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쇠의 기사


00.


 오펜슈타인은 불타고 있었다.

 포위한지 꼬박 열 달이 되던 날, 결국 성벽이 무너졌다. 그러자 독수리 깃발을 진 병사들이 무너진 성벽을 향해 몰려들었다. 반대쪽에서는 별 깃발을 진 병사들이 상대를 막아섰다. 오랜 전쟁 덕에 생긴 서로에 대한 증오심으로 불타오르는 두 나라의 병사들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함성을 내뱉으며 서로에게 달려들었다. 시간이 지나 결국 방어선은 무너졌고 독수리 깃발을 진 병사들이 해일처럼 도시 안으로 밀려들어왔다. 그러나 싸움은 계속됐다.

 한때 시민들을 위해 맑은 물을 뿜어내던 분수는 그 위에 쓰러져 죽어가는 병사들이 흘린 피로 붉게 물들었다. 한때 수많은 이들이 오가며 도시의 활기 그 자체를 상징하던 광장과 시장에는 분노와 증오에 찬 이들이 서로를 향해 내뿜는 살기로 가득 찼다. 한때 술과 도박과 음모와 사랑이 오가던 술집에는 비탄과 저주만이 오갔다.

 그렇게 오펜슈타인이 피와 불꽃에 삼켜지는 가운데, 아직 화마가 미치지 않은 도시 한 구석에서 두 사람이, 정확히는 여인의 품에 안겨 잠든 아이까지 합해 셋이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굳어가는 피처럼 검붉은 갑옷차림의 기사는 손에 피로 물든 폴액스를 쥔 채 앞으로 나아갔고 그의 뒤에는 검은 머리쓰개 사이로 황금빛 머리카락이 비치는 여인이 품에 갓 돌이 지난 아이를 안은 채 기사를 따랐다.

 기사는 여인의 손을 잡아끌었다. 여인의 목에 걸린 황금색 열쇠가 잠깐 흔들렸다. 여인은 뒤를 돌아보았다. 한 때 두 사람의 보금자리였던 성채 역시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여인은 가슴이 찢어질 것처럼 아팠다.


“아델하이드.”


 가슴아파하는 아내를 본 기사가 그녀를 다그쳤다.


“아델하이드!”


 아델하이드는 대답 없이 고개만 앞으로 돌렸다. 그녀가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슬픔 가득한 낯빛으로 기사를 바라보자 그는 그녀의 얼굴을 고양이 어르듯 손가락으로 슥 문질렀다. 울먹이는 눈동자를 보자 기사 역시 가슴속이 마구 난도질당하는 기분이었다. 그는 아내의 뒤에서 불타오르는 성채를 슬쩍 바라보았다.

 지난 일 년의 추억이, 적으로 만났으나 연인이 된 두 사람의 기억이 모조리 저 성채 안에서 불타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기사는 마음을 다잡았다. 불타오른 추억은 다시 만들면 그만이니까.

 그는 자신이 낼 수 있는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아내를 진정시키며 말했다.


“뒤돌아볼 시간 없어. 우린 가야해.”

“기옌…….”


 그녀가 말을 흐리자 기옌은 그녀의 뺨을 손바닥으로 말없이 어루만졌다. 그는 아내의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엄지로 훑었다. 그리고 기옌은 시선을 연인의 품에 안겨 세상모르고 자는 아이에게로 옮겼다. 그가 이름을 속삭였다.


“카를.”


 아비의 말에 아이가 반응하듯 조그마한 손을 꼼지락거렸다. 그 모습을 보던 기옌은 어느새 우수로 가득 찬 눈이 되어 아내를 바라보았다.


“여기만 벗어나면 멀리 동쪽으로 도망갈 수 있어. 이 빌어먹을 곳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있다고. 당신 아비도, 내 형제들도 없는 곳으로. 거기서 우리 셋이 같이 사는 거야.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영원히. 빨리 가자. 펠리페가 기다리고 있을 거야.”


 아델하이드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불타오르는 성채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기옌의 손에 이끌리면서도 계속 그 성채를 바라보다 눈을 질끈 감으며 다시 앞을 보았다. 그리고 그녀는 품에 안겨 새근새근 잠든 아들을 바라보았다. ‘너는 참 강한 아이구나.’ 그녀는 작게 중얼거렸다. 피와 불꽃으로 물들어가는 여기 이곳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잠들 수 있다니.

 갑자기 기옌이 멈춰 섰다. 그러더니 폴액스를 양손에 쥐며 아델하이드를 가렸다. 아델하이드가 연인의 어깨 너머로 시선을 돌아보았을 때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입에서 놀라 소리를 내었다. 라우레니엔을 상징하는 독수리 문양이 그려진 갑옷을 입은 병사들이 횃불을 쳐들고 나타난 것이었다. 처음에 그들은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다가 이내 셋을 발견하고는 그들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여기다! 악마 놈이다!”


