악마 추적자: 마라칸트의 악마
The Devil Seeker: Devil in Marakand


 마라칸트. 파르샨 북쪽 끝 유일한 통행로인 샛별 관문을 지키는 유서 깊은 도시. 그런 마라칸트에서도 쉽게 볼 수 없는 광경이 저잣거리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도로 위를 남쪽 사막에서 온 기수가 말을 탄 채로 뒤에 마족을 쇠사슬에 묶고 질질 끌고 다니는, 그런 광경이었다.
 그 기수, 태양빛으로 세례를 받은 것만 같은 구릿빛 피부, 짙게 난 수염, 그리고 한 줌의 분노와 한 줌의 증오로 가득 찬 두 눈동자, 악명 높은 악마 추적자 ‘말릭 알 아샤라프’는 엉망이 된 고위 마족을 끌고 태수 관저로 향했다. 주변에는 마라칸트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그와 그가 잡아온 마족을 보려고 구름처럼 몰려들었는데, 남녀노소귀천을 가리지 않고 모두 놀란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마족이 관문 바깥에 설친다는 말을 듣기는 했어도 살아있는 마족을 직접 본 적은 없었으니 말이다. 그러는 동안 말릭은 어느새 태수 관저 앞 출입구에 도달했다. 하얀 아치형 입구와 그 뒤에 자리 잡은 커다란 저택은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훌륭한 요새이자 동시에 아름다운 기념비였다.
 관저 앞에는 태수와 가족, 병사, 관료, 토착 귀족들을 비롯한 여러 권세가들이 모두 마족을 보러 와 있었다. 말릭은 가볍게 안장에서 내려왔다. 그러고는 안장에 묶었던 쇠사슬을 풀고 이를 손에 든 채 마족의 뒤로 향했다. 그는 발로 마족의 등을 짓밟아 바닥에 처박고는 머리카락을 잡아당겨 머리를 들어올렸다. 마족의 얼굴은 멍과 상처로 가득했고 사람들은 저잣거리의 그들처럼 똑같이 놀라고 또 신기해했다. 예외가 있다면 육중한 갑옷차림의 병사들뿐. 태수가 마족의 얼굴을 잘 살펴보고는 말릭을 올려다보았다.

“다른 악마는 못 봤는가?”

 말릭은 고개를 저었다.

“악마는 없었다. 이런 마족놈들이 전부였어.”

 태수는 한숨을 깊게 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리가 찾는 악마는 아니구려. 하지만 우리가 특정한 악마를 지칭해서 잡아달라고 한 적은 없으니…….”

 그러더니 태수는 뒤돌아 일어서며 말했다.

“오늘은 기쁜 날이오. 남쪽에서 온 전사가 우리를 대신해 마족을 척살하고 그 수장 중 하나를 잡아왔으니. 이 전사를 위해 연회장을 열고 잔치를 벌이세. 온 마라칸트의 백성들도 승리의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

 밤이 되었다. 말릭을 위한 잔치는 어느새 귀족들의 잔치로 변해있었다. 많은 귀족들이 홀로 마족을 잡아온 ‘영웅’에게 다가와 인사를 건네며 말을 걸었으나, 이윽고 이 사막 유목민의 생기라고는 없을뿐더러 마법오염의 흔적이 남은 두 눈동자를 보고는 돌아가 버렸고, 때문에 본래의 주인공은 잊히고 말았다. 하지만 말릭에겐 오히려 지금이 더 나았다.
 그는 홀로 난로 앞에 앉아 타오르는 불을 바라보고 있었다. 뜨겁게 타오르는 불을 당최 남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무표정으로, 하인들이 술과 음식을 담은 바구니를 한 아름 안고 와서 말릭 옆에 두고 가는 것도 모를 정도로 말이다. 말릭 그 자신의 버릇이었으나 이를 알 리가 없는 사람들은 그에 대해 부정적으로 주절거렸다.
 그때 그에게 젊은 하녀 하나가 다가왔다. 하녀는 말릭을 여기저기 살펴보더니 뒤를 돌아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시종들을 대동한 지체 높은 집안의 여성 하나가 악명 높은 악마 살해자에게 다가왔다. 말릭은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악마와 마족을 잡아다 죽이는 일 외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는 추적자조차도 고개를 두어 번 정도는 힐끗 돌아볼 수밖에 없는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또렷한 이목구비와 어쩌다 한 번 보았던 버찌와 비슷한 색깔의 붉은 뺨, 그리고 그 모든 아름다움을 가리는 깊은 어둠이 인상적이었다. 여인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

“당신이 그 유명한 악마 추적자이신가요?”

 말릭은 다시 난로로 시선을 향했다.

“나는 파르샨 말을 모른다.”

 유창한 파르샨 말이었다. 그러자 여인이 다시 되물었다.

“제 아버님하고는 잘만 얘기하셨잖아요.”

 말릭은 대답하지 않았다. 여인은 한숨을 쉬더니 옆에 있던 말릭과 같은 민족의 소녀를 돌아보았다. 소녀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맑은 목소리로 여인이 했던 말을 반복했다.

“아가씨께서 말씀하시길, 선생께서 그 유명한 악마 추적자이시냐고 여쭈십니다.”

 말릭은 오랫동안 쓰지도 듣지도 않은 고향의 말을 하는 유목민 소녀를 돌아보았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치자 소녀는 움찔하며 자기가 모시는 아가씨의 등 뒤로 숨었다. 말릭은 다시 고개를 홱 돌리며 차갑게 대답했다.

“고향의 말도 잊어버렸다.”

 유창한 고향의 말이었다. 소녀가 말릭의 말을 전하자 여인은 다시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들어 말릭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선생께서 관심이 있으실만한 정보를 제가 갖고 있답니다. ‘이블리스’에 관한 거여요.”

 이블리스. 그 단어가 나오자마자 말릭은 고개를 돌렸다. 눈동자에는 지금까지의 공허함은 사라지고, 타오르는 증오와 복수심으로 번개처럼 번쩍였다. 말릭이 물었다.

“이블리스를 알고 있다?”

 여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어디로 향했는지 알고 있답니다.”

 말릭은 몸을 돌려 여인을 마주했다. 지금껏 그가 이렇게 나온 적은 없었다. 이블리스에 대한 것을 제외하면. 그러자 여인은 손을 내저어 하녀들을 물러가게 했다. 단 둘이 남게 되자 여인이 말했다.

“저는 ‘나스린 가빈’이라고 해요. 태수이신 아버님은 아실 테고, 제 오라버니는 이 도시의 장군인 ‘바흐람 가빈’이고요.”

 마라칸트 태수의 딸이라면 공주나 다름없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금껏 그렇듯 말릭은 그런 것에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그가 신경 쓰는 것은 눈앞의 여인이 알고 있다는 이블리스에 관한 것뿐이었다.

“네가 누군지는 중요하지 않아.”
“네, 알아요. 제가 생각했던 그대로 대답하시네요. 추적자 선생께서 어떤 사람인지는 저도 많이 들었답니다. 의뢰인으로서 의뢰를 맡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는 알아야 하니까요.”

 나스린에게는 분위기를 바꾸려는 시도였겠지만, 말릭은 그 어떤 긍정적인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언짢은 표정으로 변해갔다. 나스린은 헛기침을 하며 분위기를 한 번 환기시키고는 다시 말릭을 보았다.

“제겐 약혼자가 있어요. 아니, 있었다가 맞겠죠. 지금은 실종됐으니까. 루스탐 바베디. 그이의 이름이에요.”
“……바베디?”
“네. 바베디. 마라칸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던 그 가문이었죠. 지금은……. 다른 이유로 알고 있겠지만.”

 나스린의 말뜻은 말릭도 알고 있었다. 한 해 전 가문 회의를 목적으로 모인 마라칸트의 토착 귀족인 바베디 가문 사람들이 한순간에 몰살당하고 대저택은 모조리 불타 사라졌다는 ‘바베디 가문의 참극’을 말하는 것이리라.

“그럼 죽었겠군.”

 나스린은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큰 확신이 드러나 있었다.

“아뇨. 루스탐의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어요. 거기 있던 모든 시체를 제가 다 찾아봤어요. 분명 루스탐은 없었어요.”

 말릭은 나스린의 눈을 뚫어지도록 쳐다보았다. 그녀의 심연처럼 어두운 눈이 반짝였다. 말릭은 그 눈빛에서 거짓말을 간파하지 못했다. 오히려 커다란 확신과 간절함을 느낄 수 있었다.

“제 약혼자를, 루스탐 바베디를 찾아주세요. 최소한, 시체만이라도…….”

 나스린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더니 울먹이는 소리가 대신 들려왔다. 그녀가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훔치자 말릭은 다시 난로를 향해 몸을 돌렸다. 여자의 눈물은 말릭에게도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었다. 그는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생각해보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그때였다. 뒤에서 웬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말릭과 나스린 두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을 때, 그 목소리가 누구인지 둘 다 금세 알아챌 수 있었다. 낮에 태수 옆에 서 있던, 얼굴에 상처가 난 청년이었다.

“아, 오라버니.”

 오라버니라는 말에 말릭은 나스린을 한 번 흘겨보았다. 과연. 이렇게 보니 코가 약간 닮기도 했다. 나스린이 말한 ‘바흐람 가빈’이 분명했다.

“나스린. 여기 있었구나.”

 바흐람은 그 짙은 수염과 남성미 넘치는 얼굴과는 어울리지 않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여동생에게 말했다. 나스린이 눈가를 훔치자 바흐람은 한쪽 무릎을 꿇으며 앉은 여동생과 눈높이를 맞췄다.

“무언가 슬픈 일이 있었느냐?”
“아니여요, 오라버니. 그냥, 옛날 생각을 해서.”

 바흐람은 옛날 생각이라는 말에 자신도 조금 슬퍼진 모양이었다. 그는 억지로 웃으며 나스린의 어깨에 손을 툭 얹었다.

“밤이 늦었으니 이만 들어가거라. 어머님께서 항상 네 걱정을 하신단다.”
“네, 오라버니.”

 나스린이 힘겹게 몸을 일으키자 바흐람의 수행원들이 그녀를 부축하며 방으로 데려갔다. 바흐람은 그녀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계속 바라보고 나서야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바흐람은 말릭을 힐끗 쳐다보고는 방금까지 나스린이 앉아있던 자리에 앉았다.

“혹시 내 누이가 자네에게 무슨 의뢰를 했는가?”

 말릭은 바흐람을 위아래로 한 번 훑어보았다. 바흐람의 얼굴은 자신과 몇 가지 비슷한 부분이 있었다. 턱 선을 따라 짙게 난 수염과 검은색과 갈색의 경계에 선 눈동자 색, 거무스름한 피부와 얼굴에 난 상처까지. 물론 상처의 위치는 달랐다. 바흐람은 오른쪽 뺨과 콧잔등에 크게 흉터가 나 있었다. 수염은 이를 가리기 위함인 모양이었으나 짙고 짙은 수염조차 흉터를 가리지 못할 정도로 커다란 상처였음을 말릭은 짐작할 수 있었다. 말릭은 그렇게 바흐람을 찬찬히 뜯어보고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묻잖나. 내 누이가 자네에게 의뢰를 맡겼느냐고.”

 난로 앞에는 미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바흐람은 대답을 재촉하듯 손가락을 자기 허벅지에 대고 두드렸다. 말릭은 귀찮다는 듯이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

“루스탐 바베디라는 사람을 찾아달라고 했소.”

 바흐람의 표정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그는 무어라 말을 하려다 다시 입을 닫았다. 그는 한숨을 쉬며 머리를 손으로 쓸어 올렸다. 그렇게 한참 침묵이 이어졌다. 그 침묵을 먼저 깬 사람은 당연히 바흐람이었다.

“그 의뢰를 멈추시오. 누이에게 찾을 수가 없었다고, 그렇게 말해주시오.”
“어째서?”

 말릭은 건조하게 대답했다.

“누이를 위해서요. 부탁이니,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들어주겠소. 돈, 여자, 하여튼 내가 할 수 있는 건 전부 주겠소.”

 말릭은 몸을 돌려 바흐람을 향했다. 그는 무표정하게, 그러나 위압감 넘치는 그의 상처투성이 얼굴을 바흐람에게 들이밀며 작게 중얼거렸다.

“내가 그따위 것들을 바라는 것 같아?”

 그러고는 다시 똑바로 앉았다.

“안타깝지만 네 누이가 내게 약속한 보상이 훨씬 더 끌리는데. 당신의 의뢰는 받아들일 수 없어.”
“……그렇담 당신을 막을 수밖에.”

 바흐람이 몸을 일으켰다. 그는 몸을 툭툭 털고는 말릭을 노려보며 경고하듯 말했다.

“작년에 그 일이 있은 직후 내 누이는 슬픔으로 나날을 보냈소. 슬픔의 신이 나스린의 생기마저 가져가버렸지. 지금 그 아이는 유리와도 같소. 언제 깨질지 모른다고. 당신 같은 이방인이 누이를 깨트리도록 두지 않겠소. 기어이 사랑하는 나의 누이동생을 부수겠다면, 내 경고컨대, 그대가 어떤 사람이고 얼마나 강하든 간에 마라칸트 전부의 분노는 피하지 못할 것이외다.”

***

 날이 새자 말릭은 바베디 가문의 저택이 있던 곳으로 향했다. 가는 동안 그는 안장에 앉은 채 새벽녘 마라칸트의 거리를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새벽이라 그런지 한산하기 짝이 없었고 지나가는 사람도 바쁘게 돌아다니기만 하지 주변에 신경을 쓰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주변을 둘러보던 끝에 말릭은 바베디 가문의 저택 앞에 도착했다. 말 그대로 커다란 폐허가 그를 반겼다. 한때 하얗게 빛났을 벽은 새카맣게 그을렸고 수많은 대들보는 바닥에 처박혀 재와 먼지만 쌓여 있었다. 몰락하기 전 바베디 가문의 모습을 본 적이 없는 말릭으로서는 이 폐허에서 사치스러웠던 바베디 가문의 영화로움을 떠올릴 수가 없었다.
 말릭이 안장에서 내려오자, 앞에서 잡담을 하던 병사들 셋이 소리를 듣고 일어섰다. 말릭이 다가가자 그들이 다가왔다.

“거기, 정지! 여긴 출입금지 구역입니다. 돌아가십시오.”

 그러자 말릭은 얼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난 여기를 조사할 권리가 있어. 여기 태수의 딸에게 의뢰를 받았단 말이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희도 바흐람 도련님께 명령을 받았습니다.”

 바흐람. 말릭은 소리를 내며 표정을 구겼다. 자기를 막겠다는 말을 그대로 지킬 정도로 결단력 있는 사람이었을 줄은 말릭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동안 병사들이 서로 소곤거렸다.

“그런 말을 해도 되나?”
“몰라. 일단 저 이방인을 막아야지.”

 그들의 속닥거림을 충분히 들은 말릭은 고개를 좌우로 천천히 돌리며 몸을 풀었다. 그러자 병사들이 긴장한 듯이 말했다.

“죄송하지만, 나가시죠.”
“지시를 따르지 않으면 무력을 써도 좋다고 도련님께서 지시하셨습니다.”

 그들이 칼자루를 꽉 쥐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말릭은 병사들을 밀치고 안으로 들어서려 했다.

“난 여기 들어가겠어.”
“안 된다니까!”

 병사 하나가 말릭의 어깨를 향해 손을 뻗었다. 말릭은 재빠르게 반응했다. 병사의 손이 어깨에 닿는 순간 말릭은 왼쪽으로 뒤돌며 팔을 잡고는 그대로 비틀었다. 병사가 소리를 내자 말릭은 그 병사를 바닥에 메쳤다.

“이 자식이!”

 병사들이 칼을 뽑았다. 그러자 말릭도 자신의 오래된 칼을 뽑아들었다. 칼날은 바깥 공기를 마시자 부르르 떨며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예리하게 날 선 칼날 주변은 마치 더운 봄이나 여름날의 거리처럼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뭐, 뭐야 저거!”
“화염 마법이 걸린 칼이야!”

