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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7.02.28 열쇠의 기사 03.
  2. 2017.01.19 열쇠의 기사 02.
  3. 2016.12.09 열쇠의 기사 01.
  4. 2016.10.23 열쇠의 기사 00.

열쇠의 기사
The knight of the key

03. 오펜슈타인의 섭정 3

 토비아스는 분노에 찬 소리를 내지르며 펠리페에게 달려들었다. 펠리페는 공격을 피하며 케리스에게 소리쳤다.

“카를을 보호해!”

 케리스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칼을 거두고 판매대 뒤로 폴짝 뛰어 넘어갔다. 그러자 펠리페는 다시 정신을 눈앞의 노병에게로 집중했다. 토비아스의 새빨간 얼굴에선 펠리페의 출신에 대한 비이성적이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지극히 이성적인 증오가 뿜어져 나왔다. 그는 그 증오를 가득 담아 다시 한 번 크게 칼을 휘둘렀다. 펠리페는 반사적으로 오른손에 쥔 칼을 반대로 휘둘러 쳐냈다. 공격을 막기는 했으나 얇은 칼날을 통해 전해지는 충격에 펠리페의 손목이 부러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는 고통을 참으며 왼손에 든 막대기로 토비아스의 얼굴을 후려쳤다. 토비아스는 악 소리를 내며 비틀거렸고 그는 그 틈에 상대의 얼굴을 향해 칼날을 뻗었다. 그러나 토비아스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틀었고 칼날은 살갗만 살짝 긁을 뿐이었다.
 펠리페는 지끈거리는 손목을 문지르며 물러섰다. 토비아스는 주룩 피가 흐르는 뺨을 막으며 눈짓했고 그러자 기다리던 라우레니엔 병사들이 펠리페를 향해 달려들었다. 장검과 미늘창을 든 둘은 능숙하게 서로를 보호하며 펠리페를 공격했고 또 기회를 주지 않았다. 뒤로 물러나던 그는 예상치 못하고 탁자에 걸려 넘어졌다. 그러자 그의 머리 위로 섬뜩한 창날이 떨어졌다. 펠리페는 황급히 몸을 틀었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그가 누워있던 탁자가 박살났고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펠리페는 팔로 얼굴을 가리며 소리쳤다.

“케리스!”

 펠리페의 외침을 들은 케리스는 고개를 들었다. 계산대 뒤에 숨어 벌벌 떠는 여급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케리스가 다가가자 여급은 공포로 떠는 눈을 케리스에게로 돌렸다. 그러자 그녀는 아이를 여급에게 안겼다.

“여기 가만히 있어요!”
“네?”

 케리스는 대답 대신 허리춤에서 차륜식 권총을 뽑아 들더니 화약을 다시 재며 계산대 너머를 흘낏 쳐다보았다. 펠리페는 여전히 무자비한 공격을 피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고개를 숙인 그녀는 눈을 감고 깊게 한 번 심호흡했다. 그리고는 재빠르게 몸을 일으키더니 미늘창 든 병사를 향해 권총을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다. 화약 접시에서 불꽃이 피어오르고 엄청난 굉음이 뒤따르며 여관을 뒤흔들었다. 동시에 창날을 내지르려던 병사가 비명을 지르며 몸을 꼬았다. 그러자 장검 든 병사는 당혹스러움에 어찌할 줄을 모르고 주춤했고 펠리페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펠리페는 왼손에 든 막대기를 장검 든 병사에게 던졌다. 그가 반사적으로 얼굴을 가린 틈에 펠리페는 미늘창 든 병사에게로 전진했다. 그는 고통에 신음하면서도 힘겹게 창대를 들었다. 그러자 펠리페는 몸을 날리듯 앞으로 나아가 왼손으로 창대를 강하게 붙들고는 병사의 목덜미를 향해 칼을 뻗었다. 칼날이 살갗을 찢으며 쑥 들어감을 느끼자마자 펠리페는 칼에서 손을 떼었고 병사는 짧은 단말마를 내뱉으며 뒤로 넘어갔다. 펠리페는 멈추지 않고 두 손으로 창대를 꽉 쥐더니 몸을 틀며 미늘창을 크게 휘둘렀다. 장검 든 병사는 옆으로 몸을 날리며 피했다. 그러자 펠리페는 창을 겨누며 자세를 가다듬었다.
 그러는 동안 케리스는 토비아스와 맞서고 있었다. 그녀가 총을 쏜 순간 토비아스는 그녀의 손목을 향해 두꺼운 펄션을 휘둘렀다. 케리스는 아슬아슬한 순간에 손을 내려 피했고 칼은 허공을 가르더니 애꿎은 판매대만 반으로 쪼갰다. 놀람을 애써 숨기면서 그녀는 왼손에 총을 거꾸로 쥐고 오른손으로 칼을 뽑아 상대를 겨누었다. 하지만 그녀는 선뜻 칼을 내지를 수는 없었다. 그녀의 손목만큼 가냘픈 칼날은 토비아스가 힘을 주어 쳐내는 순간 칼날과 함께 손목을 부러트릴 게 분명했다. 그녀는 이리저리 자세를 바꾸고 움직이며 상대가 틈을 내주기를 바랐다.
 갑자기 토비아스가 펼선을 왼쪽으로 쭉 빼고는 오른발을 내밀었다. 케리스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칼날을 앞으로 뻗었다. 동시에 토비아스는 강하게 사선으로 칼을 휘둘렀다. 두 칼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부딪쳤고 두 사람의 입에서 짧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케리스는 손목이 부러질 것 같은 고통과 함께 허전함을 느꼈다. 그녀의 칼은 어느새 멀리 저편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당황하지 않고 왼손에 든 총으로 토비아스의 얼굴을 강하게 후려쳤다. 토비아스는 비명을 지르며 비틀거렸다. 그러나 케리스가 한 번 더 권총을 휘두르려는 순간 토비아스가 그녀의 왼쪽 손목을 붙잡고 힘을 주어 비틀었다. 이번에는 케리스가 비명을 질렀다. 토비아스는 비웃음을 흘렸다.

“그렇게 계속 울어라 이 망할 년아!”

 그가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칼을 높이 들었다. 케리스의 팔을 내려쳐 잘라내려는 의도가 분명했다. 그녀는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그녀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케리스는 왼 다리에 무게를 싣고 오른 다리를 크게 들어 올리더니 토비아스의 얼굴을 걷어찼다. 얼굴에 가해지는 충격에 토비아스는 무의식적으로 케리스의 손을 놓았다. 그리고 케리스는 그대로 바닥에 떨어졌다. 그녀는 이를 꽉 물고 고통을 삼키며 다시 일어섰다. 토비아스는 여전히 비틀거리고 있었다. 케리스는 짧게 기합을 내지르며 토비아스의 오른손을 걷어차 칼을 쳐냈고 이어 쉬지 않고 발차기를 날렸다. 그렇게 한 번 두 번 걷어차고 세 번째, 갑자기 토비아스가 그녀의 다리를 붙잡았다. 그녀가 당황한 얼굴로 토비아스를 바라보자 그는 씩 미소를 짓더니 그대로 그녀를 휘두르듯 옆으로 날려버렸다. 케리스는 비명도 한 번 제대로 못 지르고 탁자와 의자를 부서트리며 바닥에 처박혔다. 하지만 토비아스는 멈추지 않고 잔해 위에서 피를 토해내는 케리스의 가슴팍에 올라타더니 그녀의 얼굴을 마구잡이로 내리치기 시작했다.
 한편 펠리페는 눈앞의 상대에게 잠깐의 틈도 주지 않고 계속 공격을 가했다. 칼이 닿지 않는 거리에서 벌이는 그의 날랜 찌르기에 장검 든 병사는 피하고 쳐내기를 반복할 뿐 감히 반격할 시도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런 끝에 펠리페는 병사를 벽에 몰아붙였다. 그러자 그는 창끝으로 원을 그리듯 돌리며 상대를 현혹했다. 불안에 떠는 두 눈이 빙글빙글 도는 창끝을 따라가며 당혹감과 두려움을 끌어냈다. 그러던 순간 펠리페는 창을 앞으로 뻗었다. 장검 든 병사는 반사적으로 칼을 들어 막으려 했으나 창날이 막히기는커녕 오히려 칼날을 같이 밀어냈다. 창날은 그대로 병사의 목덜미를 꿰뚫었고 흘러나온 피가 창대를 적셨다. 펠리페는 창날을 뽑으며 뒤돌았다. 그러자 그의 눈앞에 보인 것은 이미 코앞까지 다가온 토비아스의 분노에 찬 얼굴이었다.
 미처 반응할 새도 주지 않은 채, 토비아스는 펠리페를 벽에 처박았다. 그리고는 주먹으로 그의 몸을 마구잡이로 후려쳤다. 갑작스러운 충격에 펠리페는 온몸이 마비된 느낌이어서 반응조차 못 하고 피를 토했다. 토비아스가 멈추자 펠리페는 힘을 잃고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그의 손이 창대로 향하자 토비아스는 손목을 콱 짓밟고는 창대를 걷어차서 치워버렸다.
 토비아스는 비틀거리며 물러섰다. 그는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바닥에 비참하게 드러누운 채 피를 토해내는 에스테야 놈, 부서진 파편 위에 쓰러져서 미동도 없는 빨간 머리, 공포에 질린 눈으로 벌벌 떠는 난민들, 그리고 시끄럽게 우는 아이. 토비아스는 아이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가 다가오자 여급은 공포에 질린 얼굴로 뒷걸음질 쳤으나 그녀가 도망갈 곳은 없었다. 토비아스는 여급의 얼굴을 한 대 강하게 쳐 쓰러트리고는 아이를 안아 들었다. 그는 우는 아이를 잠깐 바라보더니 이윽고 펠리페에게 고개를 돌렸다.
 
“네 아들이냐?”

 그 말에 펠리페는 앞으로 기어가며 힘겹게 말을 토해냈다.

“그 아이는, 건드리지 마…….”
“내게도, 내게도 아이가 있었지. 딸이었어. 거트루트라고, 내가 직접 이름을 붙였었는데.”

 토비아스는 다시 아이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펠리페는 고통에 신음하면서 팔을 뻗었다.

“제발, 제발. 뭘 하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제발 하지 마.”
“네놈들이 쳐들어왔을 때 그 아이는 열다섯밖에 안 됐었지. 정말로 꽃다운 아가씨였는데, 그런데…….”
 
 그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그 떨림이 무슨 의미인지는 펠리페도 알고 있었다. 그는 힘겹게 무릎을 꿇고는 말했다.

“미안하다. 제발, 제발 용서해다오. 우리가 무슨 짓을 했는지는 잘 알아! 하지만, 하지만 그 아이는…….”
“죄가 없다고? 그렇겠지. 하지만 내 딸도 죄는 없었어!”

 그는 격앙된 목소리로 펠리페에게 소리쳤다.

“빌어먹을 너희 에스테야 개새끼들이 아무런 죄도 없는 내 딸을 죽였다! 잔인하게, 웃으면서!”
“안 돼, 안 돼, 멈춰!”

 펠리페는 다급한 외침에도 토비아스는 아이를 번쩍 들었다. 앞으로 자신에게 벌어질 일을 알고 있기라도 한 듯 카를은 더 크게 울기 시작했다.
“너도 똑같은 고통을 맛보게 해주마. 내가 겪었던 고통을, 내가 눈으로 보았던 그 끔찍한 슬픔을! 너도 눈앞에서 네 아이의 머리가 깨지는 것을 봐라!”
“안 돼!”

 토비아스는 카를을 바닥에 내던지려 했다. 그러자 동시에 펠리페가 자리를 박차고 앞으로 튀어나가며 단검을 뽑았다. 토비아스는 펠리페의 얼굴을 보고 움찔했다. 그가 본 펠리페의 얼굴은 감히 이 세상 사람이 지을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말 그대로 분노 그 자체였다. 그렇게 그가 머뭇거리는 사이 펠리페가 팔을 뻗었고 그의 단검은 토비아스의 옆구리를 뚫고 갈비뼈 사이로 쑥 들어갔다. 그리고 칼날을 돌리듯 비틀었다. 토비아스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비틀거렸다. 그의 손아귀에서 힘이 빠져나갔고 그 틈에 펠리페는 카를을 낚아채 품에 안았다. 그리고 토비아스는 쓰러졌다. 펠리페는 아이를 살펴보았다. 무사했다.
 펠리페는 아이를 꽉 끌어안으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이젠 괜찮단다.’ 그의 가슴에서 느껴지는 온기, 새 생명의 따듯함이 그의 온몸으로 번져갔다. 너무나도 오랜만에 느끼는, 오랫동안 느끼질 못했던 그 감각에 펠리페는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펠리페는 눈을 떴다. 그는 깊게 심호흡을 한 번 하더니 케리스에게 다가갔다. 코와 입에서는 피가 흐르고 눈가와 광대는 잔뜩 멍이 든 채 힘겹게 숨을 고르고 있었다. 그 모습에 다시금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누르며 펠리페가 말했다.

“자네 괜찮나?”

 그녀는 무어라 대답하려 했으나 대신 피 섞인 기침이 튀어나왔다. 그녀는 떠는 손으로 입가를 닦고는 엄지를 들어올렸다. 그는 한쪽 무릎을 꿇더니 케리스의 품에 아이를 안겼다.

“가만히 있게.”

 그리고 그는 토비아스를 향해 걸어갔다. 토비아스는 옆구리와 입에서 피를 주룩 흘리며 바닥에 앉아 있었는데 펠리페가 다가오는 것을 보자 그는 기겁하여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죄여오는 두려움에 고통이 더 심해지니 속도는 달팽이가 기어가는 수준이었다.
 어느새 펠리페는 토비아스의 코앞에 서 있었다. 그는 말없이 토비아스의 가슴을 발로 내려찍고는 단검이 박힌 부분을 짓밟았다. 토비아스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비명을 내질렀으나 그를 돕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는 동안 펠리페는 주변을 훑어보았다. 공포에 질려 마비된 사람들, 피투성이가 된 벽과 바닥, 산산이 조각난 탁자들, 그리고 여전히 타오르는 벽난로. 펠리페는 난로에 시선을 두고는 씩 미소 지었다.
 그가 갑자기 발을 떼더니 이윽고 토비아스의 팔을 붙들고는 질질 끌었다. 그러자 토비아스가 발버둥 쳤다.

