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쇠의 기사


01. 오펜슈타인의 섭정 1


 오펜슈타인이 불타오르고 아델하이드가 멀리 동방으로 떠난 지 이틀이 지났다. 고작 이틀뿐이었으나 그날, 그리고 그 이후는 펠리페에게 마치 영원같이 느껴졌다. 섬기던 이가 죽고 그의 연인은 사라졌다. 그리고 자신에게 남은 것은 그 두 사람의 아이 뿐. 펠리페는 또다시 세상에 외로이 남겨졌다.

 그 이틀 동안 펠리페는 자꾸 보채며 우는 카를을 안은 채 어찌할 바를 몰라 온몸이 흠뻑 젖을 정도로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아이를 안은 채 부드러운 목소리로 자장가를 몇 번이고 불러주며 등을 토닥였으나 아이는 계속 칭얼거렸다. 결국, 그는 간절히 도움을 바라는 표정으로, 카를에게 젖을 물려줄 여인을 찾아 칭얼거리는 아이를 안고 야영지를 헤매었다.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용병과 종군 민간인들의 차디찬 냉대와 비웃음뿐, 한참을 헤매던 그는 전대에 있는 돈을 모조리 탕진하고 나서야 유모를 겨우 찾을 수 있었다. 그렇게 참담한 이틀이 지나갔다.

 사흘째 되는 날 아침 펠리페는 새근새근 잠든 카를을 조심스레 유모에게 맡기고 천막 바깥으로 나섰다. 그는 주변을 슬쩍 훑어보았다. 우중충한 날씨와 진동하는 시궁창 냄새 사이로 핼쑥하고 초췌한 얼굴의 병사들이 창대를 바닥에 질질 끌며 돌아다니는데 그들의 눈동자에는 용기나 긍지 따위의 미덕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런 그들 머리 위로 힘없이 나부끼는, 하얀 숭어가 그려진 깃발만이 이들이 한때 악마공과 함께 전선을 누비며 적들을 창끝으로 밀어붙이던 그 ‘하얀 숭어 군단’이라는 것을 증명했다.

 펠리페는 옅게 섞이는 피비린내와 절망으로부터 코를 틀어막고는 병사들 사이를 헤치며 가장 큰 천막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천막 입구 사이로 오랜 친구 안젤로가 보였다. 덥수룩한 수염이 인상적인 이 용병대장은 용병대 장교들과 함께 지도를 보며 이것저것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펠리페가 안으로 들어가려 하니 천막 앞의 용병들이 그를 가로막았다.


“당신이 뭐 하는 사람인지는 모르겠는데, 여긴 당신 같은 종군 민간인 따위가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야. 알아?”


 그를 가로막은 용병은 처음부터 거칠게 반응하며 펠리페를 밀쳤다. 펠리페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파리한 얼굴에는 생기라고는 없어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만 같은 것이, 그 얼굴을 보고 펠리페는 헛웃음이 나오는 것을 참았다. 주먹 한 번이면 얼굴이 뭉개져서는 진흙 바닥에 처박히겠지, 펠리페의 머릿속에서 그런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펠리페가 생각을 실행에 옮길지 말지 생각하기도 전에 상황이 끝나버렸다. 천막 안에서 오랜 친구가 그를 부른 것이다.


“들여보내. 아는 사람이야.”


 그 말을 듣자 용병들은 펠리페를 한 번 아니꼽다는 눈초리로 흘겨보고는 입술을 씹으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펠리페는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여러 번 부러졌다 다시 붙어 어긋난 병사의 코를 다시 한 번 부러트리고 싶은 충동이 머리끝까지 솟아올랐다. 하지만 그가 한 것은 손으로 마음에 안 드는 병사의 가슴팍을 밀어내 길을 좀 더 트는 것뿐이었다.

 뒤에서 들려오는 투덜거림을 뒤로하고 안으로 들어서니 안젤로가 책상에 손을 짚은 채 서서 펠리페를 보고 있었다. 초췌하게 가라앉은 눈가는 검은 물감을 뿌린 것 같은 깊은 그림자가 장막을 드리웠고 피로가 무거운 몸으로 누르는 눈은 감기지 않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그가 허리를 펴며 말했다.


“여긴 무슨 일이야, 친구.”


 그의 말에 펠리페는 주변 사람들을 슬쩍 돌아보았다.


