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단편 2017. 6. 17. 17:49

부활
The Reincarnation

0. 5년 전, 청색 들판

 피를 흘린 채 쓰러진 동료들, 알리스터, 에드원, 에이리크, 루시아, 그리고 그웬 그녀 자신. 청색 들판을 붉게 물들인 수많은 시체 사이로 쓰러져 고통스러워하는 그들 사이로, 신들이 선택한 대전사 앨런 데리올이 홀로 서 있었다. 가문을 상징하는 깃발을 묶은 창과 커다란 방패, 그리고 은빛으로 빛나는 갑옷으로 무장한 그는 눈앞에 있는 사악한 마왕과 싸우고 있었다. 앨런을 비롯한 동료들과 마족에 대항하는 수많은 종족의 연합군이 마왕에게 맞섰으나 그 누구도 마왕을 손 끝 하나 건드리지 못하고 쓰러졌다. 그 용감하다는 남쪽 인간 왕국의 기사들도, 그 강인하다는 북쪽 난쟁이 투사들도, 그 날래다는 서쪽 요정 전사들도, 그 무시무시하다는 동쪽 상아탑의 마법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오직 한 명, 앨런만이 여전히 마왕 앞에 서 있었다.
 마왕이 앨런을 뿌리치고 날아오르더니 커다란 용으로 변했다. 그는 입에서 불을 내뿜어 아직도 버티던 이들을 형체도 없이 불태웠다. 그 모습을 본 난쟁이와 요정 군주들은 전의를 잃고 전장에서 도망치고 있었고, 대마법사들은 마법 오염으로 일어나지도 못했다. 이대로라면 이길 수 없었다. 마족 전부를 죽인다고 해도 마왕을 죽이지 못하면 헛수고였다.
 앨런은 뒤를 돌아보았다. 점점 생명을 잃어가는 동료들, 그 사이로 그웬이 그를 슬픈 눈으로 보고 있었다. 앨런은 투구를 들어 올리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창에 묶여있던 깃발을 떼고는, 자기 뺨에 흐르는 피를 닦아내더니 그웬에게 덮어주었다. 커다란 깃발은 그웬의 온몸을 가려주었다.

“앨런…….”
 
 뒤돌아서는 앨런을 향해 그웬은 애처롭게 말했다.

“가지 마.”

 앨런은 뒤로 고개만 살짝 틀었다. 그러고는 특유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모두 괜찮을 거야, 그웬. 언제나 그랬잖아.”

 앨런은 다시 앞을 돌아보며, 칼을 지지대 삼아 힘겹게 일어서는 알리스터에게 말했다.

“그웬을 부탁합니다, 왕자님.”

 멍하니 그를 보는 둘을 뒤로하며 앨런은 앞으로 달려나갔다. 그러자 허공에서 날개 달린 말 한 마리가 나타나더니 앨런의 앞에 앉았다. 그는 말에 올라타고는 그대로 하늘을 향해 날아갔다.
 그 자리에 있던 그 누구도 그 뒤의 일을 잊지 못할 것이었다. 하나의 커다란 유성처럼 빛나는 앨런은 하늘을 날아다니며 그의 적을 짓밟는 검은 용을 향해 날아갔다. 둘이 격돌하는 그 순간 하늘은 마치 불지옥을 연상하게끔 붉게 물들더니, 이윽고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빛이 하늘을 수놓으며 온 세상을 크게 비췄다. 모두가 싸움을 멈추고 하늘만 바라보았다. 그 빛은 오랫동안 이어졌고, 빛이 사라지자 마왕과 앨런 역시 자취를 감추었다. 그 모습을 본 알리스터는, 자신도 어리둥절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빛이 사라지고 나서도 모두 멍하니 하늘만 보고 있는 모습을 보곤 힘겹게 칼을 쳐들며 외쳤다.

“마왕이 쓰러졌다!”

 알리스터의 외침에 연합군 병사들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들은 다시 한번 마족을 밀어붙였다. 모든 것을 마왕의 카리스마에 의존하던 마족들은 그가 사라지자마자 오합지졸로 변했고, 연합군은 붉게 물든 청색 들판을 이번에는 보랏빛으로 물들였다.
 병사들이 각자 종족을 대표하는 대전사들을 찾아왔다. 요정군은 루시아를, 난쟁이군은 에이리크를, 마법사들은 에드윈을 부축했다. 인간 기사들이 알리스터를 찾아왔을 때 그는 부축을 받는 대신 그웬 앞에 무릎을 꿇었다.

“우리가 이겼소, 다피리스! 데리올이 우리에게 승리를 선사했소!”
“앨런…….”
“슬픔은 데리올이 원하는 바가 아닐 것이외다. 자, 가세.”

 그웬은 알리스터의 말을 무시하며 깃발을 꽉 쥐었다. 알리스터는 고개를 저으며 기사들에게 그웬을 데려가라고 명령하고 자신은 남은 병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후퇴했다. 그가 하늘을 올려다보자 하늘은 어느새 새카만 먹구름으로 가득 차 조금씩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1. 지금, 청색 들판

 그웬은 눈가에 물기를 머금은 채 잠에서 깨어났다. 또다시 그 꿈이었다. 가슴 아픈 다섯 해 전 그날의 기억. ‘모두 다 괜찮을 거야.’ 앨런은 거짓말을 했다. 그녀에게 지금은 모든 것이 괜찮기는커녕 다섯 해 전 마족과의 전쟁 때보다 더 비참하고 슬픈 시절이었다.
 그녀는 이불처럼 쓰던 데리올 가문의 깃발을 걷으며 일어났다. 군데군데 난 구멍과 헌 부분을 꿰맨 결과 깃발은 다섯 해 전의 찬란한 그 모습을 잃은 지 오래였다. 그녀가 건드리지 않은 부분은 앨런의 피가 묻은 부분뿐이었다. 그녀는 슬픈 추억에 잠긴 채 느릿하게 깃발을 망토처럼 둘러맸다.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커다란 청동상이 있었다. 날개 달린 말을 탄 채 돌격하는 기사의 모습. 그녀는 청동상 받침 부분에 다가갔다.

