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쇠의 기사
The knight of the key

02. 오펜슈타인의 섭정 2

 펠리페의 겉옷은 완전히 젖었고 몸은 물기와 추위로 몸서리를 쳤다.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아이가 비를 맞지 않도록 온몸으로 감싸며 말을 몰았다. 빗방울이 챙을 타고 흘러내리며 펠리페의 눈을 가렸다. 그는 몇 번이고 챙 끝에 맺힌 물방울을 털어냈으나 변하는 것은 없었다. 그는 때때로 품에 안긴 아이를 한 번 보았다. 아이는 여전히 잠들어있었다.
 얼마나 달렸는지도 모를 때였다. 펠리페는 언덕 위에서 멈춰 섰다. 밤새도록 말을 몬 탓에 허벅지가 저려왔다. 쉬고 싶다는 생각이 절실했으나 주변에 비를 피해 쉴 곳이라고는 없었다. 펠리페는 고통을 참으며 언덕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어둠이 짙게 깔린 땅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다만 바람이 내는 고요한 휘파람만이 펠리페의 귀를 건드릴 뿐이었다. 펠리페는 길게 심호흡했다. 그리고 다시 말을 몰았다.
 천천히 언덕을 내려오던 그는 갑자기 눈을 찌푸리며 입을 틀어막았다. 언덕 아래에 숨어있던 끔찍한 죽음의 냄새가 버틸 수 없을 정도로 진동한 탓이었다. 펠리페는 속도를 줄이고 천천히 말을 몰았다. 무엇이 앞에 있을지 알 수가 없어 함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때였다. 그가 빗방울을 훑어내려고 모자를 살짝 들어 올린 순간 눈앞에 사람의 그림자가 갑작스레 나타났다. 예상치 못한 등장에 펠리페는 놀라 말고삐를 강하게 잡아당겼고 말은 길게 울며 앞발을 들어 올렸다. 그러면서 반사적으로 아이를 더더욱 강하게 끌어안았다.
 말이 앞발을 내려놓자 펠리페는 칼을 뽑으며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그림자는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키가 매우 큰지 말에 올라탄 펠리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또 몸을 이리저리 흔들고 있었으나 펠리페를 보고도 아무런 말도 반응도 없었다. 펠리페는 그것이 더 두려웠다. 그는 칼을 강하게 움켜쥐고 천천히 칼을 그림자에 들이밀었다. 펠리페의 머릿속은 수많은 생각이 솟아올라 어지러웠다.
 때마침 주변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멀리 동쪽에서 해가 솟아오르고 강렬한 빛은 짙은 먹구름을 꿰뚫고 땅을 밝혔다. 펠리페가 선 땅에도 점점 그 빛이 손을 뻗었고 그림자 역시 결국 그 정체를 드러냈다.
 펠리페는 헛웃음이 나올 뻔했다. 그러면서도 등골이 오싹했다. 그를 내려다보던 무시무시한 그림자의 정체는 다름 아닌 나뭇가지에 목이 매달린,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며 썩어가는 시체였다.
 펠리페는 칼을 내리고 시체를 살펴보았다. 벌레가 잔뜩 꼬인 옷의 팔 부분에 묶인 노랗고 빨간 천이 펠리페의 눈에 들어왔다. 그는 다시 칼을 들고 칼끝으로 그 천을 건드려보았다. 천은 간단히 끊어졌고 가볍게 칼날 위에 내려왔다. 그는 칼날을 가까이 가져와 천을 만져보았다. 엉성하게 새겨진 별과 이를 감싼 네 개의 초승달 문양. 에스테야의 상징이었다. 펠리페는 천을 허리띠에 욱여넣고는 시체를,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주변은 이미 무기와 갑옷은 물론 속옷까지 싹 벗겨진 채 아무렇게나 내던져지고 썩어가는 시신이 온 땅을 가득 메운 채였다. 최소한의 존엄조차 보장받지 못하고 비참하게 처형당한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속이 울렁거렸다. 펠리페 그 자신도 수많은 시체들을 봐왔으나 이것만큼은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얼굴을 잔뜩 찡그린 채 이리저리 말을 몰았다. 마음 같아서는 빠르게 내달리고 싶었으나 여기저기 쓰러진 시체를 보고 놀란 말이 멈춰 서거나 다리가 걸리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한창 고삐를 이리저리 흔드는 와중에 아이가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어른도 버티기 어려운 악취를 젖먹이가 버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펠리페는 아이의 등을 토닥이며 앞을 바라보고는 그대로 박차를 가했다. 말은 다시 한 번 힘차게 바람을 갈랐고 두 사람을 괴롭히던 썩은 내는 빗방울 섞인 바람과 함께 뒤로 밀려 나갔다. 펠리페는 잠깐 뒤를 돌아보았다. 바람에 흔들리는 시체가 점점 멀어져갔다. 그는 이를 악물며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마음속으로 죽은 이들을 애도하고 또 그렇게 만든 하이메와 막시밀리안을 저주했다.
 끔찍한 냄새가 저편으로 사라지고 나서도 아이의 칭얼거림은 멈출 줄을 몰랐다. 펠리페는 말을 멈추게 하고는 아이의 엉덩이를 만져보았으나 특별히 다른 점을 느끼지 못했다. 큰일이었다. 주변을 둘러보아도 보이는 것은 허허벌판, 폐허, 그리고 시체뿐이었다.
 그때 멀리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그에게 다가오는 게 보였다. 군인 같지는 않았다. 펠리페는 그들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으나 불안한 생각을 감출 수 없었다. 그는 반사적으로 칼을 꽉 붙들었다. 그러는 동안 어느새 그 무리는 이미 펠리페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그들은 남쪽으로 향하는 피란민 부부였다. 그들이 끄는 손수레에는 아이와 짐이 구별 없이 있었고 허리에는 공구에 가까운 손도끼를 차고 있었으나 그것을 휘두를 힘은 없어 보였다. 그들은 펠리페가 그들을 빤히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멈춰 서서는 펠리페를 돌아보며 퉁명스럽게 물었다.

