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부와 반역자의 이야기

 

 엘로이즈는 오늘의 마지막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목욕통에 들어가 있었다. 그녀는 대부분의 창부들과는 다르게 노예도, 전쟁포로도, 빚쟁이도 아니었기에 그녀가 원하는 때 아무 때나 그녀가 원하는 사람을 고를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 손님은, 설명만 듣고 고르긴 했지만, 꽤나 급한 모양이었다.

 

"엘로이즈? 손님이 왔어요."

"……벌써?"

 

 그녀와 친분이 있는 소녀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엘로이즈의 되물음에 어린 창부는 그저 어깨만 들썩일 뿐이었다.

 

"기다리라고 해."

"안 돼요."

 

 소녀의 말에 엘로이즈는 고개를 돌렸다.

 

"화대를 두 배로 냈는걸요. 빨리 보고 싶다고. 이미 방에서 기다리고 있고요."

 

 엘로이즈는 따듯한 물이 담긴 목욕통에 머리를 기대며 길게 한숨을 쉬다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의 아름다운 몸을 타고 물방울이 흘러내렸다. 소녀는 그녀의 몸을 힐끗 보았다. 같은 여자인 자신이 보아도 아름답다고 느껴지는, 갖고 싶어 시기심이 생겨나는 그런 몸이었다. 엘로이즈는 스스로 몸을 닦고, 옷을 챙겨 입고는 소녀에게 알려줘서 고맙다 말하며 손님이 기다리는 방으로 향했다.

 그녀는 유명했고 이 홍등가에서는 감히 건드리지 못할 높은 자리에 위치한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이런 상황이 불쾌했다. 언제나 남녀, 혹은 여자 간의 관계에서 우위에 있던 사람은 그녀였고 그 우위는 상대를 기다리게 하는 것에서부터 시작이었다. 상대는 두 배의 화대를 미끼로 그 우위를 빼앗으려드는 것이다.

 시작부터 우위를 빼앗긴 엘로이즈는 그녀의 방문 앞에서 불쾌함과 짜증으로 굳은 자신의 얼굴을 풀며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사람들이 그 비싼 화대를 그녀에게 주는 것은 그녀의 짜증으로 굳어버린 얼굴을 보기 위함이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물론, 일부 특이한 취향의 사람들이 있기는 했지만. 그녀는 방문을 열기 전에 깊게 심호흡을 하며 문을 열었다. 나를 이렇게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누구일까, 어디에서 온 사람일까, 긴 생각을 하면서.

 그리고 그녀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정말일까 의심은 했었다만, 진짜로 여기서 이런 일을 하고 있었을 줄이야."

  

 침대에 걸터앉아있던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짧고 단정하게 깎은 머리, 턱과 입가에 난 흉터, 떡 벌어진 어깨. 빛나는 파란색 눈. 엘로이즈의 눈에 너무나도 익숙했고 그렇기에 너무나도 두려운 얼굴이었다.

 

"너, 너, 너는……."

 

 엘로이즈가 뒷걸음질 치며 물러서자 남자가 다급하게 달려들듯 다가와 문을 쾅 닫았다. 닫힌 문과 남자 사이에서 엘로이즈는 두려움에 벌벌 떨며, 금방이라도 눈물을 폭포수처럼 와락 흘릴 것만 같은 얼굴로 똑같은 말만 중얼거렸다. 엘로이즈가 공포에 질려 움직이지도 못하자 남자는 천천히 오른손을 어느새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더니 물러섰다.

 적당히 뒤로 물러선 그는 크게 한 번 숨을 들이마셨다 내쉬며 눈을 감았다. 그러더니 이내 예를 갖춰 허리를 숙여 인사하며 말했다.

 

"6년 만에 인사드립니다, 엘로이즈 공주님."

 

 그가 고개를 들자 보인 것은 엘로이즈의 날아드는 손이었다. 그녀의 손톱에 남자는 미처 피할 새도 없이 뺨을 긁혔다. 핏방울이 뺨을 타고 아래로 흘러내렸다. 엘로이즈의 얼굴은 공포에서 어느새 분노로 바뀌어 그를 계속 때리며 외쳤다.

 

"네가, 네가 어째서 여기 있는 거지? 네놈이 무슨 낯짝으로 여기에 온 거야!"