 그러더니 병사들이 기옌을 둘러쌌다. 하지만 그들은 기옌을 위협하기만 할 뿐 선뜻 앞으로 나서지 못했다. 오랜 두려움이 병사들의 심장을 움켜쥔 탓이었다. 기옌은 아내와 아들을 팔로 가렸다.


“물러서.”


 기옌은 그렇게 말하고는 폴액스를 양손에 꽉 쥐고 병사들을 노려보았다. 그 흉흉한 눈빛에 병사들은 식은땀을 흘리며 마른 침을 삼켜댔다. 그때 병사 하나가 외쳤다.


“우, 우리가 훨씬 수도 많아! 유리하다고! 공격해!”


 그러자 깃털 달린 모자를 쓴 병사가 가장 먼저 칼을 들고 기옌에게 달려들었다. 그가 칼을 아래로 내려찍자 기옌은 가볍게 몸을 틀어 피하고는 창대로 다리를 걸어 쓰러트리고 곧바로 날카로운 송곳이 달린 창대 반대쪽 끝으로 목덜미를 찍었다. 병사는 불운하게도 목에서 피를 뿜으며 천천히 죽어갔다. 기옌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창을 뽑았다.


“아, 악마 새끼…….”


 병사들의 심장을 휘어잡은 두려움이 점점 번져나갔다. 겨우 단 한 명이 죽었을 뿐인데도 병사들은 마치 수천의 동료가 죽은 듯 주춤주춤 물러서기 시작했다. 기옌은 그들을 보며 소리쳤다.


“벌써 겁먹었나? 덤벼! 개자식들아!”


 기옌의 도발에도 병사들은 애꿎은 칼만 이리저리 흔들 뿐 앞으로 나설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오히려 기옌이 앞으로 나섰다. 그는 폴액스를 강하게 움켜쥐더니 그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갑작스러운 돌진에 당황한 병사들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가장 가까이 있던 불운한 병사는 날아드는 도끼날에 얼굴이 박살나 피를 흩뿌리며 바닥에 쓰러졌다. 또 다른 동료가 바닥에 엎어지자 남은 이들도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듯 칼을 들고 애처롭게 저항했다. 병사 하나가 칼을 가로로 휘두르자 기옌은 고개를 틀며 피하고 몸을 숙이더니 창대로 등을 후려치고 발을 걸어 쓰러트렸다. 그가 쓰러진 적을 내리찍는 그 순간 주춤거리던 마지막 병사가 용기를 내어 기옌에게 달려들었다.


“기옌!”


 자신을 죽이려는 이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는데도 기옌은 전혀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의 창이 너무 깊게 박혀 빠르게 빼낼 수가 없었던 탓이었다. 그는 창대에서 손을 떼고 칼에 손을 가져갔다. 그 순간 병사가 기합을 지르며 기옌의 얼굴을 향해 칼날을 휘둘렀고 기옌은 다급하게 칼날을 뽑았다. 상대의 칼날이 기옌의 눈앞에서 자신이 뽑은 칼날에 막혔다. 기이한 행운이었다. 하지만 기옌은 그 행운을 느낄 새가 없었다. 그는 재빨리 칼을 휘둘러 상대의 칼을 쳐내 밀어내고는 상대에게 칼끝을 겨누며 손잡이를 얼굴 옆에 붙였다. 온힘을 다한 공격이 막히자 상대의 얼굴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여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기옌이 자세를 바꿔가며 천천히 병사에게 다가가자 병사는 두려움에 압도당해 떠는 손을 주체하지 못했다. 병사의 손에 들린 칼이 요란하게 떨렸다.



 그때 뒤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오더니 또 다른 병사들이 나타났다. 동료의 비명을 듣고 옆 골목에서 급히 이쪽으로 온 모양이었다.


“저기다!”

“잡아!”


 적들이 다가오자 기옌은 갑자기 눈앞에 있는 상대에게 달려들더니 몸을 앞으로 날리며 칼날을 내질렀다. 상대는 피하지 못했다. 목을 꿰뚫고 칼날이 반대쪽으로 피와 뼛조각과 함께 튀어나와 신선한 공기를 마셨다. 그의 목에서 공기가 빠지는 끔찍한 소리가 칼날이 꿰뚫은 자리에서 새어나왔다. 기옌은 칼날을 뽑으며 뒤돌아 다시 방어자세를 취했다. 뒤에서 병사가 바닥에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저 새끼가!”