“그만, 그만둬라! 그만두라고! 살려줘!”

 그의 발버둥이 목숨 구걸로 이어졌으나 펠리페는 아무 소리도 못 들은 듯이 행동했다. 어느새 펠리페는 벽난로 앞에 섰다. 그는 맹렬히 타오르는 불길을 한 번 뚫어지도록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토비아스에게로 눈을 돌렸다. 그는 자신에게 벌어질 끔찍한 결과에 대한 상상과 이어지는 두려움에 반쯤 미쳐 아무렇게나 말을 내뱉고 있었다.

“내 동료들이, 널, 널 가만두지 않을 거다! 많은 전우들이 이 근방에 있어! 그들이 달려올 거다! 날 도울 거라고! 풀어주지 않으면 그 대가를 처절하게 치를 거란 말이다! 이 빌어먹을…….”

 그때 펠리페가 입을 열었다.

“너는…….”

 펠리페는 말을 끌었다. 머리끝까지 뻗친 분노에 이성마저 조금씩 사라진 탓에 내뱉을 말을 고르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그는 느릿하게나마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너는 아이를 건드려서는 안 됐어.”
“제발, 제발, 살려…….”
“똑같은 고통을 맛보라고? 끔찍한 슬픔을 보라고?”

 펠리페는 토비아스의 멱살을 잡고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리고 속삭였다.

“너만 그런 고통을 겪은 줄 알아?”

 펠리페는 토비아스의 멱살을 잡더니 난로 안으로 힘껏 던졌다. 토비아스는 사람이 낼 수 있는 가장 끔찍한 비명을 내지르며 팔다리를 마구 휘저었다.

“아악! 으아아악!”

 토비아스는 어떻게든 벗어나려 애를 썼으나 펠리페는 그런 토비아스의 등을 발로 강하게 내려치고는 그대로 힘을 주어 짓눌렀다. 토비아스의 저항은 의미를 잃어버렸다. 시간이 지나자 토비아스의 애처로운 몸짓이 그의 비명과 함께 점점 잦아들었다. 하지만 펠리페는 토비아스의 비명이 멈추고 나서도 한참 동안 그를 짓밟으며 분노를 토해냈다. 그를 말린 사람은 어느새 일어나 다가온 케리스였다.

“그만 하세요, 펠리페 님. 죽었어요.”

 그제야 펠리페는 발을 떼었다. 그러자 갑작스레 잊고 있었던 고통이 몰아쳤다. 그는 고통을 참아내려고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몸을 숙였다. 잠깐의 침묵 끝에 한결 편해진 표정으로 그는 다시 몸을 일으키고는 케리스를 돌아보았다. 케리스는 아이를 토닥이며 물었다.

“괜찮으세요?”
“난 괜찮아. 자네는?”
“아무래도 코가 부러진 거 같아요.”

 그녀는 힘겹게 미소 지었다.

“그래도 죽지는 않아서 다행이에요.”

 그녀는 다시 흐르는 코피를 닦으며 뒤돌았다.

“빨리 여기서 나가죠. 여기 오래 있어 봐야 좋을 게 없을 거 같네요.”

 그녀는 턱짓으로 주변 사람들을 가리켰다. 그들은 여전히 공포에 질린 모습이었으나 그 두려움이 사라지기까지는 그다지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아 보였다. 펠리페는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나가 있게.”

 케리스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종종걸음으로 여관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펠리페는 자신의 칼이 박힌 채 바닥에 누워있는 시체에 다가갔다. 펠리페는 잠깐 그 생기 잃은 두 눈을 내려다보더니 이내 한쪽 무릎을 꿇고는 그 눈꺼풀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그는 일어서며 칼을 뽑았다. 그러자 옆구리에서 극심한 통증이 느껴졌다. 아까 토비아스에게 맞은 그 부위였다. 그는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옆구리를 잡고 여관 바깥으로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바깥에 나오니 밝은 빛이 쏟아졌고 펠리페는 반사적으로 눈을 가렸다. 새벽은 이미 지나 해가 하늘 위에 걸린 채였다. 빛을 막는 손가락 틈 사이로 케리스가 말을 이끌고 다가왔다.

“너무 많이 늦었어요. 당장 출발하죠. 패거리가 더 있을 수도 있잖아요?”
“그렇지……. 으윽.”

 또다시 옆구리에 통증을 느끼자 펠리페는 얼굴을 찌푸리며 옆구리에 손을 댔다. 케리스는 걱정하는 얼굴로 물었다.

“표정이 안 좋아 보이네요. 정말로 괜찮나요? 아닌 거 같은데.”
“괜찮다니까.”

 펠리페는 케리스를 물리치고는 거친 숨을 내뱉으며 말에 올라탔다. 그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멈추지를 않았음에도 그는 최대한 내색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출발하지.”
“저만 따라오세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케리스가 탄 말이 앞으로 내달렸고 펠리페가 뒤따랐다. 이제야 두 사람은 뤼텐베르크를 향해 나아갈 수 있었다.

 시간이 흘러 서녘이 조금씩 붉어지고 있음에도 여전히 뤼텐베르크는커녕 마중 나온 사람들조차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땅에 즐비한 시체와 이를 뜯어먹는 까마귀 떼뿐, 길은 여전히 그 끝을 알 수 없었다. 그러기를 한참, 결국 참다못한 펠리페가 케리스를 멈춰 세우더니 짜증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길을 잘못 든 건가?”
“아닐 걸요.”
“‘걸요’?”
“길은 맞게 가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다만…….”

 그녀가 말을 끊자 펠리페는 재촉하듯 물었다.

“다만?”
“조금……. 잠깐만, 들리세요?”

 그 말에 펠리페는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소리에 집중했다. 까마귀 울음, 새들의 날갯짓, 산들바람과 이에 흔들리는 나뭇가지, 그리고 희미하게 들려오는 말발굽 소리. 펠리페는 놀란 표정을 드러내며 말했다.

“말발굽 소리?”
“추격당하는 모양이네요. 빨리 여기서 벗어나죠.”

 케리스는 주저 없이 곧바로 박차를 가했고 펠리페도 뒤를 따랐다. 바람을 가르고 도망치면서 케리스가 외쳤다.

“놈들을 따돌려보려고 했는데 실패했네요! 차라리 그냥 뤼텐베르크로 달릴 걸 그랬어요!”
“내 말이!”

 그러던 그들의 뒤에서 아까 들었던 그 말발굽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뒤를 돌아보니 서너 명 정도의 기병들이 둘을 쫓아오고 있었다. 각자 손에는 쇠뇌나 창 따위를 들고 어깨나 투구 등에는 노란색과 검은색 천을 교차해 묶어 자신들의 소속을 드러내고 있었다.
 
“라우레니엔군이다!”

 펠리페는 그렇게 외치며 다시 앞을 보았다.

“대체 뤼텐베르크는 언제 도착하나!”
“지금쯤이면 슬슬 마중 나온 사람들이 보일 텐데!”

 그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기수가 손에 든 쇠뇌로 자신을 겨냥하는 모습이, 쇠뇌 위에서 번쩍이는 화살촉이 보였다. 펠리페가 다시 외쳤다.

“엎드려!”

 그러자 케리스는 재빨리 카를을 바투 끌어안으며 몸을 낮췄다. 펠리페는 그러는 대신 갈지자로 이리저리 말을 몰았고 기병은 그를 따라 쇠뇌를 겨눴다. 그러던 순간 기수가 쇠뇌를 쏘았다. 기수의 손가락이 움직이는 것을 본 펠리페는 재빨리 허벅지에 힘을 실으며 상체를 왼쪽으로 꺾듯이 숙였다. 그의 몸이 있던 자리를 화살이 무시무시한 소리를 울리며 훑고 지나갔다.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추격자들은 여럿이었고 날아오는 화살도 여럿이었다. 펠리페는 계속해서 몸을 이리저리 흔들었다.

“케리스! 대체 언제까지 이래야 하나!”
“조금만, 조금만 더요!”

 케리스는 아이와 앞을 번갈아 돌아보면서 외쳤다. 펠리페는 이를 갈며 고개를 돌렸다. 추격자들은 어느새 그의 옆에 다다라 쇠뇌를 들이밀고 있었다. 펠리페는 기합을 내지르며 팔을 위로 휘둘러 쇠뇌를 쳐냈다. 충격에 기수가 쇠뇌를 떨어트리자 펠리페는 다시 주먹으로 기수의 얼굴을 갈겼다. 충격에 기수가 뒤로 고꾸라지며 낙마했다. 고개를 반대로 돌리니 또 다른 추격자가 칼을 손에 쥔 채 옆으로 다가오는 게 보였다. 그는 펠리페를 노려보더니 가로로 칼을 휘둘렀다. 펠리페는 뒤로 드러누워 칼날을 피하고는 다시 몸을 일으켰다. 기수가 반대로 칼을 휘두르려고 하는 순간 펠리페는 손을 뻗어 칼날을 붙잡고 동시에 허리춤에서 칼을 뽑으며 휘둘렀다.

“아악!”

 기수가 소리를 지르며 칼을 놓치며 멀어졌다. 펠리페는 피가 흐르는 칼을 내던졌다. 손이 쓰라렸으나 그는 내색하지 않았다. 앞을 보니 케리스는 어느새 저 멀리 조그맣게 보일 정도로 멀리 가 있었고 그 너머에는 회색 성벽이 흐릿하게 보였다. 뤼텐베르크가 저 멀리 아른거렸다. 펠리페는 박차를 가해 속력을 높였다. 그리고 그 순간 뒤에서 쇠뇌 줄이 소리를 내었고 화살은 그대로 펠리페의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갔다.

“큭!”

 펠리페는 피가 흐르는 목덜미를 손으로 짚었다. 아직 추격자들은 둘이나 더 있었고 둘 다 펠리페를 죽일 듯 무시무시한 눈빛을 흘렸다. 펠리페는 다시 앞을 보았다. 뒤를 돌아볼 때가 아니었다.

“저 개 같은 새끼 참 끈질기네!”

 뒤에서 추격자들이 소리를 질러댔다. 펠리페는 신경 쓰지 않고 앞만 보고 말을 몰았다. 케리스가 좀 더 가까워져 크게 외치면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케리스!”
“조금만 기다려 봐요!”
 
 그러자 뒤에서 추격자가 기합을 내질렀다. 펠리페는 또다시 반사적으로 몸을 비틀어 뒤에서 튀어나온 칼날을 피하고는 다시 외쳤다.

“뭘 자꾸 기다리라는 거야!”

 그때 추격자들이 외쳤다.

“말을 쏴버려!”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말이 고통스레 울더니 펠리페의 눈앞에 갑자기 흙더미가 나타났다. 화살을 맞은 말이 바닥에 고꾸라지면서 펠리페를 바닥에 내친 것이었다. 돌멩이 가득한 흙바닥을 구르며 온몸이 으스러지듯이 고통스러웠다. 펠리페는 입에서 신음을 흘렸다. 앞으로 지나갔던 추격자들이 펠리페를 향해 되돌아왔다. 한 명이 외쳤다.

“잡았다!”

 펠리페는 고통을 참으며 눈을 떴다. 그의 눈에는 해를 등에 지고 그림자로 모습을 가린 기병 셋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 자식이 토비아스를 그렇게 만든 놈이야.”
“내 팔목도 그었어, 이 새끼가!”

 그 말에는 명백한 증오가 섞여 있었다. 펠리페는 떨어진 칼에 팔을 뻗었으나 칼은 너무 멀리 있었고 고통은 커다랬다. 추격자들은 그런 펠리페를 비웃으며 저마다 한 마디씩 내뱉었다.

“이 새끼도 토비아스와 똑같이 만들어버리자고.”
“모자는 내가 가질래.”
“그보다 그 애 딸린 갈보 년은? 도망간 모양인데.”
“그냥 둬. 시간 없어.”
“아까워라. 빨간 머리 쥐어뜯으며 박고 싶었는데.”

 추격자 하나가 말에서 내리더니 밧줄을 쥐고 펠리페에게 다가왔다. 그는 펠리페의 다리를 모으고는 밧줄을 걸기 시작했다. 펠리페는 어떻게든 벗어나려고 했으나 힘이 나지 않았다. 이젠 끝이라고 직감한 그는 포기하고 눈을 감았다.
 그때였다. 멀리서 케리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손 떼시지!”

 그 말에 추격자들이 모두 고개를 돌렸다. 모두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허둥대며 고삐를 잡아당겼다. 하지만 곧바로 총성이 울리고 화살이 날아들었다. 조금 전까지 의기양양하던 추격자들은 총알과 화살의 바람 속에서 허우적댔다. 그 와중에 펠리페는 자기 발을 묶으려던 기수가 도망치려고 하자 최대한 힘을 주어 다리를 가슴 쪽으로 당기고는 그를 향해 뻗었다. 그가 짧게 소리를 지르며 멈춰 섰다. 그 순간 그가 고개를 오른쪽으로 확 꺾더니 머리에서 피를 뿜으며 그대로 고꾸라졌다.

“펠리페 님!”

 곧이어 케리스가 병사들을 대동하고는 펠리페를 부르며 나타났다. 그녀는 펠리페를 내려다보더니 빙그레 웃었다.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기다리라고.”
“기다리다가, 죽을 뻔, 했잖아…….”

 케리스는 다시 미소를 짓고는 고개를 돌려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타난 사람은 다름 아닌 트리스탄이었다. 그는 케리스와 몇 마디를 더 나누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펠리페를 부축하며 일으켰다.

“가시죠,”

 펠리페가 고통에 신음하자 트리스탄은 펠리페의 팔을 자기 어깨에 두르며 무덤덤하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낙마해서 바닥에 굴렀으니 뼈가 어긋나거나 부러졌을 수도 있겠군요. 그래도 다행입니다. 목이 부러져서 찍소리도 못하고 뒈지진 않았으니. 단단하신 분이네.”

 펠리페는 무례하기 짝이 없는 그의 말에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그럴 힘도 없었다. 트리스탄은 펠리페를 수레 위에 태우더니 이내 케리스처럼 빙그레 미소 지으며 말했다.

