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백가담(魂魄家譚)

단편 2013. 3. 10. 02:17

혼백가담(魂魄家譚)

그날도 하쿠레이 신사에는 술잔치가 벌어졌다. 매일같은 술잔치에 지치지도 않을까, 툇마루에 앉아 바닥이 꺼지도록 한숨을 쉬는 하쿠레이 레이무에 대해서는 다들 아무런 관심 따위 두지 않고, 신사가 떠나가라 시끌벅적할 뿐이었다. 인간 요괴 가릴 것 없이 섞여 어울려 술을 마시는 모습은, 정말로 '환상향'이라는 단어에 어울리지 않는가,라고 누군가가 떠든 것 같았지만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다.

이 시끌벅적한 연회에는 명계의 백옥루의 주인 사이교우지 유유코와, 그녀의 경호원이자 백옥루의 반인반령 정원사 콘파쿠 요우무도 있었다. 요우무는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채로, 지저의 오니나 쓸법한 커다란 잔을 든 채로 마법사 키리사메 마리사가 쏟아붓는 술을 받았다.

이야기가 이어지고, 어쩌다보니 마리사와 그녀의 의절한 아버지에 대해서까지 이야기가 이어졌다. 그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마리사는 펄쩍 뛰면서 말을 끊어버렸고, 마리사 덕분인지 순간적으로 요우무가 있는 그룹에선 대화가 끊어져버렸다. 그 침묵을 깬 건 바로 요우무였다.

"……그러고보니 제게는 아버님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어요. 어머님에 대해서도요."

"전혀 없다고?"

"네……. 묭한 일이에요. 유유코님은 제 부모님에 대해서 아시는 게 있으세요?"

순간 유유코의 미소가 끊어진 듯 했지만, 유유코는 침착하게 다시 웃으며 얼버무렸다.

"전혀. 요우키도 자기 아들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없었단다."

평소 같았으면 전부 거짓임을 꿰뚫었겠지만, 잔뜩 술에 취해 앞뒤 구분조차 못할 뿐만 아니라 아무런 경계심도 없고 집중조차 안 하는, 아니 못하는 사람들에게 그런 것은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었다. 덕분에 요우무의 의문은 순식간에 술과 함께 요우무의 식도를 타고 사라져버렸다. 그러나 질문을 받은 유유코는 여전히 요우무의 말이 신경쓰이는지, 이미 정신을 잃고 쓰러져버린 요우무를 보고 한숨이 나왔다. 변소에 간다고 둘러댄 채로 신사 주변을 서성이던 그녀의 뒤에서 인기척과 함께 익숙한 친구의 목소리가 들렸다.

"유카리."

"어머, 유유코. 혼자 술자리에서 빠지는 거야? 유유코 답지가 않네."

유유코는 그 분홍색 머리를 흩날리며 뒤돌았다. 하지만 웃고 있지는 않았다. 그녀의 모습에 알 수 없는 위화감을 느낀 유카리는 고개를 까딱이며 유유코에게 다가갔다. 너답지 않다며, 오늘 이상하다면서. 그러자 유유코가 말했다.

"요우무가 자기 아비에 대해 의문을 가진 거 같아."

"그게 무슨 소리……아아. 알 거 같네."

유카리는 부채로 얼굴을 가리면서 말을 이었다.

"요우무가 자기 아비와 조부 간의 일을 알게 된다면 얼마나 큰 충격을 받을지 걱정하는구나, 유유코."

유유코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도 기억해. 그 일을 말야. 요우키랑, 요우모리……."

정말 오래전의 일이었다.

백옥루의 정원사 콘파쿠 요우키가 사이교우지 유유코를 주인으로 모신지도 벌써 오랜 시간이 흐른 뒤였다. 요우키는 성심성의껏 유유코를 보필했고, 그의 검술 실력은 환상향 내의 제일가는 검술사범으로 명망 높은 자였다. 그는 이름모를 반인반령 여인과 혼인하여 아들을 하나 두었고, 아들의 이름이 '콘파쿠 요우모리'였다. 유유코는 벚꽃이 화려하게 핀 봄의 백옥루 툇마루에서, 마당에서 누관검을 쥔 어린 요우모리가, 요우키의 지도에 따라 검을 쥐고, 발을 움직이고, 신기에 가까울 정도인 요우키의 검술을 하나하나 배워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미소를 지었다. 요우키는 요우모리에게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빠짐없이 열성적으로 가르쳤다.

요우키는 정말 조용한 편이었지만, 가끔 이야기 할 때는 항상 요우모리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유유코가 그 이유에 대해서 물으면 요우키는 항상,

"그 아이는 제 모든 것입니다."

라고 답할 뿐이었다. 그 말처럼, 요우키에게 그의 아들은 그에게 남은 모든 것이었다. 그의 아내는 죽은지 오래였고, 아무리 그가 환상향 최강의 검술사범이라고 한들 그의 검술을 배우려는 사람은 없었으며 그가 가르쳐주려고 하지도 않았다. 콘파쿠 가문을 잇고, 요우키의 검술을 잇고, 백옥루의 정원사 자리도 이을 그의 모든 것. 그가 바로 콘파쿠 요우모리였다. 훗날 요우모리가 그렇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으리라.

요우모리가 홀로 마을에 내려갔을 때의 일이었다. 그는 요우키처럼 두 자루의 검을 찬 채로 신사에 가는 길이었다. 그는 계속 주변에서 시선을 느꼈다. 요우모리는 길을 걷다 멈추고 소리가 들려오는 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기를 반복했고, 그때마다 자신을 보며 끼리끼리 모여 속닥거리던 사람들은 모르는 척 다시 고개를 돌렸다. 요우모리가 다시 고개를 돌리고 길을 계속 가자 사람들은 다시 모여들어 이야기를 계속했다.

"저 사람 콘파쿠네 아들 아냐? 하쿠레이 신사에 간다면서?"

"그 위험한 곳을? 신사가 요괴에 점거당했다면서?"

"가는 길도 위험하다잖아. 뭐 어쩌려고 그러는 거지? 그보다 저 칼은 뭐고……."

그 말을 아는지 모르는지, 요우모리는 그대로 마을을 벗어나 하쿠레이 신사로 향하는 숲길에 들어섰다. 여름이라 해가 높게 떴지만, 빽빽한 나무와 푸른 잎사귀 사이로 흘러오는 빛은 극히 미미했고, 대낮인데도 앞이 잘 보이지 않는 어두운 곳이었다.

"이거 기분이 안 좋은데……."

요우모리는 홀로 중얼거리며 숲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금방이라도 검을 뽑아들을 수 있도록 왼손으로 칼집을 잡고, 오른손을 쥐락펴락하며 주변을 경계했다. 주변에서 계속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누군가가 빤히 쳐다보는 강렬한 느낌이 요우모리의 피부를 콕콕 찔렀다. 바람이 불어와 푸른 잎이 달린 가지를 위아래로 마구잡이로 흔들고, 뜨거운 여름의 열기는 숲에 존재하지도 않았다. 어느순간 스윽하고 누군가가 뒤를 지나간 느낌에, 그는 재빠르게 검을 뽑으며 뒤를 돌았다. '그냥 동물인가'하고 검을 내리려는 찰나, 그의 뒤에서 압도적인 요기와 함께 굉음에 가까운 요괴의 소리가 들려왔다.

