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 추적자: 마라칸트의 악마
The Devil Seeker: Devil in Marakand


 마라칸트. 파르샨 북쪽 끝 유일한 통행로인 샛별 관문을 지키는 유서 깊은 도시. 그런 마라칸트에서도 쉽게 볼 수 없는 광경이 저잣거리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도로 위를 남쪽 사막에서 온 기수가 말을 탄 채로 뒤에 마족을 쇠사슬에 묶고 질질 끌고 다니는, 그런 광경이었다.
 그 기수, 태양빛으로 세례를 받은 것만 같은 구릿빛 피부, 짙게 난 수염, 그리고 한 줌의 분노와 한 줌의 증오로 가득 찬 두 눈동자, 악명 높은 악마 추적자 ‘말릭 알 아샤라프’는 엉망이 된 고위 마족을 끌고 태수 관저로 향했다. 주변에는 마라칸트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그와 그가 잡아온 마족을 보려고 구름처럼 몰려들었는데, 남녀노소귀천을 가리지 않고 모두 놀란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마족이 관문 바깥에 설친다는 말을 듣기는 했어도 살아있는 마족을 직접 본 적은 없었으니 말이다. 그러는 동안 말릭은 어느새 태수 관저 앞 출입구에 도달했다. 하얀 아치형 입구와 그 뒤에 자리 잡은 커다란 저택은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훌륭한 요새이자 동시에 아름다운 기념비였다.
 관저 앞에는 태수와 가족, 병사, 관료, 토착 귀족들을 비롯한 여러 권세가들이 모두 마족을 보러 와 있었다. 말릭은 가볍게 안장에서 내려왔다. 그러고는 안장에 묶었던 쇠사슬을 풀고 이를 손에 든 채 마족의 뒤로 향했다. 그는 발로 마족의 등을 짓밟아 바닥에 처박고는 머리카락을 잡아당겨 머리를 들어올렸다. 마족의 얼굴은 멍과 상처로 가득했고 사람들은 저잣거리의 그들처럼 똑같이 놀라고 또 신기해했다. 예외가 있다면 육중한 갑옷차림의 병사들뿐. 태수가 마족의 얼굴을 잘 살펴보고는 말릭을 올려다보았다.

“다른 악마는 못 봤는가?”

 말릭은 고개를 저었다.

“악마는 없었다. 이런 마족놈들이 전부였어.”

 태수는 한숨을 깊게 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리가 찾는 악마는 아니구려. 하지만 우리가 특정한 악마를 지칭해서 잡아달라고 한 적은 없으니…….”

 그러더니 태수는 뒤돌아 일어서며 말했다.

“오늘은 기쁜 날이오. 남쪽에서 온 전사가 우리를 대신해 마족을 척살하고 그 수장 중 하나를 잡아왔으니. 이 전사를 위해 연회장을 열고 잔치를 벌이세. 온 마라칸트의 백성들도 승리의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

 밤이 되었다. 말릭을 위한 잔치는 어느새 귀족들의 잔치로 변해있었다. 많은 귀족들이 홀로 마족을 잡아온 ‘영웅’에게 다가와 인사를 건네며 말을 걸었으나, 이윽고 이 사막 유목민의 생기라고는 없을뿐더러 마법오염의 흔적이 남은 두 눈동자를 보고는 돌아가 버렸고, 때문에 본래의 주인공은 잊히고 말았다. 하지만 말릭에겐 오히려 지금이 더 나았다.
 그는 홀로 난로 앞에 앉아 타오르는 불을 바라보고 있었다. 뜨겁게 타오르는 불을 당최 남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무표정으로, 하인들이 술과 음식을 담은 바구니를 한 아름 안고 와서 말릭 옆에 두고 가는 것도 모를 정도로 말이다. 말릭 그 자신의 버릇이었으나 이를 알 리가 없는 사람들은 그에 대해 부정적으로 주절거렸다.
 그때 그에게 젊은 하녀 하나가 다가왔다. 하녀는 말릭을 여기저기 살펴보더니 뒤를 돌아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시종들을 대동한 지체 높은 집안의 여성 하나가 악명 높은 악마 살해자에게 다가왔다. 말릭은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악마와 마족을 잡아다 죽이는 일 외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는 추적자조차도 고개를 두어 번 정도는 힐끗 돌아볼 수밖에 없는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또렷한 이목구비와 어쩌다 한 번 보았던 버찌와 비슷한 색깔의 붉은 뺨, 그리고 그 모든 아름다움을 가리는 깊은 어둠이 인상적이었다. 여인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

“당신이 그 유명한 악마 추적자이신가요?”

 말릭은 다시 난로로 시선을 향했다.

“나는 파르샨 말을 모른다.”

 유창한 파르샨 말이었다. 그러자 여인이 다시 되물었다.

“제 아버님하고는 잘만 얘기하셨잖아요.”

 말릭은 대답하지 않았다. 여인은 한숨을 쉬더니 옆에 있던 말릭과 같은 민족의 소녀를 돌아보았다. 소녀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맑은 목소리로 여인이 했던 말을 반복했다.

“아가씨께서 말씀하시길, 선생께서 그 유명한 악마 추적자이시냐고 여쭈십니다.”

 말릭은 오랫동안 쓰지도 듣지도 않은 고향의 말을 하는 유목민 소녀를 돌아보았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치자 소녀는 움찔하며 자기가 모시는 아가씨의 등 뒤로 숨었다. 말릭은 다시 고개를 홱 돌리며 차갑게 대답했다.

“고향의 말도 잊어버렸다.”

 유창한 고향의 말이었다. 소녀가 말릭의 말을 전하자 여인은 다시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들어 말릭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선생께서 관심이 있으실만한 정보를 제가 갖고 있답니다. ‘이블리스’에 관한 거여요.”

 이블리스. 그 단어가 나오자마자 말릭은 고개를 돌렸다. 눈동자에는 지금까지의 공허함은 사라지고, 타오르는 증오와 복수심으로 번개처럼 번쩍였다. 말릭이 물었다.

“이블리스를 알고 있다?”

 여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어디로 향했는지 알고 있답니다.”

 말릭은 몸을 돌려 여인을 마주했다. 지금껏 그가 이렇게 나온 적은 없었다. 이블리스에 대한 것을 제외하면. 그러자 여인은 손을 내저어 하녀들을 물러가게 했다. 단 둘이 남게 되자 여인이 말했다.

“저는 ‘나스린 가빈’이라고 해요. 태수이신 아버님은 아실 테고, 제 오라버니는 이 도시의 장군인 ‘바흐람 가빈’이고요.”

 마라칸트 태수의 딸이라면 공주나 다름없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금껏 그렇듯 말릭은 그런 것에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그가 신경 쓰는 것은 눈앞의 여인이 알고 있다는 이블리스에 관한 것뿐이었다.

“네가 누군지는 중요하지 않아.”
“네, 알아요. 제가 생각했던 그대로 대답하시네요. 추적자 선생께서 어떤 사람인지는 저도 많이 들었답니다. 의뢰인으로서 의뢰를 맡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는 알아야 하니까요.”

 나스린에게는 분위기를 바꾸려는 시도였겠지만, 말릭은 그 어떤 긍정적인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언짢은 표정으로 변해갔다. 나스린은 헛기침을 하며 분위기를 한 번 환기시키고는 다시 말릭을 보았다.