 병사들이 욕을 내뱉었다. 이들은 조금 전의 병사와는 다르게 두 눈에 용기가 서려 있었다. 그들의 얼굴은 두려움이 아닌 분노로 새빨갛게 물들었고 무기를 쥔 그들의 손은 성벽처럼 견고했다. 하지만 그건 기옌도, 아델하이드도 마찬가지였다.


“기옌! 엎드려!”


 갑작스레 들려오는 아내의 명령에 따라 기옌이 고개를 숙이며 몸을 낮추자 병사들의 눈에 뒤에 서 있던 그들의 공주가 보였다. 그녀의 보드라운 손에는 차륜식 권총이 하나 들려있었다. 아델하이드는 아이의 머리를 감싸며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화약접시에서 불꽃이 피어오르고 연기가 피어오르더니 총구가 요란한 소리와 함께 불을 뿜었다. 총알은 기옌이 서 있던 자리를 지나 자신들의 공주가 자신들에게 총을 겨누는 상황에 당황하여 주춤하던 병사들에게로 날아갔다.

 총알이 앞에 있던 병사의 갑옷을 뚫고 그대로 가슴팍에 박혔다. 그는 악 소리를 지르며 뒤로 넘어갔고 뒤에 있던 병사는 아델하이드, 기옌, 그리고 쓰러진 아군들을 번갈아 돌아보며 면면에 당혹감을 드러냈다.

 기옌은 그 틈에 그 병사에게 달려들어 가슴팍에 칼날을 찔러 넣었다. 그가 칼날을 뽑아내자 사방으로 피가 튀고 병사의 하얀 갬비슨이 피로 물들어갔다. 그가 뒤로 넘어가는 것을 보지도 않고 기옌은 차오르는 숨을 한번 길게 들이쉬고는 칼을 집어넣으며 여전히 연기가 피어오르는 권총을 손에 쥔 아델하이드에게 다가갔다.


“괜찮아?”


 아델하이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품에 안긴 아이를 바라보았다. 격렬한 움직임에도 반응이 없는 것을 보고 두 사람은 순간적으로 심장이 멎을 뻔 했다. 하지만 아이가 곧 깨어나 우는 것을 보고 이내 안도했다. 그때 총에 맞은 병사가 힘겹게 중얼거렸다.


“어, 어째서…….”


 둘이 고개를 돌렸다. 병사는 피를 토해내며 아델하이드를 흐려져 가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공주님, 공주님을, 구하려고, 한 건데, 어째서…….”


 병사는 잦아들어가는 목소리를 쥐어짜내어 말하려고 했으나 그러지 못했다. 이윽고 그의 두 눈에 어둠이 가득 차고, 배신감과 두려움으로 알아들을 수 없는 저주의 말을 내뱉다 그대로 멈췄다. 아델하이드는 고개를 숙였다. 총을 쥔 그녀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기옌은 떨리는 아델하이드의 손목을 거칠게 붙들었다.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호수를 연상케 하는 파란 두 눈동자가 죄책감으로 마구 흔들리고 있었다. 기옌은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이럴 때가 아니야. 가자.”


 기옌은 그녀의 팔을 붙든 채 앞으로 내달렸다. 남편의 손에 이끌려 나아가며 아델하이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자신은 잘못이 없다고, 그런 생각을 몇 번이고 되뇌었다. 기옌과 함께 탈출하기로 마음먹은 순간부터 이미 그녀는 반역자였다. 자책하기엔 이미 늦었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들이 달려가는 동안 여기저기서 여러 소리가 아이의 울음소리에 섞여 들려왔다. 대부분은 그들에게 안 좋은 의미가 담긴 소리들뿐이었다. 아군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고 오직 적들의 말과 다급한 발걸음만 들려왔다.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는, 그리고 점점 가까워지는 그들의 발걸음에도 기옌은 아이의 울음소리 때문에 멈출 수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이리저리 내달린 끝에 셋은 성벽에 달린 쪽문 앞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무거운 갑옷을 입은 채 달리던 기옌은 몸을 숙이며 숨을 몰아쉬더니 고개를 들어 자기 가족을 먼저 돌아보았다. 아델하이드 역시 힘겹게 숨을 내쉬고 있었지만 그녀는 자기보다 먼저 아이를 살폈다. 아이가 계속 울고 있었다. 기옌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녀에게 말했다.


“다 왔어.”


 기옌은 옅게 미소를 지으며 뒤돌았다. 그러는 동안 아델하이드는 우는 아이를 토닥이며 작게 노래를 불렀다. 아이의 울음이 점점 잦아들었다. 그러는 동안 기옌은 쪽문에 다가갔다. 오래된 성벽 사이에 조촐하게 마련된 나무문은 그러나 감옥처럼 굳게 닫혀있었다. 기옌의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그는 다급하게 문을 두드렸다.