 앨런 데리올. 빛의 대전사. 세상의 구원자.
 그의 희생에 우리는 이 땅에 남을 수 있었다.
 이제 신들 곁으로 돌아가 영원한 안식을 취하는 그에게 영원히 축복과 사랑이 있기를.

 그녀는 새겨진 글씨를 손으로 어루만졌다. 그녀의 보랏빛 눈은 또다시 물기로 젖어 어느새 눈물이 뺨을 타고 흐르고 있었다. 그때 그녀는 인기척을 느꼈다. 그녀는 손으로 눈물을 훑으며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돌린 곳에는 남부 왕국의 전령이 있었다. 그는 그웬이 정말 이곳에 있을 줄은 몰랐다며 중얼거리다 그웬의 서슬이 퍼런 시선을 느낀 뒤에야 머리를 조아리며 인사했다.

“그웬 다피리스 경. 전하께서 보내신 서신입니다.”

 알리스터의 편지. 그웬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떨떠름하게 편지를 받아들었다. 뒤로 살짝 두 걸음 걸으며 전령에게 등을 보이고 나서야 그녀는 편지를 열었다.

‘나의 전우, 그웬 다피리스에게.
 전쟁이 끝난 지 다섯 해가 지났건만 그대는 아직도 그 들판에서 벗어나지를 못하는구려. 나 역시 데리올의 그 마지막 모습이 여전히 눈에 선하다오. 사실 그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건 나 역시 마찬가지요. 전쟁의 상흔이 이 대륙에 여전히 남아있어서, 마족 잔당이 아직도 여기저기서 활개를 치고 다닌다오. 보이는 대로 또 들리는 대로 친정하여 쳐부숨에도 그 수가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소. 그래서 말인데, 오랜만에 그때 그 동료들과 같이 싸워볼까 하오. 청색 들판 근처에 놈들의 거점이 있소. 이미 다른 이들은 그곳으로 가고 있으니, 그대만 오면 된다오.
 아. 아직도 데리올의 말이 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소. 그대를 부탁한다는 그 말이. 아직도 그 들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그대를 생각할 때마다 그의 목소리가 나를 힐난하는 듯하오. 이제는 다피리스 자네를 위해서라도 내가 그의 마지막 말을 행할 수 있게…….’

 그웬은 편지를 끝까지 읽지 않고 그대로 불태워버렸다. 그녀는 차가운 시선으로 전령을 돌아보았다.

“어디로 가면 된다고?”

2. 지금, 위크힐 요새

 알리스터의 지휘 아래 연합군은 손쉽게 요새 정문을 돌파했다. 루시아의 요정군은 에드윈의 마법사들과 함께 선봉을 맡은 에이리크의 난쟁이군을 지원했다. 안으로 들어선 병사들은 다섯 해 전 마족들에게 죽은 가족과 지인들을 생각하며, 그들을 조금의 자비심도 보이지 않고 베어 넘겼다. 그건 그웬도 마찬가지였다.
 그웬은 마족의 기운을 따라 홀로 가장 높은 성탑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나타난 마족들은 그녀를 막지 못했다. 그녀가 성탑의 문을 열 때는 이미 주변이 마족의 보라색 피와 살점으로 가득했다. 그녀는 칼을 앞세우며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화려한 치장을 한 마족이 그녀를 보고는 놀라 뒷걸음질 치는 모습이 보였다. 그웬은 순식간에 그 마족의 목 끝에 칼날을 들이밀었다. 서슬이 퍼런 칼날과 그보다 더 무시무시한 그웬의 눈빛을 본 마족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트릴 것 같은 표정으로 그웬의 얼굴을 보았다.

“자, 잠깐, 잠깐! 너, 너는, 그웬 다피리스! 맞지? 빌어먹을 앨런 데리올의 연인!”

 그녀는 대답하는 대신 칼날을 더 들이밀었다.

“그만, 그만! 나, 나랑 거래하자, 거래! 난 강령술사야. 난 방법을 알아! 죽은 자를, 앨런 데리올을 부활시킬 방법을!”

 앨런. 부활. 두 단어가 그웬의 머리를 강하게 내려쳤고 그녀는 순간 얼어붙은 듯 움직이지 못했다. 자기 목에 들어온 칼날에서 힘이 조금씩 빠지는 것을 느낀 강령술사는 그제야 안심한 듯 한숨을 내뱉었다. 그러자 그웬이 정신을 차리고 다시 한번 칼에 힘을 주었다. 강령술사는 다시 얼굴을 공포로 구기며 아무 말이나 지껄였다.

“날 살려주면 방법을 알려줄게! 방법이 적힌 책이 있어! 책이!”

 그웬은 주변을 한 번 쭉 둘러보고는 말했다.

“그럼 넌 없어도 되는 거네.”
“아니, 잠깐! 부활은 강력하고 위험한 마법이야! 내가 없으면…….”

 그웬은 말을 다 듣지 않고 칼을 강령술사의 목에다 찔러 넣었다.

“넌 없어도 돼.”

 강령술사는 비참한 표정을 지으며 목에서 보라색 피를 뿜었다. 그의 보랏빛 눈동자는 그웬의 얼굴을 보며 점점 생기를 잃어갔다. 그가 쓰러지자 그웬은 깃발에 튄 피를 손으로 닦고는 칼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바로 주변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한참을 뒤진 끝에 수많은 잡동사니 사이에서 그웬은 어딘가 불길한 기운을 뿜는 책 한 권을 발견했다. 책은 마치 그녀를 기다렸다는 듯 그녀가 책장에 다가가자 알아서 바닥에 툭 떨어졌다. 검은색 인피로 된 책은 스스로 내는 불길한 기운을 못 이겨 덜덜 떨고 있었는데, 책을 펼치니 강력한 독기를 품은 잉크가 희미하게 빛을 내고 있었다. 그웬은 자기 손이 타들어 가는 느낌에 책을 덮었다. 그때 성탑에 에드윈이 나타났다.