요우모리는 깜짝 놀라, 뒤돌며 이리저리 검을 마구마구 휘두르며 뒤로 도망치듯 물러섰다. 온몸이 새까만 그 요괴는 불타오르는 것 같은 새빨간 두 눈만 번뜩이며, 이를 가는 기괴한 소리와 번뜩이는 발톱을 가지고 요우모리를 향해 다가왔다. 요우모리는 계속 검을 치켜세우며 요괴를 위협해봤지만 그 새까만 요괴는 전혀 위협으로 느끼지 못하는 듯, 계속 요우모리를 위협했다. 요괴가 무어라 지껄이는 것 같았지만 그에겐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치, 침착, 침착하게……."

요우모리는 요우키에게 배운 것을 생각해내려고 애를 쓰면서 동시에 눈 앞에 있는 맹렬한 적의를 가진 요괴에 대한 경계를 풀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기억을 미처 떠올리기도 전에, 요괴는 이미 번쩍 뛰어올라 그를 산산조각내려하고 있었다. 그러자 먼저 요우모리의 반령이 빠르게 나서 요괴의 목을 묶어놨고, 요괴의 움직임이 둔해지자 요우모리는 뒤로 몸을 날려 공격을 피했다. 그러자 요괴는 날카로운 손톱을 휘둘러 반령을 떼어냈고, 다시 똑같은 움직임으로 요우모리에게 달려들었다. 요우모리는 그 요괴가 달려오는 움직임에 맞춰, 그 요괴에 모든 집중을 가하며, 이를 꽉 물고 그의 검을 높게 쳐들었다.

일순간, 요우모리의 눈에 요괴의 움직임이 매우 느려진다 싶더니 이윽고 멈춘듯했다. 맹렬하게 불어오던 바람도 멈추고, 요괴의 울음에 사시나무 떨듯 부르르 떨던 가지도 멈추고, 바람에 몸을 맡기고 하늘을 흘러가던 구름도 멈추고, 요괴의 목소리 사이에서 울던 벌레의 찌르륵 소리도 멈췄다. 요우모리는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알 수가 없었지만, 그런 생각을 하기 전에 먼저 요우모리는 기합을 내지르며, 온몸의 기를 검에 집중하고는 그대로 자신의 앞에 멈춰선 요괴의 머리를 향해 검을 내리쳤다.

팍! 뼈가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요괴의 피가 요우모리에 튀었고, 요괴는 머리가 반으로 갈라졌지만 관성 덕분에 그대로 요우모리의 몸에 커다란 충격을 전달했고, 충격을 받은 요우모리는 요괴의 피를 뒤집어쓰며 흙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가 아직도 요기를 발산하는 요괴 시체를 밀어내며 일어서려하자, 드득 드득 이 가는 소리가 사방을 가득 메웠다. 요우모리는 얼어붙은 채로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연파랑색 머리카락은 이제 적갈색의 피로 검게 물들었고, 초록색 옷 역시 마찬가지였다.

요우모리는 검을 쳐들었다. 조금 전 요괴 앞에서 당황하던 요우모리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다. 그는 거칠게 숨을 훅훅 내쉬면서 숲에서 뛰쳐나오는 새카만 요괴들을 살기어린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 요괴들은 너나할 것 없이, 앞뒤 구분 없이 모두 요우모리에게 달려들었다. 그러자 요우모리의 반령이 그대로 그의 등 뒤에 그와 똑같은 모습으로 변했고, 둘이 된 요우모리는 서로의 등을 맞댄 채로 달려드는 요괴들을 향해 검을 겨눴다.

요우키가 헐레벌떡 신사로 향하는 길로 뛰어온 것은 해가 서쪽으로 넘어간 뒤였다. 그는 매우 불안한 표정으로, 산더미처럼 쌓인 요괴 시체의 산에서 이어지는, 끔찍하리만치 강렬한 요기가 어린 핏자국을 따라 뛰었다. 핏자국 끝에 있는 건, 검을 집어넣은 칼집을 지팡이 삼아, 한 쪽 무릎을 꿇은 채로 버티고 있는 요우모리였다.

"아들아!"

요우키는 그에게 달려가 금방이라도 쓰러질듯 위태로운 요우모리를 붙잡았다.

"아들아, 정신이 드느냐?"

"아, 아버님……."

요우모리는 왼 쪽 뺨에 세 갈래의 커다란 상처가 나있었고, 요우키와 똑같은 연파랑색 머리는 피로 붉은 빛이 도는 검은색으로 염색당한 모습이었다. 얼굴 뿐만 아니라 다른 곳 역시 상처투성이였고, 어느 것이 요괴의 피고 요우모리의 피인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요우모리는 끝까지 요우키에게 무어라 말하려 애를 썼다.

"저, 저는, 아, 아버님 말대로……."

"괜찮다. 그만 하거라. 백옥루로 돌아가자꾸나."

요우키에게 업힌 채로 하늘을 날아 백옥루로 돌아가던 요우모리는 홀로 중얼거렸다.

"어째서……."

요우모리가 눈을 떴을 때는 꽤 여러 날이 지난 듯했다. 그가 몸을 일으키자 문 바깥에서 유유코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머, 요우모리군. 깨어났네. 몸은 어떠니?"

요우모리는 대답대신 자신의 얼굴을 만져보았다. 세 개의 굵은 상처 위에, 꿰멘 듯한 흔적과 딱지가 앉아 울퉁불퉁한 느낌이 그대로 느껴졌다. '요우모리?' 바깥에서 유유코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오자, 그제야 그는 억지로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지금 당장이라도…….' 물론 거짓말이었다. 고개를 돌려 주변을 보니 손거울이 떨어져있었다. 유유코의 장난인가 싶은 요우모리가 거울을 쥐고 쳐다보았다. 거울속 그의 모습은 마치 염색이라도 한 듯, 연파랑의 머리카락이 아니라 흑적색의 머리카락이 얼굴을 뒤덮고 있었다. 요우모리는 놀라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었지만, 그는 더 이상 요우키와 같은 이전의 연파랑 머리카락이 아니었다. 요우모리는 멍한 표정으로 바깥으로 나왔다. 그의 붉은색이 도는 검은 머리를 본 유유코는 억지 미소를 보였다. 요우모리도 억지로 미소지으며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아, 요우모리군. 마을에 내려간 요우키 좀 불러오겠니? 요우키가 오지를 않는구나."

"그렇게 하겠습니다, 유유코님."

요우모리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백옥루의 계단을 내려갔다. 명계에서 벗어나 마을로 들어가자, 사람들이 그를 보자마자 화들짝 놀라면서 뒤로 물러났다. 무슨 일인지 물으려고 했지만, 사람들은 도망치듯 그 자리를 빠져나갔다. 그는 우두커니 서 있는 대신 요우키를 찾아 마을을 돌아다녔다. 사람들을 붙잡고 무언가를 물어보려 할 때마다, 그 사람들은 자신을 보자마자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기피했고, 요우모리는 단 한 마디도 꺼내지 못한 채로 마을 이곳저곳을 쑤시고 다녔다. 하지만 누구도 그에게 요우키가 어디 있는지 말해주지 않았다. 홀로 무기력하게 어둠이 깔린 마을을 돌아다니던 요우모리는 마을회관의 벽에 기댄 채 바닥에 주저앉았다. 요우키의 목소리가 들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내 아들이 요괴라고? 요괴이라고 했소? 요괴의 피를 뒤집어써서 머리가 새까맣게 변하고 안 좋은, 요괴의 기운을 내뿜는다고 해서 퇴치 대상이라고? 개소리 집어치우시오!"