 갈색 수염을 기른 병사는 마법에 어느 정도 조예가 있는 모양이었다. 그들이 당황하여 허둥지둥하는 동안 말릭이 먼저 움직였다. 그는 병사에게 그대로 달려들어 어깨로 밀치고, 칼을 세로로 꽉 쥔 갈색 수염의 병사를 향해 칼을 휘둘렀다. 그가 칼을 놓치자 말릭은 그대로 왼손에 마력을 모아 병사의 가슴을 향해 내질렀다. 그러자 병사는 투석기에서 발사된 돌처럼 날아가 버렸다.
 말릭의 어깨에 밀쳐져 바닥에 처박힌 병사가 일어나려는 순간, 그는 어느새 자기 목덜미에 타오르는 칼날이 자리 잡은 것을 보고는 멈췄다. 그는 두려움을 감추지 못한 채 시무드 사막 출신의 유목민 남자가 보여주는 살기에 눌려버리고 말았다. 말릭은 고개를 한 번 까닥이더니 메마른 목소리로 병사를 보며 말했다.

“바흐람에게 안부 전하게.”

 그리고 그는 병사의 머리를 강하게 짓밟았다.
 방해꾼을 적당히 처리한 말릭은 칼을 집어넣었다. 그는 숨을 토해내며 어깨와 목을 풀었다. 관절에서 뚝 소리가 났다. 그는 자기도 이제 늙었다고 한탄하면서 동시에 아직 마흔도 되지 않았음을 생각했다. 몸을 다 푼 그는 폐허의 중심을 향해 걸어 들어갔다.
 새까맣게 타서 쓰러진 기둥과 벽, 재만 남은 가구, 폐허 속에서 미처 건지지 못한 가재도구들, 모든 것이 엉망이었다. 보기만 해서는 그저 커다란 불이 모든 것을 태워버렸다는 사실 외에는 알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꽤 커다란 불인 것은 확실했다. 마라칸트 같은 중요하고 또 오래된 도시라면 화재대비도 제대로 해놓았을 텐데, 이렇게 화마가 모든 것을 집어삼킬 때까지 불을 끄지 못한 것을 보면 말이다. 외진 곳에 있어서 제때 끄지 못한 것일까, 말릭은 생각했다. 어쩌면 그것이 다행이었을 수도 있다. 저택이 번화가 한가운데 있었더라면 ‘바베디 가문의 참극’이 아니라 ‘마라칸트 대화재’로 기록됐을 테니까.
 재앙의 한가운데 선 말릭은 약탈자처럼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의 눈빛 사이로 깨진 사금파리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자기 손바닥만 한 크기의 조각이었다. 그는 사금파리를 주워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처음 데어드리와 만났을 때, 그녀가 보여준 것이 있었다.

“모든 것은 눈과 귀가 있어. 설령 살아있는 게 아닌 물건이라고 해도.”

 그러더니 그녀는 말릭의 칼을 들고 눈을 감았다. 그러기를 한참, 그녀가 칼을 놓고 말한 것은 말릭이 말한 적 없는 과거, 그리고 그가 어째서 피투성이로 시체 사이에서 죽어가고 있었는지에 대해서였다.
 사반세기 가까이 지난 지금, 말릭은 그녀에게서 배운 그 능력을 쓰면서 재미를 많이도 봤었다. 지금도 이 조각이, 작년의 그 참극을 말해주지 않을까 기대하며 그는 눈을 감았다.

***

 수많은 장면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뜨거운 열기, 사방이 불길이었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두 도망치기에 바빴다. 소리가 들렸다. 사람이 아닌 무언가가 내는 끔찍한 소리. 수많은 비명의 사이를 비집고 들렸다.
 그리고 울리는 야수의 포효. 멀리서 보이는 악몽의 근원.
 그때였다. 장면이 방해를 받았다. 바베디 가문의 저택에서 일어날 리가 없는 장면이 비집고 들어왔다.

 그녀가 보였다.
 차가운 보랏빛 눈동자를 빛내며 말릭에게 안기는 그녀가.

***

 말릭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조각을 떨어트렸다. 그의 숨은 방금까지 뜀박질한 전령처럼 거칠었다. 그는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식은땀을 훑어내며 중얼거렸다.

“또 집중이 흐트러졌나 보군…….”

 말릭은 마음을 진정시키며 환상에서 본 것들을 정리했다. 커다란 화재, 도망치는 사람들의 비명, 야수 같은 포효, 그리고 흐릿하게 비친 그 원흉의 윤곽. 이 사건이 평범한 화재 사고가 아니었음은 분명했다. 하지만 이 짧고 또 잡념 때문에 흐트러진 환시로는 루스탐에 관한 정보를 얻을 수 없었다. 그는 가방에서 루스탐의 초상화를 꺼내 펼쳐보았다. 짧고 단정한 머리, 넓은 이마, 큰 눈, 두툼한 입술. 환상에서 이런 얼굴을 한 사람은 없었다.
 말릭은 안장 위에 오르며 다음에 갈 곳을 생각했다. 그러면서 그는 무의식적으로 박차를 가했고 말은 생각에 잠긴 말릭을 데리고 정처 없이 걷기 시작했다. 그가 떠나고 나자 기절한 병사들이 소리를 내며 정신을 차렸다.

***

 어느새 석양이 지고 있었지만 말릭은 여전히 감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잠깐 머리라도 식힐 겸 해서 눈앞에 있는 술집으로 향했다. 마라칸트 시내의 향락가가 아닌, 여관을 겸하는 허름한 곳이었다. 안에 들어선 말릭은 주변을 한번 훑어보고는 주인을 향해 다가갔다. 머리가 벗겨진 주인장은 험악한 얼굴의 시무드인 남성을 보고는 긴장한 듯 침을 삼켰다.

“무엇으로 드릴까요?”

 말릭은 대답 없이 의자에 앉았다. 그러고는 금화를 꺼내 탁자에 올렸다.

“추천해주시오.”

 그러자 노인은 금화에 새겨진 황제의 얼굴을 손으로 문지르며 생각하더니, 손을 탁 치고는 창고로 향했다. 이윽고 노인이 나왔을 때 그의 손에는 포도주가 들려 있었다.

“데일스산 포도주입니다. 구하기 어려운 물건이라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안 꺼내놓고 있었습니다만, 그 금화에 맞는 가격은 될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노인은 포도주에 어울리지 않는 나무잔에다가 술을 따라주었다. 말릭은 붉은 포도주를 한참 내려다보았다. 왜 하필 데일스일까, 그는 포도주에 비친 자기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얼굴은 어느새 데어드리의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그는 헛기침을 한 번 하더니 술에 떠오른 얼굴을 없애버리려는 듯 단숨에 술을 들이켰다. 목을 타고 흐르는 취기를 느끼던 그는 잔을 탁자에 두며 노인을 보았다.

“물어볼 게 있소.”
“예, 손님.”
“루스탐 바베디.”
 
 순간 정적이 흘렀다. 술집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동시에 말릭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다들 자기 귀를 의심하고 있었다.

“죄송, 합니다만, 누구…….”
“루스탐. 바베디.”

 말릭은 이름을 딱딱 끊어 말하며 위협적으로 말했다.

“작년의 그 참극에서 유일하게 시체가 없었다는 그 사람에 관해서 물었다.”

 기나긴 침묵이 이어졌다. 모두가 이방인의 말을 의심하며 술잔을 손에서 놓았다. 그런 분위기에도 말릭은 아랑곳하지 않고 노인을 노려보았다. 노인은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처음 듣는 사람입니다만…….”

 누가 봐도 명백한 거짓말이었다.

“거짓말 말게.”

 그러자 노인은 눈을 감고 침을 삼켰다. 그리고 눈을 뜨며 말릭에게 사정하듯이 말했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분명 모르는 사람입니다. 작년까지만 해도 바베디 가문은 융성했고 유명했던 건 사실입니다만, 루스탐이라는 사람은 모릅니다. 전혀요! 게다가 루스탐이라는 이름은 여기서 흔합니다. 제 손자 이름도 루스탐인걸요. 귀족들은 애초에 이런 술집엔 오지도 않을뿐더러 우리 같은 사람들도 귀족들 얘기는 흥미로운 소식 외에는 관심도 가지지 않습니다. 저한테 더 캐물으셔도 제가 할 수 있는 말은 여기까지입니다. 그러니 부탁건대, 그만 물으십시오.”

 노인의 일장연설이 끝나자 말릭은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적대적인 눈빛을 느꼈다. 말릭은 주변을 힐끗 돌아보고는 다시 노인에게 물었다.

“바흐람 가빈이 말하지 말라고 하던가?”

 노인은 한참을 망설이더니, 결국 입을 열었다.

“예.”

 노인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마라칸트 사람들은 그분을 존경합니다. 우리를 지켜주실 뿐만 아니라 정의롭고 선하신, 완벽한 분이니까요. 바흐람 도련님께서 말하지 말라고 명령했다면, 우리들은 오르마즈드 앞에서도 말하지 않을 겁니다. 분명 사정이 있으시겠지요.”

 그리고 노인은 눈을 떴다.

“그리고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어차피 루스탐 바베디라는 사람에 대해서는 모르니, 도움을 못 드렸을 겁니다.”

 말이 끝나자마자 노인은 도망치듯 다른 손님에게로 가버렸다. 홀로 남겨진 말릭은 한숨을 쉬며 그녀를 떠오르게 하는 데일스산 포도주를 홀로 들이켰다. 그때 누군가가 그의 옆에 앉았다. 말릭은 고개를 돌렸다. 젊은 사람이지만 피곤과 괴로움으로 얼굴에 주름과 어둠이 가득한 남자였다. 그는 말없이 말릭의 포도주를 빼앗아 자신의 잔에 따랐다. 말릭이 빼앗긴 자기 술을 낚아채려고 하자 남자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난 알아.”
“뭐를.”
“루스탐 바베디.”

 그러더니 그가 망토를 홱 열며 허리춤을 가리켰다. 기병용 곡도 한 자루가 허리에 매달려 한때 자기 주인이 군인이었음을 알려주었다. 그는 이미 술에 잔뜩 취했음에도 여전히 술에 매달리고 있었다. 그는 자기 잔을 들이켜더니 입에서 역겨운 술 냄새를 뿜으며 말했다.

“이봐, 사막 친구. 난 술이 필요해. 나한테 술값을 줘. 금화 다섯 닢이면 충분할 것 같아. 당신은 아무렇지도 않게 술값으로 금화를 내놓았으니 금화도 수북하겠지. 난 돈이 없어. 은퇴하면서 받은 돈은 모두 술값으로 썼지. 이젠 빚밖에 없어. 저 할아범이 그나마 날 불쌍하게 여겨줘서 여기 앉아있을 수 있는 거지. 술값만 금화 세 닢은 되는 것 같아. 이 칼도 팔아버릴까 했는데 받아주는 데가 없더라고. 그래, 세 닢을 추가로 받아야겠어. 여덟 닢을 주면 네가 그렇게 원하는 루스탐 바베디에 대한 말을 해주지.”

 말릭은 이런 술주정뱅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절대다수가 헛소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말에 앞뒤가 안 맞고 두서도 없는 게 보통이었다. 하지만 모두 바흐람에게 충성하며 함구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정보를 주겠다며 다가온 이는 분명 흔치 않았다. 말릭은 금화 스무 닢을 꺼냈다. 그러자 남자의 풀린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가 손을 뻗자 말릭은 남자를 놀리듯 자기 손을 빼며 말했다.

“먼저 말해.”

 그러자 남자는 약간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

“먼저 열 닢부터 내놔.”

 말릭은 순순히 따랐다. 그러자 남자는 실성한 듯이 웃으며 금화를 세었다. 그는 한참을 금화에 새겨진 황제의 얼굴과 이름을 이리저리 돌려본 끝에야 말을 시작했다.

“그래……. 루스탐 바베디. 그놈은 참 대단한 놈이었지. 곱상하게 생겨서는 태수 딸년을 후리고 말이야. 그런 놈이 싸움도 잘하고, 가문도 잘나고. 나처럼 엿 같은 집구석에서 태어나 살려고 이따위 일에 뛰어든 놈들하고는 차원이 달랐지. 히히히……. 놈은 바흐람이 이끄는 기병대 소속이었어. 거, 뭐라고 하더라, 사바란? 아스와란? 그런 거 있잖아. 카타프락토인가 뭔가 하는 그거. 게다가 놈은 바흐람의 부관이었단 말이지. 분명 서로 같이 자는 사이였을 거야. 안 그럼 그렇게 사이가 좋을 리가 없지. 푸흐흐……. 관문 너머 유목민들이 관문을 넘으려고 난리를 치면 바흐람과 친구들이 나가서 놈들의 대가리를 창대나 안장에 매달고 돌아오는 게 일상이었단 말이야. 그거 알아? 나도 그들 중 하나였어. 어때, 그런 거 같아? 크흐흐……. 반응이 없는 걸 보니 역시 못 믿나 보네. 잠깐 술 좀 마시고. 아, 따라주는 건가? 고마워. 역시 사막 친구들은 생긴 것과는 다르게 의외로 자상하단 말이야. 여자들도 끝내주고. 그런 여자들이 바글바글한 사막이 고향이라니 부러워. 하여튼 자상한 네 녀석을 위해서 잡소리는 이쯤 해둘게. 내가 겪은 일이야. 아, 루스탐. 루스탐을 찾는 걸 보면 바베디 저택에서 있었던 일은 이미 알겠지? 그 일이 벌어지기 보름쯤 전의 일이었어. 우린 마족이 날뛴다는 소식을 듣고 평소대로 관문 너머로 갔단 말이야. 마족들이 많이도 있었지. 많이. 우리는 창을 들고 마족들을 신나게 꿰뚫고 다녔어. 재밌었지. 그런데 문제가 생겼어. 그냥 마족만 있는 게 아니더라고.”

 그가 말을 끊었다. 그는 그때의 끔찍한 기억을 억누르려는 듯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공포마저 억누를 수는 없는지 손을 벌벌 떨고 있었다. 가만히 지켜보다 못 한 말릭이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지?”

 남자는 겨우 눈을 뜨더니 떨리는 자기 손을 다른 손으로 붙잡았다. 그는 두려움에 질린 얼굴로 말릭을 보며 대답했다.

“악마가, 아니 악마보다 강한 놈이 있었어. 해를 가릴 정도로 크고 검으면서도 불타오르는 깃털의 날개 말이야. 알고 보니 그건…….”
“……타천사.”

 말릭이 대신 말했다. 타천사. 지금까지 그가 죽지 않고 살아있는 원동력이자, 그의 원수. 남자는 그놈을 만났다는 것이었다.

“맞아. 타천사. 아흐리만이라고 부르는 그놈 말이야! 네 고향에선 뭐라고 하더라? 이, 이, 뭐였지…….”
“이블리스.”
“그래. 이블리스! 여하튼. 아흐리만 그놈은 우리를 손으로 종잇장처럼 찢어버렸어. 바흐람도 얼굴이 걸레짝이 되어서는 쓰러지니까 난 도망쳤어. 홀로 꽁지 빠지게 도망갔다고. 하하……. 정말 죽는 줄 알았어. 그날 이후로 난 기병대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나왔어. 그런데 자꾸 아흐리만 그놈의 얼굴이 떠올라. 그 두렵고 무시무시한 얼굴이. 그걸 잊으려고 술을 마시고 또 마셔도 잊을 수가 없어. 내가 이 꼴이 된 것도 다 그놈 때문이야.”

 남자는 포도주를 병째로 들이켰다. 그러다가 술이 다 떨어지자 아쉬운 표정으로 병을 바닥에 던졌다. 말릭이 물었다.

“루스탐은?”
“누구? 아, 루스탐. 걔는 일주일 뒤에 피투성이가 되어서는 관문으로 왔어. 그리고 또 일주일 뒤에 바베디 저택에 불이 났지.”
“그 일이 정확히 어디서 벌어졌는지 기억하나? 이블리스 그놈과 싸웠던 곳 말이야.”
“기억하기 싫어서 잊어버렸어. 관문에서 꽤 떨어졌던 거 같아. 바흐람이라면 알지도 모르지.”

 말릭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나머지 금화 열 닢을 바닥에 뿌리듯 던지고는 바깥으로 향했다. 그러자 뒤에서 주정뱅이가 외쳤다.

“뭘 하는지 모르지만 건드리지 않는 게 좋을걸! 아흐리만은 자기에게 덤비는 사람들에게 파멸을 주는 놈이야!”

 말릭은 바깥으로 나왔다. 주정뱅이의 말은 대꾸할 가치도 없었다. 코앞에서 줄행랑친 주정뱅이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오랫동안 타천사와 맞섰으니까. 말릭은 이제 어디로 가야 할지 감히 잡혔다. 관문 바깥으로 나가야 했다.
 그런데 갑자기 수많은 병사들이 말릭을 둘러쌌다. 완전무장한 병사들이 창끝을 그에게 들이밀며 노려보았다. 그가 때려눕힌 병사들의 소식을 들은 모양이었다. 말릭은 반사적으로 손을 칼자루에 가져다 댔다. 말릭과 병사들, 그리고 그들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보는 사람들의 대치가 이어졌다. 병사들 뒤에 서 있던 군인이 말했다.