“그웬! 여기 있었군요. 다행이에요. 어디 다치진 않았나요?”
“뭘 그렇게 걱정해?”

 그웬은 당황한 표정과 함께 책을 등 뒤로 숨겼다. 에드윈은 그러나 어딘가 불안정한 불길함을 본능적으로 느끼고는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사악한 기운이 느껴져서요. 날카롭고, 살기등등한. 그웬, 혹시 이상한 거 없었어요?”

 그웬은 눈짓으로 강령술사의 시체를 가리켰다. 그러자 에드윈은 지팡이를 들이밀더니 다짜고짜 불꽃을 쏘아 갈겨 시체를 불태워버렸다.

“‘죽은 마족도 좋은 마족이 아니다.’ 이렇게 가루로 만들어버려야 나중에 다시 살아나서 뒤통수를 치지 않죠. 근데, 그웬.”
“응?”
“뒤에 숨긴 게 뭐죠?”

 그웬은 순간 당해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어색하게나마 빙긋 웃으며 무마했다.

“내꺼. 너한테 안 줄 거야.”

 그녀의 말에 에드윈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웬을 바라보았다. 잠깐의 침묵 속에 긴장이 흘렀다. 하지만 이내 에드윈은 장난스럽게 물었다.

“거 참. 갑자기 난쟁이 영혼이 쓰이기라도 했나요? 난데없이 그런 탐욕을 부리고. 위험한 저주가 걸린 물건일지도 모르니 마법사들에게 맡기세요. 뭐, 그럴 것 같지는 않지만.”

 에드윈은 뒤로 간 그웬의 손을 한 번 쳐다보고는 고개를 까딱이며 다시 바깥으로 나갔다. 그러자 그웬은 다시 책을 펼쳐보았다. 책에는 마족의 문자로 수많은 사악한 주술들이 삽화와 함께 빼곡히 적혀있었다.
 책에 대해 좀 더 자세하게 알아보려면 에드윈에게 맡길 수도 있었지만,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그녀는 이 주술들이 어떤 목적을 가졌고 어떤 대가를 요구하며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이미 알고 있었다. 백 명의 에드윈이 달려들어도 그녀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이 책을 해석할 수는 없을 것이었다.
 그녀의 피에 흐르는 본능적인 감각이 이미 길을 가르쳐주고 있었다.

3. 오래 전, 다피리스 성

 살로메라는 마족이 있었다. 그녀는 뛰어난 기사들을 쓰러트리고 그들이 죽기 직전 가장 약한 순간에 타락시키는 것을 좋아했다. 그러기를 여러 번, 그녀는 이번엔 존이라는 이름의 기사에게 접근했다. 존은 용감했으나 어렸고 살로메보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나약했다. 살로메는 간단히 존을 쓰러트리고 그의 위에 올라탔다. 하지만 신들이 자비를 베풀어, 존이 죄를 범했을 때는 이미 그의 영혼이 육신을 떠난 뒤였다.
 살로메는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그녀의 배 속에 뭔가가 있었다. 그건 이전에 낳았던 마족의 아이보다 훨씬 느리게 자라고 있었다. 시간이 흘러 그녀는 아이를 낳았다. 반인반마의 여자아이. 모성애라는 감각이 단 하나도 없는 살로메는 아무런 고민 없이 자기가 낳은 아이를 내다 버렸고, 아이는 이름도 사랑도 받지 못한 채 노예로서 이리저리 팔리고 빼앗기며 힘든 삶을 살아갔다.
 ……라고 눈앞의 소녀는 말하고 있었다.
 앨런은 소녀를 내려다보았다. 절반의 혈통 덕분에 몸은 영락없는 인간의 그것이었으나 나머지 절반의 혈통 때문에 눈동자는 마족의 차가운 보라색이었다. 그녀의 몸에서 느껴지는 기운은 사악하기 그지없었고, 또 마족이 마법과 거짓으로 앨런을 속이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녀의 하얀 몸에 드리워진, 수많은 노예로서의 증거가 그녀의 말에 거짓이 없음을 증명했다.

“이제 전 어떡하나요? 제 주인님은 당신이 죽였잖아요.”

 소녀는 앨런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앨런이 머뭇거리자 기사들이 하나씩 자기 의견을 냈다.

“당장 죽여야 합니다. 악마 새끼잖습니까!”
“그렇습니다. 살려봐야 결국 방해만 될 겁니다.”

 앨런은 그러나 기사들의 말을 무시하고 무릎을 꿇어 소녀와 눈동자를 맞추었다. 그녀는 순수하게 눈을 반짝이며 앨런을 마주했다. 앨런은 잠깐 생각하다 물었다.

“네 주인님을 죽인 게 싫니?”

 소녀는 고개를 저었다.

“주인님은 항상 절 아프게만 했어요. 언제나 그랬어요.”

 그러고는 물었다.

“당신이 저의 새로운 주인님이 되어주시는 건가요?”

 고개를 저은 것은 이번엔 앨런이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천천히 칼을 뽑았다.

“난 노예는 필요 없어.”

 그 말에 소녀는 두려움 섞인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그럼 절 버리는 건가요?”
“아니야.”

 앨런은 불타는 칼을 높이 들었다. 그는 소녀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내겐 여동생이 있었어. 그웬이라는 이름이었지. 너는 어딘가 그 아이를 닮았어.”