그 다음 들리는 목소리는 하쿠레이의 무녀였다.

"하지만 요우키 공께서도 아시겠지만, 도련님께서는 그 일 이후로 압도적일 정도로 강력한 요기를 내 뿜는……."

그녀가 말을 멈추더니, 자리에서 일어난 듯한 소리가 났다. 회관 안에서 나는 소리를 듣던 요우모리는 바로 앞에 인기척이 느껴지는 것을 보고 고개를 들었다. 붉은 색 무녀복, 검고 긴 생머리, 하쿠레이의 무녀였다. 그녀는 요우모리를 일으켜세웠다. 요우모리가 일어서자 하쿠레이의 무녀는 고개를 살짝 쳐들어 요우모리를 올려다보았다.

"요우모리군. 백옥루로 돌아가시지요. 마을에 계시면 위험합니다."

"……저는 요괴가 아닙니다, 무녀님. 그리고 제가 위험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위험하니까 위험하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신지요?"

무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직설적입니다, 요우모리군. 게다가 지금은 돌려말할 때도 아닙니다."

그러자 요우모리는 무녀를 손으로 밀치고는 마을에서 멀어지는 곳으로 계속 걸어갔다. 그쪽은 백옥루로 가는 길이 아니라고 무녀가 말했지만 요우모리는 듣지 않았다. 뒤이어 요우키가 뛰쳐나와 요우모리의 이름을 불렀지만 요우모리는 여전히 반응하지 않았다. 결국 요우키가 직접 그에게 뛰어가 잡은 뒤에야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목이 메어, 눈물범벅이 된 채로 요우키를 보았다. 요우키는 차마 아들의 그런 모습을 볼 수가 없었는지 시선을 회피하며 말했다.

"요우모리……. 아들아."

"왜 그때 저를 신사로 보내신 겁니까. 그러지만 않으셨다면 제가 이 꼴이 되지도 않았을 텐데."

"……그래, 모두 내 탓이다, 요우모리. 네가 조금만 더 신경을 썼다면 네가 그렇게 되지도 않았을테지. 조금만 더 신경을 썼다면……."

요우키는 무릎을 꿇었다. 요우모리는 그러나 그런 아비를 보기만 할 뿐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아들이 눈물만 흘리며 쳐다보고만 있자, 요우키는 허리에 차고 있던 두 자루의 검을 풀어 요우모리의 발 앞에 내던졌다.

"떠나지 않게 하려고 했지만……너를 백옥루에 둔다 하더라도, 네가 아무것도 하지 않더라도 결국 나는 비난을 면치 못할 게다."

"그렇게 사람들의 말이 두렵습니까?"

"나는 두렵지 않지만, 유유코님의 평판을 더럽힐 수는 없었다. 대대로 사이교우지 가를 보좌해온 콘파쿠 가의 사람으로써, 그것만은 참지 못하겠더구나."

"결국 가족보다 주인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까? 알겠습니다. 원하시는 대로 떠나드리겠습니다."

"내 말을 더 듣거라, 요우모리!"

요우모리는 누관검과 백루검을 들고 허리에 찼다. 그리고는 말했다.

"빌어먹을 늙은이."

그 말을 끝으로 요우모리는 사라졌고, 아들의 말을 들은 요우키는 그대로 무너지듯 고개를 떨구며 오열했다. 후회로 가득찬 요우키의 오열이 조용한 마을을 가득 메웠지만,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다.

그 후로 많은 시간이 지났다. 마을은 예전처럼 조용했다. 듣기로는 아홉번째 아레의 아이가 태어날 때가 가까워졌다는 말이 있고, 역사를 지운다는 반백택 여인이 마을에서 아이들을 가르친다고 하였다. 미궁의 죽림에서 불꽃으로 된 날개를 봤다는 소문이 있고, 키리사메라는 젊은 청년이 도구점을 시작했다는 말이 있었다. 그리고 가장 무엇보다─요우키의 입장에서 가장 한이 되는 소식이라면─마을에 거주하는 요괴들이 크게 늘었다는 것이다.

그에 반해 백옥루는 크게 변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여전히 봄이 되면 환상향에서 가장 아름다운 벚꽃이 피었고, 백옥루의 주인인 벚꽃색 머리의 망령 아가씨 사이교우지 유유코가 있고, 그녀의 경호원이자 정원사 콘파쿠 요우키가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작은 변화는 너무나도 많았다.

요우키는 멍하니 툇마루에 앉아 하늘만 바라보기 일쑤였다. 가끔 유령들이나 마을에 내려갔을 때에, 요우모리에 대한 소식은 없는지, 혹시 요괴들 사이에 요우모리가 있는지, 검 쓰는 사람은 보았는지 등의 정보를 묻는 일이 과도하게 많아졌다. 사실을 알고 있는 몇은 그런 요우키를 볼 때마다 불쌍하다는 듯이 말했다만, 정작 자신들이 요우키를 저렇게 만든 장본인이라는 것은 새까맣게 잊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면, 억지로 잊는 척을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던 어느날이었다. 그날도 요우키는 마을에 나온 김에 요우모리에 대한 소식을 구하고 있었다. 그때 만난 것이 바로 하쿠레이의 무녀였다. 요우모리가 떠나던 날에 비하면 그 아름다움이 어느 정도 퇴색한 모습이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무녀의 기품은 느낄 수 있었다.

"아, 요우키 공."

"안녕하시오 무녀님."

"마침 잘 만났어요. 요우키 공에게 드릴 말씀이 있었거든요."

"혹시 요우모리에 대한 일이오?"

무녀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관계는 있을지도 몰라요."

"관계가 있을지도 모른다니, 무슨 뜻입니까?"

무녀가 말하기를, 요즘 마을 외곽에서 인요를 가리지 않고 잔인하게 참살당한 시체가 많이 발견된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 살인귀는 무시무시한 요력을 내뿜고 있었는데,─과장이 섞였겠지만─10리 밖에서도 그 기운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두 자루의 검을 반짝이며 뛰쳐나와, 길을 잃은 인간과 요괴를 죽이고 그들이 가진 재물을 빼앗은 뒤 그 시체의 일부를 떼서 먹는다고 하는 것이다.

두 자루의 검, 무시무시한 요력. 떠나던 날 요우키는 누관검과 백루검을 아들에게 주었다. 아들이 떠났던 이유도 무시무시할만큼 압도적이고 강한 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머지는 요우키로써는 절대로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인요를 가리지 않고 참살하며 그 시체를 먹는다는 것은, 요우모리에 대해 가지고 있는 그의 기억 속에서 그럴만한 일은 전혀 없다. 아무리 요기가 강해졌다 한들, 요우모리가 절대로 그럴리가 없었다. 분명히 요우모리를 죽이고 두 자루의 검을 빼앗은 요괴가 그를 참칭하는 것이리라.

"아닙니다. 절대로 요우모리가 아닙니다. 저건 소문일 뿐입니다."

"하지만 그가 보이지 않은 지 벌써 10년은 넘었습니다, 요우키 공."

"빌어먹을, 요우모리를 모함하시지 마시오, 무녀. 나는 내 아들에게 그런 식이 되라고 가르치지 않았소. 내 아들을 환상향에서 떠나도록 종용한 것이 당신을 비롯한 퇴치사 일당들이면서 이제는 아예 내 아들이 인륜을 저버린 살인귀라고 하는 거요?"

