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에 해당되는 글 5건

  1. 2018.01.18 악마 추적자: 마라칸트의 악마
  2. 2017.06.17 부활 2
  3. 2016.03.23 창부와 반역자의 이야기 1
  4. 2014.10.26 혼의 아들과 꿈의 딸 上 2
  5. 2013.03.10 혼백가담(魂魄家譚) 1

악마 추적자: 마라칸트의 악마
The Devil Seeker: Devil in Marakand


 마라칸트. 파르샨 북쪽 끝 유일한 통행로인 샛별 관문을 지키는 유서 깊은 도시. 그런 마라칸트에서도 쉽게 볼 수 없는 광경이 저잣거리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도로 위를 남쪽 사막에서 온 기수가 말을 탄 채로 뒤에 마족을 쇠사슬에 묶고 질질 끌고 다니는, 그런 광경이었다.
 그 기수, 태양빛으로 세례를 받은 것만 같은 구릿빛 피부, 짙게 난 수염, 그리고 한 줌의 분노와 한 줌의 증오로 가득 찬 두 눈동자, 악명 높은 악마 추적자 ‘말릭 알 아샤라프’는 엉망이 된 고위 마족을 끌고 태수 관저로 향했다. 주변에는 마라칸트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그와 그가 잡아온 마족을 보려고 구름처럼 몰려들었는데, 남녀노소귀천을 가리지 않고 모두 놀란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마족이 관문 바깥에 설친다는 말을 듣기는 했어도 살아있는 마족을 직접 본 적은 없었으니 말이다. 그러는 동안 말릭은 어느새 태수 관저 앞 출입구에 도달했다. 하얀 아치형 입구와 그 뒤에 자리 잡은 커다란 저택은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훌륭한 요새이자 동시에 아름다운 기념비였다.
 관저 앞에는 태수와 가족, 병사, 관료, 토착 귀족들을 비롯한 여러 권세가들이 모두 마족을 보러 와 있었다. 말릭은 가볍게 안장에서 내려왔다. 그러고는 안장에 묶었던 쇠사슬을 풀고 이를 손에 든 채 마족의 뒤로 향했다. 그는 발로 마족의 등을 짓밟아 바닥에 처박고는 머리카락을 잡아당겨 머리를 들어올렸다. 마족의 얼굴은 멍과 상처로 가득했고 사람들은 저잣거리의 그들처럼 똑같이 놀라고 또 신기해했다. 예외가 있다면 육중한 갑옷차림의 병사들뿐. 태수가 마족의 얼굴을 잘 살펴보고는 말릭을 올려다보았다.

“다른 악마는 못 봤는가?”

 말릭은 고개를 저었다.

“악마는 없었다. 이런 마족놈들이 전부였어.”

 태수는 한숨을 깊게 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리가 찾는 악마는 아니구려. 하지만 우리가 특정한 악마를 지칭해서 잡아달라고 한 적은 없으니…….”

 그러더니 태수는 뒤돌아 일어서며 말했다.

“오늘은 기쁜 날이오. 남쪽에서 온 전사가 우리를 대신해 마족을 척살하고 그 수장 중 하나를 잡아왔으니. 이 전사를 위해 연회장을 열고 잔치를 벌이세. 온 마라칸트의 백성들도 승리의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

 밤이 되었다. 말릭을 위한 잔치는 어느새 귀족들의 잔치로 변해있었다. 많은 귀족들이 홀로 마족을 잡아온 ‘영웅’에게 다가와 인사를 건네며 말을 걸었으나, 이윽고 이 사막 유목민의 생기라고는 없을뿐더러 마법오염의 흔적이 남은 두 눈동자를 보고는 돌아가 버렸고, 때문에 본래의 주인공은 잊히고 말았다. 하지만 말릭에겐 오히려 지금이 더 나았다.
 그는 홀로 난로 앞에 앉아 타오르는 불을 바라보고 있었다. 뜨겁게 타오르는 불을 당최 남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무표정으로, 하인들이 술과 음식을 담은 바구니를 한 아름 안고 와서 말릭 옆에 두고 가는 것도 모를 정도로 말이다. 말릭 그 자신의 버릇이었으나 이를 알 리가 없는 사람들은 그에 대해 부정적으로 주절거렸다.
 그때 그에게 젊은 하녀 하나가 다가왔다. 하녀는 말릭을 여기저기 살펴보더니 뒤를 돌아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시종들을 대동한 지체 높은 집안의 여성 하나가 악명 높은 악마 살해자에게 다가왔다. 말릭은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악마와 마족을 잡아다 죽이는 일 외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는 추적자조차도 고개를 두어 번 정도는 힐끗 돌아볼 수밖에 없는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또렷한 이목구비와 어쩌다 한 번 보았던 버찌와 비슷한 색깔의 붉은 뺨, 그리고 그 모든 아름다움을 가리는 깊은 어둠이 인상적이었다. 여인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

“당신이 그 유명한 악마 추적자이신가요?”

 말릭은 다시 난로로 시선을 향했다.

“나는 파르샨 말을 모른다.”

 유창한 파르샨 말이었다. 그러자 여인이 다시 되물었다.

“제 아버님하고는 잘만 얘기하셨잖아요.”

 말릭은 대답하지 않았다. 여인은 한숨을 쉬더니 옆에 있던 말릭과 같은 민족의 소녀를 돌아보았다. 소녀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맑은 목소리로 여인이 했던 말을 반복했다.

“아가씨께서 말씀하시길, 선생께서 그 유명한 악마 추적자이시냐고 여쭈십니다.”

 말릭은 오랫동안 쓰지도 듣지도 않은 고향의 말을 하는 유목민 소녀를 돌아보았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치자 소녀는 움찔하며 자기가 모시는 아가씨의 등 뒤로 숨었다. 말릭은 다시 고개를 홱 돌리며 차갑게 대답했다.

“고향의 말도 잊어버렸다.”

 유창한 고향의 말이었다. 소녀가 말릭의 말을 전하자 여인은 다시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들어 말릭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선생께서 관심이 있으실만한 정보를 제가 갖고 있답니다. ‘이블리스’에 관한 거여요.”

 이블리스. 그 단어가 나오자마자 말릭은 고개를 돌렸다. 눈동자에는 지금까지의 공허함은 사라지고, 타오르는 증오와 복수심으로 번개처럼 번쩍였다. 말릭이 물었다.

“이블리스를 알고 있다?”

 여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어디로 향했는지 알고 있답니다.”

 말릭은 몸을 돌려 여인을 마주했다. 지금껏 그가 이렇게 나온 적은 없었다. 이블리스에 대한 것을 제외하면. 그러자 여인은 손을 내저어 하녀들을 물러가게 했다. 단 둘이 남게 되자 여인이 말했다.

“저는 ‘나스린 가빈’이라고 해요. 태수이신 아버님은 아실 테고, 제 오라버니는 이 도시의 장군인 ‘바흐람 가빈’이고요.”

 마라칸트 태수의 딸이라면 공주나 다름없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금껏 그렇듯 말릭은 그런 것에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그가 신경 쓰는 것은 눈앞의 여인이 알고 있다는 이블리스에 관한 것뿐이었다.

“네가 누군지는 중요하지 않아.”
“네, 알아요. 제가 생각했던 그대로 대답하시네요. 추적자 선생께서 어떤 사람인지는 저도 많이 들었답니다. 의뢰인으로서 의뢰를 맡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는 알아야 하니까요.”

 나스린에게는 분위기를 바꾸려는 시도였겠지만, 말릭은 그 어떤 긍정적인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언짢은 표정으로 변해갔다. 나스린은 헛기침을 하며 분위기를 한 번 환기시키고는 다시 말릭을 보았다.

“제겐 약혼자가 있어요. 아니, 있었다가 맞겠죠. 지금은 실종됐으니까. 루스탐 바베디. 그이의 이름이에요.”
“……바베디?”
“네. 바베디. 마라칸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던 그 가문이었죠. 지금은……. 다른 이유로 알고 있겠지만.”

 나스린의 말뜻은 말릭도 알고 있었다. 한 해 전 가문 회의를 목적으로 모인 마라칸트의 토착 귀족인 바베디 가문 사람들이 한순간에 몰살당하고 대저택은 모조리 불타 사라졌다는 ‘바베디 가문의 참극’을 말하는 것이리라.

“그럼 죽었겠군.”

 나스린은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큰 확신이 드러나 있었다.

“아뇨. 루스탐의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어요. 거기 있던 모든 시체를 제가 다 찾아봤어요. 분명 루스탐은 없었어요.”

 말릭은 나스린의 눈을 뚫어지도록 쳐다보았다. 그녀의 심연처럼 어두운 눈이 반짝였다. 말릭은 그 눈빛에서 거짓말을 간파하지 못했다. 오히려 커다란 확신과 간절함을 느낄 수 있었다.

“제 약혼자를, 루스탐 바베디를 찾아주세요. 최소한, 시체만이라도…….”

 나스린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더니 울먹이는 소리가 대신 들려왔다. 그녀가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훔치자 말릭은 다시 난로를 향해 몸을 돌렸다. 여자의 눈물은 말릭에게도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었다. 그는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생각해보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그때였다. 뒤에서 웬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말릭과 나스린 두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을 때, 그 목소리가 누구인지 둘 다 금세 알아챌 수 있었다. 낮에 태수 옆에 서 있던, 얼굴에 상처가 난 청년이었다.

“아, 오라버니.”

 오라버니라는 말에 말릭은 나스린을 한 번 흘겨보았다. 과연. 이렇게 보니 코가 약간 닮기도 했다. 나스린이 말한 ‘바흐람 가빈’이 분명했다.

“나스린. 여기 있었구나.”

 바흐람은 그 짙은 수염과 남성미 넘치는 얼굴과는 어울리지 않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여동생에게 말했다. 나스린이 눈가를 훔치자 바흐람은 한쪽 무릎을 꿇으며 앉은 여동생과 눈높이를 맞췄다.

“무언가 슬픈 일이 있었느냐?”
“아니여요, 오라버니. 그냥, 옛날 생각을 해서.”

 바흐람은 옛날 생각이라는 말에 자신도 조금 슬퍼진 모양이었다. 그는 억지로 웃으며 나스린의 어깨에 손을 툭 얹었다.

“밤이 늦었으니 이만 들어가거라. 어머님께서 항상 네 걱정을 하신단다.”
“네, 오라버니.”

 나스린이 힘겹게 몸을 일으키자 바흐람의 수행원들이 그녀를 부축하며 방으로 데려갔다. 바흐람은 그녀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계속 바라보고 나서야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바흐람은 말릭을 힐끗 쳐다보고는 방금까지 나스린이 앉아있던 자리에 앉았다.

“혹시 내 누이가 자네에게 무슨 의뢰를 했는가?”

 말릭은 바흐람을 위아래로 한 번 훑어보았다. 바흐람의 얼굴은 자신과 몇 가지 비슷한 부분이 있었다. 턱 선을 따라 짙게 난 수염과 검은색과 갈색의 경계에 선 눈동자 색, 거무스름한 피부와 얼굴에 난 상처까지. 물론 상처의 위치는 달랐다. 바흐람은 오른쪽 뺨과 콧잔등에 크게 흉터가 나 있었다. 수염은 이를 가리기 위함인 모양이었으나 짙고 짙은 수염조차 흉터를 가리지 못할 정도로 커다란 상처였음을 말릭은 짐작할 수 있었다. 말릭은 그렇게 바흐람을 찬찬히 뜯어보고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묻잖나. 내 누이가 자네에게 의뢰를 맡겼느냐고.”

 난로 앞에는 미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바흐람은 대답을 재촉하듯 손가락을 자기 허벅지에 대고 두드렸다. 말릭은 귀찮다는 듯이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

“루스탐 바베디라는 사람을 찾아달라고 했소.”

 바흐람의 표정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그는 무어라 말을 하려다 다시 입을 닫았다. 그는 한숨을 쉬며 머리를 손으로 쓸어 올렸다. 그렇게 한참 침묵이 이어졌다. 그 침묵을 먼저 깬 사람은 당연히 바흐람이었다.

“그 의뢰를 멈추시오. 누이에게 찾을 수가 없었다고, 그렇게 말해주시오.”
“어째서?”

 말릭은 건조하게 대답했다.

“누이를 위해서요. 부탁이니,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들어주겠소. 돈, 여자, 하여튼 내가 할 수 있는 건 전부 주겠소.”

 말릭은 몸을 돌려 바흐람을 향했다. 그는 무표정하게, 그러나 위압감 넘치는 그의 상처투성이 얼굴을 바흐람에게 들이밀며 작게 중얼거렸다.

“내가 그따위 것들을 바라는 것 같아?”

 그러고는 다시 똑바로 앉았다.

“안타깝지만 네 누이가 내게 약속한 보상이 훨씬 더 끌리는데. 당신의 의뢰는 받아들일 수 없어.”
“……그렇담 당신을 막을 수밖에.”

 바흐람이 몸을 일으켰다. 그는 몸을 툭툭 털고는 말릭을 노려보며 경고하듯 말했다.

“작년에 그 일이 있은 직후 내 누이는 슬픔으로 나날을 보냈소. 슬픔의 신이 나스린의 생기마저 가져가버렸지. 지금 그 아이는 유리와도 같소. 언제 깨질지 모른다고. 당신 같은 이방인이 누이를 깨트리도록 두지 않겠소. 기어이 사랑하는 나의 누이동생을 부수겠다면, 내 경고컨대, 그대가 어떤 사람이고 얼마나 강하든 간에 마라칸트 전부의 분노는 피하지 못할 것이외다.”

***

 날이 새자 말릭은 바베디 가문의 저택이 있던 곳으로 향했다. 가는 동안 그는 안장에 앉은 채 새벽녘 마라칸트의 거리를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새벽이라 그런지 한산하기 짝이 없었고 지나가는 사람도 바쁘게 돌아다니기만 하지 주변에 신경을 쓰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주변을 둘러보던 끝에 말릭은 바베디 가문의 저택 앞에 도착했다. 말 그대로 커다란 폐허가 그를 반겼다. 한때 하얗게 빛났을 벽은 새카맣게 그을렸고 수많은 대들보는 바닥에 처박혀 재와 먼지만 쌓여 있었다. 몰락하기 전 바베디 가문의 모습을 본 적이 없는 말릭으로서는 이 폐허에서 사치스러웠던 바베디 가문의 영화로움을 떠올릴 수가 없었다.
 말릭이 안장에서 내려오자, 앞에서 잡담을 하던 병사들 셋이 소리를 듣고 일어섰다. 말릭이 다가가자 그들이 다가왔다.

“거기, 정지! 여긴 출입금지 구역입니다. 돌아가십시오.”

 그러자 말릭은 얼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난 여기를 조사할 권리가 있어. 여기 태수의 딸에게 의뢰를 받았단 말이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희도 바흐람 도련님께 명령을 받았습니다.”

 바흐람. 말릭은 소리를 내며 표정을 구겼다. 자기를 막겠다는 말을 그대로 지킬 정도로 결단력 있는 사람이었을 줄은 말릭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동안 병사들이 서로 소곤거렸다.

“그런 말을 해도 되나?”
“몰라. 일단 저 이방인을 막아야지.”

 그들의 속닥거림을 충분히 들은 말릭은 고개를 좌우로 천천히 돌리며 몸을 풀었다. 그러자 병사들이 긴장한 듯이 말했다.

“죄송하지만, 나가시죠.”
“지시를 따르지 않으면 무력을 써도 좋다고 도련님께서 지시하셨습니다.”

 그들이 칼자루를 꽉 쥐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말릭은 병사들을 밀치고 안으로 들어서려 했다.

“난 여기 들어가겠어.”
“안 된다니까!”

 병사 하나가 말릭의 어깨를 향해 손을 뻗었다. 말릭은 재빠르게 반응했다. 병사의 손이 어깨에 닿는 순간 말릭은 왼쪽으로 뒤돌며 팔을 잡고는 그대로 비틀었다. 병사가 소리를 내자 말릭은 그 병사를 바닥에 메쳤다.

“이 자식이!”

 병사들이 칼을 뽑았다. 그러자 말릭도 자신의 오래된 칼을 뽑아들었다. 칼날은 바깥 공기를 마시자 부르르 떨며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예리하게 날 선 칼날 주변은 마치 더운 봄이나 여름날의 거리처럼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뭐, 뭐야 저거!”
“화염 마법이 걸린 칼이야!”

 갈색 수염을 기른 병사는 마법에 어느 정도 조예가 있는 모양이었다. 그들이 당황하여 허둥지둥하는 동안 말릭이 먼저 움직였다. 그는 병사에게 그대로 달려들어 어깨로 밀치고, 칼을 세로로 꽉 쥔 갈색 수염의 병사를 향해 칼을 휘둘렀다. 그가 칼을 놓치자 말릭은 그대로 왼손에 마력을 모아 병사의 가슴을 향해 내질렀다. 그러자 병사는 투석기에서 발사된 돌처럼 날아가 버렸다.
 말릭의 어깨에 밀쳐져 바닥에 처박힌 병사가 일어나려는 순간, 그는 어느새 자기 목덜미에 타오르는 칼날이 자리 잡은 것을 보고는 멈췄다. 그는 두려움을 감추지 못한 채 시무드 사막 출신의 유목민 남자가 보여주는 살기에 눌려버리고 말았다. 말릭은 고개를 한 번 까닥이더니 메마른 목소리로 병사를 보며 말했다.

“바흐람에게 안부 전하게.”

 그리고 그는 병사의 머리를 강하게 짓밟았다.
 방해꾼을 적당히 처리한 말릭은 칼을 집어넣었다. 그는 숨을 토해내며 어깨와 목을 풀었다. 관절에서 뚝 소리가 났다. 그는 자기도 이제 늙었다고 한탄하면서 동시에 아직 마흔도 되지 않았음을 생각했다. 몸을 다 푼 그는 폐허의 중심을 향해 걸어 들어갔다.
 새까맣게 타서 쓰러진 기둥과 벽, 재만 남은 가구, 폐허 속에서 미처 건지지 못한 가재도구들, 모든 것이 엉망이었다. 보기만 해서는 그저 커다란 불이 모든 것을 태워버렸다는 사실 외에는 알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꽤 커다란 불인 것은 확실했다. 마라칸트 같은 중요하고 또 오래된 도시라면 화재대비도 제대로 해놓았을 텐데, 이렇게 화마가 모든 것을 집어삼킬 때까지 불을 끄지 못한 것을 보면 말이다. 외진 곳에 있어서 제때 끄지 못한 것일까, 말릭은 생각했다. 어쩌면 그것이 다행이었을 수도 있다. 저택이 번화가 한가운데 있었더라면 ‘바베디 가문의 참극’이 아니라 ‘마라칸트 대화재’로 기록됐을 테니까.
 재앙의 한가운데 선 말릭은 약탈자처럼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의 눈빛 사이로 깨진 사금파리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자기 손바닥만 한 크기의 조각이었다. 그는 사금파리를 주워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처음 데어드리와 만났을 때, 그녀가 보여준 것이 있었다.

“모든 것은 눈과 귀가 있어. 설령 살아있는 게 아닌 물건이라고 해도.”

 그러더니 그녀는 말릭의 칼을 들고 눈을 감았다. 그러기를 한참, 그녀가 칼을 놓고 말한 것은 말릭이 말한 적 없는 과거, 그리고 그가 어째서 피투성이로 시체 사이에서 죽어가고 있었는지에 대해서였다.
 사반세기 가까이 지난 지금, 말릭은 그녀에게서 배운 그 능력을 쓰면서 재미를 많이도 봤었다. 지금도 이 조각이, 작년의 그 참극을 말해주지 않을까 기대하며 그는 눈을 감았다.

***

 수많은 장면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뜨거운 열기, 사방이 불길이었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두 도망치기에 바빴다. 소리가 들렸다. 사람이 아닌 무언가가 내는 끔찍한 소리. 수많은 비명의 사이를 비집고 들렸다.
 그리고 울리는 야수의 포효. 멀리서 보이는 악몽의 근원.
 그때였다. 장면이 방해를 받았다. 바베디 가문의 저택에서 일어날 리가 없는 장면이 비집고 들어왔다.

 그녀가 보였다.
 차가운 보랏빛 눈동자를 빛내며 말릭에게 안기는 그녀가.

***

 말릭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조각을 떨어트렸다. 그의 숨은 방금까지 뜀박질한 전령처럼 거칠었다. 그는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식은땀을 훑어내며 중얼거렸다.

“또 집중이 흐트러졌나 보군…….”

 말릭은 마음을 진정시키며 환상에서 본 것들을 정리했다. 커다란 화재, 도망치는 사람들의 비명, 야수 같은 포효, 그리고 흐릿하게 비친 그 원흉의 윤곽. 이 사건이 평범한 화재 사고가 아니었음은 분명했다. 하지만 이 짧고 또 잡념 때문에 흐트러진 환시로는 루스탐에 관한 정보를 얻을 수 없었다. 그는 가방에서 루스탐의 초상화를 꺼내 펼쳐보았다. 짧고 단정한 머리, 넓은 이마, 큰 눈, 두툼한 입술. 환상에서 이런 얼굴을 한 사람은 없었다.
 말릭은 안장 위에 오르며 다음에 갈 곳을 생각했다. 그러면서 그는 무의식적으로 박차를 가했고 말은 생각에 잠긴 말릭을 데리고 정처 없이 걷기 시작했다. 그가 떠나고 나자 기절한 병사들이 소리를 내며 정신을 차렸다.

***

 어느새 석양이 지고 있었지만 말릭은 여전히 감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잠깐 머리라도 식힐 겸 해서 눈앞에 있는 술집으로 향했다. 마라칸트 시내의 향락가가 아닌, 여관을 겸하는 허름한 곳이었다. 안에 들어선 말릭은 주변을 한번 훑어보고는 주인을 향해 다가갔다. 머리가 벗겨진 주인장은 험악한 얼굴의 시무드인 남성을 보고는 긴장한 듯 침을 삼켰다.

“무엇으로 드릴까요?”

 말릭은 대답 없이 의자에 앉았다. 그러고는 금화를 꺼내 탁자에 올렸다.

“추천해주시오.”

 그러자 노인은 금화에 새겨진 황제의 얼굴을 손으로 문지르며 생각하더니, 손을 탁 치고는 창고로 향했다. 이윽고 노인이 나왔을 때 그의 손에는 포도주가 들려 있었다.

“데일스산 포도주입니다. 구하기 어려운 물건이라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안 꺼내놓고 있었습니다만, 그 금화에 맞는 가격은 될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노인은 포도주에 어울리지 않는 나무잔에다가 술을 따라주었다. 말릭은 붉은 포도주를 한참 내려다보았다. 왜 하필 데일스일까, 그는 포도주에 비친 자기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얼굴은 어느새 데어드리의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그는 헛기침을 한 번 하더니 술에 떠오른 얼굴을 없애버리려는 듯 단숨에 술을 들이켰다. 목을 타고 흐르는 취기를 느끼던 그는 잔을 탁자에 두며 노인을 보았다.

“물어볼 게 있소.”
“예, 손님.”
“루스탐 바베디.”
 
 순간 정적이 흘렀다. 술집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동시에 말릭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다들 자기 귀를 의심하고 있었다.

“죄송, 합니다만, 누구…….”
“루스탐. 바베디.”

 말릭은 이름을 딱딱 끊어 말하며 위협적으로 말했다.

“작년의 그 참극에서 유일하게 시체가 없었다는 그 사람에 관해서 물었다.”

 기나긴 침묵이 이어졌다. 모두가 이방인의 말을 의심하며 술잔을 손에서 놓았다. 그런 분위기에도 말릭은 아랑곳하지 않고 노인을 노려보았다. 노인은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처음 듣는 사람입니다만…….”

 누가 봐도 명백한 거짓말이었다.

“거짓말 말게.”

 그러자 노인은 눈을 감고 침을 삼켰다. 그리고 눈을 뜨며 말릭에게 사정하듯이 말했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분명 모르는 사람입니다. 작년까지만 해도 바베디 가문은 융성했고 유명했던 건 사실입니다만, 루스탐이라는 사람은 모릅니다. 전혀요! 게다가 루스탐이라는 이름은 여기서 흔합니다. 제 손자 이름도 루스탐인걸요. 귀족들은 애초에 이런 술집엔 오지도 않을뿐더러 우리 같은 사람들도 귀족들 얘기는 흥미로운 소식 외에는 관심도 가지지 않습니다. 저한테 더 캐물으셔도 제가 할 수 있는 말은 여기까지입니다. 그러니 부탁건대, 그만 물으십시오.”

 노인의 일장연설이 끝나자 말릭은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적대적인 눈빛을 느꼈다. 말릭은 주변을 힐끗 돌아보고는 다시 노인에게 물었다.

“바흐람 가빈이 말하지 말라고 하던가?”

 노인은 한참을 망설이더니, 결국 입을 열었다.

“예.”

 노인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마라칸트 사람들은 그분을 존경합니다. 우리를 지켜주실 뿐만 아니라 정의롭고 선하신, 완벽한 분이니까요. 바흐람 도련님께서 말하지 말라고 명령했다면, 우리들은 오르마즈드 앞에서도 말하지 않을 겁니다. 분명 사정이 있으시겠지요.”

 그리고 노인은 눈을 떴다.

“그리고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어차피 루스탐 바베디라는 사람에 대해서는 모르니, 도움을 못 드렸을 겁니다.”

 말이 끝나자마자 노인은 도망치듯 다른 손님에게로 가버렸다. 홀로 남겨진 말릭은 한숨을 쉬며 그녀를 떠오르게 하는 데일스산 포도주를 홀로 들이켰다. 그때 누군가가 그의 옆에 앉았다. 말릭은 고개를 돌렸다. 젊은 사람이지만 피곤과 괴로움으로 얼굴에 주름과 어둠이 가득한 남자였다. 그는 말없이 말릭의 포도주를 빼앗아 자신의 잔에 따랐다. 말릭이 빼앗긴 자기 술을 낚아채려고 하자 남자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난 알아.”
“뭐를.”
“루스탐 바베디.”

 그러더니 그가 망토를 홱 열며 허리춤을 가리켰다. 기병용 곡도 한 자루가 허리에 매달려 한때 자기 주인이 군인이었음을 알려주었다. 그는 이미 술에 잔뜩 취했음에도 여전히 술에 매달리고 있었다. 그는 자기 잔을 들이켜더니 입에서 역겨운 술 냄새를 뿜으며 말했다.

“이봐, 사막 친구. 난 술이 필요해. 나한테 술값을 줘. 금화 다섯 닢이면 충분할 것 같아. 당신은 아무렇지도 않게 술값으로 금화를 내놓았으니 금화도 수북하겠지. 난 돈이 없어. 은퇴하면서 받은 돈은 모두 술값으로 썼지. 이젠 빚밖에 없어. 저 할아범이 그나마 날 불쌍하게 여겨줘서 여기 앉아있을 수 있는 거지. 술값만 금화 세 닢은 되는 것 같아. 이 칼도 팔아버릴까 했는데 받아주는 데가 없더라고. 그래, 세 닢을 추가로 받아야겠어. 여덟 닢을 주면 네가 그렇게 원하는 루스탐 바베디에 대한 말을 해주지.”

 말릭은 이런 술주정뱅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절대다수가 헛소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말에 앞뒤가 안 맞고 두서도 없는 게 보통이었다. 하지만 모두 바흐람에게 충성하며 함구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정보를 주겠다며 다가온 이는 분명 흔치 않았다. 말릭은 금화 스무 닢을 꺼냈다. 그러자 남자의 풀린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가 손을 뻗자 말릭은 남자를 놀리듯 자기 손을 빼며 말했다.

“먼저 말해.”

 그러자 남자는 약간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

“먼저 열 닢부터 내놔.”

 말릭은 순순히 따랐다. 그러자 남자는 실성한 듯이 웃으며 금화를 세었다. 그는 한참을 금화에 새겨진 황제의 얼굴과 이름을 이리저리 돌려본 끝에야 말을 시작했다.

