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부와 반역자의 이야기

 

 엘로이즈는 오늘의 마지막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목욕통에 들어가 있었다. 그녀는 대부분의 창부들과는 다르게 노예도, 전쟁포로도, 빚쟁이도 아니었기에 그녀가 원하는 때 아무 때나 그녀가 원하는 사람을 고를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 손님은, 설명만 듣고 고르긴 했지만, 꽤나 급한 모양이었다.

 

"엘로이즈? 손님이 왔어요."

"……벌써?"

 

 그녀와 친분이 있는 소녀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엘로이즈의 되물음에 어린 창부는 그저 어깨만 들썩일 뿐이었다.

 

"기다리라고 해."

"안 돼요."

 

 소녀의 말에 엘로이즈는 고개를 돌렸다.

 

"화대를 두 배로 냈는걸요. 빨리 보고 싶다고. 이미 방에서 기다리고 있고요."

 

 엘로이즈는 따듯한 물이 담긴 목욕통에 머리를 기대며 길게 한숨을 쉬다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의 아름다운 몸을 타고 물방울이 흘러내렸다. 소녀는 그녀의 몸을 힐끗 보았다. 같은 여자인 자신이 보아도 아름답다고 느껴지는, 갖고 싶어 시기심이 생겨나는 그런 몸이었다. 엘로이즈는 스스로 몸을 닦고, 옷을 챙겨 입고는 소녀에게 알려줘서 고맙다 말하며 손님이 기다리는 방으로 향했다.

 그녀는 유명했고 이 홍등가에서는 감히 건드리지 못할 높은 자리에 위치한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이런 상황이 불쾌했다. 언제나 남녀, 혹은 여자 간의 관계에서 우위에 있던 사람은 그녀였고 그 우위는 상대를 기다리게 하는 것에서부터 시작이었다. 상대는 두 배의 화대를 미끼로 그 우위를 빼앗으려드는 것이다.

 시작부터 우위를 빼앗긴 엘로이즈는 그녀의 방문 앞에서 불쾌함과 짜증으로 굳은 자신의 얼굴을 풀며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사람들이 그 비싼 화대를 그녀에게 주는 것은 그녀의 짜증으로 굳어버린 얼굴을 보기 위함이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물론, 일부 특이한 취향의 사람들이 있기는 했지만. 그녀는 방문을 열기 전에 깊게 심호흡을 하며 문을 열었다. 나를 이렇게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누구일까, 어디에서 온 사람일까, 긴 생각을 하면서.

 그리고 그녀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정말일까 의심은 했었다만, 진짜로 여기서 이런 일을 하고 있었을 줄이야."

  

 침대에 걸터앉아있던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짧고 단정하게 깎은 머리, 턱과 입가에 난 흉터, 떡 벌어진 어깨. 빛나는 파란색 눈. 엘로이즈의 눈에 너무나도 익숙했고 그렇기에 너무나도 두려운 얼굴이었다.

 

"너, 너, 너는……."

 

 엘로이즈가 뒷걸음질 치며 물러서자 남자가 다급하게 달려들듯 다가와 문을 쾅 닫았다. 닫힌 문과 남자 사이에서 엘로이즈는 두려움에 벌벌 떨며, 금방이라도 눈물을 폭포수처럼 와락 흘릴 것만 같은 얼굴로 똑같은 말만 중얼거렸다. 엘로이즈가 공포에 질려 움직이지도 못하자 남자는 천천히 오른손을 어느새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더니 물러섰다.

 적당히 뒤로 물러선 그는 크게 한 번 숨을 들이마셨다 내쉬며 눈을 감았다. 그러더니 이내 예를 갖춰 허리를 숙여 인사하며 말했다.

 

"6년 만에 인사드립니다, 엘로이즈 공주님."

 

 그가 고개를 들자 보인 것은 엘로이즈의 날아드는 손이었다. 그녀의 손톱에 남자는 미처 피할 새도 없이 뺨을 긁혔다. 핏방울이 뺨을 타고 아래로 흘러내렸다. 엘로이즈의 얼굴은 공포에서 어느새 분노로 바뀌어 그를 계속 때리며 외쳤다.

 

"네가, 네가 어째서 여기 있는 거지? 네놈이 무슨 낯짝으로 여기에 온 거야!"

"……공주."

 

 자신을 계속해서 때리는 엘로이즈의 손목을 잡으며 남자는 작게 중얼거렸다. 남자의 손아귀 힘에 엘로이즈는 감히 팔을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남자는 고개를 살짝 두어 번 가로젓고는 말했다.

 

"나는 얘기를 하러 온 거야."

"거짓말! 내 언니오빠들처럼 잔인하게 죽여 버리려고 왔겠지! 새 왕조의 개가 되어서!"

"하아."

 

 남자는 엘로이즈의 손을 놓았다.

 

"어떻게 해야 당신께 믿음을 줄 수 있겠나, 그럼?"

"나가. 당장!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마!"

"그럴 수는 없어."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난 당신을 만나러 오랜 시간동안 온 왕국을 찾아다녔어. 그런데 이렇게, 이제 와서 너를 만났거늘 날 이렇게 비참하게 쫓아내겠다고?"

 

 남자가 다가오자 엘로이즈는 뒷걸음질 쳤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등은 나무 문짝에 부딪혔다. 그러자 그녀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경비! 경비! 이 남자 쫓아내! 빨리!"