요우키가 비록 큰 소리는 내지 않았지만, 그의 말투와 표정에서 엄청난 분노와 살기를 무녀는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무녀는 꿋꿋했다.

"……하지만 적어도 조사는 해봐야해요, 요우키 공."

"요우키 공이라고도 부르지 마시오."

그렇게 말하며 요우키는 대답을 거부한 채 백옥루로 돌아갔다.

그날도 요우모리는 은둔처의 벽에 기댄 채로 눈을 감고 있었다. 명상을 하는 것인지 잠을 청하는 것인지는 요우모리 그 자신도 몰랐다. 아직은 낮인데다가 비까지 오기 때문에, 요우모리는 바깥으로 나가지 않았다. 도망쳐온 후 지금까지, 요우모리는 이 깊은 산속 골짜기에 있는 그의 은둔처에서 해가 떠 있을때 나간 적이 없었다.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풀에서 멧돼지 고기까지 음식은 많았고, 검을 관리할 숫돌도 충분했다. 비단옷은 이제 잔뜩 찢겨지고 짓이겨져 그 형체마저 온존치 못했지만 여전히 요우모리는 그것을 입고 다녔다. 그러던 그가 그 날, 그 아침에, 인기척을 느끼고 눈을 뜬 뒤 바깥으로 나선 것은 그야말로 운명이 분명했다.

무슨 바람이 들어서인지, 요우모리는 후두둑 떨어지는 비를 맞으며 은둔처를 나와 숲을 걷고 있었다. 오랜 시간 동안 은둔처 안에 숨어있던 것이 답답했던 것일까. 그가 인기척을 느낌과 동시에 가녀린 여인의 날카로운 비명을 들은 것은 그가 하쿠레이 신사로 가는 길 바로 옆까지 왔을 때였다. 또 요괴가 나물이나 버섯을 캐러 온 소녀를 습격해 갈갈이 찢어놓은 것일 뿐일테지, 요우모리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혹시 하는 마음에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 오지마!"

여인의 목소리가 확실히 들릴 즈음에, 요우모리는 요괴들이 내는 드득거리는 이가는 소리 역시 들을 수 있었다. 여인의 구슬픈 요청이 다시 들려왔다.

"제발, 제발 살려주세요……제발……."

"거기 요괴들."

요우모리가 발걸음을 좀 더 빠르게 해서, 여인이 낸 애처로운 말이 끝나기 직전에 사건이 벌어지려고 하는 장소에 나타날 수 있었다. 날카로운 발톱을 핥아대며 소녀를 짓이기려던 요괴들이 단체로 요우모리를 돌아보았다.

"하나, 둘, 셋인가."

요우모리의 압도적인 요기에 눌렸는지, 요괴들은 찍소리도 못내며 뒤로 물러서려고 했다. 용기를 낸 하나가 발악하려는 듯 요우모리에게 달려들자 요우모리는 별 것 아니라는 듯 누관검을 뽑아 그대로 상반신과 하반신을 나눠버렸고, 이왕 검을 뽑은 거 모조리 싹 죽여버리자고 생각했는지, 나머지 둘에게 재빨리 달려들어 순식간에 요괴들을 둘로 갈라버렸다. 피가 다시 한때 초록색이었던, 지금은 새까만 비단옷에 튀었다. 요우모리는 검을 한 번 흔들어 피를 털어낸 뒤 여인에게 다가갔다. 호박색의 아름다운 문양이 새겨진 고급스러운 재질의 옷과 옷에 달린 각종 장식, 그리고 그와는 안 어울리는 수수한 디자인의 검은색 리본이 달린 머리띠 등을 볼 때 마을 유지의 딸 중 하나로 보였다. 그 여인은 검을 든 채로 다가오는 요우모리의 모습과, 그가 내뿜은 무시무시한 아우라에 질렸는지, 얼굴이 창백하게 변한 채 그대로 기절해버렸다. 여자가 기절하자, 요우모리는 그제야 누관검을 칼집에 쑤셔넣었다.

"이거 어쩐다."

이 기절한 여인을 빗속에 내버려뒀다가는 다른 요괴에게 죽기 전에 먼저 동사하거나, 살아난다 하더라도 얼마 못 가 죽을 병을 얻을지도 모른다. 물론 깨어나도 빠져나갈 방법이 없는 건 덤. 어쩔 수 없다는 듯, 요우모리는 여인을 끌어안았다.

그녀가 깨어났을 때, 가장 먼저 느낀 것은 모닥불의 따듯한 열기였다. 두 번째로 느낀 것은 위험할 정도로 무시무시한 기운이었고, 세 번째는 자신이 속옷차림이었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깨어났지만 차라리 깨어나지 않았으면하는 상황인 것이다. 그녀가 들키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려 정체불명의 무시무시한 기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피 같은 적색 빛이 도는 검은색 머리카락은 무성의하게 다듬어져 있었고, 허리춤에는 일본도 두 자루를 차고 있는, 창백한 피부의 남자가 문쪽으로 기댄 채로, 한 쪽 눈만 뜬 채 자신을 보고 있었다. 그녀는 요우모리와 눈이 마주쳤을 때, 숨이 멎을뻔 했다. 두 자루의 칼, 압도적인 요력. 분명히 그 미친 살인귀가 분명했다.

"일단 속옷바람인 건 젖은 옷을 말리려고 한 거고, 모닥불의 존재 이유는 추워서입니다. 구워먹거나……그런 건 아닙니다."

요우모리는 여전히 존대를 썼지만, 그녀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는 그와 눈이 마주친 그 순간 다시 기절한 것 같았다.

"기절한 것과 기절한 척은 다릅니다."

요우모리가 차갑게 말하자 그제야 여자는 몸을 일으켜 앉은 상태에서 온몸으로 몸을 가렸다.

"높으신 분의 따님 같은데, 어쩌다 여기까지 왔습니까. 칼 찬 요괴의 은둔지까지 말입니다."

요우모리는 바깥을 내다보며 말했다. 그녀는 여전히 겁먹은 듯 말을 하지 않았다. 요우모리도 아무래도 됐다는 듯 더 이상 질문하지 않았다. 언제나 그랬듯이, 이 폐허가 된 사당의 뚫린 바닥에 모닥불을 펴 둔 쓰레기 같은 은둔처는 조용하기만 했지만, 요우모리나 그녀나 서로가 신경쓰이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저기."

그녀는 알았다는 말 대신 요우모리에게 물었다.

"보아하니 살인귀처럼 보이지는……않는데……."

"살인귀요? 제가 살인귀랍디까?"

여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요우모리는 큭큭큭 짧게 웃더니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창호지만 바라보았다. 자신에게 쫓아내다못해 아예 살인귀라는 소문까지 내버렸구나. 요우모리는 지독한 새끼들이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녀는 요우모리가 욕을 하거나 말거나, 궁금한 것을 물어보기 시작했다.

"옆에 떠다니는 게 뭐에요?"

"반령입니다."

"반령이요?"

"저는 반인……반요반령이니까요."

"이해하기 어려워요."

여인은 잠시 입을 꾹 닫더니, 이윽고 다시 질문을 쏟아냈다.

"이름이 뭐죠?"

여인이 물었다.

"콘파쿠……."

순간 요우모리는 자신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다. 그는 말을 하려는 듯 계속 왼손을 허공에 돌리면서 콘파쿠우우우우우우우우우-라고 말을 끌며 이름을 생각해내려 애를 썼다.