“제겐 약혼자가 있어요. 아니, 있었다가 맞겠죠. 지금은 실종됐으니까. 루스탐 바베디. 그이의 이름이에요.”
“……바베디?”
“네. 바베디. 마라칸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던 그 가문이었죠. 지금은……. 다른 이유로 알고 있겠지만.”

 나스린의 말뜻은 말릭도 알고 있었다. 한 해 전 가문 회의를 목적으로 모인 마라칸트의 토착 귀족인 바베디 가문 사람들이 한순간에 몰살당하고 대저택은 모조리 불타 사라졌다는 ‘바베디 가문의 참극’을 말하는 것이리라.

“그럼 죽었겠군.”

 나스린은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큰 확신이 드러나 있었다.

“아뇨. 루스탐의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어요. 거기 있던 모든 시체를 제가 다 찾아봤어요. 분명 루스탐은 없었어요.”

 말릭은 나스린의 눈을 뚫어지도록 쳐다보았다. 그녀의 심연처럼 어두운 눈이 반짝였다. 말릭은 그 눈빛에서 거짓말을 간파하지 못했다. 오히려 커다란 확신과 간절함을 느낄 수 있었다.

“제 약혼자를, 루스탐 바베디를 찾아주세요. 최소한, 시체만이라도…….”

 나스린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더니 울먹이는 소리가 대신 들려왔다. 그녀가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훔치자 말릭은 다시 난로를 향해 몸을 돌렸다. 여자의 눈물은 말릭에게도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었다. 그는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생각해보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그때였다. 뒤에서 웬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말릭과 나스린 두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을 때, 그 목소리가 누구인지 둘 다 금세 알아챌 수 있었다. 낮에 태수 옆에 서 있던, 얼굴에 상처가 난 청년이었다.

“아, 오라버니.”

 오라버니라는 말에 말릭은 나스린을 한 번 흘겨보았다. 과연. 이렇게 보니 코가 약간 닮기도 했다. 나스린이 말한 ‘바흐람 가빈’이 분명했다.

“나스린. 여기 있었구나.”

 바흐람은 그 짙은 수염과 남성미 넘치는 얼굴과는 어울리지 않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여동생에게 말했다. 나스린이 눈가를 훔치자 바흐람은 한쪽 무릎을 꿇으며 앉은 여동생과 눈높이를 맞췄다.

“무언가 슬픈 일이 있었느냐?”
“아니여요, 오라버니. 그냥, 옛날 생각을 해서.”

 바흐람은 옛날 생각이라는 말에 자신도 조금 슬퍼진 모양이었다. 그는 억지로 웃으며 나스린의 어깨에 손을 툭 얹었다.

“밤이 늦었으니 이만 들어가거라. 어머님께서 항상 네 걱정을 하신단다.”
“네, 오라버니.”

 나스린이 힘겹게 몸을 일으키자 바흐람의 수행원들이 그녀를 부축하며 방으로 데려갔다. 바흐람은 그녀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계속 바라보고 나서야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바흐람은 말릭을 힐끗 쳐다보고는 방금까지 나스린이 앉아있던 자리에 앉았다.

“혹시 내 누이가 자네에게 무슨 의뢰를 했는가?”

 말릭은 바흐람을 위아래로 한 번 훑어보았다. 바흐람의 얼굴은 자신과 몇 가지 비슷한 부분이 있었다. 턱 선을 따라 짙게 난 수염과 검은색과 갈색의 경계에 선 눈동자 색, 거무스름한 피부와 얼굴에 난 상처까지. 물론 상처의 위치는 달랐다. 바흐람은 오른쪽 뺨과 콧잔등에 크게 흉터가 나 있었다. 수염은 이를 가리기 위함인 모양이었으나 짙고 짙은 수염조차 흉터를 가리지 못할 정도로 커다란 상처였음을 말릭은 짐작할 수 있었다. 말릭은 그렇게 바흐람을 찬찬히 뜯어보고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묻잖나. 내 누이가 자네에게 의뢰를 맡겼느냐고.”

 난로 앞에는 미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바흐람은 대답을 재촉하듯 손가락을 자기 허벅지에 대고 두드렸다. 말릭은 귀찮다는 듯이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

“루스탐 바베디라는 사람을 찾아달라고 했소.”

 바흐람의 표정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그는 무어라 말을 하려다 다시 입을 닫았다. 그는 한숨을 쉬며 머리를 손으로 쓸어 올렸다. 그렇게 한참 침묵이 이어졌다. 그 침묵을 먼저 깬 사람은 당연히 바흐람이었다.

“그 의뢰를 멈추시오. 누이에게 찾을 수가 없었다고, 그렇게 말해주시오.”
“어째서?”

 말릭은 건조하게 대답했다.

“누이를 위해서요. 부탁이니,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들어주겠소. 돈, 여자, 하여튼 내가 할 수 있는 건 전부 주겠소.”

 말릭은 몸을 돌려 바흐람을 향했다. 그는 무표정하게, 그러나 위압감 넘치는 그의 상처투성이 얼굴을 바흐람에게 들이밀며 작게 중얼거렸다.

“내가 그따위 것들을 바라는 것 같아?”

 그러고는 다시 똑바로 앉았다.

“안타깝지만 네 누이가 내게 약속한 보상이 훨씬 더 끌리는데. 당신의 의뢰는 받아들일 수 없어.”
“……그렇담 당신을 막을 수밖에.”

 바흐람이 몸을 일으켰다. 그는 몸을 툭툭 털고는 말릭을 노려보며 경고하듯 말했다.

“작년에 그 일이 있은 직후 내 누이는 슬픔으로 나날을 보냈소. 슬픔의 신이 나스린의 생기마저 가져가버렸지. 지금 그 아이는 유리와도 같소. 언제 깨질지 모른다고. 당신 같은 이방인이 누이를 깨트리도록 두지 않겠소. 기어이 사랑하는 나의 누이동생을 부수겠다면, 내 경고컨대, 그대가 어떤 사람이고 얼마나 강하든 간에 마라칸트 전부의 분노는 피하지 못할 것이외다.”

***

 날이 새자 말릭은 바베디 가문의 저택이 있던 곳으로 향했다. 가는 동안 그는 안장에 앉은 채 새벽녘 마라칸트의 거리를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새벽이라 그런지 한산하기 짝이 없었고 지나가는 사람도 바쁘게 돌아다니기만 하지 주변에 신경을 쓰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주변을 둘러보던 끝에 말릭은 바베디 가문의 저택 앞에 도착했다. 말 그대로 커다란 폐허가 그를 반겼다. 한때 하얗게 빛났을 벽은 새카맣게 그을렸고 수많은 대들보는 바닥에 처박혀 재와 먼지만 쌓여 있었다. 몰락하기 전 바베디 가문의 모습을 본 적이 없는 말릭으로서는 이 폐허에서 사치스러웠던 바베디 가문의 영화로움을 떠올릴 수가 없었다.
 말릭이 안장에서 내려오자, 앞에서 잡담을 하던 병사들 셋이 소리를 듣고 일어섰다. 말릭이 다가가자 그들이 다가왔다.

“거기, 정지! 여긴 출입금지 구역입니다. 돌아가십시오.”

 그러자 말릭은 얼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난 여기를 조사할 권리가 있어. 여기 태수의 딸에게 의뢰를 받았단 말이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희도 바흐람 도련님께 명령을 받았습니다.”