 

 얼마 지나지 않아 엘로이즈의 다급한 외침을 들은 장정들이 문을 부수듯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장정들은 어깨와 목을 풀며 금방이라도 남자를 때려눕힐 준비를 했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이정도만 해도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엘로이즈는 덩치 좋은 이방인 경비 뒤에 숨어 남자를 노려보았다. 남자는 하는 수없이 일어섰다. 경비들이 그의 팔을 붙잡자 그는 그대로 밖으로 끌려나왔다. 나가는 동안 두 명의 경비가 엘로이즈를 지켰다. 남자가 저 멀리 사라지자 엘로이즈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경비의 뒤에서 나왔다. 

 

"괜찮아?"

"고마워……. 파리드."

 

 엘로이즈는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고, 이방인은 고개만 끄덕일 뿐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러나 또다른 경비는 불안한 듯 자꾸 복도로 고개를 기웃거렸다. 그러더니 그가 중얼거렸다.

 

"저 사람……. '왕족살해자' 조슬랭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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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엘로이즈는 며칠 간 손님을 받지 않았다. 그녀는 매일 같이 울었고 자기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 매일 그녀와 친분을 맺었던 이들이 그녀를 찾아가 위로했으나 그녀의 눈물은 멈출 줄을 몰랐다.

 그녀가 틀어박혀 나오지 않는 동안, 사창가의 창부와 왈패들은 그 악명 높은 '왕족살해자'가 그녀를 두 배의 화대까지 지불해가며 찾아왔다는 사실에 이상해했다. '왕족살해자' 조슬랭 드 샤티뵈는 6년 전 옛 왕가, '드 테르누아'의 사람들을 모조리 죽이고 그 대가로 왕족의 영지였던 땅을 수여받은, 최악의 배신자이자 반역자였다. 더욱이 이상한 건 그가 엄청난 돈을 지불해가며 그녀에게 손님이 가지 못하도록 막아버린 그의 행동이었다. 손님을 받지 않아도 아무 문제 없을 정도로 많은 돈을 안긴 그를 보며 많은 이들이 엘로이즈를 부러워했지만 동시에 두려워했다. 최악의 반역자가 그녀를 자기 것으로 만든 셈이니까.

 

"엘로이즈."

 

 방에 틀어박힌 그녀에게 파리드가 방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그 사람이 또 찾아왔어. 어떡할래? 오늘도 그냥 보낼까?"

 

 조슬랭은 이틀에 한 번씩 그녀를 만나러 찾아왔으나 지금까지는 그녀가 모두 거부해 돌아갔다. 그러기를 여러 번이었다. 엘로이즈는 이불에 파묻은 얼굴을 들고 문을 보았다.

 

"엘로이즈?"

 

 그녀가 아무 말도 없자 파리드는 긴장한 목소리였다. 그가 계속 문을 두드렸다. 파리드의 머릿속에 불안한 상상이 떠올랐다.

 

"엘로이즈? 엘로이즈? 괜찮아? 엘로이즈?"

"난……. 괜찮아. 그만 두드려."

"다행이네."

 

 문 밖에서 그의 한숨이 들려왔다.

 

"어쩔 거야? 아무 말도 안 하면 그냥 돌려보낼게."

 

 파리드는 당연히 그렇게 하겠거니 생각하며 확신하듯 말했다. 지금까지 엘로이즈는 그렇게 했었으니까. 하지만 방 안에서 들려온 그녀의 말은 파리드의 그런 확신을 깨부쉈다.

 

"들여보내."

"응? 뭐라고?"

"들여보내라고. 그 사람. 조슬랭 말이야."

"괜찮겠어? 그 조 어쩌고."

"괜찮대도."

 

 파리드는 갑작스러운 엘로이즈의 심경 변화와 '왕족살해자'에 관한 수많은 안 좋은 소문 때문에 찜찜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엘로이즈의 요구를 거절한 적이 없었고 이번에도 거절하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리고 바로 앞에는 조슬랭이 서 있었다. 뒤에서 파리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소리 질러. 종을 울려도 되고. 조금이라도……."

"걱정하지 마."

 

 파리드는 엘로이즈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기는 했지만 여전히 남자를 믿을 수 없었는지 조슬랭을 노려보다가 슬금슬금 물러서더니 이내 사라져버렸다. 조슬랭은 문을 잠그고는 여전히 얼굴을 파묻은 채 눈만 살짝 들어 자신을 흘겨보는 엘로이즈의 앞에 의자를 갖다 놓고 앞에 앉았다. 그는 엘로이즈를 보며 한숨을 길게 쉬고는 말했다.

 

"열이틀이 지난 지금에라도 나를 들여보내준 건 날 믿겠다는 뜻인가?"

 

 엘로이즈는 대답하지 않았다. 조슬랭은 또다시 한숨을 쉬었다.

 

"난 그저 얘기하고 싶었어. 지금까지 너와 내가 쌓았던 기억들, 네가 없어진 후로 겪었던 많은 일들……. 왜 믿어주지를 않는 거야?"

 

 엘로이즈가 여전히 대답하지 않자 조슬랭은 고개를 숙였다. 그는 그 상태로 한참을 있었다. 무언가 생각하는 것 같기도 하고 기도하는 것 같기도 한 모습이었다. 정말이지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조슬랭이 그 자세 그대로 다시 입을 열었다.

 

"……처음 만났을 때 기억나? 대체 얼마나 오래됐을까. 거의 10년은 된 것 같아. 그래. 10년. 10년이었던 것 같네. 그때 넌 열두 살짜리 어린 꼬마 아가씨였지. 정말 귀엽고,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조슬랭은 다시 말을 멈췄다. 그는 갑자기 피식 웃었다.