“뤼텐베르크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펠리페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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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즈베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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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쇠의 기사
The knight of the key

02. 오펜슈타인의 섭정 2

 펠리페의 겉옷은 완전히 젖었고 몸은 물기와 추위로 몸서리를 쳤다.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아이가 비를 맞지 않도록 온몸으로 감싸며 말을 몰았다. 빗방울이 챙을 타고 흘러내리며 펠리페의 눈을 가렸다. 그는 몇 번이고 챙 끝에 맺힌 물방울을 털어냈으나 변하는 것은 없었다. 그는 때때로 품에 안긴 아이를 한 번 보았다. 아이는 여전히 잠들어있었다.
 얼마나 달렸는지도 모를 때였다. 펠리페는 언덕 위에서 멈춰 섰다. 밤새도록 말을 몬 탓에 허벅지가 저려왔다. 쉬고 싶다는 생각이 절실했으나 주변에 비를 피해 쉴 곳이라고는 없었다. 펠리페는 고통을 참으며 언덕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어둠이 짙게 깔린 땅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다만 바람이 내는 고요한 휘파람만이 펠리페의 귀를 건드릴 뿐이었다. 펠리페는 길게 심호흡했다. 그리고 다시 말을 몰았다.
 천천히 언덕을 내려오던 그는 갑자기 눈을 찌푸리며 입을 틀어막았다. 언덕 아래에 숨어있던 끔찍한 죽음의 냄새가 버틸 수 없을 정도로 진동한 탓이었다. 펠리페는 속도를 줄이고 천천히 말을 몰았다. 무엇이 앞에 있을지 알 수가 없어 함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때였다. 그가 빗방울을 훑어내려고 모자를 살짝 들어 올린 순간 눈앞에 사람의 그림자가 갑작스레 나타났다. 예상치 못한 등장에 펠리페는 놀라 말고삐를 강하게 잡아당겼고 말은 길게 울며 앞발을 들어 올렸다. 그러면서 반사적으로 아이를 더더욱 강하게 끌어안았다.
 말이 앞발을 내려놓자 펠리페는 칼을 뽑으며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그림자는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키가 매우 큰지 말에 올라탄 펠리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또 몸을 이리저리 흔들고 있었으나 펠리페를 보고도 아무런 말도 반응도 없었다. 펠리페는 그것이 더 두려웠다. 그는 칼을 강하게 움켜쥐고 천천히 칼을 그림자에 들이밀었다. 펠리페의 머릿속은 수많은 생각이 솟아올라 어지러웠다.
 때마침 주변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멀리 동쪽에서 해가 솟아오르고 강렬한 빛은 짙은 먹구름을 꿰뚫고 땅을 밝혔다. 펠리페가 선 땅에도 점점 그 빛이 손을 뻗었고 그림자 역시 결국 그 정체를 드러냈다.
 펠리페는 헛웃음이 나올 뻔했다. 그러면서도 등골이 오싹했다. 그를 내려다보던 무시무시한 그림자의 정체는 다름 아닌 나뭇가지에 목이 매달린,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며 썩어가는 시체였다.
 펠리페는 칼을 내리고 시체를 살펴보았다. 벌레가 잔뜩 꼬인 옷의 팔 부분에 묶인 노랗고 빨간 천이 펠리페의 눈에 들어왔다. 그는 다시 칼을 들고 칼끝으로 그 천을 건드려보았다. 천은 간단히 끊어졌고 가볍게 칼날 위에 내려왔다. 그는 칼날을 가까이 가져와 천을 만져보았다. 엉성하게 새겨진 별과 이를 감싼 네 개의 초승달 문양. 에스테야의 상징이었다. 펠리페는 천을 허리띠에 욱여넣고는 시체를,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주변은 이미 무기와 갑옷은 물론 속옷까지 싹 벗겨진 채 아무렇게나 내던져지고 썩어가는 시신이 온 땅을 가득 메운 채였다. 최소한의 존엄조차 보장받지 못하고 비참하게 처형당한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속이 울렁거렸다. 펠리페 그 자신도 수많은 시체들을 봐왔으나 이것만큼은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얼굴을 잔뜩 찡그린 채 이리저리 말을 몰았다. 마음 같아서는 빠르게 내달리고 싶었으나 여기저기 쓰러진 시체를 보고 놀란 말이 멈춰 서거나 다리가 걸리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한창 고삐를 이리저리 흔드는 와중에 아이가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어른도 버티기 어려운 악취를 젖먹이가 버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펠리페는 아이의 등을 토닥이며 앞을 바라보고는 그대로 박차를 가했다. 말은 다시 한 번 힘차게 바람을 갈랐고 두 사람을 괴롭히던 썩은 내는 빗방울 섞인 바람과 함께 뒤로 밀려 나갔다. 펠리페는 잠깐 뒤를 돌아보았다. 바람에 흔들리는 시체가 점점 멀어져갔다. 그는 이를 악물며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마음속으로 죽은 이들을 애도하고 또 그렇게 만든 하이메와 막시밀리안을 저주했다.
 끔찍한 냄새가 저편으로 사라지고 나서도 아이의 칭얼거림은 멈출 줄을 몰랐다. 펠리페는 말을 멈추게 하고는 아이의 엉덩이를 만져보았으나 특별히 다른 점을 느끼지 못했다. 큰일이었다. 주변을 둘러보아도 보이는 것은 허허벌판, 폐허, 그리고 시체뿐이었다.
 그때 멀리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그에게 다가오는 게 보였다. 군인 같지는 않았다. 펠리페는 그들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으나 불안한 생각을 감출 수 없었다. 그는 반사적으로 칼을 꽉 붙들었다. 그러는 동안 어느새 그 무리는 이미 펠리페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그들은 남쪽으로 향하는 피란민 부부였다. 그들이 끄는 손수레에는 아이와 짐이 구별 없이 있었고 허리에는 공구에 가까운 손도끼를 차고 있었으나 그것을 휘두를 힘은 없어 보였다. 그들은 펠리페가 그들을 빤히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멈춰 서서는 펠리페를 돌아보며 퉁명스럽게 물었다.

“뭐요?”

 펠리페는 여전히 경계하는 낯빛으로 칼을 만지작거렸다. 부부 역시 떨리는 손을 천천히 손도끼에 가져갔다. 잠시 불안한 침묵이 흘렀다. 먼저 운을 뗀 것은 펠리페였다. 그는 여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내, 아이에게 젖을 물려야 하오. 미안하지만 좀 도와주실 수 있겠소?”

 부부는 서로 돌아보았다. 남편은 펠리페를 턱짓으로 가리키며 미친 사람 아니냐고 중얼거렸고 아내 역시 잔뜩 경계하는 눈치였다. 펠리페는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다시 말했다.

“사례는 두둑하게 하리다.”

 그런데도 부부는 여전히 경계를 풀지 않았다. 둘은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고 돌아가며 펠리페를 힐끔 흘겨보았다. 한참 뒤에야 여자가 펠리페에게 다가왔다.

“아이 줘요.”

 그 말에 펠리페는 반사적으로 칼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그러자 남자 역시 반사적으로 손도끼를 꺼내 들었고 여자는 깜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 그리고 말을 더듬으며 해명하듯 말했다.

“아, 아이를 주셔야 젖을 물리죠!”
“그, 그렇지.”

 펠리페는 그제야 칼에서 손을 뗐다. 그는 등 뒤로 묶은 이불을 조심스럽게 풀고 아이를 여자에게 안겼다. 여자는 뒤로 물러서서는 손수레 뒤로 천천히 걸어갔고 그제야 남자도 손도끼를 다시 허리에 찼다.
 펠리페는 이참에 자기도 잠깐 쉴 겸 말에서 내려왔다. 하지만 발이 땅에 닿는 순간 펠리페의 다리는 힘을 잃어버렸고 그대로 무릎을 꿇은 모습이 되었다. 그는 일어서려고 했으나 지금까지 잊고 있었던 피로와 고통이 다리를 찍어 눌렀다. 결국 일어서지 못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그러자 남자가 천천히 다가와 물었다.

“괜찮수?”

 펠리페는 모자를 벗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괜찮소.”

 그러면서 그는 손가락으로 안장을 가리켰다.

“부탁인데 저기서 가죽 부대 좀 꺼내다 주시겠소?”

 남자는 자기가 하인인 줄 아느냐며 투덜거렸으나 비에 젖은 생쥐 꼴로 일어나지도 못하는 펠리페가 딱한지 결국 가죽 부대를 가져다주었다. 펠리페는 양손에 이를 쥐고는 입에 가져갔다. 미지근한 물이 빗물과 함께 그의 목을 타고 흘렀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뚜껑을 닫았다. 그러자 남자가 물었다.

“사람 시켜먹는 게 자연스러운 걸 보아하니 고귀하신 양반 같은데…….”

 펠리페는 남자를 빤히 쳐다보았다. 남자가 한 말이 무슨 뜻인가 생각하며 그는 무의식적으로 칼 손잡이에 손을 가져갔다. 그러자 남자는 당황한 듯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그냥 가만히 있으면 심심해서 물어봤던 거요. 거 한 번 더 물어보면 아주 멱을 따려고 하시겠네그려.”

 남자가 억지웃음을 짓자 펠리페도 힘겹게 미소를 지으며 칼에서 손을 뗐다. 남자는 당황한 것이 역력한 낯빛으로 두어 걸음 물러섰고 펠리페도 고개를 푹 숙였다. 깊은 침묵이 흘렀다.

“난 귀족 아니올시다.”

 펠리페는 고개를 푹 숙인 그 상태로 입을 열었다.

“스물하고 여덟 해 전에는 영주 아들이었고, 열 해 전에는 검술 사범이었고, 여섯 해 전에는 폐인이었고, 닷새 전까지는 돈 받고 사람 죽이는 놈이었지. 지금은, 뭔지 모르겠소.”

 말이 끝나자 펠리페는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그러더니 고개 들어 남자에게 물었다.

“그대들은 어째서 도망치고 있던 거요?”

 그러자 남자는 탐탁지 않은 눈으로 펠리페를 잠깐 흘겨보다 입을 열었다.

“빌어먹을 전쟁 때문이요.”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리 같은 놈들 삶이 원래 개좆같긴 했어도 짐 싸고 도망 다니지는 않았소이다. 근데 그 에스테야인지 뭔지 하는 개새끼들이 쳐들어와서 우리 마을을 다 불태우고 사람들을 죽였어. 그, 누구냐, 그…….”
“악마공 기옌 말이오?”
“그래! 그 악마 새끼! 그 새끼 때문에 좋은 사람들이 다 죽었어!”

 남자는 얼굴을 붉히며 언성을 높였다. 펠리페는 아내의 젖을 문 아기가 그 악마공의 아들이라는 것을 안다면 남자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상상해보았다. 그러는 동안 남자는 말을 이었다.

“그 새끼들이 오펜슈타인으로 물러나고 나서는 살았구나 생각했는데 웬걸, 세금을 잔뜩 때리고는 못 낸다고 사람을 초주검으로 만드는 거 아니요!”

 갑자기 남자가 허리띠를 풀더니 웃옷을 손으로 끌어올렸다. 남자의 몸에는 흉터와 화상 자국이 가득했다.

“우리를 지켜준다는 놈이 내 몸을 이렇게 만들었수다! 그래서 사람들이 하나둘 다 도망가기 시작했소. 보시다시피 나도 그랬고. 결국 여기까지 도망 왔지.”

 남자는 옷을 추스르고는 뜨거운 머리를 식히려는 듯 이마에 손을 짚었다. 그리고 그는 그 상태로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별 깃발이나 독수리 깃발이나 둘 다 좆같기는 매한가지였소.”

 그때 여자가 수레 뒤에서 옷을 추스르며 나타났다. 그녀는 잠든 카를을 안은 채 종종걸음으로 펠리페에게 다가왔다.

“다 됐어요. 잠들었네.”

 펠리페는 일어나려고 했으나 여전한 통증에 일어날 수 없었다. 그러자 남자가 펠리페의 어깨를 붙들고 일으켜 세워주었다. 펠리페는 비틀거리면서 입에서 신음을 흘렸으나 이내 고통을 삼키고는 꼿꼿하게 허리를 폈다.

“아이를 주시오.”

 여자는 조심스레 펠리페의 품에 아이를 안기고 말했다.

“이대로 비에 맞게 두면 안 돼요. 북쪽으로 가다 보면 그나마 멀쩡한 여관이 하나 나오는데 거기서 묵고 가면 될 거예요. 저희도 그랬으니.”
“고맙소.”

 펠리페는 전대에서 짚이는 대로 돈을 꺼내 들었다. 피오리 은화 세 닢이었다. 그는 남자의 손에 그 세 닢을 쥐여주고는 다시 안장에 올라탔다. 그리고 부부를 돌아보며 말했다.

“남서쪽으로 쭉 내려가면 하얀 물고기가 그려진 깃발을 쓰는 용병들이 있을 거요. 거기 대장인 안젤로 데마테오에게 내 이름을 대고 그 은화를 보여주시오. 합류하면 안전할 거요. 그는 웬만한 귀족들보다도 더 훌륭한 친구요.”
“안젤로 데마테오?”

 펠리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덧붙였다.

“펠리페 데 라 토리아. 이 이름을 대시오.”

 그 말을 끝으로 펠리페는 다시 박차를 가했다. 다리가 끔찍하게 지끈거리고 피곤함에 몰려왔으나 여기서 멈출 수는 없었다. 그는 온 정신을 집중하며 그 부부가 말한 여관을 향했다.
 다행히도 펠리페는 해가 넘어가기 전에 여관에 도달했다. 그는 비틀거리며 여관 문을 힘겹게 밀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따듯한 공기가 그를 감쌌다. 그다음엔 포탄 수십 개가 처박힌 듯 난장판인 모습과 이리저리 몰려 앉은 바글바글한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왁자지껄 떠들던 그들은 펠리페의 등장에 입을 다물고 그를 바라보았다. 묘한 침묵 속에 서로 간의 경계 어린 눈빛만 이어졌다. 펠리페는 불안감에 아이를 꽉 붙들었다. 그러던 순간 누군가 말했다.