 바흐람. 말릭은 소리를 내며 표정을 구겼다. 자기를 막겠다는 말을 그대로 지킬 정도로 결단력 있는 사람이었을 줄은 말릭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동안 병사들이 서로 소곤거렸다.

“그런 말을 해도 되나?”
“몰라. 일단 저 이방인을 막아야지.”

 그들의 속닥거림을 충분히 들은 말릭은 고개를 좌우로 천천히 돌리며 몸을 풀었다. 그러자 병사들이 긴장한 듯이 말했다.

“죄송하지만, 나가시죠.”
“지시를 따르지 않으면 무력을 써도 좋다고 도련님께서 지시하셨습니다.”

 그들이 칼자루를 꽉 쥐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말릭은 병사들을 밀치고 안으로 들어서려 했다.

“난 여기 들어가겠어.”
“안 된다니까!”

 병사 하나가 말릭의 어깨를 향해 손을 뻗었다. 말릭은 재빠르게 반응했다. 병사의 손이 어깨에 닿는 순간 말릭은 왼쪽으로 뒤돌며 팔을 잡고는 그대로 비틀었다. 병사가 소리를 내자 말릭은 그 병사를 바닥에 메쳤다.

“이 자식이!”

 병사들이 칼을 뽑았다. 그러자 말릭도 자신의 오래된 칼을 뽑아들었다. 칼날은 바깥 공기를 마시자 부르르 떨며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예리하게 날 선 칼날 주변은 마치 더운 봄이나 여름날의 거리처럼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뭐, 뭐야 저거!”
“화염 마법이 걸린 칼이야!”

 갈색 수염을 기른 병사는 마법에 어느 정도 조예가 있는 모양이었다. 그들이 당황하여 허둥지둥하는 동안 말릭이 먼저 움직였다. 그는 병사에게 그대로 달려들어 어깨로 밀치고, 칼을 세로로 꽉 쥔 갈색 수염의 병사를 향해 칼을 휘둘렀다. 그가 칼을 놓치자 말릭은 그대로 왼손에 마력을 모아 병사의 가슴을 향해 내질렀다. 그러자 병사는 투석기에서 발사된 돌처럼 날아가 버렸다.
 말릭의 어깨에 밀쳐져 바닥에 처박힌 병사가 일어나려는 순간, 그는 어느새 자기 목덜미에 타오르는 칼날이 자리 잡은 것을 보고는 멈췄다. 그는 두려움을 감추지 못한 채 시무드 사막 출신의 유목민 남자가 보여주는 살기에 눌려버리고 말았다. 말릭은 고개를 한 번 까닥이더니 메마른 목소리로 병사를 보며 말했다.

“바흐람에게 안부 전하게.”

 그리고 그는 병사의 머리를 강하게 짓밟았다.
 방해꾼을 적당히 처리한 말릭은 칼을 집어넣었다. 그는 숨을 토해내며 어깨와 목을 풀었다. 관절에서 뚝 소리가 났다. 그는 자기도 이제 늙었다고 한탄하면서 동시에 아직 마흔도 되지 않았음을 생각했다. 몸을 다 푼 그는 폐허의 중심을 향해 걸어 들어갔다.
 새까맣게 타서 쓰러진 기둥과 벽, 재만 남은 가구, 폐허 속에서 미처 건지지 못한 가재도구들, 모든 것이 엉망이었다. 보기만 해서는 그저 커다란 불이 모든 것을 태워버렸다는 사실 외에는 알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꽤 커다란 불인 것은 확실했다. 마라칸트 같은 중요하고 또 오래된 도시라면 화재대비도 제대로 해놓았을 텐데, 이렇게 화마가 모든 것을 집어삼킬 때까지 불을 끄지 못한 것을 보면 말이다. 외진 곳에 있어서 제때 끄지 못한 것일까, 말릭은 생각했다. 어쩌면 그것이 다행이었을 수도 있다. 저택이 번화가 한가운데 있었더라면 ‘바베디 가문의 참극’이 아니라 ‘마라칸트 대화재’로 기록됐을 테니까.
 재앙의 한가운데 선 말릭은 약탈자처럼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의 눈빛 사이로 깨진 사금파리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자기 손바닥만 한 크기의 조각이었다. 그는 사금파리를 주워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처음 데어드리와 만났을 때, 그녀가 보여준 것이 있었다.

“모든 것은 눈과 귀가 있어. 설령 살아있는 게 아닌 물건이라고 해도.”

 그러더니 그녀는 말릭의 칼을 들고 눈을 감았다. 그러기를 한참, 그녀가 칼을 놓고 말한 것은 말릭이 말한 적 없는 과거, 그리고 그가 어째서 피투성이로 시체 사이에서 죽어가고 있었는지에 대해서였다.
 사반세기 가까이 지난 지금, 말릭은 그녀에게서 배운 그 능력을 쓰면서 재미를 많이도 봤었다. 지금도 이 조각이, 작년의 그 참극을 말해주지 않을까 기대하며 그는 눈을 감았다.

***

 수많은 장면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뜨거운 열기, 사방이 불길이었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두 도망치기에 바빴다. 소리가 들렸다. 사람이 아닌 무언가가 내는 끔찍한 소리. 수많은 비명의 사이를 비집고 들렸다.
 그리고 울리는 야수의 포효. 멀리서 보이는 악몽의 근원.
 그때였다. 장면이 방해를 받았다. 바베디 가문의 저택에서 일어날 리가 없는 장면이 비집고 들어왔다.

 그녀가 보였다.
 차가운 보랏빛 눈동자를 빛내며 말릭에게 안기는 그녀가.

***

 말릭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조각을 떨어트렸다. 그의 숨은 방금까지 뜀박질한 전령처럼 거칠었다. 그는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식은땀을 훑어내며 중얼거렸다.

“또 집중이 흐트러졌나 보군…….”

 말릭은 마음을 진정시키며 환상에서 본 것들을 정리했다. 커다란 화재, 도망치는 사람들의 비명, 야수 같은 포효, 그리고 흐릿하게 비친 그 원흉의 윤곽. 이 사건이 평범한 화재 사고가 아니었음은 분명했다. 하지만 이 짧고 또 잡념 때문에 흐트러진 환시로는 루스탐에 관한 정보를 얻을 수 없었다. 그는 가방에서 루스탐의 초상화를 꺼내 펼쳐보았다. 짧고 단정한 머리, 넓은 이마, 큰 눈, 두툼한 입술. 환상에서 이런 얼굴을 한 사람은 없었다.
 말릭은 안장 위에 오르며 다음에 갈 곳을 생각했다. 그러면서 그는 무의식적으로 박차를 가했고 말은 생각에 잠긴 말릭을 데리고 정처 없이 걷기 시작했다. 그가 떠나고 나자 기절한 병사들이 소리를 내며 정신을 차렸다.

***

 어느새 석양이 지고 있었지만 말릭은 여전히 감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잠깐 머리라도 식힐 겸 해서 눈앞에 있는 술집으로 향했다. 마라칸트 시내의 향락가가 아닌, 여관을 겸하는 허름한 곳이었다. 안에 들어선 말릭은 주변을 한번 훑어보고는 주인을 향해 다가갔다. 머리가 벗겨진 주인장은 험악한 얼굴의 시무드인 남성을 보고는 긴장한 듯 침을 삼켰다.

“무엇으로 드릴까요?”

 말릭은 대답 없이 의자에 앉았다. 그러고는 금화를 꺼내 탁자에 올렸다.