“펠리페!”


 그러나 쪽문은 여전히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기옌은 계속해서 문을 두드렸으나 여전히 반대쪽에서는 조용했다. 기옌의 머릿속에서 수많은 생각들이 곰팡이처럼 마구잡이로 피어올랐다. 펠리페가 잡힌 것일까. 중간에 돌아간 것일까. 아니면 결국 오지 않은 것일까. 그러한 생각의 범람 와중에도 기옌은 계속 펠리페를 부르며 문을 두드려댔다.


“펠리페! 펠리페! 제기랄, 펠리페!”


 끝까지 열리지 않는 문을 보며 분노한 그는 강하게 문을 걷어찼다. 그가 한숨을 쉬며 뒤를 돌아보자 아델하이드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듯이 묻는 것 같은 그 얼굴에 기옌은 한숨을 길게 내쉬고는 잠깐 하늘을 바라보았다. 타오르는 도시에서 뿜어져 나오는 검은 연기가 그나마 고개를 들이밀던 달빛마저 가리고 있었다. 기옌은 보이지 않는 달빛을 찾으며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아델하이드를 보았다.


“다른 곳을 찾아봐야겠어. 이쪽으로 가자.”


 그가 오른쪽 골목으로 몸을 돌리자 아델하이드가 다급하게 외쳤다.


“그쪽은 안 돼!”


 그녀의 말에 기옌이 멈춰 섰다.


“거긴 성벽이 무너진 쪽이야. 절대로 가면 안 돼. 차라리 반대쪽으로 가서 성문을 열고 탈출하자.”

“성문을 열어? 그럴 시간이 어디 있다고! 그걸 열기 전에 놈들에게 잡힐 거야!”


 두 사람이 옥신각신하려는 그때 뒤에서 나팔소리가 길게 울렸다. 익숙하지 않은 그 소리, 분명 라우레니엔군의 것이었다.


“놈들이야.”


 기옌의 얼굴이 굳어져갔다. 이어서 그들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젠장, 제기랄…….”


 그들이 다가오자 기옌이 마구잡이로 욕설을 내뱉으며 양손에 다시 폴액스를 쥐었으나 그 손은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그의 흉흉한 눈빛 한 구석에서 불안감이 솟구쳤다. 그러자 아델하이드가 남편의 팔을 붙잡았다. 갑작스러운 촉감에 기옌은 아델하이드를 놀라 돌아보았다.


“진정해. 당황하는 건 전혀 도움이 안 돼.”


 기옌은 후드 아래 그림자에 가려진 아델하이드의 단호한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 얼굴, 그 눈빛, 그 미소. 악마의 사악한 눈빛을 새끼양의 그것으로 바꿔버린 미소가 아니던가. 떨리던 기옌의 손이 평정심을 되찾았다. 두 사람은 서로 눈을 마주했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서로의 입술이 가까워져갔다.

 그때 쪽문 안쪽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리더니 덜커덕 소리를 내며 쪽문이 열렸다. 안에서 튀어 나온 사람은 헐레벌떡 숨을 몰아쉬는 피투성이의 남자였다.


“헉, 헉……. 늦어서 죄송합니다.”


 그의 등장에 두 사람은 처음엔 놀라고 그 다음엔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더니 마지막에는 그의 꼴을 보고 걱정하기 시작했다.


“펠리페? 자네 맞나?”

“예, 왕제님. 펠리페 데 라 토리아 맞습니다.”


 그는 불편한 듯 소리를 내고는 팔을 돌리며 얘기를 계속했다.


“길을 뚫는 와중에 예상치 못한 저항이 있었습니다.”


 그러자 기옌은 웃으며 펠리페를 꽉 끌어안았다.


“와줘서 고맙네, 펠리페! 정말로!”


 주군의 갑작스러운 포옹에 펠리페는 당황했다. 자기도 기옌처럼 팔로 등을 감싸야하는지, 그러면 안 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결국 엉성하게 편 팔을 그 자세 그대로 가만히 두었다. 포옹이 끝나자 펠리페는 주변을 한번 쓱 둘러보고는 말했다.


“시간이 너무 지체되었습니다. 어쩌면 놈들이 지하통로를 발견했을 수도 있겠군요.”

“그럼 어떡해야 하죠? 지금이라도 돌아가야 하나요, 펠리페 경?”


 펠리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델하이드 공주님. 지금이라도 빨리 움직이면 놈들이 지하통로를 수색하기 전에 빠져나갈 수 있을…….”


 그때였다. 발소리가 잠깐 들리더니 이내 사방이 밝아지며 병사들의 외침이 주변을 가득 메웠다. 셋은 당황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검은 독수리가 그려진 깃발이 병사들 사이에서 펄럭였다. 라우레니엔의 상징이었다.