“뭐요?”

 펠리페는 여전히 경계하는 낯빛으로 칼을 만지작거렸다. 부부 역시 떨리는 손을 천천히 손도끼에 가져갔다. 잠시 불안한 침묵이 흘렀다. 먼저 운을 뗀 것은 펠리페였다. 그는 여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내, 아이에게 젖을 물려야 하오. 미안하지만 좀 도와주실 수 있겠소?”

 부부는 서로 돌아보았다. 남편은 펠리페를 턱짓으로 가리키며 미친 사람 아니냐고 중얼거렸고 아내 역시 잔뜩 경계하는 눈치였다. 펠리페는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다시 말했다.

“사례는 두둑하게 하리다.”

 그런데도 부부는 여전히 경계를 풀지 않았다. 둘은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고 돌아가며 펠리페를 힐끔 흘겨보았다. 한참 뒤에야 여자가 펠리페에게 다가왔다.

“아이 줘요.”

 그 말에 펠리페는 반사적으로 칼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그러자 남자 역시 반사적으로 손도끼를 꺼내 들었고 여자는 깜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 그리고 말을 더듬으며 해명하듯 말했다.

“아, 아이를 주셔야 젖을 물리죠!”
“그, 그렇지.”

 펠리페는 그제야 칼에서 손을 뗐다. 그는 등 뒤로 묶은 이불을 조심스럽게 풀고 아이를 여자에게 안겼다. 여자는 뒤로 물러서서는 손수레 뒤로 천천히 걸어갔고 그제야 남자도 손도끼를 다시 허리에 찼다.
 펠리페는 이참에 자기도 잠깐 쉴 겸 말에서 내려왔다. 하지만 발이 땅에 닿는 순간 펠리페의 다리는 힘을 잃어버렸고 그대로 무릎을 꿇은 모습이 되었다. 그는 일어서려고 했으나 지금까지 잊고 있었던 피로와 고통이 다리를 찍어 눌렀다. 결국 일어서지 못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그러자 남자가 천천히 다가와 물었다.