“그래……. 루스탐 바베디. 그놈은 참 대단한 놈이었지. 곱상하게 생겨서는 태수 딸년을 후리고 말이야. 그런 놈이 싸움도 잘하고, 가문도 잘나고. 나처럼 엿 같은 집구석에서 태어나 살려고 이따위 일에 뛰어든 놈들하고는 차원이 달랐지. 히히히……. 놈은 바흐람이 이끄는 기병대 소속이었어. 거, 뭐라고 하더라, 사바란? 아스와란? 그런 거 있잖아. 카타프락토인가 뭔가 하는 그거. 게다가 놈은 바흐람의 부관이었단 말이지. 분명 서로 같이 자는 사이였을 거야. 안 그럼 그렇게 사이가 좋을 리가 없지. 푸흐흐……. 관문 너머 유목민들이 관문을 넘으려고 난리를 치면 바흐람과 친구들이 나가서 놈들의 대가리를 창대나 안장에 매달고 돌아오는 게 일상이었단 말이야. 그거 알아? 나도 그들 중 하나였어. 어때, 그런 거 같아? 크흐흐……. 반응이 없는 걸 보니 역시 못 믿나 보네. 잠깐 술 좀 마시고. 아, 따라주는 건가? 고마워. 역시 사막 친구들은 생긴 것과는 다르게 의외로 자상하단 말이야. 여자들도 끝내주고. 그런 여자들이 바글바글한 사막이 고향이라니 부러워. 하여튼 자상한 네 녀석을 위해서 잡소리는 이쯤 해둘게. 내가 겪은 일이야. 아, 루스탐. 루스탐을 찾는 걸 보면 바베디 저택에서 있었던 일은 이미 알겠지? 그 일이 벌어지기 보름쯤 전의 일이었어. 우린 마족이 날뛴다는 소식을 듣고 평소대로 관문 너머로 갔단 말이야. 마족들이 많이도 있었지. 많이. 우리는 창을 들고 마족들을 신나게 꿰뚫고 다녔어. 재밌었지. 그런데 문제가 생겼어. 그냥 마족만 있는 게 아니더라고.”

 그가 말을 끊었다. 그는 그때의 끔찍한 기억을 억누르려는 듯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공포마저 억누를 수는 없는지 손을 벌벌 떨고 있었다. 가만히 지켜보다 못 한 말릭이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지?”

 남자는 겨우 눈을 뜨더니 떨리는 자기 손을 다른 손으로 붙잡았다. 그는 두려움에 질린 얼굴로 말릭을 보며 대답했다.

“악마가, 아니 악마보다 강한 놈이 있었어. 해를 가릴 정도로 크고 검으면서도 불타오르는 깃털의 날개 말이야. 알고 보니 그건…….”
“……타천사.”

 말릭이 대신 말했다. 타천사. 지금까지 그가 죽지 않고 살아있는 원동력이자, 그의 원수. 남자는 그놈을 만났다는 것이었다.

“맞아. 타천사. 아흐리만이라고 부르는 그놈 말이야! 네 고향에선 뭐라고 하더라? 이, 이, 뭐였지…….”
“이블리스.”
“그래. 이블리스! 여하튼. 아흐리만 그놈은 우리를 손으로 종잇장처럼 찢어버렸어. 바흐람도 얼굴이 걸레짝이 되어서는 쓰러지니까 난 도망쳤어. 홀로 꽁지 빠지게 도망갔다고. 하하……. 정말 죽는 줄 알았어. 그날 이후로 난 기병대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나왔어. 그런데 자꾸 아흐리만 그놈의 얼굴이 떠올라. 그 두렵고 무시무시한 얼굴이. 그걸 잊으려고 술을 마시고 또 마셔도 잊을 수가 없어. 내가 이 꼴이 된 것도 다 그놈 때문이야.”

 남자는 포도주를 병째로 들이켰다. 그러다가 술이 다 떨어지자 아쉬운 표정으로 병을 바닥에 던졌다. 말릭이 물었다.

“루스탐은?”
“누구? 아, 루스탐. 걔는 일주일 뒤에 피투성이가 되어서는 관문으로 왔어. 그리고 또 일주일 뒤에 바베디 저택에 불이 났지.”
“그 일이 정확히 어디서 벌어졌는지 기억하나? 이블리스 그놈과 싸웠던 곳 말이야.”
“기억하기 싫어서 잊어버렸어. 관문에서 꽤 떨어졌던 거 같아. 바흐람이라면 알지도 모르지.”

 말릭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나머지 금화 열 닢을 바닥에 뿌리듯 던지고는 바깥으로 향했다. 그러자 뒤에서 주정뱅이가 외쳤다.

“뭘 하는지 모르지만 건드리지 않는 게 좋을걸! 아흐리만은 자기에게 덤비는 사람들에게 파멸을 주는 놈이야!”

 말릭은 바깥으로 나왔다. 주정뱅이의 말은 대꾸할 가치도 없었다. 코앞에서 줄행랑친 주정뱅이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오랫동안 타천사와 맞섰으니까. 말릭은 이제 어디로 가야 할지 감히 잡혔다. 관문 바깥으로 나가야 했다.
 그런데 갑자기 수많은 병사들이 말릭을 둘러쌌다. 완전무장한 병사들이 창끝을 그에게 들이밀며 노려보았다. 그가 때려눕힌 병사들의 소식을 들은 모양이었다. 말릭은 반사적으로 손을 칼자루에 가져다 댔다. 말릭과 병사들, 그리고 그들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보는 사람들의 대치가 이어졌다. 병사들 뒤에 서 있던 군인이 말했다.

“순순히 칼에서 손을 떼라. 우리 병사에게 폭력을 가하고 시민들을 겁박한 죄로 체포하겠다.”
“이따위 짓거리를 할 시간은 없어. 난 관문 바깥으로 나가야 해. 나스린 가빈의 의뢰를 받았단 말이다.”
“나스린 아가씨의 의뢰가 네놈이 가한 폭력을 정당화하진 못한다. 순순히 체포에 응해라!”
 
 말릭은 한숨을 쉬었다. 그의 무력과 마법이라면 이들을 모조리 쓰러트릴 수 있었고 또 필요하다면 그렇게 할 의향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칼자루에서 손을 떼었다. 여기서 괜한 칼부림을 했다가는 의뢰는커녕 사람들의 손가락질만 받으며 마라칸트에서 쫓겨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가 싸울 의사가 없음을 보이자 병사들이 그에게 다가와 붙잡았다. 하지만 그를 포박하지는 않았다. 말릭의 팔을 붙든 병사가 작게 말했다.

“귀빈 자격으로 여기 온 걸 다행으로 여겨라, 빌어먹을 이방인 놈아.”

***

 며칠간 말릭은 감옥에 갇혀 있었다. 병사들은 그에게 물이나 음식을 넣어줄 때 빼고는 그와 마주치려고 하지 않았다. 말릭은 하릴없이 감방 바닥에 앉아 명상하거나 몸을 풀며 시간을 보냈다.
 사흘 정도 지났을 때였다. 감옥 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말릭이 뒤돌아보니 그 자리에는 화려한 비단옷 안에 갑옷을 받쳐 입은 사람이 허리춤에 투구를 낀 채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바흐람이었다.

“소식은 들었소. 우리 병사들을 때려눕힌 것도 모자라 선량한 시민들을 겁박했다지. 게다가 잔인한 마귀들이 호시탐탐 노리는 관문을 열고 바깥에 나가겠다고?”

 바흐람의 비난은 거셌다.

“당신이 고위 마족을 산 채로 잡아올 정도의 실력자에 내 누이의 의뢰까지 받은 귀빈이 아니었다면, 그대는 이미 추방이나 사형 둘 중 하나였을 거요. 당신의 강력함이 당신을 살리는군.”
 그러면서 그는 말릭에게 일어나라 손짓했다.

“따라오시오.”

 말릭은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섰다. 바흐람은 말릭을 데리고 미로 같은 지하 감옥을 이리저리 빠져나왔다. 감옥 밖으로 나서자 강렬한 빛에 둘은 반사적으로 눈을 가렸다. 말릭이 손을 치우자 머리부터 발끝까지 단단한 철갑옷으로 차려입고, 말에도 마갑을 씌운 한 무리의 기병들이 바흐람을 보며 예를 갖추었다. 그 주정뱅이가 말한 기병대였다.

“그대를 설득해서 내보내는 데에 실패했으니, 이젠 내가 직접 곁에 붙어서 감시하는 수밖에.”

 바흐람은 투구를 쓰며 말 위에 올랐다.

“바깥으로 보내주겠소. 다만 마족을 상대하는 게 먼저요.”

 하인들이 말릭의 장비와 말을 들고 그에게 다가왔다. 말릭은 자기 장비를 살펴보았다. 강철로 된 투구와 보호대, 미늘 갑옷, 허리띠, 화염 마법 걸린 검, 활과 화살집, 그리고 마법과 주술을 부리는데 필요한 재료. 모든 것을 일일이 확인하고 나서야 그는 장비를 걸쳤다. 준비가 끝나고 나서야 말릭은 바흐람을 따라 말 위에 올랐다. 바흐람은 기병대를 이끌고 관문으로 향했다.
 관문에 도달한 바흐람은 관문의 병사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병사들은 잔뜩 긴장한 표정을 지으며 서로 바라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을 열었다. 다리 역할을 겸하는 거대한 문이 천천히 내려가더니 그대로 관문 앞의 해자를 덮었다. 동시에 성벽 위에 궁수들이 주변을 경계했고, 문 바로 뒤에서 보병대가 대기하다 바깥으로 나가 해자 바로 뒤에 자리 잡았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관측병이 바흐람을 향해 소리쳤다.

“진군하셔도 좋습니다!”

 그러자 기병들은 방패와 창을 손에 꽉 쥔 채, 기둥 형태로 대열을 이루고 관문 밖으로 행군했다. 기병대가 나서자 관문의 병사들은 재빨리 안으로 돌아갔고, 다시는 다시 굉음을 내며 성문으로 변했다. 기병들은 그 모습을 보며 긴장한 듯 침을 삼키며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바흐람 역시 긴장한 얼굴이었으나 깊게 심호흡하며 마음을 추슬렀다. 그는 기병 몇을 지목해 정찰을 보냈다. 그들이 앞으로 내달리며 눈앞에서 사라진 후에야 바흐람은 말릭에게 말을 걸었다.

“자, 그럼. 왜 관문 바깥으로 나오려고 했는지 말해보실까.”

 말릭은 바흐람을 돌아보았다.

“자네 부하로 보이던 주정뱅이 하나가 루스탐에 대해서 말해주더군.”

 그는 자기가 주정뱅이에게 들은 것을 간단히 설명했다. 말을 듣던 바흐람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래서 그 전투가 있던 곳으로 가보고 싶다, 이건가?”
“이해가 빠른 편이군.”

 말릭은 버릇처럼 목을 옆으로 뚝뚝 소리를 내며 꺾었다.

“그가 흘린 물건이 있을지도 모르지.”

 바흐람은 무어라 대답하려다 말고 그대로 고개를 돌렸다. 말릭은 그의 행동이 의심스러웠으나 더 캐묻지는 않았다. 그때 정찰을 나갔던 병사가 돌아왔다.

“전방에 야만인과 마족이 소수 있습니다. 무장도 거의 안 했으니 큰 위협은 아닙니다.”
“좋다. 전체 전투 대형으로. 매복을 주의하고 항상 주변을 경계하라.”

 기병들은 재빠르게 대형을 바꾸었다. 얼마 뒤에 기병대는 마족과 마주쳤고 바흐람은 재빨리 말을 몰며 돌격을 명령했다. 그러자 일부 기병들은 활을 들고 사격을 가하고, 나머지는 전우가 쏜 화살을 방패 삼아 앞으로 돌진했다. 기병들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마족들에게로 나아가 그들을 살육했다. 승리라고 하기에도 부끄러운 일이었다.

“좋아. 피해는 없고, 적은 전멸.”
“이게 끝은 아니겠지?”

 말릭의 말에 바흐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족들은 수가 많으니까. 보통은 해가 떨어질 때까지 이렇게 마족들을 잡다가 돌아가지. 하지만 오늘은 자네 일도 있으니 바로 그 장소로 가겠네.”

 바흐람이 손짓하자 기병대는 다시 행군 대형으로 정렬했다. 다시 일부가 정찰병이 되어 앞으로 먼저 사라졌다. 그러는 동안 바흐람은 말릭과 함께 점점 더 깊은 숲으로 향했다. 그러자 기병들 일부가 불안한 듯 헛기침을 하거나 몸을 떨었다. 정찰병들이 교대로 다니며 마족이나 북방 유목민들에 대해서 보고했으나 그쪽으로 향하려는 의지는 없어 보였다.

“거의 다 왔소. 이 숲만 지나면 바로 그 현장일세.”

 숲속에 들어선 지 한참, 바흐람은 잔뜩 긴장한 눈초리로 사방을 경계했다. 작년에 바흐람과 같이 이곳에 들어섰던 기병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조용히 나아가던 중에 그들은 숲과 숲 사이의 공터에 도달했다.

“바로 여기일세.”

 바흐람의 말에 말릭은 말에서 내려와 주변을 살펴보았다. 확실히 전투의 흔적이 군데군데 남아있었다. 바닥에 박혀 삭아버린 방패나 창대, 녹슨 무기나 투구, 뼈다귀 등이 보였다. 말릭은 주변을 걸으며 말했다.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지?”
“그건…….”

 말릭의 말에 바흐람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숲을 가로지르는 바람 소리가 마치 죽은 부하들이 유령이 되어 자신을 원망하는 소리 같았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기도문을 읊었다. 말릭은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시간만 충분하다면 폐허에서처럼 과거를 살펴보았을 텐데, 그럴 만큼 안전한 곳이 아니었다. 바흐람은 그 사실을 다시 상기시켰다.

“다 됐으면 빨리 나가세. 여긴 위험한 곳이오. 마족이나 야만인들의 함정도 많아.”

 그때였다. 정찰병 하나가 급하게 말을 몰아 바흐람에게 돌아왔다. 그는 피가 흐르는 상처를 틀어막으며 놀란 전우들을 향해 소리쳤다.

“악마! 악마가 나타났습니다! 저희가 쫓던 그놈입니다!”
“뭐라고?”
“악마가 튀어나와서 호르마즈드를 죽였습니다. 여기서 나가야 합니다. 빨리…….”
“뒤, 뒤에!”

 기병 하나가 외치자 정찰병이 공포에 질린 눈빛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날개 달린 무언가가 팍 튀어 오르더니, 목을 감싸고 있던 갑옷이 무색하게도 정찰병의 목을 간단하게 베어버렸다. 조금 전까지 말을 하던 전우의 목이 땅바닥에 굴러다니자 기병들도 그들이 탄 말도 모두 놀랐다. 바흐람도 놀라긴 마찬가지였으나 당황할 시간이 없었다. 그는 칼을 뽑으며 외쳤다.

“전투 준비!”

 말릭 역시 활을 꺼내 들고 악마를 향해 겨누었다. 회색 피부의 악마는 등에 커다란 한 쌍의 날개를 펄럭이고 있었고, 머리에는 산양 같은 뿔이 크게 자라있었다. 흔한 악마의 모습이었다. 말릭은 재빠르게 화살에 마력을 담아 쏘았다. 다른 기병들도 마찬가지로 활을 들고 마구 쏘아댔다. 하지만 악마는 가볍게 날아오르며 피했다. 한바탕 기병들의 공격이 끝나자 악마가 외쳤다.

“내 차례로군!”

 그러자 악마는 마치 먹이를 향해 활강하는 매처럼 기병들에게 몸을 날렸다. 무기도 없이 손톱만 휘두르는데도 갑옷과 말이 종잇장처럼 찢겨나갔다. 기병들은 최대한 저항해봤으나 악마에겐 역부족이었다.

“악마는 당신 전문이잖나! 어떻게 좀 해봐!”

 말릭은 바흐람의 외침을 듣지 못한 듯 계속 활쏘기만 집중했다. 바흐람은 그 화살이 무슨 소용인가 생각하며 기병들을 재집결시키려 노력했다. 그는 그러나 말릭이 쏜 빗나간 화살이 나무를 두 동강 내며 쓰러트리는 것을 보고는 생각을 바꾸었다. 악마 역시 말릭이 쏘는 화살이 제일 두려운지 감히 그에게 덤비지 못하고 이리저리 날아다니며 피했다. 바흐람은 그 모습을 보더니 머리를 굴렸다.

“빌어먹을 악마 놈아! 여기다! 내가 지휘관이다!”

 그러면서 바흐람은 숲속으로 튀어가며 악마를 유인했다. 그 모습에 말릭은 활을 내리며 투덜거렸다.

“대체 무슨 짓거리를 하는 거야!”

 악마는 바흐람을 향해 달려들었다. 바흐람의 예상대로였다. 그러나 악마의 비상식적인 완력과 민첩함은 예상 밖이었다. 악마는 순식간의 바흐람에게 다가와 그의 말을 탁자 뒤집듯 날려버렸고, 바흐람 역시 같이 날아가 버렸다.
 악마는 바흐람에게 다가갔다. 기병들이 활을 쏘고 창칼을 휘두르며 악마를 막으려 했으나 악마는 개의치 않고 간단히 물리쳤다. 바흐람은 정신을 못 차리고 바닥을 기어갔다.

“네 추적자 동료는 멀리 떨어져 있군.”

 친숙한 목소리에 바흐람은 악마를 올려다보았다. 그 모습을 보고 바흐람은 놀라 뒷걸음질 쳤다. 악마는 바흐람에게 손을 뻗었다. 바흐람은 그대로 허공에 끌어올려 졌다. 손이 닿지 않았음에도 바흐람은 목이 졸리는 것을 느꼈다. 그는 숨을 쉬려고 버둥거리면서도 악마의 얼굴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그의 눈동자는 놀라서 커다랬다.

“너는, 너는…….”
“흠. 자넨 여전히 변하지 않았군. 보시다시피 난 많이 변했거든.”
 악마는 바흐람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어느새 두 사람의 거리는 서로의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워졌다.

“오랜 친구여. 이 꼴로는 다시 돌아가지 못하겠지. 일 년 내내 그렇게 생각했네. 하지만 지금은 생각을 고쳐먹었지. 내 언제 한 번 자네 누이에게 안부 전하러 가겠네. 그런데 그 전에, 먼저 자네를…….”

 그 순간 옆에서 파랗게 빛나는 화살이 허공을 가르며 날아들었다. 악마가 미처 팔을 빼기도 전에 화살은 그대로 악마의 팔을 깔끔하게 잘라냈고, 동시에 바흐람은 바닥에 널브러졌다.
 악마는 소리를 내며 팔꿈치 아래가 달아간 팔을 붙잡고 말릭을 노려보았다. 말릭은 틈을 주지 않고 다시 활을 쏘았으나 악마는 재빨리 몸을 비틀어 피하고는 하늘로 날아갔다. 말릭은 하늘을 향해 활을 겨누었으나 이미 멀리 날아간 악마를 쏘아 떨어트리기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는지 그대로 활을 내렸다.

“가버렸군.”

 그는 활을 거두고는 바닥에 떨어진 악마의 왼팔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팔은 어느새 잿더미가 되어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말릭이 고개를 저으며 고개를 돌리려는 찰나, 사라지는 잿더미 사이로 빛바랜 비취색의 무언가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팔찌였다. 말릭은 그것을 이리저리 살펴보고는 주머니에 넣었다.
 살아남은 기병들이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그들은 바닥에 쓰러진 바흐람을 부축하며 일으켜 세웠다.

“괜찮으십니까, 도련님?”

 바흐람은 대답하지 않았다. 악마는 한참 전에 사라졌지만, 그는 여전히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듯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기병들이 그를 흔들어댔지만 여전했다. 말릭은 그런 바흐람을 노려보고 있었다.

***

 거의 혼이 빠져나갔던 바흐람은 태수 관저에 돌아와서도 여전했다. 말릭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난로 앞에 멍하니 앉은 바흐람을 내려다보았다.

“이봐.”

 말릭이 말했다.

“마족의 물결을 막는 도시의 지휘관이면서, 고작 악마 하나를 보고 그렇게 넋이 나가서야 쓰겠나?”

 바흐람은 말릭이 그랬듯 고개를 슥 돌려 그를 한 번 쳐다보고는 다시 난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런 게 아니오.”

 바흐람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변명하듯 말했다.

“그냥 악마는 전에도 많이 봤소.”
“그럼 이번에는?”

 말릭은 그렇게 말하면서 주머니에 넣었던 악마의 팔찌를 손에 쥐고 만지작거렸다. 악마의 팔에 붙어있던 물건이지만 이상하게도 사악한 마력이나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약해빠진 마족이나 악마가 자기 힘을 강화하려고 달고 다니는 부적과는 다른, 평범한 물건이었다. 그래서 더 이상했다.
 바흐람은 말릭의 물음에 한참을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말릭은 팔찌를 꽉 쥐며 다시 말을 걸었다.

“그 악마, 네게 오랜 친구라고 하더군.”

 그 말에 바흐람은 놀란 얼굴이 되어 말릭을 바라보았다. 말릭은 만지작거리던 팔찌를 바흐람의 앞에 내던졌다. 비취색 돌을 정성스럽게 실에다 꿴 팔찌가 대리석 바닥에 떨어졌다. 바흐람은 그 팔찌를 보더니 다시 말릭을 바라보았다.

“언제 그 말을 들은 거지?”
“그건 중요하지 않아.”

 말릭은 바흐람에게 다가갔다.

“원한다면 당장 저 팔찌에 대고 마법을 쓰거나 네 머리통 안의 기억을 강제로 뽑아낼 수도 있어. 하지만 난 지금 그런 충동을 참고 또 참고 있지. 네놈은 태수의 아들이니까. 하지만 내 인내심은 그다지 강하지 않아. 그러니 빨리 말하는 게 좋을 거야.”

 바흐람은 말없이 팔찌를 문질렀다.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 그의 눈동자는 지진이 일어난 듯 마구 떨리고 있을 터였다. 말릭은 강제로 기억을 뽑아내겠다며 협박을 하긴 했지만, 지금은 가만히 기다리는 게 더 좋다고 판단했다. 바흐람은 한참 그 팔찌를 만지작거리다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작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걸 듣고 싶은 거겠지?”
“그래.”
“좋아. 원하는 대로 다 말해주지.”

 바흐람은 팔찌를 내려놓았다. 그는 슬픔으로 무너져 내린 얼굴로 비탄에 찬 한숨을 내쉬었다.

“우린 어렸을 때부터 같이 자란 친구였소. 나는 태수의 아들이었고 그는 이쪽 지방의 유서 깊은 귀족이었지. 내가 마라칸트의 기병대장이 되었을 때 그는 내 부관이 되었소. 오랫동안, 우린 서로의 등을 맞대고 전우로서 야만인과 악마들을 상대했소.”
“그건 알고 있어.”

 말릭은 건조하게 대답했다.

“그래. 옛이야기는 별로 재미없지. 그대가 원하는 건 작년의 그 사건이겠지. 아닌가?”
“알면 빨리 말해.”
“그래……. 작년은 참 어려운 시기였다오. 지금도 그렇긴 하지만, 마족들이 참 많이도 나오던 시절이었지. 그런데 관문의 병사들 사이에 소문이 하나 돌았네. 엄청난 크기의 불타는 날개를 가진 거대한 악마에 관한 소문. 우린, 그러니까 기병대는 다들 허풍이라고 믿었다만, 관문 병사들의 묘사는 너무나도 자세했지. 그래서 관문 밖으로 나갔소. 그 악마가 누구인지, 얼마나 위험한지 알아보려고. 마족이 꽤 많더군. 짐승 수준의 놈들부터 저 북쪽 황무지에나 산다는 검은 요정도 있었어. 우린 검은 요정 하나를 포로로 잡았는데, 그 여자가 말하기를 그 악마는…….”
“단순한 악마가 아니라 타천사였겠지.”

 말릭이 끼어들자 바흐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냥 악마가 아니었네. 하늘 대신의 맏이, 처음이자 마지막 타천사, 아흐리만이었네.”
 아흐리만, 이블리스, 데어드리는 그를 ‘루시퍼’라고 불렀다. 말릭은 다시 떠오르는 그녀에 대한 기억을 치우고는 바흐람의 말에 집중했다.

“아직도 그놈의 모습이 생생하게 기억나네. 까마귀처럼 새까만 깃털은 불타고 있었지. 펼치면 온 하늘을 덮은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커다랬어. 그런 놈을 상대로 도망치지 않고 싸우다니. 정말 바보짓이었지.”

 바흐람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흐리만 그놈은 우리를 가볍게 농락했소. 나 역시 놈이 휘두른 손에 투구가 박살 나고, 이렇게 얼굴에 상처도 났소. 내 옆구리도 놈에게 찢어발겨 졌지. 난 그놈 발아래에서 죽음의 두려움에 압도당해 아무것도 못 했소. 다들 그랬지. 오직 루스탐만이 용기를 내어 마지막까지 그를 막아섰네. 그리고 내게 이렇게 외치더군. ‘도망가!’ 그 말대로 난 겁쟁이처럼 도망쳤소. 그러다가 어쩌다 뒤를 돌아보았는데, 아흐리만이 루스탐의 머리를 잡고 들어 올리고 있었지. 그의 팔이 번쩍이더니 루스탐의 끔찍한 비명이 온 숲을 쩌렁쩌렁하게 뒤덮었소. 모두가 그 비명을 듣고 악몽 꾼 어린아이가 어머니에게 달려가듯이 관문으로 도망쳤소. 나도 그랬지.”
“그 타천사가 루스탐의 머리를 붙잡고는 팔을 번쩍이더니, 루스탐이 비명을 질렀다?”

 바흐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비명은 관문에서도 들을 수 있을 정도였소…….”

 바흐람은 귀를 틀어막으며 몸서리를 쳤다. 그 비명이 여전히 들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비명 사이로 오랜 친구의 고통에 찬 애원이 들려왔다. 자기를 버리지 말라는 그 애원이.

“그래서? 듣기로는 일주일 뒤에 다시 관문에 나타났다는데.”

 말릭의 물음에 바흐람은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그는 소름 돋는 환상에서 깨어난 것에 안도하면서 동시에 아직도 그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사실에 한숨을 쉬었다.

“맞네. 엉망이었지. 갑옷은 다 뜯겨나가고 살갗도 엉망이고. 제대로 걷지도 못했소. 열병을 앓는 사람처럼 온몸이 펄펄 끓었고. 그리고 일주일 뒤에, 그 참극이 벌어졌소.”

 말릭은 바흐람이 말한 것들을 깊게 생각했다. 피투성이가 되어 돌아온 사람, 펄펄 끓는 몸, 타천사에게 당한 끔찍한 일들. 너무나도, 너무나도 비슷했다. 그녀와 너무나도 비슷했다. 말릭은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데어드리…….”
“데어드리?”

 바흐람의 물음에 말릭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내가 뭐라고 했지?”
“데어드리라고 했는데.”
“아무것도 아니다. 신경 쓰지 마.”

 말릭은 손을 내젓고는 다시 팔짱을 꼈다.

“내가 아는 사례랑 참으로 비슷하군. 그 사람은 결국 타천사에게 당했던 사람이 악마로 변해버렸지.”
“……역시.”

 바흐람은 고개를 숙이며 중얼거렸다.

“역시 내 예상이 맞았어.”

 바흐람은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 참극이 벌어질 때, 나는 병사들과 함께 불을 끄러 갔소. 그때 나는 보았네. 불타는 건물 사이로 포효하던 악마를. 다른 이들은 별다를 것 없는 악마라고 생각했지만, 나는 그 악마에게서 알 수 없는 친숙함을 느꼈지. 그리고 오늘 난 그 악마를 직접 마주했소. 그 얼굴과 이 팔찌를 보고 확신했소. 하아. 그래서 내가 나스린의 의뢰를 받지 말라고 했는데.”

 그렇게 말하며 바흐람은 얼굴을 손으로 가렸다. 슬픔과 고뇌가 그를 감싸버린 모양이었다. 그는 슬퍼하며 울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루스탐이 악마가 된 거야. 내 친구가…….”

 그때였다. 두 사람이 있던 방 바깥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누군가가 넘어졌든가, 주저앉거나 한 모양이었다. 말릭은 칼을 뽑으며 문을 강하게 열어젖혔다. 두 사람의 눈에는 놀란 얼굴로 주저앉은 나스린이 보였다.

“나, 나스린…….”
“오라버니……. 그게 무슨 말씀이신가요?”

 나스린의 눈동자는 공포와 놀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

“루스탐이, 루스탐이 악마가 됐다고요?”
“나스린, 잠깐만! 내 말 좀 들어 보거라.”

 바흐람이 몸을 일으켜 그녀를 진정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말릭은 그녀를 진정시키기는커녕, 바닥에 떨어진 팔찌를 주웠다.

“무슨 짓인가, 말릭!”

 바흐람의 제지에도 말릭은 그를 밀치며 나스린에게 팔찌를 보여주었다.

“악마가 이걸 차고 있더군.”

 나스린은 말릭의 손에서 재빨리 팔찌를 살펴보았다.

“이건, 이건…….”

 그녀는 손을 떨며 빛바랜 돌이 엮인 팔찌를 보았다. 말릭은 그때 나스린의 팔에 비슷한 팔찌가 엮인 것을 보았다.