 

"넌 귀엽고 재밌는 아가씨였어. 일개 근위병인 나를 졸졸 따라다니고, 장난치고, 가끔은 날 못살게 굴기도 했지. 때때로 화가 나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그렇게 기분 나쁘지는 않았어. 물론, 그때 네가 마구간의 말들을 죄다 풀어버리고는 그걸 나한테 뒤집어 씌웠을 때는 정말 위험했지."

 

 그는 끅끅 웃어댔다. 하지만 그 웃음에는 어딘가 안타까움이 묻어났다. 엘로이즈가 아무런 말이 없자 그는 그 상태로 엘로이즈의 눈치만 보다 결국 고개를 숙였다.

 

"……나는 아무런 말도 안 했어."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엘로이즈가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목소리에 조슬랭은 살짝 놀란 얼굴을 하며 고개를 들었다. 

 

"난 그저 널 바라보았을 뿐이야. 다른 사람들이 오해한 거고."

"……그랬지. 그것 말고도 넌 많은 거짓말을 했었지만."

"넌 바보처럼 다 속아 넘어갔었고."

 

 조슬랭은 피식 웃어보였다. 그러고 그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어느새 그의 얼굴엔 그의 상처투성이 손이 올라가있었다. 눈가를 만지는 그의 손은 언뜻 보면 눈물을 닦아내는 것 같기도 했다. 그가 그 상태로 말이 없자 엘로이즈가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그가 말이 없자 이번엔 엘로이즈가 입을 열었다.

 

"공주를 대하는 예의는 다 어디로 팔아먹은 거지, 조슬랭 드 샤티뵈? 아무리 내가 지금은 길거리를 쏘다니는 거지와 한량에게도 몸을 파는 천한 창녀라고 하지만 한 때 나는 네 공주였고 너는 지금도 나를 공주로 부르고 있는데. 말과 행동이 다르다니, 근위병답지 않은걸."

 

 조슬랭이 대답했다. 

 

"……난 이제 근위병이 아니야. 너도 이제 공주가 아니고."

 

 조슬랭은 그러면서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공주께서 원하신다면 언제든지 그때처럼 돌아가겠습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그녀에게 인사했다.

 

"조슬랭 드 샤티뵈, 다시 한 번 엘로이즈 공주님께 인사드립니다."

"좋아. 이제 보기 좋네. 앉아도 좋아. 경어는 생략하도록."

 

 엘로이즈는 후후 웃었고 조슬랭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는 이번엔 고개를 뻣뻣이 들고는 엘로이즈를 바라보았다. 예전 그때처럼. 그러자 엘로이즈가 회상에 잠기며 중얼거렸다.

 

"옛날 일이 자꾸 떠오르네. 왕실 무술 경기를 할 때가 기억나. 멀리서 보는 넌 꽤나 대단했었어. 어디 대단한 가문 출신도 아닌 네가 온갖 귀족들을 다 쳐부수고 당당히 승리하는 그 모습……."

"그래. 정말이지 대단했지. 그때는."

"하지만 결국 우리 오빠에게 졌잖아. 참 바보 같이."

 

 엘로이즈의 머릿속에 그 옛날의 모습이 떠올랐다. 무참히 패배하고 바닥에 쓰러져 항복을 외치는 바보 같고 한심한 모습. 그녀가 기억하는 조슬랭은 그런 사람이었다. 

 

"하하……. 왕자님도 참 무자비하시더라고. 바닥에 쓰러져서 기는 나를 그렇게 내리쳐서 죽일 기세로 싸우셨으니."

"맞아. 그러고 보니 너 항복을 외친 다음 그대로 기절했잖아."

 

 조슬랭의 머릿속에도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루이 왕자가 든 무기는 날을 죽인 칼이었으나 위험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서로 갑옷을 입고 있었다하더라도 조슬랭은 그때 정말 죽는 게 아닐까하는 두려움을 느꼈다. 정신을 잃기 전 흐려지는 눈빛이 그에게 떠올랐다. 그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이제 와서는 웃을 수 있는 일이니까. 그는 다시 고개를 들고 엘로이즈를 바라보았다.

 

"깨어나니까 네가 있었지. 눈이 잔뜩 부어있었어. 울었던 모양이야."

"거짓말."

"내 기억이 잘못됐을 수도 있지. 하지만 난 그렇게 기억해. 넌 슬퍼하고 있었고 울고 있었어. 그리고 내 입가를 닦아줬었어."

"손수건으로."

 

 조슬랭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엘로이즈가 말을 덧붙였다.

 

"그건 네가 나한테 줬던 거였어. 인형이 없어졌다고 울던 내 얼굴을 닦아줬던 거잖아. 뭐라고 말했더라. '아름다운 얼굴로 엉엉 울고 있는 걸보자니 참으로…….'"

"참으로 못나 보인다고, 그렇게 얘기했어. 나를 아주 힘껏 때리더군."

"그래서 내가 돌려줬잖아. 내 이름 새겨가지고."

 

 생각에 잠긴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만면에는 웃음기가 가득했다. 그는 하 소리를 내며 의자 등받이에 기대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하아. 공주가 자기 이름을 손수 새긴 손수건이라니.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정말 대단한 물건인데."

"그래서. 어쨌어?"

"뭐가? 손수건?"