 그러더니 앨런은 온 힘을 다해 칼을 휘둘렀다. 불타는 칼날은 소녀를 옭아매던 사슬을 단칼에 끊어버렸다. 소녀는 놀라 두려움 가득한 낯빛으로 앨런을 보았으나, 앨런은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일어나, 그웬. 넌 더 이상 노예가 아니야.”

4. 지금, 남부 왕국의 궁정

“국왕 전하께서 개선하신다!”
“승리왕 알리스터 만세!”

 왕궁으로 들어오는 동안 그의 신민들은 하나같이 그를 향해 ‘승리왕’이라는 말을 연호했다. 승리왕 알리스터 1세. 그 이름은 왕국이 지속하는 한, 역사가 지속하는 한 계속 남을 것이었다. 왕자의 신분으로 마족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전사이자 전쟁의 상흔을 치료하고 무너졌던 왕국의 전통과 체계를 다시 일으켜 세운 성군으로서.

“승리왕이라니, 멋진 칭호입니다, 전하.”

 먼저 궁정에 와 있던 그웬은 알리스터를 보며 조소하듯 말했다. 루시아와 에이리크, 에드윈은 반가운 친구를 본 것처럼 그웬에게 다가가 허물없이 말을 나누었으나, 알리스터는 홀로 머뭇거리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생채기 하나 없이 돌아와 줘서 고맙네, 다피리스.”

 하지만 그웬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알리스터는 왠지 창피하고 또 혼란스러웠다. 그는 붉어지는 얼굴을 감추며 급하게 방으로 들어갔다. 핑계는 무장해제였다. 방으로 들어온 그는 시종들을 모두 내쫓고 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가 ‘승리왕’이라는 칭호에 맞게 다른 모든 것에서 승리를 거머쥐었을지는 몰라도, 그가 진실로 원하던 단 하나는 쟁취하지 못했다. 그가 이겨야할 상대는 이미 전설 그 자체가 된 앨런 데리올이었다. 무슨 짓을 해도 이길 수 없는 상대였다. 그 때문에 쟁취할 수 없는 한 가지는, 너무나도 가까이 있어 더더욱 아른거렸다.

 앨런 앞에서 왕이라는 작위는 한없이 작고 무의미했다.
 그웬 앞에서 ‘승리왕’이라는 칭호는 반어법에 불과했다.
 지금 거울에 비치는 사람은 아무것도 얻지 못한 슬픈 패배자일 뿐이었다.

5. 5년 전, 만마전 심층부

“그러니까, 이 만마전의 심층부에 쳐들어가 마족의 경전을 빼앗아오면 분노한 마왕이 지상으로 나올 것이다, 그렇게 말했었지요?”

 루시아가 말했다.

“음, 에이리크는, 어, 생가, 흠. 생각했다. 바보 같았다고. 당황했다.”

 인간 말이 서툰 에이리크는 더듬거리며 루시아의 말을 보탰다. 그러고는 앞에 있는 모닥불을 불쏘시개로 쑤셨다. 불쏘시개는 마족 마법사 시체에서 빼앗은 지팡이였다.

“난 처음에 ‘이 인간 녀석이 오냐오냐하니까 기어이 정신이 나갔나보다’하고 생각했어요. 아, 불쌍한 앨런! 하면서요. 그런데 여기까지 같이 온 저도 정신이 나간 건 마찬가지인가 봐요. 이럴 줄 알았으면 혼약이라도 하고 올걸.”
“안타깝다, 너라면. 음, 많았을 것 같다. 인기.”
“당신한테 물은 적 없거든요, 꼬맹이 씨.”
“이해 안 간다. 음. 왜 성격 꼬였는지. 요, 크흠. 요정들이란.”

 루시아와 에이리크가 다시 티격태격하기 시작했다. 둘의 무의미한 싸움에 끼어드는 게 무의미한 일임을 경험으로 아는 나머지는 시끄러운 옆을 무시하고 오래 끓인 죽을 각자 떠먹으며 자기들끼리 말을 나눴다.
 그러기를 한참, 갑자기 앨런은 알리스터를 빤히 바라보았다. 알리스터는 가끔 어딘가를 보다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릴 때가 있었다. 앨런은 잠깐 생각하더니 무언가 떠오른 듯 즐거운 표정이 되어 가방에서 병 하나를 꺼냈다. 오래된 포도주였다. 갑작스러운 포도주의 등장에 알리스터의 눈이 반짝였다. 마족과의 전쟁 이후 마신 적이 없는 비싼 물건이었다. 앨런은 단검으로 코르크 마개를 찌르고는 뽑아서 향기를 맡았다. ‘멀쩡하네.’ 그렇게 중얼거리며 앨런은 술을 입에 댔다. 순간적으로 그의 미간이 찌푸려졌지만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다. 그는 말없이 꿀꺽 삼키더니 알리스터에게 병을 권했다.

“이 모든 게 끝나고 나면, 우리끼리 경쟁해야 할지도 모르겠네요.”
“경쟁? 갑자기 무슨 소리인가.”

 앨런은 어느새 자기 무릎을 베고 잠든 그웬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그 모습에 에드윈이 담뱃대에 불을 붙이며 끼어들었다.

“그림 좋네요. 주변이 시체의 산이 아니었으면 더 좋았겠는데.”

 그 말에 앨런은 웃으며 알리스터를 바라보았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왕자님.”

 알리스터는 앨런의 말을 듣고 얼굴이 굳어졌다. 그는 머뭇거리며 앨런이 권하는 술병을 받아들지 생각했다. 어느 쪽이든 불리한 사람은 알리스터였다. 하지만 그는 왕족답게 기품 있는 모양새로 앨런의 술을 낚아챘다.

“경의 도전을 받아들이겠소.”
“도전이라니. 그건 왕자님이 하는 쪽 아닌가?”