“괜찮수?”

 펠리페는 모자를 벗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괜찮소.”

 그러면서 그는 손가락으로 안장을 가리켰다.

“부탁인데 저기서 가죽 부대 좀 꺼내다 주시겠소?”

 남자는 자기가 하인인 줄 아느냐며 투덜거렸으나 비에 젖은 생쥐 꼴로 일어나지도 못하는 펠리페가 딱한지 결국 가죽 부대를 가져다주었다. 펠리페는 양손에 이를 쥐고는 입에 가져갔다. 미지근한 물이 빗물과 함께 그의 목을 타고 흘렀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뚜껑을 닫았다. 그러자 남자가 물었다.

“사람 시켜먹는 게 자연스러운 걸 보아하니 고귀하신 양반 같은데…….”

 펠리페는 남자를 빤히 쳐다보았다. 남자가 한 말이 무슨 뜻인가 생각하며 그는 무의식적으로 칼 손잡이에 손을 가져갔다. 그러자 남자는 당황한 듯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그냥 가만히 있으면 심심해서 물어봤던 거요. 거 한 번 더 물어보면 아주 멱을 따려고 하시겠네그려.”

 남자가 억지웃음을 짓자 펠리페도 힘겹게 미소를 지으며 칼에서 손을 뗐다. 남자는 당황한 것이 역력한 낯빛으로 두어 걸음 물러섰고 펠리페도 고개를 푹 숙였다. 깊은 침묵이 흘렀다.

“난 귀족 아니올시다.”

 펠리페는 고개를 푹 숙인 그 상태로 입을 열었다.

“스물하고 여덟 해 전에는 영주 아들이었고, 열 해 전에는 검술 사범이었고, 여섯 해 전에는 폐인이었고, 닷새 전까지는 돈 받고 사람 죽이는 놈이었지. 지금은, 뭔지 모르겠소.”

 말이 끝나자 펠리페는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그러더니 고개 들어 남자에게 물었다.

“그대들은 어째서 도망치고 있던 거요?”

 그러자 남자는 탐탁지 않은 눈으로 펠리페를 잠깐 흘겨보다 입을 열었다.

“빌어먹을 전쟁 때문이요.”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리 같은 놈들 삶이 원래 개좆같긴 했어도 짐 싸고 도망 다니지는 않았소이다. 근데 그 에스테야인지 뭔지 하는 개새끼들이 쳐들어와서 우리 마을을 다 불태우고 사람들을 죽였어. 그, 누구냐, 그…….”
“악마공 기옌 말이오?”
“그래! 그 악마 새끼! 그 새끼 때문에 좋은 사람들이 다 죽었어!”

 남자는 얼굴을 붉히며 언성을 높였다. 펠리페는 아내의 젖을 문 아기가 그 악마공의 아들이라는 것을 안다면 남자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상상해보았다. 그러는 동안 남자는 말을 이었다.

“그 새끼들이 오펜슈타인으로 물러나고 나서는 살았구나 생각했는데 웬걸, 세금을 잔뜩 때리고는 못 낸다고 사람을 초주검으로 만드는 거 아니요!”

 갑자기 남자가 허리띠를 풀더니 웃옷을 손으로 끌어올렸다. 남자의 몸에는 흉터와 화상 자국이 가득했다.

“우리를 지켜준다는 놈이 내 몸을 이렇게 만들었수다! 그래서 사람들이 하나둘 다 도망가기 시작했소. 보시다시피 나도 그랬고. 결국 여기까지 도망 왔지.”

 남자는 옷을 추스르고는 뜨거운 머리를 식히려는 듯 이마에 손을 짚었다. 그리고 그는 그 상태로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별 깃발이나 독수리 깃발이나 둘 다 좆같기는 매한가지였소.”

 그때 여자가 수레 뒤에서 옷을 추스르며 나타났다. 그녀는 잠든 카를을 안은 채 종종걸음으로 펠리페에게 다가왔다.