“얘기 좀 했으면 좋겠는데.”


 그러자 안젤로는 잠깐 헛기침을 하더니 옆에 있던 이들에게 손짓하며 말했다.


“오늘은 이쯤 하세. 나가보게.”


 사람들이 나가자 그는 자리에 앉으며 콧수염으로 뒤덮인 입가를 손으로 한 번 문질렀다. 펠리페가 자신을 따라 의자에 앉자 그가 말했다.


“단둘이 얘기할 이야기라면 역시 그거밖에 없는 건가?”

“그래.”


 펠리페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오펜슈타인에 가야 해.”


 그의 말에 안젤로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대뜸 한숨부터 내쉬었다. 그는 눈가를 문지르고는 앞에 놓인 술잔을 들이켰다. 지저분한 콧수염 끝에 물방울이 걸려 떨어지고 나서야 그가 입을 열었다.


“우린 지금 서쪽으로 가고 있어. 오펜슈타인과는 반대 방향이지. 지금 오펜슈타인으로 방향을 틀기에는 너무 늦었고 병사들도…….”

“엉망진창에 싸울 의지도 없지. 알아. 하지만…….”

“게다가 오펜슈타인에는 엄청나게 많은 병력도 있어.”


 안젤로는 깍지 낀 손으로 이마를 받치며 중얼거렸다.


“솔직히 라우레니엔군이 오펜슈타인에서 나오면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을지 걱정이야.”

“그래…….”


 이런 말이 나올 것이라고 예상은 했으나 친구의 반응은 너무나도 단호했다. 펠리페는 자기 얼굴에 떠오르는 실망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고, 바보 같은 요청이었다고 되뇌는 수밖에 없었다.


“정말 미안하군.”

“아니, 아니야. 그런 요청을 한 게 잘못이지.”


 안젤로는 다른 사람이 쓰던, 아직 술이 남은 잔을 들어 바닥에 홱 뿌리고는 거기다 새로이 술을 담아 펠리페에게 건넸다. 펠리페는 잔을 받아들였으나 입에 대지는 않았다. 도저히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그는 술잔을 내려다보았다. 조금씩 흔들리는 물결 아래에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기옌, 아델하이드, 카를, 그리고 오펜슈타인의 두 열쇠가 다음으로 떠올랐다. 그리고 떠오르는 형상은 점점 과거로 날아갔다. 과거가 펠리페를 붙잡기 전에 그는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아무것도 비치지 않았다.


“안색이 안 좋은데.”


 안젤로의 말에 펠리페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는 손사래를 치며 웃음을 지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하지만 펠리페의 웃음은 그다지 밝지 않았다. 안젤로는 걱정스레 그를 바라보았다.


“내 말이 너무 충격적이었나?”

“아니래도.”


 그제야 안젤로는 허 웃으며 빙그레 미소 지었다. 그는 술잔을 크게 들이켜고는 입을 닦아냈다.


“하이메에게 가서 도움을 받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해. 혼자서는 어쩔 수 없어. 그 양반도 오펜슈타인을 노리고 있을 거 아니야.”

“그렇지.”


 펠리페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그게 문제야.”

“그게 문제라니?”

“하이메 그 양반은 자존심 강하고 야심만 넘칠 뿐이지, 기옌 공과 비교하면 무능하기 짝이 없어. 내가 도움을 요청한다면 나를 이용해서 오펜슈타인을 빼앗으려고 들겠지.”


 펠리페는 그제야 술을 들이켰다. 그는 책상을 내려치듯 술잔을 내려놓고 말했다.


“아델하이드 공은 나를 믿고 내게 섭정 자리를 줬어. 섭정공이 되어야 할 사람은 나야. 빌어먹을 하이메 그놈이 아니라!”

“워, 진정하라고.”


 안젤로는 펠리페를 진정시키며 빈 술잔을 다시 채웠다.


“그 양반이 그래도 일단은 우리 고용주잖아.”

“네 고용주겠지. 지금 그놈과 나는 아무런 상관도 없어.”


 펠리페는 친구가 따라준 술을 또다시 단번에 들이켜 목을 축였다. 그는 잠깐 고개를 숙이며 무어라 중얼거리더니 다시 고개를 들었다.


“어찌됐든 간에 난 오펜슈타인으로 가겠어. 일단 가보면……뭐든 방도가 생기겠지.”