“아이가 있어.”

 그러자 몇 명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펠리페에게 다가왔다. 펠리페는 반사적으로 칼을 뽑아 들었다.

“워, 진정하시오! 우린 도우려고 한 것뿐이오!”

 허리에 칼을 찬 남자가 말했다. 펠리페는 대답 대신 일어난 사람들을 각자 훑어보았다. 칼 찬 남자, 평범한 농민, 오래된 양피지 같은 얼굴의 수도승,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이었다. 결국 그는 칼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그러자 팔을 따라 하듯 다리도 같이 무너져 내렸다. 그가 무릎을 꿇자 사람들이 다가와 그를 부축했다. 그리고 여급도 다가와 카를을 안았다. 펠리페는 아이를 끝까지 잡으려는 듯 손을 뻗었으나 이내 떨어트렸다.

“괜찮소?”

 사람들이 물었으나 펠리페는 대답할 기운이 없었다. 그는 힘겹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사람들은 잠깐 서로 얘기하더니 그를 벽난로 앞에 데려다 놓았다. 뜨거운 열기가 빗방울에 차가워진 그의 몸을 감쌌다. 그가 무너지듯 바닥에 앉자 수도승이 말했다.

“젖은 옷을 계속 입고 있으면 안 좋으니 벗으시게.”

 펠리페는 대답도 안 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자 잊고 있던 피로가 천천히 그를 잠식했다. 옷깃을 붙잡으려는 손이 너무나도 떨렸다. 금방이라도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으나 펠리페는 피로를 참아냈다.
 한동안 사투 끝에 펠리페는 옷을 완전히 벗어 던지고 이불로 몸을 덮었다. 그러면서도 계속 아이를 향해 눈을 돌리며 손으로는 칼 손잡이를 문질러댔다. 그러던 중 카를을 안은 여급이 다가와 그에게 그릇을 건넸다. 허여멀건 우유죽이었다.

“공짜에요. 드세요.”

 펠리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릇을 받아들며 말했다.

“아이는?”

 그러자 여급이 새카맣게 썩은 이빨을 드러내며 빙그레 미소 지었다.

“걱정 마세요. 제가 데리고 있을게요.”

 여인이 떠나자 펠리페는 그릇을 바닥에 놓고는 칼에서 손을 떼고 수저를 들었다. 죽을 한 입 떠 입에 넣자 따듯한 기운이 입안에 잔잔하게 퍼져나갔다. 맛은 없었다. 하지만 기분은 좋았다.
 펠리페는 순식간에 그릇을 비워냈다. 사지가 끊어질 것 같던 고통이 조금이나마 나아진 느낌이었다. 기운을 차린 그는 다시 칼을 붙잡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조금 전 그를 부축했던 이들과 그들 주변에 각자 무리 지은 사람들, 모두 웃으며 떠들고 있었으나 그 아래의 뿌리 깊은 불안과 공포를 펠리페는 느낄 수 있었다.
 그때 한 여인이 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날카로운 대바늘로 고정한 붉은색 쪽 찐 머리와 여우를 연상케 하는 귀는 케르모레나 바다 건너 요르문드라면 모를까 이곳 오펜슈타인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신체적 특징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어딘가 낯익었다.
 그 순간 그 여인이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의 눈동자가 서로를 마주했다. 여인은 슬쩍 미소 짓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펠리페에게 다가왔다. 순식간에 여인의 붉은 눈동자가 펠리페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펠리페는 물러서거나 고개를 돌리지 않고서는 칼을 꽉 쥔 채 여인을 바라보았다. 갓 성인이 된 시골 처녀 같은 얼굴. 그러나 눈과 입 주변의 잔주름이 진짜 나이를 가늠케 했다.

“절 아시나요?”

 머리카락도 눈동자도 붉은 여인이 다짜고짜 물었다. 펠리페는 칼을 더더욱 꽉 쥐었다.

“아니.”

 그러자 여인이 웃었다.

“전 당신을 알아요. 펠리페 데 라 토리아.”

 반사적으로 펠리페가 칼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여인은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은 채 이불 속에서 뛰쳐나온 칼날과 펠리페를 돌아보았다.

“칼을 내려놓으시는 게 좋을 거예요. 모르는 사람들에게 벗은 몸을 보여주는 건 좀 그렇잖아요?”

 그 말에 펠리페는 고개를 돌렸다. 사람들이 두 사람을 보고 수군거리는 게 보였다. 펠리페는 천천히 칼을 내리며 다시 이불을 덮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칼에서 손을 놓지 않고 있었다.

“날 어떻게 아는 건지 말해야 할 것 같은데.”
“물론이죠.”

 여인은 자세를 고쳤다. 짝 달라붙는 가죽 바지와 길게 뻗은 다리가 합쳐지니 뇌쇄적인 모양새라 마치 유혹하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펠리페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며칠 전에 트리스탄을 만나셨죠?”
“그걸 어떻게 아는 거지?”

 펠리페의 경계 섞인 목소리에 여인은 미소를 유지하며 대답했다.

“제가 트리스탄을 거두고, 또 가르친 사람이니까요.”
“그럼 그대가…….”
“네. 제가 케리스 다퓌닐린입니다.”

 펠리페는 자신이 왜 낯익다고 생각했는지 깨달았다. 붉은색 머리카락, 쪽 찐 머리를 대바늘로 고정하고 다니는 네레디르 여인, 그리고 콘라트의 두 첩자 중 하나. 잊고 있던 그 이름을 떠올리자 펠리페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났다.

“이제야 안심이 되나요?”
“그래.”

 펠리페는 그제야 칼을 놓았다. 케리스도 편한 자세로 고쳐 앉으며 웃었다.

“솔직히 놀랐어요. 원래 펠리페 님은 여기 계시면 안 되잖아요.”
“그게, 일이 좀 복잡해졌네.”

 그는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어쩌다 아이를 맡게 되었는지, 어쩌다 이름뿐인 오펜슈타인 섭정공이 되었는지, 어쩌다 아이를 안고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지 등. 케리스는 어느새 심각한 얼굴이 되어 펠리페의 말을 묵묵히 듣고 있었다.

“아델하이드 님께선 대체 무슨 생각이셨을까요.”
“이유야 아까도 내가 말했다만, 솔직히 지금도 잘 이해가 안 돼. 이제 와서 그런 말을 한들 무슨 소용이겠나.”

 펠리페는 한숨을 쉬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제 자네 차례일세. 자넨 왜 여기 있었나?”
“저요?”

 케리스는 약간 당황한 듯 머뭇거렸다. 그녀는 살짝 고개를 숙인 채 길게 생각하더니 이내 펠리페의 바로 옆까지 가까이 붙었다.

“우리가, 정확히는 백작께서 하신 일은 엄밀히 말하면 반역이잖아요.”
“반역? 아, 그렇겠군.”
“그래서 혹시나 사람들이 눈치를 채지는 않았나, 군대가 뤼텐베르크로 오지는 않나, 그런 걸 확인하고 있었죠. 다행히 그런 건 아직까진 없는데…….”

 그녀는 주변을 둘러보고는 펠리페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여기저기 흩어진 에스테야 사람들이 많아요. 그들을 라우레니엔 병사들이 일일이 찾아서 죽이고 있고요.”

 그 말에 펠리페는 아까 전 봤던 구더기가 들끓는 시체로 가득한 평원을 떠올렸다. 그러자 자신도 모르게 오한이 들어 몸을 떨었다. 케리스는 잠깐 고개를 돌려 다시 주변을 살피고는 다시 말했다.

“조심하세요. 여기 있는 피란민 중에서도 에스테야라면 이를 바득바득 가는 사람이 많으니까.”

 그녀는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다시 미소 지으며 말했다.

“아이는 제가 데리고 있죠. 편히 쉬세요, 펠리페 님.”
“자네가 먼저 뤼텐베르크로 아이를 데려가면 안 되겠나?”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저도 피곤해서요. 게다가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사람이 다시 나가면 의심을 살 수도 있고.”

 그 말을 끝으로 케리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카를을 데리고 있는 종업원에게 다가가 펠리페를 가리키며 몇 마디 말을 나누더니 아이를 품에 안았다. 펠리페는 케리스가 자신을 돌아보며 웃는 것을 보고 나서야 바닥에 드러누웠다. 딱딱한 바닥에 베개도 없었으나 커다란 피로에 펠리페는 금세 잠이 들었다.
 시간이 흘렀으나 아직 새벽일 때였다. 케리스는 벌써 떠날 준비를 마치고는 카를을 안고 펠리페에게 다가갔다. 펠리페는 고통스러운 듯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잠꼬대를 중얼거렸다. 그녀는 장난기가 동해 그를 깨우지 않고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펠리페는 한참을 끙끙거리며 고통스러워하더니 힘겹게 말을 뱉어냈다.

“미안해 여보…….”

 그러더니 펠리페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그런 모습을 더 이상은 보고 있을 수 없어 케리스는 양손으로 펠리페의 어깨를 잡고 마구잡이로 흔들었다.

“일어나세요, 펠리페 님.”

 펠리페는 헉 소리를 내며 벌떡 일어섰다. 그는 반사적으로 칼을 쥐고 주변을 둘러보다가 케리스를 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고. 또 악몽이라도 꾼 모양일세.”

 그는 눈가를 손으로 문질렀다.

“편히 쉬셨나요?”
“아니.”
“좋아요. 지금 가면 해 뜰 때쯤이면 도착할 거예요. 편지는 보내놨으니까 그쪽에서도 우릴 마중 나오겠죠. 옷 입으세요.”

 케리스는 난로 앞에 널브러진 옷가지를 펠리페에게 던져주었다. 펠리페는 끙 소리를 내며 머리를 짚다가 옷을 받았다. 펠리페는 여전히 피곤한 몸을 옷소매에 넣느라 고생해야 했다. 한동안 투쟁 끝에 펠리페는 여관에 오기 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는 모자를 눌러쓰고 여급에게 다가갔다.

“음? 벌써 가시나요?”

 그녀가 묻자 펠리페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이 많았다면 오래오래 있었겠다만.”

 그 말에 여급은 썩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하여튼. 얼마요?”

 그러면서 펠리페는 전대에 손을 넣고 돈을 만지작거렸다. 여급은 머릿속으로 계산하기 시작했다.
 그때 여관 문이 열리고 라우레니엔말이 들려왔다. 작게 중얼거리며 계산을 하던 여급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갔다. 펠리페는 고개를 살짝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세 명의 병사. 팔뚝에 노랗고 검은 천을 둘둘 매 라우레니엔 소속이라는 것을, 온몸에 눌어붙은 진흙과 먼지, 그리고 핏자국으로 이들이 오랜 시간 동안 싸워왔음을 증명했다.
 그들은 각자 무기를 지고 껄렁대며 여관 안의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시선 끝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은 눈이 마주칠 때마다 두려움에 질려갔다. 그때 병사 하나가 펠리페를 보고 말했다.

“어이. 모자 좋은데?”

 펠리페는 대답하지 않았다.

“무시한다고 우리가 사라지는 건 아니야. 그보다 그 칼도 마음에 드는군그래.”
“허리에 두른 건 전대 아니야? 그것도 마음에 드는걸.”

 병사들은 크게 웃어대며 펠리페에게 다가왔다. 펠리페는 천천히 칼을 뽑고는 여급에게 작게 말했다.

“아무거나 쥐여 주시오.”
“네?”
“아무거나. 단단한 것이든 날카로운 것이든, 무엇이든 간에.”

 그러자 여급은 탁자에 기대어있던 막대기를 펠리페에게 건넸다. 펠리페는 다시 물었다.

“놈들이 가까이 왔소?”

 여급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펠리페는 재빨리 몸을 돌리며 왼손에 든 작대기를 휘둘렀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작대기가 박살났고 병사는 큰 소리를 내며 바닥에 쓰러졌다.

“아악! 내 얼굴!”
“이 빌어먹을 개새…….”

 펠리페는 재빨리 칼로 오른쪽에 있던 병사의 목덜미를 겨눴다. 왼쪽에 있던 병사는 어느새 다가온 케리스가 자기 목에 칼을 대자 그대로 멈춰 섰다.

“너, 너희들, 시, 실수하는 거야!”

 그 말이 끝나자마자 다시 여관 문이 열리더니 늙은 병사를 포함한 또 다른 세 명이 안으로 들어왔다. 안에서 들려온 요란한 소리에 다급하게 들어온 모양이었다.

“그 칼 내려놔!”

 늙은 병사가 펄션을 겨누며 외쳤다. 그러던 중 병사 하나가 펠리페의 허리를 가리키며 외쳤다.

“저 천……. 토비아스! 저 새끼 에스테야놈이야!”

 펠리페는 자기 허리를 바라보았다. 나뭇가지에 목이 매달린 채 썩어가는 시체의 팔뚝에 묶여있던 그것이었다. 토비아스라 불린 늙은 병사는 분노로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크게 소리쳤다.

“이 빌어먹을 개새끼 같으니! 네 목을 따서 죽은 가족들의 무덤 앞에 바치겠다!”
 
 펠리페는 어금니를 꽉 물고 케리스를 보았다. 두 사람은 서로 눈을 마주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각자 병사의 목을 꿰뚫거나 베어 쓰러트리고 가까이 붙었다. 그리고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는 적들을 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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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쇠의 기사


01. 오펜슈타인의 섭정 1


 오펜슈타인이 불타오르고 아델하이드가 멀리 동방으로 떠난 지 이틀이 지났다. 고작 이틀뿐이었으나 그날, 그리고 그 이후는 펠리페에게 마치 영원같이 느껴졌다. 섬기던 이가 죽고 그의 연인은 사라졌다. 그리고 자신에게 남은 것은 그 두 사람의 아이 뿐. 펠리페는 또다시 세상에 외로이 남겨졌다.

 그 이틀 동안 펠리페는 자꾸 보채며 우는 카를을 안은 채 어찌할 바를 몰라 온몸이 흠뻑 젖을 정도로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아이를 안은 채 부드러운 목소리로 자장가를 몇 번이고 불러주며 등을 토닥였으나 아이는 계속 칭얼거렸다. 결국, 그는 간절히 도움을 바라는 표정으로, 카를에게 젖을 물려줄 여인을 찾아 칭얼거리는 아이를 안고 야영지를 헤매었다.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용병과 종군 민간인들의 차디찬 냉대와 비웃음뿐, 한참을 헤매던 그는 전대에 있는 돈을 모조리 탕진하고 나서야 유모를 겨우 찾을 수 있었다. 그렇게 참담한 이틀이 지나갔다.