"요우모리. 콘파쿠 요우모리. 요우모리라고 불러도 됩니다."

"이름도 기억 못하는 건가요? 덜렁이시네요."

여인은 짧게 웃음을 흘렸다.

"그러는 아가씨는, 이름이?"

"그냥……유메라고 불러주세요."

"유메(夢)……."

다시 침묵.

"저기, 구해주셔서……고맙습니다."

"돌아가시면 적어도 제가 살인귀는 아니라고 해주십시오."

"꼭 말씀드릴게요. 콘파쿠 요우모리는 살인귀가 아니라 아주아주 착하고 좋은 요괴다, 라구요."

유메는 천쪼가리로 몸을 가린채로 요우모리의 등 뒤에 다가왔다. 그러더니 부드러운 손길로 씻지도 않고 제대로 다듬지도 않아 엉망인 요우모리의 머리카락을 빗어주며 말했다.

"머리라도 깔끔하게 하면 살인귀라는 소문이 줄어들거에요."

그러자 요우모리의 얼굴이 붉어졌지만, 그것을 유메가 알 일은 없었다. 요우모리는 어색함을 피하려고

"……10년이 넘도록 본 요괴들은 머리카락이 어떤지 신경쓰지는 않았습니다만."

"요즘 마을의 요괴들은 머리카락도 멋지게 하고 다니는 걸요."

"마을에 요괴가 삽니까?"

"네. 많이요."

요우모리는 깜짝 놀라 유메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그녀는 그의 행동에 도리어 놀라 몸을 돌리며 재빨리 손으로 가렸고, 요우모리도 자신의 무례함을 깨닫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 그, 그것들이 사, 사람을 고, 공격하지는 않고 그럽니까?"

"그, 그야, 고, 공격하지 않게, 겠다고 선, 선언한 요괴만 사, 사니까요."

둘은 한동안 다시 말이 없었다. 침묵을 깬 건 이번엔 요우모리였다.

"그거……억울하군요. 저는 쫓겨났었는데."

"그럼 지금이라도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요?"

"그들이 받아들이지도 않을 겁니다. 무엇보다 돌아갈 마음도 없습니다."

요우모리의 반응에 유메는 그를 설득시키고 싶었는지, 발을 동동구르며 어떤 말을 해야할지 생각했다. 이윽고 무언가 떠올랐는지 기쁜 얼굴로 말했다.

"하지만 떠나신지 10년이 넘었다고 하셨잖아요? 그러면 용서해주실지도 몰라요!"

"용서라고 하셨습니까?"

용서라는 단어에, 요우모리는 정말로 차갑게, 무서울 정도로 단호하게 대답했다.

"죄가 없는데 어떻게 용서를 받겠습니까."

"……저기, 혹시 제가 말 실수를 했다면 죄송해요."

"아닙니다."

요우모리는 여전히 차가웠다. 유메는 무슨 말이라도 할까 했지만, 바깥에서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요우모리가 미닫이 문을 열고 바깥을 보았다. 날은 이미 어두워졌지만 비는 그쳐있었다.

"옷을 입으십시오. 돌려보내드리겠습니다."

"저, 저기."

요우모리가 그 말에 유메쪽을 돌아보려는 찰나, 유메가 먼저 등 뒤에서 그를 껴안았다.

"좀 더 있고 싶어요. 요우모리님이랑……좀 더 있고 싶어요."

"유메씨?"

그녀의 행동에 요우모리는 너무나도 당황해 말도 똑바로 하지 못했다.

"……집에 가면 또 혼만 잔뜩 나고 아버지한테 얻어맞을 거에요. 그리고 한 동안 방에 갇혀서 살 게 분명해요. 어차피 그쪽에서 전 내다놓은 자식이니까요. 그냥 버리면 그만인……."

"……."

"항상 그곳에서 저를 데리고 나와줄 분을 기다렸는데, 어쩌면 요우모리님이 그 분일지도……."

유메는 요우모리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부드러운 양손으로 그의 상처투성이 얼굴을 어루만졌다. 그녀는 까끌까끌한 요우모리의 피부와 움푹 파인 그의 상처를 쓸어내렸다. 그러자 요우모리는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았다.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게 얼마나 기쁜 일인지 모르시는 겁니까?"

"제게 돌아갈 곳은 기쁜 곳이 아니랍니다, 요우모리님. 제가 왜 숲에서 헤메고 있었다고 생각하시나요? 제가 왜 요우모리님께 그렇게 귀찮을 정도로 말을 걸었다고 생각하시나요?"

"하지만……."

유메는 요우모리의 말을 자신의 입술을 그의 입술에 포개어 틀어막았다.

"이건 사랑이 아니라 한 순간의 일탈에 불과할지 몰라도……."

요우모리는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몇 개월이 지났고, 마을에는 대사건이 일어났다. 숲으로 가서 실종된지 하루가 지나 살아 돌아온 여인에게서 '콘파쿠 요우모리'가 살아있고, 살인귀는 그의 행적이 와전된 소문에 불과하다는 증언이 실린 텐구의 신문이 마을 전체에 뿌려졌다. 그리고 그녀의 배가 점점 더 불러오고 있다는 것도 모든 사람들이 알게 되었다. 그녀의 집안에서는 그녀를 방 안에 유폐해버렸고, 그녀는 한동안 나오지 않았다. 이 소식을 들은 요우키가 펄쩍 뛰며 기뻐했다는 것은 표현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그와는 별개로, 유메라는 여자가 무슨 말을 했던간에 요우모리를 그 '살인귀'로 규정하고 그를 퇴치하려는 퇴치사 집단에서는 그야말로 골칫거리였다. 사실 죽었다는 말이 나오기를 바랬던 그들이었지만, 그가 멀쩡히 살아있다는 소식은 퇴마사들을 공포에 몰아넣기 충분했다. 아무리 유메 그 여자가 요우모리는 살인귀가 아니라고 말을 해봐야 세뇌 당했을 가능성이 충분했고, 두 자루의 검과 강한 요기의 살인귀가 그라고 믿을 증거도 충분했다.

"벌써 몇 년이지? 요우모리가 떠난지도 말야."

퇴치사 중 한 명이 그렇게 말하자, 문을 열고 들어온 하쿠레이의 무녀가 그 말에 대답했다.

"거의 15년이 다 되어가죠. 우리는 그가 반인반령이었다는 것을 간과했었습니다."

그녀의 등장에, 모든 퇴치사들이 벌떡 일어나 그녀에게 예를 표했다. 그리고 다들 자리에 앉았다.

"그보다 요우키 공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그 분의 아들을 죽이려한다는 것만으로도 그분이 우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잘 아실거라 생각합니다."

"하, 하긴, 그렇겠지."

"그래서 요우키 공에겐 이 일을 알리지 않았습니다."

"그보다, 그를 퇴치할 계획부터 짜봅시다. 그놈의 아이를 밴 유메라는 여인을 쓰는 게 어떻겠습니까?"

퇴치사 중 하나가 헛기침을 하며 제안을 냈다.

"그녀를 쓰자니, 무슨 뜻입니까?"

"그 여인을 미끼로 요우모리 그 사람을 마을로 끌어들여 처리하는 겁니다. 마을 바깥으로 나가면 그 자에게 먼저 우리가 참살 당할테니, 마을로 끌어들여 그 자를 결계에 들어오게 한 뒤 봉인해버리자, 아니면 죽이자, 그런 뜻입니다."