“다 됐어요. 잠들었네.”

 펠리페는 일어나려고 했으나 여전한 통증에 일어날 수 없었다. 그러자 남자가 펠리페의 어깨를 붙들고 일으켜 세워주었다. 펠리페는 비틀거리면서 입에서 신음을 흘렸으나 이내 고통을 삼키고는 꼿꼿하게 허리를 폈다.

“아이를 주시오.”

 여자는 조심스레 펠리페의 품에 아이를 안기고 말했다.

“이대로 비에 맞게 두면 안 돼요. 북쪽으로 가다 보면 그나마 멀쩡한 여관이 하나 나오는데 거기서 묵고 가면 될 거예요. 저희도 그랬으니.”
“고맙소.”

 펠리페는 전대에서 짚이는 대로 돈을 꺼내 들었다. 피오리 은화 세 닢이었다. 그는 남자의 손에 그 세 닢을 쥐여주고는 다시 안장에 올라탔다. 그리고 부부를 돌아보며 말했다.

“남서쪽으로 쭉 내려가면 하얀 물고기가 그려진 깃발을 쓰는 용병들이 있을 거요. 거기 대장인 안젤로 데마테오에게 내 이름을 대고 그 은화를 보여주시오. 합류하면 안전할 거요. 그는 웬만한 귀족들보다도 더 훌륭한 친구요.”
“안젤로 데마테오?”

 펠리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덧붙였다.

“펠리페 데 라 토리아. 이 이름을 대시오.”

 그 말을 끝으로 펠리페는 다시 박차를 가했다. 다리가 끔찍하게 지끈거리고 피곤함에 몰려왔으나 여기서 멈출 수는 없었다. 그는 온 정신을 집중하며 그 부부가 말한 여관을 향했다.
 다행히도 펠리페는 해가 넘어가기 전에 여관에 도달했다. 그는 비틀거리며 여관 문을 힘겹게 밀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따듯한 공기가 그를 감쌌다. 그다음엔 포탄 수십 개가 처박힌 듯 난장판인 모습과 이리저리 몰려 앉은 바글바글한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왁자지껄 떠들던 그들은 펠리페의 등장에 입을 다물고 그를 바라보았다. 묘한 침묵 속에 서로 간의 경계 어린 눈빛만 이어졌다. 펠리페는 불안감에 아이를 꽉 붙들었다. 그러던 순간 누군가 말했다.

“아이가 있어.”

 그러자 몇 명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펠리페에게 다가왔다. 펠리페는 반사적으로 칼을 뽑아 들었다.

“워, 진정하시오! 우린 도우려고 한 것뿐이오!”

 허리에 칼을 찬 남자가 말했다. 펠리페는 대답 대신 일어난 사람들을 각자 훑어보았다. 칼 찬 남자, 평범한 농민, 오래된 양피지 같은 얼굴의 수도승,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이었다. 결국 그는 칼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그러자 팔을 따라 하듯 다리도 같이 무너져 내렸다. 그가 무릎을 꿇자 사람들이 다가와 그를 부축했다. 그리고 여급도 다가와 카를을 안았다. 펠리페는 아이를 끝까지 잡으려는 듯 손을 뻗었으나 이내 떨어트렸다.

“괜찮소?”

 사람들이 물었으나 펠리페는 대답할 기운이 없었다. 그는 힘겹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사람들은 잠깐 서로 얘기하더니 그를 벽난로 앞에 데려다 놓았다. 뜨거운 열기가 빗방울에 차가워진 그의 몸을 감쌌다. 그가 무너지듯 바닥에 앉자 수도승이 말했다.

“젖은 옷을 계속 입고 있으면 안 좋으니 벗으시게.”