 

 엘로이즈는 약간의 살짝 기대를 담은 눈으로 옛 근위병을 바라보았다. 근위병은 한숨을 쉬더니 이윽고 급격히 어두워진 표정을 지었다. 그는 웅얼거리며 말했다.

 

"……잃어버렸어."

"뭐라고?"

"잃어버렸다고……. 6년 전에"

 

 6년 전. 그 이야기가 나오자 마치 얼음 그 자체를 방 곳곳에 끼얹은 듯 순식간에 공기가 얼어붙었다. 조금이나마 웃음기를 띄고 있던 엘로이즈의 얼굴은 어느새 6년 전 그때와 같이 슬픔과 공포와 분노로 감히 무어라 얘기하기 어려울 정도의 얼굴이었다.

 

"그때……."

 

 엘로이즈의 얼굴을 본 조슬랭은 그 얘기를 꺼낸 것을 깊이 후회했다. 그녀는 금방이라도 분노를 터트릴 듯 조슬랭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녀가 입을 열기 전에 조슬랭은 손을 내저었고 그녀는 입을 멈추었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 일은 입 밖에 꺼내지 않도록 하자고. 얘기하기 싫은 건 피차일반이잖아."

 

 엘로이즈는 무어라 말하려고 했으나 조슬랭의 말에 이내 입을 다물었다. 그는 등받이에 머리를 기댔다. 그러고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두 사람은 한참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조슬랭도 엘로이즈도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길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 뒤로도 한참, 조슬랭은 침묵을 깨고 옅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때 그 일들이 끝나고……. 너 혼자 살아남아 베랑게르 공 앞에 끌려왔을 때, 그는 네게 자신과 혼인하면 살려주겠다고 했었잖아. 그때 네가 그렇게 외쳤지. '너 따위와 결혼해서 정통성을 위한 도구가 되느니…….'"

"차라리 창녀가 되겠다고. 그렇게 말했지……."

"그 말이 정말로 이루어지다니. 세상 앞날은 알 수 없는 것이로군."

"내가 선택한 거야."

 

 조슬랭은 등받이에서 뒤통수를 떼고 엘로이즈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무릎을 끌어 모은 채 얼굴을 파묻은 상태로 말했다.

 

"어차피 바느질 같은 것 말고는 할 줄 아는 것도 없었어."

"슬프지 않아?"

 

 조슬랭이 물었다.

 

"가장 아름답고 총명하고 또 고귀했던, 그래서 이 나라의 보석이라고 여겨지던 네가, 이름도 모를 하찮은 쓰레기들에게 몸을 내주고 있는데. 다른 사람이 보기엔 상상도 못할 정도로 비참한 일이잖아. 하늘 높이 있던 네가, 지옥 밑바닥까지 떨어져버렸는데."

"아니."

 

 그녀는 조금의 주저도 없이 대답했다.

 

"여기서는 자유로이 있을 수 있어. 그래, 처음엔 많이 힘들었지. 하지만 금세 괜찮아지더라고. 여기서의 난 그때처럼 사랑받는 사람이야. 그 사랑의 형태가 조금……. 다를 뿐인 거고. 아니, 같을지도 모르겠네. 그때도……."

 

 그녀는 순간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고 조슬랭의 표정도 급격히 어두워졌다. 조슬랭은 눈가를 문지르며 말했다.

 

"그런 말은 말아."

"어쨌든. 여기는 왕궁과 달라. 내 겉모습과 내가 하는 일은 하찮고 처량할지 몰라도 여기에서 난 그 누구보다 더 행복하다고. 내가 불행하다고 얘기하지 마. 불행하다고 생각하지도 말고. 난 행복해. 자유로워. 공주로서의 나보다 훨씬 더. 너 역시 근위병으로서의 너보다 지금이 훨씬 더 행복하겠지. 안 그래? 더 많은 부, 더 많은 권력……. 무엇보다 널 괴롭히는 꼬마도 없고."

"……아니."

 

 조슬랭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모든 걸 잊고 지금을 즐기면 행복할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는데. 딱히 그러지도 않더군. 뭐, 아무래도 좋아. 이러나저러나 의미 없으니까."

 

 말을 끝낸 그는 말없이 창밖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해는 졌고 사방은 깜깜했다. 오늘은 아무런 일도 없는지 도시는 조용했다. 불이 켜진 집은 거의 없었다. 저 멀리 있는 시장 관저도 새벽처럼 최소한의 불빛만 보였다. 밖을 한참 보던 조슬랭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야겠네."

 

 엘로이즈는 대답 없이 조슬랭을 그저 보고만 있었다. 조슬랭 역시 딱히 대답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으나 아무 말도 없는 그녀에게 실망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는 뒤돌았다. 그때까지 엘로이즈는 말이 없었다. 그의 손이 문짝에 닿았다. 뒤에서 이불이 걷히는 소리가 들렸다. 조슬랭이 그 소리를 무시하고 나가려는데 여인의 손길이 거친 그의 왼손을 붙들었다.

 

"그거 알아? 난 아직도 네가 증오스러워. 하지만 오늘은 손님으로 온 거니까."

 

 조슬랭이 뒤돌았을 때 그는 그 옛날의 모습이 조금이나마 느껴지는 여인이 눈에 들어왔다.

 

"그저 직업적인 이유일 뿐이야."

 

 엘로이즈는 까치발을 들며 조슬랭의 까슬까슬한 입에 그녀의 보드라운 입을 맞추었다. 조슬랭은 그녀의 입에 자신에게 닿는 순간 온몸이 마비되는 것만 같았다. 그는 옛날 근위병처럼 공주의 말과 행동 하나하나에 순응할 수밖에 없었다. 엘로이즈가 그를 침대로 끌어오자 조슬랭은 정신을 잃은 사람과도 같이 멍청하게 누워있을 뿐이었다.