“순순히 칼에서 손을 떼라. 우리 병사에게 폭력을 가하고 시민들을 겁박한 죄로 체포하겠다.”
“이따위 짓거리를 할 시간은 없어. 난 관문 바깥으로 나가야 해. 나스린 가빈의 의뢰를 받았단 말이다.”
“나스린 아가씨의 의뢰가 네놈이 가한 폭력을 정당화하진 못한다. 순순히 체포에 응해라!”
 
 말릭은 한숨을 쉬었다. 그의 무력과 마법이라면 이들을 모조리 쓰러트릴 수 있었고 또 필요하다면 그렇게 할 의향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칼자루에서 손을 떼었다. 여기서 괜한 칼부림을 했다가는 의뢰는커녕 사람들의 손가락질만 받으며 마라칸트에서 쫓겨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가 싸울 의사가 없음을 보이자 병사들이 그에게 다가와 붙잡았다. 하지만 그를 포박하지는 않았다. 말릭의 팔을 붙든 병사가 작게 말했다.

“귀빈 자격으로 여기 온 걸 다행으로 여겨라, 빌어먹을 이방인 놈아.”

***

 며칠간 말릭은 감옥에 갇혀 있었다. 병사들은 그에게 물이나 음식을 넣어줄 때 빼고는 그와 마주치려고 하지 않았다. 말릭은 하릴없이 감방 바닥에 앉아 명상하거나 몸을 풀며 시간을 보냈다.
 사흘 정도 지났을 때였다. 감옥 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말릭이 뒤돌아보니 그 자리에는 화려한 비단옷 안에 갑옷을 받쳐 입은 사람이 허리춤에 투구를 낀 채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바흐람이었다.

“소식은 들었소. 우리 병사들을 때려눕힌 것도 모자라 선량한 시민들을 겁박했다지. 게다가 잔인한 마귀들이 호시탐탐 노리는 관문을 열고 바깥에 나가겠다고?”

 바흐람의 비난은 거셌다.

“당신이 고위 마족을 산 채로 잡아올 정도의 실력자에 내 누이의 의뢰까지 받은 귀빈이 아니었다면, 그대는 이미 추방이나 사형 둘 중 하나였을 거요. 당신의 강력함이 당신을 살리는군.”
 그러면서 그는 말릭에게 일어나라 손짓했다.

“따라오시오.”

 말릭은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섰다. 바흐람은 말릭을 데리고 미로 같은 지하 감옥을 이리저리 빠져나왔다. 감옥 밖으로 나서자 강렬한 빛에 둘은 반사적으로 눈을 가렸다. 말릭이 손을 치우자 머리부터 발끝까지 단단한 철갑옷으로 차려입고, 말에도 마갑을 씌운 한 무리의 기병들이 바흐람을 보며 예를 갖추었다. 그 주정뱅이가 말한 기병대였다.

“그대를 설득해서 내보내는 데에 실패했으니, 이젠 내가 직접 곁에 붙어서 감시하는 수밖에.”

 바흐람은 투구를 쓰며 말 위에 올랐다.

“바깥으로 보내주겠소. 다만 마족을 상대하는 게 먼저요.”

 하인들이 말릭의 장비와 말을 들고 그에게 다가왔다. 말릭은 자기 장비를 살펴보았다. 강철로 된 투구와 보호대, 미늘 갑옷, 허리띠, 화염 마법 걸린 검, 활과 화살집, 그리고 마법과 주술을 부리는데 필요한 재료. 모든 것을 일일이 확인하고 나서야 그는 장비를 걸쳤다. 준비가 끝나고 나서야 말릭은 바흐람을 따라 말 위에 올랐다. 바흐람은 기병대를 이끌고 관문으로 향했다.
 관문에 도달한 바흐람은 관문의 병사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병사들은 잔뜩 긴장한 표정을 지으며 서로 바라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을 열었다. 다리 역할을 겸하는 거대한 문이 천천히 내려가더니 그대로 관문 앞의 해자를 덮었다. 동시에 성벽 위에 궁수들이 주변을 경계했고, 문 바로 뒤에서 보병대가 대기하다 바깥으로 나가 해자 바로 뒤에 자리 잡았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관측병이 바흐람을 향해 소리쳤다.

“진군하셔도 좋습니다!”

 그러자 기병들은 방패와 창을 손에 꽉 쥔 채, 기둥 형태로 대열을 이루고 관문 밖으로 행군했다. 기병대가 나서자 관문의 병사들은 재빨리 안으로 돌아갔고, 다시는 다시 굉음을 내며 성문으로 변했다. 기병들은 그 모습을 보며 긴장한 듯 침을 삼키며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바흐람 역시 긴장한 얼굴이었으나 깊게 심호흡하며 마음을 추슬렀다. 그는 기병 몇을 지목해 정찰을 보냈다. 그들이 앞으로 내달리며 눈앞에서 사라진 후에야 바흐람은 말릭에게 말을 걸었다.

“자, 그럼. 왜 관문 바깥으로 나오려고 했는지 말해보실까.”

 말릭은 바흐람을 돌아보았다.

“자네 부하로 보이던 주정뱅이 하나가 루스탐에 대해서 말해주더군.”

 그는 자기가 주정뱅이에게 들은 것을 간단히 설명했다. 말을 듣던 바흐람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래서 그 전투가 있던 곳으로 가보고 싶다, 이건가?”
“이해가 빠른 편이군.”

 말릭은 버릇처럼 목을 옆으로 뚝뚝 소리를 내며 꺾었다.

“그가 흘린 물건이 있을지도 모르지.”

 바흐람은 무어라 대답하려다 말고 그대로 고개를 돌렸다. 말릭은 그의 행동이 의심스러웠으나 더 캐묻지는 않았다. 그때 정찰을 나갔던 병사가 돌아왔다.

“전방에 야만인과 마족이 소수 있습니다. 무장도 거의 안 했으니 큰 위협은 아닙니다.”
“좋다. 전체 전투 대형으로. 매복을 주의하고 항상 주변을 경계하라.”

 기병들은 재빠르게 대형을 바꾸었다. 얼마 뒤에 기병대는 마족과 마주쳤고 바흐람은 재빨리 말을 몰며 돌격을 명령했다. 그러자 일부 기병들은 활을 들고 사격을 가하고, 나머지는 전우가 쏜 화살을 방패 삼아 앞으로 돌진했다. 기병들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마족들에게로 나아가 그들을 살육했다. 승리라고 하기에도 부끄러운 일이었다.

“좋아. 피해는 없고, 적은 전멸.”
“이게 끝은 아니겠지?”

 말릭의 말에 바흐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족들은 수가 많으니까. 보통은 해가 떨어질 때까지 이렇게 마족들을 잡다가 돌아가지. 하지만 오늘은 자네 일도 있으니 바로 그 장소로 가겠네.”

 바흐람이 손짓하자 기병대는 다시 행군 대형으로 정렬했다. 다시 일부가 정찰병이 되어 앞으로 먼저 사라졌다. 그러는 동안 바흐람은 말릭과 함께 점점 더 깊은 숲으로 향했다. 그러자 기병들 일부가 불안한 듯 헛기침을 하거나 몸을 떨었다. 정찰병들이 교대로 다니며 마족이나 북방 유목민들에 대해서 보고했으나 그쪽으로 향하려는 의지는 없어 보였다.

“거의 다 왔소. 이 숲만 지나면 바로 그 현장일세.”

 숲속에 들어선 지 한참, 바흐람은 잔뜩 긴장한 눈초리로 사방을 경계했다. 작년에 바흐람과 같이 이곳에 들어섰던 기병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조용히 나아가던 중에 그들은 숲과 숲 사이의 공터에 도달했다.

“바로 여기일세.”

 바흐람의 말에 말릭은 말에서 내려와 주변을 살펴보았다. 확실히 전투의 흔적이 군데군데 남아있었다. 바닥에 박혀 삭아버린 방패나 창대, 녹슨 무기나 투구, 뼈다귀 등이 보였다. 말릭은 주변을 걸으며 말했다.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지?”
“그건…….”

 말릭의 말에 바흐람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숲을 가로지르는 바람 소리가 마치 죽은 부하들이 유령이 되어 자신을 원망하는 소리 같았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기도문을 읊었다. 말릭은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시간만 충분하다면 폐허에서처럼 과거를 살펴보았을 텐데, 그럴 만큼 안전한 곳이 아니었다. 바흐람은 그 사실을 다시 상기시켰다.

“다 됐으면 빨리 나가세. 여긴 위험한 곳이오. 마족이나 야만인들의 함정도 많아.”

 그때였다. 정찰병 하나가 급하게 말을 몰아 바흐람에게 돌아왔다. 그는 피가 흐르는 상처를 틀어막으며 놀란 전우들을 향해 소리쳤다.

“악마! 악마가 나타났습니다! 저희가 쫓던 그놈입니다!”
“뭐라고?”
“악마가 튀어나와서 호르마즈드를 죽였습니다. 여기서 나가야 합니다. 빨리…….”
“뒤, 뒤에!”

 기병 하나가 외치자 정찰병이 공포에 질린 눈빛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날개 달린 무언가가 팍 튀어 오르더니, 목을 감싸고 있던 갑옷이 무색하게도 정찰병의 목을 간단하게 베어버렸다. 조금 전까지 말을 하던 전우의 목이 땅바닥에 굴러다니자 기병들도 그들이 탄 말도 모두 놀랐다. 바흐람도 놀라긴 마찬가지였으나 당황할 시간이 없었다. 그는 칼을 뽑으며 외쳤다.

“전투 준비!”

 말릭 역시 활을 꺼내 들고 악마를 향해 겨누었다. 회색 피부의 악마는 등에 커다란 한 쌍의 날개를 펄럭이고 있었고, 머리에는 산양 같은 뿔이 크게 자라있었다. 흔한 악마의 모습이었다. 말릭은 재빠르게 화살에 마력을 담아 쏘았다. 다른 기병들도 마찬가지로 활을 들고 마구 쏘아댔다. 하지만 악마는 가볍게 날아오르며 피했다. 한바탕 기병들의 공격이 끝나자 악마가 외쳤다.

“내 차례로군!”

 그러자 악마는 마치 먹이를 향해 활강하는 매처럼 기병들에게 몸을 날렸다. 무기도 없이 손톱만 휘두르는데도 갑옷과 말이 종잇장처럼 찢겨나갔다. 기병들은 최대한 저항해봤으나 악마에겐 역부족이었다.

“악마는 당신 전문이잖나! 어떻게 좀 해봐!”

 말릭은 바흐람의 외침을 듣지 못한 듯 계속 활쏘기만 집중했다. 바흐람은 그 화살이 무슨 소용인가 생각하며 기병들을 재집결시키려 노력했다. 그는 그러나 말릭이 쏜 빗나간 화살이 나무를 두 동강 내며 쓰러트리는 것을 보고는 생각을 바꾸었다. 악마 역시 말릭이 쏘는 화살이 제일 두려운지 감히 그에게 덤비지 못하고 이리저리 날아다니며 피했다. 바흐람은 그 모습을 보더니 머리를 굴렸다.

“빌어먹을 악마 놈아! 여기다! 내가 지휘관이다!”

 그러면서 바흐람은 숲속으로 튀어가며 악마를 유인했다. 그 모습에 말릭은 활을 내리며 투덜거렸다.

“대체 무슨 짓거리를 하는 거야!”

 악마는 바흐람을 향해 달려들었다. 바흐람의 예상대로였다. 그러나 악마의 비상식적인 완력과 민첩함은 예상 밖이었다. 악마는 순식간의 바흐람에게 다가와 그의 말을 탁자 뒤집듯 날려버렸고, 바흐람 역시 같이 날아가 버렸다.
 악마는 바흐람에게 다가갔다. 기병들이 활을 쏘고 창칼을 휘두르며 악마를 막으려 했으나 악마는 개의치 않고 간단히 물리쳤다. 바흐람은 정신을 못 차리고 바닥을 기어갔다.

“네 추적자 동료는 멀리 떨어져 있군.”

 친숙한 목소리에 바흐람은 악마를 올려다보았다. 그 모습을 보고 바흐람은 놀라 뒷걸음질 쳤다. 악마는 바흐람에게 손을 뻗었다. 바흐람은 그대로 허공에 끌어올려 졌다. 손이 닿지 않았음에도 바흐람은 목이 졸리는 것을 느꼈다. 그는 숨을 쉬려고 버둥거리면서도 악마의 얼굴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그의 눈동자는 놀라서 커다랬다.

“너는, 너는…….”
“흠. 자넨 여전히 변하지 않았군. 보시다시피 난 많이 변했거든.”
 악마는 바흐람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어느새 두 사람의 거리는 서로의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워졌다.

“오랜 친구여. 이 꼴로는 다시 돌아가지 못하겠지. 일 년 내내 그렇게 생각했네. 하지만 지금은 생각을 고쳐먹었지. 내 언제 한 번 자네 누이에게 안부 전하러 가겠네. 그런데 그 전에, 먼저 자네를…….”

 그 순간 옆에서 파랗게 빛나는 화살이 허공을 가르며 날아들었다. 악마가 미처 팔을 빼기도 전에 화살은 그대로 악마의 팔을 깔끔하게 잘라냈고, 동시에 바흐람은 바닥에 널브러졌다.
 악마는 소리를 내며 팔꿈치 아래가 달아간 팔을 붙잡고 말릭을 노려보았다. 말릭은 틈을 주지 않고 다시 활을 쏘았으나 악마는 재빨리 몸을 비틀어 피하고는 하늘로 날아갔다. 말릭은 하늘을 향해 활을 겨누었으나 이미 멀리 날아간 악마를 쏘아 떨어트리기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는지 그대로 활을 내렸다.

“가버렸군.”

 그는 활을 거두고는 바닥에 떨어진 악마의 왼팔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팔은 어느새 잿더미가 되어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말릭이 고개를 저으며 고개를 돌리려는 찰나, 사라지는 잿더미 사이로 빛바랜 비취색의 무언가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팔찌였다. 말릭은 그것을 이리저리 살펴보고는 주머니에 넣었다.
 살아남은 기병들이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그들은 바닥에 쓰러진 바흐람을 부축하며 일으켜 세웠다.

“괜찮으십니까, 도련님?”

 바흐람은 대답하지 않았다. 악마는 한참 전에 사라졌지만, 그는 여전히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듯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기병들이 그를 흔들어댔지만 여전했다. 말릭은 그런 바흐람을 노려보고 있었다.

***

 거의 혼이 빠져나갔던 바흐람은 태수 관저에 돌아와서도 여전했다. 말릭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난로 앞에 멍하니 앉은 바흐람을 내려다보았다.

“이봐.”

 말릭이 말했다.

“마족의 물결을 막는 도시의 지휘관이면서, 고작 악마 하나를 보고 그렇게 넋이 나가서야 쓰겠나?”

 바흐람은 말릭이 그랬듯 고개를 슥 돌려 그를 한 번 쳐다보고는 다시 난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런 게 아니오.”

 바흐람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변명하듯 말했다.

“그냥 악마는 전에도 많이 봤소.”
“그럼 이번에는?”

 말릭은 그렇게 말하면서 주머니에 넣었던 악마의 팔찌를 손에 쥐고 만지작거렸다. 악마의 팔에 붙어있던 물건이지만 이상하게도 사악한 마력이나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약해빠진 마족이나 악마가 자기 힘을 강화하려고 달고 다니는 부적과는 다른, 평범한 물건이었다. 그래서 더 이상했다.
 바흐람은 말릭의 물음에 한참을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말릭은 팔찌를 꽉 쥐며 다시 말을 걸었다.

“그 악마, 네게 오랜 친구라고 하더군.”

 그 말에 바흐람은 놀란 얼굴이 되어 말릭을 바라보았다. 말릭은 만지작거리던 팔찌를 바흐람의 앞에 내던졌다. 비취색 돌을 정성스럽게 실에다 꿴 팔찌가 대리석 바닥에 떨어졌다. 바흐람은 그 팔찌를 보더니 다시 말릭을 바라보았다.

“언제 그 말을 들은 거지?”
“그건 중요하지 않아.”

 말릭은 바흐람에게 다가갔다.