 펠리페는 대답도 안 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자 잊고 있던 피로가 천천히 그를 잠식했다. 옷깃을 붙잡으려는 손이 너무나도 떨렸다. 금방이라도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으나 펠리페는 피로를 참아냈다.
 한동안 사투 끝에 펠리페는 옷을 완전히 벗어 던지고 이불로 몸을 덮었다. 그러면서도 계속 아이를 향해 눈을 돌리며 손으로는 칼 손잡이를 문질러댔다. 그러던 중 카를을 안은 여급이 다가와 그에게 그릇을 건넸다. 허여멀건 우유죽이었다.

“공짜에요. 드세요.”

 펠리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릇을 받아들며 말했다.

“아이는?”

 그러자 여급이 새카맣게 썩은 이빨을 드러내며 빙그레 미소 지었다.

“걱정 마세요. 제가 데리고 있을게요.”

 여인이 떠나자 펠리페는 그릇을 바닥에 놓고는 칼에서 손을 떼고 수저를 들었다. 죽을 한 입 떠 입에 넣자 따듯한 기운이 입안에 잔잔하게 퍼져나갔다. 맛은 없었다. 하지만 기분은 좋았다.
 펠리페는 순식간에 그릇을 비워냈다. 사지가 끊어질 것 같던 고통이 조금이나마 나아진 느낌이었다. 기운을 차린 그는 다시 칼을 붙잡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조금 전 그를 부축했던 이들과 그들 주변에 각자 무리 지은 사람들, 모두 웃으며 떠들고 있었으나 그 아래의 뿌리 깊은 불안과 공포를 펠리페는 느낄 수 있었다.
 그때 한 여인이 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날카로운 대바늘로 고정한 붉은색 쪽 찐 머리와 여우를 연상케 하는 귀는 케르모레나 바다 건너 요르문드라면 모를까 이곳 오펜슈타인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신체적 특징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어딘가 낯익었다.
 그 순간 그 여인이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의 눈동자가 서로를 마주했다. 여인은 슬쩍 미소 짓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펠리페에게 다가왔다. 순식간에 여인의 붉은 눈동자가 펠리페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펠리페는 물러서거나 고개를 돌리지 않고서는 칼을 꽉 쥔 채 여인을 바라보았다. 갓 성인이 된 시골 처녀 같은 얼굴. 그러나 눈과 입 주변의 잔주름이 진짜 나이를 가늠케 했다.

“절 아시나요?”

 머리카락도 눈동자도 붉은 여인이 다짜고짜 물었다. 펠리페는 칼을 더더욱 꽉 쥐었다.

“아니.”

 그러자 여인이 웃었다.

“전 당신을 알아요. 펠리페 데 라 토리아.”

 반사적으로 펠리페가 칼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여인은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은 채 이불 속에서 뛰쳐나온 칼날과 펠리페를 돌아보았다.

“칼을 내려놓으시는 게 좋을 거예요. 모르는 사람들에게 벗은 몸을 보여주는 건 좀 그렇잖아요?”

 그 말에 펠리페는 고개를 돌렸다. 사람들이 두 사람을 보고 수군거리는 게 보였다. 펠리페는 천천히 칼을 내리며 다시 이불을 덮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칼에서 손을 놓지 않고 있었다.

“날 어떻게 아는 건지 말해야 할 것 같은데.”
“물론이죠.”

 여인은 자세를 고쳤다. 짝 달라붙는 가죽 바지와 길게 뻗은 다리가 합쳐지니 뇌쇄적인 모양새라 마치 유혹하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펠리페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며칠 전에 트리스탄을 만나셨죠?”
“그걸 어떻게 아는 거지?”

 펠리페의 경계 섞인 목소리에 여인은 미소를 유지하며 대답했다.

“제가 트리스탄을 거두고, 또 가르친 사람이니까요.”
“그럼 그대가…….”
“네. 제가 케리스 다퓌닐린입니다.”

 펠리페는 자신이 왜 낯익다고 생각했는지 깨달았다. 붉은색 머리카락, 쪽 찐 머리를 대바늘로 고정하고 다니는 네레디르 여인, 그리고 콘라트의 두 첩자 중 하나. 잊고 있던 그 이름을 떠올리자 펠리페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났다.

“이제야 안심이 되나요?”
“그래.”