“정말로 안이하기 짝이 없는 생각이야, 펠리페. 다시 생각해보라고.”


 하지만 안젤로의 말에도 펠리페는 고개만 가로저을 뿐이었다. 안젤로도 지난 삼 년 동안 에스테야 왕 하이메가 보여준 추잡한 짓거리를 떠올리고는 더 이상 그를 설득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걱정스러운 눈치였다.


“그래도, 설마 바로 오펜슈타인으로 갈 건 아니지?”

“그럴 생각이었는데.”

“빌어먹을, 너 진짜 제정신 아니구나. 지금 오펜슈타인으로 들어갈 수는 있을 거 같아? 거긴 지금 지옥이야! 그런 지옥에 이제 돌 지난 아이를 끌고 들어가겠다고?”


 펠리페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손으로 머리를 짚으며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안젤로의 말 그대로였다. 미친 사람처럼 오펜슈타인으로 가야 한다는 말만 되풀이하기만 했지 계획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그는 한참을 침묵했다. 지금껏 본적이 없는 모습이었다. 펠리페는 안젤로가 술잔을 두 번 비우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어쩌지?”


 안젤로는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오래 생각하더니 하는 말이 고작 ‘어쩌지’냐?”


 펠리페는 대답하지 않았다. 안젤로는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내뱉고는 술잔을 손에 든 채 말했다.


“좀 쉬어.”

“그래야겠어.”


 펠리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바깥으로 나섰다. 하늘은 여전히 우중충했고 피비린내 섞인 시궁창 냄새가 펠리페의 코를 찔렀다. 그러다 자기 앞을 지나가는 병사들의 초췌한 얼굴을 보고 펠리페는 자기가 지난 이틀간 거의 잠을 안 잤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갑자기 몸이 무거워졌다. 그는 발바닥을 질질 끌며 자기 천막으로 돌아갔다. 유모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무어라 말을 했다. 하지만 펠리페는 그 말이 들리지 않았다. 그는 대답 대신 손만 내젓고는 그대로 간이침대 위로 무너졌다.

 갖가지 형상이 펠리페의 눈앞에 지나갔다. 기억 저편 멀리 던져놓았던 지난 삼 년의 기억들이 다시 떠올랐다. 아델하이드, 기옌, 카를, 안젤로, 오펜슈타인, 라우레니엔, 마차, 배, 트리스탄. 쉴 새 없이 흐르던 그의 기억이 트리스탄의 얼굴에서 갑자기 멈췄다. 그리고 그는 눈을 떴다.

 펠리페는 벌떡 일어나 바깥으로 뛰쳐나왔다. 그는 주저 없이 바로 안젤로가 있는 천막으로 향했다. 아까 그 병사들이 그를 막으려 했으나 펠리페는 제지를 뿌리치고 안으로 들어섰다. 홀로 술을 마시던 그가 펠리페를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트리스탄!”


 펠리페가 말했다.


“그러니까, 트, 트리스탄이 어, 어, 어디서 왔지?”


 안젤로는 더듬거리는 펠리페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눈만 껌뻑였다.


“갑자기 뭔 소리야?”

“트리스탄 말이야! 오펜슈타인 공 탈출시킬 때 왔던!”


 펠리페가 폭탄 터트리듯 외친 말에 안젤로는 여전히 당혹스러운 표정을 한 채 대답했다.


“그야, 콘라트가 보냈지. 뤼텐베르크에서.”

“그럼 뤼텐베르크로 가야겠어!”

“진정하고 천천히 얘기해!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그제야 펠리페는 깊게 심호흡을 하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는 한참을 뜸을 들이더니 책상에 손을 얹으며 말을 꺼냈다.


“콘라트에게 가야겠어.”

“그래, 방금 말했잖아. 갑자기 왜?”

“그러니까, 아델하이드 공을 탈출시킨 계획을 아는 사람은 너와 나, 히에로니무스 대주교님, 그리고 그 사람뿐이잖아?”


 안젤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 일은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아. 맞지?”

“그렇지.”

“게다가 뤼텐베르크는 전장에서는 멀면서도 오펜슈타인에서는 멀지 않잖아? 잠시 몸을 맡기기엔 최적의 장소야.”

“그래, 맞아. 하지만 우린 그쪽으로 못 가. 서쪽 말고는 아무 데도 못 간다고.”