 알리스터는 에드윈을 한 번 흘겨보고는 단숨에 술을 들이켰다. 이윽고 그의 입은 분수가 되었다. 그는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외쳤다.

“완전 식초잖아!”

 그 모습에 앨런과 에드윈은 큰 소리로 웃었고 티격태격 하던 두 사람도 알리스터를 보고 마찬가지로 웃었다. 오직 그웬 하나만이 마법에 걸린 공주처럼 깊이 잠들어 알리스터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녀의 얼굴은 행복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6. 지금, 남부 왕국의 궁정

 궁정에는 화려한 연회가 열렸지만, 정작 주인공인 왕은 코빼기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술에 진탕 취해 연회를 즐기는 루시아, 에이리크, 에드윈을 뒤로하고 알리스터는 홀로 자기 침실의 난간에 서서 창밖을 바라보았다. 마치 다섯 해 전 청색 들판에서의 전투 전야처럼 달은 피처럼 붉었고 그 빛마저 아주 미약해 평소라면 밤에도 잘 보였을 산등성이에는 마을과 요새에서 피우는 불빛만 있을 뿐이었다.
 다섯 해 전 이날, 알리스터의 눈앞에는 아름답게 빛나는 앨런이 서 있었다. 전투 직전 그는 지금의 동상이 들어선 그 자리에서 병사들에게 용기를 불어넣는 연설을 했다. 그동안 바람에 날리던 그의 붉은 머리는 남자인 알리스터의 눈에도 아름다웠다. 전투가 벌어졌을 때도 그는 가장 앞에 서서 돌진했고, 마지막에는 마왕과 함께 사라짐으로써 세계의 구원자로서, 전설로써 남았다.
 알리스터는 그의 죽음에 슬퍼했다. 위대한 전사이자 유쾌하고 선량했던 친구를 잃은 것도 그렇지만, 그웬이 영원히 그를 그리워하면서 영혼에 입을, 영원히 치유되지 않을 상처에 슬퍼했다.
 그렇게 상념에 잠겨있는데, 밖에서 경비병이 문을 두드렸다.

“전하. 그웬 경께서 알현을 요청합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자기를 찾아올 리가 없는 사람이 자신을 만나길 원한다는 사실에 알리스터는 혼란스러워 대답도 못 하고 멍하니 문만 바라보았다. 왕이 대답하지 않자 경비병은 불안함에 목소리를 살짝 떨며 다시 물었다.

“전하. 그웬 다피리스 경께서 알현을 요청합니다. 들여보낼까요?”
“그, 그래. 들여보내라.”

 그러자 문이 열리고, 그웬이 들어왔다. 알리스터는 쿵쾅거리는 심장을 숨기려는 의도에서 붉은 달빛을 등지고 그웬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옛날과 전혀 다를 바 없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검은 머리, 일렁이는 보랏빛 눈동자, 마족의 혈통을 증명하는 매혹적인 몸, 허리띠에 달린 검과 단도까지도. 달라진 것이 하나 있다면 언제나 쓰고 다니는 데리올 가문의 깃발뿐이었다.
 알리스터가 아무 말이 없자 그웬은 그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그녀가 한 발자국 다가올 때마다 그의 심장이 점점 빠르게 뛰었다.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이 점점 달빛에 붉게 물들 때마다 알리스터는 뜻 모를 두려움을 느꼈다. 그녀의 생기 잃은 보랏빛 눈동자는 어느새 알리스터의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전하.”

 그녀는 고개를 살짝 들어 눈을 마주쳤다.

“염치 불고하고, 바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녀의 빛을 잃은 눈동자와 힘을 잃어버린 나약한 목소리에, 알리스터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할지 몰라 두려웠다. 하지만 그녀가 자신에게 무언가를 원한다는 것이 앨런과의 무의미한 경쟁에서 한 걸음 더 전진하는 것이라면, 알리스터는 어떤 짓거리도 할 생각이었다.

“그대가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하겠네, 다피리스. 그것이 그대와……데리올이 원하는 것이라면.”

 알리스터는 자기도 모르게 앨런을 언급했다.

“그래요, 앨런. 저는 지금껏 앨런을 그리워하며 살았죠. 그래서 이 깃발을 집처럼 여기고 살았어요. 하지만 그가 남긴 이 깃발을 끌어안고만 있는 건 그저 저를 슬프게 할 뿐. 저는 깨달았어요. 무언가 완전히 다른 방법이 필요하다는 걸요.”

 알리스터의 희망이 희미하게나마 밝아졌다. 그녀는 앨런이 그랬던 것처럼, 밝게 미소를 지었다.

“그이를, 앨런을 되살릴 방법을 찾았답니다.”

 희미하게 빛나던 알리스터의 희망은 앨런의 이름이 언급되는 순간 처참하게 산산조각이 났다. 마구 뛰던 알리스터의 심장은 어느새 배신감과 분노로 점점 차가워지고 있었다.

“사람을 되살리는 건……. 불가능하오. 지금껏 수많은 강령술사들이 부활을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그 결과는 전부 처참했소이다. 다섯 해 전에도 우리와 함께하던 수녀가 그런 짓을 했다가 엄청난 사건이 벌어졌음을 자네도 잘 알 터인데……. 어찌하여 자네마저 그런 멍청한 술법에 손을 대려는 게요?”

 알리스터는 분노로 가늘어지는 이성의 끈을 간신히 붙잡으며 차갑게 대답했다. 그러자 그웬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왜 그러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전하. 전하께서는 그저 전하께서 그토록 원하시던 그것을 이루면 되는 거예요.”
“짐이 원하던 그것이라니?”
“전하께서 원하시던 그것, 바로 저요.”

 그웬은 천천히 옷을 벗기 시작했다.