"……공주."

 

 자신을 계속해서 때리는 엘로이즈의 손목을 잡으며 남자는 작게 중얼거렸다. 남자의 손아귀 힘에 엘로이즈는 감히 팔을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남자는 고개를 살짝 두어 번 가로젓고는 말했다.

 

"나는 얘기를 하러 온 거야."

"거짓말! 내 언니오빠들처럼 잔인하게 죽여 버리려고 왔겠지! 새 왕조의 개가 되어서!"

"하아."

 

 남자는 엘로이즈의 손을 놓았다.

 

"어떻게 해야 당신께 믿음을 줄 수 있겠나, 그럼?"

"나가. 당장!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마!"

"그럴 수는 없어."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난 당신을 만나러 오랜 시간동안 온 왕국을 찾아다녔어. 그런데 이렇게, 이제 와서 너를 만났거늘 날 이렇게 비참하게 쫓아내겠다고?"

 

 남자가 다가오자 엘로이즈는 뒷걸음질 쳤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등은 나무 문짝에 부딪혔다. 그러자 그녀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경비! 경비! 이 남자 쫓아내! 빨리!"

 

 얼마 지나지 않아 엘로이즈의 다급한 외침을 들은 장정들이 문을 부수듯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장정들은 어깨와 목을 풀며 금방이라도 남자를 때려눕힐 준비를 했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이정도만 해도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엘로이즈는 덩치 좋은 이방인 경비 뒤에 숨어 남자를 노려보았다. 남자는 하는 수없이 일어섰다. 경비들이 그의 팔을 붙잡자 그는 그대로 밖으로 끌려나왔다. 나가는 동안 두 명의 경비가 엘로이즈를 지켰다. 남자가 저 멀리 사라지자 엘로이즈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경비의 뒤에서 나왔다. 

 

"괜찮아?"

"고마워……. 파리드."

 

 엘로이즈는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고, 이방인은 고개만 끄덕일 뿐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러나 또다른 경비는 불안한 듯 자꾸 복도로 고개를 기웃거렸다. 그러더니 그가 중얼거렸다.

 

"저 사람……. '왕족살해자' 조슬랭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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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엘로이즈는 며칠 간 손님을 받지 않았다. 그녀는 매일 같이 울었고 자기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 매일 그녀와 친분을 맺었던 이들이 그녀를 찾아가 위로했으나 그녀의 눈물은 멈출 줄을 몰랐다.

 그녀가 틀어박혀 나오지 않는 동안, 사창가의 창부와 왈패들은 그 악명 높은 '왕족살해자'가 그녀를 두 배의 화대까지 지불해가며 찾아왔다는 사실에 이상해했다. '왕족살해자' 조슬랭 드 샤티뵈는 6년 전 옛 왕가, '드 테르누아'의 사람들을 모조리 죽이고 그 대가로 왕족의 영지였던 땅을 수여받은, 최악의 배신자이자 반역자였다. 더욱이 이상한 건 그가 엄청난 돈을 지불해가며 그녀에게 손님이 가지 못하도록 막아버린 그의 행동이었다. 손님을 받지 않아도 아무 문제 없을 정도로 많은 돈을 안긴 그를 보며 많은 이들이 엘로이즈를 부러워했지만 동시에 두려워했다. 최악의 반역자가 그녀를 자기 것으로 만든 셈이니까.

 

"엘로이즈."

 

 방에 틀어박힌 그녀에게 파리드가 방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그 사람이 또 찾아왔어. 어떡할래? 오늘도 그냥 보낼까?"

 

 조슬랭은 이틀에 한 번씩 그녀를 만나러 찾아왔으나 지금까지는 그녀가 모두 거부해 돌아갔다. 그러기를 여러 번이었다. 엘로이즈는 이불에 파묻은 얼굴을 들고 문을 보았다.

 

"엘로이즈?"

 

 그녀가 아무 말도 없자 파리드는 긴장한 목소리였다. 그가 계속 문을 두드렸다. 파리드의 머릿속에 불안한 상상이 떠올랐다.

 

"엘로이즈? 엘로이즈? 괜찮아? 엘로이즈?"

"난……. 괜찮아. 그만 두드려."

"다행이네."

 

 문 밖에서 그의 한숨이 들려왔다.

