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쇠의 기사
The knight of the key

03. 오펜슈타인의 섭정 3

 토비아스는 분노에 찬 소리를 내지르며 펠리페에게 달려들었다. 펠리페는 공격을 피하며 케리스에게 소리쳤다.

“카를을 보호해!”

 케리스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칼을 거두고 판매대 뒤로 폴짝 뛰어 넘어갔다. 그러자 펠리페는 다시 정신을 눈앞의 노병에게로 집중했다. 토비아스의 새빨간 얼굴에선 펠리페의 출신에 대한 비이성적이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지극히 이성적인 증오가 뿜어져 나왔다. 그는 그 증오를 가득 담아 다시 한 번 크게 칼을 휘둘렀다. 펠리페는 반사적으로 오른손에 쥔 칼을 반대로 휘둘러 쳐냈다. 공격을 막기는 했으나 얇은 칼날을 통해 전해지는 충격에 펠리페의 손목이 부러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는 고통을 참으며 왼손에 든 막대기로 토비아스의 얼굴을 후려쳤다. 토비아스는 악 소리를 내며 비틀거렸고 그는 그 틈에 상대의 얼굴을 향해 칼날을 뻗었다. 그러나 토비아스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틀었고 칼날은 살갗만 살짝 긁을 뿐이었다.
 펠리페는 지끈거리는 손목을 문지르며 물러섰다. 토비아스는 주룩 피가 흐르는 뺨을 막으며 눈짓했고 그러자 기다리던 라우레니엔 병사들이 펠리페를 향해 달려들었다. 장검과 미늘창을 든 둘은 능숙하게 서로를 보호하며 펠리페를 공격했고 또 기회를 주지 않았다. 뒤로 물러나던 그는 예상치 못하고 탁자에 걸려 넘어졌다. 그러자 그의 머리 위로 섬뜩한 창날이 떨어졌다. 펠리페는 황급히 몸을 틀었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그가 누워있던 탁자가 박살났고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펠리페는 팔로 얼굴을 가리며 소리쳤다.

“케리스!”

 펠리페의 외침을 들은 케리스는 고개를 들었다. 계산대 뒤에 숨어 벌벌 떠는 여급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케리스가 다가가자 여급은 공포로 떠는 눈을 케리스에게로 돌렸다. 그러자 그녀는 아이를 여급에게 안겼다.

“여기 가만히 있어요!”
“네?”

 케리스는 대답 대신 허리춤에서 차륜식 권총을 뽑아 들더니 화약을 다시 재며 계산대 너머를 흘낏 쳐다보았다. 펠리페는 여전히 무자비한 공격을 피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고개를 숙인 그녀는 눈을 감고 깊게 한 번 심호흡했다. 그리고는 재빠르게 몸을 일으키더니 미늘창 든 병사를 향해 권총을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다. 화약 접시에서 불꽃이 피어오르고 엄청난 굉음이 뒤따르며 여관을 뒤흔들었다. 동시에 창날을 내지르려던 병사가 비명을 지르며 몸을 꼬았다. 그러자 장검 든 병사는 당혹스러움에 어찌할 줄을 모르고 주춤했고 펠리페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펠리페는 왼손에 든 막대기를 장검 든 병사에게 던졌다. 그가 반사적으로 얼굴을 가린 틈에 펠리페는 미늘창 든 병사에게로 전진했다. 그는 고통에 신음하면서도 힘겹게 창대를 들었다. 그러자 펠리페는 몸을 날리듯 앞으로 나아가 왼손으로 창대를 강하게 붙들고는 병사의 목덜미를 향해 칼을 뻗었다. 칼날이 살갗을 찢으며 쑥 들어감을 느끼자마자 펠리페는 칼에서 손을 떼었고 병사는 짧은 단말마를 내뱉으며 뒤로 넘어갔다. 펠리페는 멈추지 않고 두 손으로 창대를 꽉 쥐더니 몸을 틀며 미늘창을 크게 휘둘렀다. 장검 든 병사는 옆으로 몸을 날리며 피했다. 그러자 펠리페는 창을 겨누며 자세를 가다듬었다.
 그러는 동안 케리스는 토비아스와 맞서고 있었다. 그녀가 총을 쏜 순간 토비아스는 그녀의 손목을 향해 두꺼운 펄션을 휘둘렀다. 케리스는 아슬아슬한 순간에 손을 내려 피했고 칼은 허공을 가르더니 애꿎은 판매대만 반으로 쪼갰다. 놀람을 애써 숨기면서 그녀는 왼손에 총을 거꾸로 쥐고 오른손으로 칼을 뽑아 상대를 겨누었다. 하지만 그녀는 선뜻 칼을 내지를 수는 없었다. 그녀의 손목만큼 가냘픈 칼날은 토비아스가 힘을 주어 쳐내는 순간 칼날과 함께 손목을 부러트릴 게 분명했다. 그녀는 이리저리 자세를 바꾸고 움직이며 상대가 틈을 내주기를 바랐다.
 갑자기 토비아스가 펼선을 왼쪽으로 쭉 빼고는 오른발을 내밀었다. 케리스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칼날을 앞으로 뻗었다. 동시에 토비아스는 강하게 사선으로 칼을 휘둘렀다. 두 칼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부딪쳤고 두 사람의 입에서 짧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케리스는 손목이 부러질 것 같은 고통과 함께 허전함을 느꼈다. 그녀의 칼은 어느새 멀리 저편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당황하지 않고 왼손에 든 총으로 토비아스의 얼굴을 강하게 후려쳤다. 토비아스는 비명을 지르며 비틀거렸다. 그러나 케리스가 한 번 더 권총을 휘두르려는 순간 토비아스가 그녀의 왼쪽 손목을 붙잡고 힘을 주어 비틀었다. 이번에는 케리스가 비명을 질렀다. 토비아스는 비웃음을 흘렸다.