“원한다면 당장 저 팔찌에 대고 마법을 쓰거나 네 머리통 안의 기억을 강제로 뽑아낼 수도 있어. 하지만 난 지금 그런 충동을 참고 또 참고 있지. 네놈은 태수의 아들이니까. 하지만 내 인내심은 그다지 강하지 않아. 그러니 빨리 말하는 게 좋을 거야.”

 바흐람은 말없이 팔찌를 문질렀다.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 그의 눈동자는 지진이 일어난 듯 마구 떨리고 있을 터였다. 말릭은 강제로 기억을 뽑아내겠다며 협박을 하긴 했지만, 지금은 가만히 기다리는 게 더 좋다고 판단했다. 바흐람은 한참 그 팔찌를 만지작거리다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작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걸 듣고 싶은 거겠지?”
“그래.”
“좋아. 원하는 대로 다 말해주지.”

 바흐람은 팔찌를 내려놓았다. 그는 슬픔으로 무너져 내린 얼굴로 비탄에 찬 한숨을 내쉬었다.

“우린 어렸을 때부터 같이 자란 친구였소. 나는 태수의 아들이었고 그는 이쪽 지방의 유서 깊은 귀족이었지. 내가 마라칸트의 기병대장이 되었을 때 그는 내 부관이 되었소. 오랫동안, 우린 서로의 등을 맞대고 전우로서 야만인과 악마들을 상대했소.”
“그건 알고 있어.”

 말릭은 건조하게 대답했다.

“그래. 옛이야기는 별로 재미없지. 그대가 원하는 건 작년의 그 사건이겠지. 아닌가?”
“알면 빨리 말해.”
“그래……. 작년은 참 어려운 시기였다오. 지금도 그렇긴 하지만, 마족들이 참 많이도 나오던 시절이었지. 그런데 관문의 병사들 사이에 소문이 하나 돌았네. 엄청난 크기의 불타는 날개를 가진 거대한 악마에 관한 소문. 우린, 그러니까 기병대는 다들 허풍이라고 믿었다만, 관문 병사들의 묘사는 너무나도 자세했지. 그래서 관문 밖으로 나갔소. 그 악마가 누구인지, 얼마나 위험한지 알아보려고. 마족이 꽤 많더군. 짐승 수준의 놈들부터 저 북쪽 황무지에나 산다는 검은 요정도 있었어. 우린 검은 요정 하나를 포로로 잡았는데, 그 여자가 말하기를 그 악마는…….”
“단순한 악마가 아니라 타천사였겠지.”

 말릭이 끼어들자 바흐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냥 악마가 아니었네. 하늘 대신의 맏이, 처음이자 마지막 타천사, 아흐리만이었네.”
 아흐리만, 이블리스, 데어드리는 그를 ‘루시퍼’라고 불렀다. 말릭은 다시 떠오르는 그녀에 대한 기억을 치우고는 바흐람의 말에 집중했다.

“아직도 그놈의 모습이 생생하게 기억나네. 까마귀처럼 새까만 깃털은 불타고 있었지. 펼치면 온 하늘을 덮은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커다랬어. 그런 놈을 상대로 도망치지 않고 싸우다니. 정말 바보짓이었지.”

 바흐람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흐리만 그놈은 우리를 가볍게 농락했소. 나 역시 놈이 휘두른 손에 투구가 박살 나고, 이렇게 얼굴에 상처도 났소. 내 옆구리도 놈에게 찢어발겨 졌지. 난 그놈 발아래에서 죽음의 두려움에 압도당해 아무것도 못 했소. 다들 그랬지. 오직 루스탐만이 용기를 내어 마지막까지 그를 막아섰네. 그리고 내게 이렇게 외치더군. ‘도망가!’ 그 말대로 난 겁쟁이처럼 도망쳤소. 그러다가 어쩌다 뒤를 돌아보았는데, 아흐리만이 루스탐의 머리를 잡고 들어 올리고 있었지. 그의 팔이 번쩍이더니 루스탐의 끔찍한 비명이 온 숲을 쩌렁쩌렁하게 뒤덮었소. 모두가 그 비명을 듣고 악몽 꾼 어린아이가 어머니에게 달려가듯이 관문으로 도망쳤소. 나도 그랬지.”
“그 타천사가 루스탐의 머리를 붙잡고는 팔을 번쩍이더니, 루스탐이 비명을 질렀다?”

 바흐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비명은 관문에서도 들을 수 있을 정도였소…….”

 바흐람은 귀를 틀어막으며 몸서리를 쳤다. 그 비명이 여전히 들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비명 사이로 오랜 친구의 고통에 찬 애원이 들려왔다. 자기를 버리지 말라는 그 애원이.

“그래서? 듣기로는 일주일 뒤에 다시 관문에 나타났다는데.”

 말릭의 물음에 바흐람은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그는 소름 돋는 환상에서 깨어난 것에 안도하면서 동시에 아직도 그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사실에 한숨을 쉬었다.

“맞네. 엉망이었지. 갑옷은 다 뜯겨나가고 살갗도 엉망이고. 제대로 걷지도 못했소. 열병을 앓는 사람처럼 온몸이 펄펄 끓었고. 그리고 일주일 뒤에, 그 참극이 벌어졌소.”

 말릭은 바흐람이 말한 것들을 깊게 생각했다. 피투성이가 되어 돌아온 사람, 펄펄 끓는 몸, 타천사에게 당한 끔찍한 일들. 너무나도, 너무나도 비슷했다. 그녀와 너무나도 비슷했다. 말릭은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데어드리…….”
“데어드리?”

 바흐람의 물음에 말릭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내가 뭐라고 했지?”
“데어드리라고 했는데.”
“아무것도 아니다. 신경 쓰지 마.”

 말릭은 손을 내젓고는 다시 팔짱을 꼈다.

“내가 아는 사례랑 참으로 비슷하군. 그 사람은 결국 타천사에게 당했던 사람이 악마로 변해버렸지.”
“……역시.”

 바흐람은 고개를 숙이며 중얼거렸다.

“역시 내 예상이 맞았어.”

 바흐람은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 참극이 벌어질 때, 나는 병사들과 함께 불을 끄러 갔소. 그때 나는 보았네. 불타는 건물 사이로 포효하던 악마를. 다른 이들은 별다를 것 없는 악마라고 생각했지만, 나는 그 악마에게서 알 수 없는 친숙함을 느꼈지. 그리고 오늘 난 그 악마를 직접 마주했소. 그 얼굴과 이 팔찌를 보고 확신했소. 하아. 그래서 내가 나스린의 의뢰를 받지 말라고 했는데.”

 그렇게 말하며 바흐람은 얼굴을 손으로 가렸다. 슬픔과 고뇌가 그를 감싸버린 모양이었다. 그는 슬퍼하며 울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루스탐이 악마가 된 거야. 내 친구가…….”

 그때였다. 두 사람이 있던 방 바깥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누군가가 넘어졌든가, 주저앉거나 한 모양이었다. 말릭은 칼을 뽑으며 문을 강하게 열어젖혔다. 두 사람의 눈에는 놀란 얼굴로 주저앉은 나스린이 보였다.

“나, 나스린…….”
“오라버니……. 그게 무슨 말씀이신가요?”

 나스린의 눈동자는 공포와 놀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

“루스탐이, 루스탐이 악마가 됐다고요?”
“나스린, 잠깐만! 내 말 좀 들어 보거라.”

 바흐람이 몸을 일으켜 그녀를 진정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말릭은 그녀를 진정시키기는커녕, 바닥에 떨어진 팔찌를 주웠다.

“무슨 짓인가, 말릭!”

 바흐람의 제지에도 말릭은 그를 밀치며 나스린에게 팔찌를 보여주었다.

“악마가 이걸 차고 있더군.”

 나스린은 말릭의 손에서 재빨리 팔찌를 살펴보았다.

“이건, 이건…….”

 그녀는 손을 떨며 빛바랜 돌이 엮인 팔찌를 보았다. 말릭은 그때 나스린의 팔에 비슷한 팔찌가 엮인 것을 보았다.

“제가 예전에 준 팔찌에요……. 저, 정말로, 정말로 악마가 이걸 차고 있었나요? 루스탐에게서 빼앗은 게 아닐까요? 설마…….”

 말릭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녀의 마지막 희망마저 짓밟았다.

“악마가 빼앗은 거라면 마법을 걸어놨겠지. 하지만 아무것도 없었어. 악마는 아무 능력도, 의미도 없는 장신구는 달지 않아.”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어……. 루스탐이 악마일 리가…….”

 나스린은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리다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바흐람이 놀라 그녀를 붙들었다. 나스린은 죽은 사람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다. 바흐람은 사방에 대고 울부짖듯 사람을 찾았다. 근위병과 하인들이 그 소리를 듣고 방에 찾아와 쓰러진 나스린을 데려갔다. 이 모든 일이 벌어지는 동안 말릭은 그저 팔짱만 끼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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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즈베즈다
,

부활

단편 2017. 6. 17. 17:49

부활
The Reincarnation

0. 5년 전, 청색 들판

 피를 흘린 채 쓰러진 동료들, 알리스터, 에드원, 에이리크, 루시아, 그리고 그웬 그녀 자신. 청색 들판을 붉게 물들인 수많은 시체 사이로 쓰러져 고통스러워하는 그들 사이로, 신들이 선택한 대전사 앨런 데리올이 홀로 서 있었다. 가문을 상징하는 깃발을 묶은 창과 커다란 방패, 그리고 은빛으로 빛나는 갑옷으로 무장한 그는 눈앞에 있는 사악한 마왕과 싸우고 있었다. 앨런을 비롯한 동료들과 마족에 대항하는 수많은 종족의 연합군이 마왕에게 맞섰으나 그 누구도 마왕을 손 끝 하나 건드리지 못하고 쓰러졌다. 그 용감하다는 남쪽 인간 왕국의 기사들도, 그 강인하다는 북쪽 난쟁이 투사들도, 그 날래다는 서쪽 요정 전사들도, 그 무시무시하다는 동쪽 상아탑의 마법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오직 한 명, 앨런만이 여전히 마왕 앞에 서 있었다.
 마왕이 앨런을 뿌리치고 날아오르더니 커다란 용으로 변했다. 그는 입에서 불을 내뿜어 아직도 버티던 이들을 형체도 없이 불태웠다. 그 모습을 본 난쟁이와 요정 군주들은 전의를 잃고 전장에서 도망치고 있었고, 대마법사들은 마법 오염으로 일어나지도 못했다. 이대로라면 이길 수 없었다. 마족 전부를 죽인다고 해도 마왕을 죽이지 못하면 헛수고였다.
 앨런은 뒤를 돌아보았다. 점점 생명을 잃어가는 동료들, 그 사이로 그웬이 그를 슬픈 눈으로 보고 있었다. 앨런은 투구를 들어 올리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창에 묶여있던 깃발을 떼고는, 자기 뺨에 흐르는 피를 닦아내더니 그웬에게 덮어주었다. 커다란 깃발은 그웬의 온몸을 가려주었다.

“앨런…….”
 
 뒤돌아서는 앨런을 향해 그웬은 애처롭게 말했다.

“가지 마.”

 앨런은 뒤로 고개만 살짝 틀었다. 그러고는 특유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모두 괜찮을 거야, 그웬. 언제나 그랬잖아.”

 앨런은 다시 앞을 돌아보며, 칼을 지지대 삼아 힘겹게 일어서는 알리스터에게 말했다.

“그웬을 부탁합니다, 왕자님.”

 멍하니 그를 보는 둘을 뒤로하며 앨런은 앞으로 달려나갔다. 그러자 허공에서 날개 달린 말 한 마리가 나타나더니 앨런의 앞에 앉았다. 그는 말에 올라타고는 그대로 하늘을 향해 날아갔다.
 그 자리에 있던 그 누구도 그 뒤의 일을 잊지 못할 것이었다. 하나의 커다란 유성처럼 빛나는 앨런은 하늘을 날아다니며 그의 적을 짓밟는 검은 용을 향해 날아갔다. 둘이 격돌하는 그 순간 하늘은 마치 불지옥을 연상하게끔 붉게 물들더니, 이윽고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빛이 하늘을 수놓으며 온 세상을 크게 비췄다. 모두가 싸움을 멈추고 하늘만 바라보았다. 그 빛은 오랫동안 이어졌고, 빛이 사라지자 마왕과 앨런 역시 자취를 감추었다. 그 모습을 본 알리스터는, 자신도 어리둥절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빛이 사라지고 나서도 모두 멍하니 하늘만 보고 있는 모습을 보곤 힘겹게 칼을 쳐들며 외쳤다.

“마왕이 쓰러졌다!”

 알리스터의 외침에 연합군 병사들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들은 다시 한번 마족을 밀어붙였다. 모든 것을 마왕의 카리스마에 의존하던 마족들은 그가 사라지자마자 오합지졸로 변했고, 연합군은 붉게 물든 청색 들판을 이번에는 보랏빛으로 물들였다.
 병사들이 각자 종족을 대표하는 대전사들을 찾아왔다. 요정군은 루시아를, 난쟁이군은 에이리크를, 마법사들은 에드윈을 부축했다. 인간 기사들이 알리스터를 찾아왔을 때 그는 부축을 받는 대신 그웬 앞에 무릎을 꿇었다.

“우리가 이겼소, 다피리스! 데리올이 우리에게 승리를 선사했소!”
“앨런…….”
“슬픔은 데리올이 원하는 바가 아닐 것이외다. 자, 가세.”

 그웬은 알리스터의 말을 무시하며 깃발을 꽉 쥐었다. 알리스터는 고개를 저으며 기사들에게 그웬을 데려가라고 명령하고 자신은 남은 병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후퇴했다. 그가 하늘을 올려다보자 하늘은 어느새 새카만 먹구름으로 가득 차 조금씩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1. 지금, 청색 들판

 그웬은 눈가에 물기를 머금은 채 잠에서 깨어났다. 또다시 그 꿈이었다. 가슴 아픈 다섯 해 전 그날의 기억. ‘모두 다 괜찮을 거야.’ 앨런은 거짓말을 했다. 그녀에게 지금은 모든 것이 괜찮기는커녕 다섯 해 전 마족과의 전쟁 때보다 더 비참하고 슬픈 시절이었다.
 그녀는 이불처럼 쓰던 데리올 가문의 깃발을 걷으며 일어났다. 군데군데 난 구멍과 헌 부분을 꿰맨 결과 깃발은 다섯 해 전의 찬란한 그 모습을 잃은 지 오래였다. 그녀가 건드리지 않은 부분은 앨런의 피가 묻은 부분뿐이었다. 그녀는 슬픈 추억에 잠긴 채 느릿하게 깃발을 망토처럼 둘러맸다.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커다란 청동상이 있었다. 날개 달린 말을 탄 채 돌격하는 기사의 모습. 그녀는 청동상 받침 부분에 다가갔다.

 앨런 데리올. 빛의 대전사. 세상의 구원자.
 그의 희생에 우리는 이 땅에 남을 수 있었다.
 이제 신들 곁으로 돌아가 영원한 안식을 취하는 그에게 영원히 축복과 사랑이 있기를.

 그녀는 새겨진 글씨를 손으로 어루만졌다. 그녀의 보랏빛 눈은 또다시 물기로 젖어 어느새 눈물이 뺨을 타고 흐르고 있었다. 그때 그녀는 인기척을 느꼈다. 그녀는 손으로 눈물을 훑으며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돌린 곳에는 남부 왕국의 전령이 있었다. 그는 그웬이 정말 이곳에 있을 줄은 몰랐다며 중얼거리다 그웬의 서슬이 퍼런 시선을 느낀 뒤에야 머리를 조아리며 인사했다.

“그웬 다피리스 경. 전하께서 보내신 서신입니다.”

 알리스터의 편지. 그웬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떨떠름하게 편지를 받아들었다. 뒤로 살짝 두 걸음 걸으며 전령에게 등을 보이고 나서야 그녀는 편지를 열었다.

‘나의 전우, 그웬 다피리스에게.
 전쟁이 끝난 지 다섯 해가 지났건만 그대는 아직도 그 들판에서 벗어나지를 못하는구려. 나 역시 데리올의 그 마지막 모습이 여전히 눈에 선하다오. 사실 그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건 나 역시 마찬가지요. 전쟁의 상흔이 이 대륙에 여전히 남아있어서, 마족 잔당이 아직도 여기저기서 활개를 치고 다닌다오. 보이는 대로 또 들리는 대로 친정하여 쳐부숨에도 그 수가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소. 그래서 말인데, 오랜만에 그때 그 동료들과 같이 싸워볼까 하오. 청색 들판 근처에 놈들의 거점이 있소. 이미 다른 이들은 그곳으로 가고 있으니, 그대만 오면 된다오.
 아. 아직도 데리올의 말이 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소. 그대를 부탁한다는 그 말이. 아직도 그 들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그대를 생각할 때마다 그의 목소리가 나를 힐난하는 듯하오. 이제는 다피리스 자네를 위해서라도 내가 그의 마지막 말을 행할 수 있게…….’