“제가 예전에 준 팔찌에요……. 저, 정말로, 정말로 악마가 이걸 차고 있었나요? 루스탐에게서 빼앗은 게 아닐까요? 설마…….”

 말릭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녀의 마지막 희망마저 짓밟았다.

“악마가 빼앗은 거라면 마법을 걸어놨겠지. 하지만 아무것도 없었어. 악마는 아무 능력도, 의미도 없는 장신구는 달지 않아.”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어……. 루스탐이 악마일 리가…….”

 나스린은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리다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바흐람이 놀라 그녀를 붙들었다. 나스린은 죽은 사람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다. 바흐람은 사방에 대고 울부짖듯 사람을 찾았다. 근위병과 하인들이 그 소리를 듣고 방에 찾아와 쓰러진 나스린을 데려갔다. 이 모든 일이 벌어지는 동안 말릭은 그저 팔짱만 끼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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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즈베즈다
,

부활

단편 2017. 6. 17. 17:49

부활
The Reincarnation

0. 5년 전, 청색 들판

 피를 흘린 채 쓰러진 동료들, 알리스터, 에드원, 에이리크, 루시아, 그리고 그웬 그녀 자신. 청색 들판을 붉게 물들인 수많은 시체 사이로 쓰러져 고통스러워하는 그들 사이로, 신들이 선택한 대전사 앨런 데리올이 홀로 서 있었다. 가문을 상징하는 깃발을 묶은 창과 커다란 방패, 그리고 은빛으로 빛나는 갑옷으로 무장한 그는 눈앞에 있는 사악한 마왕과 싸우고 있었다. 앨런을 비롯한 동료들과 마족에 대항하는 수많은 종족의 연합군이 마왕에게 맞섰으나 그 누구도 마왕을 손 끝 하나 건드리지 못하고 쓰러졌다. 그 용감하다는 남쪽 인간 왕국의 기사들도, 그 강인하다는 북쪽 난쟁이 투사들도, 그 날래다는 서쪽 요정 전사들도, 그 무시무시하다는 동쪽 상아탑의 마법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오직 한 명, 앨런만이 여전히 마왕 앞에 서 있었다.
 마왕이 앨런을 뿌리치고 날아오르더니 커다란 용으로 변했다. 그는 입에서 불을 내뿜어 아직도 버티던 이들을 형체도 없이 불태웠다. 그 모습을 본 난쟁이와 요정 군주들은 전의를 잃고 전장에서 도망치고 있었고, 대마법사들은 마법 오염으로 일어나지도 못했다. 이대로라면 이길 수 없었다. 마족 전부를 죽인다고 해도 마왕을 죽이지 못하면 헛수고였다.
 앨런은 뒤를 돌아보았다. 점점 생명을 잃어가는 동료들, 그 사이로 그웬이 그를 슬픈 눈으로 보고 있었다. 앨런은 투구를 들어 올리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창에 묶여있던 깃발을 떼고는, 자기 뺨에 흐르는 피를 닦아내더니 그웬에게 덮어주었다. 커다란 깃발은 그웬의 온몸을 가려주었다.

“앨런…….”
 
 뒤돌아서는 앨런을 향해 그웬은 애처롭게 말했다.

“가지 마.”

 앨런은 뒤로 고개만 살짝 틀었다. 그러고는 특유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모두 괜찮을 거야, 그웬. 언제나 그랬잖아.”

 앨런은 다시 앞을 돌아보며, 칼을 지지대 삼아 힘겹게 일어서는 알리스터에게 말했다.

“그웬을 부탁합니다, 왕자님.”

 멍하니 그를 보는 둘을 뒤로하며 앨런은 앞으로 달려나갔다. 그러자 허공에서 날개 달린 말 한 마리가 나타나더니 앨런의 앞에 앉았다. 그는 말에 올라타고는 그대로 하늘을 향해 날아갔다.
 그 자리에 있던 그 누구도 그 뒤의 일을 잊지 못할 것이었다. 하나의 커다란 유성처럼 빛나는 앨런은 하늘을 날아다니며 그의 적을 짓밟는 검은 용을 향해 날아갔다. 둘이 격돌하는 그 순간 하늘은 마치 불지옥을 연상하게끔 붉게 물들더니, 이윽고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빛이 하늘을 수놓으며 온 세상을 크게 비췄다. 모두가 싸움을 멈추고 하늘만 바라보았다. 그 빛은 오랫동안 이어졌고, 빛이 사라지자 마왕과 앨런 역시 자취를 감추었다. 그 모습을 본 알리스터는, 자신도 어리둥절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빛이 사라지고 나서도 모두 멍하니 하늘만 보고 있는 모습을 보곤 힘겹게 칼을 쳐들며 외쳤다.

“마왕이 쓰러졌다!”

 알리스터의 외침에 연합군 병사들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들은 다시 한번 마족을 밀어붙였다. 모든 것을 마왕의 카리스마에 의존하던 마족들은 그가 사라지자마자 오합지졸로 변했고, 연합군은 붉게 물든 청색 들판을 이번에는 보랏빛으로 물들였다.
 병사들이 각자 종족을 대표하는 대전사들을 찾아왔다. 요정군은 루시아를, 난쟁이군은 에이리크를, 마법사들은 에드윈을 부축했다. 인간 기사들이 알리스터를 찾아왔을 때 그는 부축을 받는 대신 그웬 앞에 무릎을 꿇었다.

“우리가 이겼소, 다피리스! 데리올이 우리에게 승리를 선사했소!”
“앨런…….”
“슬픔은 데리올이 원하는 바가 아닐 것이외다. 자, 가세.”

 그웬은 알리스터의 말을 무시하며 깃발을 꽉 쥐었다. 알리스터는 고개를 저으며 기사들에게 그웬을 데려가라고 명령하고 자신은 남은 병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후퇴했다. 그가 하늘을 올려다보자 하늘은 어느새 새카만 먹구름으로 가득 차 조금씩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1. 지금, 청색 들판

 그웬은 눈가에 물기를 머금은 채 잠에서 깨어났다. 또다시 그 꿈이었다. 가슴 아픈 다섯 해 전 그날의 기억. ‘모두 다 괜찮을 거야.’ 앨런은 거짓말을 했다. 그녀에게 지금은 모든 것이 괜찮기는커녕 다섯 해 전 마족과의 전쟁 때보다 더 비참하고 슬픈 시절이었다.
 그녀는 이불처럼 쓰던 데리올 가문의 깃발을 걷으며 일어났다. 군데군데 난 구멍과 헌 부분을 꿰맨 결과 깃발은 다섯 해 전의 찬란한 그 모습을 잃은 지 오래였다. 그녀가 건드리지 않은 부분은 앨런의 피가 묻은 부분뿐이었다. 그녀는 슬픈 추억에 잠긴 채 느릿하게 깃발을 망토처럼 둘러맸다.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커다란 청동상이 있었다. 날개 달린 말을 탄 채 돌격하는 기사의 모습. 그녀는 청동상 받침 부분에 다가갔다.

 앨런 데리올. 빛의 대전사. 세상의 구원자.
 그의 희생에 우리는 이 땅에 남을 수 있었다.
 이제 신들 곁으로 돌아가 영원한 안식을 취하는 그에게 영원히 축복과 사랑이 있기를.

 그녀는 새겨진 글씨를 손으로 어루만졌다. 그녀의 보랏빛 눈은 또다시 물기로 젖어 어느새 눈물이 뺨을 타고 흐르고 있었다. 그때 그녀는 인기척을 느꼈다. 그녀는 손으로 눈물을 훑으며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돌린 곳에는 남부 왕국의 전령이 있었다. 그는 그웬이 정말 이곳에 있을 줄은 몰랐다며 중얼거리다 그웬의 서슬이 퍼런 시선을 느낀 뒤에야 머리를 조아리며 인사했다.

“그웬 다피리스 경. 전하께서 보내신 서신입니다.”

 알리스터의 편지. 그웬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떨떠름하게 편지를 받아들었다. 뒤로 살짝 두 걸음 걸으며 전령에게 등을 보이고 나서야 그녀는 편지를 열었다.

‘나의 전우, 그웬 다피리스에게.
 전쟁이 끝난 지 다섯 해가 지났건만 그대는 아직도 그 들판에서 벗어나지를 못하는구려. 나 역시 데리올의 그 마지막 모습이 여전히 눈에 선하다오. 사실 그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건 나 역시 마찬가지요. 전쟁의 상흔이 이 대륙에 여전히 남아있어서, 마족 잔당이 아직도 여기저기서 활개를 치고 다닌다오. 보이는 대로 또 들리는 대로 친정하여 쳐부숨에도 그 수가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소. 그래서 말인데, 오랜만에 그때 그 동료들과 같이 싸워볼까 하오. 청색 들판 근처에 놈들의 거점이 있소. 이미 다른 이들은 그곳으로 가고 있으니, 그대만 오면 된다오.
 아. 아직도 데리올의 말이 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소. 그대를 부탁한다는 그 말이. 아직도 그 들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그대를 생각할 때마다 그의 목소리가 나를 힐난하는 듯하오. 이제는 다피리스 자네를 위해서라도 내가 그의 마지막 말을 행할 수 있게…….’

 그웬은 편지를 끝까지 읽지 않고 그대로 불태워버렸다. 그녀는 차가운 시선으로 전령을 돌아보았다.

“어디로 가면 된다고?”

2. 지금, 위크힐 요새

 알리스터의 지휘 아래 연합군은 손쉽게 요새 정문을 돌파했다. 루시아의 요정군은 에드윈의 마법사들과 함께 선봉을 맡은 에이리크의 난쟁이군을 지원했다. 안으로 들어선 병사들은 다섯 해 전 마족들에게 죽은 가족과 지인들을 생각하며, 그들을 조금의 자비심도 보이지 않고 베어 넘겼다. 그건 그웬도 마찬가지였다.
 그웬은 마족의 기운을 따라 홀로 가장 높은 성탑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나타난 마족들은 그녀를 막지 못했다. 그녀가 성탑의 문을 열 때는 이미 주변이 마족의 보라색 피와 살점으로 가득했다. 그녀는 칼을 앞세우며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화려한 치장을 한 마족이 그녀를 보고는 놀라 뒷걸음질 치는 모습이 보였다. 그웬은 순식간에 그 마족의 목 끝에 칼날을 들이밀었다. 서슬이 퍼런 칼날과 그보다 더 무시무시한 그웬의 눈빛을 본 마족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트릴 것 같은 표정으로 그웬의 얼굴을 보았다.

“자, 잠깐, 잠깐! 너, 너는, 그웬 다피리스! 맞지? 빌어먹을 앨런 데리올의 연인!”

 그녀는 대답하는 대신 칼날을 더 들이밀었다.

“그만, 그만! 나, 나랑 거래하자, 거래! 난 강령술사야. 난 방법을 알아! 죽은 자를, 앨런 데리올을 부활시킬 방법을!”

 앨런. 부활. 두 단어가 그웬의 머리를 강하게 내려쳤고 그녀는 순간 얼어붙은 듯 움직이지 못했다. 자기 목에 들어온 칼날에서 힘이 조금씩 빠지는 것을 느낀 강령술사는 그제야 안심한 듯 한숨을 내뱉었다. 그러자 그웬이 정신을 차리고 다시 한번 칼에 힘을 주었다. 강령술사는 다시 얼굴을 공포로 구기며 아무 말이나 지껄였다.

“날 살려주면 방법을 알려줄게! 방법이 적힌 책이 있어! 책이!”

 그웬은 주변을 한 번 쭉 둘러보고는 말했다.

“그럼 넌 없어도 되는 거네.”
“아니, 잠깐! 부활은 강력하고 위험한 마법이야! 내가 없으면…….”

 그웬은 말을 다 듣지 않고 칼을 강령술사의 목에다 찔러 넣었다.

“넌 없어도 돼.”

 강령술사는 비참한 표정을 지으며 목에서 보라색 피를 뿜었다. 그의 보랏빛 눈동자는 그웬의 얼굴을 보며 점점 생기를 잃어갔다. 그가 쓰러지자 그웬은 깃발에 튄 피를 손으로 닦고는 칼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바로 주변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한참을 뒤진 끝에 수많은 잡동사니 사이에서 그웬은 어딘가 불길한 기운을 뿜는 책 한 권을 발견했다. 책은 마치 그녀를 기다렸다는 듯 그녀가 책장에 다가가자 알아서 바닥에 툭 떨어졌다. 검은색 인피로 된 책은 스스로 내는 불길한 기운을 못 이겨 덜덜 떨고 있었는데, 책을 펼치니 강력한 독기를 품은 잉크가 희미하게 빛을 내고 있었다. 그웬은 자기 손이 타들어 가는 느낌에 책을 덮었다. 그때 성탑에 에드윈이 나타났다.

“그웬! 여기 있었군요. 다행이에요. 어디 다치진 않았나요?”
“뭘 그렇게 걱정해?”

 그웬은 당황한 표정과 함께 책을 등 뒤로 숨겼다. 에드윈은 그러나 어딘가 불안정한 불길함을 본능적으로 느끼고는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사악한 기운이 느껴져서요. 날카롭고, 살기등등한. 그웬, 혹시 이상한 거 없었어요?”

 그웬은 눈짓으로 강령술사의 시체를 가리켰다. 그러자 에드윈은 지팡이를 들이밀더니 다짜고짜 불꽃을 쏘아 갈겨 시체를 불태워버렸다.

“‘죽은 마족도 좋은 마족이 아니다.’ 이렇게 가루로 만들어버려야 나중에 다시 살아나서 뒤통수를 치지 않죠. 근데, 그웬.”
“응?”
“뒤에 숨긴 게 뭐죠?”

 그웬은 순간 당해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어색하게나마 빙긋 웃으며 무마했다.

“내꺼. 너한테 안 줄 거야.”

 그녀의 말에 에드윈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웬을 바라보았다. 잠깐의 침묵 속에 긴장이 흘렀다. 하지만 이내 에드윈은 장난스럽게 물었다.

“거 참. 갑자기 난쟁이 영혼이 쓰이기라도 했나요? 난데없이 그런 탐욕을 부리고. 위험한 저주가 걸린 물건일지도 모르니 마법사들에게 맡기세요. 뭐, 그럴 것 같지는 않지만.”

 에드윈은 뒤로 간 그웬의 손을 한 번 쳐다보고는 고개를 까딱이며 다시 바깥으로 나갔다. 그러자 그웬은 다시 책을 펼쳐보았다. 책에는 마족의 문자로 수많은 사악한 주술들이 삽화와 함께 빼곡히 적혀있었다.
 책에 대해 좀 더 자세하게 알아보려면 에드윈에게 맡길 수도 있었지만,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그녀는 이 주술들이 어떤 목적을 가졌고 어떤 대가를 요구하며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이미 알고 있었다. 백 명의 에드윈이 달려들어도 그녀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이 책을 해석할 수는 없을 것이었다.
 그녀의 피에 흐르는 본능적인 감각이 이미 길을 가르쳐주고 있었다.

3. 오래 전, 다피리스 성

 살로메라는 마족이 있었다. 그녀는 뛰어난 기사들을 쓰러트리고 그들이 죽기 직전 가장 약한 순간에 타락시키는 것을 좋아했다. 그러기를 여러 번, 그녀는 이번엔 존이라는 이름의 기사에게 접근했다. 존은 용감했으나 어렸고 살로메보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나약했다. 살로메는 간단히 존을 쓰러트리고 그의 위에 올라탔다. 하지만 신들이 자비를 베풀어, 존이 죄를 범했을 때는 이미 그의 영혼이 육신을 떠난 뒤였다.
 살로메는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그녀의 배 속에 뭔가가 있었다. 그건 이전에 낳았던 마족의 아이보다 훨씬 느리게 자라고 있었다. 시간이 흘러 그녀는 아이를 낳았다. 반인반마의 여자아이. 모성애라는 감각이 단 하나도 없는 살로메는 아무런 고민 없이 자기가 낳은 아이를 내다 버렸고, 아이는 이름도 사랑도 받지 못한 채 노예로서 이리저리 팔리고 빼앗기며 힘든 삶을 살아갔다.
 ……라고 눈앞의 소녀는 말하고 있었다.
 앨런은 소녀를 내려다보았다. 절반의 혈통 덕분에 몸은 영락없는 인간의 그것이었으나 나머지 절반의 혈통 때문에 눈동자는 마족의 차가운 보라색이었다. 그녀의 몸에서 느껴지는 기운은 사악하기 그지없었고, 또 마족이 마법과 거짓으로 앨런을 속이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녀의 하얀 몸에 드리워진, 수많은 노예로서의 증거가 그녀의 말에 거짓이 없음을 증명했다.

“이제 전 어떡하나요? 제 주인님은 당신이 죽였잖아요.”

 소녀는 앨런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앨런이 머뭇거리자 기사들이 하나씩 자기 의견을 냈다.

“당장 죽여야 합니다. 악마 새끼잖습니까!”
“그렇습니다. 살려봐야 결국 방해만 될 겁니다.”

 앨런은 그러나 기사들의 말을 무시하고 무릎을 꿇어 소녀와 눈동자를 맞추었다. 그녀는 순수하게 눈을 반짝이며 앨런을 마주했다. 앨런은 잠깐 생각하다 물었다.

“네 주인님을 죽인 게 싫니?”

 소녀는 고개를 저었다.

“주인님은 항상 절 아프게만 했어요. 언제나 그랬어요.”

 그러고는 물었다.

“당신이 저의 새로운 주인님이 되어주시는 건가요?”

 고개를 저은 것은 이번엔 앨런이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천천히 칼을 뽑았다.

“난 노예는 필요 없어.”

 그 말에 소녀는 두려움 섞인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그럼 절 버리는 건가요?”
“아니야.”

 앨런은 불타는 칼을 높이 들었다. 그는 소녀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내겐 여동생이 있었어. 그웬이라는 이름이었지. 너는 어딘가 그 아이를 닮았어.”

 그러더니 앨런은 온 힘을 다해 칼을 휘둘렀다. 불타는 칼날은 소녀를 옭아매던 사슬을 단칼에 끊어버렸다. 소녀는 놀라 두려움 가득한 낯빛으로 앨런을 보았으나, 앨런은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일어나, 그웬. 넌 더 이상 노예가 아니야.”

4. 지금, 남부 왕국의 궁정

“국왕 전하께서 개선하신다!”
“승리왕 알리스터 만세!”

 왕궁으로 들어오는 동안 그의 신민들은 하나같이 그를 향해 ‘승리왕’이라는 말을 연호했다. 승리왕 알리스터 1세. 그 이름은 왕국이 지속하는 한, 역사가 지속하는 한 계속 남을 것이었다. 왕자의 신분으로 마족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전사이자 전쟁의 상흔을 치료하고 무너졌던 왕국의 전통과 체계를 다시 일으켜 세운 성군으로서.

“승리왕이라니, 멋진 칭호입니다, 전하.”

 먼저 궁정에 와 있던 그웬은 알리스터를 보며 조소하듯 말했다. 루시아와 에이리크, 에드윈은 반가운 친구를 본 것처럼 그웬에게 다가가 허물없이 말을 나누었으나, 알리스터는 홀로 머뭇거리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생채기 하나 없이 돌아와 줘서 고맙네, 다피리스.”

 하지만 그웬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알리스터는 왠지 창피하고 또 혼란스러웠다. 그는 붉어지는 얼굴을 감추며 급하게 방으로 들어갔다. 핑계는 무장해제였다. 방으로 들어온 그는 시종들을 모두 내쫓고 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가 ‘승리왕’이라는 칭호에 맞게 다른 모든 것에서 승리를 거머쥐었을지는 몰라도, 그가 진실로 원하던 단 하나는 쟁취하지 못했다. 그가 이겨야할 상대는 이미 전설 그 자체가 된 앨런 데리올이었다. 무슨 짓을 해도 이길 수 없는 상대였다. 그 때문에 쟁취할 수 없는 한 가지는, 너무나도 가까이 있어 더더욱 아른거렸다.

 앨런 앞에서 왕이라는 작위는 한없이 작고 무의미했다.
 그웬 앞에서 ‘승리왕’이라는 칭호는 반어법에 불과했다.
 지금 거울에 비치는 사람은 아무것도 얻지 못한 슬픈 패배자일 뿐이었다.

5. 5년 전, 만마전 심층부

“그러니까, 이 만마전의 심층부에 쳐들어가 마족의 경전을 빼앗아오면 분노한 마왕이 지상으로 나올 것이다, 그렇게 말했었지요?”

 루시아가 말했다.

“음, 에이리크는, 어, 생가, 흠. 생각했다. 바보 같았다고. 당황했다.”

 인간 말이 서툰 에이리크는 더듬거리며 루시아의 말을 보탰다. 그러고는 앞에 있는 모닥불을 불쏘시개로 쑤셨다. 불쏘시개는 마족 마법사 시체에서 빼앗은 지팡이였다.

“난 처음에 ‘이 인간 녀석이 오냐오냐하니까 기어이 정신이 나갔나보다’하고 생각했어요. 아, 불쌍한 앨런! 하면서요. 그런데 여기까지 같이 온 저도 정신이 나간 건 마찬가지인가 봐요. 이럴 줄 알았으면 혼약이라도 하고 올걸.”
“안타깝다, 너라면. 음, 많았을 것 같다. 인기.”
“당신한테 물은 적 없거든요, 꼬맹이 씨.”
“이해 안 간다. 음. 왜 성격 꼬였는지. 요, 크흠. 요정들이란.”

 루시아와 에이리크가 다시 티격태격하기 시작했다. 둘의 무의미한 싸움에 끼어드는 게 무의미한 일임을 경험으로 아는 나머지는 시끄러운 옆을 무시하고 오래 끓인 죽을 각자 떠먹으며 자기들끼리 말을 나눴다.
 그러기를 한참, 갑자기 앨런은 알리스터를 빤히 바라보았다. 알리스터는 가끔 어딘가를 보다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릴 때가 있었다. 앨런은 잠깐 생각하더니 무언가 떠오른 듯 즐거운 표정이 되어 가방에서 병 하나를 꺼냈다. 오래된 포도주였다. 갑작스러운 포도주의 등장에 알리스터의 눈이 반짝였다. 마족과의 전쟁 이후 마신 적이 없는 비싼 물건이었다. 앨런은 단검으로 코르크 마개를 찌르고는 뽑아서 향기를 맡았다. ‘멀쩡하네.’ 그렇게 중얼거리며 앨런은 술을 입에 댔다. 순간적으로 그의 미간이 찌푸려졌지만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다. 그는 말없이 꿀꺽 삼키더니 알리스터에게 병을 권했다.

“이 모든 게 끝나고 나면, 우리끼리 경쟁해야 할지도 모르겠네요.”
“경쟁? 갑자기 무슨 소리인가.”

 앨런은 어느새 자기 무릎을 베고 잠든 그웬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그 모습에 에드윈이 담뱃대에 불을 붙이며 끼어들었다.

“그림 좋네요. 주변이 시체의 산이 아니었으면 더 좋았겠는데.”

 그 말에 앨런은 웃으며 알리스터를 바라보았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왕자님.”

 알리스터는 앨런의 말을 듣고 얼굴이 굳어졌다. 그는 머뭇거리며 앨런이 권하는 술병을 받아들지 생각했다. 어느 쪽이든 불리한 사람은 알리스터였다. 하지만 그는 왕족답게 기품 있는 모양새로 앨런의 술을 낚아챘다.

“경의 도전을 받아들이겠소.”
“도전이라니. 그건 왕자님이 하는 쪽 아닌가?”

 알리스터는 에드윈을 한 번 흘겨보고는 단숨에 술을 들이켰다. 이윽고 그의 입은 분수가 되었다. 그는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외쳤다.

“완전 식초잖아!”

 그 모습에 앨런과 에드윈은 큰 소리로 웃었고 티격태격 하던 두 사람도 알리스터를 보고 마찬가지로 웃었다. 오직 그웬 하나만이 마법에 걸린 공주처럼 깊이 잠들어 알리스터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녀의 얼굴은 행복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6. 지금, 남부 왕국의 궁정

 궁정에는 화려한 연회가 열렸지만, 정작 주인공인 왕은 코빼기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술에 진탕 취해 연회를 즐기는 루시아, 에이리크, 에드윈을 뒤로하고 알리스터는 홀로 자기 침실의 난간에 서서 창밖을 바라보았다. 마치 다섯 해 전 청색 들판에서의 전투 전야처럼 달은 피처럼 붉었고 그 빛마저 아주 미약해 평소라면 밤에도 잘 보였을 산등성이에는 마을과 요새에서 피우는 불빛만 있을 뿐이었다.
 다섯 해 전 이날, 알리스터의 눈앞에는 아름답게 빛나는 앨런이 서 있었다. 전투 직전 그는 지금의 동상이 들어선 그 자리에서 병사들에게 용기를 불어넣는 연설을 했다. 그동안 바람에 날리던 그의 붉은 머리는 남자인 알리스터의 눈에도 아름다웠다. 전투가 벌어졌을 때도 그는 가장 앞에 서서 돌진했고, 마지막에는 마왕과 함께 사라짐으로써 세계의 구원자로서, 전설로써 남았다.
 알리스터는 그의 죽음에 슬퍼했다. 위대한 전사이자 유쾌하고 선량했던 친구를 잃은 것도 그렇지만, 그웬이 영원히 그를 그리워하면서 영혼에 입을, 영원히 치유되지 않을 상처에 슬퍼했다.
 그렇게 상념에 잠겨있는데, 밖에서 경비병이 문을 두드렸다.

“전하. 그웬 경께서 알현을 요청합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자기를 찾아올 리가 없는 사람이 자신을 만나길 원한다는 사실에 알리스터는 혼란스러워 대답도 못 하고 멍하니 문만 바라보았다. 왕이 대답하지 않자 경비병은 불안함에 목소리를 살짝 떨며 다시 물었다.

“전하. 그웬 다피리스 경께서 알현을 요청합니다. 들여보낼까요?”
“그, 그래. 들여보내라.”

 그러자 문이 열리고, 그웬이 들어왔다. 알리스터는 쿵쾅거리는 심장을 숨기려는 의도에서 붉은 달빛을 등지고 그웬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옛날과 전혀 다를 바 없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검은 머리, 일렁이는 보랏빛 눈동자, 마족의 혈통을 증명하는 매혹적인 몸, 허리띠에 달린 검과 단도까지도. 달라진 것이 하나 있다면 언제나 쓰고 다니는 데리올 가문의 깃발뿐이었다.
 알리스터가 아무 말이 없자 그웬은 그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그녀가 한 발자국 다가올 때마다 그의 심장이 점점 빠르게 뛰었다.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이 점점 달빛에 붉게 물들 때마다 알리스터는 뜻 모를 두려움을 느꼈다. 그녀의 생기 잃은 보랏빛 눈동자는 어느새 알리스터의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전하.”

 그녀는 고개를 살짝 들어 눈을 마주쳤다.

“염치 불고하고, 바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녀의 빛을 잃은 눈동자와 힘을 잃어버린 나약한 목소리에, 알리스터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할지 몰라 두려웠다. 하지만 그녀가 자신에게 무언가를 원한다는 것이 앨런과의 무의미한 경쟁에서 한 걸음 더 전진하는 것이라면, 알리스터는 어떤 짓거리도 할 생각이었다.

“그대가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하겠네, 다피리스. 그것이 그대와……데리올이 원하는 것이라면.”

 알리스터는 자기도 모르게 앨런을 언급했다.

“그래요, 앨런. 저는 지금껏 앨런을 그리워하며 살았죠. 그래서 이 깃발을 집처럼 여기고 살았어요. 하지만 그가 남긴 이 깃발을 끌어안고만 있는 건 그저 저를 슬프게 할 뿐. 저는 깨달았어요. 무언가 완전히 다른 방법이 필요하다는 걸요.”

 알리스터의 희망이 희미하게나마 밝아졌다. 그녀는 앨런이 그랬던 것처럼, 밝게 미소를 지었다.

“그이를, 앨런을 되살릴 방법을 찾았답니다.”

 희미하게 빛나던 알리스터의 희망은 앨런의 이름이 언급되는 순간 처참하게 산산조각이 났다. 마구 뛰던 알리스터의 심장은 어느새 배신감과 분노로 점점 차가워지고 있었다.

“사람을 되살리는 건……. 불가능하오. 지금껏 수많은 강령술사들이 부활을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그 결과는 전부 처참했소이다. 다섯 해 전에도 우리와 함께하던 수녀가 그런 짓을 했다가 엄청난 사건이 벌어졌음을 자네도 잘 알 터인데……. 어찌하여 자네마저 그런 멍청한 술법에 손을 대려는 게요?”