 

=========

 

 보름이 지나도록 조슬랭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엘로이즈에게 매일 오는 화대는 끊이지 않아서 그녀는 굳이 일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녀는 단순하게 시간을 보내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는 조슬랭이 왜 보름이 지나도록 나타나지 않는지 궁금해 했다. 걱정하는 게 아니야,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왠지 모르게 자꾸 조슬랭의 얼굴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조슬랭이 나타나지 않은지 열엿새 되는 날이었다. 도시 야경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발코니에서 차를 마시던 그녀에게 파리드가 다가왔다. 파리드는 그녀에게 요깃거리를 가져다주며 말했다.

 

"그 양반이 찾아왔어."

"누구?"

"조 어쩌고 말이야. 전에 왔던."

"조슬랭?"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파리드는 벌떡 일어난 그녀를 보고 놀라 뒷걸음질 치고는 한숨을 한 번 쉬었다.

 

"놀랬네."

"그, 그래. 마침 잘 됐네. 들여보내."

 

 파리드는 고개를 한 번 까딱이더니 말했다.

 

"그 녀석 표정이 영 안 좋던데."

"응?"

"어딘가 불안해보이고 어두워보였어. 그냥 보내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아니야. 괜찮아. 그 녀석이 날 해할 리는 없어."

 

 엘로이즈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분명 괜찮을 거야……."

 

 파리드는 쯧, 혀를 한 번 차고는 말도 없이 뒤돌아 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조슬랭이 방문을 열고 나타났다. 그는 엘로이즈를 보고는 한 번 예를 갖춰 인사하더니 천천히 다가와 엘로이즈의 앞에 앉았다. 과연 파리드의 말대로 그의 표정은 굳어있었다. 그 표정은 슬프기 보다는 불안하다는 느낌의 어두움이었다. 그는 엘로이즈를 한 번 보더니 무어라 말하려 입을 잠깐 열었다 다시 닫았다. 그러고는 엘로이즈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것이었다. 엘로이즈는 그의 모습을 보고는 그녀 자신도 불안해졌다. 그가 무슨 말을 할지, 무슨 짓을 할지 아무도 모르니까.

 

"무슨 일이야? 왜 그런 표정을 하고 있어?"

 

 엘로이즈의 물음에 고개를 숙인 채 가만히 있던 조슬랭이 퍼뜩 정신을 차리며 고개를 들었다. 그는 손을 가만두지 못하며 말을 못하고 있었다.

 

"빨리 말해."

"……그래. 알았어."

 

 조슬랭은 결심한 듯 눈을 감은 채 한 번 크게 심호흡하고는 다시 눈을 떴다. 그는 엘로이즈를 똑바로 쳐다보며 얘기를 시작했다.

 

"왕이 죽었어."

"……베렝게르 왕이?"

 

 조슬랭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까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곧 찬탈자 베렝게르가 후사도 없이 죽었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지겠지. 그럼 그가 그랬듯이 많은 이들이 왕의 자리에 도전할 거야. 한참 전의 가계도를 뒤져가면서 왕이 될 이유를 댈 테고. 이 나라는 또다시 내전에 빠질 거야."

 

 엘로이즈는 아무런 말도 없이 그저 조슬랭을 놀란 얼굴로 바라 보고 있었다.

 

"널 찾은 건 그 때문이었어."

 

 조슬랭은 엘로이즈의 손을 잡았다. 그녀는 화들짝 놀라며 손을 빼려 했으나 조슬랭의 손은 너무나도 강했다. 그는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

 

"엘로이즈 드 테르누아. 6년 전 반란에서 죽은 클로드 왕의 마지막 딸. 너야말로 이 나라의 왕위에 앉을 자격이 있어. 네가 왕에 올라야 해."

"……뭐라고?"

 

 엘로이즈는 조슬랭의 손아귀에서 손을 강하게 뺐다. 그녀의 놀란 얼굴은 점점 분노로 붉어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조슬랭은 꿋꿋이 그녀에게 같은 말을 반복했다.

 

"이 나라는, 우리는, 나는……. 네가 필요해. 나와 함께 싸우자, 엘로이즈."

 

 그러면서 조슬랭은 허리에 찼던 칼을 칼집 채로 허리띠에서 풀고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 칼은 다름 아닌 엘로이즈의 아버지인 클로드의 것이었다.

 

"이 칼을 잡고서……."

"……헛소리 마."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녀는 금방이라도 칼을 뽑아 조슬랭의 목을 칠 것만 같은 분노의 표정으로 조슬랭을 보고 있었다.

 

"그때……. 넌 우리를, 나를 배신했어."

"그건……."

"그때 그렇게 우리 가족을 죽여놓고, 내 앞에서 그토록 잔인하게 내 언니오빠를 살해해놓고……. 이제 와서 뭐라고?"

 

 그녀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더니 조슬랭의 뺨을 후려쳤다.

 

"……내 말 좀 들어봐, 엘로이즈."

"네가 무슨 말을 하든 상관없어. 넌 나를 배신하고 그 반역자 놈에게 붙어서 우리 가족을 다 죽였어! 다른 사람도 아닌 바로 내 앞에서! 난 널 믿었는데! 너야말로 우리 가족을 지켜줄 거라고 그렇게 믿었었는데! 네 손에 묻은 그 피는 지금은 말랐겠지만 내 가슴속에 있는 그 핏자국은 아직도 흐르고 있다고!"