“추천해주시오.”

 그러자 노인은 금화에 새겨진 황제의 얼굴을 손으로 문지르며 생각하더니, 손을 탁 치고는 창고로 향했다. 이윽고 노인이 나왔을 때 그의 손에는 포도주가 들려 있었다.

“데일스산 포도주입니다. 구하기 어려운 물건이라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안 꺼내놓고 있었습니다만, 그 금화에 맞는 가격은 될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노인은 포도주에 어울리지 않는 나무잔에다가 술을 따라주었다. 말릭은 붉은 포도주를 한참 내려다보았다. 왜 하필 데일스일까, 그는 포도주에 비친 자기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얼굴은 어느새 데어드리의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그는 헛기침을 한 번 하더니 술에 떠오른 얼굴을 없애버리려는 듯 단숨에 술을 들이켰다. 목을 타고 흐르는 취기를 느끼던 그는 잔을 탁자에 두며 노인을 보았다.

“물어볼 게 있소.”
“예, 손님.”
“루스탐 바베디.”
 
 순간 정적이 흘렀다. 술집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동시에 말릭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다들 자기 귀를 의심하고 있었다.

“죄송, 합니다만, 누구…….”
“루스탐. 바베디.”

 말릭은 이름을 딱딱 끊어 말하며 위협적으로 말했다.

“작년의 그 참극에서 유일하게 시체가 없었다는 그 사람에 관해서 물었다.”

 기나긴 침묵이 이어졌다. 모두가 이방인의 말을 의심하며 술잔을 손에서 놓았다. 그런 분위기에도 말릭은 아랑곳하지 않고 노인을 노려보았다. 노인은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처음 듣는 사람입니다만…….”

 누가 봐도 명백한 거짓말이었다.

“거짓말 말게.”

 그러자 노인은 눈을 감고 침을 삼켰다. 그리고 눈을 뜨며 말릭에게 사정하듯이 말했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분명 모르는 사람입니다. 작년까지만 해도 바베디 가문은 융성했고 유명했던 건 사실입니다만, 루스탐이라는 사람은 모릅니다. 전혀요! 게다가 루스탐이라는 이름은 여기서 흔합니다. 제 손자 이름도 루스탐인걸요. 귀족들은 애초에 이런 술집엔 오지도 않을뿐더러 우리 같은 사람들도 귀족들 얘기는 흥미로운 소식 외에는 관심도 가지지 않습니다. 저한테 더 캐물으셔도 제가 할 수 있는 말은 여기까지입니다. 그러니 부탁건대, 그만 물으십시오.”

 노인의 일장연설이 끝나자 말릭은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적대적인 눈빛을 느꼈다. 말릭은 주변을 힐끗 돌아보고는 다시 노인에게 물었다.

“바흐람 가빈이 말하지 말라고 하던가?”

 노인은 한참을 망설이더니, 결국 입을 열었다.

“예.”

 노인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마라칸트 사람들은 그분을 존경합니다. 우리를 지켜주실 뿐만 아니라 정의롭고 선하신, 완벽한 분이니까요. 바흐람 도련님께서 말하지 말라고 명령했다면, 우리들은 오르마즈드 앞에서도 말하지 않을 겁니다. 분명 사정이 있으시겠지요.”

 그리고 노인은 눈을 떴다.

“그리고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어차피 루스탐 바베디라는 사람에 대해서는 모르니, 도움을 못 드렸을 겁니다.”

 말이 끝나자마자 노인은 도망치듯 다른 손님에게로 가버렸다. 홀로 남겨진 말릭은 한숨을 쉬며 그녀를 떠오르게 하는 데일스산 포도주를 홀로 들이켰다. 그때 누군가가 그의 옆에 앉았다. 말릭은 고개를 돌렸다. 젊은 사람이지만 피곤과 괴로움으로 얼굴에 주름과 어둠이 가득한 남자였다. 그는 말없이 말릭의 포도주를 빼앗아 자신의 잔에 따랐다. 말릭이 빼앗긴 자기 술을 낚아채려고 하자 남자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난 알아.”
“뭐를.”
“루스탐 바베디.”

 그러더니 그가 망토를 홱 열며 허리춤을 가리켰다. 기병용 곡도 한 자루가 허리에 매달려 한때 자기 주인이 군인이었음을 알려주었다. 그는 이미 술에 잔뜩 취했음에도 여전히 술에 매달리고 있었다. 그는 자기 잔을 들이켜더니 입에서 역겨운 술 냄새를 뿜으며 말했다.

“이봐, 사막 친구. 난 술이 필요해. 나한테 술값을 줘. 금화 다섯 닢이면 충분할 것 같아. 당신은 아무렇지도 않게 술값으로 금화를 내놓았으니 금화도 수북하겠지. 난 돈이 없어. 은퇴하면서 받은 돈은 모두 술값으로 썼지. 이젠 빚밖에 없어. 저 할아범이 그나마 날 불쌍하게 여겨줘서 여기 앉아있을 수 있는 거지. 술값만 금화 세 닢은 되는 것 같아. 이 칼도 팔아버릴까 했는데 받아주는 데가 없더라고. 그래, 세 닢을 추가로 받아야겠어. 여덟 닢을 주면 네가 그렇게 원하는 루스탐 바베디에 대한 말을 해주지.”

 말릭은 이런 술주정뱅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절대다수가 헛소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말에 앞뒤가 안 맞고 두서도 없는 게 보통이었다. 하지만 모두 바흐람에게 충성하며 함구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정보를 주겠다며 다가온 이는 분명 흔치 않았다. 말릭은 금화 스무 닢을 꺼냈다. 그러자 남자의 풀린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가 손을 뻗자 말릭은 남자를 놀리듯 자기 손을 빼며 말했다.

“먼저 말해.”

 그러자 남자는 약간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

“먼저 열 닢부터 내놔.”

 말릭은 순순히 따랐다. 그러자 남자는 실성한 듯이 웃으며 금화를 세었다. 그는 한참을 금화에 새겨진 황제의 얼굴과 이름을 이리저리 돌려본 끝에야 말을 시작했다.

“그래……. 루스탐 바베디. 그놈은 참 대단한 놈이었지. 곱상하게 생겨서는 태수 딸년을 후리고 말이야. 그런 놈이 싸움도 잘하고, 가문도 잘나고. 나처럼 엿 같은 집구석에서 태어나 살려고 이따위 일에 뛰어든 놈들하고는 차원이 달랐지. 히히히……. 놈은 바흐람이 이끄는 기병대 소속이었어. 거, 뭐라고 하더라, 사바란? 아스와란? 그런 거 있잖아. 카타프락토인가 뭔가 하는 그거. 게다가 놈은 바흐람의 부관이었단 말이지. 분명 서로 같이 자는 사이였을 거야. 안 그럼 그렇게 사이가 좋을 리가 없지. 푸흐흐……. 관문 너머 유목민들이 관문을 넘으려고 난리를 치면 바흐람과 친구들이 나가서 놈들의 대가리를 창대나 안장에 매달고 돌아오는 게 일상이었단 말이야. 그거 알아? 나도 그들 중 하나였어. 어때, 그런 거 같아? 크흐흐……. 반응이 없는 걸 보니 역시 못 믿나 보네. 잠깐 술 좀 마시고. 아, 따라주는 건가? 고마워. 역시 사막 친구들은 생긴 것과는 다르게 의외로 자상하단 말이야. 여자들도 끝내주고. 그런 여자들이 바글바글한 사막이 고향이라니 부러워. 하여튼 자상한 네 녀석을 위해서 잡소리는 이쯤 해둘게. 내가 겪은 일이야. 아, 루스탐. 루스탐을 찾는 걸 보면 바베디 저택에서 있었던 일은 이미 알겠지? 그 일이 벌어지기 보름쯤 전의 일이었어. 우린 마족이 날뛴다는 소식을 듣고 평소대로 관문 너머로 갔단 말이야. 마족들이 많이도 있었지. 많이. 우리는 창을 들고 마족들을 신나게 꿰뚫고 다녔어. 재밌었지. 그런데 문제가 생겼어. 그냥 마족만 있는 게 아니더라고.”