 

"어쩔 거야? 아무 말도 안 하면 그냥 돌려보낼게."

 

 파리드는 당연히 그렇게 하겠거니 생각하며 확신하듯 말했다. 지금까지 엘로이즈는 그렇게 했었으니까. 하지만 방 안에서 들려온 그녀의 말은 파리드의 그런 확신을 깨부쉈다.

 

"들여보내."

"응? 뭐라고?"

"들여보내라고. 그 사람. 조슬랭 말이야."

"괜찮겠어? 그 조 어쩌고."

"괜찮대도."

 

 파리드는 갑작스러운 엘로이즈의 심경 변화와 '왕족살해자'에 관한 수많은 안 좋은 소문 때문에 찜찜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엘로이즈의 요구를 거절한 적이 없었고 이번에도 거절하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리고 바로 앞에는 조슬랭이 서 있었다. 뒤에서 파리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소리 질러. 종을 울려도 되고. 조금이라도……."

"걱정하지 마."

 

 파리드는 엘로이즈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기는 했지만 여전히 남자를 믿을 수 없었는지 조슬랭을 노려보다가 슬금슬금 물러서더니 이내 사라져버렸다. 조슬랭은 문을 잠그고는 여전히 얼굴을 파묻은 채 눈만 살짝 들어 자신을 흘겨보는 엘로이즈의 앞에 의자를 갖다 놓고 앞에 앉았다. 그는 엘로이즈를 보며 한숨을 길게 쉬고는 말했다.

 

"열이틀이 지난 지금에라도 나를 들여보내준 건 날 믿겠다는 뜻인가?"

 

 엘로이즈는 대답하지 않았다. 조슬랭은 또다시 한숨을 쉬었다.

 

"난 그저 얘기하고 싶었어. 지금까지 너와 내가 쌓았던 기억들, 네가 없어진 후로 겪었던 많은 일들……. 왜 믿어주지를 않는 거야?"

 

 엘로이즈가 여전히 대답하지 않자 조슬랭은 고개를 숙였다. 그는 그 상태로 한참을 있었다. 무언가 생각하는 것 같기도 하고 기도하는 것 같기도 한 모습이었다. 정말이지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조슬랭이 그 자세 그대로 다시 입을 열었다.

 

"……처음 만났을 때 기억나? 대체 얼마나 오래됐을까. 거의 10년은 된 것 같아. 그래. 10년. 10년이었던 것 같네. 그때 넌 열두 살짜리 어린 꼬마 아가씨였지. 정말 귀엽고,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조슬랭은 다시 말을 멈췄다. 그는 갑자기 피식 웃었다.

 

"넌 귀엽고 재밌는 아가씨였어. 일개 근위병인 나를 졸졸 따라다니고, 장난치고, 가끔은 날 못살게 굴기도 했지. 때때로 화가 나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그렇게 기분 나쁘지는 않았어. 물론, 그때 네가 마구간의 말들을 죄다 풀어버리고는 그걸 나한테 뒤집어 씌웠을 때는 정말 위험했지."

 

 그는 끅끅 웃어댔다. 하지만 그 웃음에는 어딘가 안타까움이 묻어났다. 엘로이즈가 아무런 말이 없자 그는 그 상태로 엘로이즈의 눈치만 보다 결국 고개를 숙였다.

 

"……나는 아무런 말도 안 했어."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엘로이즈가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목소리에 조슬랭은 살짝 놀란 얼굴을 하며 고개를 들었다. 

 

"난 그저 널 바라보았을 뿐이야. 다른 사람들이 오해한 거고."

"……그랬지. 그것 말고도 넌 많은 거짓말을 했었지만."

"넌 바보처럼 다 속아 넘어갔었고."

 

 조슬랭은 피식 웃어보였다. 그러고 그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어느새 그의 얼굴엔 그의 상처투성이 손이 올라가있었다. 눈가를 만지는 그의 손은 언뜻 보면 눈물을 닦아내는 것 같기도 했다. 그가 그 상태로 말이 없자 엘로이즈가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그가 말이 없자 이번엔 엘로이즈가 입을 열었다.