 그웬은 편지를 끝까지 읽지 않고 그대로 불태워버렸다. 그녀는 차가운 시선으로 전령을 돌아보았다.

“어디로 가면 된다고?”

2. 지금, 위크힐 요새

 알리스터의 지휘 아래 연합군은 손쉽게 요새 정문을 돌파했다. 루시아의 요정군은 에드윈의 마법사들과 함께 선봉을 맡은 에이리크의 난쟁이군을 지원했다. 안으로 들어선 병사들은 다섯 해 전 마족들에게 죽은 가족과 지인들을 생각하며, 그들을 조금의 자비심도 보이지 않고 베어 넘겼다. 그건 그웬도 마찬가지였다.
 그웬은 마족의 기운을 따라 홀로 가장 높은 성탑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나타난 마족들은 그녀를 막지 못했다. 그녀가 성탑의 문을 열 때는 이미 주변이 마족의 보라색 피와 살점으로 가득했다. 그녀는 칼을 앞세우며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화려한 치장을 한 마족이 그녀를 보고는 놀라 뒷걸음질 치는 모습이 보였다. 그웬은 순식간에 그 마족의 목 끝에 칼날을 들이밀었다. 서슬이 퍼런 칼날과 그보다 더 무시무시한 그웬의 눈빛을 본 마족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트릴 것 같은 표정으로 그웬의 얼굴을 보았다.

“자, 잠깐, 잠깐! 너, 너는, 그웬 다피리스! 맞지? 빌어먹을 앨런 데리올의 연인!”

 그녀는 대답하는 대신 칼날을 더 들이밀었다.

“그만, 그만! 나, 나랑 거래하자, 거래! 난 강령술사야. 난 방법을 알아! 죽은 자를, 앨런 데리올을 부활시킬 방법을!”

 앨런. 부활. 두 단어가 그웬의 머리를 강하게 내려쳤고 그녀는 순간 얼어붙은 듯 움직이지 못했다. 자기 목에 들어온 칼날에서 힘이 조금씩 빠지는 것을 느낀 강령술사는 그제야 안심한 듯 한숨을 내뱉었다. 그러자 그웬이 정신을 차리고 다시 한번 칼에 힘을 주었다. 강령술사는 다시 얼굴을 공포로 구기며 아무 말이나 지껄였다.

“날 살려주면 방법을 알려줄게! 방법이 적힌 책이 있어! 책이!”

 그웬은 주변을 한 번 쭉 둘러보고는 말했다.

“그럼 넌 없어도 되는 거네.”
“아니, 잠깐! 부활은 강력하고 위험한 마법이야! 내가 없으면…….”

 그웬은 말을 다 듣지 않고 칼을 강령술사의 목에다 찔러 넣었다.

“넌 없어도 돼.”

 강령술사는 비참한 표정을 지으며 목에서 보라색 피를 뿜었다. 그의 보랏빛 눈동자는 그웬의 얼굴을 보며 점점 생기를 잃어갔다. 그가 쓰러지자 그웬은 깃발에 튄 피를 손으로 닦고는 칼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바로 주변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한참을 뒤진 끝에 수많은 잡동사니 사이에서 그웬은 어딘가 불길한 기운을 뿜는 책 한 권을 발견했다. 책은 마치 그녀를 기다렸다는 듯 그녀가 책장에 다가가자 알아서 바닥에 툭 떨어졌다. 검은색 인피로 된 책은 스스로 내는 불길한 기운을 못 이겨 덜덜 떨고 있었는데, 책을 펼치니 강력한 독기를 품은 잉크가 희미하게 빛을 내고 있었다. 그웬은 자기 손이 타들어 가는 느낌에 책을 덮었다. 그때 성탑에 에드윈이 나타났다.

“그웬! 여기 있었군요. 다행이에요. 어디 다치진 않았나요?”
“뭘 그렇게 걱정해?”

 그웬은 당황한 표정과 함께 책을 등 뒤로 숨겼다. 에드윈은 그러나 어딘가 불안정한 불길함을 본능적으로 느끼고는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사악한 기운이 느껴져서요. 날카롭고, 살기등등한. 그웬, 혹시 이상한 거 없었어요?”

 그웬은 눈짓으로 강령술사의 시체를 가리켰다. 그러자 에드윈은 지팡이를 들이밀더니 다짜고짜 불꽃을 쏘아 갈겨 시체를 불태워버렸다.

“‘죽은 마족도 좋은 마족이 아니다.’ 이렇게 가루로 만들어버려야 나중에 다시 살아나서 뒤통수를 치지 않죠. 근데, 그웬.”
“응?”
“뒤에 숨긴 게 뭐죠?”

 그웬은 순간 당해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어색하게나마 빙긋 웃으며 무마했다.

“내꺼. 너한테 안 줄 거야.”

 그녀의 말에 에드윈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웬을 바라보았다. 잠깐의 침묵 속에 긴장이 흘렀다. 하지만 이내 에드윈은 장난스럽게 물었다.

“거 참. 갑자기 난쟁이 영혼이 쓰이기라도 했나요? 난데없이 그런 탐욕을 부리고. 위험한 저주가 걸린 물건일지도 모르니 마법사들에게 맡기세요. 뭐, 그럴 것 같지는 않지만.”

 에드윈은 뒤로 간 그웬의 손을 한 번 쳐다보고는 고개를 까딱이며 다시 바깥으로 나갔다. 그러자 그웬은 다시 책을 펼쳐보았다. 책에는 마족의 문자로 수많은 사악한 주술들이 삽화와 함께 빼곡히 적혀있었다.
 책에 대해 좀 더 자세하게 알아보려면 에드윈에게 맡길 수도 있었지만,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그녀는 이 주술들이 어떤 목적을 가졌고 어떤 대가를 요구하며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이미 알고 있었다. 백 명의 에드윈이 달려들어도 그녀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이 책을 해석할 수는 없을 것이었다.
 그녀의 피에 흐르는 본능적인 감각이 이미 길을 가르쳐주고 있었다.

3. 오래 전, 다피리스 성

 살로메라는 마족이 있었다. 그녀는 뛰어난 기사들을 쓰러트리고 그들이 죽기 직전 가장 약한 순간에 타락시키는 것을 좋아했다. 그러기를 여러 번, 그녀는 이번엔 존이라는 이름의 기사에게 접근했다. 존은 용감했으나 어렸고 살로메보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나약했다. 살로메는 간단히 존을 쓰러트리고 그의 위에 올라탔다. 하지만 신들이 자비를 베풀어, 존이 죄를 범했을 때는 이미 그의 영혼이 육신을 떠난 뒤였다.
 살로메는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그녀의 배 속에 뭔가가 있었다. 그건 이전에 낳았던 마족의 아이보다 훨씬 느리게 자라고 있었다. 시간이 흘러 그녀는 아이를 낳았다. 반인반마의 여자아이. 모성애라는 감각이 단 하나도 없는 살로메는 아무런 고민 없이 자기가 낳은 아이를 내다 버렸고, 아이는 이름도 사랑도 받지 못한 채 노예로서 이리저리 팔리고 빼앗기며 힘든 삶을 살아갔다.
 ……라고 눈앞의 소녀는 말하고 있었다.
 앨런은 소녀를 내려다보았다. 절반의 혈통 덕분에 몸은 영락없는 인간의 그것이었으나 나머지 절반의 혈통 때문에 눈동자는 마족의 차가운 보라색이었다. 그녀의 몸에서 느껴지는 기운은 사악하기 그지없었고, 또 마족이 마법과 거짓으로 앨런을 속이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녀의 하얀 몸에 드리워진, 수많은 노예로서의 증거가 그녀의 말에 거짓이 없음을 증명했다.

“이제 전 어떡하나요? 제 주인님은 당신이 죽였잖아요.”

 소녀는 앨런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앨런이 머뭇거리자 기사들이 하나씩 자기 의견을 냈다.

“당장 죽여야 합니다. 악마 새끼잖습니까!”
“그렇습니다. 살려봐야 결국 방해만 될 겁니다.”

 앨런은 그러나 기사들의 말을 무시하고 무릎을 꿇어 소녀와 눈동자를 맞추었다. 그녀는 순수하게 눈을 반짝이며 앨런을 마주했다. 앨런은 잠깐 생각하다 물었다.

“네 주인님을 죽인 게 싫니?”

 소녀는 고개를 저었다.

“주인님은 항상 절 아프게만 했어요. 언제나 그랬어요.”

 그러고는 물었다.

“당신이 저의 새로운 주인님이 되어주시는 건가요?”

 고개를 저은 것은 이번엔 앨런이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천천히 칼을 뽑았다.

“난 노예는 필요 없어.”

 그 말에 소녀는 두려움 섞인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그럼 절 버리는 건가요?”
“아니야.”

 앨런은 불타는 칼을 높이 들었다. 그는 소녀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내겐 여동생이 있었어. 그웬이라는 이름이었지. 너는 어딘가 그 아이를 닮았어.”

 그러더니 앨런은 온 힘을 다해 칼을 휘둘렀다. 불타는 칼날은 소녀를 옭아매던 사슬을 단칼에 끊어버렸다. 소녀는 놀라 두려움 가득한 낯빛으로 앨런을 보았으나, 앨런은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일어나, 그웬. 넌 더 이상 노예가 아니야.”

4. 지금, 남부 왕국의 궁정

“국왕 전하께서 개선하신다!”
“승리왕 알리스터 만세!”

 왕궁으로 들어오는 동안 그의 신민들은 하나같이 그를 향해 ‘승리왕’이라는 말을 연호했다. 승리왕 알리스터 1세. 그 이름은 왕국이 지속하는 한, 역사가 지속하는 한 계속 남을 것이었다. 왕자의 신분으로 마족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전사이자 전쟁의 상흔을 치료하고 무너졌던 왕국의 전통과 체계를 다시 일으켜 세운 성군으로서.

“승리왕이라니, 멋진 칭호입니다, 전하.”

 먼저 궁정에 와 있던 그웬은 알리스터를 보며 조소하듯 말했다. 루시아와 에이리크, 에드윈은 반가운 친구를 본 것처럼 그웬에게 다가가 허물없이 말을 나누었으나, 알리스터는 홀로 머뭇거리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생채기 하나 없이 돌아와 줘서 고맙네, 다피리스.”

 하지만 그웬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알리스터는 왠지 창피하고 또 혼란스러웠다. 그는 붉어지는 얼굴을 감추며 급하게 방으로 들어갔다. 핑계는 무장해제였다. 방으로 들어온 그는 시종들을 모두 내쫓고 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가 ‘승리왕’이라는 칭호에 맞게 다른 모든 것에서 승리를 거머쥐었을지는 몰라도, 그가 진실로 원하던 단 하나는 쟁취하지 못했다. 그가 이겨야할 상대는 이미 전설 그 자체가 된 앨런 데리올이었다. 무슨 짓을 해도 이길 수 없는 상대였다. 그 때문에 쟁취할 수 없는 한 가지는, 너무나도 가까이 있어 더더욱 아른거렸다.

 앨런 앞에서 왕이라는 작위는 한없이 작고 무의미했다.
 그웬 앞에서 ‘승리왕’이라는 칭호는 반어법에 불과했다.
 지금 거울에 비치는 사람은 아무것도 얻지 못한 슬픈 패배자일 뿐이었다.

5. 5년 전, 만마전 심층부

“그러니까, 이 만마전의 심층부에 쳐들어가 마족의 경전을 빼앗아오면 분노한 마왕이 지상으로 나올 것이다, 그렇게 말했었지요?”

 루시아가 말했다.

“음, 에이리크는, 어, 생가, 흠. 생각했다. 바보 같았다고. 당황했다.”

 인간 말이 서툰 에이리크는 더듬거리며 루시아의 말을 보탰다. 그러고는 앞에 있는 모닥불을 불쏘시개로 쑤셨다. 불쏘시개는 마족 마법사 시체에서 빼앗은 지팡이였다.

“난 처음에 ‘이 인간 녀석이 오냐오냐하니까 기어이 정신이 나갔나보다’하고 생각했어요. 아, 불쌍한 앨런! 하면서요. 그런데 여기까지 같이 온 저도 정신이 나간 건 마찬가지인가 봐요. 이럴 줄 알았으면 혼약이라도 하고 올걸.”
“안타깝다, 너라면. 음, 많았을 것 같다. 인기.”
“당신한테 물은 적 없거든요, 꼬맹이 씨.”
“이해 안 간다. 음. 왜 성격 꼬였는지. 요, 크흠. 요정들이란.”

 루시아와 에이리크가 다시 티격태격하기 시작했다. 둘의 무의미한 싸움에 끼어드는 게 무의미한 일임을 경험으로 아는 나머지는 시끄러운 옆을 무시하고 오래 끓인 죽을 각자 떠먹으며 자기들끼리 말을 나눴다.
 그러기를 한참, 갑자기 앨런은 알리스터를 빤히 바라보았다. 알리스터는 가끔 어딘가를 보다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릴 때가 있었다. 앨런은 잠깐 생각하더니 무언가 떠오른 듯 즐거운 표정이 되어 가방에서 병 하나를 꺼냈다. 오래된 포도주였다. 갑작스러운 포도주의 등장에 알리스터의 눈이 반짝였다. 마족과의 전쟁 이후 마신 적이 없는 비싼 물건이었다. 앨런은 단검으로 코르크 마개를 찌르고는 뽑아서 향기를 맡았다. ‘멀쩡하네.’ 그렇게 중얼거리며 앨런은 술을 입에 댔다. 순간적으로 그의 미간이 찌푸려졌지만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다. 그는 말없이 꿀꺽 삼키더니 알리스터에게 병을 권했다.

“이 모든 게 끝나고 나면, 우리끼리 경쟁해야 할지도 모르겠네요.”
“경쟁? 갑자기 무슨 소리인가.”

 앨런은 어느새 자기 무릎을 베고 잠든 그웬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그 모습에 에드윈이 담뱃대에 불을 붙이며 끼어들었다.

“그림 좋네요. 주변이 시체의 산이 아니었으면 더 좋았겠는데.”

 그 말에 앨런은 웃으며 알리스터를 바라보았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왕자님.”

 알리스터는 앨런의 말을 듣고 얼굴이 굳어졌다. 그는 머뭇거리며 앨런이 권하는 술병을 받아들지 생각했다. 어느 쪽이든 불리한 사람은 알리스터였다. 하지만 그는 왕족답게 기품 있는 모양새로 앨런의 술을 낚아챘다.

“경의 도전을 받아들이겠소.”
“도전이라니. 그건 왕자님이 하는 쪽 아닌가?”

 알리스터는 에드윈을 한 번 흘겨보고는 단숨에 술을 들이켰다. 이윽고 그의 입은 분수가 되었다. 그는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외쳤다.

“완전 식초잖아!”

 그 모습에 앨런과 에드윈은 큰 소리로 웃었고 티격태격 하던 두 사람도 알리스터를 보고 마찬가지로 웃었다. 오직 그웬 하나만이 마법에 걸린 공주처럼 깊이 잠들어 알리스터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녀의 얼굴은 행복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6. 지금, 남부 왕국의 궁정

 궁정에는 화려한 연회가 열렸지만, 정작 주인공인 왕은 코빼기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술에 진탕 취해 연회를 즐기는 루시아, 에이리크, 에드윈을 뒤로하고 알리스터는 홀로 자기 침실의 난간에 서서 창밖을 바라보았다. 마치 다섯 해 전 청색 들판에서의 전투 전야처럼 달은 피처럼 붉었고 그 빛마저 아주 미약해 평소라면 밤에도 잘 보였을 산등성이에는 마을과 요새에서 피우는 불빛만 있을 뿐이었다.
 다섯 해 전 이날, 알리스터의 눈앞에는 아름답게 빛나는 앨런이 서 있었다. 전투 직전 그는 지금의 동상이 들어선 그 자리에서 병사들에게 용기를 불어넣는 연설을 했다. 그동안 바람에 날리던 그의 붉은 머리는 남자인 알리스터의 눈에도 아름다웠다. 전투가 벌어졌을 때도 그는 가장 앞에 서서 돌진했고, 마지막에는 마왕과 함께 사라짐으로써 세계의 구원자로서, 전설로써 남았다.
 알리스터는 그의 죽음에 슬퍼했다. 위대한 전사이자 유쾌하고 선량했던 친구를 잃은 것도 그렇지만, 그웬이 영원히 그를 그리워하면서 영혼에 입을, 영원히 치유되지 않을 상처에 슬퍼했다.
 그렇게 상념에 잠겨있는데, 밖에서 경비병이 문을 두드렸다.