“항상 그 사람의 등 뒤에서 열등감에 시달리며, 항상 손에서 저를 놓지 않던 그이를 원망하지 않으셨나요?”

 데리올 가문의 깃발이 바닥에 떨어졌다.

“왕국을 다시 일으킬 후계자라는 위상, 가장 위대한 성군이 되리라는 주변의 기대 때문에, 반인반마인 제게 말조차 걸지 못했다는 사실을 증오하지 않으셨나요?”

 허리띠와 옷가지가 바닥에 떨어졌다.

“그토록 제 사랑을 갈구하셨으면서도 정작 아무 말도 못 하고 속으로만 저를 탐하기만 하던, 용기 없는 자기 자신을 혐오하지 않으셨나요?”

 그녀의 속옷이 바닥에 떨어졌다. 붉은 달빛 아래서 완전히 나신이 된 그웬은 팔을 벌렸다.

“자, 그렇게 원하시던 제가 전하의 앞에 있답니다.”

 그러자 알리스터는 갑자기 그웬의 목을 조르며 바닥에 쓰러트렸다. 그의 얼굴은 분노와 슬픔의 양가감정으로 감히 헤아릴 수 없었다.

“너는 끝까지 짐을 고통에 빠트리는구나, 그웬 다피리스! 너는 짐이 그토록 너를 사랑했음에도 끝까지 짐을 무시하였도다! 너는 이미 죽은 앨런 데리올만을 바라보며, 짐이 뒤에서 항상 너를 바라보고 그리워했음을 알지도 못하고, 알려 하지도 않았다! 그러더니, 그렇게 나를 절망에 빠트려놓더니, 이젠, 이제 와서는 죽은 사람을 되살리려고 짐의 사랑을 그런 식으로 이용하다니! 짐은 고작 망자보다도 못하다는 것이냐? 짐은 그 깃발만도 못하다는 것이냐? 너는 참으로, 참으로 악마로구나!”

 알리스터는 그웬을 죽일 듯이 목을 졸랐으나, 그의 얼굴은 점점 슬픔으로 일그러져갔다. 그웬은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태연했다. 그녀는 알리스터의 얼굴을 손으로 어루만지더니 그의 뒤통수에 깍지를 끼고는 자기 얼굴로 끌어왔다. 둘은 길게 입을 맞추었다. 알리스터의 손에 힘이 풀렸다.
 그날 밤 승리왕은 그가 유일하게 정복하지 못한 땅을 정복했다. 하지만 그것은 승리가 아니었다. 그는 패배했다. 그가 이기지 못했던 상대, 그리고 그가 그토록 원했던 상대 모두에게.

7. 10개월 후, 위크힐 요새

 에드윈은 요새 성문 앞에 서 있었다. 열 달 전 연회 이후 그웬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녀가 항상 있었던 청색 들판 위 앨런의 동상 아래에도 그녀는 없었다. 지난 다섯 해 동안 없었던 일이었다. 알리스터의 요청에 에드윈은 상아탑을 떠나 그녀를 찾아다녔고, 그녀의 마지막 흔적은 바로 이 위크힐 요새에 있었다.
 그는 마법사 특유의 고깔모자에 달린 차양을 손으로 올리며 요새를 올려다보았다. 전설 속 흡혈귀왕의 요새가 실존했다면 바로 이런 모습이었을 터. 열 달 전 왕국이 토벌한 이후 아무런 전략적 가치가 없어서 버려진 곳이었다. 이런 버려진 곳에는 굳이 마족 잔당이 아니더라도 으레 여러 괴물이나 도적 떼가 꼬이기 마련이었으나, 그 어떤 저항도 흔적도 없었다. 에드윈은 오히려 잘 됐다고 생각하며 문으로 다가갔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성문은 열려있었다.
 그는 지팡이를 바닥에 쿵쿵 찍으며 나아갔다. 그러나 그 행동에 답하는 이는 그 누구도 없었다. 시체는 열 달 전의 그것이었고 잡동사니는 먼지와 거미줄에 자리를 내주었다. 이런 침묵과 고독이야말로 에드윈이 두려워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두려운 것은 그웬의 흔적이 요새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열 달 전 그녀가 궁정을 떠날 때, 그녀의 눈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어두웠다. 평소에도 빛이 없던 그녀였으나 그날따라 더더욱 그랬다. 하지만 에드윈은 그녀에게서 그 어떠한 마법 효과도 느끼지 못했다. 두려운 일이었다. 그녀가 무슨 일을 벌인다면 그것은 마족이 부린 마법에 홀려서가 아니라, 그녀 자신의 의지로 일으켰다는 것이니까.
 그는 희미하게 느껴지는 마법의 흔적을 미궁 속 실타래로 삼아 감아올렸다. 그 실타래 끝에는 열 달 전 그웬이 있었던 그 성탑이 있었다. 그는 잠깐 망설였으나 크게 심호흡한 다음 성탑의 문을 열었다.
 그는 차라리 눈앞에 있는 게 역겨운 이교도 마녀의 집회나 끔찍한 시산혈해이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은 성탑 한가운데에 복잡하고 거대한 마법진을 그리는 익숙한 모습의 여인이었다.

“그웬?”

 에드윈의 말에 여인은 고개를 돌렸다. 그의 예상이 맞았다. 하지만 그녀의 모습은 예상 밖이었다. 그녀의 배는 매우 커다랬다. 분명 임신 중이었다. 궁정에 돌던 소문, 알리스터와 그웬이 동침했다는 소문은 사실이었다.

“안녕, 에드윈.”

 그웬의 목소리에는 생기가 없었다.

“무슨 짓을 벌이는 거죠, 그웬?”
“그이를 되살리려고.”
“그이?”

 에드윈은 그녀의 말에 혼란스러웠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웬은 계속 마법진을 그렸다.