“그렇게 계속 울어라 이 망할 년아!”

 그가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칼을 높이 들었다. 케리스의 팔을 내려쳐 잘라내려는 의도가 분명했다. 그녀는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그녀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케리스는 왼 다리에 무게를 싣고 오른 다리를 크게 들어 올리더니 토비아스의 얼굴을 걷어찼다. 얼굴에 가해지는 충격에 토비아스는 무의식적으로 케리스의 손을 놓았다. 그리고 케리스는 그대로 바닥에 떨어졌다. 그녀는 이를 꽉 물고 고통을 삼키며 다시 일어섰다. 토비아스는 여전히 비틀거리고 있었다. 케리스는 짧게 기합을 내지르며 토비아스의 오른손을 걷어차 칼을 쳐냈고 이어 쉬지 않고 발차기를 날렸다. 그렇게 한 번 두 번 걷어차고 세 번째, 갑자기 토비아스가 그녀의 다리를 붙잡았다. 그녀가 당황한 얼굴로 토비아스를 바라보자 그는 씩 미소를 짓더니 그대로 그녀를 휘두르듯 옆으로 날려버렸다. 케리스는 비명도 한 번 제대로 못 지르고 탁자와 의자를 부서트리며 바닥에 처박혔다. 하지만 토비아스는 멈추지 않고 잔해 위에서 피를 토해내는 케리스의 가슴팍에 올라타더니 그녀의 얼굴을 마구잡이로 내리치기 시작했다.
 한편 펠리페는 눈앞의 상대에게 잠깐의 틈도 주지 않고 계속 공격을 가했다. 칼이 닿지 않는 거리에서 벌이는 그의 날랜 찌르기에 장검 든 병사는 피하고 쳐내기를 반복할 뿐 감히 반격할 시도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런 끝에 펠리페는 병사를 벽에 몰아붙였다. 그러자 그는 창끝으로 원을 그리듯 돌리며 상대를 현혹했다. 불안에 떠는 두 눈이 빙글빙글 도는 창끝을 따라가며 당혹감과 두려움을 끌어냈다. 그러던 순간 펠리페는 창을 앞으로 뻗었다. 장검 든 병사는 반사적으로 칼을 들어 막으려 했으나 창날이 막히기는커녕 오히려 칼날을 같이 밀어냈다. 창날은 그대로 병사의 목덜미를 꿰뚫었고 흘러나온 피가 창대를 적셨다. 펠리페는 창날을 뽑으며 뒤돌았다. 그러자 그의 눈앞에 보인 것은 이미 코앞까지 다가온 토비아스의 분노에 찬 얼굴이었다.
 미처 반응할 새도 주지 않은 채, 토비아스는 펠리페를 벽에 처박았다. 그리고는 주먹으로 그의 몸을 마구잡이로 후려쳤다. 갑작스러운 충격에 펠리페는 온몸이 마비된 느낌이어서 반응조차 못 하고 피를 토했다. 토비아스가 멈추자 펠리페는 힘을 잃고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그의 손이 창대로 향하자 토비아스는 손목을 콱 짓밟고는 창대를 걷어차서 치워버렸다.
 토비아스는 비틀거리며 물러섰다. 그는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바닥에 비참하게 드러누운 채 피를 토해내는 에스테야 놈, 부서진 파편 위에 쓰러져서 미동도 없는 빨간 머리, 공포에 질린 눈으로 벌벌 떠는 난민들, 그리고 시끄럽게 우는 아이. 토비아스는 아이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가 다가오자 여급은 공포에 질린 얼굴로 뒷걸음질 쳤으나 그녀가 도망갈 곳은 없었다. 토비아스는 여급의 얼굴을 한 대 강하게 쳐 쓰러트리고는 아이를 안아 들었다. 그는 우는 아이를 잠깐 바라보더니 이윽고 펠리페에게 고개를 돌렸다.
 