 펠리페는 그제야 칼을 놓았다. 케리스도 편한 자세로 고쳐 앉으며 웃었다.

“솔직히 놀랐어요. 원래 펠리페 님은 여기 계시면 안 되잖아요.”
“그게, 일이 좀 복잡해졌네.”

 그는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어쩌다 아이를 맡게 되었는지, 어쩌다 이름뿐인 오펜슈타인 섭정공이 되었는지, 어쩌다 아이를 안고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지 등. 케리스는 어느새 심각한 얼굴이 되어 펠리페의 말을 묵묵히 듣고 있었다.

“아델하이드 님께선 대체 무슨 생각이셨을까요.”
“이유야 아까도 내가 말했다만, 솔직히 지금도 잘 이해가 안 돼. 이제 와서 그런 말을 한들 무슨 소용이겠나.”

 펠리페는 한숨을 쉬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제 자네 차례일세. 자넨 왜 여기 있었나?”
“저요?”

 케리스는 약간 당황한 듯 머뭇거렸다. 그녀는 살짝 고개를 숙인 채 길게 생각하더니 이내 펠리페의 바로 옆까지 가까이 붙었다.

“우리가, 정확히는 백작께서 하신 일은 엄밀히 말하면 반역이잖아요.”
“반역? 아, 그렇겠군.”
“그래서 혹시나 사람들이 눈치를 채지는 않았나, 군대가 뤼텐베르크로 오지는 않나, 그런 걸 확인하고 있었죠. 다행히 그런 건 아직까진 없는데…….”

 그녀는 주변을 둘러보고는 펠리페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여기저기 흩어진 에스테야 사람들이 많아요. 그들을 라우레니엔 병사들이 일일이 찾아서 죽이고 있고요.”

 그 말에 펠리페는 아까 전 봤던 구더기가 들끓는 시체로 가득한 평원을 떠올렸다. 그러자 자신도 모르게 오한이 들어 몸을 떨었다. 케리스는 잠깐 고개를 돌려 다시 주변을 살피고는 다시 말했다.

“조심하세요. 여기 있는 피란민 중에서도 에스테야라면 이를 바득바득 가는 사람이 많으니까.”

 그녀는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다시 미소 지으며 말했다.

“아이는 제가 데리고 있죠. 편히 쉬세요, 펠리페 님.”
“자네가 먼저 뤼텐베르크로 아이를 데려가면 안 되겠나?”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저도 피곤해서요. 게다가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사람이 다시 나가면 의심을 살 수도 있고.”

 그 말을 끝으로 케리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카를을 데리고 있는 종업원에게 다가가 펠리페를 가리키며 몇 마디 말을 나누더니 아이를 품에 안았다. 펠리페는 케리스가 자신을 돌아보며 웃는 것을 보고 나서야 바닥에 드러누웠다. 딱딱한 바닥에 베개도 없었으나 커다란 피로에 펠리페는 금세 잠이 들었다.
 시간이 흘렀으나 아직 새벽일 때였다. 케리스는 벌써 떠날 준비를 마치고는 카를을 안고 펠리페에게 다가갔다. 펠리페는 고통스러운 듯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잠꼬대를 중얼거렸다. 그녀는 장난기가 동해 그를 깨우지 않고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펠리페는 한참을 끙끙거리며 고통스러워하더니 힘겹게 말을 뱉어냈다.

“미안해 여보…….”

 그러더니 펠리페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그런 모습을 더 이상은 보고 있을 수 없어 케리스는 양손으로 펠리페의 어깨를 잡고 마구잡이로 흔들었다.

“일어나세요, 펠리페 님.”

 펠리페는 헉 소리를 내며 벌떡 일어섰다. 그는 반사적으로 칼을 쥐고 주변을 둘러보다가 케리스를 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고. 또 악몽이라도 꾼 모양일세.”

 그는 눈가를 손으로 문질렀다.

“편히 쉬셨나요?”
“아니.”
“좋아요. 지금 가면 해 뜰 때쯤이면 도착할 거예요. 편지는 보내놨으니까 그쪽에서도 우릴 마중 나오겠죠. 옷 입으세요.”