 펠리페는 고개를 저었다.


“같이 가달라는 게 아니야. 어차피 도움도 못 줄 거라면서. 혼자 갈 거야.”

“혼자라고?”

“아이도 데리고 가야겠지.”


 그 말에 안젤로의 표정이 당혹스러움에서 걱정으로 변했다. 그리고 수염이 무성한 턱을 가리며 말했다.


“너도 알겠지만, 북쪽엔 라우레니엔군이 판을 치고 있어. 사방을 쑤시고 다니면서 사람들에게 에스테야 놈이다, 아니면 부역자다, 이런 소리를 하며 죽여대고 있다고. 거긴 생지옥이야, 펠리페. 그 정신 나간 병신들이 너도 죽이려 들 거야.”

“알아.”


 펠리페는 그러나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가 고개를 들었다. 불안감으로 흔들리던 아까와는 다르게, 그의 눈빛은 밝게 빛나는 횃불처럼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 눈빛을 보고 안젤로는 입을 다물었다.


“그래도 가야겠어.”

“그래. 알았어. 언제 갈 생각인데?”

“최대한 빨리.”


 안젤로가 고개를 끄덕이자 펠리페 역시 고개를 끄덕이고는 뒤돌아 바깥으로 나섰다. 어느새 그의 머리에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그는 빠른 걸음으로 자기 천막으로 들어갔다. 들어가니 카를을 안은 유모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 오셨군요.”


 온화하게 짓는 옅은 미소와 무고하고 맑은 눈동자가 그의 눈에 아른거렸다. 펠리페는 그녀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리 없는 유모는 고용주가 말없이 한참 자기 얼굴을 보고 있으니 당황스러움과 쑥스러움이 섞인 표정으로 물었다.


“저기, 왜 그러시나요?”


 펠리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는 눈가를 잠깐 문지르고는 다시 유모를 바라보았다.


“이제 그만 일해도 좋소.”

“네?”


 일방적인 통보에 유모의 얼굴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펠리페는 유모에게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를 쓰며 차갑게 말했다.


“해고라고.”

“갑자기 왜…….”

“이유는 묻지 마시오. 아이는 침대에 두게.”


 그러면서 그는 전대를 풀고 안을 열었다. 그는 전대에서 금화 두 닢을 꺼내 유모의 손에 쥐어주었다. 그러자 평범한 종군 민간인으로 돌아간 여인의 눈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휘둥그레졌다. 그녀는 자기 손에 들어온 황금색 동그라미 두 개를 보며 말을 잇지 못하고 펠리페와 금화를 돌아보기만 했다. 그녀는 쿵쾅거리는 가슴을 침을 꼴깍 삼키며 진정시키고는 힘겹게 물었다.


“이, 이건 너무…….”

“지금까지의 헌신에 대한 보답이라고 생각하시오.”

“고작 이틀뿐이었는데요?”


 펠리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차갑게 선고할 뿐이었다.


“나가보게.”


 여인은 혼이 빠져나간 것만 같은 모습으로 금화를 꽉 쥔 채 바깥으로 나섰다. 여인이 바깥으로 사라지자 펠리페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는 얼굴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그리고 시선을 카를에게로 옮겼다. 막 젖을 먹고 잠들었는지 아이는 고르게 숨을 내쉬며 잠들어있었다.

 펠리페는 얼굴을 감쌌다. 또다시 머리가 꼬여갔다. 유모를 보낸 게 잘한 일이었을까, 그 질문이 그의 마음에서 폭풍이 되어 휘몰아쳤다.

 아이를 데리고 폭력과 증오가 넘실대는 땅을 지나야 한다. 그동안 자신을 대신해 카를을 먹여주고 감싸주고 재워줄 사람은 분명 필요했다. 하지만 아무 죄도 없는, 아무것도 모르는 여인을 끌고 다니면서, 성공 여부가 확실치도 않은 계략에 억지로 참여시킬 권리가 펠리페에게는 없었다.

 계획이라는 단어를 생각하니 펠리페의 눈앞이 더더욱 캄캄해졌다. 오펜슈타인 섭정공이 된다는 거창한 목표만 있을 뿐 아무런 계획도 전략도 그를 도울 사람도 없었다. 그에게 가진 것이라고는 열쇠와 반지, 그리고 아이뿐이었다.