“네 아들이냐?”

 그 말에 펠리페는 앞으로 기어가며 힘겹게 말을 토해냈다.

“그 아이는, 건드리지 마…….”
“내게도, 내게도 아이가 있었지. 딸이었어. 거트루트라고, 내가 직접 이름을 붙였었는데.”

 토비아스는 다시 아이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펠리페는 고통에 신음하면서 팔을 뻗었다.

“제발, 제발. 뭘 하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제발 하지 마.”
“네놈들이 쳐들어왔을 때 그 아이는 열다섯밖에 안 됐었지. 정말로 꽃다운 아가씨였는데, 그런데…….”
 
 그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그 떨림이 무슨 의미인지는 펠리페도 알고 있었다. 그는 힘겹게 무릎을 꿇고는 말했다.

“미안하다. 제발, 제발 용서해다오. 우리가 무슨 짓을 했는지는 잘 알아! 하지만, 하지만 그 아이는…….”
“죄가 없다고? 그렇겠지. 하지만 내 딸도 죄는 없었어!”

 그는 격앙된 목소리로 펠리페에게 소리쳤다.

“빌어먹을 너희 에스테야 개새끼들이 아무런 죄도 없는 내 딸을 죽였다! 잔인하게, 웃으면서!”
“안 돼, 안 돼, 멈춰!”

 펠리페는 다급한 외침에도 토비아스는 아이를 번쩍 들었다. 앞으로 자신에게 벌어질 일을 알고 있기라도 한 듯 카를은 더 크게 울기 시작했다.
“너도 똑같은 고통을 맛보게 해주마. 내가 겪었던 고통을, 내가 눈으로 보았던 그 끔찍한 슬픔을! 너도 눈앞에서 네 아이의 머리가 깨지는 것을 봐라!”
“안 돼!”

 토비아스는 카를을 바닥에 내던지려 했다. 그러자 동시에 펠리페가 자리를 박차고 앞으로 튀어나가며 단검을 뽑았다. 토비아스는 펠리페의 얼굴을 보고 움찔했다. 그가 본 펠리페의 얼굴은 감히 이 세상 사람이 지을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말 그대로 분노 그 자체였다. 그렇게 그가 머뭇거리는 사이 펠리페가 팔을 뻗었고 그의 단검은 토비아스의 옆구리를 뚫고 갈비뼈 사이로 쑥 들어갔다. 그리고 칼날을 돌리듯 비틀었다. 토비아스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비틀거렸다. 그의 손아귀에서 힘이 빠져나갔고 그 틈에 펠리페는 카를을 낚아채 품에 안았다. 그리고 토비아스는 쓰러졌다. 펠리페는 아이를 살펴보았다. 무사했다.
 펠리페는 아이를 꽉 끌어안으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이젠 괜찮단다.’ 그의 가슴에서 느껴지는 온기, 새 생명의 따듯함이 그의 온몸으로 번져갔다. 너무나도 오랜만에 느끼는, 오랫동안 느끼질 못했던 그 감각에 펠리페는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펠리페는 눈을 떴다. 그는 깊게 심호흡을 한 번 하더니 케리스에게 다가갔다. 코와 입에서는 피가 흐르고 눈가와 광대는 잔뜩 멍이 든 채 힘겹게 숨을 고르고 있었다. 그 모습에 다시금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누르며 펠리페가 말했다.