 케리스는 난로 앞에 널브러진 옷가지를 펠리페에게 던져주었다. 펠리페는 끙 소리를 내며 머리를 짚다가 옷을 받았다. 펠리페는 여전히 피곤한 몸을 옷소매에 넣느라 고생해야 했다. 한동안 투쟁 끝에 펠리페는 여관에 오기 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는 모자를 눌러쓰고 여급에게 다가갔다.

“음? 벌써 가시나요?”

 그녀가 묻자 펠리페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이 많았다면 오래오래 있었겠다만.”

 그 말에 여급은 썩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하여튼. 얼마요?”

 그러면서 펠리페는 전대에 손을 넣고 돈을 만지작거렸다. 여급은 머릿속으로 계산하기 시작했다.
 그때 여관 문이 열리고 라우레니엔말이 들려왔다. 작게 중얼거리며 계산을 하던 여급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갔다. 펠리페는 고개를 살짝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세 명의 병사. 팔뚝에 노랗고 검은 천을 둘둘 매 라우레니엔 소속이라는 것을, 온몸에 눌어붙은 진흙과 먼지, 그리고 핏자국으로 이들이 오랜 시간 동안 싸워왔음을 증명했다.
 그들은 각자 무기를 지고 껄렁대며 여관 안의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시선 끝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은 눈이 마주칠 때마다 두려움에 질려갔다. 그때 병사 하나가 펠리페를 보고 말했다.

“어이. 모자 좋은데?”

 펠리페는 대답하지 않았다.

“무시한다고 우리가 사라지는 건 아니야. 그보다 그 칼도 마음에 드는군그래.”
“허리에 두른 건 전대 아니야? 그것도 마음에 드는걸.”

 병사들은 크게 웃어대며 펠리페에게 다가왔다. 펠리페는 천천히 칼을 뽑고는 여급에게 작게 말했다.

“아무거나 쥐여 주시오.”
“네?”
“아무거나. 단단한 것이든 날카로운 것이든, 무엇이든 간에.”

 그러자 여급은 탁자에 기대어있던 막대기를 펠리페에게 건넸다. 펠리페는 다시 물었다.

“놈들이 가까이 왔소?”

 여급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펠리페는 재빨리 몸을 돌리며 왼손에 든 작대기를 휘둘렀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작대기가 박살났고 병사는 큰 소리를 내며 바닥에 쓰러졌다.

“아악! 내 얼굴!”
“이 빌어먹을 개새…….”

 펠리페는 재빨리 칼로 오른쪽에 있던 병사의 목덜미를 겨눴다. 왼쪽에 있던 병사는 어느새 다가온 케리스가 자기 목에 칼을 대자 그대로 멈춰 섰다.

“너, 너희들, 시, 실수하는 거야!”

 그 말이 끝나자마자 다시 여관 문이 열리더니 늙은 병사를 포함한 또 다른 세 명이 안으로 들어왔다. 안에서 들려온 요란한 소리에 다급하게 들어온 모양이었다.

“그 칼 내려놔!”

 늙은 병사가 펄션을 겨누며 외쳤다. 그러던 중 병사 하나가 펠리페의 허리를 가리키며 외쳤다.

“저 천……. 토비아스! 저 새끼 에스테야놈이야!”

 펠리페는 자기 허리를 바라보았다. 나뭇가지에 목이 매달린 채 썩어가는 시체의 팔뚝에 묶여있던 그것이었다. 토비아스라 불린 늙은 병사는 분노로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크게 소리쳤다.

“이 빌어먹을 개새끼 같으니! 네 목을 따서 죽은 가족들의 무덤 앞에 바치겠다!”
 
 펠리페는 어금니를 꽉 물고 케리스를 보았다. 두 사람은 서로 눈을 마주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각자 병사의 목을 꿰뚫거나 베어 쓰러트리고 가까이 붙었다. 그리고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는 적들을 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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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즈베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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