“마침 잘 됐다. 너는 나보다 이런 거 더 잘 알잖아. 그리는 것 좀 도와줄래? 생각보다 어렵네.”

 그녀가 무슨 짓거리를 벌이려는지 에드윈은 어느 정도 예상했으나 믿고 싶지 않았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대체, 대체 뭘 하는 건데요.”
“말했잖아. 그이를 되살릴 거라고. 부활 의식의 마법진이야.”
“부활…….”

 차라리 묻지 말았어야 했다고 에드윈은 생각했다. 지금껏 부활을 시도한 강령술사들의 결말을 에드윈은 누누이 들었으며, 그가 연모하던 수녀가 부활에 손을 댔다가 산채로 심연에 끌려들어 간 것을, 그리고 그 자리에서 무시무시한 악마가 튀어나온 것을 본 적도 있었다. 그렇기에 에드윈은 세차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당장 그만두세요, 그웬. 이런 미친 짓을 했다가는…….”
“부탁이야. 도와줘.”
“안 돼요. 절대 안 돼요! 부활 같은 미친 짓을 제가 도우라고요? 그것도 당신이 하는 걸? 아뇨. 절대 그렇게는 못 해요.”

 그러면서 에드윈은 지팡이를 높게 들었다. 그러자 그웬의 표정이 짜증으로 일그러졌다.

“그럼 방해하지 마.”

 그웬이 손을 뻗자 붉은 촉수 여럿이 튀어나와 순식간에 에드윈을 옭아맸다. 마족의 마법이었다. 그는 온몸이 묶인 채 발버둥 치다 주문해제를 재빠르게 외쳐 벗어났다. 바닥에 떨어진 그는 정신없이 바닥을 더듬거리며 지팡이를 쥐고는 촉수가 다시 그를 옭아매기 전에 먼저 순간이동으로 사라졌다.
 방해꾼이 사라지자 그웬은 다시 바닥에 마법진을 그렸다. 마법서의 삽화대로 마법진이 완성되자 붉게 빛이 나기 시작했다. ‘다 됐다.’ 그웬은 희미하게 웃었다. 그때 갑작스러운 진통에 그녀는 마법진 중앙에 주저앉았다.
 의식은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8. 열 달 후, 왕국 궁정

 에드윈은 벌벌 떠는 손으로 담배에 불을 붙였다. 알리스터는 그가 전한 충격적인 소식에 허공만 멍하니 바라보았다. 국왕이 그러고 있자 떨면서 담배를 피우던 에드윈이 말했다.

“시간이 없어요, 알리스터. 빨리 막아야 합니다.”
“……어떻게?”

 알리스터는 의지가 없었다. 그 모습을 보는 에드윈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제 그웬은 그냥 마족이에요. 그렇게 생각하세요. 지금 당장 위크힐 요새로 가서 그웬을 막아야 해요. 악마가 또 튀어나오는 꼴을 두고 볼 수는 없어요.”

 그 말을 들은 끝에 알리스터는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전령을 불렀다.

“지금 당장 루시아와 에이리크에게 위크힐 요새로 병력을 이끌고 오라고 전하게. 상아탑의 마법사들에게도! 당장 차출할 수 있는 병력을 모두 동원해서 위크힐 요새를 포위하라고 전하라.”
“예, 전하. 포위하면 바로 공격하라고 할까요?”

 알리스터는 고개를 저었다.

“……명령이 있기 전까지는, 공격하지 말라고 하라.”

9. 열 달 후, 위크힐 요새

 알리스터는 기도했다. 아무도 없는 위크힐 요새를 나아가며, 에드윈이 건넨 실타래를 따라가며, 제발 그가 틀렸기를 기도했다.
 점점 그웬이 있는 성탑으로 다가갈 때마다 마법 재능이라고는 없던 알리스터조차 무시무시한 마력을 느낄 수 있었다. 거대한 마법의 힘이 왕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발걸음 하나하나가 힘겨워졌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성탑에 도착했을 때 그는 손을 뻗는 것조차 어려웠다. 성문 안에서는 그웬의 힘에 부친 신음과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힘겹게 문을 열었다. 그곳엔 그웬이 있었다.

“드디어 오셨군요, 전하.”

 그웬은 알리스터를 올려다보았다. 알리스터는 그녀의 얼굴에서 아래쪽으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녀의 피투성이 다리 사이로 이어진 탯줄, 그 끝에서 갓난아기가 울고 있었다. 그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웬의 손에는 단도가 들려있었다. 그녀는 옆에 놓인 깃발을 집어 들더니 다섯 해 전 앨런이 묻힌 핏자국을 단도 끝으로 긁었다. 그녀가 중얼거리자 핏자국은 그대로 액체가 되어 단도를 새빨갛게 물들였다.

“이제 보세요. 앨런이 다시 태어날 거예요.”
“그만하게, 다피리스!”
“여기까지 왔는데 그만둘 수는 없어요.”
 
 그웬은 단도를 양손에 쥐었다. 자기 운명이 어찌 될지 모르고 우는 아이 위에 단도가 자리 잡았다. 그웬은 주문을 읊기 시작했다. 알리스터는 이를 막기는커녕 마법진에서 뿜어져 나오는 엄청난 힘에 눈을 뜨기도 어려웠다. 그렇다고 그저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알리스터는 대신 칼을 뽑았다. 칼날이 뽑히며 소름 끼치는 소리를 냈다. 그는 칼을 크게 뒤로 뻗었다.

“그만두게, 제발, 제발…….”

 그웬은 무시했다. 그녀가 멈출 생각이 없음을 깨달은 알리스터는 눈물을 주르륵 흘리며, 속삭이듯 말했다.

“사랑하오, 그웬.”