“자네 괜찮나?”

 그녀는 무어라 대답하려 했으나 대신 피 섞인 기침이 튀어나왔다. 그녀는 떠는 손으로 입가를 닦고는 엄지를 들어올렸다. 그는 한쪽 무릎을 꿇더니 케리스의 품에 아이를 안겼다.

“가만히 있게.”

 그리고 그는 토비아스를 향해 걸어갔다. 토비아스는 옆구리와 입에서 피를 주룩 흘리며 바닥에 앉아 있었는데 펠리페가 다가오는 것을 보자 그는 기겁하여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죄여오는 두려움에 고통이 더 심해지니 속도는 달팽이가 기어가는 수준이었다.
 어느새 펠리페는 토비아스의 코앞에 서 있었다. 그는 말없이 토비아스의 가슴을 발로 내려찍고는 단검이 박힌 부분을 짓밟았다. 토비아스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비명을 내질렀으나 그를 돕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는 동안 펠리페는 주변을 훑어보았다. 공포에 질려 마비된 사람들, 피투성이가 된 벽과 바닥, 산산이 조각난 탁자들, 그리고 여전히 타오르는 벽난로. 펠리페는 난로에 시선을 두고는 씩 미소 지었다.
 그가 갑자기 발을 떼더니 이윽고 토비아스의 팔을 붙들고는 질질 끌었다. 그러자 토비아스가 발버둥 쳤다.

“그만, 그만둬라! 그만두라고! 살려줘!”

 그의 발버둥이 목숨 구걸로 이어졌으나 펠리페는 아무 소리도 못 들은 듯이 행동했다. 어느새 펠리페는 벽난로 앞에 섰다. 그는 맹렬히 타오르는 불길을 한 번 뚫어지도록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토비아스에게로 눈을 돌렸다. 그는 자신에게 벌어질 끔찍한 결과에 대한 상상과 이어지는 두려움에 반쯤 미쳐 아무렇게나 말을 내뱉고 있었다.

“내 동료들이, 널, 널 가만두지 않을 거다! 많은 전우들이 이 근방에 있어! 그들이 달려올 거다! 날 도울 거라고! 풀어주지 않으면 그 대가를 처절하게 치를 거란 말이다! 이 빌어먹을…….”

 그때 펠리페가 입을 열었다.

“너는…….”

 펠리페는 말을 끌었다. 머리끝까지 뻗친 분노에 이성마저 조금씩 사라진 탓에 내뱉을 말을 고르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그는 느릿하게나마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너는 아이를 건드려서는 안 됐어.”
“제발, 제발, 살려…….”
“똑같은 고통을 맛보라고? 끔찍한 슬픔을 보라고?”

 펠리페는 토비아스의 멱살을 잡고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리고 속삭였다.

“너만 그런 고통을 겪은 줄 알아?”

 펠리페는 토비아스의 멱살을 잡더니 난로 안으로 힘껏 던졌다. 토비아스는 사람이 낼 수 있는 가장 끔찍한 비명을 내지르며 팔다리를 마구 휘저었다.

“아악! 으아아악!”

 토비아스는 어떻게든 벗어나려 애를 썼으나 펠리페는 그런 토비아스의 등을 발로 강하게 내려치고는 그대로 힘을 주어 짓눌렀다. 토비아스의 저항은 의미를 잃어버렸다. 시간이 지나자 토비아스의 애처로운 몸짓이 그의 비명과 함께 점점 잦아들었다. 하지만 펠리페는 토비아스의 비명이 멈추고 나서도 한참 동안 그를 짓밟으며 분노를 토해냈다. 그를 말린 사람은 어느새 일어나 다가온 케리스였다.