 

 엘로이즈는 불같이 말을 토해내고는 숨조차 쉬기 어려운지 거칠게 숨을 토해냈다. 어느새 그녀의 얼굴에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조슬랭은 고해성사하는 선 죄인처럼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네 손에 죽어간 불쌍한 사람들은 또 어떻고? 네 칼끝에 묻은 피에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들의 것도 있었어. 네가 지난 6년 동안 베렝게르 그 자식을 위해 수없이 짓밟은 사람들에 대해선 뭐라고 변명할 생각이야?"

 

 조슬랭은 얼굴을 문질렀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길게 숨을 토해내고는 그제야 그가 하고 싶었던 말을 내뱉었다.

 

"모든 건, 모든 건 널 위해서였어."

 

 조슬랭의 말에 엘로이즈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뭐?"

 

 조슬랭은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그의 눈가에도 눈물이 가득했다. 그는 울먹이며 말했다.

 

"널 위해서였다고."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조슬랭은 고개를 두어 번 가로저었다. 그는 눈물을 닦곤 자리에서 일어나 엘로이즈에게 다가갔다. 그가 다가올 때마다 엘로이즈가 조금씩 뒤로 물러섰고 그녀는 결국 뒤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조슬랭은 그녀 앞에 무릎 꿇고 앉아 그녀에게 말했다.

 

"그래……. 난 바보였어. 바보처럼 계속 네게 속았어. 네가 그런 비참한 얼굴로 국왕의 부름에 응하는 것을 보고도, 그건 그저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저 병간호일 뿐이라고, 그런 지나가는 3살 짜리 꼬마도 속지 않을 거짓말에 속아 아무것도 하지 못했어."

"……그 이야기는 하지 마."

 

 조슬랭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네 아비도 네 오라비들도 다 너를 고통스럽게 하고 괴롭혔는데도, 너를 딸이나 동생이 아니라 첩 따위로 여겼는데도, 나는 널 도와주기는커녕 네 거짓말에 속아 아무 일도 없었다고 생각했어. 애초에 내가 너의 말에 속지만 않았더라도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거야."

 

 그러면서 조슬랭은 어둠이 들어선 그녀의 얼굴에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녀는 이번에는 물러서지 않은 채 거칠고 상처투성이인 옛 근위병의 손길이 자기 얼굴을 어루만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어느새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조슬랭 역시 울먹이며,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낼 것만 같은 얼굴로, 슬픔 가득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속삭였다.

 

"그때 널 구했다면 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겠지. 미안해. 정말로……."

 

 엘로이즈는 눈물을 흘렸다. 그녀는 눈물을 토해내듯 오열했다. 조슬랭이 그녀의 눈가에 손을 갖다 대자 그녀는 거칠게 그 손을 뿌리치며 외쳤다.

 

"그 더러운 손 치워! 나를 위해서 그랬다는 건……. 좋은 변명이 아니야! 난……. 넌……. 왜, 왜……."

 

 그녀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감을 못 잡는 모양이었다. 조슬랭은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 역시 어떤 말을 해야 그녀를 안심시키고 눈물을 닦아낼 수 있는지를 몰랐다. 그녀는 바로 앞의 조슬랭을 주먹으로 마구 내리치며 말했다.

 

"왜, 왜 내 앞에 나타난 거야! 어째서! 나는 행복하게 잘 살고 있는데……. 이제야 그 악마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자유로워졌다고, 이제는 두려워 할 필요 없다고, 그렇게 믿었는데……. 왜 다시 나타나서 나를 괴롭히는 거야……. 제발……. 제발 꺼져……. 내 앞에서 당장 사라지라고……."

 

 그녀가 크게 소리치자 조슬랭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차마 표현하기도 어려운 슬픈 표정을 지으며 엉엉 우는 엘로이즈를 한 번 끌어안았다. 그의 옷이 엘로이즈의 눈물로 가득 젖어버린 후에야 그는 눈물을 멈출 기미가 없는 그녀를 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길게 한숨을 내뱉고는 탁자 위에 올려놓았던 칼을 들고 방 바깥으로 사라졌다.

 방 밖으로 나온 그의 뒤에, 안에서 여전히 엘로이즈의 울음이 들려왔다. 조슬랭은 그걸 무시하고 갈 용기가 없어서, 그저 문에 등을 기댄 채 바닥에 주저앉아, 억지로 소리를 막으며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

 

 내전의 참화가 도시를 덮쳤다. 조슬랭이 경고한 대로 많은 이들이 왕위를 노렸고 그 결과는 내전이었다. 이 나라의 사람들은 누군가를 선택해야 했고 이 도시는 시장의 잘못된 선택으로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홍등가의 여인들은 도시까지 쳐들어온 화를 피해 짐을 싸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언제나 괴악한 손님들로부터 그녀들을 지키던 깡패와 용병들도 강철과 화약과 명백한 살의 앞에서는 어린애처럼 무기력하게 벌벌 떨 수밖에 없었다.

 엘로이즈 역시 사창가를 떠나야 했다. 그녀는 조슬랭이 준 돈으로 배를 살 수 있었고 사람들과 함께 그쪽으로 떠날 준비를 했다.

 

"모두 준비됐어?"