“에스테야의 악마 놈이 저기 있다!”

“잡아라!”


 다들 그렇게 외쳐댔다. 그러자 아델하이드의 품에 있던 아이가 다시 크게 울기 시작했다. 순간적으로 모두가 침묵했다. 하지만 얼마 안 있어 병사들의 외침이 그 울음을 묻어버렸다. 한낱 아기의 울음 따위가 병사들의 타오르는 증오를 잠재우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런 와중에 얼굴에 끔찍한 화상자국이 새겨진 기사가 외쳤다.


“악마 놈을 잡아라!”


 그러자 병사들이 다시 함성을 내지르며 세 사람에게 달려들었다. 펠리페가 둘을 잡아끌며 외쳤다.


“이쪽으로!”


 기옌은 펠리페와 아델하이드를 안으로 들여보내고 자신도 들어가려고 문간에 손을 짚었다. 그때 뒤에서 화상 자국이 있는 기사가 외쳤다.


“쏴라!”


 그러자 달카닥 쇳소리가 들리더니 뒤에서 천둥이 치는 것 같은 총성이 이어졌다. 그와 동시에 기옌은 무언가 날카로운 것이 자기 다리와 어깨를 꿰뚫는 통증을 느끼며 동시에 몸이 앞으로 기울어졌다. 그러나 기옌은 고통스러운 신음이 새어나오려는 입을 어금니로 틀어막았다. 셋이 안으로 들어서자 기옌은 재빨리 걸쇠를 걸었다. 반대쪽에서 세 사람이 들어간 문을 열려고 안간힘을 쓰는 병사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기옌은 그 소리를 뒤로하고, 고통에 흘러나오는 신음을 억지로 참으며 계단을 내려갔다.

 그러나 기옌은 점점 발걸음을 옮기는 게 고통스러웠다. 그가 벽을 짚자 손바닥만 한 핏자국이 묻었다. 기옌의 팔과 다리가 그의 갑옷처럼 붉게, 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결국 그는 얼마 못 가 고통을 참지 못하고 무릎을 꿇었다. 그 소리를 들은 두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기옌!”

“왕제님!”


 아델하이드는 기옌의 왼팔을 붙들어 그를 일으켜 세우려고 했다. 하지만 그녀가 어깨를 만지는 순간 기옌이 고통스러운 소리를 내질렀다. 그 목소리에 아델하이드는 반사적으로 손을 떼었다. 하지만 이미 그녀의 손은 새빨간 피로 물든 뒤였다. 그녀는 잠시 정신이 멍해졌다. 그러는 동안 펠리페는 통로 너머와 주군을 번갈아 보며 그를 부축하려고 애를 썼다.


“정신 차리십시오, 왕제님! 나가는 길이 코앞입니다!”

“으윽…….”


 펠리페는 그의 팔을 어깨에 두르고 그를 질질 끌 듯 부축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기옌은 끔찍한 고통에 가만히 있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어깨에 올라간 그의 팔이 시나브로 떨어지더니 이내 그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델하이드가 울먹이며 그를 붙들었다.


“안 돼! 기옌, 좀 더 힘을 내! 조금만 더 가면 바깥이야! 이거 봐. 바람이야. 바람이 느껴져. 이제 곧 나갈 수 있어!”“맞습니다! 안젤로가 바깥에 병력을 이끌고 도착할 겁니다. 그러면 안전해질 거고요!”


 하지만 기옌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더 이상은 못 가겠어.”


 그 말과 함께 기옌은 큰 소리로 기침했다. 입에서 피가 튀어나왔다.


“왕제님…….”


 일으켜 세우려는 펠리페의 손길을 뿌리치며 기옌은 좁은 통로 벽에 등을 기댔다. 그의 숨소리는 마치 폐병에 걸린 사람 같이 거칠기 짝이 없었다. 그는 힘겹게 투구를 벗으며 중얼거렸다.


“가. 빨리.”

“안 돼.”


 그의 말에 아델하이드가 무릎을 꿇으며 기옌의 팔을 붙잡았다. 그녀는 울먹이며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그런 말 하지 마, 기옌. 아직 우린 나갈 수 있어!”


 그런 그녀의 말을 배신하듯 저 멀리서 문이 박살나는 소리가 들렸다.


“미안해, 여보. 더 이상은 못 가. 어차피 놈들이 노리는 건 나니까…….”

“안 돼. 안 돼! 같이 나갈 거야. 네가 없으면 우리 아들은 어떻게 하려고! 제발 같이 가자. 일어나! 우리 아이를 위해서!”