 펠리페는 얼굴을 감싼 손을 내려놓았다. 그는 기옌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전략이라는 것은 뼈대만 세워놓고, 살은 임기응변으로 붙이고 떼는 것이다.’ 더는 생각에 잠길 때가 아니었다. 펠리페는 지금 뼈대를 세워야 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죽 겉옷을 걸치고 구석에 처박아뒀던 칼을 꺼내 허리띠에 단단히 매었다. 준비가 끝나자 그는 고개를 돌렸다. 아이를 감싸는 강보에 싸인 그대로 새근새근 잠든 아이를 잠깐 바라보던 그는 옆에 있던 얇은 이불을 들고 아이를 안은 채 서로의 몸을 꽉 묶었다. 어쩌면 이번이 자신의 마지막일 수도 있다. 펠리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잠든 아이의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고는 바깥으로 나섰다.

 그의 앞에 여러 명의 병사가 몰려있었다. 펠리페는 반사적으로 멈춰 서서 아이를 꽉 안으며 병사들을 날카로운 눈빛으로 훑어보았다. 하지만 그럴 필요는 없었다. 병사 중 하나가 펠리페에게 내민 것은 다름 아닌 말 고삐였다. 그때 병사들 사이를 가르고 안젤로가 나타났다.


“식량하고 필요한 물건은 안장에 실어놨어. 젖먹이에게 필요한 건 없겠지만.”


 그리고 펠리페와 안젤로는 짧게, 그리고 조심스럽게 포옹을 나누었다. 그리고 안젤로는 한 걸음 물러서더니 손에 쥔 물건을 펠리페에게 건넸다. 하얀 깃털 장식이 달린 챙 넓은 모자였다. 펠리페가 설명을 요구하려던 순간 안젤로가 선수를 쳤다.


“내 모자야. 나중에 와서 돌려달라고.”


 펠리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짧게 미소로 답하고는 모자를 머리에 얹었다. 내리는 빗방울에 챙이 아래로 가라앉았으나 펠리페는 개의치 않고 병사가 내민 고삐를 쥐고 능숙하게 안장에 올랐다. 펠리페는 다시 한 번 아이를 꽉 안으며 안색을 살펴보았다. 아이는 여전히 고요하게 잠든 채였다. 그 모습을 눈에 각인시키고 나서야 펠리페는 오른손으로 고삐를 꽉 붙들었다. 그때 안젤로가 물었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는 알지?”

“북쪽으로 곧장.”

“어디가 북쪽인지는 알고?”


 그러자 펠리페는 턱짓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해가 가라앉는 지평선 너머였다.


“저기가 서쪽일 테니…….”


 그러면서 펠리페는 고개를 오른쪽으로 꺾었다.


“저기가 북쪽이겠지.”

“몇 번이고 생각한 거지만 넌 정말 제정신이 아니야. 알아?”


 안젤로는 혀를 차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펠리페는 어떻게든 그 말을 되받으려고 했지만 그로서는 딱히 떠오르는 말이 없었다. 최소한 오늘을 포함한 지난 사흘간만큼은 안젤로가 구구절절 옳았다. 안젤로는 혀를 차는 것을 그만두고 손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북쪽은 저쪽이야. 네가 가리킨 곳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지.”


 그러면서 그는 펠리페의 손을 꽉 붙잡았다.


“몸조심해라. 몇 없는 친구가 어디 성벽이나 나뭇가지에 목이 매달린 꼴은 보고 싶지 않으니까.”

“내가 할 말이야.”


 안젤로가 손을 놓았다. 그러자 펠리페는 더 이상의 작별인사 없이 바로 박차를 가하며 앞으로 튀어나갔다. 갈색 말이 길게 울며 갈기를 휘날렸다. 펠리페가 빗방울과 차가운 바람을 뚫고 북쪽 너머로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던 안젤로는 이윽고 친구와 아이가 저 멀리 하나의 작은 그림자가 되자 고개를 돌렸다.


“우리도 갈 준비를 해야겠군. 다들 짐 챙겨! 한 시간 이내로 떠난다!”


 그러자 병사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빗속을 뛰어다니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안젤로의 얼굴은 불안으로 굳어졌다.


'열쇠의 기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열쇠의 기사 03.  (0) 2017.02.28
열쇠의 기사 02.  (0) 2017.01.19
열쇠의 기사 00.  (0) 2016.10.23
Posted by 즈베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