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백옥루의 마당에도 낙엽이 가득 쌓이고, 노랗게 변한 낙엽이 때때로 바람에 날리며 내는 울음과 같은 소리를 제외하면 그 어떤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망령 아가씨의 거처에 어울리는 지독하고 소름끼치는 정적이었다. 그 정적 속의 마루 위에는 벚꽃 같은 머리색의 사이교우지 유유코가 멍하게 앉아있었다. 그녀의 눈에 초점이라고는 없었고, 비어있는 것만 같았다.

 그 정적을 깨는 발소리, 손에 소반을 든 요우무가 뒤에서 나와 유유코의 옆에 내려놓았다. 조르륵 소리와 함께 차를 따르며, 요우무가 말을 걸었다.

 

"차 드세요, 유유코 님."

"……."

 

 멍하니 있던 유유코는 요우무의 말에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몸을 돌리고 찻잔을 받았다.

 

"고마워, 요우무. 오늘은 경단이네."

 

 유유코는 다시 떨어지는 낙엽을 보면서 찻잔을 기울였다. 그녀는 아무런 말도 없이 그저 이리저리 흩날리는 낙엽에만 시선을 고정했다. 그러기를 한참, 조용한 주인을 뚫어지도록 쳐다보던 어린 정원사는 얼음장 같은 정적을 참지 못하고 말을 꺼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계신가요?"

"아무것도."

"하지만 그렇게 슬픈 표정으로 낙엽을 보시면 제가 다 걱정돼요, 유유코 님."

 

 그 말에 찻잔을 기울이던 유유코의 손이 멈췄다. 그녀는 잔을 놓고는 경단을 하나 집었다. 그녀는 아가씨답게 조신하게 한 입 베어물고는 다시 내려놓았다.

 

"그래……. 사실은 낙엽을 볼 때마다 요우키가 생각난단다."

"제 할아버지요?"

 

 유유코는 고개를 끄덕였다.

 

"요우키가 떠난 지도 정말 오래구나."

 

 요우키라는 말에 요우무는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표정 역시 밝지만은 않았다. 유유코는 반이 잘린 경단을 다시 집어먹었다. 경단이 그녀의 목을 타고 넘어가자, 그녀는 다시 찻잔을 들었다. 그녀는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운 요우무를 한 번 힐끗 쳐다보았다.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니? 나도 요우무가 그렇게 슬픈 표정을 지으면 싫단다."

"할아버지께서 떠나시기 전에 제 부모님에 관해서 물어본 적이 있었어요."

 

 유유코는 순간적으로 손을 멈췄다. 손이 멈췄다기보다는 그대로 마비되었다는 것에 가까웠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찻잔을 엎지를 뻔했다

 

"평소 같으면 무섭게 화를 내셨을 텐데, 그때는 정말로 슬픈 표정을 지으셨어요. 그러더니 할아버지답지 않게 미소를 지으시면서, 언젠가는 알 거라고, 그 말만 하셨어요."

 

 요우무의 얼굴은 여전히 응달처럼 어두웠다. 항상 차갑고 무서운, 다가가기 어려웠던 그 사람이 억지로 웃으며 슬픔을 억누르는 모습을 회상하자니 더더욱 슬프고, 또 궁금했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유유코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제 부모님은 대체 어떤 분인가요?"

 

 유유코는 대답하지 않고, 그녀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알려주세요, 유유코 님!"

 

 절규에 가까운 요우무의 물음에도 유유코는 말없이 찻잔만 기울였다. 그리고 시선을 저멀리 허공에 둔 채,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미안해, 요우무. 요우키는 나한테 아무 말도 안 해줬단다. 그나마 알고 있던 부분은 다 잊어버렸고."

"하지만……."

 

 그때 정원에 누군가가 불쑥 튀어나왔다. 유유코가 시선을 옮기자 그곳엔 양산을 쓴 금발의 아름다운 요괴, 야쿠모 유카리가 마루를 향해 천천히 걸어오는 게 보였다. 요우무는 그녀를 보자 일단 일어나 인사했다.

 

"손님이 왔네. 미안하지만 술상을 준비해줄 수 있겠니?"

 

 요우무의 표정에는 당장 대답을 듣겠다는 의지가 보였으나, 점점 더 가까워지는 유카리를 보고는 풀 죽은 목소리로 알았다는 대답만 하며 부엌으로 물러났다. 유카리는 요우무가 앉았던 자리에 앉았다.