 알리스터는 분노로 가늘어지는 이성의 끈을 간신히 붙잡으며 차갑게 대답했다. 그러자 그웬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왜 그러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전하. 전하께서는 그저 전하께서 그토록 원하시던 그것을 이루면 되는 거예요.”
“짐이 원하던 그것이라니?”
“전하께서 원하시던 그것, 바로 저요.”

 그웬은 천천히 옷을 벗기 시작했다.

“항상 그 사람의 등 뒤에서 열등감에 시달리며, 항상 손에서 저를 놓지 않던 그이를 원망하지 않으셨나요?”

 데리올 가문의 깃발이 바닥에 떨어졌다.

“왕국을 다시 일으킬 후계자라는 위상, 가장 위대한 성군이 되리라는 주변의 기대 때문에, 반인반마인 제게 말조차 걸지 못했다는 사실을 증오하지 않으셨나요?”

 허리띠와 옷가지가 바닥에 떨어졌다.

“그토록 제 사랑을 갈구하셨으면서도 정작 아무 말도 못 하고 속으로만 저를 탐하기만 하던, 용기 없는 자기 자신을 혐오하지 않으셨나요?”

 그녀의 속옷이 바닥에 떨어졌다. 붉은 달빛 아래서 완전히 나신이 된 그웬은 팔을 벌렸다.

“자, 그렇게 원하시던 제가 전하의 앞에 있답니다.”

 그러자 알리스터는 갑자기 그웬의 목을 조르며 바닥에 쓰러트렸다. 그의 얼굴은 분노와 슬픔의 양가감정으로 감히 헤아릴 수 없었다.

“너는 끝까지 짐을 고통에 빠트리는구나, 그웬 다피리스! 너는 짐이 그토록 너를 사랑했음에도 끝까지 짐을 무시하였도다! 너는 이미 죽은 앨런 데리올만을 바라보며, 짐이 뒤에서 항상 너를 바라보고 그리워했음을 알지도 못하고, 알려 하지도 않았다! 그러더니, 그렇게 나를 절망에 빠트려놓더니, 이젠, 이제 와서는 죽은 사람을 되살리려고 짐의 사랑을 그런 식으로 이용하다니! 짐은 고작 망자보다도 못하다는 것이냐? 짐은 그 깃발만도 못하다는 것이냐? 너는 참으로, 참으로 악마로구나!”

 알리스터는 그웬을 죽일 듯이 목을 졸랐으나, 그의 얼굴은 점점 슬픔으로 일그러져갔다. 그웬은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태연했다. 그녀는 알리스터의 얼굴을 손으로 어루만지더니 그의 뒤통수에 깍지를 끼고는 자기 얼굴로 끌어왔다. 둘은 길게 입을 맞추었다. 알리스터의 손에 힘이 풀렸다.
 그날 밤 승리왕은 그가 유일하게 정복하지 못한 땅을 정복했다. 하지만 그것은 승리가 아니었다. 그는 패배했다. 그가 이기지 못했던 상대, 그리고 그가 그토록 원했던 상대 모두에게.

7. 10개월 후, 위크힐 요새

 에드윈은 요새 성문 앞에 서 있었다. 열 달 전 연회 이후 그웬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녀가 항상 있었던 청색 들판 위 앨런의 동상 아래에도 그녀는 없었다. 지난 다섯 해 동안 없었던 일이었다. 알리스터의 요청에 에드윈은 상아탑을 떠나 그녀를 찾아다녔고, 그녀의 마지막 흔적은 바로 이 위크힐 요새에 있었다.
 그는 마법사 특유의 고깔모자에 달린 차양을 손으로 올리며 요새를 올려다보았다. 전설 속 흡혈귀왕의 요새가 실존했다면 바로 이런 모습이었을 터. 열 달 전 왕국이 토벌한 이후 아무런 전략적 가치가 없어서 버려진 곳이었다. 이런 버려진 곳에는 굳이 마족 잔당이 아니더라도 으레 여러 괴물이나 도적 떼가 꼬이기 마련이었으나, 그 어떤 저항도 흔적도 없었다. 에드윈은 오히려 잘 됐다고 생각하며 문으로 다가갔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성문은 열려있었다.
 그는 지팡이를 바닥에 쿵쿵 찍으며 나아갔다. 그러나 그 행동에 답하는 이는 그 누구도 없었다. 시체는 열 달 전의 그것이었고 잡동사니는 먼지와 거미줄에 자리를 내주었다. 이런 침묵과 고독이야말로 에드윈이 두려워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두려운 것은 그웬의 흔적이 요새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열 달 전 그녀가 궁정을 떠날 때, 그녀의 눈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어두웠다. 평소에도 빛이 없던 그녀였으나 그날따라 더더욱 그랬다. 하지만 에드윈은 그녀에게서 그 어떠한 마법 효과도 느끼지 못했다. 두려운 일이었다. 그녀가 무슨 일을 벌인다면 그것은 마족이 부린 마법에 홀려서가 아니라, 그녀 자신의 의지로 일으켰다는 것이니까.
 그는 희미하게 느껴지는 마법의 흔적을 미궁 속 실타래로 삼아 감아올렸다. 그 실타래 끝에는 열 달 전 그웬이 있었던 그 성탑이 있었다. 그는 잠깐 망설였으나 크게 심호흡한 다음 성탑의 문을 열었다.
 그는 차라리 눈앞에 있는 게 역겨운 이교도 마녀의 집회나 끔찍한 시산혈해이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은 성탑 한가운데에 복잡하고 거대한 마법진을 그리는 익숙한 모습의 여인이었다.

“그웬?”

 에드윈의 말에 여인은 고개를 돌렸다. 그의 예상이 맞았다. 하지만 그녀의 모습은 예상 밖이었다. 그녀의 배는 매우 커다랬다. 분명 임신 중이었다. 궁정에 돌던 소문, 알리스터와 그웬이 동침했다는 소문은 사실이었다.

“안녕, 에드윈.”

 그웬의 목소리에는 생기가 없었다.

“무슨 짓을 벌이는 거죠, 그웬?”
“그이를 되살리려고.”
“그이?”

 에드윈은 그녀의 말에 혼란스러웠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웬은 계속 마법진을 그렸다.

“마침 잘 됐다. 너는 나보다 이런 거 더 잘 알잖아. 그리는 것 좀 도와줄래? 생각보다 어렵네.”

 그녀가 무슨 짓거리를 벌이려는지 에드윈은 어느 정도 예상했으나 믿고 싶지 않았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대체, 대체 뭘 하는 건데요.”
“말했잖아. 그이를 되살릴 거라고. 부활 의식의 마법진이야.”
“부활…….”

 차라리 묻지 말았어야 했다고 에드윈은 생각했다. 지금껏 부활을 시도한 강령술사들의 결말을 에드윈은 누누이 들었으며, 그가 연모하던 수녀가 부활에 손을 댔다가 산채로 심연에 끌려들어 간 것을, 그리고 그 자리에서 무시무시한 악마가 튀어나온 것을 본 적도 있었다. 그렇기에 에드윈은 세차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당장 그만두세요, 그웬. 이런 미친 짓을 했다가는…….”
“부탁이야. 도와줘.”
“안 돼요. 절대 안 돼요! 부활 같은 미친 짓을 제가 도우라고요? 그것도 당신이 하는 걸? 아뇨. 절대 그렇게는 못 해요.”

 그러면서 에드윈은 지팡이를 높게 들었다. 그러자 그웬의 표정이 짜증으로 일그러졌다.

“그럼 방해하지 마.”

 그웬이 손을 뻗자 붉은 촉수 여럿이 튀어나와 순식간에 에드윈을 옭아맸다. 마족의 마법이었다. 그는 온몸이 묶인 채 발버둥 치다 주문해제를 재빠르게 외쳐 벗어났다. 바닥에 떨어진 그는 정신없이 바닥을 더듬거리며 지팡이를 쥐고는 촉수가 다시 그를 옭아매기 전에 먼저 순간이동으로 사라졌다.
 방해꾼이 사라지자 그웬은 다시 바닥에 마법진을 그렸다. 마법서의 삽화대로 마법진이 완성되자 붉게 빛이 나기 시작했다. ‘다 됐다.’ 그웬은 희미하게 웃었다. 그때 갑작스러운 진통에 그녀는 마법진 중앙에 주저앉았다.
 의식은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8. 열 달 후, 왕국 궁정

 에드윈은 벌벌 떠는 손으로 담배에 불을 붙였다. 알리스터는 그가 전한 충격적인 소식에 허공만 멍하니 바라보았다. 국왕이 그러고 있자 떨면서 담배를 피우던 에드윈이 말했다.

“시간이 없어요, 알리스터. 빨리 막아야 합니다.”
“……어떻게?”

 알리스터는 의지가 없었다. 그 모습을 보는 에드윈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제 그웬은 그냥 마족이에요. 그렇게 생각하세요. 지금 당장 위크힐 요새로 가서 그웬을 막아야 해요. 악마가 또 튀어나오는 꼴을 두고 볼 수는 없어요.”

 그 말을 들은 끝에 알리스터는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전령을 불렀다.

“지금 당장 루시아와 에이리크에게 위크힐 요새로 병력을 이끌고 오라고 전하게. 상아탑의 마법사들에게도! 당장 차출할 수 있는 병력을 모두 동원해서 위크힐 요새를 포위하라고 전하라.”
“예, 전하. 포위하면 바로 공격하라고 할까요?”

 알리스터는 고개를 저었다.

“……명령이 있기 전까지는, 공격하지 말라고 하라.”

9. 열 달 후, 위크힐 요새

 알리스터는 기도했다. 아무도 없는 위크힐 요새를 나아가며, 에드윈이 건넨 실타래를 따라가며, 제발 그가 틀렸기를 기도했다.
 점점 그웬이 있는 성탑으로 다가갈 때마다 마법 재능이라고는 없던 알리스터조차 무시무시한 마력을 느낄 수 있었다. 거대한 마법의 힘이 왕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발걸음 하나하나가 힘겨워졌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성탑에 도착했을 때 그는 손을 뻗는 것조차 어려웠다. 성문 안에서는 그웬의 힘에 부친 신음과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힘겹게 문을 열었다. 그곳엔 그웬이 있었다.

“드디어 오셨군요, 전하.”

 그웬은 알리스터를 올려다보았다. 알리스터는 그녀의 얼굴에서 아래쪽으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녀의 피투성이 다리 사이로 이어진 탯줄, 그 끝에서 갓난아기가 울고 있었다. 그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웬의 손에는 단도가 들려있었다. 그녀는 옆에 놓인 깃발을 집어 들더니 다섯 해 전 앨런이 묻힌 핏자국을 단도 끝으로 긁었다. 그녀가 중얼거리자 핏자국은 그대로 액체가 되어 단도를 새빨갛게 물들였다.

“이제 보세요. 앨런이 다시 태어날 거예요.”
“그만하게, 다피리스!”
“여기까지 왔는데 그만둘 수는 없어요.”
 
 그웬은 단도를 양손에 쥐었다. 자기 운명이 어찌 될지 모르고 우는 아이 위에 단도가 자리 잡았다. 그웬은 주문을 읊기 시작했다. 알리스터는 이를 막기는커녕 마법진에서 뿜어져 나오는 엄청난 힘에 눈을 뜨기도 어려웠다. 그렇다고 그저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알리스터는 대신 칼을 뽑았다. 칼날이 뽑히며 소름 끼치는 소리를 냈다. 그는 칼을 크게 뒤로 뻗었다.

“그만두게, 제발, 제발…….”

 그웬은 무시했다. 그녀가 멈출 생각이 없음을 깨달은 알리스터는 눈물을 주르륵 흘리며, 속삭이듯 말했다.

“사랑하오, 그웬.”

 알리스터는 비통에 찬 기합을 내지르며 그웬을 향해 힘껏 칼을 던졌고, 동시에 그웬은 단도를 아기에게 찔러 넣었다. 엄청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알리스터는 팔로 눈을 가렸다.
 성탑에서 나온 빛은 마치 앨런이 죽었을 때처럼 온 세상을 가득 메웠다. 요새를 포위한 루시아와 에이리크, 에드윈 모두 그 빛을 멍하니 보고만 있었다.

10.

 알리스터는 팔을 뗐다. 앞에는 열네 살 남짓한 소년이 가슴에 칼을 맞고 쓰러진 그웬의 얼굴을 한쪽 무릎을 꿇은 채로 어루만지고 있었다. 그웬은 빙그레 웃으며 소년의 뺨을 어루만졌다.

“돌아왔구나, 앨런…….”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웬이 계속 말을 이었다.

“넌 나를 그 끔찍한 구렁텅이에서 구해줬어. 넌 나의 구원자였어. 나도 널 구원하고 싶었어.”

 그웬은 힘겹게 미소 지었다.

“하지만 이젠 반대가 됐네…….”
“모두 다 괜찮을 거야, 그웬. 언제나 그랬잖아.”

 앨런은 그웬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웬의 보랏빛 눈동자는 그렇게 영원히 생기를 잃어버렸다. 앨런은 그녀의 눈을 쓸어내리더니 슬픔을 못 이기고 눈물을 흘렸다. 한참 후에야 앨런은 일어서서 그녀의 몸에 박힌 칼을 뽑아내었다.
 앨런이 고개를 돌리자, 그 모습을 본 알리스터는 그대로 주저앉아버렸다. 하늘거리는 붉은 머리칼, 눈처럼 새하얀 피부, 남자가 보아도 아름다운 그 얼굴. 모두 그의 것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앳된 소년의 모습, 그리고 그웬과 자신의 눈동자 색이 하나씩 들어간 그의 눈뿐이었다. 앨런은 알리스터의 칼을 주인에게 들이밀며 다가왔다.

“전 왕자님께 그웬을 부탁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헌데 왕자님께선 그 약속을 무시한 모양입니다.”

 알리스터는 말이 없었다.

“그토록 그웬의 사랑을 갈구하셨으면서, 결국 그녀를 죽이셨군요. 저는 왕자님을 믿었는데요.”

 앨런의 비난에 알리스터는 눈물을 흘리며 말을 토해냈다.

“처음부터, 처음부터 난 자네의 부탁을 들어줄 수 없었소. 자네의 유언을 이룰 수 있는 일말의 가능성조차 없었소. 자네가 내게 그웬을 부탁한다고 한 그 순간부터, 이 일은 예견되어 있던 거요. 난 그대의 말을 지키고 싶었으나, 결국 그녀를 슬픔에서 구해줄 수 없었소. 그녀를 행복하게 해주기는커녕 그녀 가슴에 그 칼을 찔러 넣었구려. 난 용서받지 못할 것이외다. 하늘의 신들에게도, 심연의 여신에게도, 그녀에게도, 자네에게도, 그리고 나 자신조차도. 이제 난 누구에게도 받지 못할 구원을 기다리는 그런 사람이 되어버렸구려.”

 앨런은 다시 뒤돌아 그웬을 끌어안았다. 그는 알리스터를 노려보며 말했다.

“알리스터.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될 겁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앨런과 그웬의 몸이 빛나기 시작했다. 그때 문이 벌컥 열리고 에드윈, 루시아, 에이리크, 그리고 병사들이 성탑 안으로 들어왔다. 그 순간 두 사람을 감싼 빛이 폭발하더니 두 사람은 사라졌다. 빛이 사라지자 에드윈이 놀란 얼굴로 중얼거렸다.

“……앨런?”

11.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청색 들판

“그웬.”
“네, 아바마마.”

 그웬돌린은 알리스터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알리스터는 손가락으로 반대쪽 끝 마족군의 선봉장을 가리켰다.

“저기 저 은색 갑옷의 기사가 보이느냐? 새로운 마왕 말이다.”
“네, 보입니다.”

 그녀는 자기 눈을 의심했다. 은빛으로 빛나는 모습은 마왕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사람을 홀리고 매혹하는 악마적인 매력이 아니라 기품 넘치고 신성하기까지 한 그런 아름다움이었다.

“정말 마족이 맞는 건가요, 아바마마?”

 알리스터는 그 말에 똑바로 대답하지 않고, 대신 다른 말을 했다.

“그토록 아름답고 기품 있던 세계의 구원자가, 이번엔 세상에 파멸을 부르려 하는구나.”

 그웬돌린은 아버지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의 얼굴이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수심 가득해, 감히 물어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러던 중에 알리스터가 물었다.

“그웬, 내 딸아. 혹 사랑하는 사람이 있느냐?”

 그러자 그웬돌린은 얼굴을 붉혔다. 그녀가 대답하지 못하자 알리스터는 괜찮다는 듯 옅게 웃었다.

“혹여 네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이가 있다면, 이 전투가 끝나고 나서 네 위치, 평판 같은 것은 신경 쓰지 말고 쟁취해라. 나는 그러지 못해서 평생을 고통 속에 살았구나. 자, 그럼. 싸우러 가자꾸나. 세상을 위해서.”

 알리스터는 투구를 쓰고는 칼을 뽑아 들었다.

“전사들이여! 전진하라!”

 왕과 공주의 뒤를 따라, 수많은 인간 기사들이 들판을 가르며 나아갔다. 언덕 위 상아탑의 마법사들은 불덩이를 던졌고 난쟁이와 요정은 적들을 포위하듯 전진했다. 그러자 마왕도 칼을 높이 들었다. 이전에 그가 왕에게서 가져간 왕가의 검이었다. 그가 외치자 마족들 역시 함성을 길게 내지르며 돌진했다.

 다시 한번, 최후의 전투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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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즈베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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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부와 반역자의 이야기

 

 엘로이즈는 오늘의 마지막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목욕통에 들어가 있었다. 그녀는 대부분의 창부들과는 다르게 노예도, 전쟁포로도, 빚쟁이도 아니었기에 그녀가 원하는 때 아무 때나 그녀가 원하는 사람을 고를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 손님은, 설명만 듣고 고르긴 했지만, 꽤나 급한 모양이었다.

 

"엘로이즈? 손님이 왔어요."

"……벌써?"

 

 그녀와 친분이 있는 소녀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엘로이즈의 되물음에 어린 창부는 그저 어깨만 들썩일 뿐이었다.

 

"기다리라고 해."

"안 돼요."

 

 소녀의 말에 엘로이즈는 고개를 돌렸다.

 

"화대를 두 배로 냈는걸요. 빨리 보고 싶다고. 이미 방에서 기다리고 있고요."

 

 엘로이즈는 따듯한 물이 담긴 목욕통에 머리를 기대며 길게 한숨을 쉬다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의 아름다운 몸을 타고 물방울이 흘러내렸다. 소녀는 그녀의 몸을 힐끗 보았다. 같은 여자인 자신이 보아도 아름답다고 느껴지는, 갖고 싶어 시기심이 생겨나는 그런 몸이었다. 엘로이즈는 스스로 몸을 닦고, 옷을 챙겨 입고는 소녀에게 알려줘서 고맙다 말하며 손님이 기다리는 방으로 향했다.

 그녀는 유명했고 이 홍등가에서는 감히 건드리지 못할 높은 자리에 위치한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이런 상황이 불쾌했다. 언제나 남녀, 혹은 여자 간의 관계에서 우위에 있던 사람은 그녀였고 그 우위는 상대를 기다리게 하는 것에서부터 시작이었다. 상대는 두 배의 화대를 미끼로 그 우위를 빼앗으려드는 것이다.

 시작부터 우위를 빼앗긴 엘로이즈는 그녀의 방문 앞에서 불쾌함과 짜증으로 굳은 자신의 얼굴을 풀며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사람들이 그 비싼 화대를 그녀에게 주는 것은 그녀의 짜증으로 굳어버린 얼굴을 보기 위함이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물론, 일부 특이한 취향의 사람들이 있기는 했지만. 그녀는 방문을 열기 전에 깊게 심호흡을 하며 문을 열었다. 나를 이렇게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누구일까, 어디에서 온 사람일까, 긴 생각을 하면서.

 그리고 그녀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정말일까 의심은 했었다만, 진짜로 여기서 이런 일을 하고 있었을 줄이야."

  

 침대에 걸터앉아있던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짧고 단정하게 깎은 머리, 턱과 입가에 난 흉터, 떡 벌어진 어깨. 빛나는 파란색 눈. 엘로이즈의 눈에 너무나도 익숙했고 그렇기에 너무나도 두려운 얼굴이었다.

 

"너, 너, 너는……."

 

 엘로이즈가 뒷걸음질 치며 물러서자 남자가 다급하게 달려들듯 다가와 문을 쾅 닫았다. 닫힌 문과 남자 사이에서 엘로이즈는 두려움에 벌벌 떨며, 금방이라도 눈물을 폭포수처럼 와락 흘릴 것만 같은 얼굴로 똑같은 말만 중얼거렸다. 엘로이즈가 공포에 질려 움직이지도 못하자 남자는 천천히 오른손을 어느새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더니 물러섰다.

 적당히 뒤로 물러선 그는 크게 한 번 숨을 들이마셨다 내쉬며 눈을 감았다. 그러더니 이내 예를 갖춰 허리를 숙여 인사하며 말했다.

 

"6년 만에 인사드립니다, 엘로이즈 공주님."

 

 그가 고개를 들자 보인 것은 엘로이즈의 날아드는 손이었다. 그녀의 손톱에 남자는 미처 피할 새도 없이 뺨을 긁혔다. 핏방울이 뺨을 타고 아래로 흘러내렸다. 엘로이즈의 얼굴은 공포에서 어느새 분노로 바뀌어 그를 계속 때리며 외쳤다.

 

"네가, 네가 어째서 여기 있는 거지? 네놈이 무슨 낯짝으로 여기에 온 거야!"

"……공주."

 

 자신을 계속해서 때리는 엘로이즈의 손목을 잡으며 남자는 작게 중얼거렸다. 남자의 손아귀 힘에 엘로이즈는 감히 팔을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남자는 고개를 살짝 두어 번 가로젓고는 말했다.

 

"나는 얘기를 하러 온 거야."

"거짓말! 내 언니오빠들처럼 잔인하게 죽여 버리려고 왔겠지! 새 왕조의 개가 되어서!"

"하아."

 

 남자는 엘로이즈의 손을 놓았다.

 

"어떻게 해야 당신께 믿음을 줄 수 있겠나, 그럼?"

"나가. 당장!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마!"

"그럴 수는 없어."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난 당신을 만나러 오랜 시간동안 온 왕국을 찾아다녔어. 그런데 이렇게, 이제 와서 너를 만났거늘 날 이렇게 비참하게 쫓아내겠다고?"

 

 남자가 다가오자 엘로이즈는 뒷걸음질 쳤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등은 나무 문짝에 부딪혔다. 그러자 그녀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경비! 경비! 이 남자 쫓아내! 빨리!"

 

 얼마 지나지 않아 엘로이즈의 다급한 외침을 들은 장정들이 문을 부수듯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장정들은 어깨와 목을 풀며 금방이라도 남자를 때려눕힐 준비를 했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이정도만 해도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엘로이즈는 덩치 좋은 이방인 경비 뒤에 숨어 남자를 노려보았다. 남자는 하는 수없이 일어섰다. 경비들이 그의 팔을 붙잡자 그는 그대로 밖으로 끌려나왔다. 나가는 동안 두 명의 경비가 엘로이즈를 지켰다. 남자가 저 멀리 사라지자 엘로이즈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경비의 뒤에서 나왔다. 

 

"괜찮아?"

"고마워……. 파리드."

 

 엘로이즈는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고, 이방인은 고개만 끄덕일 뿐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러나 또다른 경비는 불안한 듯 자꾸 복도로 고개를 기웃거렸다. 그러더니 그가 중얼거렸다.

 

"저 사람……. '왕족살해자' 조슬랭이잖아?"

 

=========

 

 엘로이즈는 며칠 간 손님을 받지 않았다. 그녀는 매일 같이 울었고 자기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 매일 그녀와 친분을 맺었던 이들이 그녀를 찾아가 위로했으나 그녀의 눈물은 멈출 줄을 몰랐다.

 그녀가 틀어박혀 나오지 않는 동안, 사창가의 창부와 왈패들은 그 악명 높은 '왕족살해자'가 그녀를 두 배의 화대까지 지불해가며 찾아왔다는 사실에 이상해했다. '왕족살해자' 조슬랭 드 샤티뵈는 6년 전 옛 왕가, '드 테르누아'의 사람들을 모조리 죽이고 그 대가로 왕족의 영지였던 땅을 수여받은, 최악의 배신자이자 반역자였다. 더욱이 이상한 건 그가 엄청난 돈을 지불해가며 그녀에게 손님이 가지 못하도록 막아버린 그의 행동이었다. 손님을 받지 않아도 아무 문제 없을 정도로 많은 돈을 안긴 그를 보며 많은 이들이 엘로이즈를 부러워했지만 동시에 두려워했다. 최악의 반역자가 그녀를 자기 것으로 만든 셈이니까.

 

"엘로이즈."

 

 방에 틀어박힌 그녀에게 파리드가 방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그 사람이 또 찾아왔어. 어떡할래? 오늘도 그냥 보낼까?"

 

 조슬랭은 이틀에 한 번씩 그녀를 만나러 찾아왔으나 지금까지는 그녀가 모두 거부해 돌아갔다. 그러기를 여러 번이었다. 엘로이즈는 이불에 파묻은 얼굴을 들고 문을 보았다.

 

"엘로이즈?"

 

 그녀가 아무 말도 없자 파리드는 긴장한 목소리였다. 그가 계속 문을 두드렸다. 파리드의 머릿속에 불안한 상상이 떠올랐다.

 

"엘로이즈? 엘로이즈? 괜찮아? 엘로이즈?"

"난……. 괜찮아. 그만 두드려."

"다행이네."

 

 문 밖에서 그의 한숨이 들려왔다.

 

"어쩔 거야? 아무 말도 안 하면 그냥 돌려보낼게."

 

 파리드는 당연히 그렇게 하겠거니 생각하며 확신하듯 말했다. 지금까지 엘로이즈는 그렇게 했었으니까. 하지만 방 안에서 들려온 그녀의 말은 파리드의 그런 확신을 깨부쉈다.

 

"들여보내."

"응? 뭐라고?"

"들여보내라고. 그 사람. 조슬랭 말이야."

"괜찮겠어? 그 조 어쩌고."

"괜찮대도."

 

 파리드는 갑작스러운 엘로이즈의 심경 변화와 '왕족살해자'에 관한 수많은 안 좋은 소문 때문에 찜찜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엘로이즈의 요구를 거절한 적이 없었고 이번에도 거절하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리고 바로 앞에는 조슬랭이 서 있었다. 뒤에서 파리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소리 질러. 종을 울려도 되고. 조금이라도……."

"걱정하지 마."

 

 파리드는 엘로이즈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기는 했지만 여전히 남자를 믿을 수 없었는지 조슬랭을 노려보다가 슬금슬금 물러서더니 이내 사라져버렸다. 조슬랭은 문을 잠그고는 여전히 얼굴을 파묻은 채 눈만 살짝 들어 자신을 흘겨보는 엘로이즈의 앞에 의자를 갖다 놓고 앞에 앉았다. 그는 엘로이즈를 보며 한숨을 길게 쉬고는 말했다.

 

"열이틀이 지난 지금에라도 나를 들여보내준 건 날 믿겠다는 뜻인가?"

 

 엘로이즈는 대답하지 않았다. 조슬랭은 또다시 한숨을 쉬었다.

 

"난 그저 얘기하고 싶었어. 지금까지 너와 내가 쌓았던 기억들, 네가 없어진 후로 겪었던 많은 일들……. 왜 믿어주지를 않는 거야?"

 

 엘로이즈가 여전히 대답하지 않자 조슬랭은 고개를 숙였다. 그는 그 상태로 한참을 있었다. 무언가 생각하는 것 같기도 하고 기도하는 것 같기도 한 모습이었다. 정말이지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조슬랭이 그 자세 그대로 다시 입을 열었다.

 

"……처음 만났을 때 기억나? 대체 얼마나 오래됐을까. 거의 10년은 된 것 같아. 그래. 10년. 10년이었던 것 같네. 그때 넌 열두 살짜리 어린 꼬마 아가씨였지. 정말 귀엽고,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조슬랭은 다시 말을 멈췄다. 그는 갑자기 피식 웃었다.

 

"넌 귀엽고 재밌는 아가씨였어. 일개 근위병인 나를 졸졸 따라다니고, 장난치고, 가끔은 날 못살게 굴기도 했지. 때때로 화가 나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그렇게 기분 나쁘지는 않았어. 물론, 그때 네가 마구간의 말들을 죄다 풀어버리고는 그걸 나한테 뒤집어 씌웠을 때는 정말 위험했지."

 

 그는 끅끅 웃어댔다. 하지만 그 웃음에는 어딘가 안타까움이 묻어났다. 엘로이즈가 아무런 말이 없자 그는 그 상태로 엘로이즈의 눈치만 보다 결국 고개를 숙였다.