 사흘째 되는 날 아침 펠리페는 새근새근 잠든 카를을 조심스레 유모에게 맡기고 천막 바깥으로 나섰다. 그는 주변을 슬쩍 훑어보았다. 우중충한 날씨와 진동하는 시궁창 냄새 사이로 핼쑥하고 초췌한 얼굴의 병사들이 창대를 바닥에 질질 끌며 돌아다니는데 그들의 눈동자에는 용기나 긍지 따위의 미덕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런 그들 머리 위로 힘없이 나부끼는, 하얀 숭어가 그려진 깃발만이 이들이 한때 악마공과 함께 전선을 누비며 적들을 창끝으로 밀어붙이던 그 ‘하얀 숭어 군단’이라는 것을 증명했다.

 펠리페는 옅게 섞이는 피비린내와 절망으로부터 코를 틀어막고는 병사들 사이를 헤치며 가장 큰 천막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천막 입구 사이로 오랜 친구 안젤로가 보였다. 덥수룩한 수염이 인상적인 이 용병대장은 용병대 장교들과 함께 지도를 보며 이것저것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펠리페가 안으로 들어가려 하니 천막 앞의 용병들이 그를 가로막았다.


“당신이 뭐 하는 사람인지는 모르겠는데, 여긴 당신 같은 종군 민간인 따위가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야. 알아?”


 그를 가로막은 용병은 처음부터 거칠게 반응하며 펠리페를 밀쳤다. 펠리페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파리한 얼굴에는 생기라고는 없어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만 같은 것이, 그 얼굴을 보고 펠리페는 헛웃음이 나오는 것을 참았다. 주먹 한 번이면 얼굴이 뭉개져서는 진흙 바닥에 처박히겠지, 펠리페의 머릿속에서 그런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펠리페가 생각을 실행에 옮길지 말지 생각하기도 전에 상황이 끝나버렸다. 천막 안에서 오랜 친구가 그를 부른 것이다.


“들여보내. 아는 사람이야.”


 그 말을 듣자 용병들은 펠리페를 한 번 아니꼽다는 눈초리로 흘겨보고는 입술을 씹으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펠리페는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여러 번 부러졌다 다시 붙어 어긋난 병사의 코를 다시 한 번 부러트리고 싶은 충동이 머리끝까지 솟아올랐다. 하지만 그가 한 것은 손으로 마음에 안 드는 병사의 가슴팍을 밀어내 길을 좀 더 트는 것뿐이었다.

 뒤에서 들려오는 투덜거림을 뒤로하고 안으로 들어서니 안젤로가 책상에 손을 짚은 채 서서 펠리페를 보고 있었다. 초췌하게 가라앉은 눈가는 검은 물감을 뿌린 것 같은 깊은 그림자가 장막을 드리웠고 피로가 무거운 몸으로 누르는 눈은 감기지 않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그가 허리를 펴며 말했다.


“여긴 무슨 일이야, 친구.”


 그의 말에 펠리페는 주변 사람들을 슬쩍 돌아보았다.


“얘기 좀 했으면 좋겠는데.”


 그러자 안젤로는 잠깐 헛기침을 하더니 옆에 있던 이들에게 손짓하며 말했다.


“오늘은 이쯤 하세. 나가보게.”


 사람들이 나가자 그는 자리에 앉으며 콧수염으로 뒤덮인 입가를 손으로 한 번 문질렀다. 펠리페가 자신을 따라 의자에 앉자 그가 말했다.


“단둘이 얘기할 이야기라면 역시 그거밖에 없는 건가?”

“그래.”


 펠리페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오펜슈타인에 가야 해.”


 그의 말에 안젤로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대뜸 한숨부터 내쉬었다. 그는 눈가를 문지르고는 앞에 놓인 술잔을 들이켰다. 지저분한 콧수염 끝에 물방울이 걸려 떨어지고 나서야 그가 입을 열었다.


“우린 지금 서쪽으로 가고 있어. 오펜슈타인과는 반대 방향이지. 지금 오펜슈타인으로 방향을 틀기에는 너무 늦었고 병사들도…….”

“엉망진창에 싸울 의지도 없지. 알아. 하지만…….”

“게다가 오펜슈타인에는 엄청나게 많은 병력도 있어.”


 안젤로는 깍지 낀 손으로 이마를 받치며 중얼거렸다.


“솔직히 라우레니엔군이 오펜슈타인에서 나오면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을지 걱정이야.”

“그래…….”


 이런 말이 나올 것이라고 예상은 했으나 친구의 반응은 너무나도 단호했다. 펠리페는 자기 얼굴에 떠오르는 실망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고, 바보 같은 요청이었다고 되뇌는 수밖에 없었다.


“정말 미안하군.”

“아니, 아니야. 그런 요청을 한 게 잘못이지.”


 안젤로는 다른 사람이 쓰던, 아직 술이 남은 잔을 들어 바닥에 홱 뿌리고는 거기다 새로이 술을 담아 펠리페에게 건넸다. 펠리페는 잔을 받아들였으나 입에 대지는 않았다. 도저히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그는 술잔을 내려다보았다. 조금씩 흔들리는 물결 아래에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기옌, 아델하이드, 카를, 그리고 오펜슈타인의 두 열쇠가 다음으로 떠올랐다. 그리고 떠오르는 형상은 점점 과거로 날아갔다. 과거가 펠리페를 붙잡기 전에 그는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아무것도 비치지 않았다.


“안색이 안 좋은데.”


 안젤로의 말에 펠리페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는 손사래를 치며 웃음을 지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하지만 펠리페의 웃음은 그다지 밝지 않았다. 안젤로는 걱정스레 그를 바라보았다.


“내 말이 너무 충격적이었나?”

“아니래도.”


 그제야 안젤로는 허 웃으며 빙그레 미소 지었다. 그는 술잔을 크게 들이켜고는 입을 닦아냈다.


“하이메에게 가서 도움을 받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해. 혼자서는 어쩔 수 없어. 그 양반도 오펜슈타인을 노리고 있을 거 아니야.”

“그렇지.”


 펠리페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그게 문제야.”

“그게 문제라니?”

“하이메 그 양반은 자존심 강하고 야심만 넘칠 뿐이지, 기옌 공과 비교하면 무능하기 짝이 없어. 내가 도움을 요청한다면 나를 이용해서 오펜슈타인을 빼앗으려고 들겠지.”


 펠리페는 그제야 술을 들이켰다. 그는 책상을 내려치듯 술잔을 내려놓고 말했다.


“아델하이드 공은 나를 믿고 내게 섭정 자리를 줬어. 섭정공이 되어야 할 사람은 나야. 빌어먹을 하이메 그놈이 아니라!”

“워, 진정하라고.”


 안젤로는 펠리페를 진정시키며 빈 술잔을 다시 채웠다.


“그 양반이 그래도 일단은 우리 고용주잖아.”

“네 고용주겠지. 지금 그놈과 나는 아무런 상관도 없어.”


 펠리페는 친구가 따라준 술을 또다시 단번에 들이켜 목을 축였다. 그는 잠깐 고개를 숙이며 무어라 중얼거리더니 다시 고개를 들었다.


“어찌됐든 간에 난 오펜슈타인으로 가겠어. 일단 가보면……뭐든 방도가 생기겠지.”

“정말로 안이하기 짝이 없는 생각이야, 펠리페. 다시 생각해보라고.”


 하지만 안젤로의 말에도 펠리페는 고개만 가로저을 뿐이었다. 안젤로도 지난 삼 년 동안 에스테야 왕 하이메가 보여준 추잡한 짓거리를 떠올리고는 더 이상 그를 설득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걱정스러운 눈치였다.


“그래도, 설마 바로 오펜슈타인으로 갈 건 아니지?”

“그럴 생각이었는데.”

“빌어먹을, 너 진짜 제정신 아니구나. 지금 오펜슈타인으로 들어갈 수는 있을 거 같아? 거긴 지금 지옥이야! 그런 지옥에 이제 돌 지난 아이를 끌고 들어가겠다고?”


 펠리페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손으로 머리를 짚으며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안젤로의 말 그대로였다. 미친 사람처럼 오펜슈타인으로 가야 한다는 말만 되풀이하기만 했지 계획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그는 한참을 침묵했다. 지금껏 본적이 없는 모습이었다. 펠리페는 안젤로가 술잔을 두 번 비우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어쩌지?”


 안젤로는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오래 생각하더니 하는 말이 고작 ‘어쩌지’냐?”


 펠리페는 대답하지 않았다. 안젤로는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내뱉고는 술잔을 손에 든 채 말했다.


“좀 쉬어.”

“그래야겠어.”


 펠리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바깥으로 나섰다. 하늘은 여전히 우중충했고 피비린내 섞인 시궁창 냄새가 펠리페의 코를 찔렀다. 그러다 자기 앞을 지나가는 병사들의 초췌한 얼굴을 보고 펠리페는 자기가 지난 이틀간 거의 잠을 안 잤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갑자기 몸이 무거워졌다. 그는 발바닥을 질질 끌며 자기 천막으로 돌아갔다. 유모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무어라 말을 했다. 하지만 펠리페는 그 말이 들리지 않았다. 그는 대답 대신 손만 내젓고는 그대로 간이침대 위로 무너졌다.

 갖가지 형상이 펠리페의 눈앞에 지나갔다. 기억 저편 멀리 던져놓았던 지난 삼 년의 기억들이 다시 떠올랐다. 아델하이드, 기옌, 카를, 안젤로, 오펜슈타인, 라우레니엔, 마차, 배, 트리스탄. 쉴 새 없이 흐르던 그의 기억이 트리스탄의 얼굴에서 갑자기 멈췄다. 그리고 그는 눈을 떴다.

 펠리페는 벌떡 일어나 바깥으로 뛰쳐나왔다. 그는 주저 없이 바로 안젤로가 있는 천막으로 향했다. 아까 그 병사들이 그를 막으려 했으나 펠리페는 제지를 뿌리치고 안으로 들어섰다. 홀로 술을 마시던 그가 펠리페를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트리스탄!”


 펠리페가 말했다.


“그러니까, 트, 트리스탄이 어, 어, 어디서 왔지?”


 안젤로는 더듬거리는 펠리페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눈만 껌뻑였다.


“갑자기 뭔 소리야?”

“트리스탄 말이야! 오펜슈타인 공 탈출시킬 때 왔던!”


 펠리페가 폭탄 터트리듯 외친 말에 안젤로는 여전히 당혹스러운 표정을 한 채 대답했다.


“그야, 콘라트가 보냈지. 뤼텐베르크에서.”

“그럼 뤼텐베르크로 가야겠어!”

“진정하고 천천히 얘기해!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그제야 펠리페는 깊게 심호흡을 하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는 한참을 뜸을 들이더니 책상에 손을 얹으며 말을 꺼냈다.


“콘라트에게 가야겠어.”

“그래, 방금 말했잖아. 갑자기 왜?”

“그러니까, 아델하이드 공을 탈출시킨 계획을 아는 사람은 너와 나, 히에로니무스 대주교님, 그리고 그 사람뿐이잖아?”


 안젤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 일은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아. 맞지?”

“그렇지.”

“게다가 뤼텐베르크는 전장에서는 멀면서도 오펜슈타인에서는 멀지 않잖아? 잠시 몸을 맡기기엔 최적의 장소야.”

“그래, 맞아. 하지만 우린 그쪽으로 못 가. 서쪽 말고는 아무 데도 못 간다고.”


 펠리페는 고개를 저었다.


“같이 가달라는 게 아니야. 어차피 도움도 못 줄 거라면서. 혼자 갈 거야.”

“혼자라고?”

“아이도 데리고 가야겠지.”


 그 말에 안젤로의 표정이 당혹스러움에서 걱정으로 변했다. 그리고 수염이 무성한 턱을 가리며 말했다.


“너도 알겠지만, 북쪽엔 라우레니엔군이 판을 치고 있어. 사방을 쑤시고 다니면서 사람들에게 에스테야 놈이다, 아니면 부역자다, 이런 소리를 하며 죽여대고 있다고. 거긴 생지옥이야, 펠리페. 그 정신 나간 병신들이 너도 죽이려 들 거야.”

“알아.”


 펠리페는 그러나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가 고개를 들었다. 불안감으로 흔들리던 아까와는 다르게, 그의 눈빛은 밝게 빛나는 횃불처럼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 눈빛을 보고 안젤로는 입을 다물었다.


“그래도 가야겠어.”

“그래. 알았어. 언제 갈 생각인데?”

“최대한 빨리.”


 안젤로가 고개를 끄덕이자 펠리페 역시 고개를 끄덕이고는 뒤돌아 바깥으로 나섰다. 어느새 그의 머리에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그는 빠른 걸음으로 자기 천막으로 들어갔다. 들어가니 카를을 안은 유모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 오셨군요.”


 온화하게 짓는 옅은 미소와 무고하고 맑은 눈동자가 그의 눈에 아른거렸다. 펠리페는 그녀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리 없는 유모는 고용주가 말없이 한참 자기 얼굴을 보고 있으니 당황스러움과 쑥스러움이 섞인 표정으로 물었다.


“저기, 왜 그러시나요?”


 펠리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는 눈가를 잠깐 문지르고는 다시 유모를 바라보았다.


“이제 그만 일해도 좋소.”

“네?”


 일방적인 통보에 유모의 얼굴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펠리페는 유모에게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를 쓰며 차갑게 말했다.


“해고라고.”

“갑자기 왜…….”

“이유는 묻지 마시오. 아이는 침대에 두게.”


 그러면서 그는 전대를 풀고 안을 열었다. 그는 전대에서 금화 두 닢을 꺼내 유모의 손에 쥐어주었다. 그러자 평범한 종군 민간인으로 돌아간 여인의 눈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휘둥그레졌다. 그녀는 자기 손에 들어온 황금색 동그라미 두 개를 보며 말을 잇지 못하고 펠리페와 금화를 돌아보기만 했다. 그녀는 쿵쾅거리는 가슴을 침을 꼴깍 삼키며 진정시키고는 힘겹게 물었다.