 

"안녕, 유카리. 이제 곧 자야할 때네. 인사하러 온 거야? 마침 잘 왔어. 단풍이 예쁘게 폈거든."

"흐응. 난관에서 구해준 건 언급하지 않는 거야? 실망인걸."

"아직 나한테 실망할 거리는 많아, 유카리."

 

 유유코는 나름의 유머를 발휘했으나, 씁쓸한 표정을 감출 수는 없었다. 유카리는 잠깐 뒤를 돌아보았다. 유유코는 어차피 요우무가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지 이야기를 꺼냈다.

 

"아직도 잊지 못해. 요우키의 그 모습을. 누가 잊을 수 있겠어."

 

 유카리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둘은 과거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정말 오래전의 이야기였다.

 백옥루의 정원사 콘파쿠 요우키가 방랑무사 짓을 끝내고 백옥루의 주인 사이교우지 유유코를 보필한지도 수없이 많은 시간이 지난 뒤였다. 수많은 시간이 지나는 동안 그는 성심성의껏 유유코를 보필했다. 언제나 조용하게, 있는 듯 없는 듯 하면서도 유유코를 지켰다. 뿐만 아니라 그의 검술 실력은 환상향 제일이라고 해도 무리가 아니었다. 최소한 유유코를 제외한 사람들에게, 그는 가지치기보다는 검술로서 더 알려진 사람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품에 갓난아기를 안은 채로 백옥루에 나타났다. 그는 무표정하면서도 무언가 단호히 결심한 모습으로 유유코에게 절을 올렸다. 유유코는 요우키의 기묘한 행색에 반은 놀람으로, 반은 신기함으로 그를 대했다.

 

"소인 콘파쿠 요우키, 아가씨께 청할 것이 있습니다."

 

 유유코는 대답 대신 미소로 요우키를 바라보았다. 긍정의 뜻으로 알아들은 요우키는 아이를 보며 말했다.

 

"그 아이는 제가 허락 없이 다른 아가씨와 통혼하여 낳은 아이입니다. 아가씨를 모시는 몸으로서 허락도 없이 통혼한 죄를 범하였습니다. 저는 죽어 마땅한 존재이나, 이 아이를 생각해서라도 부디 저를 용서해주십시오." 

 

 유유코는 새근새근 조용히 자는 아기를 보았다. 은은한 청색이 도는 하얀 머리는 물론, 아기의 주위에 손가락처럼 조그마한 반령이 유유히 떠다니는 것이 영락없는 요우키의 아이였다처음부터 내치려는 생각 따위는 없었던 그녀는 밝게 웃어보였다.

 

"이 백옥루에 사람이 한 명 더 생긴다면 그거야 말로 좋은 일이라고 생각해. 그보다도, 칼날 같던 요우키의 마음을 가져간 아가씨는 누굴까? 궁금해지는걸."

 

 요우키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이 이름은 지었고?"

"예전에 섬겼던 분의 이름을 따서, 요우모리(妖盛)로 할까 합니다."

"콘파쿠 요우모리(魂魄妖盛). 좋은 이름인걸."

 

 유유코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요우키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는 다시 한 번 절하며 아이를 데리고 나갔다. 대체 누구와의 사이에서 얻은 자식일까, 유유코로서는 알 수 없었다.

 

 그렇게 한참이 지난 뒤, . 언제나 변함없이 백옥루 마루에 앉아 차를 마시며 변화하는 계절을 보던 그녀에게 새로운 볼거리가 생겼다. 백옥루의 마당은 전과 같지 않게 시끌시끌했고, 그 소음의 진원지에는 은은한 청색이 감도는 하얀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두 칼잡이의 검무가 보였다. 둘은 기합을 내지르며 진짜 같은 대련을 펼쳤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서로 죽이려 드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대련은 거칠었다.

 요우키는 계속 옆으로 움직이며 아들의 허점을 살폈다. 거친 숨을 내쉬며 지친 모습을 보이는 요우모리는 움직임이 계속 느려졌고, 아버지의 빠른 몸놀림에 눈을 따라가는 것도 버거웠다. 하지만 그는 요우키의 공격을 요리조리 칼을 움직이며 막아내었다. 그런 요우모리의 모습을 날카로운 눈초리로 노리던 요우키는 단 한 번의 틈을 노리고, 크게 기합을 내지르며 칼을 뻗었다. 요우키의 일격에 요우모리는 칼을 잃고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많이 늘었네, 요우모리군."