 

"공주를 대하는 예의는 다 어디로 팔아먹은 거지, 조슬랭 드 샤티뵈? 아무리 내가 지금은 길거리를 쏘다니는 거지와 한량에게도 몸을 파는 천한 창녀라고 하지만 한 때 나는 네 공주였고 너는 지금도 나를 공주로 부르고 있는데. 말과 행동이 다르다니, 근위병답지 않은걸."

 

 조슬랭이 대답했다. 

 

"……난 이제 근위병이 아니야. 너도 이제 공주가 아니고."

 

 조슬랭은 그러면서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공주께서 원하신다면 언제든지 그때처럼 돌아가겠습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그녀에게 인사했다.

 

"조슬랭 드 샤티뵈, 다시 한 번 엘로이즈 공주님께 인사드립니다."

"좋아. 이제 보기 좋네. 앉아도 좋아. 경어는 생략하도록."

 

 엘로이즈는 후후 웃었고 조슬랭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는 이번엔 고개를 뻣뻣이 들고는 엘로이즈를 바라보았다. 예전 그때처럼. 그러자 엘로이즈가 회상에 잠기며 중얼거렸다.

 

"옛날 일이 자꾸 떠오르네. 왕실 무술 경기를 할 때가 기억나. 멀리서 보는 넌 꽤나 대단했었어. 어디 대단한 가문 출신도 아닌 네가 온갖 귀족들을 다 쳐부수고 당당히 승리하는 그 모습……."

"그래. 정말이지 대단했지. 그때는."

"하지만 결국 우리 오빠에게 졌잖아. 참 바보 같이."

 

 엘로이즈의 머릿속에 그 옛날의 모습이 떠올랐다. 무참히 패배하고 바닥에 쓰러져 항복을 외치는 바보 같고 한심한 모습. 그녀가 기억하는 조슬랭은 그런 사람이었다. 

 

"하하……. 왕자님도 참 무자비하시더라고. 바닥에 쓰러져서 기는 나를 그렇게 내리쳐서 죽일 기세로 싸우셨으니."

"맞아. 그러고 보니 너 항복을 외친 다음 그대로 기절했잖아."

 

 조슬랭의 머릿속에도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루이 왕자가 든 무기는 날을 죽인 칼이었으나 위험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서로 갑옷을 입고 있었다하더라도 조슬랭은 그때 정말 죽는 게 아닐까하는 두려움을 느꼈다. 정신을 잃기 전 흐려지는 눈빛이 그에게 떠올랐다. 그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이제 와서는 웃을 수 있는 일이니까. 그는 다시 고개를 들고 엘로이즈를 바라보았다.

 

"깨어나니까 네가 있었지. 눈이 잔뜩 부어있었어. 울었던 모양이야."

"거짓말."

"내 기억이 잘못됐을 수도 있지. 하지만 난 그렇게 기억해. 넌 슬퍼하고 있었고 울고 있었어. 그리고 내 입가를 닦아줬었어."

"손수건으로."

 

 조슬랭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엘로이즈가 말을 덧붙였다.

 

"그건 네가 나한테 줬던 거였어. 인형이 없어졌다고 울던 내 얼굴을 닦아줬던 거잖아. 뭐라고 말했더라. '아름다운 얼굴로 엉엉 울고 있는 걸보자니 참으로…….'"

"참으로 못나 보인다고, 그렇게 얘기했어. 나를 아주 힘껏 때리더군."

"그래서 내가 돌려줬잖아. 내 이름 새겨가지고."

 

 생각에 잠긴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만면에는 웃음기가 가득했다. 그는 하 소리를 내며 의자 등받이에 기대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하아. 공주가 자기 이름을 손수 새긴 손수건이라니.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정말 대단한 물건인데."

"그래서. 어쨌어?"

"뭐가? 손수건?"

 

 엘로이즈는 약간의 살짝 기대를 담은 눈으로 옛 근위병을 바라보았다. 근위병은 한숨을 쉬더니 이윽고 급격히 어두워진 표정을 지었다. 그는 웅얼거리며 말했다.

 

"……잃어버렸어."

"뭐라고?"

"잃어버렸다고……. 6년 전에"

 

 6년 전. 그 이야기가 나오자 마치 얼음 그 자체를 방 곳곳에 끼얹은 듯 순식간에 공기가 얼어붙었다. 조금이나마 웃음기를 띄고 있던 엘로이즈의 얼굴은 어느새 6년 전 그때와 같이 슬픔과 공포와 분노로 감히 무어라 얘기하기 어려울 정도의 얼굴이었다.