"어머나, 그렇게 끔찍한 일을."

퇴치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무녀의 뒤에서 큰 목소리와 함께 등장한 유카리였다.

"결계라는 말 때문에 더 들어보니, 임산부를 미끼로 쓰는 결계인 건가요?"

"여기서 뭘 하는 거지, 유카리?"

"그냥, 유유코의 부탁을 받아서 요우모리를 붙잡는 일에 참여하려고 그래요, 무.녀.님♪"

유카리는 무녀를 보고 윙크를 보냈고, 무녀는 못볼 꼴을 봤다는 듯 얼굴을 찌푸렸다.

"솔직히 말해 나도 한 사람의 여자로써 그다지 마음에 드는 제안은 아닙니다만, 요우모리를 끌어들일 확실한 방법임은 틀림 없군요. 한 번 해봅시다."

유메가 돌아온지 8개월쯤이 되던 날이었다. 광장 한가운데, 손이 묶인 유메가 불편한 몸에도 불구하고 강제로 끌려와 앉아있었고, 그 주변으로 요괴 퇴치사들과 하쿠레이의 무녀, 그리고 무엇보다 유카리의 힘으로 요우모리를 가둘 함정이 설치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다들 무슨 일인가 하여 벌떼같이 마을 광장에 몰려있었다. 결계 설치가 끝나자 무녀가 결계 유지를 위해 자리에 남고, 퇴치사들이 마을 곳곳에 붙여놓은 부적을 통해 요우모리가 오는지를 확인했다. 유카리는 결계 설치가 끝나자 근처 지붕에 올라가 광장 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결계 한가운데에 묶인 유메는 주변을 계속 둘러보며 불안한 기색을 전혀 감추지 못했다. 그녀는 손을 모아 기도하면서, 요우모리가 자신을 구해주기를, 만약 그렇지 못한다면 차라리 이곳에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잠깐, 기척이 있어. 강력한 요기……크아악!"

마을 어딘가에서 요괴 퇴치사의 단말마가 들리자, 마을의 의용병과 퇴치사들이 모두 그쪽으로 향했다. 그들이 본 것은 퇴치사의 심장을 뚫고 나온 긴 일본도─누관검, 그리고 그것을 퇴치사의 몸에서 검을 빼내는 검은 머리의 요우모리였다. 문답무용, 퇴치사들이 모두 한꺼번에 요우모리를 향해 탄막을 쏘았다. 요우모리는 말없이, 왼손으로 빠르게 백루검을 뽑아들고 양쪽의 검을 맞댄 뒤 빠르게 한 바퀴 원을 그리며, "반사하계참!"을 외쳤다. 퇴치사들이 날린 탄막이 모조리 사방으로 튀어나오며, 일부는 마을 사람을 맞추고, 일부는 창든 민병을 맞추고, 일부는 운없는 퇴치사를 맞췄다. 상황이 그렇게 되자, 퇴치사들이 그를 결계로 끌어들이기 위해 뒤로 빠지면서, 장창을 든 사람들이 요우모리의 앞을 막아세웠다. 가장 앞에 선 사람이 창을 들고 그에게 달려들자, 요우모리는 빠르게 왼손에 든 백루검으로 창대를 오른쪽으로 쳐내고, 그와 동시에 오른손에 든 누관검으로 창대 자체를 잘라버린 뒤, 十자로 교차된 두 개의 검을 손목을 틀어 칼날이 안쪽으로 오게 쥐면서 창을 들고 돌격해온 불쌍한 사람의 목에 걸었다. 문답무용, 요우모리는 한순간의 지체도 없이 이 남자의 목을 몸에서 분리했다. 요우모리의 행동에 놀란 사람들은 주춤거리며 뒤로 빠졌다. 요우모리가 빠른 걸음으로 그들에게 다가오자, 손을 부들부들떨던 장창수는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찌르기를 시도했다. 요우모리는 이번에도 가볍게 백루검을 아래로 휘둘러 창끝을 땅에 처박고, 그틈을 놓치지 않고 발로 밟아 창대를 부쉈다. 창대가 박살나며 중심이 흔들린 그는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느끼기도 전에 요우모리가 내지른 누관검의 찌르기에 목이 꿰뚫렸다. 장창을 든 마지막 사람은 그 광경을 보자마자 창을 놓고 소리지르며 도망쳐버렸다.

요우모리가 광장쪽으로 다가오자 거기엔 남산만한 배를 끌어안고, 이번엔 사람 피를 뒤집어쓴 요우모리를 보는 유메가 있었다. 유메는 손을 뻗으며 '오지 마'라고 소리쳤지만 그 목소리는 요우모리에게 들리지 않았다. 결계인지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요우모리는, 그를 가로막으려는 요괴 퇴치사들의 탄막을 피하고, 튕겨내고, 빗겨내며 그들의 팔다리를 잘라버리고는 유메를 향해 달려왔다. 유메가 '안 돼'라고 외치는 순간 결계 안으로 들어온 요우모리를 향해 유카리와 무녀의 결계가 작동했다. 크아악! 요우모리는 짧은 비명을 지르며 두 자루의 검을 떨어트렸다. 그리고 무릎을 꿇으며 무너졌다. 숨도 쉬지 못할 정도로 강력한 결계에 고통받던 요우모리를 보던 유메는, 그가 떨어트린 누관검의 끄트머리로 묶여있던 손을 풀고 그에게 다가갔다. '요우모리님!' 그녀가 소리치며 요우모리를 끌어안았다. 그녀와 그녀의 뱃속에 있는 아기에겐 결계가 작동하지 않는건지, 유메는 요우모리에 비해 훨씬 나은 움직임을 보이며 요우모리를 끌어안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무녀는 요우모리를 끝내기 위해, 결계를 유지하면서 천천히 그에게 다가왔다.

그때였다. 유메 덕분에 요우모리가 민가 지붕에 앉아서 상황을 지켜보던 유카리와 눈이 마주친 그 순간, 그녀가 윙크했다. 그러자 갑자기 결계가 유리장 깨지듯, 종이장 찢어지듯 파괴되고, 요우모리는 순간적으로 힘이 회복되자마자 땅에 떨어진 누관검을 잡고, 왼손으로 유메를 품에 안은 채 그에게 가까이 다가온 하쿠레이의 무녀를 향해 누관검을 내뻗었다. 콱! 칼날이 살을 찢고 피가 뿜어지는 소리와 함께, 하쿠레이의 무녀의 배와 등을 누관검이 뚫은 그 광경을, 마을사람들이 모두 놀란 얼굴로 지켜보았다. 무녀 역시 처음에는 놀란 모습이었지만, 이윽고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요우모리가 검을 빼냈을 때, 무녀는 그대로 앞으로 쓰러졌다. 요우모리가 다시 유카리가 있던 지붕을 보았을 때, 그녀는 이미 없었다.

상황이 정리되자, 유메는 갑자기 고통이 느껴지는지 신음하며 요우모리의 가슴에 안겼고, 요우모리는 재빠르게 두 자루의 검을 챙긴 뒤 그녀를 데리고 마을 바깥으로 도망쳤다. 그가 도망치는 동안, 아무도 요우모리가 내뿜는 극도의 살기 때문에 그를 가로막지 못했다.