 

"……나는 아무런 말도 안 했어."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엘로이즈가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목소리에 조슬랭은 살짝 놀란 얼굴을 하며 고개를 들었다. 

 

"난 그저 널 바라보았을 뿐이야. 다른 사람들이 오해한 거고."

"……그랬지. 그것 말고도 넌 많은 거짓말을 했었지만."

"넌 바보처럼 다 속아 넘어갔었고."

 

 조슬랭은 피식 웃어보였다. 그러고 그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어느새 그의 얼굴엔 그의 상처투성이 손이 올라가있었다. 눈가를 만지는 그의 손은 언뜻 보면 눈물을 닦아내는 것 같기도 했다. 그가 그 상태로 말이 없자 엘로이즈가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그가 말이 없자 이번엔 엘로이즈가 입을 열었다.

 

"공주를 대하는 예의는 다 어디로 팔아먹은 거지, 조슬랭 드 샤티뵈? 아무리 내가 지금은 길거리를 쏘다니는 거지와 한량에게도 몸을 파는 천한 창녀라고 하지만 한 때 나는 네 공주였고 너는 지금도 나를 공주로 부르고 있는데. 말과 행동이 다르다니, 근위병답지 않은걸."

 

 조슬랭이 대답했다. 

 

"……난 이제 근위병이 아니야. 너도 이제 공주가 아니고."

 

 조슬랭은 그러면서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공주께서 원하신다면 언제든지 그때처럼 돌아가겠습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그녀에게 인사했다.

 

"조슬랭 드 샤티뵈, 다시 한 번 엘로이즈 공주님께 인사드립니다."

"좋아. 이제 보기 좋네. 앉아도 좋아. 경어는 생략하도록."

 

 엘로이즈는 후후 웃었고 조슬랭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는 이번엔 고개를 뻣뻣이 들고는 엘로이즈를 바라보았다. 예전 그때처럼. 그러자 엘로이즈가 회상에 잠기며 중얼거렸다.

 

"옛날 일이 자꾸 떠오르네. 왕실 무술 경기를 할 때가 기억나. 멀리서 보는 넌 꽤나 대단했었어. 어디 대단한 가문 출신도 아닌 네가 온갖 귀족들을 다 쳐부수고 당당히 승리하는 그 모습……."

"그래. 정말이지 대단했지. 그때는."

"하지만 결국 우리 오빠에게 졌잖아. 참 바보 같이."

 

 엘로이즈의 머릿속에 그 옛날의 모습이 떠올랐다. 무참히 패배하고 바닥에 쓰러져 항복을 외치는 바보 같고 한심한 모습. 그녀가 기억하는 조슬랭은 그런 사람이었다. 

 

"하하……. 왕자님도 참 무자비하시더라고. 바닥에 쓰러져서 기는 나를 그렇게 내리쳐서 죽일 기세로 싸우셨으니."

"맞아. 그러고 보니 너 항복을 외친 다음 그대로 기절했잖아."

 

 조슬랭의 머릿속에도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루이 왕자가 든 무기는 날을 죽인 칼이었으나 위험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서로 갑옷을 입고 있었다하더라도 조슬랭은 그때 정말 죽는 게 아닐까하는 두려움을 느꼈다. 정신을 잃기 전 흐려지는 눈빛이 그에게 떠올랐다. 그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이제 와서는 웃을 수 있는 일이니까. 그는 다시 고개를 들고 엘로이즈를 바라보았다.

 

"깨어나니까 네가 있었지. 눈이 잔뜩 부어있었어. 울었던 모양이야."

"거짓말."

"내 기억이 잘못됐을 수도 있지. 하지만 난 그렇게 기억해. 넌 슬퍼하고 있었고 울고 있었어. 그리고 내 입가를 닦아줬었어."

"손수건으로."

 

 조슬랭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엘로이즈가 말을 덧붙였다.

 

"그건 네가 나한테 줬던 거였어. 인형이 없어졌다고 울던 내 얼굴을 닦아줬던 거잖아. 뭐라고 말했더라. '아름다운 얼굴로 엉엉 울고 있는 걸보자니 참으로…….'"

"참으로 못나 보인다고, 그렇게 얘기했어. 나를 아주 힘껏 때리더군."

"그래서 내가 돌려줬잖아. 내 이름 새겨가지고."

 

 생각에 잠긴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만면에는 웃음기가 가득했다. 그는 하 소리를 내며 의자 등받이에 기대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하아. 공주가 자기 이름을 손수 새긴 손수건이라니.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정말 대단한 물건인데."

"그래서. 어쨌어?"

"뭐가? 손수건?"

 

 엘로이즈는 약간의 살짝 기대를 담은 눈으로 옛 근위병을 바라보았다. 근위병은 한숨을 쉬더니 이윽고 급격히 어두워진 표정을 지었다. 그는 웅얼거리며 말했다.

 

"……잃어버렸어."

"뭐라고?"

"잃어버렸다고……. 6년 전에"

 

 6년 전. 그 이야기가 나오자 마치 얼음 그 자체를 방 곳곳에 끼얹은 듯 순식간에 공기가 얼어붙었다. 조금이나마 웃음기를 띄고 있던 엘로이즈의 얼굴은 어느새 6년 전 그때와 같이 슬픔과 공포와 분노로 감히 무어라 얘기하기 어려울 정도의 얼굴이었다.

 

"그때……."

 

 엘로이즈의 얼굴을 본 조슬랭은 그 얘기를 꺼낸 것을 깊이 후회했다. 그녀는 금방이라도 분노를 터트릴 듯 조슬랭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녀가 입을 열기 전에 조슬랭은 손을 내저었고 그녀는 입을 멈추었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 일은 입 밖에 꺼내지 않도록 하자고. 얘기하기 싫은 건 피차일반이잖아."

 

 엘로이즈는 무어라 말하려고 했으나 조슬랭의 말에 이내 입을 다물었다. 그는 등받이에 머리를 기댔다. 그러고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두 사람은 한참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조슬랭도 엘로이즈도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길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 뒤로도 한참, 조슬랭은 침묵을 깨고 옅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때 그 일들이 끝나고……. 너 혼자 살아남아 베랑게르 공 앞에 끌려왔을 때, 그는 네게 자신과 혼인하면 살려주겠다고 했었잖아. 그때 네가 그렇게 외쳤지. '너 따위와 결혼해서 정통성을 위한 도구가 되느니…….'"

"차라리 창녀가 되겠다고. 그렇게 말했지……."

"그 말이 정말로 이루어지다니. 세상 앞날은 알 수 없는 것이로군."

"내가 선택한 거야."

 

 조슬랭은 등받이에서 뒤통수를 떼고 엘로이즈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무릎을 끌어 모은 채 얼굴을 파묻은 상태로 말했다.

 

"어차피 바느질 같은 것 말고는 할 줄 아는 것도 없었어."

"슬프지 않아?"

 

 조슬랭이 물었다.

 

"가장 아름답고 총명하고 또 고귀했던, 그래서 이 나라의 보석이라고 여겨지던 네가, 이름도 모를 하찮은 쓰레기들에게 몸을 내주고 있는데. 다른 사람이 보기엔 상상도 못할 정도로 비참한 일이잖아. 하늘 높이 있던 네가, 지옥 밑바닥까지 떨어져버렸는데."

"아니."

 

 그녀는 조금의 주저도 없이 대답했다.

 

"여기서는 자유로이 있을 수 있어. 그래, 처음엔 많이 힘들었지. 하지만 금세 괜찮아지더라고. 여기서의 난 그때처럼 사랑받는 사람이야. 그 사랑의 형태가 조금……. 다를 뿐인 거고. 아니, 같을지도 모르겠네. 그때도……."

 

 그녀는 순간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고 조슬랭의 표정도 급격히 어두워졌다. 조슬랭은 눈가를 문지르며 말했다.

 

"그런 말은 말아."

"어쨌든. 여기는 왕궁과 달라. 내 겉모습과 내가 하는 일은 하찮고 처량할지 몰라도 여기에서 난 그 누구보다 더 행복하다고. 내가 불행하다고 얘기하지 마. 불행하다고 생각하지도 말고. 난 행복해. 자유로워. 공주로서의 나보다 훨씬 더. 너 역시 근위병으로서의 너보다 지금이 훨씬 더 행복하겠지. 안 그래? 더 많은 부, 더 많은 권력……. 무엇보다 널 괴롭히는 꼬마도 없고."

"……아니."

 

 조슬랭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모든 걸 잊고 지금을 즐기면 행복할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는데. 딱히 그러지도 않더군. 뭐, 아무래도 좋아. 이러나저러나 의미 없으니까."

 

 말을 끝낸 그는 말없이 창밖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해는 졌고 사방은 깜깜했다. 오늘은 아무런 일도 없는지 도시는 조용했다. 불이 켜진 집은 거의 없었다. 저 멀리 있는 시장 관저도 새벽처럼 최소한의 불빛만 보였다. 밖을 한참 보던 조슬랭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야겠네."

 

 엘로이즈는 대답 없이 조슬랭을 그저 보고만 있었다. 조슬랭 역시 딱히 대답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으나 아무 말도 없는 그녀에게 실망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는 뒤돌았다. 그때까지 엘로이즈는 말이 없었다. 그의 손이 문짝에 닿았다. 뒤에서 이불이 걷히는 소리가 들렸다. 조슬랭이 그 소리를 무시하고 나가려는데 여인의 손길이 거친 그의 왼손을 붙들었다.

 

"그거 알아? 난 아직도 네가 증오스러워. 하지만 오늘은 손님으로 온 거니까."

 

 조슬랭이 뒤돌았을 때 그는 그 옛날의 모습이 조금이나마 느껴지는 여인이 눈에 들어왔다.

 

"그저 직업적인 이유일 뿐이야."

 

 엘로이즈는 까치발을 들며 조슬랭의 까슬까슬한 입에 그녀의 보드라운 입을 맞추었다. 조슬랭은 그녀의 입에 자신에게 닿는 순간 온몸이 마비되는 것만 같았다. 그는 옛날 근위병처럼 공주의 말과 행동 하나하나에 순응할 수밖에 없었다. 엘로이즈가 그를 침대로 끌어오자 조슬랭은 정신을 잃은 사람과도 같이 멍청하게 누워있을 뿐이었다.

 

=========

 

 보름이 지나도록 조슬랭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엘로이즈에게 매일 오는 화대는 끊이지 않아서 그녀는 굳이 일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녀는 단순하게 시간을 보내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는 조슬랭이 왜 보름이 지나도록 나타나지 않는지 궁금해 했다. 걱정하는 게 아니야,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왠지 모르게 자꾸 조슬랭의 얼굴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조슬랭이 나타나지 않은지 열엿새 되는 날이었다. 도시 야경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발코니에서 차를 마시던 그녀에게 파리드가 다가왔다. 파리드는 그녀에게 요깃거리를 가져다주며 말했다.

 

"그 양반이 찾아왔어."

"누구?"

"조 어쩌고 말이야. 전에 왔던."

"조슬랭?"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파리드는 벌떡 일어난 그녀를 보고 놀라 뒷걸음질 치고는 한숨을 한 번 쉬었다.

 

"놀랬네."

"그, 그래. 마침 잘 됐네. 들여보내."

 

 파리드는 고개를 한 번 까딱이더니 말했다.

 

"그 녀석 표정이 영 안 좋던데."

"응?"

"어딘가 불안해보이고 어두워보였어. 그냥 보내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아니야. 괜찮아. 그 녀석이 날 해할 리는 없어."

 

 엘로이즈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분명 괜찮을 거야……."

 

 파리드는 쯧, 혀를 한 번 차고는 말도 없이 뒤돌아 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조슬랭이 방문을 열고 나타났다. 그는 엘로이즈를 보고는 한 번 예를 갖춰 인사하더니 천천히 다가와 엘로이즈의 앞에 앉았다. 과연 파리드의 말대로 그의 표정은 굳어있었다. 그 표정은 슬프기 보다는 불안하다는 느낌의 어두움이었다. 그는 엘로이즈를 한 번 보더니 무어라 말하려 입을 잠깐 열었다 다시 닫았다. 그러고는 엘로이즈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것이었다. 엘로이즈는 그의 모습을 보고는 그녀 자신도 불안해졌다. 그가 무슨 말을 할지, 무슨 짓을 할지 아무도 모르니까.

 

"무슨 일이야? 왜 그런 표정을 하고 있어?"

 

 엘로이즈의 물음에 고개를 숙인 채 가만히 있던 조슬랭이 퍼뜩 정신을 차리며 고개를 들었다. 그는 손을 가만두지 못하며 말을 못하고 있었다.

 

"빨리 말해."

"……그래. 알았어."

 

 조슬랭은 결심한 듯 눈을 감은 채 한 번 크게 심호흡하고는 다시 눈을 떴다. 그는 엘로이즈를 똑바로 쳐다보며 얘기를 시작했다.

 

"왕이 죽었어."

"……베렝게르 왕이?"

 

 조슬랭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까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곧 찬탈자 베렝게르가 후사도 없이 죽었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지겠지. 그럼 그가 그랬듯이 많은 이들이 왕의 자리에 도전할 거야. 한참 전의 가계도를 뒤져가면서 왕이 될 이유를 댈 테고. 이 나라는 또다시 내전에 빠질 거야."

 

 엘로이즈는 아무런 말도 없이 그저 조슬랭을 놀란 얼굴로 바라 보고 있었다.

 

"널 찾은 건 그 때문이었어."

 

 조슬랭은 엘로이즈의 손을 잡았다. 그녀는 화들짝 놀라며 손을 빼려 했으나 조슬랭의 손은 너무나도 강했다. 그는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

 

"엘로이즈 드 테르누아. 6년 전 반란에서 죽은 클로드 왕의 마지막 딸. 너야말로 이 나라의 왕위에 앉을 자격이 있어. 네가 왕에 올라야 해."

"……뭐라고?"

 

 엘로이즈는 조슬랭의 손아귀에서 손을 강하게 뺐다. 그녀의 놀란 얼굴은 점점 분노로 붉어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조슬랭은 꿋꿋이 그녀에게 같은 말을 반복했다.

 

"이 나라는, 우리는, 나는……. 네가 필요해. 나와 함께 싸우자, 엘로이즈."

 

 그러면서 조슬랭은 허리에 찼던 칼을 칼집 채로 허리띠에서 풀고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 칼은 다름 아닌 엘로이즈의 아버지인 클로드의 것이었다.

 

"이 칼을 잡고서……."

"……헛소리 마."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녀는 금방이라도 칼을 뽑아 조슬랭의 목을 칠 것만 같은 분노의 표정으로 조슬랭을 보고 있었다.

 

"그때……. 넌 우리를, 나를 배신했어."

"그건……."

"그때 그렇게 우리 가족을 죽여놓고, 내 앞에서 그토록 잔인하게 내 언니오빠를 살해해놓고……. 이제 와서 뭐라고?"

 

 그녀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더니 조슬랭의 뺨을 후려쳤다.

 

"……내 말 좀 들어봐, 엘로이즈."

"네가 무슨 말을 하든 상관없어. 넌 나를 배신하고 그 반역자 놈에게 붙어서 우리 가족을 다 죽였어! 다른 사람도 아닌 바로 내 앞에서! 난 널 믿었는데! 너야말로 우리 가족을 지켜줄 거라고 그렇게 믿었었는데! 네 손에 묻은 그 피는 지금은 말랐겠지만 내 가슴속에 있는 그 핏자국은 아직도 흐르고 있다고!"

 

 엘로이즈는 불같이 말을 토해내고는 숨조차 쉬기 어려운지 거칠게 숨을 토해냈다. 어느새 그녀의 얼굴에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조슬랭은 고해성사하는 선 죄인처럼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네 손에 죽어간 불쌍한 사람들은 또 어떻고? 네 칼끝에 묻은 피에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들의 것도 있었어. 네가 지난 6년 동안 베렝게르 그 자식을 위해 수없이 짓밟은 사람들에 대해선 뭐라고 변명할 생각이야?"

 

 조슬랭은 얼굴을 문질렀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길게 숨을 토해내고는 그제야 그가 하고 싶었던 말을 내뱉었다.

 

"모든 건, 모든 건 널 위해서였어."

 

 조슬랭의 말에 엘로이즈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뭐?"

 

 조슬랭은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그의 눈가에도 눈물이 가득했다. 그는 울먹이며 말했다.

 

"널 위해서였다고."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조슬랭은 고개를 두어 번 가로저었다. 그는 눈물을 닦곤 자리에서 일어나 엘로이즈에게 다가갔다. 그가 다가올 때마다 엘로이즈가 조금씩 뒤로 물러섰고 그녀는 결국 뒤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조슬랭은 그녀 앞에 무릎 꿇고 앉아 그녀에게 말했다.

 

"그래……. 난 바보였어. 바보처럼 계속 네게 속았어. 네가 그런 비참한 얼굴로 국왕의 부름에 응하는 것을 보고도, 그건 그저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저 병간호일 뿐이라고, 그런 지나가는 3살 짜리 꼬마도 속지 않을 거짓말에 속아 아무것도 하지 못했어."

"……그 이야기는 하지 마."

 

 조슬랭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네 아비도 네 오라비들도 다 너를 고통스럽게 하고 괴롭혔는데도, 너를 딸이나 동생이 아니라 첩 따위로 여겼는데도, 나는 널 도와주기는커녕 네 거짓말에 속아 아무 일도 없었다고 생각했어. 애초에 내가 너의 말에 속지만 않았더라도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거야."

 

 그러면서 조슬랭은 어둠이 들어선 그녀의 얼굴에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녀는 이번에는 물러서지 않은 채 거칠고 상처투성이인 옛 근위병의 손길이 자기 얼굴을 어루만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어느새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조슬랭 역시 울먹이며,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낼 것만 같은 얼굴로, 슬픔 가득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속삭였다.

 

"그때 널 구했다면 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겠지. 미안해. 정말로……."

 

 엘로이즈는 눈물을 흘렸다. 그녀는 눈물을 토해내듯 오열했다. 조슬랭이 그녀의 눈가에 손을 갖다 대자 그녀는 거칠게 그 손을 뿌리치며 외쳤다.

 

"그 더러운 손 치워! 나를 위해서 그랬다는 건……. 좋은 변명이 아니야! 난……. 넌……. 왜, 왜……."

 

 그녀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감을 못 잡는 모양이었다. 조슬랭은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 역시 어떤 말을 해야 그녀를 안심시키고 눈물을 닦아낼 수 있는지를 몰랐다. 그녀는 바로 앞의 조슬랭을 주먹으로 마구 내리치며 말했다.

 

"왜, 왜 내 앞에 나타난 거야! 어째서! 나는 행복하게 잘 살고 있는데……. 이제야 그 악마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자유로워졌다고, 이제는 두려워 할 필요 없다고, 그렇게 믿었는데……. 왜 다시 나타나서 나를 괴롭히는 거야……. 제발……. 제발 꺼져……. 내 앞에서 당장 사라지라고……."

 

 그녀가 크게 소리치자 조슬랭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차마 표현하기도 어려운 슬픈 표정을 지으며 엉엉 우는 엘로이즈를 한 번 끌어안았다. 그의 옷이 엘로이즈의 눈물로 가득 젖어버린 후에야 그는 눈물을 멈출 기미가 없는 그녀를 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길게 한숨을 내뱉고는 탁자 위에 올려놓았던 칼을 들고 방 바깥으로 사라졌다.

 방 밖으로 나온 그의 뒤에, 안에서 여전히 엘로이즈의 울음이 들려왔다. 조슬랭은 그걸 무시하고 갈 용기가 없어서, 그저 문에 등을 기댄 채 바닥에 주저앉아, 억지로 소리를 막으며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

 

 내전의 참화가 도시를 덮쳤다. 조슬랭이 경고한 대로 많은 이들이 왕위를 노렸고 그 결과는 내전이었다. 이 나라의 사람들은 누군가를 선택해야 했고 이 도시는 시장의 잘못된 선택으로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홍등가의 여인들은 도시까지 쳐들어온 화를 피해 짐을 싸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언제나 괴악한 손님들로부터 그녀들을 지키던 깡패와 용병들도 강철과 화약과 명백한 살의 앞에서는 어린애처럼 무기력하게 벌벌 떨 수밖에 없었다.

 엘로이즈 역시 사창가를 떠나야 했다. 그녀는 조슬랭이 준 돈으로 배를 살 수 있었고 사람들과 함께 그쪽으로 떠날 준비를 했다.

 

"모두 준비됐어?"

 

 파리드가 건물 안으로 들어서며 외쳤다. 굳이 대답을 들을 필요는 없었다. 엘로이즈를 필두로 건물 안의 모든 사람들이 한데 모여 있었다. 그때였다. 포탄 하나가 건물을 뚫고 사람들이 있는 곳 위에 바로 떨어졌다. 그들은 혼비백산하여 질서를 잃고 밖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엘로이즈는 그들의 물결에 밀려 이리저리 휩쓸려갔다.

 

"파리드!"

"여기야! 엘로이즈!"

 

 그녀는 이방인의 손을 잡아 무질서의 파도에서 빠져나왔다. 그녀는 그녀와 친분이 있는 어린 창부의 손을 같이 맞잡고 파리드의 인도를 따라 부두로 향했다.

 그곳은 이미 도망치려는 사람들로 혼란 그 자체였다. 지옥의 모습을 그리라고 한다면 이곳을 배경으로 삼는 게 어울릴 정도였다. 엘로이즈는 급하게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돈을 내지 않았음에도 배에 뛰어오르려고 안간힘을 쓰는 사람들을 막는 선원들과 그 뒤에 돛을 내리고 출항 준비를 하는 배 한 척이 보였다. 엘로이즈의 배였다.

 

"저기야! 빨리!"

 

 셋은 사람들을 뚫고 배로 향하려고 했으나 사람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벽은 감히 뚫을 수가 없었다. 파리드는 안간힘을 쓰다가 결국 하는 수 없이 허리춤에 찬 총 한 자루를 뽑아 하늘에다 겨눴다. 그리고 방아쇠를 당겼다.

 폭음을 신호로 사람들이 썰물처럼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 틈을 타서 파리드가 재빨리 둘을 데리고 배로 향했다. 세 사람이 선원들을 뚫고 배 위에 올라타는 순간 뒤에서 함성과 함께 침략군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마구잡이로 사람들을 향해 칼을 휘두르고 총과 활을 쏘아댔다. 안 그래도 시끄럽고 혼란스럽던 부두는 지옥 그 자체로 변하고 말았다.

 세 사람은 끔찍한 참상을 그녀가 조슬랭의 손을 잡지 않은 결과를 눈앞에서 똑똑히 지켜보았다.

 

=========

 

 오랜 시간이 지났다. 이 사막 땅에 온지 거의 3년은 지났을 것이었다. 파리드는 고향을 찾아 다시 떠났으나 엘로이즈와 어린 소녀는 처음 도착한 해안 도시에 남았다. 처음엔 힘들었다. 그러나 그녀들은 그녀가 샀던 배를 시작으로 상단을 일으켰고 이윽고 성공해 부유해졌다. 그녀, 엘로이즈의 상단은 어느새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여전히 전란이 멈추지 않는 고향에서 세 사람이 그녀를 찾아왔다. 자리에 앉아 세 살이 된 그녀의 아들을 소녀와 함께 돌보던 그녀는 손님이 왔다고 말하는 하인의 말을 듣고 그들을 들여보냈다.

 남자 둘 여자 하나로 이루어진 셋. 그들은 하나같이 얼굴에 끔찍했던 그동안의 시간을 새긴 모양이었다. 그들은 어두운 얼굴을 한 채 밝은 얼굴의 엘로이즈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를 찾아오셨다고요?"

 

 셋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가장 왼쪽에 앉아 있던, 연장자로 보이는 남자가 말했다.

 

"조슬랭 경을 기억하십니까?"

"……조슬랭 드 샤티뵈?"

 

 셋은 또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한숨을 쉬더니 옆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아이와 노는 소녀를 돌아보았다.

 

"카트린. 잠깐 자리 좀 비켜줄래?"

"네, 엘로이즈."

 

 소녀는 아이를 안고 자리를 나섰다. 그러자 자리에 앉았던 남자 하나가 소녀를 따라 나섰다. 두 사람이 아이를 데리고 노는 동안 남은 둘은 엘로이즈와 얘기를 나누었다.

 

"저 아이……. 파란색 눈이군요. 당신의 눈은 갈색인데요."

"무슨 말을 하려는 거죠?"

 

 엘로이즈는 대답을 회피했다. 그러자 여자가 허리에 찼던 칼을 칼집째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 칼은 평범한 장검이었으나 그 칼집 끝에는 노란색 손수건 하나가 묶여 있었다.

 

"이건……."

"조슬랭 경의 검입니다."

 

 여자는 슬퍼하는 기색을 보이며 말을 이었다.

 

"반 년 전에……. 조슬랭 경께서 전사하셨습니다. 경께서 돌아가시기 직전에 당신을 찾아가라고 하시더군요."

"아……."

 

 엘로이즈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대답했으나 그녀의 놀란 얼굴을 숨길 수는 없었다. 그러자 이번엔 남자 쪽이 말했다.

 

"경께서 이런 말도 하셨습니다. 엘로이즈 양을 찾아뵈면 이렇게 말하라고 했죠. 다시 네 자리에 오르는 걸 원한다……. 라고요."

"엘로이즈 양. 아니, 엘로이즈 공주님."

 

 여자가 말했다.

 

"제발, 왕국은 무너지기 직전입니다."

"조슬랭 경께서 모시던 이들도, 그분과 적대하던 이들도, 이젠 다 죽었습니다. 하지만 내전은 끝이 나질 않습니다. 왕을 사칭하는 이들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엘로이즈 공주님. 다시 돌아와 왕위에 앉아주십시오."

 

 하지만 엘로이즈는 고개를 저었다.

 

"저는 공주가 아니랍니다. 공주가 몸을 얼마나 험하게 굴렸으면 아비도 모를 아이가 있겠어요? 게다가 저는 그 나라에 대한 좋은 기억이 없어요. 왕국이 무너지든 말든 상관하지 않아요. 난 돌아가지 않을 거예요."

"공주님……. 제발……."

 

 남자가 엘로이즈에게 매달리듯이 말함에도 그녀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그녀는 확고했다. 다만 그녀의 눈은 어디서 많이 본 노란색 손수건에만 머물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을 느낀 여자는 칼집 끝에 묶인 노란 손수건을 풀며 입을 열었다.

 

"전 조슬랭 경의 시녀였습니다. 그분께서 베렝게르 왕의 근위대장이자 대귀족으로서 작위를 받은 후로 쭉. 아, 그분께선 정말 제게 잘해주셨죠. 저를 비롯한 수많은 이들에게 조슬랭 경은 부하나 하인으로서 만날 수 있는 최고의 사람이었으니까요.
 조슬랭 경의 얼굴은 언제나 어두웠고 언제나 슬퍼하는 눈치였습니다. 베렝게르를 위해 하는 수많은 악행을 하면서 자신이 쌓은 죄악을 두려워하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3년 전부터, 베렝게르가 죽은 후로 내전이 났을 때……. 그분께선 이름도 모를 사람들을 위해 싸웠습니다. 왕궁은 어느새 가난하고 힘 없는 사람들을 위한 집으로 바뀌었죠. 속죄를 위해서, 조슬랭 경께선 싸우셨습니다. 저 같이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 힘도 없는 사람을 위해 싸우고 제게 대항하는 법을 가르쳐주셨습니다. 그것 때문에 돌아가셨지만…….
 저는 그런 그분을 사랑했습니다. 저는 이름 없는 지방 귀족의 딸이고 아무런 힘도 배경도 없는 사람이지만 감히 그분의 얼굴을 보며 사랑을 꿈꿨지요. 하지만 그분께선 항상 단 한 분만을 생각하고 계셨습니다. 그건 제가 아니었어요.
 그분은 언제나 그 노란 손수건을 소중히 여기셨습니다. 처음에 전 칼에 묻은 피를 닦아내려고 일부러 한 건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습니다. 언제 한 번은 제가 무례하게 그분께 물은 적이 있었죠. 대체 그 손수건이 뭔지. 그분께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자기가 속죄해야 하는, 사랑하는 사람이 남겨준 유일한 것이라고."

 

 어느새 여인은 노란 손수건을 풀어 좌우로 펼쳤다. 생각 외로 큰 손수건은 정말 오래된 물건이었는지 군데군데 헤지고 낡은 티가 났었다. 허나 하나 확실한 것은 그 노란 손수건은 엘로이즈에게 낯익은 물건이라는 것이었다.