 그러면서 그녀는 기옌의 품에 자기 얼굴을 파묻었다. 기옌은 슬쩍 웃더니 왼손으로 아내의 얼굴을, 그리고 아이의 얼굴을 한 번씩 어루만졌다.


“잘 있어, 아델하이드.”


 그리고 그는 시선을 펠리페에게로 돌렸다.


“뒤를 맡기겠네, 펠리페.”


 아델하이드가 무어라고 얘기하기도 전에 반대쪽에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세 사람이 있는 곳으로 점점 가까이 들려왔다. 기옌은 힘겹게 칼을 뽑아내며 외쳤다.


“빨리 가라고!”


 아델하이드는 기옌을 바라보다 이내 그와 마지막으로 입을 맞추고는 펠리페와 함께 반대쪽으로 달려갔다. 기옌도 슬픔 가득한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멀리서 불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기옌은 그것이 마치 자신을 심판하러 오는 사신의 눈빛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무기력하게, 가만히 앉아서 사신의 손에 끌려가지는 않으리라. 그는 그렇게 다짐하며 칼을 쥔 손에 더더욱 힘을 주었다.

 아델하이드는 눈물을 멈추고 펠리페의 손을 잡고 앞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그때 뒤에서 총성이 울려 퍼졌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뒤돌았다. 그리고 입을 틀어막으며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기옌…….”


 그녀는 다시 뒤돌았다. 더 이상 뒤돌아보지 않겠다고 마지막으로 다짐하며,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는 바깥으로 아이를 꼭 끌어안은 채 달려갔다. 바깥으로 나온 그들은 강나루로 향했다. 나루에는 펠리페가 타고 온 쪽배가 있었다. 두 사람이 앉을 자리. 그러나 그 자리에는 한 사람밖에 앉을 이가 없었다. 펠리페는 다급하게 아델하이드를 태우고 배 위에 올라탔다. 라우레니엔군은 쫓아오지 않았다. 그는 힘차게 노를 저으며 나루를 빠져나갔다.

 쪽배를 타고 나아가는 동안 펠리페는 어색한 침묵을 깨보려고 무어라 말이라도 걸어볼까 했으나 너무나도 슬퍼 보이는 주군의 연인을 보고는 이내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잔잔히 너울대는 강가를 가르며 나간 곳 끝에는 짙게 기른 콧수염이 인상적인 남자를 포함한 병사 몇이 나루 근처서 서성이고 있었다. 그들은 처음에 쪽배가 나타난 것을 보고 칼을 뽑아들고 경계했으나 이내 한손을 흔드는 펠리페를 보고 칼을 아래로 내렸다. 그들은 아델하이드와 그녀의 품에 안긴 아이를 조심스레 부축했고 그러는 동안 인상적인 콧수염을 기른 남자가 펠리페에게 다가왔다.


“안젤로.”

“돌아왔군, 펠리페. 다행이야. 근데 네스칸타라 공작은?”


 펠리페는 대답하지 못하고 그저 고개만 가로저었다. 안젤로도 무슨 뜻인지 알고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하필이면 악마공 그 양반이 못 빠져나오다니. 아이러니도 이런 아이러니가 없군…….”


 그렇게 둘이 침울하게 한숨을 내쉬는 사이 뒤에서 젊은 청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둘은 뒤를 돌아보았다. 키가 큰 청년이 마차 문을 열고 아델하이드와 아이를 안에 태우는 게 보였다. 펠리페는 그를 턱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처음 보는 사람이야. 믿을 만한가?”

“저 키 큰 친구 말이야? 저 친구가 트리스탄인데. 콘라트가 보낸다던 그 친구.”

“그래? 그럼 다행이고.”


 그러더니 안젤로는 말고삐를 쥔 병사에게 손짓해 펠리페에게 그 고삐를 넘겨주었다. 그러면서 자신 역시 말에 올라탔다.


“사방에 라우레니엔군이 쫙 깔렸어. 빨리 가지 않으면 항구로 못 갈 거야.”

“그럼 이렇게 얘기할 시간조차 없겠군. 트리스탄!”


 그러자 마차 문에 기대어 말린 허브를 질겅거리던 청년이 고개를 들었다. 그는 펠리페의 손짓을 보자 바닥에 허브를 뱉고는 재빠르게 마부 자리에 올라탔다. 안젤로와 펠리페가 앞으로 뛰쳐나가자 아델하이드가 탄 마차 역시 덜컹거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한참을 달린 끝에 그들이 도달한 곳은 남쪽 항구였다. 아직 해가 뜨기 전. 날씨는 쌀쌀했고 항구는 조용했다. 그들은 곧바로 부두로 향했다. 있어야 할 사람이 없자 안젤로가 짜증 섞인 욕을 내뱉으며 말했다.