“이, 이건 너무…….”

“지금까지의 헌신에 대한 보답이라고 생각하시오.”

“고작 이틀뿐이었는데요?”


 펠리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차갑게 선고할 뿐이었다.


“나가보게.”


 여인은 혼이 빠져나간 것만 같은 모습으로 금화를 꽉 쥔 채 바깥으로 나섰다. 여인이 바깥으로 사라지자 펠리페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는 얼굴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그리고 시선을 카를에게로 옮겼다. 막 젖을 먹고 잠들었는지 아이는 고르게 숨을 내쉬며 잠들어있었다.

 펠리페는 얼굴을 감쌌다. 또다시 머리가 꼬여갔다. 유모를 보낸 게 잘한 일이었을까, 그 질문이 그의 마음에서 폭풍이 되어 휘몰아쳤다.

 아이를 데리고 폭력과 증오가 넘실대는 땅을 지나야 한다. 그동안 자신을 대신해 카를을 먹여주고 감싸주고 재워줄 사람은 분명 필요했다. 하지만 아무 죄도 없는, 아무것도 모르는 여인을 끌고 다니면서, 성공 여부가 확실치도 않은 계략에 억지로 참여시킬 권리가 펠리페에게는 없었다.

 계획이라는 단어를 생각하니 펠리페의 눈앞이 더더욱 캄캄해졌다. 오펜슈타인 섭정공이 된다는 거창한 목표만 있을 뿐 아무런 계획도 전략도 그를 도울 사람도 없었다. 그에게 가진 것이라고는 열쇠와 반지, 그리고 아이뿐이었다.

 펠리페는 얼굴을 감싼 손을 내려놓았다. 그는 기옌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전략이라는 것은 뼈대만 세워놓고, 살은 임기응변으로 붙이고 떼는 것이다.’ 더는 생각에 잠길 때가 아니었다. 펠리페는 지금 뼈대를 세워야 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죽 겉옷을 걸치고 구석에 처박아뒀던 칼을 꺼내 허리띠에 단단히 매었다. 준비가 끝나자 그는 고개를 돌렸다. 아이를 감싸는 강보에 싸인 그대로 새근새근 잠든 아이를 잠깐 바라보던 그는 옆에 있던 얇은 이불을 들고 아이를 안은 채 서로의 몸을 꽉 묶었다. 어쩌면 이번이 자신의 마지막일 수도 있다. 펠리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잠든 아이의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고는 바깥으로 나섰다.

 그의 앞에 여러 명의 병사가 몰려있었다. 펠리페는 반사적으로 멈춰 서서 아이를 꽉 안으며 병사들을 날카로운 눈빛으로 훑어보았다. 하지만 그럴 필요는 없었다. 병사 중 하나가 펠리페에게 내민 것은 다름 아닌 말 고삐였다. 그때 병사들 사이를 가르고 안젤로가 나타났다.


“식량하고 필요한 물건은 안장에 실어놨어. 젖먹이에게 필요한 건 없겠지만.”


 그리고 펠리페와 안젤로는 짧게, 그리고 조심스럽게 포옹을 나누었다. 그리고 안젤로는 한 걸음 물러서더니 손에 쥔 물건을 펠리페에게 건넸다. 하얀 깃털 장식이 달린 챙 넓은 모자였다. 펠리페가 설명을 요구하려던 순간 안젤로가 선수를 쳤다.


“내 모자야. 나중에 와서 돌려달라고.”


 펠리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짧게 미소로 답하고는 모자를 머리에 얹었다. 내리는 빗방울에 챙이 아래로 가라앉았으나 펠리페는 개의치 않고 병사가 내민 고삐를 쥐고 능숙하게 안장에 올랐다. 펠리페는 다시 한 번 아이를 꽉 안으며 안색을 살펴보았다. 아이는 여전히 고요하게 잠든 채였다. 그 모습을 눈에 각인시키고 나서야 펠리페는 오른손으로 고삐를 꽉 붙들었다. 그때 안젤로가 물었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는 알지?”

“북쪽으로 곧장.”

“어디가 북쪽인지는 알고?”


 그러자 펠리페는 턱짓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해가 가라앉는 지평선 너머였다.


“저기가 서쪽일 테니…….”


 그러면서 펠리페는 고개를 오른쪽으로 꺾었다.


“저기가 북쪽이겠지.”

“몇 번이고 생각한 거지만 넌 정말 제정신이 아니야. 알아?”


 안젤로는 혀를 차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펠리페는 어떻게든 그 말을 되받으려고 했지만 그로서는 딱히 떠오르는 말이 없었다. 최소한 오늘을 포함한 지난 사흘간만큼은 안젤로가 구구절절 옳았다. 안젤로는 혀를 차는 것을 그만두고 손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북쪽은 저쪽이야. 네가 가리킨 곳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지.”


 그러면서 그는 펠리페의 손을 꽉 붙잡았다.


“몸조심해라. 몇 없는 친구가 어디 성벽이나 나뭇가지에 목이 매달린 꼴은 보고 싶지 않으니까.”

“내가 할 말이야.”


 안젤로가 손을 놓았다. 그러자 펠리페는 더 이상의 작별인사 없이 바로 박차를 가하며 앞으로 튀어나갔다. 갈색 말이 길게 울며 갈기를 휘날렸다. 펠리페가 빗방울과 차가운 바람을 뚫고 북쪽 너머로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던 안젤로는 이윽고 친구와 아이가 저 멀리 하나의 작은 그림자가 되자 고개를 돌렸다.


“우리도 갈 준비를 해야겠군. 다들 짐 챙겨! 한 시간 이내로 떠난다!”


 그러자 병사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빗속을 뛰어다니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안젤로의 얼굴은 불안으로 굳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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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


 오펜슈타인은 불타고 있었다.

 포위한지 꼬박 열 달이 되던 날, 결국 성벽이 무너졌다. 그러자 독수리 깃발을 진 병사들이 무너진 성벽을 향해 몰려들었다. 반대쪽에서는 별 깃발을 진 병사들이 상대를 막아섰다. 오랜 전쟁 덕에 생긴 서로에 대한 증오심으로 불타오르는 두 나라의 병사들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함성을 내뱉으며 서로에게 달려들었다. 시간이 지나 결국 방어선은 무너졌고 독수리 깃발을 진 병사들이 해일처럼 도시 안으로 밀려들어왔다. 그러나 싸움은 계속됐다.

 한때 시민들을 위해 맑은 물을 뿜어내던 분수는 그 위에 쓰러져 죽어가는 병사들이 흘린 피로 붉게 물들었다. 한때 수많은 이들이 오가며 도시의 활기 그 자체를 상징하던 광장과 시장에는 분노와 증오에 찬 이들이 서로를 향해 내뿜는 살기로 가득 찼다. 한때 술과 도박과 음모와 사랑이 오가던 술집에는 비탄과 저주만이 오갔다.

 그렇게 오펜슈타인이 피와 불꽃에 삼켜지는 가운데, 아직 화마가 미치지 않은 도시 한 구석에서 두 사람이, 정확히는 여인의 품에 안겨 잠든 아이까지 합해 셋이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굳어가는 피처럼 검붉은 갑옷차림의 기사는 손에 피로 물든 폴액스를 쥔 채 앞으로 나아갔고 그의 뒤에는 검은 머리쓰개 사이로 황금빛 머리카락이 비치는 여인이 품에 갓 돌이 지난 아이를 안은 채 기사를 따랐다.

 기사는 여인의 손을 잡아끌었다. 여인의 목에 걸린 황금색 열쇠가 잠깐 흔들렸다. 여인은 뒤를 돌아보았다. 한 때 두 사람의 보금자리였던 성채 역시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여인은 가슴이 찢어질 것처럼 아팠다.


“아델하이드.”


 가슴아파하는 아내를 본 기사가 그녀를 다그쳤다.


“아델하이드!”


 아델하이드는 대답 없이 고개만 앞으로 돌렸다. 그녀가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슬픔 가득한 낯빛으로 기사를 바라보자 그는 그녀의 얼굴을 고양이 어르듯 손가락으로 슥 문질렀다. 울먹이는 눈동자를 보자 기사 역시 가슴속이 마구 난도질당하는 기분이었다. 그는 아내의 뒤에서 불타오르는 성채를 슬쩍 바라보았다.

 지난 일 년의 추억이, 적으로 만났으나 연인이 된 두 사람의 기억이 모조리 저 성채 안에서 불타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기사는 마음을 다잡았다. 불타오른 추억은 다시 만들면 그만이니까.

 그는 자신이 낼 수 있는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아내를 진정시키며 말했다.


“뒤돌아볼 시간 없어. 우린 가야해.”

“기옌…….”


 그녀가 말을 흐리자 기옌은 그녀의 뺨을 손바닥으로 말없이 어루만졌다. 그는 아내의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엄지로 훑었다. 그리고 기옌은 시선을 연인의 품에 안겨 세상모르고 자는 아이에게로 옮겼다. 그가 이름을 속삭였다.


“카를.”


 아비의 말에 아이가 반응하듯 조그마한 손을 꼼지락거렸다. 그 모습을 보던 기옌은 어느새 우수로 가득 찬 눈이 되어 아내를 바라보았다.


“여기만 벗어나면 멀리 동쪽으로 도망갈 수 있어. 이 빌어먹을 곳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있다고. 당신 아비도, 내 형제들도 없는 곳으로. 거기서 우리 셋이 같이 사는 거야.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영원히. 빨리 가자. 펠리페가 기다리고 있을 거야.”


 아델하이드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불타오르는 성채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기옌의 손에 이끌리면서도 계속 그 성채를 바라보다 눈을 질끈 감으며 다시 앞을 보았다. 그리고 그녀는 품에 안겨 새근새근 잠든 아들을 바라보았다. ‘너는 참 강한 아이구나.’ 그녀는 작게 중얼거렸다. 피와 불꽃으로 물들어가는 여기 이곳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잠들 수 있다니.

 갑자기 기옌이 멈춰 섰다. 그러더니 폴액스를 양손에 쥐며 아델하이드를 가렸다. 아델하이드가 연인의 어깨 너머로 시선을 돌아보았을 때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입에서 놀라 소리를 내었다. 라우레니엔을 상징하는 독수리 문양이 그려진 갑옷을 입은 병사들이 횃불을 쳐들고 나타난 것이었다. 처음에 그들은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다가 이내 셋을 발견하고는 그들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여기다! 악마 놈이다!”


 그러더니 병사들이 기옌을 둘러쌌다. 하지만 그들은 기옌을 위협하기만 할 뿐 선뜻 앞으로 나서지 못했다. 오랜 두려움이 병사들의 심장을 움켜쥔 탓이었다. 기옌은 아내와 아들을 팔로 가렸다.


“물러서.”


 기옌은 그렇게 말하고는 폴액스를 양손에 꽉 쥐고 병사들을 노려보았다. 그 흉흉한 눈빛에 병사들은 식은땀을 흘리며 마른 침을 삼켜댔다. 그때 병사 하나가 외쳤다.


“우, 우리가 훨씬 수도 많아! 유리하다고! 공격해!”


 그러자 깃털 달린 모자를 쓴 병사가 가장 먼저 칼을 들고 기옌에게 달려들었다. 그가 칼을 아래로 내려찍자 기옌은 가볍게 몸을 틀어 피하고는 창대로 다리를 걸어 쓰러트리고 곧바로 날카로운 송곳이 달린 창대 반대쪽 끝으로 목덜미를 찍었다. 병사는 불운하게도 목에서 피를 뿜으며 천천히 죽어갔다. 기옌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창을 뽑았다.


“아, 악마 새끼…….”


 병사들의 심장을 휘어잡은 두려움이 점점 번져나갔다. 겨우 단 한 명이 죽었을 뿐인데도 병사들은 마치 수천의 동료가 죽은 듯 주춤주춤 물러서기 시작했다. 기옌은 그들을 보며 소리쳤다.


“벌써 겁먹었나? 덤벼! 개자식들아!”


 기옌의 도발에도 병사들은 애꿎은 칼만 이리저리 흔들 뿐 앞으로 나설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오히려 기옌이 앞으로 나섰다. 그는 폴액스를 강하게 움켜쥐더니 그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갑작스러운 돌진에 당황한 병사들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가장 가까이 있던 불운한 병사는 날아드는 도끼날에 얼굴이 박살나 피를 흩뿌리며 바닥에 쓰러졌다. 또 다른 동료가 바닥에 엎어지자 남은 이들도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듯 칼을 들고 애처롭게 저항했다. 병사 하나가 칼을 가로로 휘두르자 기옌은 고개를 틀며 피하고 몸을 숙이더니 창대로 등을 후려치고 발을 걸어 쓰러트렸다. 그가 쓰러진 적을 내리찍는 그 순간 주춤거리던 마지막 병사가 용기를 내어 기옌에게 달려들었다.


“기옌!”


 자신을 죽이려는 이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는데도 기옌은 전혀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의 창이 너무 깊게 박혀 빠르게 빼낼 수가 없었던 탓이었다. 그는 창대에서 손을 떼고 칼에 손을 가져갔다. 그 순간 병사가 기합을 지르며 기옌의 얼굴을 향해 칼날을 휘둘렀고 기옌은 다급하게 칼날을 뽑았다. 상대의 칼날이 기옌의 눈앞에서 자신이 뽑은 칼날에 막혔다. 기이한 행운이었다. 하지만 기옌은 그 행운을 느낄 새가 없었다. 그는 재빨리 칼을 휘둘러 상대의 칼을 쳐내 밀어내고는 상대에게 칼끝을 겨누며 손잡이를 얼굴 옆에 붙였다. 온힘을 다한 공격이 막히자 상대의 얼굴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여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기옌이 자세를 바꿔가며 천천히 병사에게 다가가자 병사는 두려움에 압도당해 떠는 손을 주체하지 못했다. 병사의 손에 들린 칼이 요란하게 떨렸다.



 그때 뒤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오더니 또 다른 병사들이 나타났다. 동료의 비명을 듣고 옆 골목에서 급히 이쪽으로 온 모양이었다.