 

"그분께선 외롭고 힘들 때마다, 슬플 때마다 그 손수건을 풀어서 거기 적힌 이름을 부르며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매일 같이 들을 수 있었던 이름이었죠. 엘로이즈……."

"……드 테르누아."

 

 엘로이즈는 여인의 말을 끊으며 대신 자신이 말을 이었다. 어색한 침묵이, 슬픈 침묵이 이어졌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여자가 다시 말을 꺼냈다.

 

"조슬랭 경께서 엘로이즈 공주님께 한 짓은, 살아오면서 쌓은 죄악은 오직 신만이 용서할 수 있는 악행임이 확실합니다. 조슬랭 경께서도 자신이 용서받을 수 없음을, 지옥에 떨어질 것임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속죄를 위한 노력마저 저버리는 건 잔인한 일이 아닌가요?"

 

 여인은 엘로이즈의 앞에 그 노란 손수건을 두었다. 엘로이즈는 떨리는 손으로 그 손수건을 쥐었다. 색깔. 촉감. 그리고 Eloise de Ternois라는 글씨. 모두가 그 옛날 그녀가 조슬랭에게 주었던 그것, 조슬랭이 잃어버렸다고 한 그것이었다. 엘로이즈의 눈에 어느새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폭포처럼 눈물을 흘리는 그녀를 보며 여자가 다시 말했다.


"공주님……. 저희가 공주님께 강요할 권리는 없습니다. 왕과 나라를, 백성을 위해 싸워야할 의무도 공주님께는 없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그런 고상한 것들 위해서가 아니라, 죽는 순간까지 공주님을 사랑했고 기억했고 속죄하려던 조슬랭 경의 순수했던 마음을 위해 싸워주셨으면, 그래서 이 칼을 잡고 그분의 속죄를 마무리 해주셨으면, 하고 바랄 뿐입니다."


 그렇게 남자도 여자도 입을 다물었다. 그 긴 침묵 동안 엘로이즈는 흐르는 눈물을 손으로 닦아냈다. 그녀는 루비처럼 붉어진 눈으로 그녀의 아들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과 함께 노는 아무것도 모르는 그녀의 아이. 그 너머로 석양이 지고 있었다. 그 석양 위에 옛 모습이 떠올랐다. 석양을 등지고 선 근위병 조슬랭을 바라보던 공주로서의 자신이. 언제나 자신을 위해 헌신 하겠다 맹세하던 그의 모습이. 

 엘로이즈는 다시 탁자 위에 놓인 그의 칼을 내려다보았다. 낡고 닳은 칼집과 손잡이가 지난 3년간을 말해주고 있었다. 칼을 바라보던 그녀는 눈을 감은 채 길게 심호흡했다.


 그녀는 칼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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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즈베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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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 백옥루의 마당에도 낙엽이 가득 쌓이고, 노랗게 변한 낙엽이 때때로 바람에 날리며 내는 울음과 같은 소리를 제외하면 그 어떤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망령 아가씨의 거처에 어울리는 지독하고 소름끼치는 정적이었다. 그 정적 속의 마루 위에는 벚꽃 같은 머리색의 사이교우지 유유코가 멍하게 앉아있었다. 그녀의 눈에 초점이라고는 없었고, 비어있는 것만 같았다.

 그 정적을 깨는 발소리, 손에 소반을 든 요우무가 뒤에서 나와 유유코의 옆에 내려놓았다. 조르륵 소리와 함께 차를 따르며, 요우무가 말을 걸었다.

 

"차 드세요, 유유코 님."

"……."

 

 멍하니 있던 유유코는 요우무의 말에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몸을 돌리고 찻잔을 받았다.

 

"고마워, 요우무. 오늘은 경단이네."

 

 유유코는 다시 떨어지는 낙엽을 보면서 찻잔을 기울였다. 그녀는 아무런 말도 없이 그저 이리저리 흩날리는 낙엽에만 시선을 고정했다. 그러기를 한참, 조용한 주인을 뚫어지도록 쳐다보던 어린 정원사는 얼음장 같은 정적을 참지 못하고 말을 꺼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계신가요?"

"아무것도."

"하지만 그렇게 슬픈 표정으로 낙엽을 보시면 제가 다 걱정돼요, 유유코 님."

 

 그 말에 찻잔을 기울이던 유유코의 손이 멈췄다. 그녀는 잔을 놓고는 경단을 하나 집었다. 그녀는 아가씨답게 조신하게 한 입 베어물고는 다시 내려놓았다.

 

"그래……. 사실은 낙엽을 볼 때마다 요우키가 생각난단다."

"제 할아버지요?"

 

 유유코는 고개를 끄덕였다.

 

"요우키가 떠난 지도 정말 오래구나."

 

 요우키라는 말에 요우무는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표정 역시 밝지만은 않았다. 유유코는 반이 잘린 경단을 다시 집어먹었다. 경단이 그녀의 목을 타고 넘어가자, 그녀는 다시 찻잔을 들었다. 그녀는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운 요우무를 한 번 힐끗 쳐다보았다.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니? 나도 요우무가 그렇게 슬픈 표정을 지으면 싫단다."

"할아버지께서 떠나시기 전에 제 부모님에 관해서 물어본 적이 있었어요."

 

 유유코는 순간적으로 손을 멈췄다. 손이 멈췄다기보다는 그대로 마비되었다는 것에 가까웠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찻잔을 엎지를 뻔했다

 

"평소 같으면 무섭게 화를 내셨을 텐데, 그때는 정말로 슬픈 표정을 지으셨어요. 그러더니 할아버지답지 않게 미소를 지으시면서, 언젠가는 알 거라고, 그 말만 하셨어요."

 

 요우무의 얼굴은 여전히 응달처럼 어두웠다. 항상 차갑고 무서운, 다가가기 어려웠던 그 사람이 억지로 웃으며 슬픔을 억누르는 모습을 회상하자니 더더욱 슬프고, 또 궁금했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유유코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제 부모님은 대체 어떤 분인가요?"

 

 유유코는 대답하지 않고, 그녀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알려주세요, 유유코 님!"

 

 절규에 가까운 요우무의 물음에도 유유코는 말없이 찻잔만 기울였다. 그리고 시선을 저멀리 허공에 둔 채,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미안해, 요우무. 요우키는 나한테 아무 말도 안 해줬단다. 그나마 알고 있던 부분은 다 잊어버렸고."

"하지만……."

 

 그때 정원에 누군가가 불쑥 튀어나왔다. 유유코가 시선을 옮기자 그곳엔 양산을 쓴 금발의 아름다운 요괴, 야쿠모 유카리가 마루를 향해 천천히 걸어오는 게 보였다. 요우무는 그녀를 보자 일단 일어나 인사했다.

 

"손님이 왔네. 미안하지만 술상을 준비해줄 수 있겠니?"

 

 요우무의 표정에는 당장 대답을 듣겠다는 의지가 보였으나, 점점 더 가까워지는 유카리를 보고는 풀 죽은 목소리로 알았다는 대답만 하며 부엌으로 물러났다. 유카리는 요우무가 앉았던 자리에 앉았다.

 

"안녕, 유카리. 이제 곧 자야할 때네. 인사하러 온 거야? 마침 잘 왔어. 단풍이 예쁘게 폈거든."

"흐응. 난관에서 구해준 건 언급하지 않는 거야? 실망인걸."

"아직 나한테 실망할 거리는 많아, 유카리."

 

 유유코는 나름의 유머를 발휘했으나, 씁쓸한 표정을 감출 수는 없었다. 유카리는 잠깐 뒤를 돌아보았다. 유유코는 어차피 요우무가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지 이야기를 꺼냈다.

 

"아직도 잊지 못해. 요우키의 그 모습을. 누가 잊을 수 있겠어."

 

 유카리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둘은 과거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정말 오래전의 이야기였다.

 백옥루의 정원사 콘파쿠 요우키가 방랑무사 짓을 끝내고 백옥루의 주인 사이교우지 유유코를 보필한지도 수없이 많은 시간이 지난 뒤였다. 수많은 시간이 지나는 동안 그는 성심성의껏 유유코를 보필했다. 언제나 조용하게, 있는 듯 없는 듯 하면서도 유유코를 지켰다. 뿐만 아니라 그의 검술 실력은 환상향 제일이라고 해도 무리가 아니었다. 최소한 유유코를 제외한 사람들에게, 그는 가지치기보다는 검술로서 더 알려진 사람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품에 갓난아기를 안은 채로 백옥루에 나타났다. 그는 무표정하면서도 무언가 단호히 결심한 모습으로 유유코에게 절을 올렸다. 유유코는 요우키의 기묘한 행색에 반은 놀람으로, 반은 신기함으로 그를 대했다.

 

"소인 콘파쿠 요우키, 아가씨께 청할 것이 있습니다."

 

 유유코는 대답 대신 미소로 요우키를 바라보았다. 긍정의 뜻으로 알아들은 요우키는 아이를 보며 말했다.

 

"그 아이는 제가 허락 없이 다른 아가씨와 통혼하여 낳은 아이입니다. 아가씨를 모시는 몸으로서 허락도 없이 통혼한 죄를 범하였습니다. 저는 죽어 마땅한 존재이나, 이 아이를 생각해서라도 부디 저를 용서해주십시오." 

 

 유유코는 새근새근 조용히 자는 아기를 보았다. 은은한 청색이 도는 하얀 머리는 물론, 아기의 주위에 손가락처럼 조그마한 반령이 유유히 떠다니는 것이 영락없는 요우키의 아이였다처음부터 내치려는 생각 따위는 없었던 그녀는 밝게 웃어보였다.

 

"이 백옥루에 사람이 한 명 더 생긴다면 그거야 말로 좋은 일이라고 생각해. 그보다도, 칼날 같던 요우키의 마음을 가져간 아가씨는 누굴까? 궁금해지는걸."

 

 요우키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이 이름은 지었고?"

"예전에 섬겼던 분의 이름을 따서, 요우모리(妖盛)로 할까 합니다."

"콘파쿠 요우모리(魂魄妖盛). 좋은 이름인걸."

 

 유유코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요우키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는 다시 한 번 절하며 아이를 데리고 나갔다. 대체 누구와의 사이에서 얻은 자식일까, 유유코로서는 알 수 없었다.

 

 그렇게 한참이 지난 뒤, . 언제나 변함없이 백옥루 마루에 앉아 차를 마시며 변화하는 계절을 보던 그녀에게 새로운 볼거리가 생겼다. 백옥루의 마당은 전과 같지 않게 시끌시끌했고, 그 소음의 진원지에는 은은한 청색이 감도는 하얀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두 칼잡이의 검무가 보였다. 둘은 기합을 내지르며 진짜 같은 대련을 펼쳤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서로 죽이려 드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대련은 거칠었다.

 요우키는 계속 옆으로 움직이며 아들의 허점을 살폈다. 거친 숨을 내쉬며 지친 모습을 보이는 요우모리는 움직임이 계속 느려졌고, 아버지의 빠른 몸놀림에 눈을 따라가는 것도 버거웠다. 하지만 그는 요우키의 공격을 요리조리 칼을 움직이며 막아내었다. 그런 요우모리의 모습을 날카로운 눈초리로 노리던 요우키는 단 한 번의 틈을 노리고, 크게 기합을 내지르며 칼을 뻗었다. 요우키의 일격에 요우모리는 칼을 잃고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많이 늘었네, 요우모리군."

 

 낯선 여인의 목소리에 둘은 살기를 잃고 목소리의 주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유카리였다. 요우키는 칼을 치우고 아들을 일으켜 세우며 유카리를 향해 인사했다.

 

"오랜만입니다, 유카리 님. 아가씨를 뵈러 오셨는지요?"

", 그렇다고나 할까."

 

 유카리는 부채로 입을 가린 채 살짝 웃었다.

 

"온지는 한참 됐는데, 둘이 너무 대단하게 대련하느라 넋 놓고 보고 있었지."

"과찬이십니다."

"아니야. 정말 대단했어."

 

 유카리는 호호 웃더니 요우모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고는 부채를 접으며 요우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사흘 뒤에 새로운 하쿠레이의 무녀가 처음으로 제를 올릴 거야."

"그 아이가 벌써 그렇게 자랐습니까?"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결계를 수호하는 인간이 제를 올리는 날이니 우리가 참석해야겠군요. 언제나 그랬듯이."

"."

 

 유유코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유카리를 부르는 듯했다. 유유코 쪽을 한 번 돌아본 유카리는 적당히 인사하며 자리를 떴고, 그녀가 유유코를 향해 걷자 요우키는 아들을 데리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요우모리는 곁눈질로 유카리를 힐끔힐끔 보았다.

 

"저 분은 누구……."

"야쿠모 유카리. 요괴 현자이자 아가씨의 오랜 친구이시다. 혹시나 음흉한 생각을 품고 있다면 그런 생각은 그만 두는 게 좋아."

"제가 언제 그런 생각을 했다고 그래요, 아버지?"

 

 그렇게 떠들던 둘은 방문 앞에 도착했다. 요우키가 장지문을 열자마자 보인 것은 빛바랜 초록색 오오요로이(綠大鎧)였다. 갑옷 뒤에는 소창(素槍)과 활이 한 자루씩 걸려있었다. 요우키는 이 모든 것들이 마치 보이지 않는 것인 양 안으로 들어가서는 자리에 앉았다.

 

"조금 전에 들었느냐? 새로운 하쿠레이의 무녀가 처음 제를 올리는 날이 사흘 앞이라고."

", , 아버지. 무녀는 환상향의 결계 유지에 꼭 필요한 존재라고 하던데."

"그래. 환상향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기에 우리가 가서 축하해줘야 하는 거지.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본 무녀만 몇이더라. 지난번 무녀는……."

 

 하지만 요우모리는 아버지가 얘기를 하든지 말든지 상관은 안 하고, 오로지 요우키의 왼편 벽에 걸린 초록색 갑옷만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무녀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 요우키는 요우모리의 무신경한 대답과 홀린 듯한 시선을 보았다.

 

"저 갑옷이 그렇게 궁금하느냐?"

 

 아버지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린 요우모리는 아버지에게로 돌렸다. 그는 기죽은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 갑옷에 홀린 것처럼 고개를 돌렸다.

 

"볼 때마다 궁금했던 겁니다만, 대체 저 갑옷은 어디서 구하신 건가요? 환상향 어디에서도 저런 갑옷은 못 봤어요."

 

 요우모리의 말에 요우키는 고개를 돌려 갑옷을 보았다. 찰은 낡아 빛을 잃었고 이를 연결하는 실은 때가 잔뜩 껴서 거무스름했다. 투구는 커다란 황금색 장식이 붙어있지만, 마찬가지로 황금으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색이 바랬다. 먼지가 하얗게 앉은 것은 물론이었다. 요우키는 일어나 갑옷에 가까이 갔다. , 한 번 입김을 불자 갑옷에 붙어있던 먼지가 날아갔다.

 시선을 조금 더 뒤로 옮기자 벽에 창과 활이 걸려있었다. 창날은 낡았고 이는 빠져있었으며, 창대는 금방 부러질 것 같았고, 활은 한 번 당기기라도 했다간 활 몸과 시위가 동시에 부러져버릴 게 분명했다. 요우키는 손으로 갑옷을 천천히 쓸며 입을 열었다.

 

"이건 내가 환상향에 오기 전에 썼던 것들이야. 뭐라고 해야하나, 정말 오래된 것들이지. 환상향에 오기 전, 결계가 생기기 전에 나는 이 나라 곳곳을 떠돌아다니며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찾았다. 이 갑옷을 입고, 저 뒤에 있는 창과 활을 들고, 보이는 것들은 모조리 죽였지. 사람, 요괴, 오니, 누구든 가리지 않았어."

 

 낡은 갑옷은 그의 눈엔 인간, 동물, 요괴, 온갖 피를 뒤집어 쓴 자기 자신으로 보였다. 자기 의지라고는 없이 따르는 주인의 명령에 따라 손에 든 무기를, 주인이 가리키는 사람을 모조리 살해하는 그 모습. 그것은 무사라기보다는 하나의 괴물이었다. 요우키는 눈을 감고 그 끔찍한 과거를 생각했다.

 

"한때 나는 온 나라가 두 패로 갈려서 싸울 때 호랑나비 깃발을 든 전사들 사이에서 대나무 잎을 든 자들과 맞서 싸웠다. 결국 우리가 패해 흩어져버린 뒤로, 난 살아남기 위해 싸웠지……."

 

 요우키가 말꼬리를 흐리더니, 그대로 침묵했다. 그는 갑옷을 만지며 상념에 잠겼다. 창대를 쥔 채 자신에게 달려드는 졸병, 두려움에 질려 마구잡이로 칼을 휘두르는 무사, 무시무시한 소리를 내며 날아오는 화살, 상처투성이가 되어 피를 흘리면서 무릎 꿇은 자신…….

요우키의 무거운 침묵에 공기마저 무거워 숨쉬기조차 어려워졌으나, 요우모리는 과거 이야기를 하는 아버지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그냥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덕분에 나는 초록 오오요로이의 귀신이라는 새 이름을 가지고 온 나라를 떠돌았지. 증오를 증오로, 분노를 분노로 씻으며, 이 칼로 내 자신의 부끄러움을 덮으며 살았다그러던 중에 야쿠모 유카리를 만났지. 그리고 아가씨를 만났어. 그렇게 여기까지 왔고."

 

 요우키는 갑옷에서 손을 뗐다.

 

"여기에 정착하면서, 다시는 이걸 입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매일 이 갑옷을 보면서 과거의 내 자신을, 생각하기조차 싫은 그 괴물을 떠올리며 각오를 되새겼다. 때로는 보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워 이 갑옷을 버리려고 했지만, 그럴 때마다 나는 이를 수행이라고 생각하며 참았다."

 

 그는 몸을 돌려 아들을 바라보았다.

 

"아직도 이 갑옷이 멋있다고 느껴지느냐? 환상향은 갑옷이 필요 없는 곳이다. 그래야만 하는 곳이다. 너도 그 뜻을 이해하면 좋겠구나."

 

 요우모리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지만, 완전히 이해한 표정은 아닌 것 같았다. 요우키는 언젠가 아들이 이해해주리라고 믿으며 자리로 향했다. 그때 갑자기 장지문이 스르륵 하고 열렸다. 둘이 거의 동시에 열린 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유유코였다. 그녀는 두 사람에게 한 번 미소를 보여주고는 요우키를 돌아보았다.

 

"요우키. 유카리가 주문한 게 다 됐다고 해. 마침 잘 됐어. 찻잎이 다 떨어졌으니. 빨리 마을에 내려갔다 와."

 

 요우키는 대답하지 않고 일어나 유유코에게 묵례로 답했다. 그가 밖으로 나서려는데 유유코가 다시 말을 꺼냈다.

 

"요우모리도 같이 내려가렴. 요우키 혼자서 모두 들 수는 없잖니?"

", 아가씨."

 

 요우모리 역시 요우키와 똑같이 인사하며 일어섰다. 둘의 모습을 본 유유코는 웃으며 중얼거렸다.

 

"정말로 요우키의 아들이 맞구나."

"?"

"아무것도 아니야. , 빨리 가야지. 아버지가 기다리고 있잖니. 그리고 올 때 맛있는 거 사오고."

", ."

 

 두 사람이 갈 준비를 마치고 나가려는데, 유유코가 요우키를 불렀다.

 

, 아가씨.”

아까 말한 거 말이야.”

…….”

 

요우키는 유유코의 말에 당황했다.

 

들으셨습니까?”

처음부터 유카리한테서 들어서 별로 놀랍지는 않아. 그래도…….”

 

유유코는 걱정하는 눈빛이었다.

 

언제든지 힘들 때면……. 알았지? 종자를 챙기는 건 주인의 몫이니까.”

……황송함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아가씨.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콘파쿠 부자는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려는 때에 마을에 도착했다. 마을에는 점점 어둠이 드리워져갔지만, 등불 덕분에 오히려 낮보다 더 밝고 활기찼다. 이제 곧 열릴 새 무녀의 첫 제의에 마을 사람들도 같이 들뜬 것처럼 보였다. 둘이 안으로 들어가자 마을 사람들이 각자 요우키를 보고는 인사를 건넸다. 요우모리는 시선을 끄는 주변의 많은 것들을 보고 멈칫거렸으나 요우키는 모조리 무시하고 한 곳으로 향했다. 바로 대장간이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주인이 밝게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네요, 콘파쿠 공! 옆의 분은?"

"아들일세."

"아들? 아아! 콘파쿠 요우모리, 맞죠?"

 

 요우모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별안간 대장장이는 잠깐 기다리라며 공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뒤에서 한참을 덜그럭 소리를 내며 나오지 않자, 부자는 약속한 듯 동시에 서로 돌아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한참이 지난 뒤에야 대장장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들어가기 전엔 없었던 커다란 검을 손에 들고 나왔다. 대장장이가 손잡이 끝을 잡고 칼을 뽑자 칼날이 반짝였다.

 

"만들어달라고 했던 거, 이거 맞죠? 칼날이 한 세 척 정도 하는 노다치 말입니다."

", 그렇소."

 

 요우키가 대금을 치르자 대장장이는 칼날을 다시 집어넣고 요우키에게 주었다.

 

"정원사께서 갑자기 노다치는 왜? 전쟁이라도 하실 생각인가요?"

"전쟁은 무슨. 가지치기와의 전쟁이라면 전쟁이다만."

 

 요우키는 그렇게 말하며 힘을 주어 칼을 뽑았다. 농담을 하던 방금까지의 모습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위협적이었다. 이리저리 둘러보고, 한 번 돌려보며 무기를 확인한 요우키는 칼을 다시 칼집에 넣었다.

 

"정말로 고맙네. 나중에 또 내려오면 들리지. 가자."

 

 두 사람이 나가자 뒤에서 대장장이의 활기찬 인사가 들려왔다. 바깥에 나오자마자 요우키는 요우모리에게 노다치를 건네며 말했다.

 

"이건 널 위해 만든 거다."

"?"

 

 요우키가 준 노다치를 받아든 요우모리는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옻칠 된 칼집 안에서 잠든 무시무시한 전쟁용 검이 자신의 손에 들려 있었다. 그리고 이 괴수는 아버지의 한 마디에 바로 자신의 것이 되었다.

 

너는 나보다 키도 크고 힘도 강하니 노다치를 써도 좋을 듯해서 이걸로 만들었다. 물론, 내가 쓰는 타치도 언젠가 물려줄 터이니 수련을 게을리 하지 말거라.”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요우모리는 칼집을 살짝 밀어 약간 뽑아보았다.

 

"칼잡이들은 때때로 칼에 이름을 붙이기도 하지. 나는 이제 나이 먹고 칼에 이름 붙이는 건 남우세스러워 못 하겠다만……. 네가 직접 붙여 보거라."

 

 이름을 붙이라는 말에 요우모리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노다치를 내려다보았다. 한참을 내려다보던 그는 끄응 소리를 내며 머리를 최대한으로 굴렸다. 그러더니 아하, 칼집을 가볍게 두드리고는 다시 요우키를 바라보았다.

 

"저희는 백옥루를 지키는 사람들이니까, 다락 누()에 볼 관()을 써서 누관검이라고 하겠습니다."

"좋은 이름이구나."

 

 요우키는 미소 지으며 아들의 등에 노다치를 묶어주고는 어깨를 한 번 툭 건드렸다.

 

"어디보자, 이젠 떨어진 찻잎과 찬거리도 사고, 계속 두고 먹을 간식거리도 사야겠군. 그보다 쌀부터 사야할 텐데……."

 

 요우키가 중얼거리며 마을을 돌아다니는 동안, 요우모리는 등에 찬 노다치를 계속 만져댔다. 분명 손에 느껴지는 딱딱한 칼집의 감촉, 그러나 얼떨떨한 건 여전했다. 정말 갑작스럽게 생긴 자신만의 검, 그것도 다름 아닌 노다치. 말은 안 했지만, 이 칼을 줬다는 것은 분명 인정 받았다는 뜻이리라. 그렇게 생각하니 요우모리는 자신도 모르게 으헤헤 웃고 말았다. 소리를 들은 요우키가 뒤를 돌아보았다.

 

"뭐가 그리 좋으냐?"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버지."

그럼 으헤헤 같은 웃음소리는 내지 말거라. 이상하니까.”

 

 그렇게 걷는 사이, 옆에서 갑자기 요우키를 부르는 큰 소리가 들려왔다. 둘이 옆을 보니 까만 날개가 달린 카라스 텐구 둘이 손바닥만 한 술잔을 들고 대작 중이었다. 요우키와 눈이 마주친 그들은 이리 오라며 손짓했다. 요우키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는 아들을 돌아보았다.

 

혼자 가도 괜찮겠느냐?”

설마 텐구랑 술 대결을 하시려고요?”

 

요우키는 슬쩍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요우모리는 아버지가 내려놓은 짐을 들며 불평을 내뱉었지만, 요우키는 들은 척도 않았다.

 

아가씨를 위한 요깃거리는 내가 사 가지고 갈 테니 너는 그냥 가거라.”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내 걱정은 하지 마라, 요우모리.”

 

요우키는 끄덕이며 텐구들을 향해 걸어갔다. 마치 일기토를 준비하는 장수처럼, 그의 걸음은 위압적이었다. 고작 술 마시는 것에 불과한데. 그가 자리에 앉아 자신의 울퉁불퉁한 손바닥을 완전히 가리는 텐구 전용 술잔을 쥐고 그들의 시끄러운 연회에 녹아들어가자, 요우모리는 한숨을 한 번 길게 내쉬며 백옥루를 향해 걸어갔다.

무거운 짐을 가득 진 채 한참을 걷던 요우모리는, 마을 구석에 작은 불빛만 나는 건물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갑자기, 무언가가 요우모리의 옆구리를 들이받듯 부딪쳤다. 깜짝 놀란 요우모리가 짐을 놓치며 바닥에 넘어짐과 동시에, 옆에서 가냘픈 소녀의 비명과 흙바닥에 물건이 떨어지는 둔탁한 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요우모리가 정신을 차리고 옆을 보자, 갈색 머리의 소녀가 바닥에 널브러진 카메라 필름 사이에 쓰러져있었다. 요우모리는 당황하여 벌떡 일어나 소녀를 일으켰다.

 

죄송합니다! 괜찮으신가요?”

 

소녀는 여전히 정신이 없는지 헝겊인형마냥 그대로 요우모리에게 끌려 올라왔다. 그녀가 정신을 차리자, 다짜고짜 요우모리의 팔을 뿌리치고 카메라 필름을 정신없이 주웠다. 요우모리 역시 자기 짐은 내버려두고 그녀를 따라 필름을 주웠다. 소녀에게 필름을 건네주자 그녀는 한 아름 사진기용 필름을 안은 채 요우모리에게 인사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앞을 보고 걸었어야 했는데…….”

아닙니다. 제가 신경을 안 써서…….”

 

순간 침묵이 이어졌다. 길고 긴 정적이었다.

 

눈을 감은 채 찻잔을 기울이며 유유코의 말에 귀 기울이던 유카리는 친구의 이야기가 잠시 끊기자 옆을 돌아보았다, 유유코는 머리에 손가락을 짚으며 고민에 잠긴 모습이었다. 기억에 혼선이 온 듯했다.

 

뭐야,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 거 맞아, 유유코?”

요우키가 그렇게 말했던 것 같은데…….”

 

유유코는 고개를 잠깐 흔들더니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 뒤로 이틀간 요우모리는 매일같이 마을로 나갔지. 요우키는 아들이 뭘 하고 있는지 봐야겠다면서 그 아이를 몰래 쫓아다녔고, 돌아와서는 내게 요우모리가 뭘 하는지 말했어. 하라는 수련은 안 하고 여자 꽁무니나 쫓아다닌다면서 하소연을 했지만, 동시에 평범한 삶을 사는 것 같다고, 내심 좋아하던 게 기억나. 너도 기억할걸?”

아아, 기억난다. 나한테도 계속 그렇게 말하던데.”

 

유카리는 아들의 모습을 성토하는 요우키의 표정을 상상하자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유유코 역시 웃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래. 하지만 행복은 얼마 가지 않았어…….”

 

유유코의 말에 두 사람 모두 웃음기를 잃어버렸다.

 

 

-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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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즈베즈다
,

혼백가담(魂魄家譚)

단편 2013. 3. 10. 02:17

혼백가담(魂魄家譚)

그날도 하쿠레이 신사에는 술잔치가 벌어졌다. 매일같은 술잔치에 지치지도 않을까, 툇마루에 앉아 바닥이 꺼지도록 한숨을 쉬는 하쿠레이 레이무에 대해서는 다들 아무런 관심 따위 두지 않고, 신사가 떠나가라 시끌벅적할 뿐이었다. 인간 요괴 가릴 것 없이 섞여 어울려 술을 마시는 모습은, 정말로 '환상향'이라는 단어에 어울리지 않는가,라고 누군가가 떠든 것 같았지만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다.