 그가 말을 끊었다. 그는 그때의 끔찍한 기억을 억누르려는 듯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공포마저 억누를 수는 없는지 손을 벌벌 떨고 있었다. 가만히 지켜보다 못 한 말릭이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지?”

 남자는 겨우 눈을 뜨더니 떨리는 자기 손을 다른 손으로 붙잡았다. 그는 두려움에 질린 얼굴로 말릭을 보며 대답했다.

“악마가, 아니 악마보다 강한 놈이 있었어. 해를 가릴 정도로 크고 검으면서도 불타오르는 깃털의 날개 말이야. 알고 보니 그건…….”
“……타천사.”

 말릭이 대신 말했다. 타천사. 지금까지 그가 죽지 않고 살아있는 원동력이자, 그의 원수. 남자는 그놈을 만났다는 것이었다.

“맞아. 타천사. 아흐리만이라고 부르는 그놈 말이야! 네 고향에선 뭐라고 하더라? 이, 이, 뭐였지…….”
“이블리스.”
“그래. 이블리스! 여하튼. 아흐리만 그놈은 우리를 손으로 종잇장처럼 찢어버렸어. 바흐람도 얼굴이 걸레짝이 되어서는 쓰러지니까 난 도망쳤어. 홀로 꽁지 빠지게 도망갔다고. 하하……. 정말 죽는 줄 알았어. 그날 이후로 난 기병대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나왔어. 그런데 자꾸 아흐리만 그놈의 얼굴이 떠올라. 그 두렵고 무시무시한 얼굴이. 그걸 잊으려고 술을 마시고 또 마셔도 잊을 수가 없어. 내가 이 꼴이 된 것도 다 그놈 때문이야.”

 남자는 포도주를 병째로 들이켰다. 그러다가 술이 다 떨어지자 아쉬운 표정으로 병을 바닥에 던졌다. 말릭이 물었다.

“루스탐은?”
“누구? 아, 루스탐. 걔는 일주일 뒤에 피투성이가 되어서는 관문으로 왔어. 그리고 또 일주일 뒤에 바베디 저택에 불이 났지.”
“그 일이 정확히 어디서 벌어졌는지 기억하나? 이블리스 그놈과 싸웠던 곳 말이야.”
“기억하기 싫어서 잊어버렸어. 관문에서 꽤 떨어졌던 거 같아. 바흐람이라면 알지도 모르지.”

 말릭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나머지 금화 열 닢을 바닥에 뿌리듯 던지고는 바깥으로 향했다. 그러자 뒤에서 주정뱅이가 외쳤다.

“뭘 하는지 모르지만 건드리지 않는 게 좋을걸! 아흐리만은 자기에게 덤비는 사람들에게 파멸을 주는 놈이야!”

 말릭은 바깥으로 나왔다. 주정뱅이의 말은 대꾸할 가치도 없었다. 코앞에서 줄행랑친 주정뱅이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오랫동안 타천사와 맞섰으니까. 말릭은 이제 어디로 가야 할지 감히 잡혔다. 관문 바깥으로 나가야 했다.
 그런데 갑자기 수많은 병사들이 말릭을 둘러쌌다. 완전무장한 병사들이 창끝을 그에게 들이밀며 노려보았다. 그가 때려눕힌 병사들의 소식을 들은 모양이었다. 말릭은 반사적으로 손을 칼자루에 가져다 댔다. 말릭과 병사들, 그리고 그들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보는 사람들의 대치가 이어졌다. 병사들 뒤에 서 있던 군인이 말했다.

“순순히 칼에서 손을 떼라. 우리 병사에게 폭력을 가하고 시민들을 겁박한 죄로 체포하겠다.”
“이따위 짓거리를 할 시간은 없어. 난 관문 바깥으로 나가야 해. 나스린 가빈의 의뢰를 받았단 말이다.”
“나스린 아가씨의 의뢰가 네놈이 가한 폭력을 정당화하진 못한다. 순순히 체포에 응해라!”
 
 말릭은 한숨을 쉬었다. 그의 무력과 마법이라면 이들을 모조리 쓰러트릴 수 있었고 또 필요하다면 그렇게 할 의향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칼자루에서 손을 떼었다. 여기서 괜한 칼부림을 했다가는 의뢰는커녕 사람들의 손가락질만 받으며 마라칸트에서 쫓겨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가 싸울 의사가 없음을 보이자 병사들이 그에게 다가와 붙잡았다. 하지만 그를 포박하지는 않았다. 말릭의 팔을 붙든 병사가 작게 말했다.

“귀빈 자격으로 여기 온 걸 다행으로 여겨라, 빌어먹을 이방인 놈아.”

***

 며칠간 말릭은 감옥에 갇혀 있었다. 병사들은 그에게 물이나 음식을 넣어줄 때 빼고는 그와 마주치려고 하지 않았다. 말릭은 하릴없이 감방 바닥에 앉아 명상하거나 몸을 풀며 시간을 보냈다.
 사흘 정도 지났을 때였다. 감옥 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말릭이 뒤돌아보니 그 자리에는 화려한 비단옷 안에 갑옷을 받쳐 입은 사람이 허리춤에 투구를 낀 채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바흐람이었다.

“소식은 들었소. 우리 병사들을 때려눕힌 것도 모자라 선량한 시민들을 겁박했다지. 게다가 잔인한 마귀들이 호시탐탐 노리는 관문을 열고 바깥에 나가겠다고?”

 바흐람의 비난은 거셌다.

“당신이 고위 마족을 산 채로 잡아올 정도의 실력자에 내 누이의 의뢰까지 받은 귀빈이 아니었다면, 그대는 이미 추방이나 사형 둘 중 하나였을 거요. 당신의 강력함이 당신을 살리는군.”
 그러면서 그는 말릭에게 일어나라 손짓했다.

“따라오시오.”

 말릭은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섰다. 바흐람은 말릭을 데리고 미로 같은 지하 감옥을 이리저리 빠져나왔다. 감옥 밖으로 나서자 강렬한 빛에 둘은 반사적으로 눈을 가렸다. 말릭이 손을 치우자 머리부터 발끝까지 단단한 철갑옷으로 차려입고, 말에도 마갑을 씌운 한 무리의 기병들이 바흐람을 보며 예를 갖추었다. 그 주정뱅이가 말한 기병대였다.

“그대를 설득해서 내보내는 데에 실패했으니, 이젠 내가 직접 곁에 붙어서 감시하는 수밖에.”

 바흐람은 투구를 쓰며 말 위에 올랐다.

“바깥으로 보내주겠소. 다만 마족을 상대하는 게 먼저요.”