“그만 하세요, 펠리페 님. 죽었어요.”

 그제야 펠리페는 발을 떼었다. 그러자 갑작스레 잊고 있었던 고통이 몰아쳤다. 그는 고통을 참아내려고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몸을 숙였다. 잠깐의 침묵 끝에 한결 편해진 표정으로 그는 다시 몸을 일으키고는 케리스를 돌아보았다. 케리스는 아이를 토닥이며 물었다.

“괜찮으세요?”
“난 괜찮아. 자네는?”
“아무래도 코가 부러진 거 같아요.”

 그녀는 힘겹게 미소 지었다.

“그래도 죽지는 않아서 다행이에요.”

 그녀는 다시 흐르는 코피를 닦으며 뒤돌았다.

“빨리 여기서 나가죠. 여기 오래 있어 봐야 좋을 게 없을 거 같네요.”

 그녀는 턱짓으로 주변 사람들을 가리켰다. 그들은 여전히 공포에 질린 모습이었으나 그 두려움이 사라지기까지는 그다지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아 보였다. 펠리페는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나가 있게.”

 케리스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종종걸음으로 여관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펠리페는 자신의 칼이 박힌 채 바닥에 누워있는 시체에 다가갔다. 펠리페는 잠깐 그 생기 잃은 두 눈을 내려다보더니 이내 한쪽 무릎을 꿇고는 그 눈꺼풀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그는 일어서며 칼을 뽑았다. 그러자 옆구리에서 극심한 통증이 느껴졌다. 아까 토비아스에게 맞은 그 부위였다. 그는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옆구리를 잡고 여관 바깥으로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바깥에 나오니 밝은 빛이 쏟아졌고 펠리페는 반사적으로 눈을 가렸다. 새벽은 이미 지나 해가 하늘 위에 걸린 채였다. 빛을 막는 손가락 틈 사이로 케리스가 말을 이끌고 다가왔다.

“너무 많이 늦었어요. 당장 출발하죠. 패거리가 더 있을 수도 있잖아요?”
“그렇지……. 으윽.”

 또다시 옆구리에 통증을 느끼자 펠리페는 얼굴을 찌푸리며 옆구리에 손을 댔다. 케리스는 걱정하는 얼굴로 물었다.

“표정이 안 좋아 보이네요. 정말로 괜찮나요? 아닌 거 같은데.”
“괜찮다니까.”

 펠리페는 케리스를 물리치고는 거친 숨을 내뱉으며 말에 올라탔다. 그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멈추지를 않았음에도 그는 최대한 내색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출발하지.”
“저만 따라오세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케리스가 탄 말이 앞으로 내달렸고 펠리페가 뒤따랐다. 이제야 두 사람은 뤼텐베르크를 향해 나아갈 수 있었다.

 시간이 흘러 서녘이 조금씩 붉어지고 있음에도 여전히 뤼텐베르크는커녕 마중 나온 사람들조차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땅에 즐비한 시체와 이를 뜯어먹는 까마귀 떼뿐, 길은 여전히 그 끝을 알 수 없었다. 그러기를 한참, 결국 참다못한 펠리페가 케리스를 멈춰 세우더니 짜증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길을 잘못 든 건가?”
“아닐 걸요.”
“‘걸요’?”
“길은 맞게 가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다만…….”

 그녀가 말을 끊자 펠리페는 재촉하듯 물었다.

“다만?”
“조금……. 잠깐만, 들리세요?”

 그 말에 펠리페는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소리에 집중했다. 까마귀 울음, 새들의 날갯짓, 산들바람과 이에 흔들리는 나뭇가지, 그리고 희미하게 들려오는 말발굽 소리. 펠리페는 놀란 표정을 드러내며 말했다.

“말발굽 소리?”
“추격당하는 모양이네요. 빨리 여기서 벗어나죠.”

 케리스는 주저 없이 곧바로 박차를 가했고 펠리페도 뒤를 따랐다. 바람을 가르고 도망치면서 케리스가 외쳤다.