 

 낯선 여인의 목소리에 둘은 살기를 잃고 목소리의 주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유카리였다. 요우키는 칼을 치우고 아들을 일으켜 세우며 유카리를 향해 인사했다.

 

"오랜만입니다, 유카리 님. 아가씨를 뵈러 오셨는지요?"

", 그렇다고나 할까."

 

 유카리는 부채로 입을 가린 채 살짝 웃었다.

 

"온지는 한참 됐는데, 둘이 너무 대단하게 대련하느라 넋 놓고 보고 있었지."

"과찬이십니다."

"아니야. 정말 대단했어."

 

 유카리는 호호 웃더니 요우모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고는 부채를 접으며 요우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사흘 뒤에 새로운 하쿠레이의 무녀가 처음으로 제를 올릴 거야."

"그 아이가 벌써 그렇게 자랐습니까?"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결계를 수호하는 인간이 제를 올리는 날이니 우리가 참석해야겠군요. 언제나 그랬듯이."

"."

 

 유유코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유카리를 부르는 듯했다. 유유코 쪽을 한 번 돌아본 유카리는 적당히 인사하며 자리를 떴고, 그녀가 유유코를 향해 걷자 요우키는 아들을 데리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요우모리는 곁눈질로 유카리를 힐끔힐끔 보았다.

 

"저 분은 누구……."

"야쿠모 유카리. 요괴 현자이자 아가씨의 오랜 친구이시다. 혹시나 음흉한 생각을 품고 있다면 그런 생각은 그만 두는 게 좋아."

"제가 언제 그런 생각을 했다고 그래요, 아버지?"

 

 그렇게 떠들던 둘은 방문 앞에 도착했다. 요우키가 장지문을 열자마자 보인 것은 빛바랜 초록색 오오요로이(綠大鎧)였다. 갑옷 뒤에는 소창(素槍)과 활이 한 자루씩 걸려있었다. 요우키는 이 모든 것들이 마치 보이지 않는 것인 양 안으로 들어가서는 자리에 앉았다.

 

"조금 전에 들었느냐? 새로운 하쿠레이의 무녀가 처음 제를 올리는 날이 사흘 앞이라고."

", , 아버지. 무녀는 환상향의 결계 유지에 꼭 필요한 존재라고 하던데."

"그래. 환상향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기에 우리가 가서 축하해줘야 하는 거지.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본 무녀만 몇이더라. 지난번 무녀는……."

 

 하지만 요우모리는 아버지가 얘기를 하든지 말든지 상관은 안 하고, 오로지 요우키의 왼편 벽에 걸린 초록색 갑옷만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무녀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 요우키는 요우모리의 무신경한 대답과 홀린 듯한 시선을 보았다.

 

"저 갑옷이 그렇게 궁금하느냐?"

 

 아버지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린 요우모리는 아버지에게로 돌렸다. 그는 기죽은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 갑옷에 홀린 것처럼 고개를 돌렸다.

 

"볼 때마다 궁금했던 겁니다만, 대체 저 갑옷은 어디서 구하신 건가요? 환상향 어디에서도 저런 갑옷은 못 봤어요."

 

 요우모리의 말에 요우키는 고개를 돌려 갑옷을 보았다. 찰은 낡아 빛을 잃었고 이를 연결하는 실은 때가 잔뜩 껴서 거무스름했다. 투구는 커다란 황금색 장식이 붙어있지만, 마찬가지로 황금으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색이 바랬다. 먼지가 하얗게 앉은 것은 물론이었다. 요우키는 일어나 갑옷에 가까이 갔다. , 한 번 입김을 불자 갑옷에 붙어있던 먼지가 날아갔다.

 시선을 조금 더 뒤로 옮기자 벽에 창과 활이 걸려있었다. 창날은 낡았고 이는 빠져있었으며, 창대는 금방 부러질 것 같았고, 활은 한 번 당기기라도 했다간 활 몸과 시위가 동시에 부러져버릴 게 분명했다. 요우키는 손으로 갑옷을 천천히 쓸며 입을 열었다.

 

"이건 내가 환상향에 오기 전에 썼던 것들이야. 뭐라고 해야하나, 정말 오래된 것들이지. 환상향에 오기 전, 결계가 생기기 전에 나는 이 나라 곳곳을 떠돌아다니며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찾았다. 이 갑옷을 입고, 저 뒤에 있는 창과 활을 들고, 보이는 것들은 모조리 죽였지. 사람, 요괴, 오니, 누구든 가리지 않았어."