 하인들이 말릭의 장비와 말을 들고 그에게 다가왔다. 말릭은 자기 장비를 살펴보았다. 강철로 된 투구와 보호대, 미늘 갑옷, 허리띠, 화염 마법 걸린 검, 활과 화살집, 그리고 마법과 주술을 부리는데 필요한 재료. 모든 것을 일일이 확인하고 나서야 그는 장비를 걸쳤다. 준비가 끝나고 나서야 말릭은 바흐람을 따라 말 위에 올랐다. 바흐람은 기병대를 이끌고 관문으로 향했다.
 관문에 도달한 바흐람은 관문의 병사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병사들은 잔뜩 긴장한 표정을 지으며 서로 바라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을 열었다. 다리 역할을 겸하는 거대한 문이 천천히 내려가더니 그대로 관문 앞의 해자를 덮었다. 동시에 성벽 위에 궁수들이 주변을 경계했고, 문 바로 뒤에서 보병대가 대기하다 바깥으로 나가 해자 바로 뒤에 자리 잡았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관측병이 바흐람을 향해 소리쳤다.

“진군하셔도 좋습니다!”

 그러자 기병들은 방패와 창을 손에 꽉 쥔 채, 기둥 형태로 대열을 이루고 관문 밖으로 행군했다. 기병대가 나서자 관문의 병사들은 재빨리 안으로 돌아갔고, 다시는 다시 굉음을 내며 성문으로 변했다. 기병들은 그 모습을 보며 긴장한 듯 침을 삼키며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바흐람 역시 긴장한 얼굴이었으나 깊게 심호흡하며 마음을 추슬렀다. 그는 기병 몇을 지목해 정찰을 보냈다. 그들이 앞으로 내달리며 눈앞에서 사라진 후에야 바흐람은 말릭에게 말을 걸었다.

“자, 그럼. 왜 관문 바깥으로 나오려고 했는지 말해보실까.”

 말릭은 바흐람을 돌아보았다.

“자네 부하로 보이던 주정뱅이 하나가 루스탐에 대해서 말해주더군.”

 그는 자기가 주정뱅이에게 들은 것을 간단히 설명했다. 말을 듣던 바흐람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래서 그 전투가 있던 곳으로 가보고 싶다, 이건가?”
“이해가 빠른 편이군.”

 말릭은 버릇처럼 목을 옆으로 뚝뚝 소리를 내며 꺾었다.

“그가 흘린 물건이 있을지도 모르지.”

 바흐람은 무어라 대답하려다 말고 그대로 고개를 돌렸다. 말릭은 그의 행동이 의심스러웠으나 더 캐묻지는 않았다. 그때 정찰을 나갔던 병사가 돌아왔다.

“전방에 야만인과 마족이 소수 있습니다. 무장도 거의 안 했으니 큰 위협은 아닙니다.”
“좋다. 전체 전투 대형으로. 매복을 주의하고 항상 주변을 경계하라.”

 기병들은 재빠르게 대형을 바꾸었다. 얼마 뒤에 기병대는 마족과 마주쳤고 바흐람은 재빨리 말을 몰며 돌격을 명령했다. 그러자 일부 기병들은 활을 들고 사격을 가하고, 나머지는 전우가 쏜 화살을 방패 삼아 앞으로 돌진했다. 기병들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마족들에게로 나아가 그들을 살육했다. 승리라고 하기에도 부끄러운 일이었다.

“좋아. 피해는 없고, 적은 전멸.”
“이게 끝은 아니겠지?”

 말릭의 말에 바흐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족들은 수가 많으니까. 보통은 해가 떨어질 때까지 이렇게 마족들을 잡다가 돌아가지. 하지만 오늘은 자네 일도 있으니 바로 그 장소로 가겠네.”

 바흐람이 손짓하자 기병대는 다시 행군 대형으로 정렬했다. 다시 일부가 정찰병이 되어 앞으로 먼저 사라졌다. 그러는 동안 바흐람은 말릭과 함께 점점 더 깊은 숲으로 향했다. 그러자 기병들 일부가 불안한 듯 헛기침을 하거나 몸을 떨었다. 정찰병들이 교대로 다니며 마족이나 북방 유목민들에 대해서 보고했으나 그쪽으로 향하려는 의지는 없어 보였다.

“거의 다 왔소. 이 숲만 지나면 바로 그 현장일세.”

 숲속에 들어선 지 한참, 바흐람은 잔뜩 긴장한 눈초리로 사방을 경계했다. 작년에 바흐람과 같이 이곳에 들어섰던 기병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조용히 나아가던 중에 그들은 숲과 숲 사이의 공터에 도달했다.

“바로 여기일세.”

 바흐람의 말에 말릭은 말에서 내려와 주변을 살펴보았다. 확실히 전투의 흔적이 군데군데 남아있었다. 바닥에 박혀 삭아버린 방패나 창대, 녹슨 무기나 투구, 뼈다귀 등이 보였다. 말릭은 주변을 걸으며 말했다.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지?”
“그건…….”

 말릭의 말에 바흐람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숲을 가로지르는 바람 소리가 마치 죽은 부하들이 유령이 되어 자신을 원망하는 소리 같았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기도문을 읊었다. 말릭은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시간만 충분하다면 폐허에서처럼 과거를 살펴보았을 텐데, 그럴 만큼 안전한 곳이 아니었다. 바흐람은 그 사실을 다시 상기시켰다.

“다 됐으면 빨리 나가세. 여긴 위험한 곳이오. 마족이나 야만인들의 함정도 많아.”

 그때였다. 정찰병 하나가 급하게 말을 몰아 바흐람에게 돌아왔다. 그는 피가 흐르는 상처를 틀어막으며 놀란 전우들을 향해 소리쳤다.

“악마! 악마가 나타났습니다! 저희가 쫓던 그놈입니다!”
“뭐라고?”
“악마가 튀어나와서 호르마즈드를 죽였습니다. 여기서 나가야 합니다. 빨리…….”
“뒤, 뒤에!”

 기병 하나가 외치자 정찰병이 공포에 질린 눈빛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날개 달린 무언가가 팍 튀어 오르더니, 목을 감싸고 있던 갑옷이 무색하게도 정찰병의 목을 간단하게 베어버렸다. 조금 전까지 말을 하던 전우의 목이 땅바닥에 굴러다니자 기병들도 그들이 탄 말도 모두 놀랐다. 바흐람도 놀라긴 마찬가지였으나 당황할 시간이 없었다. 그는 칼을 뽑으며 외쳤다.

“전투 준비!”

 말릭 역시 활을 꺼내 들고 악마를 향해 겨누었다. 회색 피부의 악마는 등에 커다란 한 쌍의 날개를 펄럭이고 있었고, 머리에는 산양 같은 뿔이 크게 자라있었다. 흔한 악마의 모습이었다. 말릭은 재빠르게 화살에 마력을 담아 쏘았다. 다른 기병들도 마찬가지로 활을 들고 마구 쏘아댔다. 하지만 악마는 가볍게 날아오르며 피했다. 한바탕 기병들의 공격이 끝나자 악마가 외쳤다.

“내 차례로군!”

 그러자 악마는 마치 먹이를 향해 활강하는 매처럼 기병들에게 몸을 날렸다. 무기도 없이 손톱만 휘두르는데도 갑옷과 말이 종잇장처럼 찢겨나갔다. 기병들은 최대한 저항해봤으나 악마에겐 역부족이었다.

“악마는 당신 전문이잖나! 어떻게 좀 해봐!”