이 시끌벅적한 연회에는 명계의 백옥루의 주인 사이교우지 유유코와, 그녀의 경호원이자 백옥루의 반인반령 정원사 콘파쿠 요우무도 있었다. 요우무는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채로, 지저의 오니나 쓸법한 커다란 잔을 든 채로 마법사 키리사메 마리사가 쏟아붓는 술을 받았다.

이야기가 이어지고, 어쩌다보니 마리사와 그녀의 의절한 아버지에 대해서까지 이야기가 이어졌다. 그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마리사는 펄쩍 뛰면서 말을 끊어버렸고, 마리사 덕분인지 순간적으로 요우무가 있는 그룹에선 대화가 끊어져버렸다. 그 침묵을 깬 건 바로 요우무였다.

"……그러고보니 제게는 아버님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어요. 어머님에 대해서도요."

"전혀 없다고?"

"네……. 묭한 일이에요. 유유코님은 제 부모님에 대해서 아시는 게 있으세요?"

순간 유유코의 미소가 끊어진 듯 했지만, 유유코는 침착하게 다시 웃으며 얼버무렸다.

"전혀. 요우키도 자기 아들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없었단다."

평소 같았으면 전부 거짓임을 꿰뚫었겠지만, 잔뜩 술에 취해 앞뒤 구분조차 못할 뿐만 아니라 아무런 경계심도 없고 집중조차 안 하는, 아니 못하는 사람들에게 그런 것은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었다. 덕분에 요우무의 의문은 순식간에 술과 함께 요우무의 식도를 타고 사라져버렸다. 그러나 질문을 받은 유유코는 여전히 요우무의 말이 신경쓰이는지, 이미 정신을 잃고 쓰러져버린 요우무를 보고 한숨이 나왔다. 변소에 간다고 둘러댄 채로 신사 주변을 서성이던 그녀의 뒤에서 인기척과 함께 익숙한 친구의 목소리가 들렸다.

"유카리."

"어머, 유유코. 혼자 술자리에서 빠지는 거야? 유유코 답지가 않네."

유유코는 그 분홍색 머리를 흩날리며 뒤돌았다. 하지만 웃고 있지는 않았다. 그녀의 모습에 알 수 없는 위화감을 느낀 유카리는 고개를 까딱이며 유유코에게 다가갔다. 너답지 않다며, 오늘 이상하다면서. 그러자 유유코가 말했다.

"요우무가 자기 아비에 대해 의문을 가진 거 같아."

"그게 무슨 소리……아아. 알 거 같네."

유카리는 부채로 얼굴을 가리면서 말을 이었다.

"요우무가 자기 아비와 조부 간의 일을 알게 된다면 얼마나 큰 충격을 받을지 걱정하는구나, 유유코."

유유코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도 기억해. 그 일을 말야. 요우키랑, 요우모리……."

정말 오래전의 일이었다.

백옥루의 정원사 콘파쿠 요우키가 사이교우지 유유코를 주인으로 모신지도 벌써 오랜 시간이 흐른 뒤였다. 요우키는 성심성의껏 유유코를 보필했고, 그의 검술 실력은 환상향 내의 제일가는 검술사범으로 명망 높은 자였다. 그는 이름모를 반인반령 여인과 혼인하여 아들을 하나 두었고, 아들의 이름이 '콘파쿠 요우모리'였다. 유유코는 벚꽃이 화려하게 핀 봄의 백옥루 툇마루에서, 마당에서 누관검을 쥔 어린 요우모리가, 요우키의 지도에 따라 검을 쥐고, 발을 움직이고, 신기에 가까울 정도인 요우키의 검술을 하나하나 배워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미소를 지었다. 요우키는 요우모리에게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빠짐없이 열성적으로 가르쳤다.

요우키는 정말 조용한 편이었지만, 가끔 이야기 할 때는 항상 요우모리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유유코가 그 이유에 대해서 물으면 요우키는 항상,

"그 아이는 제 모든 것입니다."

라고 답할 뿐이었다. 그 말처럼, 요우키에게 그의 아들은 그에게 남은 모든 것이었다. 그의 아내는 죽은지 오래였고, 아무리 그가 환상향 최강의 검술사범이라고 한들 그의 검술을 배우려는 사람은 없었으며 그가 가르쳐주려고 하지도 않았다. 콘파쿠 가문을 잇고, 요우키의 검술을 잇고, 백옥루의 정원사 자리도 이을 그의 모든 것. 그가 바로 콘파쿠 요우모리였다. 훗날 요우모리가 그렇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으리라.

요우모리가 홀로 마을에 내려갔을 때의 일이었다. 그는 요우키처럼 두 자루의 검을 찬 채로 신사에 가는 길이었다. 그는 계속 주변에서 시선을 느꼈다. 요우모리는 길을 걷다 멈추고 소리가 들려오는 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기를 반복했고, 그때마다 자신을 보며 끼리끼리 모여 속닥거리던 사람들은 모르는 척 다시 고개를 돌렸다. 요우모리가 다시 고개를 돌리고 길을 계속 가자 사람들은 다시 모여들어 이야기를 계속했다.

"저 사람 콘파쿠네 아들 아냐? 하쿠레이 신사에 간다면서?"

"그 위험한 곳을? 신사가 요괴에 점거당했다면서?"

"가는 길도 위험하다잖아. 뭐 어쩌려고 그러는 거지? 그보다 저 칼은 뭐고……."

그 말을 아는지 모르는지, 요우모리는 그대로 마을을 벗어나 하쿠레이 신사로 향하는 숲길에 들어섰다. 여름이라 해가 높게 떴지만, 빽빽한 나무와 푸른 잎사귀 사이로 흘러오는 빛은 극히 미미했고, 대낮인데도 앞이 잘 보이지 않는 어두운 곳이었다.

"이거 기분이 안 좋은데……."

요우모리는 홀로 중얼거리며 숲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금방이라도 검을 뽑아들을 수 있도록 왼손으로 칼집을 잡고, 오른손을 쥐락펴락하며 주변을 경계했다. 주변에서 계속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누군가가 빤히 쳐다보는 강렬한 느낌이 요우모리의 피부를 콕콕 찔렀다. 바람이 불어와 푸른 잎이 달린 가지를 위아래로 마구잡이로 흔들고, 뜨거운 여름의 열기는 숲에 존재하지도 않았다. 어느순간 스윽하고 누군가가 뒤를 지나간 느낌에, 그는 재빠르게 검을 뽑으며 뒤를 돌았다. '그냥 동물인가'하고 검을 내리려는 찰나, 그의 뒤에서 압도적인 요기와 함께 굉음에 가까운 요괴의 소리가 들려왔다.

요우모리는 깜짝 놀라, 뒤돌며 이리저리 검을 마구마구 휘두르며 뒤로 도망치듯 물러섰다. 온몸이 새까만 그 요괴는 불타오르는 것 같은 새빨간 두 눈만 번뜩이며, 이를 가는 기괴한 소리와 번뜩이는 발톱을 가지고 요우모리를 향해 다가왔다. 요우모리는 계속 검을 치켜세우며 요괴를 위협해봤지만 그 새까만 요괴는 전혀 위협으로 느끼지 못하는 듯, 계속 요우모리를 위협했다. 요괴가 무어라 지껄이는 것 같았지만 그에겐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치, 침착, 침착하게……."

요우모리는 요우키에게 배운 것을 생각해내려고 애를 쓰면서 동시에 눈 앞에 있는 맹렬한 적의를 가진 요괴에 대한 경계를 풀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기억을 미처 떠올리기도 전에, 요괴는 이미 번쩍 뛰어올라 그를 산산조각내려하고 있었다. 그러자 먼저 요우모리의 반령이 빠르게 나서 요괴의 목을 묶어놨고, 요괴의 움직임이 둔해지자 요우모리는 뒤로 몸을 날려 공격을 피했다. 그러자 요괴는 날카로운 손톱을 휘둘러 반령을 떼어냈고, 다시 똑같은 움직임으로 요우모리에게 달려들었다. 요우모리는 그 요괴가 달려오는 움직임에 맞춰, 그 요괴에 모든 집중을 가하며, 이를 꽉 물고 그의 검을 높게 쳐들었다.

일순간, 요우모리의 눈에 요괴의 움직임이 매우 느려진다 싶더니 이윽고 멈춘듯했다. 맹렬하게 불어오던 바람도 멈추고, 요괴의 울음에 사시나무 떨듯 부르르 떨던 가지도 멈추고, 바람에 몸을 맡기고 하늘을 흘러가던 구름도 멈추고, 요괴의 목소리 사이에서 울던 벌레의 찌르륵 소리도 멈췄다. 요우모리는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알 수가 없었지만, 그런 생각을 하기 전에 먼저 요우모리는 기합을 내지르며, 온몸의 기를 검에 집중하고는 그대로 자신의 앞에 멈춰선 요괴의 머리를 향해 검을 내리쳤다.

팍! 뼈가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요괴의 피가 요우모리에 튀었고, 요괴는 머리가 반으로 갈라졌지만 관성 덕분에 그대로 요우모리의 몸에 커다란 충격을 전달했고, 충격을 받은 요우모리는 요괴의 피를 뒤집어쓰며 흙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가 아직도 요기를 발산하는 요괴 시체를 밀어내며 일어서려하자, 드득 드득 이 가는 소리가 사방을 가득 메웠다. 요우모리는 얼어붙은 채로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연파랑색 머리카락은 이제 적갈색의 피로 검게 물들었고, 초록색 옷 역시 마찬가지였다.

요우모리는 검을 쳐들었다. 조금 전 요괴 앞에서 당황하던 요우모리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다. 그는 거칠게 숨을 훅훅 내쉬면서 숲에서 뛰쳐나오는 새카만 요괴들을 살기어린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 요괴들은 너나할 것 없이, 앞뒤 구분 없이 모두 요우모리에게 달려들었다. 그러자 요우모리의 반령이 그대로 그의 등 뒤에 그와 똑같은 모습으로 변했고, 둘이 된 요우모리는 서로의 등을 맞댄 채로 달려드는 요괴들을 향해 검을 겨눴다.

요우키가 헐레벌떡 신사로 향하는 길로 뛰어온 것은 해가 서쪽으로 넘어간 뒤였다. 그는 매우 불안한 표정으로, 산더미처럼 쌓인 요괴 시체의 산에서 이어지는, 끔찍하리만치 강렬한 요기가 어린 핏자국을 따라 뛰었다. 핏자국 끝에 있는 건, 검을 집어넣은 칼집을 지팡이 삼아, 한 쪽 무릎을 꿇은 채로 버티고 있는 요우모리였다.

"아들아!"

요우키는 그에게 달려가 금방이라도 쓰러질듯 위태로운 요우모리를 붙잡았다.

"아들아, 정신이 드느냐?"

"아, 아버님……."

요우모리는 왼 쪽 뺨에 세 갈래의 커다란 상처가 나있었고, 요우키와 똑같은 연파랑색 머리는 피로 붉은 빛이 도는 검은색으로 염색당한 모습이었다. 얼굴 뿐만 아니라 다른 곳 역시 상처투성이였고, 어느 것이 요괴의 피고 요우모리의 피인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요우모리는 끝까지 요우키에게 무어라 말하려 애를 썼다.

"저, 저는, 아, 아버님 말대로……."

"괜찮다. 그만 하거라. 백옥루로 돌아가자꾸나."

요우키에게 업힌 채로 하늘을 날아 백옥루로 돌아가던 요우모리는 홀로 중얼거렸다.

"어째서……."

요우모리가 눈을 떴을 때는 꽤 여러 날이 지난 듯했다. 그가 몸을 일으키자 문 바깥에서 유유코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머, 요우모리군. 깨어났네. 몸은 어떠니?"

요우모리는 대답대신 자신의 얼굴을 만져보았다. 세 개의 굵은 상처 위에, 꿰멘 듯한 흔적과 딱지가 앉아 울퉁불퉁한 느낌이 그대로 느껴졌다. '요우모리?' 바깥에서 유유코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오자, 그제야 그는 억지로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지금 당장이라도…….' 물론 거짓말이었다. 고개를 돌려 주변을 보니 손거울이 떨어져있었다. 유유코의 장난인가 싶은 요우모리가 거울을 쥐고 쳐다보았다. 거울속 그의 모습은 마치 염색이라도 한 듯, 연파랑의 머리카락이 아니라 흑적색의 머리카락이 얼굴을 뒤덮고 있었다. 요우모리는 놀라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었지만, 그는 더 이상 요우키와 같은 이전의 연파랑 머리카락이 아니었다. 요우모리는 멍한 표정으로 바깥으로 나왔다. 그의 붉은색이 도는 검은 머리를 본 유유코는 억지 미소를 보였다. 요우모리도 억지로 미소지으며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아, 요우모리군. 마을에 내려간 요우키 좀 불러오겠니? 요우키가 오지를 않는구나."

"그렇게 하겠습니다, 유유코님."

요우모리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백옥루의 계단을 내려갔다. 명계에서 벗어나 마을로 들어가자, 사람들이 그를 보자마자 화들짝 놀라면서 뒤로 물러났다. 무슨 일인지 물으려고 했지만, 사람들은 도망치듯 그 자리를 빠져나갔다. 그는 우두커니 서 있는 대신 요우키를 찾아 마을을 돌아다녔다. 사람들을 붙잡고 무언가를 물어보려 할 때마다, 그 사람들은 자신을 보자마자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기피했고, 요우모리는 단 한 마디도 꺼내지 못한 채로 마을 이곳저곳을 쑤시고 다녔다. 하지만 누구도 그에게 요우키가 어디 있는지 말해주지 않았다. 홀로 무기력하게 어둠이 깔린 마을을 돌아다니던 요우모리는 마을회관의 벽에 기댄 채 바닥에 주저앉았다. 요우키의 목소리가 들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내 아들이 요괴라고? 요괴이라고 했소? 요괴의 피를 뒤집어써서 머리가 새까맣게 변하고 안 좋은, 요괴의 기운을 내뿜는다고 해서 퇴치 대상이라고? 개소리 집어치우시오!"

그 다음 들리는 목소리는 하쿠레이의 무녀였다.

"하지만 요우키 공께서도 아시겠지만, 도련님께서는 그 일 이후로 압도적일 정도로 강력한 요기를 내 뿜는……."

그녀가 말을 멈추더니, 자리에서 일어난 듯한 소리가 났다. 회관 안에서 나는 소리를 듣던 요우모리는 바로 앞에 인기척이 느껴지는 것을 보고 고개를 들었다. 붉은 색 무녀복, 검고 긴 생머리, 하쿠레이의 무녀였다. 그녀는 요우모리를 일으켜세웠다. 요우모리가 일어서자 하쿠레이의 무녀는 고개를 살짝 쳐들어 요우모리를 올려다보았다.

"요우모리군. 백옥루로 돌아가시지요. 마을에 계시면 위험합니다."

"……저는 요괴가 아닙니다, 무녀님. 그리고 제가 위험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위험하니까 위험하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신지요?"

무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직설적입니다, 요우모리군. 게다가 지금은 돌려말할 때도 아닙니다."

그러자 요우모리는 무녀를 손으로 밀치고는 마을에서 멀어지는 곳으로 계속 걸어갔다. 그쪽은 백옥루로 가는 길이 아니라고 무녀가 말했지만 요우모리는 듣지 않았다. 뒤이어 요우키가 뛰쳐나와 요우모리의 이름을 불렀지만 요우모리는 여전히 반응하지 않았다. 결국 요우키가 직접 그에게 뛰어가 잡은 뒤에야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목이 메어, 눈물범벅이 된 채로 요우키를 보았다. 요우키는 차마 아들의 그런 모습을 볼 수가 없었는지 시선을 회피하며 말했다.

"요우모리……. 아들아."

"왜 그때 저를 신사로 보내신 겁니까. 그러지만 않으셨다면 제가 이 꼴이 되지도 않았을 텐데."

"……그래, 모두 내 탓이다, 요우모리. 네가 조금만 더 신경을 썼다면 네가 그렇게 되지도 않았을테지. 조금만 더 신경을 썼다면……."

요우키는 무릎을 꿇었다. 요우모리는 그러나 그런 아비를 보기만 할 뿐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아들이 눈물만 흘리며 쳐다보고만 있자, 요우키는 허리에 차고 있던 두 자루의 검을 풀어 요우모리의 발 앞에 내던졌다.

"떠나지 않게 하려고 했지만……너를 백옥루에 둔다 하더라도, 네가 아무것도 하지 않더라도 결국 나는 비난을 면치 못할 게다."

"그렇게 사람들의 말이 두렵습니까?"

"나는 두렵지 않지만, 유유코님의 평판을 더럽힐 수는 없었다. 대대로 사이교우지 가를 보좌해온 콘파쿠 가의 사람으로써, 그것만은 참지 못하겠더구나."

"결국 가족보다 주인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까? 알겠습니다. 원하시는 대로 떠나드리겠습니다."

"내 말을 더 듣거라, 요우모리!"

요우모리는 누관검과 백루검을 들고 허리에 찼다. 그리고는 말했다.

"빌어먹을 늙은이."

그 말을 끝으로 요우모리는 사라졌고, 아들의 말을 들은 요우키는 그대로 무너지듯 고개를 떨구며 오열했다. 후회로 가득찬 요우키의 오열이 조용한 마을을 가득 메웠지만,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다.

그 후로 많은 시간이 지났다. 마을은 예전처럼 조용했다. 듣기로는 아홉번째 아레의 아이가 태어날 때가 가까워졌다는 말이 있고, 역사를 지운다는 반백택 여인이 마을에서 아이들을 가르친다고 하였다. 미궁의 죽림에서 불꽃으로 된 날개를 봤다는 소문이 있고, 키리사메라는 젊은 청년이 도구점을 시작했다는 말이 있었다. 그리고 가장 무엇보다─요우키의 입장에서 가장 한이 되는 소식이라면─마을에 거주하는 요괴들이 크게 늘었다는 것이다.

그에 반해 백옥루는 크게 변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여전히 봄이 되면 환상향에서 가장 아름다운 벚꽃이 피었고, 백옥루의 주인인 벚꽃색 머리의 망령 아가씨 사이교우지 유유코가 있고, 그녀의 경호원이자 정원사 콘파쿠 요우키가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작은 변화는 너무나도 많았다.

요우키는 멍하니 툇마루에 앉아 하늘만 바라보기 일쑤였다. 가끔 유령들이나 마을에 내려갔을 때에, 요우모리에 대한 소식은 없는지, 혹시 요괴들 사이에 요우모리가 있는지, 검 쓰는 사람은 보았는지 등의 정보를 묻는 일이 과도하게 많아졌다. 사실을 알고 있는 몇은 그런 요우키를 볼 때마다 불쌍하다는 듯이 말했다만, 정작 자신들이 요우키를 저렇게 만든 장본인이라는 것은 새까맣게 잊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면, 억지로 잊는 척을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던 어느날이었다. 그날도 요우키는 마을에 나온 김에 요우모리에 대한 소식을 구하고 있었다. 그때 만난 것이 바로 하쿠레이의 무녀였다. 요우모리가 떠나던 날에 비하면 그 아름다움이 어느 정도 퇴색한 모습이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무녀의 기품은 느낄 수 있었다.

"아, 요우키 공."

"안녕하시오 무녀님."

"마침 잘 만났어요. 요우키 공에게 드릴 말씀이 있었거든요."

"혹시 요우모리에 대한 일이오?"

무녀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관계는 있을지도 몰라요."

"관계가 있을지도 모른다니, 무슨 뜻입니까?"

무녀가 말하기를, 요즘 마을 외곽에서 인요를 가리지 않고 잔인하게 참살당한 시체가 많이 발견된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 살인귀는 무시무시한 요력을 내뿜고 있었는데,─과장이 섞였겠지만─10리 밖에서도 그 기운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두 자루의 검을 반짝이며 뛰쳐나와, 길을 잃은 인간과 요괴를 죽이고 그들이 가진 재물을 빼앗은 뒤 그 시체의 일부를 떼서 먹는다고 하는 것이다.

두 자루의 검, 무시무시한 요력. 떠나던 날 요우키는 누관검과 백루검을 아들에게 주었다. 아들이 떠났던 이유도 무시무시할만큼 압도적이고 강한 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머지는 요우키로써는 절대로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인요를 가리지 않고 참살하며 그 시체를 먹는다는 것은, 요우모리에 대해 가지고 있는 그의 기억 속에서 그럴만한 일은 전혀 없다. 아무리 요기가 강해졌다 한들, 요우모리가 절대로 그럴리가 없었다. 분명히 요우모리를 죽이고 두 자루의 검을 빼앗은 요괴가 그를 참칭하는 것이리라.

"아닙니다. 절대로 요우모리가 아닙니다. 저건 소문일 뿐입니다."

"하지만 그가 보이지 않은 지 벌써 10년은 넘었습니다, 요우키 공."

"빌어먹을, 요우모리를 모함하시지 마시오, 무녀. 나는 내 아들에게 그런 식이 되라고 가르치지 않았소. 내 아들을 환상향에서 떠나도록 종용한 것이 당신을 비롯한 퇴치사 일당들이면서 이제는 아예 내 아들이 인륜을 저버린 살인귀라고 하는 거요?"

요우키가 비록 큰 소리는 내지 않았지만, 그의 말투와 표정에서 엄청난 분노와 살기를 무녀는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무녀는 꿋꿋했다.

"……하지만 적어도 조사는 해봐야해요, 요우키 공."

"요우키 공이라고도 부르지 마시오."

그렇게 말하며 요우키는 대답을 거부한 채 백옥루로 돌아갔다.

그날도 요우모리는 은둔처의 벽에 기댄 채로 눈을 감고 있었다. 명상을 하는 것인지 잠을 청하는 것인지는 요우모리 그 자신도 몰랐다. 아직은 낮인데다가 비까지 오기 때문에, 요우모리는 바깥으로 나가지 않았다. 도망쳐온 후 지금까지, 요우모리는 이 깊은 산속 골짜기에 있는 그의 은둔처에서 해가 떠 있을때 나간 적이 없었다.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풀에서 멧돼지 고기까지 음식은 많았고, 검을 관리할 숫돌도 충분했다. 비단옷은 이제 잔뜩 찢겨지고 짓이겨져 그 형체마저 온존치 못했지만 여전히 요우모리는 그것을 입고 다녔다. 그러던 그가 그 날, 그 아침에, 인기척을 느끼고 눈을 뜬 뒤 바깥으로 나선 것은 그야말로 운명이 분명했다.

무슨 바람이 들어서인지, 요우모리는 후두둑 떨어지는 비를 맞으며 은둔처를 나와 숲을 걷고 있었다. 오랜 시간 동안 은둔처 안에 숨어있던 것이 답답했던 것일까. 그가 인기척을 느낌과 동시에 가녀린 여인의 날카로운 비명을 들은 것은 그가 하쿠레이 신사로 가는 길 바로 옆까지 왔을 때였다. 또 요괴가 나물이나 버섯을 캐러 온 소녀를 습격해 갈갈이 찢어놓은 것일 뿐일테지, 요우모리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혹시 하는 마음에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 오지마!"

여인의 목소리가 확실히 들릴 즈음에, 요우모리는 요괴들이 내는 드득거리는 이가는 소리 역시 들을 수 있었다. 여인의 구슬픈 요청이 다시 들려왔다.

"제발, 제발 살려주세요……제발……."

"거기 요괴들."

요우모리가 발걸음을 좀 더 빠르게 해서, 여인이 낸 애처로운 말이 끝나기 직전에 사건이 벌어지려고 하는 장소에 나타날 수 있었다. 날카로운 발톱을 핥아대며 소녀를 짓이기려던 요괴들이 단체로 요우모리를 돌아보았다.

"하나, 둘, 셋인가."

요우모리의 압도적인 요기에 눌렸는지, 요괴들은 찍소리도 못내며 뒤로 물러서려고 했다. 용기를 낸 하나가 발악하려는 듯 요우모리에게 달려들자 요우모리는 별 것 아니라는 듯 누관검을 뽑아 그대로 상반신과 하반신을 나눠버렸고, 이왕 검을 뽑은 거 모조리 싹 죽여버리자고 생각했는지, 나머지 둘에게 재빨리 달려들어 순식간에 요괴들을 둘로 갈라버렸다. 피가 다시 한때 초록색이었던, 지금은 새까만 비단옷에 튀었다. 요우모리는 검을 한 번 흔들어 피를 털어낸 뒤 여인에게 다가갔다. 호박색의 아름다운 문양이 새겨진 고급스러운 재질의 옷과 옷에 달린 각종 장식, 그리고 그와는 안 어울리는 수수한 디자인의 검은색 리본이 달린 머리띠 등을 볼 때 마을 유지의 딸 중 하나로 보였다. 그 여인은 검을 든 채로 다가오는 요우모리의 모습과, 그가 내뿜은 무시무시한 아우라에 질렸는지, 얼굴이 창백하게 변한 채 그대로 기절해버렸다. 여자가 기절하자, 요우모리는 그제야 누관검을 칼집에 쑤셔넣었다.

"이거 어쩐다."

이 기절한 여인을 빗속에 내버려뒀다가는 다른 요괴에게 죽기 전에 먼저 동사하거나, 살아난다 하더라도 얼마 못 가 죽을 병을 얻을지도 모른다. 물론 깨어나도 빠져나갈 방법이 없는 건 덤. 어쩔 수 없다는 듯, 요우모리는 여인을 끌어안았다.

그녀가 깨어났을 때, 가장 먼저 느낀 것은 모닥불의 따듯한 열기였다. 두 번째로 느낀 것은 위험할 정도로 무시무시한 기운이었고, 세 번째는 자신이 속옷차림이었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깨어났지만 차라리 깨어나지 않았으면하는 상황인 것이다. 그녀가 들키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려 정체불명의 무시무시한 기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피 같은 적색 빛이 도는 검은색 머리카락은 무성의하게 다듬어져 있었고, 허리춤에는 일본도 두 자루를 차고 있는, 창백한 피부의 남자가 문쪽으로 기댄 채로, 한 쪽 눈만 뜬 채 자신을 보고 있었다. 그녀는 요우모리와 눈이 마주쳤을 때, 숨이 멎을뻔 했다. 두 자루의 칼, 압도적인 요력. 분명히 그 미친 살인귀가 분명했다.

"일단 속옷바람인 건 젖은 옷을 말리려고 한 거고, 모닥불의 존재 이유는 추워서입니다. 구워먹거나……그런 건 아닙니다."

요우모리는 여전히 존대를 썼지만, 그녀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는 그와 눈이 마주친 그 순간 다시 기절한 것 같았다.

"기절한 것과 기절한 척은 다릅니다."

요우모리가 차갑게 말하자 그제야 여자는 몸을 일으켜 앉은 상태에서 온몸으로 몸을 가렸다.

"높으신 분의 따님 같은데, 어쩌다 여기까지 왔습니까. 칼 찬 요괴의 은둔지까지 말입니다."

요우모리는 바깥을 내다보며 말했다. 그녀는 여전히 겁먹은 듯 말을 하지 않았다. 요우모리도 아무래도 됐다는 듯 더 이상 질문하지 않았다. 언제나 그랬듯이, 이 폐허가 된 사당의 뚫린 바닥에 모닥불을 펴 둔 쓰레기 같은 은둔처는 조용하기만 했지만, 요우모리나 그녀나 서로가 신경쓰이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저기."

그녀는 알았다는 말 대신 요우모리에게 물었다.

"보아하니 살인귀처럼 보이지는……않는데……."

"살인귀요? 제가 살인귀랍디까?"

여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요우모리는 큭큭큭 짧게 웃더니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창호지만 바라보았다. 자신에게 쫓아내다못해 아예 살인귀라는 소문까지 내버렸구나. 요우모리는 지독한 새끼들이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녀는 요우모리가 욕을 하거나 말거나, 궁금한 것을 물어보기 시작했다.

"옆에 떠다니는 게 뭐에요?"

"반령입니다."

"반령이요?"

"저는 반인……반요반령이니까요."

"이해하기 어려워요."

여인은 잠시 입을 꾹 닫더니, 이윽고 다시 질문을 쏟아냈다.

"이름이 뭐죠?"

여인이 물었다.

"콘파쿠……."

순간 요우모리는 자신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다. 그는 말을 하려는 듯 계속 왼손을 허공에 돌리면서 콘파쿠우우우우우우우우우-라고 말을 끌며 이름을 생각해내려 애를 썼다.

"요우모리. 콘파쿠 요우모리. 요우모리라고 불러도 됩니다."

"이름도 기억 못하는 건가요? 덜렁이시네요."