 

 낡은 갑옷은 그의 눈엔 인간, 동물, 요괴, 온갖 피를 뒤집어 쓴 자기 자신으로 보였다. 자기 의지라고는 없이 따르는 주인의 명령에 따라 손에 든 무기를, 주인이 가리키는 사람을 모조리 살해하는 그 모습. 그것은 무사라기보다는 하나의 괴물이었다. 요우키는 눈을 감고 그 끔찍한 과거를 생각했다.

 

"한때 나는 온 나라가 두 패로 갈려서 싸울 때 호랑나비 깃발을 든 전사들 사이에서 대나무 잎을 든 자들과 맞서 싸웠다. 결국 우리가 패해 흩어져버린 뒤로, 난 살아남기 위해 싸웠지……."

 

 요우키가 말꼬리를 흐리더니, 그대로 침묵했다. 그는 갑옷을 만지며 상념에 잠겼다. 창대를 쥔 채 자신에게 달려드는 졸병, 두려움에 질려 마구잡이로 칼을 휘두르는 무사, 무시무시한 소리를 내며 날아오는 화살, 상처투성이가 되어 피를 흘리면서 무릎 꿇은 자신…….

요우키의 무거운 침묵에 공기마저 무거워 숨쉬기조차 어려워졌으나, 요우모리는 과거 이야기를 하는 아버지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그냥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덕분에 나는 초록 오오요로이의 귀신이라는 새 이름을 가지고 온 나라를 떠돌았지. 증오를 증오로, 분노를 분노로 씻으며, 이 칼로 내 자신의 부끄러움을 덮으며 살았다그러던 중에 야쿠모 유카리를 만났지. 그리고 아가씨를 만났어. 그렇게 여기까지 왔고."

 

 요우키는 갑옷에서 손을 뗐다.

 

"여기에 정착하면서, 다시는 이걸 입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매일 이 갑옷을 보면서 과거의 내 자신을, 생각하기조차 싫은 그 괴물을 떠올리며 각오를 되새겼다. 때로는 보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워 이 갑옷을 버리려고 했지만, 그럴 때마다 나는 이를 수행이라고 생각하며 참았다."

 

 그는 몸을 돌려 아들을 바라보았다.

 

"아직도 이 갑옷이 멋있다고 느껴지느냐? 환상향은 갑옷이 필요 없는 곳이다. 그래야만 하는 곳이다. 너도 그 뜻을 이해하면 좋겠구나."

 

 요우모리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지만, 완전히 이해한 표정은 아닌 것 같았다. 요우키는 언젠가 아들이 이해해주리라고 믿으며 자리로 향했다. 그때 갑자기 장지문이 스르륵 하고 열렸다. 둘이 거의 동시에 열린 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유유코였다. 그녀는 두 사람에게 한 번 미소를 보여주고는 요우키를 돌아보았다.

 

"요우키. 유카리가 주문한 게 다 됐다고 해. 마침 잘 됐어. 찻잎이 다 떨어졌으니. 빨리 마을에 내려갔다 와."

 

 요우키는 대답하지 않고 일어나 유유코에게 묵례로 답했다. 그가 밖으로 나서려는데 유유코가 다시 말을 꺼냈다.

 

"요우모리도 같이 내려가렴. 요우키 혼자서 모두 들 수는 없잖니?"

", 아가씨."

 

 요우모리 역시 요우키와 똑같이 인사하며 일어섰다. 둘의 모습을 본 유유코는 웃으며 중얼거렸다.

 

"정말로 요우키의 아들이 맞구나."

"?"

"아무것도 아니야. , 빨리 가야지. 아버지가 기다리고 있잖니. 그리고 올 때 맛있는 거 사오고."

", ."

 

 두 사람이 갈 준비를 마치고 나가려는데, 유유코가 요우키를 불렀다.

 

, 아가씨.”

아까 말한 거 말이야.”

…….”

 

요우키는 유유코의 말에 당황했다.

 

들으셨습니까?”

처음부터 유카리한테서 들어서 별로 놀랍지는 않아. 그래도…….”

 

유유코는 걱정하는 눈빛이었다.

 

언제든지 힘들 때면……. 알았지? 종자를 챙기는 건 주인의 몫이니까.”