“전하. 그웬 경께서 알현을 요청합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자기를 찾아올 리가 없는 사람이 자신을 만나길 원한다는 사실에 알리스터는 혼란스러워 대답도 못 하고 멍하니 문만 바라보았다. 왕이 대답하지 않자 경비병은 불안함에 목소리를 살짝 떨며 다시 물었다.

“전하. 그웬 다피리스 경께서 알현을 요청합니다. 들여보낼까요?”
“그, 그래. 들여보내라.”

 그러자 문이 열리고, 그웬이 들어왔다. 알리스터는 쿵쾅거리는 심장을 숨기려는 의도에서 붉은 달빛을 등지고 그웬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옛날과 전혀 다를 바 없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검은 머리, 일렁이는 보랏빛 눈동자, 마족의 혈통을 증명하는 매혹적인 몸, 허리띠에 달린 검과 단도까지도. 달라진 것이 하나 있다면 언제나 쓰고 다니는 데리올 가문의 깃발뿐이었다.
 알리스터가 아무 말이 없자 그웬은 그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그녀가 한 발자국 다가올 때마다 그의 심장이 점점 빠르게 뛰었다.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이 점점 달빛에 붉게 물들 때마다 알리스터는 뜻 모를 두려움을 느꼈다. 그녀의 생기 잃은 보랏빛 눈동자는 어느새 알리스터의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전하.”

 그녀는 고개를 살짝 들어 눈을 마주쳤다.

“염치 불고하고, 바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녀의 빛을 잃은 눈동자와 힘을 잃어버린 나약한 목소리에, 알리스터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할지 몰라 두려웠다. 하지만 그녀가 자신에게 무언가를 원한다는 것이 앨런과의 무의미한 경쟁에서 한 걸음 더 전진하는 것이라면, 알리스터는 어떤 짓거리도 할 생각이었다.

“그대가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하겠네, 다피리스. 그것이 그대와……데리올이 원하는 것이라면.”

 알리스터는 자기도 모르게 앨런을 언급했다.

“그래요, 앨런. 저는 지금껏 앨런을 그리워하며 살았죠. 그래서 이 깃발을 집처럼 여기고 살았어요. 하지만 그가 남긴 이 깃발을 끌어안고만 있는 건 그저 저를 슬프게 할 뿐. 저는 깨달았어요. 무언가 완전히 다른 방법이 필요하다는 걸요.”

 알리스터의 희망이 희미하게나마 밝아졌다. 그녀는 앨런이 그랬던 것처럼, 밝게 미소를 지었다.

“그이를, 앨런을 되살릴 방법을 찾았답니다.”

 희미하게 빛나던 알리스터의 희망은 앨런의 이름이 언급되는 순간 처참하게 산산조각이 났다. 마구 뛰던 알리스터의 심장은 어느새 배신감과 분노로 점점 차가워지고 있었다.

“사람을 되살리는 건……. 불가능하오. 지금껏 수많은 강령술사들이 부활을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그 결과는 전부 처참했소이다. 다섯 해 전에도 우리와 함께하던 수녀가 그런 짓을 했다가 엄청난 사건이 벌어졌음을 자네도 잘 알 터인데……. 어찌하여 자네마저 그런 멍청한 술법에 손을 대려는 게요?”

 알리스터는 분노로 가늘어지는 이성의 끈을 간신히 붙잡으며 차갑게 대답했다. 그러자 그웬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왜 그러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전하. 전하께서는 그저 전하께서 그토록 원하시던 그것을 이루면 되는 거예요.”
“짐이 원하던 그것이라니?”
“전하께서 원하시던 그것, 바로 저요.”

 그웬은 천천히 옷을 벗기 시작했다.

“항상 그 사람의 등 뒤에서 열등감에 시달리며, 항상 손에서 저를 놓지 않던 그이를 원망하지 않으셨나요?”

 데리올 가문의 깃발이 바닥에 떨어졌다.

“왕국을 다시 일으킬 후계자라는 위상, 가장 위대한 성군이 되리라는 주변의 기대 때문에, 반인반마인 제게 말조차 걸지 못했다는 사실을 증오하지 않으셨나요?”

 허리띠와 옷가지가 바닥에 떨어졌다.

“그토록 제 사랑을 갈구하셨으면서도 정작 아무 말도 못 하고 속으로만 저를 탐하기만 하던, 용기 없는 자기 자신을 혐오하지 않으셨나요?”

 그녀의 속옷이 바닥에 떨어졌다. 붉은 달빛 아래서 완전히 나신이 된 그웬은 팔을 벌렸다.

“자, 그렇게 원하시던 제가 전하의 앞에 있답니다.”

 그러자 알리스터는 갑자기 그웬의 목을 조르며 바닥에 쓰러트렸다. 그의 얼굴은 분노와 슬픔의 양가감정으로 감히 헤아릴 수 없었다.

“너는 끝까지 짐을 고통에 빠트리는구나, 그웬 다피리스! 너는 짐이 그토록 너를 사랑했음에도 끝까지 짐을 무시하였도다! 너는 이미 죽은 앨런 데리올만을 바라보며, 짐이 뒤에서 항상 너를 바라보고 그리워했음을 알지도 못하고, 알려 하지도 않았다! 그러더니, 그렇게 나를 절망에 빠트려놓더니, 이젠, 이제 와서는 죽은 사람을 되살리려고 짐의 사랑을 그런 식으로 이용하다니! 짐은 고작 망자보다도 못하다는 것이냐? 짐은 그 깃발만도 못하다는 것이냐? 너는 참으로, 참으로 악마로구나!”

 알리스터는 그웬을 죽일 듯이 목을 졸랐으나, 그의 얼굴은 점점 슬픔으로 일그러져갔다. 그웬은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태연했다. 그녀는 알리스터의 얼굴을 손으로 어루만지더니 그의 뒤통수에 깍지를 끼고는 자기 얼굴로 끌어왔다. 둘은 길게 입을 맞추었다. 알리스터의 손에 힘이 풀렸다.
 그날 밤 승리왕은 그가 유일하게 정복하지 못한 땅을 정복했다. 하지만 그것은 승리가 아니었다. 그는 패배했다. 그가 이기지 못했던 상대, 그리고 그가 그토록 원했던 상대 모두에게.

7. 10개월 후, 위크힐 요새

 에드윈은 요새 성문 앞에 서 있었다. 열 달 전 연회 이후 그웬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녀가 항상 있었던 청색 들판 위 앨런의 동상 아래에도 그녀는 없었다. 지난 다섯 해 동안 없었던 일이었다. 알리스터의 요청에 에드윈은 상아탑을 떠나 그녀를 찾아다녔고, 그녀의 마지막 흔적은 바로 이 위크힐 요새에 있었다.
 그는 마법사 특유의 고깔모자에 달린 차양을 손으로 올리며 요새를 올려다보았다. 전설 속 흡혈귀왕의 요새가 실존했다면 바로 이런 모습이었을 터. 열 달 전 왕국이 토벌한 이후 아무런 전략적 가치가 없어서 버려진 곳이었다. 이런 버려진 곳에는 굳이 마족 잔당이 아니더라도 으레 여러 괴물이나 도적 떼가 꼬이기 마련이었으나, 그 어떤 저항도 흔적도 없었다. 에드윈은 오히려 잘 됐다고 생각하며 문으로 다가갔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성문은 열려있었다.
 그는 지팡이를 바닥에 쿵쿵 찍으며 나아갔다. 그러나 그 행동에 답하는 이는 그 누구도 없었다. 시체는 열 달 전의 그것이었고 잡동사니는 먼지와 거미줄에 자리를 내주었다. 이런 침묵과 고독이야말로 에드윈이 두려워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두려운 것은 그웬의 흔적이 요새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열 달 전 그녀가 궁정을 떠날 때, 그녀의 눈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어두웠다. 평소에도 빛이 없던 그녀였으나 그날따라 더더욱 그랬다. 하지만 에드윈은 그녀에게서 그 어떠한 마법 효과도 느끼지 못했다. 두려운 일이었다. 그녀가 무슨 일을 벌인다면 그것은 마족이 부린 마법에 홀려서가 아니라, 그녀 자신의 의지로 일으켰다는 것이니까.
 그는 희미하게 느껴지는 마법의 흔적을 미궁 속 실타래로 삼아 감아올렸다. 그 실타래 끝에는 열 달 전 그웬이 있었던 그 성탑이 있었다. 그는 잠깐 망설였으나 크게 심호흡한 다음 성탑의 문을 열었다.
 그는 차라리 눈앞에 있는 게 역겨운 이교도 마녀의 집회나 끔찍한 시산혈해이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은 성탑 한가운데에 복잡하고 거대한 마법진을 그리는 익숙한 모습의 여인이었다.

“그웬?”

 에드윈의 말에 여인은 고개를 돌렸다. 그의 예상이 맞았다. 하지만 그녀의 모습은 예상 밖이었다. 그녀의 배는 매우 커다랬다. 분명 임신 중이었다. 궁정에 돌던 소문, 알리스터와 그웬이 동침했다는 소문은 사실이었다.

“안녕, 에드윈.”

 그웬의 목소리에는 생기가 없었다.

“무슨 짓을 벌이는 거죠, 그웬?”
“그이를 되살리려고.”
“그이?”

 에드윈은 그녀의 말에 혼란스러웠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웬은 계속 마법진을 그렸다.

“마침 잘 됐다. 너는 나보다 이런 거 더 잘 알잖아. 그리는 것 좀 도와줄래? 생각보다 어렵네.”

 그녀가 무슨 짓거리를 벌이려는지 에드윈은 어느 정도 예상했으나 믿고 싶지 않았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대체, 대체 뭘 하는 건데요.”
“말했잖아. 그이를 되살릴 거라고. 부활 의식의 마법진이야.”
“부활…….”

 차라리 묻지 말았어야 했다고 에드윈은 생각했다. 지금껏 부활을 시도한 강령술사들의 결말을 에드윈은 누누이 들었으며, 그가 연모하던 수녀가 부활에 손을 댔다가 산채로 심연에 끌려들어 간 것을, 그리고 그 자리에서 무시무시한 악마가 튀어나온 것을 본 적도 있었다. 그렇기에 에드윈은 세차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당장 그만두세요, 그웬. 이런 미친 짓을 했다가는…….”
“부탁이야. 도와줘.”
“안 돼요. 절대 안 돼요! 부활 같은 미친 짓을 제가 도우라고요? 그것도 당신이 하는 걸? 아뇨. 절대 그렇게는 못 해요.”

 그러면서 에드윈은 지팡이를 높게 들었다. 그러자 그웬의 표정이 짜증으로 일그러졌다.

“그럼 방해하지 마.”

 그웬이 손을 뻗자 붉은 촉수 여럿이 튀어나와 순식간에 에드윈을 옭아맸다. 마족의 마법이었다. 그는 온몸이 묶인 채 발버둥 치다 주문해제를 재빠르게 외쳐 벗어났다. 바닥에 떨어진 그는 정신없이 바닥을 더듬거리며 지팡이를 쥐고는 촉수가 다시 그를 옭아매기 전에 먼저 순간이동으로 사라졌다.
 방해꾼이 사라지자 그웬은 다시 바닥에 마법진을 그렸다. 마법서의 삽화대로 마법진이 완성되자 붉게 빛이 나기 시작했다. ‘다 됐다.’ 그웬은 희미하게 웃었다. 그때 갑작스러운 진통에 그녀는 마법진 중앙에 주저앉았다.
 의식은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8. 열 달 후, 왕국 궁정

 에드윈은 벌벌 떠는 손으로 담배에 불을 붙였다. 알리스터는 그가 전한 충격적인 소식에 허공만 멍하니 바라보았다. 국왕이 그러고 있자 떨면서 담배를 피우던 에드윈이 말했다.

“시간이 없어요, 알리스터. 빨리 막아야 합니다.”
“……어떻게?”

 알리스터는 의지가 없었다. 그 모습을 보는 에드윈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제 그웬은 그냥 마족이에요. 그렇게 생각하세요. 지금 당장 위크힐 요새로 가서 그웬을 막아야 해요. 악마가 또 튀어나오는 꼴을 두고 볼 수는 없어요.”

 그 말을 들은 끝에 알리스터는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전령을 불렀다.

“지금 당장 루시아와 에이리크에게 위크힐 요새로 병력을 이끌고 오라고 전하게. 상아탑의 마법사들에게도! 당장 차출할 수 있는 병력을 모두 동원해서 위크힐 요새를 포위하라고 전하라.”
“예, 전하. 포위하면 바로 공격하라고 할까요?”

 알리스터는 고개를 저었다.

“……명령이 있기 전까지는, 공격하지 말라고 하라.”

9. 열 달 후, 위크힐 요새

 알리스터는 기도했다. 아무도 없는 위크힐 요새를 나아가며, 에드윈이 건넨 실타래를 따라가며, 제발 그가 틀렸기를 기도했다.
 점점 그웬이 있는 성탑으로 다가갈 때마다 마법 재능이라고는 없던 알리스터조차 무시무시한 마력을 느낄 수 있었다. 거대한 마법의 힘이 왕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발걸음 하나하나가 힘겨워졌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성탑에 도착했을 때 그는 손을 뻗는 것조차 어려웠다. 성문 안에서는 그웬의 힘에 부친 신음과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힘겹게 문을 열었다. 그곳엔 그웬이 있었다.

“드디어 오셨군요, 전하.”

 그웬은 알리스터를 올려다보았다. 알리스터는 그녀의 얼굴에서 아래쪽으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녀의 피투성이 다리 사이로 이어진 탯줄, 그 끝에서 갓난아기가 울고 있었다. 그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웬의 손에는 단도가 들려있었다. 그녀는 옆에 놓인 깃발을 집어 들더니 다섯 해 전 앨런이 묻힌 핏자국을 단도 끝으로 긁었다. 그녀가 중얼거리자 핏자국은 그대로 액체가 되어 단도를 새빨갛게 물들였다.

“이제 보세요. 앨런이 다시 태어날 거예요.”
“그만하게, 다피리스!”
“여기까지 왔는데 그만둘 수는 없어요.”
 
 그웬은 단도를 양손에 쥐었다. 자기 운명이 어찌 될지 모르고 우는 아이 위에 단도가 자리 잡았다. 그웬은 주문을 읊기 시작했다. 알리스터는 이를 막기는커녕 마법진에서 뿜어져 나오는 엄청난 힘에 눈을 뜨기도 어려웠다. 그렇다고 그저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알리스터는 대신 칼을 뽑았다. 칼날이 뽑히며 소름 끼치는 소리를 냈다. 그는 칼을 크게 뒤로 뻗었다.

“그만두게, 제발, 제발…….”

 그웬은 무시했다. 그녀가 멈출 생각이 없음을 깨달은 알리스터는 눈물을 주르륵 흘리며, 속삭이듯 말했다.

“사랑하오, 그웬.”

 알리스터는 비통에 찬 기합을 내지르며 그웬을 향해 힘껏 칼을 던졌고, 동시에 그웬은 단도를 아기에게 찔러 넣었다. 엄청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알리스터는 팔로 눈을 가렸다.
 성탑에서 나온 빛은 마치 앨런이 죽었을 때처럼 온 세상을 가득 메웠다. 요새를 포위한 루시아와 에이리크, 에드윈 모두 그 빛을 멍하니 보고만 있었다.

10.

 알리스터는 팔을 뗐다. 앞에는 열네 살 남짓한 소년이 가슴에 칼을 맞고 쓰러진 그웬의 얼굴을 한쪽 무릎을 꿇은 채로 어루만지고 있었다. 그웬은 빙그레 웃으며 소년의 뺨을 어루만졌다.

“돌아왔구나, 앨런…….”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웬이 계속 말을 이었다.

“넌 나를 그 끔찍한 구렁텅이에서 구해줬어. 넌 나의 구원자였어. 나도 널 구원하고 싶었어.”

 그웬은 힘겹게 미소 지었다.