“놈들을 따돌려보려고 했는데 실패했네요! 차라리 그냥 뤼텐베르크로 달릴 걸 그랬어요!”
“내 말이!”

 그러던 그들의 뒤에서 아까 들었던 그 말발굽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뒤를 돌아보니 서너 명 정도의 기병들이 둘을 쫓아오고 있었다. 각자 손에는 쇠뇌나 창 따위를 들고 어깨나 투구 등에는 노란색과 검은색 천을 교차해 묶어 자신들의 소속을 드러내고 있었다.
 
“라우레니엔군이다!”

 펠리페는 그렇게 외치며 다시 앞을 보았다.

“대체 뤼텐베르크는 언제 도착하나!”
“지금쯤이면 슬슬 마중 나온 사람들이 보일 텐데!”

 그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기수가 손에 든 쇠뇌로 자신을 겨냥하는 모습이, 쇠뇌 위에서 번쩍이는 화살촉이 보였다. 펠리페가 다시 외쳤다.

“엎드려!”

 그러자 케리스는 재빨리 카를을 바투 끌어안으며 몸을 낮췄다. 펠리페는 그러는 대신 갈지자로 이리저리 말을 몰았고 기병은 그를 따라 쇠뇌를 겨눴다. 그러던 순간 기수가 쇠뇌를 쏘았다. 기수의 손가락이 움직이는 것을 본 펠리페는 재빨리 허벅지에 힘을 실으며 상체를 왼쪽으로 꺾듯이 숙였다. 그의 몸이 있던 자리를 화살이 무시무시한 소리를 울리며 훑고 지나갔다.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추격자들은 여럿이었고 날아오는 화살도 여럿이었다. 펠리페는 계속해서 몸을 이리저리 흔들었다.

“케리스! 대체 언제까지 이래야 하나!”
“조금만, 조금만 더요!”

 케리스는 아이와 앞을 번갈아 돌아보면서 외쳤다. 펠리페는 이를 갈며 고개를 돌렸다. 추격자들은 어느새 그의 옆에 다다라 쇠뇌를 들이밀고 있었다. 펠리페는 기합을 내지르며 팔을 위로 휘둘러 쇠뇌를 쳐냈다. 충격에 기수가 쇠뇌를 떨어트리자 펠리페는 다시 주먹으로 기수의 얼굴을 갈겼다. 충격에 기수가 뒤로 고꾸라지며 낙마했다. 고개를 반대로 돌리니 또 다른 추격자가 칼을 손에 쥔 채 옆으로 다가오는 게 보였다. 그는 펠리페를 노려보더니 가로로 칼을 휘둘렀다. 펠리페는 뒤로 드러누워 칼날을 피하고는 다시 몸을 일으켰다. 기수가 반대로 칼을 휘두르려고 하는 순간 펠리페는 손을 뻗어 칼날을 붙잡고 동시에 허리춤에서 칼을 뽑으며 휘둘렀다.

“아악!”

 기수가 소리를 지르며 칼을 놓치며 멀어졌다. 펠리페는 피가 흐르는 칼을 내던졌다. 손이 쓰라렸으나 그는 내색하지 않았다. 앞을 보니 케리스는 어느새 저 멀리 조그맣게 보일 정도로 멀리 가 있었고 그 너머에는 회색 성벽이 흐릿하게 보였다. 뤼텐베르크가 저 멀리 아른거렸다. 펠리페는 박차를 가해 속력을 높였다. 그리고 그 순간 뒤에서 쇠뇌 줄이 소리를 내었고 화살은 그대로 펠리페의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갔다.

“큭!”

 펠리페는 피가 흐르는 목덜미를 손으로 짚었다. 아직 추격자들은 둘이나 더 있었고 둘 다 펠리페를 죽일 듯 무시무시한 눈빛을 흘렸다. 펠리페는 다시 앞을 보았다. 뒤를 돌아볼 때가 아니었다.

“저 개 같은 새끼 참 끈질기네!”

 뒤에서 추격자들이 소리를 질러댔다. 펠리페는 신경 쓰지 않고 앞만 보고 말을 몰았다. 케리스가 좀 더 가까워져 크게 외치면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케리스!”
“조금만 기다려 봐요!”
 