……황송함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아가씨.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콘파쿠 부자는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려는 때에 마을에 도착했다. 마을에는 점점 어둠이 드리워져갔지만, 등불 덕분에 오히려 낮보다 더 밝고 활기찼다. 이제 곧 열릴 새 무녀의 첫 제의에 마을 사람들도 같이 들뜬 것처럼 보였다. 둘이 안으로 들어가자 마을 사람들이 각자 요우키를 보고는 인사를 건넸다. 요우모리는 시선을 끄는 주변의 많은 것들을 보고 멈칫거렸으나 요우키는 모조리 무시하고 한 곳으로 향했다. 바로 대장간이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주인이 밝게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네요, 콘파쿠 공! 옆의 분은?"

"아들일세."

"아들? 아아! 콘파쿠 요우모리, 맞죠?"

 

 요우모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별안간 대장장이는 잠깐 기다리라며 공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뒤에서 한참을 덜그럭 소리를 내며 나오지 않자, 부자는 약속한 듯 동시에 서로 돌아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한참이 지난 뒤에야 대장장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들어가기 전엔 없었던 커다란 검을 손에 들고 나왔다. 대장장이가 손잡이 끝을 잡고 칼을 뽑자 칼날이 반짝였다.

 

"만들어달라고 했던 거, 이거 맞죠? 칼날이 한 세 척 정도 하는 노다치 말입니다."

", 그렇소."

 

 요우키가 대금을 치르자 대장장이는 칼날을 다시 집어넣고 요우키에게 주었다.

 

"정원사께서 갑자기 노다치는 왜? 전쟁이라도 하실 생각인가요?"

"전쟁은 무슨. 가지치기와의 전쟁이라면 전쟁이다만."

 

 요우키는 그렇게 말하며 힘을 주어 칼을 뽑았다. 농담을 하던 방금까지의 모습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위협적이었다. 이리저리 둘러보고, 한 번 돌려보며 무기를 확인한 요우키는 칼을 다시 칼집에 넣었다.

 

"정말로 고맙네. 나중에 또 내려오면 들리지. 가자."

 

 두 사람이 나가자 뒤에서 대장장이의 활기찬 인사가 들려왔다. 바깥에 나오자마자 요우키는 요우모리에게 노다치를 건네며 말했다.

 

"이건 널 위해 만든 거다."

"?"

 

 요우키가 준 노다치를 받아든 요우모리는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옻칠 된 칼집 안에서 잠든 무시무시한 전쟁용 검이 자신의 손에 들려 있었다. 그리고 이 괴수는 아버지의 한 마디에 바로 자신의 것이 되었다.

 

너는 나보다 키도 크고 힘도 강하니 노다치를 써도 좋을 듯해서 이걸로 만들었다. 물론, 내가 쓰는 타치도 언젠가 물려줄 터이니 수련을 게을리 하지 말거라.”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요우모리는 칼집을 살짝 밀어 약간 뽑아보았다.

 

"칼잡이들은 때때로 칼에 이름을 붙이기도 하지. 나는 이제 나이 먹고 칼에 이름 붙이는 건 남우세스러워 못 하겠다만……. 네가 직접 붙여 보거라."

 

 이름을 붙이라는 말에 요우모리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노다치를 내려다보았다. 한참을 내려다보던 그는 끄응 소리를 내며 머리를 최대한으로 굴렸다. 그러더니 아하, 칼집을 가볍게 두드리고는 다시 요우키를 바라보았다.

 

"저희는 백옥루를 지키는 사람들이니까, 다락 누()에 볼 관()을 써서 누관검이라고 하겠습니다."

"좋은 이름이구나."

 

 요우키는 미소 지으며 아들의 등에 노다치를 묶어주고는 어깨를 한 번 툭 건드렸다.

 

"어디보자, 이젠 떨어진 찻잎과 찬거리도 사고, 계속 두고 먹을 간식거리도 사야겠군. 그보다 쌀부터 사야할 텐데……."

 

 요우키가 중얼거리며 마을을 돌아다니는 동안, 요우모리는 등에 찬 노다치를 계속 만져댔다. 분명 손에 느껴지는 딱딱한 칼집의 감촉, 그러나 얼떨떨한 건 여전했다. 정말 갑작스럽게 생긴 자신만의 검, 그것도 다름 아닌 노다치. 말은 안 했지만, 이 칼을 줬다는 것은 분명 인정 받았다는 뜻이리라. 그렇게 생각하니 요우모리는 자신도 모르게 으헤헤 웃고 말았다. 소리를 들은 요우키가 뒤를 돌아보았다.