여인은 짧게 웃음을 흘렸다.

"그러는 아가씨는, 이름이?"

"그냥……유메라고 불러주세요."

"유메(夢)……."

다시 침묵.

"저기, 구해주셔서……고맙습니다."

"돌아가시면 적어도 제가 살인귀는 아니라고 해주십시오."

"꼭 말씀드릴게요. 콘파쿠 요우모리는 살인귀가 아니라 아주아주 착하고 좋은 요괴다, 라구요."

유메는 천쪼가리로 몸을 가린채로 요우모리의 등 뒤에 다가왔다. 그러더니 부드러운 손길로 씻지도 않고 제대로 다듬지도 않아 엉망인 요우모리의 머리카락을 빗어주며 말했다.

"머리라도 깔끔하게 하면 살인귀라는 소문이 줄어들거에요."

그러자 요우모리의 얼굴이 붉어졌지만, 그것을 유메가 알 일은 없었다. 요우모리는 어색함을 피하려고

"……10년이 넘도록 본 요괴들은 머리카락이 어떤지 신경쓰지는 않았습니다만."

"요즘 마을의 요괴들은 머리카락도 멋지게 하고 다니는 걸요."

"마을에 요괴가 삽니까?"

"네. 많이요."

요우모리는 깜짝 놀라 유메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그녀는 그의 행동에 도리어 놀라 몸을 돌리며 재빨리 손으로 가렸고, 요우모리도 자신의 무례함을 깨닫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 그, 그것들이 사, 사람을 고, 공격하지는 않고 그럽니까?"

"그, 그야, 고, 공격하지 않게, 겠다고 선, 선언한 요괴만 사, 사니까요."

둘은 한동안 다시 말이 없었다. 침묵을 깬 건 이번엔 요우모리였다.

"그거……억울하군요. 저는 쫓겨났었는데."

"그럼 지금이라도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요?"

"그들이 받아들이지도 않을 겁니다. 무엇보다 돌아갈 마음도 없습니다."

요우모리의 반응에 유메는 그를 설득시키고 싶었는지, 발을 동동구르며 어떤 말을 해야할지 생각했다. 이윽고 무언가 떠올랐는지 기쁜 얼굴로 말했다.

"하지만 떠나신지 10년이 넘었다고 하셨잖아요? 그러면 용서해주실지도 몰라요!"

"용서라고 하셨습니까?"

용서라는 단어에, 요우모리는 정말로 차갑게, 무서울 정도로 단호하게 대답했다.

"죄가 없는데 어떻게 용서를 받겠습니까."

"……저기, 혹시 제가 말 실수를 했다면 죄송해요."

"아닙니다."

요우모리는 여전히 차가웠다. 유메는 무슨 말이라도 할까 했지만, 바깥에서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요우모리가 미닫이 문을 열고 바깥을 보았다. 날은 이미 어두워졌지만 비는 그쳐있었다.

"옷을 입으십시오. 돌려보내드리겠습니다."

"저, 저기."

요우모리가 그 말에 유메쪽을 돌아보려는 찰나, 유메가 먼저 등 뒤에서 그를 껴안았다.

"좀 더 있고 싶어요. 요우모리님이랑……좀 더 있고 싶어요."

"유메씨?"

그녀의 행동에 요우모리는 너무나도 당황해 말도 똑바로 하지 못했다.

"……집에 가면 또 혼만 잔뜩 나고 아버지한테 얻어맞을 거에요. 그리고 한 동안 방에 갇혀서 살 게 분명해요. 어차피 그쪽에서 전 내다놓은 자식이니까요. 그냥 버리면 그만인……."

"……."

"항상 그곳에서 저를 데리고 나와줄 분을 기다렸는데, 어쩌면 요우모리님이 그 분일지도……."

유메는 요우모리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부드러운 양손으로 그의 상처투성이 얼굴을 어루만졌다. 그녀는 까끌까끌한 요우모리의 피부와 움푹 파인 그의 상처를 쓸어내렸다. 그러자 요우모리는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았다.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게 얼마나 기쁜 일인지 모르시는 겁니까?"

"제게 돌아갈 곳은 기쁜 곳이 아니랍니다, 요우모리님. 제가 왜 숲에서 헤메고 있었다고 생각하시나요? 제가 왜 요우모리님께 그렇게 귀찮을 정도로 말을 걸었다고 생각하시나요?"

"하지만……."

유메는 요우모리의 말을 자신의 입술을 그의 입술에 포개어 틀어막았다.

"이건 사랑이 아니라 한 순간의 일탈에 불과할지 몰라도……."

요우모리는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몇 개월이 지났고, 마을에는 대사건이 일어났다. 숲으로 가서 실종된지 하루가 지나 살아 돌아온 여인에게서 '콘파쿠 요우모리'가 살아있고, 살인귀는 그의 행적이 와전된 소문에 불과하다는 증언이 실린 텐구의 신문이 마을 전체에 뿌려졌다. 그리고 그녀의 배가 점점 더 불러오고 있다는 것도 모든 사람들이 알게 되었다. 그녀의 집안에서는 그녀를 방 안에 유폐해버렸고, 그녀는 한동안 나오지 않았다. 이 소식을 들은 요우키가 펄쩍 뛰며 기뻐했다는 것은 표현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그와는 별개로, 유메라는 여자가 무슨 말을 했던간에 요우모리를 그 '살인귀'로 규정하고 그를 퇴치하려는 퇴치사 집단에서는 그야말로 골칫거리였다. 사실 죽었다는 말이 나오기를 바랬던 그들이었지만, 그가 멀쩡히 살아있다는 소식은 퇴마사들을 공포에 몰아넣기 충분했다. 아무리 유메 그 여자가 요우모리는 살인귀가 아니라고 말을 해봐야 세뇌 당했을 가능성이 충분했고, 두 자루의 검과 강한 요기의 살인귀가 그라고 믿을 증거도 충분했다.

"벌써 몇 년이지? 요우모리가 떠난지도 말야."

퇴치사 중 한 명이 그렇게 말하자, 문을 열고 들어온 하쿠레이의 무녀가 그 말에 대답했다.

"거의 15년이 다 되어가죠. 우리는 그가 반인반령이었다는 것을 간과했었습니다."

그녀의 등장에, 모든 퇴치사들이 벌떡 일어나 그녀에게 예를 표했다. 그리고 다들 자리에 앉았다.

"그보다 요우키 공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그 분의 아들을 죽이려한다는 것만으로도 그분이 우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잘 아실거라 생각합니다."

"하, 하긴, 그렇겠지."

"그래서 요우키 공에겐 이 일을 알리지 않았습니다."

"그보다, 그를 퇴치할 계획부터 짜봅시다. 그놈의 아이를 밴 유메라는 여인을 쓰는 게 어떻겠습니까?"

퇴치사 중 하나가 헛기침을 하며 제안을 냈다.

"그녀를 쓰자니, 무슨 뜻입니까?"

"그 여인을 미끼로 요우모리 그 사람을 마을로 끌어들여 처리하는 겁니다. 마을 바깥으로 나가면 그 자에게 먼저 우리가 참살 당할테니, 마을로 끌어들여 그 자를 결계에 들어오게 한 뒤 봉인해버리자, 아니면 죽이자, 그런 뜻입니다."

"어머나, 그렇게 끔찍한 일을."

퇴치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무녀의 뒤에서 큰 목소리와 함께 등장한 유카리였다.

"결계라는 말 때문에 더 들어보니, 임산부를 미끼로 쓰는 결계인 건가요?"

"여기서 뭘 하는 거지, 유카리?"

"그냥, 유유코의 부탁을 받아서 요우모리를 붙잡는 일에 참여하려고 그래요, 무.녀.님♪"

유카리는 무녀를 보고 윙크를 보냈고, 무녀는 못볼 꼴을 봤다는 듯 얼굴을 찌푸렸다.

"솔직히 말해 나도 한 사람의 여자로써 그다지 마음에 드는 제안은 아닙니다만, 요우모리를 끌어들일 확실한 방법임은 틀림 없군요. 한 번 해봅시다."

유메가 돌아온지 8개월쯤이 되던 날이었다. 광장 한가운데, 손이 묶인 유메가 불편한 몸에도 불구하고 강제로 끌려와 앉아있었고, 그 주변으로 요괴 퇴치사들과 하쿠레이의 무녀, 그리고 무엇보다 유카리의 힘으로 요우모리를 가둘 함정이 설치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다들 무슨 일인가 하여 벌떼같이 마을 광장에 몰려있었다. 결계 설치가 끝나자 무녀가 결계 유지를 위해 자리에 남고, 퇴치사들이 마을 곳곳에 붙여놓은 부적을 통해 요우모리가 오는지를 확인했다. 유카리는 결계 설치가 끝나자 근처 지붕에 올라가 광장 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결계 한가운데에 묶인 유메는 주변을 계속 둘러보며 불안한 기색을 전혀 감추지 못했다. 그녀는 손을 모아 기도하면서, 요우모리가 자신을 구해주기를, 만약 그렇지 못한다면 차라리 이곳에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잠깐, 기척이 있어. 강력한 요기……크아악!"

마을 어딘가에서 요괴 퇴치사의 단말마가 들리자, 마을의 의용병과 퇴치사들이 모두 그쪽으로 향했다. 그들이 본 것은 퇴치사의 심장을 뚫고 나온 긴 일본도─누관검, 그리고 그것을 퇴치사의 몸에서 검을 빼내는 검은 머리의 요우모리였다. 문답무용, 퇴치사들이 모두 한꺼번에 요우모리를 향해 탄막을 쏘았다. 요우모리는 말없이, 왼손으로 빠르게 백루검을 뽑아들고 양쪽의 검을 맞댄 뒤 빠르게 한 바퀴 원을 그리며, "반사하계참!"을 외쳤다. 퇴치사들이 날린 탄막이 모조리 사방으로 튀어나오며, 일부는 마을 사람을 맞추고, 일부는 창든 민병을 맞추고, 일부는 운없는 퇴치사를 맞췄다. 상황이 그렇게 되자, 퇴치사들이 그를 결계로 끌어들이기 위해 뒤로 빠지면서, 장창을 든 사람들이 요우모리의 앞을 막아세웠다. 가장 앞에 선 사람이 창을 들고 그에게 달려들자, 요우모리는 빠르게 왼손에 든 백루검으로 창대를 오른쪽으로 쳐내고, 그와 동시에 오른손에 든 누관검으로 창대 자체를 잘라버린 뒤, 十자로 교차된 두 개의 검을 손목을 틀어 칼날이 안쪽으로 오게 쥐면서 창을 들고 돌격해온 불쌍한 사람의 목에 걸었다. 문답무용, 요우모리는 한순간의 지체도 없이 이 남자의 목을 몸에서 분리했다. 요우모리의 행동에 놀란 사람들은 주춤거리며 뒤로 빠졌다. 요우모리가 빠른 걸음으로 그들에게 다가오자, 손을 부들부들떨던 장창수는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찌르기를 시도했다. 요우모리는 이번에도 가볍게 백루검을 아래로 휘둘러 창끝을 땅에 처박고, 그틈을 놓치지 않고 발로 밟아 창대를 부쉈다. 창대가 박살나며 중심이 흔들린 그는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느끼기도 전에 요우모리가 내지른 누관검의 찌르기에 목이 꿰뚫렸다. 장창을 든 마지막 사람은 그 광경을 보자마자 창을 놓고 소리지르며 도망쳐버렸다.

요우모리가 광장쪽으로 다가오자 거기엔 남산만한 배를 끌어안고, 이번엔 사람 피를 뒤집어쓴 요우모리를 보는 유메가 있었다. 유메는 손을 뻗으며 '오지 마'라고 소리쳤지만 그 목소리는 요우모리에게 들리지 않았다. 결계인지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요우모리는, 그를 가로막으려는 요괴 퇴치사들의 탄막을 피하고, 튕겨내고, 빗겨내며 그들의 팔다리를 잘라버리고는 유메를 향해 달려왔다. 유메가 '안 돼'라고 외치는 순간 결계 안으로 들어온 요우모리를 향해 유카리와 무녀의 결계가 작동했다. 크아악! 요우모리는 짧은 비명을 지르며 두 자루의 검을 떨어트렸다. 그리고 무릎을 꿇으며 무너졌다. 숨도 쉬지 못할 정도로 강력한 결계에 고통받던 요우모리를 보던 유메는, 그가 떨어트린 누관검의 끄트머리로 묶여있던 손을 풀고 그에게 다가갔다. '요우모리님!' 그녀가 소리치며 요우모리를 끌어안았다. 그녀와 그녀의 뱃속에 있는 아기에겐 결계가 작동하지 않는건지, 유메는 요우모리에 비해 훨씬 나은 움직임을 보이며 요우모리를 끌어안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무녀는 요우모리를 끝내기 위해, 결계를 유지하면서 천천히 그에게 다가왔다.

그때였다. 유메 덕분에 요우모리가 민가 지붕에 앉아서 상황을 지켜보던 유카리와 눈이 마주친 그 순간, 그녀가 윙크했다. 그러자 갑자기 결계가 유리장 깨지듯, 종이장 찢어지듯 파괴되고, 요우모리는 순간적으로 힘이 회복되자마자 땅에 떨어진 누관검을 잡고, 왼손으로 유메를 품에 안은 채 그에게 가까이 다가온 하쿠레이의 무녀를 향해 누관검을 내뻗었다. 콱! 칼날이 살을 찢고 피가 뿜어지는 소리와 함께, 하쿠레이의 무녀의 배와 등을 누관검이 뚫은 그 광경을, 마을사람들이 모두 놀란 얼굴로 지켜보았다. 무녀 역시 처음에는 놀란 모습이었지만, 이윽고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요우모리가 검을 빼냈을 때, 무녀는 그대로 앞으로 쓰러졌다. 요우모리가 다시 유카리가 있던 지붕을 보았을 때, 그녀는 이미 없었다.

상황이 정리되자, 유메는 갑자기 고통이 느껴지는지 신음하며 요우모리의 가슴에 안겼고, 요우모리는 재빠르게 두 자루의 검을 챙긴 뒤 그녀를 데리고 마을 바깥으로 도망쳤다. 그가 도망치는 동안, 아무도 요우모리가 내뿜는 극도의 살기 때문에 그를 가로막지 못했다.

요우키가 마을에 내려온 것은 요우모리가 도망치고 한참 뒤였다. 유유코의 말 같지 않은 억지 때문에 마을에 내려가지 못하다가, 막상 내려와보니 목이 달아난 시체, 팔다리가 없어진 부상자들, 그리고 그 사이에서 배에 붕대를 감은 채 누워있는 하쿠레이의 무녀를 보고 대체 무슨 상황인지 전혀 감조차 잡지 못했다. 그럴때는 물론 물어보는 것이 최고였다. 그는 무녀에게 뛰어갔다.

"무녀님,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업입니다. 무고한 생명을 이용하려고 했던 우리에 대해 신께서 내린 형벌입니다."

"그런 이상한 소리 말고, 무슨 일인지 말씀하십시오!"

"요우모리, 요우모리가 자신의 아이를 가진 유메를 데리러 왔습니다. 그리고 그 여파는 보시다싶이……."

요우키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이제 요우모리가 무슨 짓을 할지 모릅니다, 요우키 공. 그를 막을 분은 당신 뿐입니다."

"……뒷처리를 부탁하시는 겁니까?"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죄송합니다, 요우키 공. 하지만, 하지만 요우모리가 분노로 정말로 그 살인귀로 변해버린 것 같습니다. 끝까지 이런 부탁을 해서 죄송합니다만……그를 죽여주십시오."

처음엔 자기한테 아들을 죽여달라고 말하는 무녀의 부탁을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했지만, 요우키는 요우모리가 살인귀가 되어 콘파쿠 가의 이름을 더럽히고 환상향을 공포로 물들일 것이란 무녀의 말이 걸렸다. 그리고 이미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환상향을 지키는 무녀에게까지 상해를 입힌 요우모리의 행동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요우키는 원치 않았지만, 환상향은 요우모리의 죽음을 필요로 했다.

계속해서 요우모리가 살아있다면, 환상향은 이상향으로 불리지 못하는 곳이 될지도 모른다.

요우모리가 도의적으로 옳았다 할지라도, 하쿠레이의 무녀가 틀렸다 할지라도, 더 이상 요우모리가 도의적으로 옳은 사람으로 존재할 수는 없었다.

하쿠레이의 무녀 때문에, 유메라는 아가씨 때문에, 빌어먹을 야생 요괴들 때문에, 그리고 이 모든 일의 단초를 제공한 그 자신, 콘파쿠 요우키 때문에…….

그렇게 하루 종일 아들의 흔적을 따라서, 요우키는 요우모리가 은둔처로 두던 사당 앞으로 왔다. 요우모리는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사당 앞에서 양손에 검을 한 자루씩 쥔 채 서 있었다. 요우키는 검을 뽑으며 앞으로 나섰다.

"콘파쿠 요우모리!"

"오랜만입니다, 요우키 영감. 나를 죽이러 오셨습니까? 그 빌어먹을 무녀년이 그랬던 것처럼?"

요우모리의 눈은 새빨갛게 변한 채 이글거렸고, 눈동자는 고양이마냥 날카롭게 변해있었다. 더는 사람의 눈이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이제는 눈에 보일 정도로 강력한 요력이 요우모리의 온몸을 감싸고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그의 분노와 살기만은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요우모리."

"당신이 좀 더 신경써서 그때 그 시간에 나를 하쿠레이 신사로 가도록 명하지 않았다면 내 머리카락이 이렇게 붉게 변하지도 않았을 거야."

요우모리의 머리카락은 더 이상 검은색이 아니라 갓 흘러나온 피 같은 색깔이었고, 사자의 갈기처럼 바람에 이리저리 흩날렸다.

"요우모리……."

"당신들은 나를 이렇게 만들고도 아무런 죄책감도 없었지. 나를 쫓아내고, 나를 사랑해주던 아가씨를 미끼로 쓰고……."

요우모리는 오른손에 쥐고 있던 누관검을 등 뒤로 올려, 등에 대고 칼집에서 검을 뽑아냈다. 누관검의 칼집은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졌다. 백루검 역시 허리춤에서 칼이 뽑히자 칼집은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들아."

"더 이상은 날 가지고 놀게 하지 않겠어. 운명이든 신의 뜻이든 필연이든 무엇이든 간에 더 이상 내가 이렇게 비참하게 살 필요는 없어. 더는 그렇게 되도록 좌시하지 않겠어."

요우모리의 반령은 요우모리 주변을 정신없이 돌아다녔고, 그러자 요우키의 반령은 마치 춤을 추듯 요우키의 주변을 빙글빙글 돌았다. 그와 동시에, 사당 안에서는 유메의 찢어질듯한 신음에 가까운 비명이 들렸다.

"당신은 내 아내를 건드리지 못해. 내 아이를 건드리지 못해. 내 사랑을, 내가 가진 것마저 빼앗지 못하게 할 거야. 나를 요괴로 몰아넣고 쫓아낸 대가를 톡톡히 치루게 해주마!"

요우키는 대답 대신 양손으로 쥔 일본도를 치켜들었다. 요우모리는 점점 광인에 가까운 모습이 되어갔다. 더 이상 아들이 그런 식으로 부서져내리는 꼴을 놔두지 않으리라.

"바람에 흩날리는 꽃잎마저 베어버리는 속도로, 심초참!"

요우모리가 심초참이라 외치자마자, 정말 빠른 속도로 요우모리의 누관검이 허공을 가르며 요우키에게 향했다. 요우키는 압도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아들의 속도에 짐짓 놀라 주춤했지만, 그다지 어렵지 않게 검을 들어올려 요우모리의 검을 막았다. 그리고 동시에 그의 검으로 요우모리의 누관검을 위로 밀어내며 발로 빠르게 요우모리를 걷어찼다. 요우모리는 요우키의 빠른 반응에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그 다음은 서로 발을 이리저리 놀리며 서로의 빈틈을 찾기 시작했다. 이것은 요우키가 가르친 가장 기본적인 대련 기술 중 하나였다. 스텝을 밟아가며, 어떻게 검을 휘둘러야 하는지 계산하는 것, 그것이 검술 대련이라고 요우키는 말했었다. 그리고 그 빈틈을 그가 찾은 듯했다. 요우키는 재빠른 속도로 위에서 아래로 크게 내려베기를 시도했다. 상대가 요우모리가 아니었다면 그대로 끝이었겠지만, 요우모리는 재빠르게 왼손의 백루검으로 그 일격을 막고 도리어 자신이 누관검으로 요우키를 내려찍으려했다. 요우모리의 반령과 옥신각신하던 요우키의 반령이 재빠르게 요우모리를 쳐서 떨어트리지 않았다면 이번엔 요우키가 죽었을 것이었다. 그러자 갑자기 요우모리가 발도하는 자세를 잡더니 외쳤다.

"속도로써 틈을 만들어내는 기세로, 현세참!"

이번에는 요우키가 간단히 검을 들어 막았지만, 요우키에게 전달된 충격으로 그는 쭈욱 뒤로 밀려났다. 하지만 요우모리는 멈추지 않았다.

"명상참!"

요우모리를 감싸던 요력이 갑자기 누관검에 들어가더니, 요력으로 길고 강력해진 누관검의 칼날이 그대로 요우키를 향해 날아왔다. 요우키가 재빠르게 뒤로 물러났지만 칼날 끝에 걸려 옷 앞섬이 잘려나갔다. 하지만 그는 개의치않고 바로 반령으로 요우모리를 강타하려고 했지만, 요우모리가 팔로 간단하게 쳐냈다. 그리고 이번엔 요우모리의 반령이 요우키의 가슴을 강타하고, 그대로 요우키의 목에 뱀처럼 칭칭감겨 그의 목을 졸랐다.

그때 다시 유메의 비명이 들리고, 요우모리는 사당으로 시선을 옮겼다. 유메, 그가 중얼거렸다. 그의 시선이 분산된 그 순간에 요우키가 반령을 풀어내고는 바로 검을 치켜들고 외쳤다.

"미진지항참!"

그러자, 요우키의 검에 그가 가진 요력이 불어넣어지고, 그 검은 파랗게 빛났다. 요우모리는 그것을 보고 미처 피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요우키의 힘을 실은 참격에 그대로 요우마루의 옷이 찢어지고, 가슴과 배까지 가로지를 정도의 커다란 상처가 생기며 그의 몸에서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나왔다. '크아아아아아악!!!' 요우모리는 굉음을 지르며 고통을 표현했지만 그는 여전히 쓰러지지 않았다. 그는 정말로 미친 사람처럼, 요괴처럼, 온몸에서 피가 나고 내장이 튀어나올 수준의 상처에도 요우키에게 달려들어 검을 휘두르려고 했다. 그 모습을 본 요우키는,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며, 검으로 자세를 잡고 중얼거렸다.

"모든 증오와 분노를 끊고 자유로워져라. 그리고……날 용서해다오. 육근청정참."

요우모리는 목석처럼 무릎을 꿇고, 고개를 떨군 채로, 눈과 코와 입에서, 온몸의 상처에서 피를 뚝뚝 흘렸다. 그의 반령은 이미 바닥에 떨어진채였다. 더 이상 유메의 비명도 들려오지 않았다. 다만 아이 하나가 시끄럽게 우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요우키는 여전히 검을 쥔 채 요우모리를 보고 있었다.

"영감……죽기 전에……소원……들어줘……."

"말하거라."

"저……아이……내겐……꿈과도……같아……하룻밤의……아름다운……꿈……."

요우키는 요우모리의 목을 내려치기 위해 자세를 잡고 검을 높게 들었다.

"그러니까……저 아이……요우무(妖夢)라고……이름……붙여줘……."

"그게 다인게냐?"

"그리고……사랑한……."

요우키는 요우모리가 말을 다 하기도 전에 홱, 목을 내리쳤다. 요우모리의 목이 바닥을 굴러가며 이미 피가 묻지 않은 땅에도 그의 피를 적셨고, 목이 있던 자리에서는 피가 탄막 쏘듯 마구 뿜어져나오더니 그대로 바닥으로 무너지듯 쓰러졌다. 요우키는 칼을 버렸다. 그리고 본래 자신의 것이던 누관검과 백루검을 다시 허리에 찼다. 그제야 목이 터져라 울고있는 아이가 있을 사당으로 들어섰다. 안으로 들어서자 희미하게 숨을 내쉬는 유메와, 탯줄도 잘리지 않은, 울고있는 아기가 있었다. 문이 열리고 인기척을 느낀 유메는 희미한 시야로 요우키를 돌아보았다.

"……요우모리님."

"……."

"저는 이제 힘이 나지 않아요."

"……."

요우키는 탯줄을 자른 뒤, 울고 있는 아기를 강보에 싸서 품에 안았다.

"딸……인가요?"

요우키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지으셨나요?"

"요우무. 콘파쿠 요우무라고 하겠소. 당신의 이름을 따서."

"좋은……이름이네……요……."

그걸 마지막으로 거의 들리지도 않는 유메의 희미한 숨소리마저 끝났다. 요우키는 사당을 나오며 불을 질렀다. 우르르, 소리를 내며 무너지고, 타들어가는 사당을 뒤로하고, 요우키는 잠든 요우무를 오른팔로 꽉 끌어안고, 왼손으로는 요우모리의 잘린 목을 들고 마을로 돌아왔다. 그가 한 손에는 아들의 목을, 다른 손에는 새근새근 자는 손녀를 들고 나타나자 모두 어떤 표정을 지어야할지 알 지 못했다. 요우키는 요우모리의 목을 광장에 내던졌다. 이제는 요우모리의 저주받은 인생도 끝이라고, 요우키는 그렇게 말했다.

"……그래서 지금까지의 일을 모조리 역사에서 지워달라는 건가요?"

카미시라사와 케이네는 이 늙은 정원사의 말을 듣고는 어찌할 줄 몰랐다. 자신과 요우무만 남기고 요우모리에 대한 모든 역사를 완전히 지워달라고 할 줄이야.

"하지만 그렇게 하면, 저 요우무라는 아이가 자라서 왜 자기 부모에 대해서 하나도 기억도, 기록도 없는지 궁금해 할게 분명할텐데요."

"그게 자기 아비가 사람 목을 베고 다니던 살인귀라는 진실─은 아니지만─보다는 낫다고 생각하오, 선생 양반."

케이네는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역사를 지워도 알 사람은 모두 알 게 될 겁니다. 역사에서 지운다고 사건 자체가 없던 일이 되는 게 아닙니다. 누군가가 요우무에게 진실을 말해줄 수 있어요."

"나는 명계의 주인을 모시는 정원사라오."

요우키는 그렇게 말하며 작게 웃음지었다. 케이네는 요우모리에 대해 적힌 모든 역사를 꺼내들고, 그 기록 위에 손을 대고 주문을 외웠다. 그리고 손으로 지우개 가루를 쓸어내듯 종이 위를 쓸어냈다.

"그래서, 이걸로 정말로 요우모리에 대한 역사는 없어진 것이오?"

"요우모리가 누군데 그러시죠?"

케이네는 싱긋 웃어보였다.

"할아버지?"

요우무의 부름에 요우키는 자신이 멍하니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요우무에 대한 책망.

"할아버지라 부르지 말라고 하지 않았느냐?"

"하지만, 스승님이라고 부르면 반응하지 않으셔서……."

"시끄럽다. 앞으로 그런 말을 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 계속한다. 날 따라해라."

"그, 그치만, 보고 따라하는 건 너무 어려운……."

"시끄럽다고 했다!"

다시 현재, 시끌벅적한 술잔치가 점점 파할 때에 가까웠다. 유유코는 자신이 알고 있는 이 사실을 요우무가 알게 된다면 어떻게 될지 너무나도 두려웠다.

"만약에, 요우무가 요우모리처럼 되면 어떡하지?"

"흐음, 유유코. 너무 걱정하는 거 아니야?"

유카리는 유유코에게 어깨동무하며 그녀를 다시 술잔치가 있는 곳으로 끌고 갔다.

"요우무가 사실을 알 게 되서 미쳐 날뛰더라도……이번 하쿠레이의 무녀의 배를 누관검으로 찌르지는 못할 거야. 그러니 걱정하지 마. 게다가 요우무는 정신이 더 강한 아이니까 말이지. 사실을 안다고 해서 요우모리처럼 되지 않을꺼야. 적어도 난 그렇게 믿어."

두 사람이 다시 돌아오자, 정신을 차린답시고 앉아서 비틀거리던 요우무가 벌떡 일어나더니 유유코에게 안겼다.

"우웅, 유유코님, 헤헤헤. 응……."

"이런이런, 아무래도 백옥루까지 가긴 힘들겠네. 레이무, 미안한데 요우무 좀 재워줄 수 있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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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즈베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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