 말릭은 바흐람의 외침을 듣지 못한 듯 계속 활쏘기만 집중했다. 바흐람은 그 화살이 무슨 소용인가 생각하며 기병들을 재집결시키려 노력했다. 그는 그러나 말릭이 쏜 빗나간 화살이 나무를 두 동강 내며 쓰러트리는 것을 보고는 생각을 바꾸었다. 악마 역시 말릭이 쏘는 화살이 제일 두려운지 감히 그에게 덤비지 못하고 이리저리 날아다니며 피했다. 바흐람은 그 모습을 보더니 머리를 굴렸다.

“빌어먹을 악마 놈아! 여기다! 내가 지휘관이다!”

 그러면서 바흐람은 숲속으로 튀어가며 악마를 유인했다. 그 모습에 말릭은 활을 내리며 투덜거렸다.

“대체 무슨 짓거리를 하는 거야!”

 악마는 바흐람을 향해 달려들었다. 바흐람의 예상대로였다. 그러나 악마의 비상식적인 완력과 민첩함은 예상 밖이었다. 악마는 순식간의 바흐람에게 다가와 그의 말을 탁자 뒤집듯 날려버렸고, 바흐람 역시 같이 날아가 버렸다.
 악마는 바흐람에게 다가갔다. 기병들이 활을 쏘고 창칼을 휘두르며 악마를 막으려 했으나 악마는 개의치 않고 간단히 물리쳤다. 바흐람은 정신을 못 차리고 바닥을 기어갔다.

“네 추적자 동료는 멀리 떨어져 있군.”

 친숙한 목소리에 바흐람은 악마를 올려다보았다. 그 모습을 보고 바흐람은 놀라 뒷걸음질 쳤다. 악마는 바흐람에게 손을 뻗었다. 바흐람은 그대로 허공에 끌어올려 졌다. 손이 닿지 않았음에도 바흐람은 목이 졸리는 것을 느꼈다. 그는 숨을 쉬려고 버둥거리면서도 악마의 얼굴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그의 눈동자는 놀라서 커다랬다.

“너는, 너는…….”
“흠. 자넨 여전히 변하지 않았군. 보시다시피 난 많이 변했거든.”
 악마는 바흐람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어느새 두 사람의 거리는 서로의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워졌다.

“오랜 친구여. 이 꼴로는 다시 돌아가지 못하겠지. 일 년 내내 그렇게 생각했네. 하지만 지금은 생각을 고쳐먹었지. 내 언제 한 번 자네 누이에게 안부 전하러 가겠네. 그런데 그 전에, 먼저 자네를…….”

 그 순간 옆에서 파랗게 빛나는 화살이 허공을 가르며 날아들었다. 악마가 미처 팔을 빼기도 전에 화살은 그대로 악마의 팔을 깔끔하게 잘라냈고, 동시에 바흐람은 바닥에 널브러졌다.
 악마는 소리를 내며 팔꿈치 아래가 달아간 팔을 붙잡고 말릭을 노려보았다. 말릭은 틈을 주지 않고 다시 활을 쏘았으나 악마는 재빨리 몸을 비틀어 피하고는 하늘로 날아갔다. 말릭은 하늘을 향해 활을 겨누었으나 이미 멀리 날아간 악마를 쏘아 떨어트리기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는지 그대로 활을 내렸다.

“가버렸군.”

 그는 활을 거두고는 바닥에 떨어진 악마의 왼팔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팔은 어느새 잿더미가 되어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말릭이 고개를 저으며 고개를 돌리려는 찰나, 사라지는 잿더미 사이로 빛바랜 비취색의 무언가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팔찌였다. 말릭은 그것을 이리저리 살펴보고는 주머니에 넣었다.
 살아남은 기병들이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그들은 바닥에 쓰러진 바흐람을 부축하며 일으켜 세웠다.

“괜찮으십니까, 도련님?”

 바흐람은 대답하지 않았다. 악마는 한참 전에 사라졌지만, 그는 여전히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듯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기병들이 그를 흔들어댔지만 여전했다. 말릭은 그런 바흐람을 노려보고 있었다.

***

 거의 혼이 빠져나갔던 바흐람은 태수 관저에 돌아와서도 여전했다. 말릭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난로 앞에 멍하니 앉은 바흐람을 내려다보았다.

“이봐.”

 말릭이 말했다.

“마족의 물결을 막는 도시의 지휘관이면서, 고작 악마 하나를 보고 그렇게 넋이 나가서야 쓰겠나?”

 바흐람은 말릭이 그랬듯 고개를 슥 돌려 그를 한 번 쳐다보고는 다시 난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런 게 아니오.”

 바흐람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변명하듯 말했다.

“그냥 악마는 전에도 많이 봤소.”
“그럼 이번에는?”

 말릭은 그렇게 말하면서 주머니에 넣었던 악마의 팔찌를 손에 쥐고 만지작거렸다. 악마의 팔에 붙어있던 물건이지만 이상하게도 사악한 마력이나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약해빠진 마족이나 악마가 자기 힘을 강화하려고 달고 다니는 부적과는 다른, 평범한 물건이었다. 그래서 더 이상했다.
 바흐람은 말릭의 물음에 한참을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말릭은 팔찌를 꽉 쥐며 다시 말을 걸었다.

“그 악마, 네게 오랜 친구라고 하더군.”

 그 말에 바흐람은 놀란 얼굴이 되어 말릭을 바라보았다. 말릭은 만지작거리던 팔찌를 바흐람의 앞에 내던졌다. 비취색 돌을 정성스럽게 실에다 꿴 팔찌가 대리석 바닥에 떨어졌다. 바흐람은 그 팔찌를 보더니 다시 말릭을 바라보았다.

“언제 그 말을 들은 거지?”
“그건 중요하지 않아.”

 말릭은 바흐람에게 다가갔다.

“원한다면 당장 저 팔찌에 대고 마법을 쓰거나 네 머리통 안의 기억을 강제로 뽑아낼 수도 있어. 하지만 난 지금 그런 충동을 참고 또 참고 있지. 네놈은 태수의 아들이니까. 하지만 내 인내심은 그다지 강하지 않아. 그러니 빨리 말하는 게 좋을 거야.”

 바흐람은 말없이 팔찌를 문질렀다.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 그의 눈동자는 지진이 일어난 듯 마구 떨리고 있을 터였다. 말릭은 강제로 기억을 뽑아내겠다며 협박을 하긴 했지만, 지금은 가만히 기다리는 게 더 좋다고 판단했다. 바흐람은 한참 그 팔찌를 만지작거리다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작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걸 듣고 싶은 거겠지?”
“그래.”
“좋아. 원하는 대로 다 말해주지.”

 바흐람은 팔찌를 내려놓았다. 그는 슬픔으로 무너져 내린 얼굴로 비탄에 찬 한숨을 내쉬었다.

“우린 어렸을 때부터 같이 자란 친구였소. 나는 태수의 아들이었고 그는 이쪽 지방의 유서 깊은 귀족이었지. 내가 마라칸트의 기병대장이 되었을 때 그는 내 부관이 되었소. 오랫동안, 우린 서로의 등을 맞대고 전우로서 야만인과 악마들을 상대했소.”
“그건 알고 있어.”

 말릭은 건조하게 대답했다.