“하지만 이젠 반대가 됐네…….”
“모두 다 괜찮을 거야, 그웬. 언제나 그랬잖아.”

 앨런은 그웬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웬의 보랏빛 눈동자는 그렇게 영원히 생기를 잃어버렸다. 앨런은 그녀의 눈을 쓸어내리더니 슬픔을 못 이기고 눈물을 흘렸다. 한참 후에야 앨런은 일어서서 그녀의 몸에 박힌 칼을 뽑아내었다.
 앨런이 고개를 돌리자, 그 모습을 본 알리스터는 그대로 주저앉아버렸다. 하늘거리는 붉은 머리칼, 눈처럼 새하얀 피부, 남자가 보아도 아름다운 그 얼굴. 모두 그의 것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앳된 소년의 모습, 그리고 그웬과 자신의 눈동자 색이 하나씩 들어간 그의 눈뿐이었다. 앨런은 알리스터의 칼을 주인에게 들이밀며 다가왔다.

“전 왕자님께 그웬을 부탁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헌데 왕자님께선 그 약속을 무시한 모양입니다.”

 알리스터는 말이 없었다.

“그토록 그웬의 사랑을 갈구하셨으면서, 결국 그녀를 죽이셨군요. 저는 왕자님을 믿었는데요.”

 앨런의 비난에 알리스터는 눈물을 흘리며 말을 토해냈다.

“처음부터, 처음부터 난 자네의 부탁을 들어줄 수 없었소. 자네의 유언을 이룰 수 있는 일말의 가능성조차 없었소. 자네가 내게 그웬을 부탁한다고 한 그 순간부터, 이 일은 예견되어 있던 거요. 난 그대의 말을 지키고 싶었으나, 결국 그녀를 슬픔에서 구해줄 수 없었소. 그녀를 행복하게 해주기는커녕 그녀 가슴에 그 칼을 찔러 넣었구려. 난 용서받지 못할 것이외다. 하늘의 신들에게도, 심연의 여신에게도, 그녀에게도, 자네에게도, 그리고 나 자신조차도. 이제 난 누구에게도 받지 못할 구원을 기다리는 그런 사람이 되어버렸구려.”

 앨런은 다시 뒤돌아 그웬을 끌어안았다. 그는 알리스터를 노려보며 말했다.

“알리스터.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될 겁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앨런과 그웬의 몸이 빛나기 시작했다. 그때 문이 벌컥 열리고 에드윈, 루시아, 에이리크, 그리고 병사들이 성탑 안으로 들어왔다. 그 순간 두 사람을 감싼 빛이 폭발하더니 두 사람은 사라졌다. 빛이 사라지자 에드윈이 놀란 얼굴로 중얼거렸다.

“……앨런?”

11.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청색 들판

“그웬.”
“네, 아바마마.”

 그웬돌린은 알리스터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알리스터는 손가락으로 반대쪽 끝 마족군의 선봉장을 가리켰다.

“저기 저 은색 갑옷의 기사가 보이느냐? 새로운 마왕 말이다.”
“네, 보입니다.”

 그녀는 자기 눈을 의심했다. 은빛으로 빛나는 모습은 마왕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사람을 홀리고 매혹하는 악마적인 매력이 아니라 기품 넘치고 신성하기까지 한 그런 아름다움이었다.

“정말 마족이 맞는 건가요, 아바마마?”

 알리스터는 그 말에 똑바로 대답하지 않고, 대신 다른 말을 했다.

“그토록 아름답고 기품 있던 세계의 구원자가, 이번엔 세상에 파멸을 부르려 하는구나.”

 그웬돌린은 아버지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의 얼굴이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수심 가득해, 감히 물어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러던 중에 알리스터가 물었다.

“그웬, 내 딸아. 혹 사랑하는 사람이 있느냐?”

 그러자 그웬돌린은 얼굴을 붉혔다. 그녀가 대답하지 못하자 알리스터는 괜찮다는 듯 옅게 웃었다.

“혹여 네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이가 있다면, 이 전투가 끝나고 나서 네 위치, 평판 같은 것은 신경 쓰지 말고 쟁취해라. 나는 그러지 못해서 평생을 고통 속에 살았구나. 자, 그럼. 싸우러 가자꾸나. 세상을 위해서.”

 알리스터는 투구를 쓰고는 칼을 뽑아 들었다.

“전사들이여! 전진하라!”

 왕과 공주의 뒤를 따라, 수많은 인간 기사들이 들판을 가르며 나아갔다. 언덕 위 상아탑의 마법사들은 불덩이를 던졌고 난쟁이와 요정은 적들을 포위하듯 전진했다. 그러자 마왕도 칼을 높이 들었다. 이전에 그가 왕에게서 가져간 왕가의 검이었다. 그가 외치자 마족들 역시 함성을 길게 내지르며 돌진했다.

 다시 한번, 최후의 전투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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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즈베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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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쇠의 기사
The knight of the key

03. 오펜슈타인의 섭정 3

 토비아스는 분노에 찬 소리를 내지르며 펠리페에게 달려들었다. 펠리페는 공격을 피하며 케리스에게 소리쳤다.

“카를을 보호해!”

 케리스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칼을 거두고 판매대 뒤로 폴짝 뛰어 넘어갔다. 그러자 펠리페는 다시 정신을 눈앞의 노병에게로 집중했다. 토비아스의 새빨간 얼굴에선 펠리페의 출신에 대한 비이성적이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지극히 이성적인 증오가 뿜어져 나왔다. 그는 그 증오를 가득 담아 다시 한 번 크게 칼을 휘둘렀다. 펠리페는 반사적으로 오른손에 쥔 칼을 반대로 휘둘러 쳐냈다. 공격을 막기는 했으나 얇은 칼날을 통해 전해지는 충격에 펠리페의 손목이 부러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는 고통을 참으며 왼손에 든 막대기로 토비아스의 얼굴을 후려쳤다. 토비아스는 악 소리를 내며 비틀거렸고 그는 그 틈에 상대의 얼굴을 향해 칼날을 뻗었다. 그러나 토비아스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틀었고 칼날은 살갗만 살짝 긁을 뿐이었다.
 펠리페는 지끈거리는 손목을 문지르며 물러섰다. 토비아스는 주룩 피가 흐르는 뺨을 막으며 눈짓했고 그러자 기다리던 라우레니엔 병사들이 펠리페를 향해 달려들었다. 장검과 미늘창을 든 둘은 능숙하게 서로를 보호하며 펠리페를 공격했고 또 기회를 주지 않았다. 뒤로 물러나던 그는 예상치 못하고 탁자에 걸려 넘어졌다. 그러자 그의 머리 위로 섬뜩한 창날이 떨어졌다. 펠리페는 황급히 몸을 틀었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그가 누워있던 탁자가 박살났고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펠리페는 팔로 얼굴을 가리며 소리쳤다.

“케리스!”

 펠리페의 외침을 들은 케리스는 고개를 들었다. 계산대 뒤에 숨어 벌벌 떠는 여급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케리스가 다가가자 여급은 공포로 떠는 눈을 케리스에게로 돌렸다. 그러자 그녀는 아이를 여급에게 안겼다.

“여기 가만히 있어요!”
“네?”

 케리스는 대답 대신 허리춤에서 차륜식 권총을 뽑아 들더니 화약을 다시 재며 계산대 너머를 흘낏 쳐다보았다. 펠리페는 여전히 무자비한 공격을 피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고개를 숙인 그녀는 눈을 감고 깊게 한 번 심호흡했다. 그리고는 재빠르게 몸을 일으키더니 미늘창 든 병사를 향해 권총을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다. 화약 접시에서 불꽃이 피어오르고 엄청난 굉음이 뒤따르며 여관을 뒤흔들었다. 동시에 창날을 내지르려던 병사가 비명을 지르며 몸을 꼬았다. 그러자 장검 든 병사는 당혹스러움에 어찌할 줄을 모르고 주춤했고 펠리페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펠리페는 왼손에 든 막대기를 장검 든 병사에게 던졌다. 그가 반사적으로 얼굴을 가린 틈에 펠리페는 미늘창 든 병사에게로 전진했다. 그는 고통에 신음하면서도 힘겹게 창대를 들었다. 그러자 펠리페는 몸을 날리듯 앞으로 나아가 왼손으로 창대를 강하게 붙들고는 병사의 목덜미를 향해 칼을 뻗었다. 칼날이 살갗을 찢으며 쑥 들어감을 느끼자마자 펠리페는 칼에서 손을 떼었고 병사는 짧은 단말마를 내뱉으며 뒤로 넘어갔다. 펠리페는 멈추지 않고 두 손으로 창대를 꽉 쥐더니 몸을 틀며 미늘창을 크게 휘둘렀다. 장검 든 병사는 옆으로 몸을 날리며 피했다. 그러자 펠리페는 창을 겨누며 자세를 가다듬었다.
 그러는 동안 케리스는 토비아스와 맞서고 있었다. 그녀가 총을 쏜 순간 토비아스는 그녀의 손목을 향해 두꺼운 펄션을 휘둘렀다. 케리스는 아슬아슬한 순간에 손을 내려 피했고 칼은 허공을 가르더니 애꿎은 판매대만 반으로 쪼갰다. 놀람을 애써 숨기면서 그녀는 왼손에 총을 거꾸로 쥐고 오른손으로 칼을 뽑아 상대를 겨누었다. 하지만 그녀는 선뜻 칼을 내지를 수는 없었다. 그녀의 손목만큼 가냘픈 칼날은 토비아스가 힘을 주어 쳐내는 순간 칼날과 함께 손목을 부러트릴 게 분명했다. 그녀는 이리저리 자세를 바꾸고 움직이며 상대가 틈을 내주기를 바랐다.
 갑자기 토비아스가 펼선을 왼쪽으로 쭉 빼고는 오른발을 내밀었다. 케리스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칼날을 앞으로 뻗었다. 동시에 토비아스는 강하게 사선으로 칼을 휘둘렀다. 두 칼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부딪쳤고 두 사람의 입에서 짧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케리스는 손목이 부러질 것 같은 고통과 함께 허전함을 느꼈다. 그녀의 칼은 어느새 멀리 저편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당황하지 않고 왼손에 든 총으로 토비아스의 얼굴을 강하게 후려쳤다. 토비아스는 비명을 지르며 비틀거렸다. 그러나 케리스가 한 번 더 권총을 휘두르려는 순간 토비아스가 그녀의 왼쪽 손목을 붙잡고 힘을 주어 비틀었다. 이번에는 케리스가 비명을 질렀다. 토비아스는 비웃음을 흘렸다.

“그렇게 계속 울어라 이 망할 년아!”

 그가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칼을 높이 들었다. 케리스의 팔을 내려쳐 잘라내려는 의도가 분명했다. 그녀는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그녀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케리스는 왼 다리에 무게를 싣고 오른 다리를 크게 들어 올리더니 토비아스의 얼굴을 걷어찼다. 얼굴에 가해지는 충격에 토비아스는 무의식적으로 케리스의 손을 놓았다. 그리고 케리스는 그대로 바닥에 떨어졌다. 그녀는 이를 꽉 물고 고통을 삼키며 다시 일어섰다. 토비아스는 여전히 비틀거리고 있었다. 케리스는 짧게 기합을 내지르며 토비아스의 오른손을 걷어차 칼을 쳐냈고 이어 쉬지 않고 발차기를 날렸다. 그렇게 한 번 두 번 걷어차고 세 번째, 갑자기 토비아스가 그녀의 다리를 붙잡았다. 그녀가 당황한 얼굴로 토비아스를 바라보자 그는 씩 미소를 짓더니 그대로 그녀를 휘두르듯 옆으로 날려버렸다. 케리스는 비명도 한 번 제대로 못 지르고 탁자와 의자를 부서트리며 바닥에 처박혔다. 하지만 토비아스는 멈추지 않고 잔해 위에서 피를 토해내는 케리스의 가슴팍에 올라타더니 그녀의 얼굴을 마구잡이로 내리치기 시작했다.
 한편 펠리페는 눈앞의 상대에게 잠깐의 틈도 주지 않고 계속 공격을 가했다. 칼이 닿지 않는 거리에서 벌이는 그의 날랜 찌르기에 장검 든 병사는 피하고 쳐내기를 반복할 뿐 감히 반격할 시도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런 끝에 펠리페는 병사를 벽에 몰아붙였다. 그러자 그는 창끝으로 원을 그리듯 돌리며 상대를 현혹했다. 불안에 떠는 두 눈이 빙글빙글 도는 창끝을 따라가며 당혹감과 두려움을 끌어냈다. 그러던 순간 펠리페는 창을 앞으로 뻗었다. 장검 든 병사는 반사적으로 칼을 들어 막으려 했으나 창날이 막히기는커녕 오히려 칼날을 같이 밀어냈다. 창날은 그대로 병사의 목덜미를 꿰뚫었고 흘러나온 피가 창대를 적셨다. 펠리페는 창날을 뽑으며 뒤돌았다. 그러자 그의 눈앞에 보인 것은 이미 코앞까지 다가온 토비아스의 분노에 찬 얼굴이었다.
 미처 반응할 새도 주지 않은 채, 토비아스는 펠리페를 벽에 처박았다. 그리고는 주먹으로 그의 몸을 마구잡이로 후려쳤다. 갑작스러운 충격에 펠리페는 온몸이 마비된 느낌이어서 반응조차 못 하고 피를 토했다. 토비아스가 멈추자 펠리페는 힘을 잃고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그의 손이 창대로 향하자 토비아스는 손목을 콱 짓밟고는 창대를 걷어차서 치워버렸다.
 토비아스는 비틀거리며 물러섰다. 그는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바닥에 비참하게 드러누운 채 피를 토해내는 에스테야 놈, 부서진 파편 위에 쓰러져서 미동도 없는 빨간 머리, 공포에 질린 눈으로 벌벌 떠는 난민들, 그리고 시끄럽게 우는 아이. 토비아스는 아이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가 다가오자 여급은 공포에 질린 얼굴로 뒷걸음질 쳤으나 그녀가 도망갈 곳은 없었다. 토비아스는 여급의 얼굴을 한 대 강하게 쳐 쓰러트리고는 아이를 안아 들었다. 그는 우는 아이를 잠깐 바라보더니 이윽고 펠리페에게 고개를 돌렸다.
 
“네 아들이냐?”

 그 말에 펠리페는 앞으로 기어가며 힘겹게 말을 토해냈다.

“그 아이는, 건드리지 마…….”
“내게도, 내게도 아이가 있었지. 딸이었어. 거트루트라고, 내가 직접 이름을 붙였었는데.”

 토비아스는 다시 아이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펠리페는 고통에 신음하면서 팔을 뻗었다.

“제발, 제발. 뭘 하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제발 하지 마.”
“네놈들이 쳐들어왔을 때 그 아이는 열다섯밖에 안 됐었지. 정말로 꽃다운 아가씨였는데, 그런데…….”
 
 그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그 떨림이 무슨 의미인지는 펠리페도 알고 있었다. 그는 힘겹게 무릎을 꿇고는 말했다.

“미안하다. 제발, 제발 용서해다오. 우리가 무슨 짓을 했는지는 잘 알아! 하지만, 하지만 그 아이는…….”
“죄가 없다고? 그렇겠지. 하지만 내 딸도 죄는 없었어!”

 그는 격앙된 목소리로 펠리페에게 소리쳤다.

“빌어먹을 너희 에스테야 개새끼들이 아무런 죄도 없는 내 딸을 죽였다! 잔인하게, 웃으면서!”
“안 돼, 안 돼, 멈춰!”

 펠리페는 다급한 외침에도 토비아스는 아이를 번쩍 들었다. 앞으로 자신에게 벌어질 일을 알고 있기라도 한 듯 카를은 더 크게 울기 시작했다.
“너도 똑같은 고통을 맛보게 해주마. 내가 겪었던 고통을, 내가 눈으로 보았던 그 끔찍한 슬픔을! 너도 눈앞에서 네 아이의 머리가 깨지는 것을 봐라!”
“안 돼!”