 

 파리드가 건물 안으로 들어서며 외쳤다. 굳이 대답을 들을 필요는 없었다. 엘로이즈를 필두로 건물 안의 모든 사람들이 한데 모여 있었다. 그때였다. 포탄 하나가 건물을 뚫고 사람들이 있는 곳 위에 바로 떨어졌다. 그들은 혼비백산하여 질서를 잃고 밖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엘로이즈는 그들의 물결에 밀려 이리저리 휩쓸려갔다.

 

"파리드!"

"여기야! 엘로이즈!"

 

 그녀는 이방인의 손을 잡아 무질서의 파도에서 빠져나왔다. 그녀는 그녀와 친분이 있는 어린 창부의 손을 같이 맞잡고 파리드의 인도를 따라 부두로 향했다.

 그곳은 이미 도망치려는 사람들로 혼란 그 자체였다. 지옥의 모습을 그리라고 한다면 이곳을 배경으로 삼는 게 어울릴 정도였다. 엘로이즈는 급하게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돈을 내지 않았음에도 배에 뛰어오르려고 안간힘을 쓰는 사람들을 막는 선원들과 그 뒤에 돛을 내리고 출항 준비를 하는 배 한 척이 보였다. 엘로이즈의 배였다.

 

"저기야! 빨리!"

 

 셋은 사람들을 뚫고 배로 향하려고 했으나 사람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벽은 감히 뚫을 수가 없었다. 파리드는 안간힘을 쓰다가 결국 하는 수 없이 허리춤에 찬 총 한 자루를 뽑아 하늘에다 겨눴다. 그리고 방아쇠를 당겼다.

 폭음을 신호로 사람들이 썰물처럼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 틈을 타서 파리드가 재빨리 둘을 데리고 배로 향했다. 세 사람이 선원들을 뚫고 배 위에 올라타는 순간 뒤에서 함성과 함께 침략군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마구잡이로 사람들을 향해 칼을 휘두르고 총과 활을 쏘아댔다. 안 그래도 시끄럽고 혼란스럽던 부두는 지옥 그 자체로 변하고 말았다.

 세 사람은 끔찍한 참상을 그녀가 조슬랭의 손을 잡지 않은 결과를 눈앞에서 똑똑히 지켜보았다.

 

=========

 

 오랜 시간이 지났다. 이 사막 땅에 온지 거의 3년은 지났을 것이었다. 파리드는 고향을 찾아 다시 떠났으나 엘로이즈와 어린 소녀는 처음 도착한 해안 도시에 남았다. 처음엔 힘들었다. 그러나 그녀들은 그녀가 샀던 배를 시작으로 상단을 일으켰고 이윽고 성공해 부유해졌다. 그녀, 엘로이즈의 상단은 어느새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여전히 전란이 멈추지 않는 고향에서 세 사람이 그녀를 찾아왔다. 자리에 앉아 세 살이 된 그녀의 아들을 소녀와 함께 돌보던 그녀는 손님이 왔다고 말하는 하인의 말을 듣고 그들을 들여보냈다.

 남자 둘 여자 하나로 이루어진 셋. 그들은 하나같이 얼굴에 끔찍했던 그동안의 시간을 새긴 모양이었다. 그들은 어두운 얼굴을 한 채 밝은 얼굴의 엘로이즈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를 찾아오셨다고요?"

 

 셋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가장 왼쪽에 앉아 있던, 연장자로 보이는 남자가 말했다.

 

"조슬랭 경을 기억하십니까?"

"……조슬랭 드 샤티뵈?"

 

 셋은 또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한숨을 쉬더니 옆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아이와 노는 소녀를 돌아보았다.

 

"카트린. 잠깐 자리 좀 비켜줄래?"

"네, 엘로이즈."

 

 소녀는 아이를 안고 자리를 나섰다. 그러자 자리에 앉았던 남자 하나가 소녀를 따라 나섰다. 두 사람이 아이를 데리고 노는 동안 남은 둘은 엘로이즈와 얘기를 나누었다.

 

"저 아이……. 파란색 눈이군요. 당신의 눈은 갈색인데요."

"무슨 말을 하려는 거죠?"

 

 엘로이즈는 대답을 회피했다. 그러자 여자가 허리에 찼던 칼을 칼집째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 칼은 평범한 장검이었으나 그 칼집 끝에는 노란색 손수건 하나가 묶여 있었다.

 

"이건……."

"조슬랭 경의 검입니다."

 

 여자는 슬퍼하는 기색을 보이며 말을 이었다.

 

"반 년 전에……. 조슬랭 경께서 전사하셨습니다. 경께서 돌아가시기 직전에 당신을 찾아가라고 하시더군요."

"아……."

 

 엘로이즈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대답했으나 그녀의 놀란 얼굴을 숨길 수는 없었다. 그러자 이번엔 남자 쪽이 말했다.

 

"경께서 이런 말도 하셨습니다. 엘로이즈 양을 찾아뵈면 이렇게 말하라고 했죠. 다시 네 자리에 오르는 걸 원한다……. 라고요."

"엘로이즈 양. 아니, 엘로이즈 공주님."

 

 여자가 말했다.

 

"제발, 왕국은 무너지기 직전입니다."

"조슬랭 경께서 모시던 이들도, 그분과 적대하던 이들도, 이젠 다 죽었습니다. 하지만 내전은 끝이 나질 않습니다. 왕을 사칭하는 이들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엘로이즈 공주님. 다시 돌아와 왕위에 앉아주십시오."

 

 하지만 엘로이즈는 고개를 저었다.