요우키가 마을에 내려온 것은 요우모리가 도망치고 한참 뒤였다. 유유코의 말 같지 않은 억지 때문에 마을에 내려가지 못하다가, 막상 내려와보니 목이 달아난 시체, 팔다리가 없어진 부상자들, 그리고 그 사이에서 배에 붕대를 감은 채 누워있는 하쿠레이의 무녀를 보고 대체 무슨 상황인지 전혀 감조차 잡지 못했다. 그럴때는 물론 물어보는 것이 최고였다. 그는 무녀에게 뛰어갔다.

"무녀님,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업입니다. 무고한 생명을 이용하려고 했던 우리에 대해 신께서 내린 형벌입니다."

"그런 이상한 소리 말고, 무슨 일인지 말씀하십시오!"

"요우모리, 요우모리가 자신의 아이를 가진 유메를 데리러 왔습니다. 그리고 그 여파는 보시다싶이……."

요우키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이제 요우모리가 무슨 짓을 할지 모릅니다, 요우키 공. 그를 막을 분은 당신 뿐입니다."

"……뒷처리를 부탁하시는 겁니까?"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죄송합니다, 요우키 공. 하지만, 하지만 요우모리가 분노로 정말로 그 살인귀로 변해버린 것 같습니다. 끝까지 이런 부탁을 해서 죄송합니다만……그를 죽여주십시오."

처음엔 자기한테 아들을 죽여달라고 말하는 무녀의 부탁을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했지만, 요우키는 요우모리가 살인귀가 되어 콘파쿠 가의 이름을 더럽히고 환상향을 공포로 물들일 것이란 무녀의 말이 걸렸다. 그리고 이미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환상향을 지키는 무녀에게까지 상해를 입힌 요우모리의 행동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요우키는 원치 않았지만, 환상향은 요우모리의 죽음을 필요로 했다.

계속해서 요우모리가 살아있다면, 환상향은 이상향으로 불리지 못하는 곳이 될지도 모른다.

요우모리가 도의적으로 옳았다 할지라도, 하쿠레이의 무녀가 틀렸다 할지라도, 더 이상 요우모리가 도의적으로 옳은 사람으로 존재할 수는 없었다.

하쿠레이의 무녀 때문에, 유메라는 아가씨 때문에, 빌어먹을 야생 요괴들 때문에, 그리고 이 모든 일의 단초를 제공한 그 자신, 콘파쿠 요우키 때문에…….

그렇게 하루 종일 아들의 흔적을 따라서, 요우키는 요우모리가 은둔처로 두던 사당 앞으로 왔다. 요우모리는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사당 앞에서 양손에 검을 한 자루씩 쥔 채 서 있었다. 요우키는 검을 뽑으며 앞으로 나섰다.

"콘파쿠 요우모리!"

"오랜만입니다, 요우키 영감. 나를 죽이러 오셨습니까? 그 빌어먹을 무녀년이 그랬던 것처럼?"

요우모리의 눈은 새빨갛게 변한 채 이글거렸고, 눈동자는 고양이마냥 날카롭게 변해있었다. 더는 사람의 눈이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이제는 눈에 보일 정도로 강력한 요력이 요우모리의 온몸을 감싸고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그의 분노와 살기만은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요우모리."

"당신이 좀 더 신경써서 그때 그 시간에 나를 하쿠레이 신사로 가도록 명하지 않았다면 내 머리카락이 이렇게 붉게 변하지도 않았을 거야."

요우모리의 머리카락은 더 이상 검은색이 아니라 갓 흘러나온 피 같은 색깔이었고, 사자의 갈기처럼 바람에 이리저리 흩날렸다.

"요우모리……."

"당신들은 나를 이렇게 만들고도 아무런 죄책감도 없었지. 나를 쫓아내고, 나를 사랑해주던 아가씨를 미끼로 쓰고……."

요우모리는 오른손에 쥐고 있던 누관검을 등 뒤로 올려, 등에 대고 칼집에서 검을 뽑아냈다. 누관검의 칼집은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졌다. 백루검 역시 허리춤에서 칼이 뽑히자 칼집은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들아."

"더 이상은 날 가지고 놀게 하지 않겠어. 운명이든 신의 뜻이든 필연이든 무엇이든 간에 더 이상 내가 이렇게 비참하게 살 필요는 없어. 더는 그렇게 되도록 좌시하지 않겠어."

요우모리의 반령은 요우모리 주변을 정신없이 돌아다녔고, 그러자 요우키의 반령은 마치 춤을 추듯 요우키의 주변을 빙글빙글 돌았다. 그와 동시에, 사당 안에서는 유메의 찢어질듯한 신음에 가까운 비명이 들렸다.

"당신은 내 아내를 건드리지 못해. 내 아이를 건드리지 못해. 내 사랑을, 내가 가진 것마저 빼앗지 못하게 할 거야. 나를 요괴로 몰아넣고 쫓아낸 대가를 톡톡히 치루게 해주마!"

요우키는 대답 대신 양손으로 쥔 일본도를 치켜들었다. 요우모리는 점점 광인에 가까운 모습이 되어갔다. 더 이상 아들이 그런 식으로 부서져내리는 꼴을 놔두지 않으리라.

"바람에 흩날리는 꽃잎마저 베어버리는 속도로, 심초참!"

요우모리가 심초참이라 외치자마자, 정말 빠른 속도로 요우모리의 누관검이 허공을 가르며 요우키에게 향했다. 요우키는 압도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아들의 속도에 짐짓 놀라 주춤했지만, 그다지 어렵지 않게 검을 들어올려 요우모리의 검을 막았다. 그리고 동시에 그의 검으로 요우모리의 누관검을 위로 밀어내며 발로 빠르게 요우모리를 걷어찼다. 요우모리는 요우키의 빠른 반응에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그 다음은 서로 발을 이리저리 놀리며 서로의 빈틈을 찾기 시작했다. 이것은 요우키가 가르친 가장 기본적인 대련 기술 중 하나였다. 스텝을 밟아가며, 어떻게 검을 휘둘러야 하는지 계산하는 것, 그것이 검술 대련이라고 요우키는 말했었다. 그리고 그 빈틈을 그가 찾은 듯했다. 요우키는 재빠른 속도로 위에서 아래로 크게 내려베기를 시도했다. 상대가 요우모리가 아니었다면 그대로 끝이었겠지만, 요우모리는 재빠르게 왼손의 백루검으로 그 일격을 막고 도리어 자신이 누관검으로 요우키를 내려찍으려했다. 요우모리의 반령과 옥신각신하던 요우키의 반령이 재빠르게 요우모리를 쳐서 떨어트리지 않았다면 이번엔 요우키가 죽었을 것이었다. 그러자 갑자기 요우모리가 발도하는 자세를 잡더니 외쳤다.

"속도로써 틈을 만들어내는 기세로, 현세참!"

이번에는 요우키가 간단히 검을 들어 막았지만, 요우키에게 전달된 충격으로 그는 쭈욱 뒤로 밀려났다. 하지만 요우모리는 멈추지 않았다.

"명상참!"

요우모리를 감싸던 요력이 갑자기 누관검에 들어가더니, 요력으로 길고 강력해진 누관검의 칼날이 그대로 요우키를 향해 날아왔다. 요우키가 재빠르게 뒤로 물러났지만 칼날 끝에 걸려 옷 앞섬이 잘려나갔다. 하지만 그는 개의치않고 바로 반령으로 요우모리를 강타하려고 했지만, 요우모리가 팔로 간단하게 쳐냈다. 그리고 이번엔 요우모리의 반령이 요우키의 가슴을 강타하고, 그대로 요우키의 목에 뱀처럼 칭칭감겨 그의 목을 졸랐다.