 토비아스는 카를을 바닥에 내던지려 했다. 그러자 동시에 펠리페가 자리를 박차고 앞으로 튀어나가며 단검을 뽑았다. 토비아스는 펠리페의 얼굴을 보고 움찔했다. 그가 본 펠리페의 얼굴은 감히 이 세상 사람이 지을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말 그대로 분노 그 자체였다. 그렇게 그가 머뭇거리는 사이 펠리페가 팔을 뻗었고 그의 단검은 토비아스의 옆구리를 뚫고 갈비뼈 사이로 쑥 들어갔다. 그리고 칼날을 돌리듯 비틀었다. 토비아스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비틀거렸다. 그의 손아귀에서 힘이 빠져나갔고 그 틈에 펠리페는 카를을 낚아채 품에 안았다. 그리고 토비아스는 쓰러졌다. 펠리페는 아이를 살펴보았다. 무사했다.
 펠리페는 아이를 꽉 끌어안으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이젠 괜찮단다.’ 그의 가슴에서 느껴지는 온기, 새 생명의 따듯함이 그의 온몸으로 번져갔다. 너무나도 오랜만에 느끼는, 오랫동안 느끼질 못했던 그 감각에 펠리페는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펠리페는 눈을 떴다. 그는 깊게 심호흡을 한 번 하더니 케리스에게 다가갔다. 코와 입에서는 피가 흐르고 눈가와 광대는 잔뜩 멍이 든 채 힘겹게 숨을 고르고 있었다. 그 모습에 다시금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누르며 펠리페가 말했다.

“자네 괜찮나?”

 그녀는 무어라 대답하려 했으나 대신 피 섞인 기침이 튀어나왔다. 그녀는 떠는 손으로 입가를 닦고는 엄지를 들어올렸다. 그는 한쪽 무릎을 꿇더니 케리스의 품에 아이를 안겼다.

“가만히 있게.”

 그리고 그는 토비아스를 향해 걸어갔다. 토비아스는 옆구리와 입에서 피를 주룩 흘리며 바닥에 앉아 있었는데 펠리페가 다가오는 것을 보자 그는 기겁하여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죄여오는 두려움에 고통이 더 심해지니 속도는 달팽이가 기어가는 수준이었다.
 어느새 펠리페는 토비아스의 코앞에 서 있었다. 그는 말없이 토비아스의 가슴을 발로 내려찍고는 단검이 박힌 부분을 짓밟았다. 토비아스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비명을 내질렀으나 그를 돕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는 동안 펠리페는 주변을 훑어보았다. 공포에 질려 마비된 사람들, 피투성이가 된 벽과 바닥, 산산이 조각난 탁자들, 그리고 여전히 타오르는 벽난로. 펠리페는 난로에 시선을 두고는 씩 미소 지었다.
 그가 갑자기 발을 떼더니 이윽고 토비아스의 팔을 붙들고는 질질 끌었다. 그러자 토비아스가 발버둥 쳤다.

“그만, 그만둬라! 그만두라고! 살려줘!”

 그의 발버둥이 목숨 구걸로 이어졌으나 펠리페는 아무 소리도 못 들은 듯이 행동했다. 어느새 펠리페는 벽난로 앞에 섰다. 그는 맹렬히 타오르는 불길을 한 번 뚫어지도록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토비아스에게로 눈을 돌렸다. 그는 자신에게 벌어질 끔찍한 결과에 대한 상상과 이어지는 두려움에 반쯤 미쳐 아무렇게나 말을 내뱉고 있었다.

“내 동료들이, 널, 널 가만두지 않을 거다! 많은 전우들이 이 근방에 있어! 그들이 달려올 거다! 날 도울 거라고! 풀어주지 않으면 그 대가를 처절하게 치를 거란 말이다! 이 빌어먹을…….”

 그때 펠리페가 입을 열었다.

“너는…….”

 펠리페는 말을 끌었다. 머리끝까지 뻗친 분노에 이성마저 조금씩 사라진 탓에 내뱉을 말을 고르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그는 느릿하게나마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너는 아이를 건드려서는 안 됐어.”
“제발, 제발, 살려…….”
“똑같은 고통을 맛보라고? 끔찍한 슬픔을 보라고?”

 펠리페는 토비아스의 멱살을 잡고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리고 속삭였다.

“너만 그런 고통을 겪은 줄 알아?”

 펠리페는 토비아스의 멱살을 잡더니 난로 안으로 힘껏 던졌다. 토비아스는 사람이 낼 수 있는 가장 끔찍한 비명을 내지르며 팔다리를 마구 휘저었다.

“아악! 으아아악!”

 토비아스는 어떻게든 벗어나려 애를 썼으나 펠리페는 그런 토비아스의 등을 발로 강하게 내려치고는 그대로 힘을 주어 짓눌렀다. 토비아스의 저항은 의미를 잃어버렸다. 시간이 지나자 토비아스의 애처로운 몸짓이 그의 비명과 함께 점점 잦아들었다. 하지만 펠리페는 토비아스의 비명이 멈추고 나서도 한참 동안 그를 짓밟으며 분노를 토해냈다. 그를 말린 사람은 어느새 일어나 다가온 케리스였다.

“그만 하세요, 펠리페 님. 죽었어요.”

 그제야 펠리페는 발을 떼었다. 그러자 갑작스레 잊고 있었던 고통이 몰아쳤다. 그는 고통을 참아내려고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몸을 숙였다. 잠깐의 침묵 끝에 한결 편해진 표정으로 그는 다시 몸을 일으키고는 케리스를 돌아보았다. 케리스는 아이를 토닥이며 물었다.

“괜찮으세요?”
“난 괜찮아. 자네는?”
“아무래도 코가 부러진 거 같아요.”

 그녀는 힘겹게 미소 지었다.

“그래도 죽지는 않아서 다행이에요.”

 그녀는 다시 흐르는 코피를 닦으며 뒤돌았다.

“빨리 여기서 나가죠. 여기 오래 있어 봐야 좋을 게 없을 거 같네요.”

 그녀는 턱짓으로 주변 사람들을 가리켰다. 그들은 여전히 공포에 질린 모습이었으나 그 두려움이 사라지기까지는 그다지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아 보였다. 펠리페는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나가 있게.”

 케리스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종종걸음으로 여관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펠리페는 자신의 칼이 박힌 채 바닥에 누워있는 시체에 다가갔다. 펠리페는 잠깐 그 생기 잃은 두 눈을 내려다보더니 이내 한쪽 무릎을 꿇고는 그 눈꺼풀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그는 일어서며 칼을 뽑았다. 그러자 옆구리에서 극심한 통증이 느껴졌다. 아까 토비아스에게 맞은 그 부위였다. 그는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옆구리를 잡고 여관 바깥으로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바깥에 나오니 밝은 빛이 쏟아졌고 펠리페는 반사적으로 눈을 가렸다. 새벽은 이미 지나 해가 하늘 위에 걸린 채였다. 빛을 막는 손가락 틈 사이로 케리스가 말을 이끌고 다가왔다.

“너무 많이 늦었어요. 당장 출발하죠. 패거리가 더 있을 수도 있잖아요?”
“그렇지……. 으윽.”

 또다시 옆구리에 통증을 느끼자 펠리페는 얼굴을 찌푸리며 옆구리에 손을 댔다. 케리스는 걱정하는 얼굴로 물었다.

“표정이 안 좋아 보이네요. 정말로 괜찮나요? 아닌 거 같은데.”
“괜찮다니까.”

 펠리페는 케리스를 물리치고는 거친 숨을 내뱉으며 말에 올라탔다. 그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멈추지를 않았음에도 그는 최대한 내색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출발하지.”
“저만 따라오세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케리스가 탄 말이 앞으로 내달렸고 펠리페가 뒤따랐다. 이제야 두 사람은 뤼텐베르크를 향해 나아갈 수 있었다.

 시간이 흘러 서녘이 조금씩 붉어지고 있음에도 여전히 뤼텐베르크는커녕 마중 나온 사람들조차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땅에 즐비한 시체와 이를 뜯어먹는 까마귀 떼뿐, 길은 여전히 그 끝을 알 수 없었다. 그러기를 한참, 결국 참다못한 펠리페가 케리스를 멈춰 세우더니 짜증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길을 잘못 든 건가?”
“아닐 걸요.”
“‘걸요’?”
“길은 맞게 가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다만…….”

 그녀가 말을 끊자 펠리페는 재촉하듯 물었다.

“다만?”
“조금……. 잠깐만, 들리세요?”

 그 말에 펠리페는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소리에 집중했다. 까마귀 울음, 새들의 날갯짓, 산들바람과 이에 흔들리는 나뭇가지, 그리고 희미하게 들려오는 말발굽 소리. 펠리페는 놀란 표정을 드러내며 말했다.

“말발굽 소리?”
“추격당하는 모양이네요. 빨리 여기서 벗어나죠.”

 케리스는 주저 없이 곧바로 박차를 가했고 펠리페도 뒤를 따랐다. 바람을 가르고 도망치면서 케리스가 외쳤다.

“놈들을 따돌려보려고 했는데 실패했네요! 차라리 그냥 뤼텐베르크로 달릴 걸 그랬어요!”
“내 말이!”

 그러던 그들의 뒤에서 아까 들었던 그 말발굽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뒤를 돌아보니 서너 명 정도의 기병들이 둘을 쫓아오고 있었다. 각자 손에는 쇠뇌나 창 따위를 들고 어깨나 투구 등에는 노란색과 검은색 천을 교차해 묶어 자신들의 소속을 드러내고 있었다.
 
“라우레니엔군이다!”

 펠리페는 그렇게 외치며 다시 앞을 보았다.

“대체 뤼텐베르크는 언제 도착하나!”
“지금쯤이면 슬슬 마중 나온 사람들이 보일 텐데!”

 그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기수가 손에 든 쇠뇌로 자신을 겨냥하는 모습이, 쇠뇌 위에서 번쩍이는 화살촉이 보였다. 펠리페가 다시 외쳤다.

“엎드려!”

 그러자 케리스는 재빨리 카를을 바투 끌어안으며 몸을 낮췄다. 펠리페는 그러는 대신 갈지자로 이리저리 말을 몰았고 기병은 그를 따라 쇠뇌를 겨눴다. 그러던 순간 기수가 쇠뇌를 쏘았다. 기수의 손가락이 움직이는 것을 본 펠리페는 재빨리 허벅지에 힘을 실으며 상체를 왼쪽으로 꺾듯이 숙였다. 그의 몸이 있던 자리를 화살이 무시무시한 소리를 울리며 훑고 지나갔다.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추격자들은 여럿이었고 날아오는 화살도 여럿이었다. 펠리페는 계속해서 몸을 이리저리 흔들었다.

“케리스! 대체 언제까지 이래야 하나!”
“조금만, 조금만 더요!”

 케리스는 아이와 앞을 번갈아 돌아보면서 외쳤다. 펠리페는 이를 갈며 고개를 돌렸다. 추격자들은 어느새 그의 옆에 다다라 쇠뇌를 들이밀고 있었다. 펠리페는 기합을 내지르며 팔을 위로 휘둘러 쇠뇌를 쳐냈다. 충격에 기수가 쇠뇌를 떨어트리자 펠리페는 다시 주먹으로 기수의 얼굴을 갈겼다. 충격에 기수가 뒤로 고꾸라지며 낙마했다. 고개를 반대로 돌리니 또 다른 추격자가 칼을 손에 쥔 채 옆으로 다가오는 게 보였다. 그는 펠리페를 노려보더니 가로로 칼을 휘둘렀다. 펠리페는 뒤로 드러누워 칼날을 피하고는 다시 몸을 일으켰다. 기수가 반대로 칼을 휘두르려고 하는 순간 펠리페는 손을 뻗어 칼날을 붙잡고 동시에 허리춤에서 칼을 뽑으며 휘둘렀다.

“아악!”

 기수가 소리를 지르며 칼을 놓치며 멀어졌다. 펠리페는 피가 흐르는 칼을 내던졌다. 손이 쓰라렸으나 그는 내색하지 않았다. 앞을 보니 케리스는 어느새 저 멀리 조그맣게 보일 정도로 멀리 가 있었고 그 너머에는 회색 성벽이 흐릿하게 보였다. 뤼텐베르크가 저 멀리 아른거렸다. 펠리페는 박차를 가해 속력을 높였다. 그리고 그 순간 뒤에서 쇠뇌 줄이 소리를 내었고 화살은 그대로 펠리페의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갔다.

“큭!”

 펠리페는 피가 흐르는 목덜미를 손으로 짚었다. 아직 추격자들은 둘이나 더 있었고 둘 다 펠리페를 죽일 듯 무시무시한 눈빛을 흘렸다. 펠리페는 다시 앞을 보았다. 뒤를 돌아볼 때가 아니었다.

“저 개 같은 새끼 참 끈질기네!”

 뒤에서 추격자들이 소리를 질러댔다. 펠리페는 신경 쓰지 않고 앞만 보고 말을 몰았다. 케리스가 좀 더 가까워져 크게 외치면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케리스!”
“조금만 기다려 봐요!”
 
 그러자 뒤에서 추격자가 기합을 내질렀다. 펠리페는 또다시 반사적으로 몸을 비틀어 뒤에서 튀어나온 칼날을 피하고는 다시 외쳤다.

“뭘 자꾸 기다리라는 거야!”

 그때 추격자들이 외쳤다.

“말을 쏴버려!”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말이 고통스레 울더니 펠리페의 눈앞에 갑자기 흙더미가 나타났다. 화살을 맞은 말이 바닥에 고꾸라지면서 펠리페를 바닥에 내친 것이었다. 돌멩이 가득한 흙바닥을 구르며 온몸이 으스러지듯이 고통스러웠다. 펠리페는 입에서 신음을 흘렸다. 앞으로 지나갔던 추격자들이 펠리페를 향해 되돌아왔다. 한 명이 외쳤다.

“잡았다!”

 펠리페는 고통을 참으며 눈을 떴다. 그의 눈에는 해를 등에 지고 그림자로 모습을 가린 기병 셋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 자식이 토비아스를 그렇게 만든 놈이야.”
“내 팔목도 그었어, 이 새끼가!”

 그 말에는 명백한 증오가 섞여 있었다. 펠리페는 떨어진 칼에 팔을 뻗었으나 칼은 너무 멀리 있었고 고통은 커다랬다. 추격자들은 그런 펠리페를 비웃으며 저마다 한 마디씩 내뱉었다.

“이 새끼도 토비아스와 똑같이 만들어버리자고.”
“모자는 내가 가질래.”
“그보다 그 애 딸린 갈보 년은? 도망간 모양인데.”
“그냥 둬. 시간 없어.”
“아까워라. 빨간 머리 쥐어뜯으며 박고 싶었는데.”

 추격자 하나가 말에서 내리더니 밧줄을 쥐고 펠리페에게 다가왔다. 그는 펠리페의 다리를 모으고는 밧줄을 걸기 시작했다. 펠리페는 어떻게든 벗어나려고 했으나 힘이 나지 않았다. 이젠 끝이라고 직감한 그는 포기하고 눈을 감았다.
 그때였다. 멀리서 케리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손 떼시지!”

 그 말에 추격자들이 모두 고개를 돌렸다. 모두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허둥대며 고삐를 잡아당겼다. 하지만 곧바로 총성이 울리고 화살이 날아들었다. 조금 전까지 의기양양하던 추격자들은 총알과 화살의 바람 속에서 허우적댔다. 그 와중에 펠리페는 자기 발을 묶으려던 기수가 도망치려고 하자 최대한 힘을 주어 다리를 가슴 쪽으로 당기고는 그를 향해 뻗었다. 그가 짧게 소리를 지르며 멈춰 섰다. 그 순간 그가 고개를 오른쪽으로 확 꺾더니 머리에서 피를 뿜으며 그대로 고꾸라졌다.

“펠리페 님!”

 곧이어 케리스가 병사들을 대동하고는 펠리페를 부르며 나타났다. 그녀는 펠리페를 내려다보더니 빙그레 웃었다.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기다리라고.”
“기다리다가, 죽을 뻔, 했잖아…….”

 케리스는 다시 미소를 짓고는 고개를 돌려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타난 사람은 다름 아닌 트리스탄이었다. 그는 케리스와 몇 마디를 더 나누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펠리페를 부축하며 일으켰다.

“가시죠,”

 펠리페가 고통에 신음하자 트리스탄은 펠리페의 팔을 자기 어깨에 두르며 무덤덤하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낙마해서 바닥에 굴렀으니 뼈가 어긋나거나 부러졌을 수도 있겠군요. 그래도 다행입니다. 목이 부러져서 찍소리도 못하고 뒈지진 않았으니. 단단하신 분이네.”

 펠리페는 무례하기 짝이 없는 그의 말에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그럴 힘도 없었다. 트리스탄은 펠리페를 수레 위에 태우더니 이내 케리스처럼 빙그레 미소 지으며 말했다.

“뤼텐베르크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펠리페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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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즈베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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