 

"저는 공주가 아니랍니다. 공주가 몸을 얼마나 험하게 굴렸으면 아비도 모를 아이가 있겠어요? 게다가 저는 그 나라에 대한 좋은 기억이 없어요. 왕국이 무너지든 말든 상관하지 않아요. 난 돌아가지 않을 거예요."

"공주님……. 제발……."

 

 남자가 엘로이즈에게 매달리듯이 말함에도 그녀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그녀는 확고했다. 다만 그녀의 눈은 어디서 많이 본 노란색 손수건에만 머물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을 느낀 여자는 칼집 끝에 묶인 노란 손수건을 풀며 입을 열었다.

 

"전 조슬랭 경의 시녀였습니다. 그분께서 베렝게르 왕의 근위대장이자 대귀족으로서 작위를 받은 후로 쭉. 아, 그분께선 정말 제게 잘해주셨죠. 저를 비롯한 수많은 이들에게 조슬랭 경은 부하나 하인으로서 만날 수 있는 최고의 사람이었으니까요.
 조슬랭 경의 얼굴은 언제나 어두웠고 언제나 슬퍼하는 눈치였습니다. 베렝게르를 위해 하는 수많은 악행을 하면서 자신이 쌓은 죄악을 두려워하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3년 전부터, 베렝게르가 죽은 후로 내전이 났을 때……. 그분께선 이름도 모를 사람들을 위해 싸웠습니다. 왕궁은 어느새 가난하고 힘 없는 사람들을 위한 집으로 바뀌었죠. 속죄를 위해서, 조슬랭 경께선 싸우셨습니다. 저 같이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 힘도 없는 사람을 위해 싸우고 제게 대항하는 법을 가르쳐주셨습니다. 그것 때문에 돌아가셨지만…….
 저는 그런 그분을 사랑했습니다. 저는 이름 없는 지방 귀족의 딸이고 아무런 힘도 배경도 없는 사람이지만 감히 그분의 얼굴을 보며 사랑을 꿈꿨지요. 하지만 그분께선 항상 단 한 분만을 생각하고 계셨습니다. 그건 제가 아니었어요.
 그분은 언제나 그 노란 손수건을 소중히 여기셨습니다. 처음에 전 칼에 묻은 피를 닦아내려고 일부러 한 건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습니다. 언제 한 번은 제가 무례하게 그분께 물은 적이 있었죠. 대체 그 손수건이 뭔지. 그분께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자기가 속죄해야 하는, 사랑하는 사람이 남겨준 유일한 것이라고."

 

 어느새 여인은 노란 손수건을 풀어 좌우로 펼쳤다. 생각 외로 큰 손수건은 정말 오래된 물건이었는지 군데군데 헤지고 낡은 티가 났었다. 허나 하나 확실한 것은 그 노란 손수건은 엘로이즈에게 낯익은 물건이라는 것이었다.

 

"그분께선 외롭고 힘들 때마다, 슬플 때마다 그 손수건을 풀어서 거기 적힌 이름을 부르며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매일 같이 들을 수 있었던 이름이었죠. 엘로이즈……."

"……드 테르누아."

 

 엘로이즈는 여인의 말을 끊으며 대신 자신이 말을 이었다. 어색한 침묵이, 슬픈 침묵이 이어졌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여자가 다시 말을 꺼냈다.

 

"조슬랭 경께서 엘로이즈 공주님께 한 짓은, 살아오면서 쌓은 죄악은 오직 신만이 용서할 수 있는 악행임이 확실합니다. 조슬랭 경께서도 자신이 용서받을 수 없음을, 지옥에 떨어질 것임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속죄를 위한 노력마저 저버리는 건 잔인한 일이 아닌가요?"

 

 여인은 엘로이즈의 앞에 그 노란 손수건을 두었다. 엘로이즈는 떨리는 손으로 그 손수건을 쥐었다. 색깔. 촉감. 그리고 Eloise de Ternois라는 글씨. 모두가 그 옛날 그녀가 조슬랭에게 주었던 그것, 조슬랭이 잃어버렸다고 한 그것이었다. 엘로이즈의 눈에 어느새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폭포처럼 눈물을 흘리는 그녀를 보며 여자가 다시 말했다.


"공주님……. 저희가 공주님께 강요할 권리는 없습니다. 왕과 나라를, 백성을 위해 싸워야할 의무도 공주님께는 없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그런 고상한 것들 위해서가 아니라, 죽는 순간까지 공주님을 사랑했고 기억했고 속죄하려던 조슬랭 경의 순수했던 마음을 위해 싸워주셨으면, 그래서 이 칼을 잡고 그분의 속죄를 마무리 해주셨으면, 하고 바랄 뿐입니다."


 그렇게 남자도 여자도 입을 다물었다. 그 긴 침묵 동안 엘로이즈는 흐르는 눈물을 손으로 닦아냈다. 그녀는 루비처럼 붉어진 눈으로 그녀의 아들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과 함께 노는 아무것도 모르는 그녀의 아이. 그 너머로 석양이 지고 있었다. 그 석양 위에 옛 모습이 떠올랐다. 석양을 등지고 선 근위병 조슬랭을 바라보던 공주로서의 자신이. 언제나 자신을 위해 헌신 하겠다 맹세하던 그의 모습이. 

 엘로이즈는 다시 탁자 위에 놓인 그의 칼을 내려다보았다. 낡고 닳은 칼집과 손잡이가 지난 3년간을 말해주고 있었다. 칼을 바라보던 그녀는 눈을 감은 채 길게 심호흡했다.


 그녀는 칼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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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즈베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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