 그러자 뒤에서 추격자가 기합을 내질렀다. 펠리페는 또다시 반사적으로 몸을 비틀어 뒤에서 튀어나온 칼날을 피하고는 다시 외쳤다.

“뭘 자꾸 기다리라는 거야!”

 그때 추격자들이 외쳤다.

“말을 쏴버려!”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말이 고통스레 울더니 펠리페의 눈앞에 갑자기 흙더미가 나타났다. 화살을 맞은 말이 바닥에 고꾸라지면서 펠리페를 바닥에 내친 것이었다. 돌멩이 가득한 흙바닥을 구르며 온몸이 으스러지듯이 고통스러웠다. 펠리페는 입에서 신음을 흘렸다. 앞으로 지나갔던 추격자들이 펠리페를 향해 되돌아왔다. 한 명이 외쳤다.

“잡았다!”

 펠리페는 고통을 참으며 눈을 떴다. 그의 눈에는 해를 등에 지고 그림자로 모습을 가린 기병 셋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 자식이 토비아스를 그렇게 만든 놈이야.”
“내 팔목도 그었어, 이 새끼가!”

 그 말에는 명백한 증오가 섞여 있었다. 펠리페는 떨어진 칼에 팔을 뻗었으나 칼은 너무 멀리 있었고 고통은 커다랬다. 추격자들은 그런 펠리페를 비웃으며 저마다 한 마디씩 내뱉었다.

“이 새끼도 토비아스와 똑같이 만들어버리자고.”
“모자는 내가 가질래.”
“그보다 그 애 딸린 갈보 년은? 도망간 모양인데.”
“그냥 둬. 시간 없어.”
“아까워라. 빨간 머리 쥐어뜯으며 박고 싶었는데.”

 추격자 하나가 말에서 내리더니 밧줄을 쥐고 펠리페에게 다가왔다. 그는 펠리페의 다리를 모으고는 밧줄을 걸기 시작했다. 펠리페는 어떻게든 벗어나려고 했으나 힘이 나지 않았다. 이젠 끝이라고 직감한 그는 포기하고 눈을 감았다.
 그때였다. 멀리서 케리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손 떼시지!”

 그 말에 추격자들이 모두 고개를 돌렸다. 모두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허둥대며 고삐를 잡아당겼다. 하지만 곧바로 총성이 울리고 화살이 날아들었다. 조금 전까지 의기양양하던 추격자들은 총알과 화살의 바람 속에서 허우적댔다. 그 와중에 펠리페는 자기 발을 묶으려던 기수가 도망치려고 하자 최대한 힘을 주어 다리를 가슴 쪽으로 당기고는 그를 향해 뻗었다. 그가 짧게 소리를 지르며 멈춰 섰다. 그 순간 그가 고개를 오른쪽으로 확 꺾더니 머리에서 피를 뿜으며 그대로 고꾸라졌다.

“펠리페 님!”

 곧이어 케리스가 병사들을 대동하고는 펠리페를 부르며 나타났다. 그녀는 펠리페를 내려다보더니 빙그레 웃었다.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기다리라고.”
“기다리다가, 죽을 뻔, 했잖아…….”

 케리스는 다시 미소를 짓고는 고개를 돌려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타난 사람은 다름 아닌 트리스탄이었다. 그는 케리스와 몇 마디를 더 나누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펠리페를 부축하며 일으켰다.

“가시죠,”

 펠리페가 고통에 신음하자 트리스탄은 펠리페의 팔을 자기 어깨에 두르며 무덤덤하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낙마해서 바닥에 굴렀으니 뼈가 어긋나거나 부러졌을 수도 있겠군요. 그래도 다행입니다. 목이 부러져서 찍소리도 못하고 뒈지진 않았으니. 단단하신 분이네.”

 펠리페는 무례하기 짝이 없는 그의 말에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그럴 힘도 없었다. 트리스탄은 펠리페를 수레 위에 태우더니 이내 케리스처럼 빙그레 미소 지으며 말했다.

“뤼텐베르크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펠리페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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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즈베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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