“저기다!”

“잡아!”


 적들이 다가오자 기옌은 갑자기 눈앞에 있는 상대에게 달려들더니 몸을 앞으로 날리며 칼날을 내질렀다. 상대는 피하지 못했다. 목을 꿰뚫고 칼날이 반대쪽으로 피와 뼛조각과 함께 튀어나와 신선한 공기를 마셨다. 그의 목에서 공기가 빠지는 끔찍한 소리가 칼날이 꿰뚫은 자리에서 새어나왔다. 기옌은 칼날을 뽑으며 뒤돌아 다시 방어자세를 취했다. 뒤에서 병사가 바닥에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저 새끼가!”


 병사들이 욕을 내뱉었다. 이들은 조금 전의 병사와는 다르게 두 눈에 용기가 서려 있었다. 그들의 얼굴은 두려움이 아닌 분노로 새빨갛게 물들었고 무기를 쥔 그들의 손은 성벽처럼 견고했다. 하지만 그건 기옌도, 아델하이드도 마찬가지였다.


“기옌! 엎드려!”


 갑작스레 들려오는 아내의 명령에 따라 기옌이 고개를 숙이며 몸을 낮추자 병사들의 눈에 뒤에 서 있던 그들의 공주가 보였다. 그녀의 보드라운 손에는 차륜식 권총이 하나 들려있었다. 아델하이드는 아이의 머리를 감싸며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화약접시에서 불꽃이 피어오르고 연기가 피어오르더니 총구가 요란한 소리와 함께 불을 뿜었다. 총알은 기옌이 서 있던 자리를 지나 자신들의 공주가 자신들에게 총을 겨누는 상황에 당황하여 주춤하던 병사들에게로 날아갔다.

 총알이 앞에 있던 병사의 갑옷을 뚫고 그대로 가슴팍에 박혔다. 그는 악 소리를 지르며 뒤로 넘어갔고 뒤에 있던 병사는 아델하이드, 기옌, 그리고 쓰러진 아군들을 번갈아 돌아보며 면면에 당혹감을 드러냈다.

 기옌은 그 틈에 그 병사에게 달려들어 가슴팍에 칼날을 찔러 넣었다. 그가 칼날을 뽑아내자 사방으로 피가 튀고 병사의 하얀 갬비슨이 피로 물들어갔다. 그가 뒤로 넘어가는 것을 보지도 않고 기옌은 차오르는 숨을 한번 길게 들이쉬고는 칼을 집어넣으며 여전히 연기가 피어오르는 권총을 손에 쥔 아델하이드에게 다가갔다.


“괜찮아?”


 아델하이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품에 안긴 아이를 바라보았다. 격렬한 움직임에도 반응이 없는 것을 보고 두 사람은 순간적으로 심장이 멎을 뻔 했다. 하지만 아이가 곧 깨어나 우는 것을 보고 이내 안도했다. 그때 총에 맞은 병사가 힘겹게 중얼거렸다.


“어, 어째서…….”


 둘이 고개를 돌렸다. 병사는 피를 토해내며 아델하이드를 흐려져 가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공주님, 공주님을, 구하려고, 한 건데, 어째서…….”


 병사는 잦아들어가는 목소리를 쥐어짜내어 말하려고 했으나 그러지 못했다. 이윽고 그의 두 눈에 어둠이 가득 차고, 배신감과 두려움으로 알아들을 수 없는 저주의 말을 내뱉다 그대로 멈췄다. 아델하이드는 고개를 숙였다. 총을 쥔 그녀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기옌은 떨리는 아델하이드의 손목을 거칠게 붙들었다.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호수를 연상케 하는 파란 두 눈동자가 죄책감으로 마구 흔들리고 있었다. 기옌은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이럴 때가 아니야. 가자.”


 기옌은 그녀의 팔을 붙든 채 앞으로 내달렸다. 남편의 손에 이끌려 나아가며 아델하이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자신은 잘못이 없다고, 그런 생각을 몇 번이고 되뇌었다. 기옌과 함께 탈출하기로 마음먹은 순간부터 이미 그녀는 반역자였다. 자책하기엔 이미 늦었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들이 달려가는 동안 여기저기서 여러 소리가 아이의 울음소리에 섞여 들려왔다. 대부분은 그들에게 안 좋은 의미가 담긴 소리들뿐이었다. 아군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고 오직 적들의 말과 다급한 발걸음만 들려왔다.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는, 그리고 점점 가까워지는 그들의 발걸음에도 기옌은 아이의 울음소리 때문에 멈출 수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이리저리 내달린 끝에 셋은 성벽에 달린 쪽문 앞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무거운 갑옷을 입은 채 달리던 기옌은 몸을 숙이며 숨을 몰아쉬더니 고개를 들어 자기 가족을 먼저 돌아보았다. 아델하이드 역시 힘겹게 숨을 내쉬고 있었지만 그녀는 자기보다 먼저 아이를 살폈다. 아이가 계속 울고 있었다. 기옌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녀에게 말했다.


“다 왔어.”


 기옌은 옅게 미소를 지으며 뒤돌았다. 그러는 동안 아델하이드는 우는 아이를 토닥이며 작게 노래를 불렀다. 아이의 울음이 점점 잦아들었다. 그러는 동안 기옌은 쪽문에 다가갔다. 오래된 성벽 사이에 조촐하게 마련된 나무문은 그러나 감옥처럼 굳게 닫혀있었다. 기옌의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그는 다급하게 문을 두드렸다.


“펠리페!”


 그러나 쪽문은 여전히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기옌은 계속해서 문을 두드렸으나 여전히 반대쪽에서는 조용했다. 기옌의 머릿속에서 수많은 생각들이 곰팡이처럼 마구잡이로 피어올랐다. 펠리페가 잡힌 것일까. 중간에 돌아간 것일까. 아니면 결국 오지 않은 것일까. 그러한 생각의 범람 와중에도 기옌은 계속 펠리페를 부르며 문을 두드려댔다.


“펠리페! 펠리페! 제기랄, 펠리페!”


 끝까지 열리지 않는 문을 보며 분노한 그는 강하게 문을 걷어찼다. 그가 한숨을 쉬며 뒤를 돌아보자 아델하이드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듯이 묻는 것 같은 그 얼굴에 기옌은 한숨을 길게 내쉬고는 잠깐 하늘을 바라보았다. 타오르는 도시에서 뿜어져 나오는 검은 연기가 그나마 고개를 들이밀던 달빛마저 가리고 있었다. 기옌은 보이지 않는 달빛을 찾으며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아델하이드를 보았다.


“다른 곳을 찾아봐야겠어. 이쪽으로 가자.”


 그가 오른쪽 골목으로 몸을 돌리자 아델하이드가 다급하게 외쳤다.


“그쪽은 안 돼!”


 그녀의 말에 기옌이 멈춰 섰다.


“거긴 성벽이 무너진 쪽이야. 절대로 가면 안 돼. 차라리 반대쪽으로 가서 성문을 열고 탈출하자.”

“성문을 열어? 그럴 시간이 어디 있다고! 그걸 열기 전에 놈들에게 잡힐 거야!”


 두 사람이 옥신각신하려는 그때 뒤에서 나팔소리가 길게 울렸다. 익숙하지 않은 그 소리, 분명 라우레니엔군의 것이었다.


“놈들이야.”


 기옌의 얼굴이 굳어져갔다. 이어서 그들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젠장, 제기랄…….”


 그들이 다가오자 기옌이 마구잡이로 욕설을 내뱉으며 양손에 다시 폴액스를 쥐었으나 그 손은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그의 흉흉한 눈빛 한 구석에서 불안감이 솟구쳤다. 그러자 아델하이드가 남편의 팔을 붙잡았다. 갑작스러운 촉감에 기옌은 아델하이드를 놀라 돌아보았다.


“진정해. 당황하는 건 전혀 도움이 안 돼.”


 기옌은 후드 아래 그림자에 가려진 아델하이드의 단호한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 얼굴, 그 눈빛, 그 미소. 악마의 사악한 눈빛을 새끼양의 그것으로 바꿔버린 미소가 아니던가. 떨리던 기옌의 손이 평정심을 되찾았다. 두 사람은 서로 눈을 마주했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서로의 입술이 가까워져갔다.

 그때 쪽문 안쪽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리더니 덜커덕 소리를 내며 쪽문이 열렸다. 안에서 튀어 나온 사람은 헐레벌떡 숨을 몰아쉬는 피투성이의 남자였다.


“헉, 헉……. 늦어서 죄송합니다.”


 그의 등장에 두 사람은 처음엔 놀라고 그 다음엔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더니 마지막에는 그의 꼴을 보고 걱정하기 시작했다.


“펠리페? 자네 맞나?”

“예, 왕제님. 펠리페 데 라 토리아 맞습니다.”


 그는 불편한 듯 소리를 내고는 팔을 돌리며 얘기를 계속했다.


“길을 뚫는 와중에 예상치 못한 저항이 있었습니다.”


 그러자 기옌은 웃으며 펠리페를 꽉 끌어안았다.


“와줘서 고맙네, 펠리페! 정말로!”


 주군의 갑작스러운 포옹에 펠리페는 당황했다. 자기도 기옌처럼 팔로 등을 감싸야하는지, 그러면 안 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결국 엉성하게 편 팔을 그 자세 그대로 가만히 두었다. 포옹이 끝나자 펠리페는 주변을 한번 쓱 둘러보고는 말했다.


“시간이 너무 지체되었습니다. 어쩌면 놈들이 지하통로를 발견했을 수도 있겠군요.”

“그럼 어떡해야 하죠? 지금이라도 돌아가야 하나요, 펠리페 경?”


 펠리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델하이드 공주님. 지금이라도 빨리 움직이면 놈들이 지하통로를 수색하기 전에 빠져나갈 수 있을…….”


 그때였다. 발소리가 잠깐 들리더니 이내 사방이 밝아지며 병사들의 외침이 주변을 가득 메웠다. 셋은 당황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검은 독수리가 그려진 깃발이 병사들 사이에서 펄럭였다. 라우레니엔의 상징이었다.


“에스테야의 악마 놈이 저기 있다!”

“잡아라!”


 다들 그렇게 외쳐댔다. 그러자 아델하이드의 품에 있던 아이가 다시 크게 울기 시작했다. 순간적으로 모두가 침묵했다. 하지만 얼마 안 있어 병사들의 외침이 그 울음을 묻어버렸다. 한낱 아기의 울음 따위가 병사들의 타오르는 증오를 잠재우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런 와중에 얼굴에 끔찍한 화상자국이 새겨진 기사가 외쳤다.


“악마 놈을 잡아라!”


 그러자 병사들이 다시 함성을 내지르며 세 사람에게 달려들었다. 펠리페가 둘을 잡아끌며 외쳤다.


“이쪽으로!”


 기옌은 펠리페와 아델하이드를 안으로 들여보내고 자신도 들어가려고 문간에 손을 짚었다. 그때 뒤에서 화상 자국이 있는 기사가 외쳤다.


“쏴라!”


 그러자 달카닥 쇳소리가 들리더니 뒤에서 천둥이 치는 것 같은 총성이 이어졌다. 그와 동시에 기옌은 무언가 날카로운 것이 자기 다리와 어깨를 꿰뚫는 통증을 느끼며 동시에 몸이 앞으로 기울어졌다. 그러나 기옌은 고통스러운 신음이 새어나오려는 입을 어금니로 틀어막았다. 셋이 안으로 들어서자 기옌은 재빨리 걸쇠를 걸었다. 반대쪽에서 세 사람이 들어간 문을 열려고 안간힘을 쓰는 병사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기옌은 그 소리를 뒤로하고, 고통에 흘러나오는 신음을 억지로 참으며 계단을 내려갔다.

 그러나 기옌은 점점 발걸음을 옮기는 게 고통스러웠다. 그가 벽을 짚자 손바닥만 한 핏자국이 묻었다. 기옌의 팔과 다리가 그의 갑옷처럼 붉게, 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결국 그는 얼마 못 가 고통을 참지 못하고 무릎을 꿇었다. 그 소리를 들은 두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기옌!”

“왕제님!”


 아델하이드는 기옌의 왼팔을 붙들어 그를 일으켜 세우려고 했다. 하지만 그녀가 어깨를 만지는 순간 기옌이 고통스러운 소리를 내질렀다. 그 목소리에 아델하이드는 반사적으로 손을 떼었다. 하지만 이미 그녀의 손은 새빨간 피로 물든 뒤였다. 그녀는 잠시 정신이 멍해졌다. 그러는 동안 펠리페는 통로 너머와 주군을 번갈아 보며 그를 부축하려고 애를 썼다.


“정신 차리십시오, 왕제님! 나가는 길이 코앞입니다!”

“으윽…….”


 펠리페는 그의 팔을 어깨에 두르고 그를 질질 끌 듯 부축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기옌은 끔찍한 고통에 가만히 있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어깨에 올라간 그의 팔이 시나브로 떨어지더니 이내 그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델하이드가 울먹이며 그를 붙들었다.


“안 돼! 기옌, 좀 더 힘을 내! 조금만 더 가면 바깥이야! 이거 봐. 바람이야. 바람이 느껴져. 이제 곧 나갈 수 있어!”“맞습니다! 안젤로가 바깥에 병력을 이끌고 도착할 겁니다. 그러면 안전해질 거고요!”


 하지만 기옌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더 이상은 못 가겠어.”


 그 말과 함께 기옌은 큰 소리로 기침했다. 입에서 피가 튀어나왔다.


“왕제님…….”


 일으켜 세우려는 펠리페의 손길을 뿌리치며 기옌은 좁은 통로 벽에 등을 기댔다. 그의 숨소리는 마치 폐병에 걸린 사람 같이 거칠기 짝이 없었다. 그는 힘겹게 투구를 벗으며 중얼거렸다.


“가. 빨리.”

“안 돼.”


 그의 말에 아델하이드가 무릎을 꿇으며 기옌의 팔을 붙잡았다. 그녀는 울먹이며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그런 말 하지 마, 기옌. 아직 우린 나갈 수 있어!”


 그런 그녀의 말을 배신하듯 저 멀리서 문이 박살나는 소리가 들렸다.