“선장 놈은 또 어디 술집에 가 있나보군. 내 가서 그 빌어먹을 놈을 찾아오겠네. 자네들은 여기서 기다리고 있게. 그리고……. 오펜슈타인 공작께서도 잠깐만 이 친구들하고 같이 기다려주시지요.”


 그는 아델하이드에게 정중하게 인사했다. 아델하이드 역시 안젤로에게 답례했고, 안젤로는 곧바로 술집을 향해 달려갔다. 안젤로가 사라지자 트리스탄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펠리페에게 물었다.


“에, 제 할 일은 이제 끝난 거 같은데요. 죄송한데 전 할 일이 많아서요. 가보아도 될까요.”

“기다려. 일이 다 끝나기 전까진 끝난 게 아니야. 정 심심하면 근처에서 서성이고 있던가.”


 펠리페의 단호한 말에 트리스탄은 작은 목소리로 투덜거리더니 근처 벽에 기대 다시 말린 허브를 입에 넣었다. 이내 두 사람만이 남게 되자 펠리페가 아델하이드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는 허리에 찬 주머니를 꺼내더니 아델하이드에게 건네주었다.


“이거면 동방에서도 충분할 겁니다.”


 아델하이드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녀는 조금씩 떠는 손으로 주머니를 받아들었다. 그러면서 그녀는 미친 사람처럼 무어라 중얼거렸다. 펠리페는 순간적으로 지하통로에서 들었던 그 총성이 그녀의 이성을 산산조각 낸 것이 아닐까하는 끔찍한 생각이 들었으나 이내 맑은 눈빛과 단호한 표정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라우레니엔의 공주를 보고 안도했다.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공주님의 뜻은 곧 기옌 왕제님의 뜻이기도 하니.”

“정말로, 정말로 중요한 부탁이에요. 꼭 이루겠다고 약속해주실 수 있나요.”


 그녀의 단호한 표정과 목소리에 펠리페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러는 것인지 궁금 하기도하고 또 두렵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하겠습니다. 말씀하십시오.”


 그러자 그녀는 자기 몸에 둘러 묶었던 강보를 풀고는 품에 안긴 아이를 펠리페에게 건넸다. 펠리페는 당황하여 아이를 붙잡아 안아들고는 놀란 표정으로 아델하이드를 바라보았다.


“펠리페 경.”

“공주님, 설마, 아니, 안 됩니다. 이건 아닙니다. 잘못됐다고요!”


 펠리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펠리페의 목소리에 지나가던 사람들이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들은 금세 관심을 끊어버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델하이드는 계속 펠리페를 보며 말했다.


“부탁을 들어주겠다고 하시지 않으셨나요?”

“이런 부탁이었다면…….”


 아델하이드는 펠리페의 손을 붙잡았다. 그녀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눈망울로 연인의 부관이었던 남자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펠리페는 그 눈을 마주하기가 너무나도 어려웠다. 하지만 그는 최대한 눈을 피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펠리페 경. 힘들고, 어려운 결정이라는 건 알아요. 저 역시 그러하니까. 하지만 이 아이는 두 왕가의 피를 이은 아이랍니다. 알고 계시겠지만요.”

“하, 하지만…….”

“제 아버지는 집요하신 분이에요. 그리고 저는 오펜슈타인 공작이고, 동시에 라우레니엔의 계승권을 쥔 공주랍니다. 아버지는 세상 끝까지 저를 쫓아오실 거예요. 절대로 저를 가만히 두지 않을 거고요. 카를도 가만두지 않겠죠. 기옌이 있다면 상관없었겠지만 그이가 없는 지금은…….”

“하지만, 공주님. 카를은 공주님의 피를 이은 아이잖습니까. 카를이 기옌 왕제님의 피를 타고 난 건 맞지만 그렇다고 사랑하는 자기 딸이 낳은 손자를 죽이려고 들겠습니까? 자기 피붙이를?”


 아델하이드는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가 사랑하시는 사람은 저에요. 제가 사랑하는 이들이 아니라.”


 그 말끝에는 어딘가 모를 독기가 가득했다. 아델하이드는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흐르는 눈물을 손으로 닦아내려했지만 닦아내는 눈물보다 흐르는 눈물이 더 많았다.


“마지막까지 이런 짐을 지게 해서 미안해요, 펠리페. 하지만, 하지만 이건 이 아이를 위해서예요. 저는 자신이 없어요. 평생을 숨고 도망치면서 산다면 아이에게 영원히 씻을 수 없는 상처만 남기겠죠. 하지만 펠리페 경이라면. 이 아이가 저와 기옌의 아이가 아닌 펠리페 경의 아이라면. 그러면 카를은 안전해질 거예요.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처럼 아버지와 아버지의 사람들은 카를이 바로 코앞에 있다는 것도 모르겠죠. 아버지는 분명 집요하시지만, 눈이 어두운 분이시니…….”