“그래. 옛이야기는 별로 재미없지. 그대가 원하는 건 작년의 그 사건이겠지. 아닌가?”
“알면 빨리 말해.”
“그래……. 작년은 참 어려운 시기였다오. 지금도 그렇긴 하지만, 마족들이 참 많이도 나오던 시절이었지. 그런데 관문의 병사들 사이에 소문이 하나 돌았네. 엄청난 크기의 불타는 날개를 가진 거대한 악마에 관한 소문. 우린, 그러니까 기병대는 다들 허풍이라고 믿었다만, 관문 병사들의 묘사는 너무나도 자세했지. 그래서 관문 밖으로 나갔소. 그 악마가 누구인지, 얼마나 위험한지 알아보려고. 마족이 꽤 많더군. 짐승 수준의 놈들부터 저 북쪽 황무지에나 산다는 검은 요정도 있었어. 우린 검은 요정 하나를 포로로 잡았는데, 그 여자가 말하기를 그 악마는…….”
“단순한 악마가 아니라 타천사였겠지.”

 말릭이 끼어들자 바흐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냥 악마가 아니었네. 하늘 대신의 맏이, 처음이자 마지막 타천사, 아흐리만이었네.”
 아흐리만, 이블리스, 데어드리는 그를 ‘루시퍼’라고 불렀다. 말릭은 다시 떠오르는 그녀에 대한 기억을 치우고는 바흐람의 말에 집중했다.

“아직도 그놈의 모습이 생생하게 기억나네. 까마귀처럼 새까만 깃털은 불타고 있었지. 펼치면 온 하늘을 덮은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커다랬어. 그런 놈을 상대로 도망치지 않고 싸우다니. 정말 바보짓이었지.”

 바흐람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흐리만 그놈은 우리를 가볍게 농락했소. 나 역시 놈이 휘두른 손에 투구가 박살 나고, 이렇게 얼굴에 상처도 났소. 내 옆구리도 놈에게 찢어발겨 졌지. 난 그놈 발아래에서 죽음의 두려움에 압도당해 아무것도 못 했소. 다들 그랬지. 오직 루스탐만이 용기를 내어 마지막까지 그를 막아섰네. 그리고 내게 이렇게 외치더군. ‘도망가!’ 그 말대로 난 겁쟁이처럼 도망쳤소. 그러다가 어쩌다 뒤를 돌아보았는데, 아흐리만이 루스탐의 머리를 잡고 들어 올리고 있었지. 그의 팔이 번쩍이더니 루스탐의 끔찍한 비명이 온 숲을 쩌렁쩌렁하게 뒤덮었소. 모두가 그 비명을 듣고 악몽 꾼 어린아이가 어머니에게 달려가듯이 관문으로 도망쳤소. 나도 그랬지.”
“그 타천사가 루스탐의 머리를 붙잡고는 팔을 번쩍이더니, 루스탐이 비명을 질렀다?”

 바흐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비명은 관문에서도 들을 수 있을 정도였소…….”

 바흐람은 귀를 틀어막으며 몸서리를 쳤다. 그 비명이 여전히 들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비명 사이로 오랜 친구의 고통에 찬 애원이 들려왔다. 자기를 버리지 말라는 그 애원이.

“그래서? 듣기로는 일주일 뒤에 다시 관문에 나타났다는데.”

 말릭의 물음에 바흐람은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그는 소름 돋는 환상에서 깨어난 것에 안도하면서 동시에 아직도 그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사실에 한숨을 쉬었다.

“맞네. 엉망이었지. 갑옷은 다 뜯겨나가고 살갗도 엉망이고. 제대로 걷지도 못했소. 열병을 앓는 사람처럼 온몸이 펄펄 끓었고. 그리고 일주일 뒤에, 그 참극이 벌어졌소.”

 말릭은 바흐람이 말한 것들을 깊게 생각했다. 피투성이가 되어 돌아온 사람, 펄펄 끓는 몸, 타천사에게 당한 끔찍한 일들. 너무나도, 너무나도 비슷했다. 그녀와 너무나도 비슷했다. 말릭은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데어드리…….”
“데어드리?”

 바흐람의 물음에 말릭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내가 뭐라고 했지?”
“데어드리라고 했는데.”
“아무것도 아니다. 신경 쓰지 마.”

 말릭은 손을 내젓고는 다시 팔짱을 꼈다.

“내가 아는 사례랑 참으로 비슷하군. 그 사람은 결국 타천사에게 당했던 사람이 악마로 변해버렸지.”
“……역시.”

 바흐람은 고개를 숙이며 중얼거렸다.

“역시 내 예상이 맞았어.”

 바흐람은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 참극이 벌어질 때, 나는 병사들과 함께 불을 끄러 갔소. 그때 나는 보았네. 불타는 건물 사이로 포효하던 악마를. 다른 이들은 별다를 것 없는 악마라고 생각했지만, 나는 그 악마에게서 알 수 없는 친숙함을 느꼈지. 그리고 오늘 난 그 악마를 직접 마주했소. 그 얼굴과 이 팔찌를 보고 확신했소. 하아. 그래서 내가 나스린의 의뢰를 받지 말라고 했는데.”

 그렇게 말하며 바흐람은 얼굴을 손으로 가렸다. 슬픔과 고뇌가 그를 감싸버린 모양이었다. 그는 슬퍼하며 울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루스탐이 악마가 된 거야. 내 친구가…….”

 그때였다. 두 사람이 있던 방 바깥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누군가가 넘어졌든가, 주저앉거나 한 모양이었다. 말릭은 칼을 뽑으며 문을 강하게 열어젖혔다. 두 사람의 눈에는 놀란 얼굴로 주저앉은 나스린이 보였다.

“나, 나스린…….”
“오라버니……. 그게 무슨 말씀이신가요?”

 나스린의 눈동자는 공포와 놀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

“루스탐이, 루스탐이 악마가 됐다고요?”
“나스린, 잠깐만! 내 말 좀 들어 보거라.”

 바흐람이 몸을 일으켜 그녀를 진정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말릭은 그녀를 진정시키기는커녕, 바닥에 떨어진 팔찌를 주웠다.

“무슨 짓인가, 말릭!”

 바흐람의 제지에도 말릭은 그를 밀치며 나스린에게 팔찌를 보여주었다.

“악마가 이걸 차고 있더군.”

 나스린은 말릭의 손에서 재빨리 팔찌를 살펴보았다.

“이건, 이건…….”

 그녀는 손을 떨며 빛바랜 돌이 엮인 팔찌를 보았다. 말릭은 그때 나스린의 팔에 비슷한 팔찌가 엮인 것을 보았다.

“제가 예전에 준 팔찌에요……. 저, 정말로, 정말로 악마가 이걸 차고 있었나요? 루스탐에게서 빼앗은 게 아닐까요? 설마…….”

 말릭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녀의 마지막 희망마저 짓밟았다.

“악마가 빼앗은 거라면 마법을 걸어놨겠지. 하지만 아무것도 없었어. 악마는 아무 능력도, 의미도 없는 장신구는 달지 않아.”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어……. 루스탐이 악마일 리가…….”

 나스린은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리다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바흐람이 놀라 그녀를 붙들었다. 나스린은 죽은 사람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다. 바흐람은 사방에 대고 울부짖듯 사람을 찾았다. 근위병과 하인들이 그 소리를 듣고 방에 찾아와 쓰러진 나스린을 데려갔다. 이 모든 일이 벌어지는 동안 말릭은 그저 팔짱만 끼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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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즈베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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