 알리스터는 비통에 찬 기합을 내지르며 그웬을 향해 힘껏 칼을 던졌고, 동시에 그웬은 단도를 아기에게 찔러 넣었다. 엄청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알리스터는 팔로 눈을 가렸다.
 성탑에서 나온 빛은 마치 앨런이 죽었을 때처럼 온 세상을 가득 메웠다. 요새를 포위한 루시아와 에이리크, 에드윈 모두 그 빛을 멍하니 보고만 있었다.

10.

 알리스터는 팔을 뗐다. 앞에는 열네 살 남짓한 소년이 가슴에 칼을 맞고 쓰러진 그웬의 얼굴을 한쪽 무릎을 꿇은 채로 어루만지고 있었다. 그웬은 빙그레 웃으며 소년의 뺨을 어루만졌다.

“돌아왔구나, 앨런…….”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웬이 계속 말을 이었다.

“넌 나를 그 끔찍한 구렁텅이에서 구해줬어. 넌 나의 구원자였어. 나도 널 구원하고 싶었어.”

 그웬은 힘겹게 미소 지었다.

“하지만 이젠 반대가 됐네…….”
“모두 다 괜찮을 거야, 그웬. 언제나 그랬잖아.”

 앨런은 그웬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웬의 보랏빛 눈동자는 그렇게 영원히 생기를 잃어버렸다. 앨런은 그녀의 눈을 쓸어내리더니 슬픔을 못 이기고 눈물을 흘렸다. 한참 후에야 앨런은 일어서서 그녀의 몸에 박힌 칼을 뽑아내었다.
 앨런이 고개를 돌리자, 그 모습을 본 알리스터는 그대로 주저앉아버렸다. 하늘거리는 붉은 머리칼, 눈처럼 새하얀 피부, 남자가 보아도 아름다운 그 얼굴. 모두 그의 것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앳된 소년의 모습, 그리고 그웬과 자신의 눈동자 색이 하나씩 들어간 그의 눈뿐이었다. 앨런은 알리스터의 칼을 주인에게 들이밀며 다가왔다.

“전 왕자님께 그웬을 부탁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헌데 왕자님께선 그 약속을 무시한 모양입니다.”

 알리스터는 말이 없었다.

“그토록 그웬의 사랑을 갈구하셨으면서, 결국 그녀를 죽이셨군요. 저는 왕자님을 믿었는데요.”

 앨런의 비난에 알리스터는 눈물을 흘리며 말을 토해냈다.

“처음부터, 처음부터 난 자네의 부탁을 들어줄 수 없었소. 자네의 유언을 이룰 수 있는 일말의 가능성조차 없었소. 자네가 내게 그웬을 부탁한다고 한 그 순간부터, 이 일은 예견되어 있던 거요. 난 그대의 말을 지키고 싶었으나, 결국 그녀를 슬픔에서 구해줄 수 없었소. 그녀를 행복하게 해주기는커녕 그녀 가슴에 그 칼을 찔러 넣었구려. 난 용서받지 못할 것이외다. 하늘의 신들에게도, 심연의 여신에게도, 그녀에게도, 자네에게도, 그리고 나 자신조차도. 이제 난 누구에게도 받지 못할 구원을 기다리는 그런 사람이 되어버렸구려.”

 앨런은 다시 뒤돌아 그웬을 끌어안았다. 그는 알리스터를 노려보며 말했다.

“알리스터.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될 겁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앨런과 그웬의 몸이 빛나기 시작했다. 그때 문이 벌컥 열리고 에드윈, 루시아, 에이리크, 그리고 병사들이 성탑 안으로 들어왔다. 그 순간 두 사람을 감싼 빛이 폭발하더니 두 사람은 사라졌다. 빛이 사라지자 에드윈이 놀란 얼굴로 중얼거렸다.

“……앨런?”

11.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청색 들판

“그웬.”
“네, 아바마마.”

 그웬돌린은 알리스터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알리스터는 손가락으로 반대쪽 끝 마족군의 선봉장을 가리켰다.

“저기 저 은색 갑옷의 기사가 보이느냐? 새로운 마왕 말이다.”
“네, 보입니다.”

 그녀는 자기 눈을 의심했다. 은빛으로 빛나는 모습은 마왕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사람을 홀리고 매혹하는 악마적인 매력이 아니라 기품 넘치고 신성하기까지 한 그런 아름다움이었다.

“정말 마족이 맞는 건가요, 아바마마?”

 알리스터는 그 말에 똑바로 대답하지 않고, 대신 다른 말을 했다.

“그토록 아름답고 기품 있던 세계의 구원자가, 이번엔 세상에 파멸을 부르려 하는구나.”

 그웬돌린은 아버지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의 얼굴이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수심 가득해, 감히 물어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러던 중에 알리스터가 물었다.

“그웬, 내 딸아. 혹 사랑하는 사람이 있느냐?”

 그러자 그웬돌린은 얼굴을 붉혔다. 그녀가 대답하지 못하자 알리스터는 괜찮다는 듯 옅게 웃었다.

“혹여 네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이가 있다면, 이 전투가 끝나고 나서 네 위치, 평판 같은 것은 신경 쓰지 말고 쟁취해라. 나는 그러지 못해서 평생을 고통 속에 살았구나. 자, 그럼. 싸우러 가자꾸나. 세상을 위해서.”

 알리스터는 투구를 쓰고는 칼을 뽑아 들었다.

“전사들이여! 전진하라!”

 왕과 공주의 뒤를 따라, 수많은 인간 기사들이 들판을 가르며 나아갔다. 언덕 위 상아탑의 마법사들은 불덩이를 던졌고 난쟁이와 요정은 적들을 포위하듯 전진했다. 그러자 마왕도 칼을 높이 들었다. 이전에 그가 왕에게서 가져간 왕가의 검이었다. 그가 외치자 마족들 역시 함성을 길게 내지르며 돌진했다.

 다시 한번, 최후의 전투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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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즈베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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