“아델하이드 님…….”

“저는 당신을 믿어요, 펠리페. 당신은 기옌의 부하이자 친구였고, 또 우리를 위해 목숨까지 건 사람이잖아요. 기옌이 없는 지금 당신 외에는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이 없어요.”

“제, 제가 어찌 감히…….”


 펠리페는 계속 거절하려고 했으나 그럴 수가 없었다. 품안에 있는 아이는 어머니가 우는 것도 모르고 어느새 잠들어 새근새근 숨소리만 냈다. 펠리페는 눈을 감았다. 그는 한참을 생각하고, 또 생각하다 이내 다시 눈을 떴다.


“알겠습니다, 공주님. 공주님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고맙습니다, 펠리페 경…….”


 그리고 아델하이드는 마지막으로 아이를 보았다. 그녀는 아이의 이마에 짧게 입을 맞추더니 목에 걸린 황금열쇠를 손으로 쥐어뜯었다. 그리고 그녀는 아이의 손에 그 열쇠를 꼭 쥐어주었다.


“아가. 이게 너를 버리고 떠나는 이 못난 어미가 줄 수 있는 유일한 선물이구나. 나를 용서하지 않아도 괜찮단다. 애초에 아이를 버리고 떠나는 어미는 용서받을 자격이 없어. 하지만, 하지만 너는 나와 그이가 이 세상에 있었다는 증거니까, 반드시, 반드시 돌아올게. 모든 일이 끝나면 반드시 돌아와 너를 다시 품에 안을게. 그때까지 꼭 기다려주렴.”


 말을 끝낸 그녀는 한참 눈물을 흘렸다. 술에 취한 선장과 선원들이 돌아와 배에 오르기 직전까지도. 아름다운 얼굴을 눈물로 적시는 여인을 보는 펠리페의 마음도 양탄자를 단검으로 북북 찢어버리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그는 공주가 눈물을 멈출 때까지 그저 그녀를 가만히 둘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배에 오를 차례가 되자 그녀는 손에 끼고 있던 인장 반지를 빼 펠리페에게 건네주었다.


“그 열쇠와 이 반지로 오펜슈타인 공작의 대리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을 거예요. 제가 드릴 수 있는 마지막 선물입니다, 펠리페 경. 아니, 오펜슈타인 섭정공 각하.”


 그녀의 얼굴에는 그림자가 가득했고 목은 잠겨있었다. 펠리페는 어떤 말을 해야 하나 고심했으나 어떤 말도 그녀를 위로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간단히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부디 몸조심하십시오.”


 펠리페의 말을 듣자마자 그녀는 그녀의 호위 역할을 할 용병들과 함께 배에 올라탔다. 그녀는 갑판 위에 서서 마지막으로 그녀의 땅이었던 곳을 내려다보았다. 돛이 내려오자 그녀는 그대로 고개를 돌렸다. 아무런 미련도 없다는 듯, 아무런 미련도 갖지 않겠다는 듯. 그렇게 배는 태양을 향해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펠리페는 그의 품에 안긴 아이를 다시 바라보았다. 아이는 여전히 자고 있었다. 그의 주군을 닮은 검은머리가 인상적인 아이였다. 펠리페는 눈을 감았다. 하지만 많은 것들이 그의 눈앞에 선명하게 나타났다. 그의 아내, 그의 아이들, 그가 사랑하던, 그리고 잃어버린 사람들의 그 모습이.

 그가 다시 눈을 뜬 것은 안젤로가 말을 걸었을 때였다.


“펠리페.”


 펠리페가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안젤로는 그의 품에 안긴 아이를 보고 깜짝 놀라며 물었다.


“그 아기는……. 설마?”


 펠리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망할 여편네가 자네에게 애까지 주고 가버린 건가? 허이고 참, 왕족들이란.”

“그런 게 아니야.”


 안젤로가 혀를 차자 펠리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어머니이기에, 진정으로 아이를 사랑하기에 할 수 있는 결단이야. 적어도 난 그렇게 생각하네. 안젤로.”


 그리고 그는 잔뜩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이제 어떡하지?”

“글쎄. 공주가 자네에게 뭐라고 얘기했는지부터 들어야겠군.”

“트리스탄은?”

“보냈어.”


 안젤로는 그의 콧수염 끝을 잠깐 문지르더니 그에게 손짓하며 뒤돌았다. 펠리페는 다시 아이를 바라보았다. 그는 아이의 손에 쥐어진 열쇠를 자기 손으로 감쌌다.

 자신에게 찾아온 두 번째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고, 그는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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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즈베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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