“미안해, 여보. 더 이상은 못 가. 어차피 놈들이 노리는 건 나니까…….”

“안 돼. 안 돼! 같이 나갈 거야. 네가 없으면 우리 아들은 어떻게 하려고! 제발 같이 가자. 일어나! 우리 아이를 위해서!”


 그러면서 그녀는 기옌의 품에 자기 얼굴을 파묻었다. 기옌은 슬쩍 웃더니 왼손으로 아내의 얼굴을, 그리고 아이의 얼굴을 한 번씩 어루만졌다.


“잘 있어, 아델하이드.”


 그리고 그는 시선을 펠리페에게로 돌렸다.


“뒤를 맡기겠네, 펠리페.”


 아델하이드가 무어라고 얘기하기도 전에 반대쪽에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세 사람이 있는 곳으로 점점 가까이 들려왔다. 기옌은 힘겹게 칼을 뽑아내며 외쳤다.


“빨리 가라고!”


 아델하이드는 기옌을 바라보다 이내 그와 마지막으로 입을 맞추고는 펠리페와 함께 반대쪽으로 달려갔다. 기옌도 슬픔 가득한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멀리서 불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기옌은 그것이 마치 자신을 심판하러 오는 사신의 눈빛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무기력하게, 가만히 앉아서 사신의 손에 끌려가지는 않으리라. 그는 그렇게 다짐하며 칼을 쥔 손에 더더욱 힘을 주었다.

 아델하이드는 눈물을 멈추고 펠리페의 손을 잡고 앞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그때 뒤에서 총성이 울려 퍼졌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뒤돌았다. 그리고 입을 틀어막으며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기옌…….”


 그녀는 다시 뒤돌았다. 더 이상 뒤돌아보지 않겠다고 마지막으로 다짐하며,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는 바깥으로 아이를 꼭 끌어안은 채 달려갔다. 바깥으로 나온 그들은 강나루로 향했다. 나루에는 펠리페가 타고 온 쪽배가 있었다. 두 사람이 앉을 자리. 그러나 그 자리에는 한 사람밖에 앉을 이가 없었다. 펠리페는 다급하게 아델하이드를 태우고 배 위에 올라탔다. 라우레니엔군은 쫓아오지 않았다. 그는 힘차게 노를 저으며 나루를 빠져나갔다.

 쪽배를 타고 나아가는 동안 펠리페는 어색한 침묵을 깨보려고 무어라 말이라도 걸어볼까 했으나 너무나도 슬퍼 보이는 주군의 연인을 보고는 이내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잔잔히 너울대는 강가를 가르며 나간 곳 끝에는 짙게 기른 콧수염이 인상적인 남자를 포함한 병사 몇이 나루 근처서 서성이고 있었다. 그들은 처음에 쪽배가 나타난 것을 보고 칼을 뽑아들고 경계했으나 이내 한손을 흔드는 펠리페를 보고 칼을 아래로 내렸다. 그들은 아델하이드와 그녀의 품에 안긴 아이를 조심스레 부축했고 그러는 동안 인상적인 콧수염을 기른 남자가 펠리페에게 다가왔다.


“안젤로.”

“돌아왔군, 펠리페. 다행이야. 근데 네스칸타라 공작은?”


 펠리페는 대답하지 못하고 그저 고개만 가로저었다. 안젤로도 무슨 뜻인지 알고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하필이면 악마공 그 양반이 못 빠져나오다니. 아이러니도 이런 아이러니가 없군…….”


 그렇게 둘이 침울하게 한숨을 내쉬는 사이 뒤에서 젊은 청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둘은 뒤를 돌아보았다. 키가 큰 청년이 마차 문을 열고 아델하이드와 아이를 안에 태우는 게 보였다. 펠리페는 그를 턱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처음 보는 사람이야. 믿을 만한가?”

“저 키 큰 친구 말이야? 저 친구가 트리스탄인데. 콘라트가 보낸다던 그 친구.”

“그래? 그럼 다행이고.”


 그러더니 안젤로는 말고삐를 쥔 병사에게 손짓해 펠리페에게 그 고삐를 넘겨주었다. 그러면서 자신 역시 말에 올라탔다.


“사방에 라우레니엔군이 쫙 깔렸어. 빨리 가지 않으면 항구로 못 갈 거야.”

“그럼 이렇게 얘기할 시간조차 없겠군. 트리스탄!”


 그러자 마차 문에 기대어 말린 허브를 질겅거리던 청년이 고개를 들었다. 그는 펠리페의 손짓을 보자 바닥에 허브를 뱉고는 재빠르게 마부 자리에 올라탔다. 안젤로와 펠리페가 앞으로 뛰쳐나가자 아델하이드가 탄 마차 역시 덜컹거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한참을 달린 끝에 그들이 도달한 곳은 남쪽 항구였다. 아직 해가 뜨기 전. 날씨는 쌀쌀했고 항구는 조용했다. 그들은 곧바로 부두로 향했다. 있어야 할 사람이 없자 안젤로가 짜증 섞인 욕을 내뱉으며 말했다.


“선장 놈은 또 어디 술집에 가 있나보군. 내 가서 그 빌어먹을 놈을 찾아오겠네. 자네들은 여기서 기다리고 있게. 그리고……. 오펜슈타인 공작께서도 잠깐만 이 친구들하고 같이 기다려주시지요.”


 그는 아델하이드에게 정중하게 인사했다. 아델하이드 역시 안젤로에게 답례했고, 안젤로는 곧바로 술집을 향해 달려갔다. 안젤로가 사라지자 트리스탄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펠리페에게 물었다.


“에, 제 할 일은 이제 끝난 거 같은데요. 죄송한데 전 할 일이 많아서요. 가보아도 될까요.”

“기다려. 일이 다 끝나기 전까진 끝난 게 아니야. 정 심심하면 근처에서 서성이고 있던가.”


 펠리페의 단호한 말에 트리스탄은 작은 목소리로 투덜거리더니 근처 벽에 기대 다시 말린 허브를 입에 넣었다. 이내 두 사람만이 남게 되자 펠리페가 아델하이드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는 허리에 찬 주머니를 꺼내더니 아델하이드에게 건네주었다.


“이거면 동방에서도 충분할 겁니다.”


 아델하이드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녀는 조금씩 떠는 손으로 주머니를 받아들었다. 그러면서 그녀는 미친 사람처럼 무어라 중얼거렸다. 펠리페는 순간적으로 지하통로에서 들었던 그 총성이 그녀의 이성을 산산조각 낸 것이 아닐까하는 끔찍한 생각이 들었으나 이내 맑은 눈빛과 단호한 표정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라우레니엔의 공주를 보고 안도했다.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공주님의 뜻은 곧 기옌 왕제님의 뜻이기도 하니.”

“정말로, 정말로 중요한 부탁이에요. 꼭 이루겠다고 약속해주실 수 있나요.”


 그녀의 단호한 표정과 목소리에 펠리페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러는 것인지 궁금 하기도하고 또 두렵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하겠습니다. 말씀하십시오.”


 그러자 그녀는 자기 몸에 둘러 묶었던 강보를 풀고는 품에 안긴 아이를 펠리페에게 건넸다. 펠리페는 당황하여 아이를 붙잡아 안아들고는 놀란 표정으로 아델하이드를 바라보았다.


“펠리페 경.”

“공주님, 설마, 아니, 안 됩니다. 이건 아닙니다. 잘못됐다고요!”


 펠리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펠리페의 목소리에 지나가던 사람들이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들은 금세 관심을 끊어버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델하이드는 계속 펠리페를 보며 말했다.


“부탁을 들어주겠다고 하시지 않으셨나요?”

“이런 부탁이었다면…….”


 아델하이드는 펠리페의 손을 붙잡았다. 그녀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눈망울로 연인의 부관이었던 남자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펠리페는 그 눈을 마주하기가 너무나도 어려웠다. 하지만 그는 최대한 눈을 피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펠리페 경. 힘들고, 어려운 결정이라는 건 알아요. 저 역시 그러하니까. 하지만 이 아이는 두 왕가의 피를 이은 아이랍니다. 알고 계시겠지만요.”

“하, 하지만…….”

“제 아버지는 집요하신 분이에요. 그리고 저는 오펜슈타인 공작이고, 동시에 라우레니엔의 계승권을 쥔 공주랍니다. 아버지는 세상 끝까지 저를 쫓아오실 거예요. 절대로 저를 가만히 두지 않을 거고요. 카를도 가만두지 않겠죠. 기옌이 있다면 상관없었겠지만 그이가 없는 지금은…….”

“하지만, 공주님. 카를은 공주님의 피를 이은 아이잖습니까. 카를이 기옌 왕제님의 피를 타고 난 건 맞지만 그렇다고 사랑하는 자기 딸이 낳은 손자를 죽이려고 들겠습니까? 자기 피붙이를?”


 아델하이드는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가 사랑하시는 사람은 저에요. 제가 사랑하는 이들이 아니라.”


 그 말끝에는 어딘가 모를 독기가 가득했다. 아델하이드는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흐르는 눈물을 손으로 닦아내려했지만 닦아내는 눈물보다 흐르는 눈물이 더 많았다.


“마지막까지 이런 짐을 지게 해서 미안해요, 펠리페. 하지만, 하지만 이건 이 아이를 위해서예요. 저는 자신이 없어요. 평생을 숨고 도망치면서 산다면 아이에게 영원히 씻을 수 없는 상처만 남기겠죠. 하지만 펠리페 경이라면. 이 아이가 저와 기옌의 아이가 아닌 펠리페 경의 아이라면. 그러면 카를은 안전해질 거예요.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처럼 아버지와 아버지의 사람들은 카를이 바로 코앞에 있다는 것도 모르겠죠. 아버지는 분명 집요하시지만, 눈이 어두운 분이시니…….”

“아델하이드 님…….”

“저는 당신을 믿어요, 펠리페. 당신은 기옌의 부하이자 친구였고, 또 우리를 위해 목숨까지 건 사람이잖아요. 기옌이 없는 지금 당신 외에는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이 없어요.”

“제, 제가 어찌 감히…….”


 펠리페는 계속 거절하려고 했으나 그럴 수가 없었다. 품안에 있는 아이는 어머니가 우는 것도 모르고 어느새 잠들어 새근새근 숨소리만 냈다. 펠리페는 눈을 감았다. 그는 한참을 생각하고, 또 생각하다 이내 다시 눈을 떴다.


“알겠습니다, 공주님. 공주님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고맙습니다, 펠리페 경…….”


 그리고 아델하이드는 마지막으로 아이를 보았다. 그녀는 아이의 이마에 짧게 입을 맞추더니 목에 걸린 황금열쇠를 손으로 쥐어뜯었다. 그리고 그녀는 아이의 손에 그 열쇠를 꼭 쥐어주었다.


“아가. 이게 너를 버리고 떠나는 이 못난 어미가 줄 수 있는 유일한 선물이구나. 나를 용서하지 않아도 괜찮단다. 애초에 아이를 버리고 떠나는 어미는 용서받을 자격이 없어. 하지만, 하지만 너는 나와 그이가 이 세상에 있었다는 증거니까, 반드시, 반드시 돌아올게. 모든 일이 끝나면 반드시 돌아와 너를 다시 품에 안을게. 그때까지 꼭 기다려주렴.”


 말을 끝낸 그녀는 한참 눈물을 흘렸다. 술에 취한 선장과 선원들이 돌아와 배에 오르기 직전까지도. 아름다운 얼굴을 눈물로 적시는 여인을 보는 펠리페의 마음도 양탄자를 단검으로 북북 찢어버리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그는 공주가 눈물을 멈출 때까지 그저 그녀를 가만히 둘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배에 오를 차례가 되자 그녀는 손에 끼고 있던 인장 반지를 빼 펠리페에게 건네주었다.


“그 열쇠와 이 반지로 오펜슈타인 공작의 대리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을 거예요. 제가 드릴 수 있는 마지막 선물입니다, 펠리페 경. 아니, 오펜슈타인 섭정공 각하.”


 그녀의 얼굴에는 그림자가 가득했고 목은 잠겨있었다. 펠리페는 어떤 말을 해야 하나 고심했으나 어떤 말도 그녀를 위로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간단히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부디 몸조심하십시오.”


 펠리페의 말을 듣자마자 그녀는 그녀의 호위 역할을 할 용병들과 함께 배에 올라탔다. 그녀는 갑판 위에 서서 마지막으로 그녀의 땅이었던 곳을 내려다보았다. 돛이 내려오자 그녀는 그대로 고개를 돌렸다. 아무런 미련도 없다는 듯, 아무런 미련도 갖지 않겠다는 듯. 그렇게 배는 태양을 향해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펠리페는 그의 품에 안긴 아이를 다시 바라보았다. 아이는 여전히 자고 있었다. 그의 주군을 닮은 검은머리가 인상적인 아이였다. 펠리페는 눈을 감았다. 하지만 많은 것들이 그의 눈앞에 선명하게 나타났다. 그의 아내, 그의 아이들, 그가 사랑하던, 그리고 잃어버린 사람들의 그 모습이.

 그가 다시 눈을 뜬 것은 안젤로가 말을 걸었을 때였다.


“펠리페.”


 펠리페가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안젤로는 그의 품에 안긴 아이를 보고 깜짝 놀라며 물었다.


“그 아기는……. 설마?”


 펠리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망할 여편네가 자네에게 애까지 주고 가버린 건가? 허이고 참, 왕족들이란.”

“그런 게 아니야.”


 안젤로가 혀를 차자 펠리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어머니이기에, 진정으로 아이를 사랑하기에 할 수 있는 결단이야. 적어도 난 그렇게 생각하네. 안젤로.”


 그리고 그는 잔뜩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이제 어떡하지?”

“글쎄. 공주가 자네에게 뭐라고 얘기했는지부터 들어야겠군.”

“트리스탄은?”

“보냈어.”


 안젤로는 그의 콧수염 끝을 잠깐 문지르더니 그에게 손짓하며 뒤돌았다. 펠리페는 다시 아이를 바라보았다. 그는 아이의 손에 쥐어진 열쇠를 자기 손으로 감쌌다.

 자신에게 찾아온 두 번째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고, 그는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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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즈베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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