 

"뭐가 그리 좋으냐?"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버지."

그럼 으헤헤 같은 웃음소리는 내지 말거라. 이상하니까.”

 

 그렇게 걷는 사이, 옆에서 갑자기 요우키를 부르는 큰 소리가 들려왔다. 둘이 옆을 보니 까만 날개가 달린 카라스 텐구 둘이 손바닥만 한 술잔을 들고 대작 중이었다. 요우키와 눈이 마주친 그들은 이리 오라며 손짓했다. 요우키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는 아들을 돌아보았다.

 

혼자 가도 괜찮겠느냐?”

설마 텐구랑 술 대결을 하시려고요?”

 

요우키는 슬쩍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요우모리는 아버지가 내려놓은 짐을 들며 불평을 내뱉었지만, 요우키는 들은 척도 않았다.

 

아가씨를 위한 요깃거리는 내가 사 가지고 갈 테니 너는 그냥 가거라.”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내 걱정은 하지 마라, 요우모리.”

 

요우키는 끄덕이며 텐구들을 향해 걸어갔다. 마치 일기토를 준비하는 장수처럼, 그의 걸음은 위압적이었다. 고작 술 마시는 것에 불과한데. 그가 자리에 앉아 자신의 울퉁불퉁한 손바닥을 완전히 가리는 텐구 전용 술잔을 쥐고 그들의 시끄러운 연회에 녹아들어가자, 요우모리는 한숨을 한 번 길게 내쉬며 백옥루를 향해 걸어갔다.

무거운 짐을 가득 진 채 한참을 걷던 요우모리는, 마을 구석에 작은 불빛만 나는 건물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갑자기, 무언가가 요우모리의 옆구리를 들이받듯 부딪쳤다. 깜짝 놀란 요우모리가 짐을 놓치며 바닥에 넘어짐과 동시에, 옆에서 가냘픈 소녀의 비명과 흙바닥에 물건이 떨어지는 둔탁한 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요우모리가 정신을 차리고 옆을 보자, 갈색 머리의 소녀가 바닥에 널브러진 카메라 필름 사이에 쓰러져있었다. 요우모리는 당황하여 벌떡 일어나 소녀를 일으켰다.

 

죄송합니다! 괜찮으신가요?”

 

소녀는 여전히 정신이 없는지 헝겊인형마냥 그대로 요우모리에게 끌려 올라왔다. 그녀가 정신을 차리자, 다짜고짜 요우모리의 팔을 뿌리치고 카메라 필름을 정신없이 주웠다. 요우모리 역시 자기 짐은 내버려두고 그녀를 따라 필름을 주웠다. 소녀에게 필름을 건네주자 그녀는 한 아름 사진기용 필름을 안은 채 요우모리에게 인사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앞을 보고 걸었어야 했는데…….”

아닙니다. 제가 신경을 안 써서…….”

 

순간 침묵이 이어졌다. 길고 긴 정적이었다.

 

눈을 감은 채 찻잔을 기울이며 유유코의 말에 귀 기울이던 유카리는 친구의 이야기가 잠시 끊기자 옆을 돌아보았다, 유유코는 머리에 손가락을 짚으며 고민에 잠긴 모습이었다. 기억에 혼선이 온 듯했다.

 

뭐야,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 거 맞아, 유유코?”

요우키가 그렇게 말했던 것 같은데…….”

 

유유코는 고개를 잠깐 흔들더니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 뒤로 이틀간 요우모리는 매일같이 마을로 나갔지. 요우키는 아들이 뭘 하고 있는지 봐야겠다면서 그 아이를 몰래 쫓아다녔고, 돌아와서는 내게 요우모리가 뭘 하는지 말했어. 하라는 수련은 안 하고 여자 꽁무니나 쫓아다닌다면서 하소연을 했지만, 동시에 평범한 삶을 사는 것 같다고, 내심 좋아하던 게 기억나. 너도 기억할걸?”

아아, 기억난다. 나한테도 계속 그렇게 말하던데.”

 

유카리는 아들의 모습을 성토하는 요우키의 표정을 상상하자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유유코 역시 웃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래. 하지만 행복은 얼마 가지 않았어…….”

 

유유코의 말에 두 사람 모두 웃음기를 잃어버렸다.

 

 

-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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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즈베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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