그때 다시 유메의 비명이 들리고, 요우모리는 사당으로 시선을 옮겼다. 유메, 그가 중얼거렸다. 그의 시선이 분산된 그 순간에 요우키가 반령을 풀어내고는 바로 검을 치켜들고 외쳤다.

"미진지항참!"

그러자, 요우키의 검에 그가 가진 요력이 불어넣어지고, 그 검은 파랗게 빛났다. 요우모리는 그것을 보고 미처 피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요우키의 힘을 실은 참격에 그대로 요우마루의 옷이 찢어지고, 가슴과 배까지 가로지를 정도의 커다란 상처가 생기며 그의 몸에서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나왔다. '크아아아아아악!!!' 요우모리는 굉음을 지르며 고통을 표현했지만 그는 여전히 쓰러지지 않았다. 그는 정말로 미친 사람처럼, 요괴처럼, 온몸에서 피가 나고 내장이 튀어나올 수준의 상처에도 요우키에게 달려들어 검을 휘두르려고 했다. 그 모습을 본 요우키는,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며, 검으로 자세를 잡고 중얼거렸다.

"모든 증오와 분노를 끊고 자유로워져라. 그리고……날 용서해다오. 육근청정참."

요우모리는 목석처럼 무릎을 꿇고, 고개를 떨군 채로, 눈과 코와 입에서, 온몸의 상처에서 피를 뚝뚝 흘렸다. 그의 반령은 이미 바닥에 떨어진채였다. 더 이상 유메의 비명도 들려오지 않았다. 다만 아이 하나가 시끄럽게 우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요우키는 여전히 검을 쥔 채 요우모리를 보고 있었다.

"영감……죽기 전에……소원……들어줘……."

"말하거라."

"저……아이……내겐……꿈과도……같아……하룻밤의……아름다운……꿈……."

요우키는 요우모리의 목을 내려치기 위해 자세를 잡고 검을 높게 들었다.

"그러니까……저 아이……요우무(妖夢)라고……이름……붙여줘……."

"그게 다인게냐?"

"그리고……사랑한……."

요우키는 요우모리가 말을 다 하기도 전에 홱, 목을 내리쳤다. 요우모리의 목이 바닥을 굴러가며 이미 피가 묻지 않은 땅에도 그의 피를 적셨고, 목이 있던 자리에서는 피가 탄막 쏘듯 마구 뿜어져나오더니 그대로 바닥으로 무너지듯 쓰러졌다. 요우키는 칼을 버렸다. 그리고 본래 자신의 것이던 누관검과 백루검을 다시 허리에 찼다. 그제야 목이 터져라 울고있는 아이가 있을 사당으로 들어섰다. 안으로 들어서자 희미하게 숨을 내쉬는 유메와, 탯줄도 잘리지 않은, 울고있는 아기가 있었다. 문이 열리고 인기척을 느낀 유메는 희미한 시야로 요우키를 돌아보았다.

"……요우모리님."

"……."

"저는 이제 힘이 나지 않아요."

"……."

요우키는 탯줄을 자른 뒤, 울고 있는 아기를 강보에 싸서 품에 안았다.

"딸……인가요?"

요우키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지으셨나요?"

"요우무. 콘파쿠 요우무라고 하겠소. 당신의 이름을 따서."

"좋은……이름이네……요……."

그걸 마지막으로 거의 들리지도 않는 유메의 희미한 숨소리마저 끝났다. 요우키는 사당을 나오며 불을 질렀다. 우르르, 소리를 내며 무너지고, 타들어가는 사당을 뒤로하고, 요우키는 잠든 요우무를 오른팔로 꽉 끌어안고, 왼손으로는 요우모리의 잘린 목을 들고 마을로 돌아왔다. 그가 한 손에는 아들의 목을, 다른 손에는 새근새근 자는 손녀를 들고 나타나자 모두 어떤 표정을 지어야할지 알 지 못했다. 요우키는 요우모리의 목을 광장에 내던졌다. 이제는 요우모리의 저주받은 인생도 끝이라고, 요우키는 그렇게 말했다.

"……그래서 지금까지의 일을 모조리 역사에서 지워달라는 건가요?"

카미시라사와 케이네는 이 늙은 정원사의 말을 듣고는 어찌할 줄 몰랐다. 자신과 요우무만 남기고 요우모리에 대한 모든 역사를 완전히 지워달라고 할 줄이야.

"하지만 그렇게 하면, 저 요우무라는 아이가 자라서 왜 자기 부모에 대해서 하나도 기억도, 기록도 없는지 궁금해 할게 분명할텐데요."

"그게 자기 아비가 사람 목을 베고 다니던 살인귀라는 진실─은 아니지만─보다는 낫다고 생각하오, 선생 양반."

케이네는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역사를 지워도 알 사람은 모두 알 게 될 겁니다. 역사에서 지운다고 사건 자체가 없던 일이 되는 게 아닙니다. 누군가가 요우무에게 진실을 말해줄 수 있어요."

"나는 명계의 주인을 모시는 정원사라오."

요우키는 그렇게 말하며 작게 웃음지었다. 케이네는 요우모리에 대해 적힌 모든 역사를 꺼내들고, 그 기록 위에 손을 대고 주문을 외웠다. 그리고 손으로 지우개 가루를 쓸어내듯 종이 위를 쓸어냈다.

"그래서, 이걸로 정말로 요우모리에 대한 역사는 없어진 것이오?"

"요우모리가 누군데 그러시죠?"

케이네는 싱긋 웃어보였다.

"할아버지?"

요우무의 부름에 요우키는 자신이 멍하니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요우무에 대한 책망.

"할아버지라 부르지 말라고 하지 않았느냐?"

"하지만, 스승님이라고 부르면 반응하지 않으셔서……."

"시끄럽다. 앞으로 그런 말을 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 계속한다. 날 따라해라."

"그, 그치만, 보고 따라하는 건 너무 어려운……."

"시끄럽다고 했다!"

다시 현재, 시끌벅적한 술잔치가 점점 파할 때에 가까웠다. 유유코는 자신이 알고 있는 이 사실을 요우무가 알게 된다면 어떻게 될지 너무나도 두려웠다.

"만약에, 요우무가 요우모리처럼 되면 어떡하지?"

"흐음, 유유코. 너무 걱정하는 거 아니야?"

유카리는 유유코에게 어깨동무하며 그녀를 다시 술잔치가 있는 곳으로 끌고 갔다.

"요우무가 사실을 알 게 되서 미쳐 날뛰더라도……이번 하쿠레이의 무녀의 배를 누관검으로 찌르지는 못할 거야. 그러니 걱정하지 마. 게다가 요우무는 정신이 더 강한 아이니까 말이지. 사실을 안다고 해서 요우모리처럼 되지 않을꺼야. 적어도 난 그렇게 믿어."

두 사람이 다시 돌아오자, 정신을 차린답시고 앉아서 비틀거리던 요우무가 벌떡 일어나더니 유유코에게 안겼다.

"우웅, 유유코님, 헤헤헤. 응……."

"이런이런, 아무래도 백옥루까지 가긴 힘들겠네. 레이무, 미안한데 요우무 좀 재워줄 수 있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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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즈베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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