 

"그때……."

 

 엘로이즈의 얼굴을 본 조슬랭은 그 얘기를 꺼낸 것을 깊이 후회했다. 그녀는 금방이라도 분노를 터트릴 듯 조슬랭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녀가 입을 열기 전에 조슬랭은 손을 내저었고 그녀는 입을 멈추었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 일은 입 밖에 꺼내지 않도록 하자고. 얘기하기 싫은 건 피차일반이잖아."

 

 엘로이즈는 무어라 말하려고 했으나 조슬랭의 말에 이내 입을 다물었다. 그는 등받이에 머리를 기댔다. 그러고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두 사람은 한참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조슬랭도 엘로이즈도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길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 뒤로도 한참, 조슬랭은 침묵을 깨고 옅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때 그 일들이 끝나고……. 너 혼자 살아남아 베랑게르 공 앞에 끌려왔을 때, 그는 네게 자신과 혼인하면 살려주겠다고 했었잖아. 그때 네가 그렇게 외쳤지. '너 따위와 결혼해서 정통성을 위한 도구가 되느니…….'"

"차라리 창녀가 되겠다고. 그렇게 말했지……."

"그 말이 정말로 이루어지다니. 세상 앞날은 알 수 없는 것이로군."

"내가 선택한 거야."

 

 조슬랭은 등받이에서 뒤통수를 떼고 엘로이즈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무릎을 끌어 모은 채 얼굴을 파묻은 상태로 말했다.

 

"어차피 바느질 같은 것 말고는 할 줄 아는 것도 없었어."

"슬프지 않아?"

 

 조슬랭이 물었다.

 

"가장 아름답고 총명하고 또 고귀했던, 그래서 이 나라의 보석이라고 여겨지던 네가, 이름도 모를 하찮은 쓰레기들에게 몸을 내주고 있는데. 다른 사람이 보기엔 상상도 못할 정도로 비참한 일이잖아. 하늘 높이 있던 네가, 지옥 밑바닥까지 떨어져버렸는데."

"아니."

 

 그녀는 조금의 주저도 없이 대답했다.

 

"여기서는 자유로이 있을 수 있어. 그래, 처음엔 많이 힘들었지. 하지만 금세 괜찮아지더라고. 여기서의 난 그때처럼 사랑받는 사람이야. 그 사랑의 형태가 조금……. 다를 뿐인 거고. 아니, 같을지도 모르겠네. 그때도……."

 

 그녀는 순간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고 조슬랭의 표정도 급격히 어두워졌다. 조슬랭은 눈가를 문지르며 말했다.

 

"그런 말은 말아."

"어쨌든. 여기는 왕궁과 달라. 내 겉모습과 내가 하는 일은 하찮고 처량할지 몰라도 여기에서 난 그 누구보다 더 행복하다고. 내가 불행하다고 얘기하지 마. 불행하다고 생각하지도 말고. 난 행복해. 자유로워. 공주로서의 나보다 훨씬 더. 너 역시 근위병으로서의 너보다 지금이 훨씬 더 행복하겠지. 안 그래? 더 많은 부, 더 많은 권력……. 무엇보다 널 괴롭히는 꼬마도 없고."

"……아니."

 

 조슬랭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모든 걸 잊고 지금을 즐기면 행복할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는데. 딱히 그러지도 않더군. 뭐, 아무래도 좋아. 이러나저러나 의미 없으니까."

 

 말을 끝낸 그는 말없이 창밖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해는 졌고 사방은 깜깜했다. 오늘은 아무런 일도 없는지 도시는 조용했다. 불이 켜진 집은 거의 없었다. 저 멀리 있는 시장 관저도 새벽처럼 최소한의 불빛만 보였다. 밖을 한참 보던 조슬랭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야겠네."

 

 엘로이즈는 대답 없이 조슬랭을 그저 보고만 있었다. 조슬랭 역시 딱히 대답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으나 아무 말도 없는 그녀에게 실망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는 뒤돌았다. 그때까지 엘로이즈는 말이 없었다. 그의 손이 문짝에 닿았다. 뒤에서 이불이 걷히는 소리가 들렸다. 조슬랭이 그 소리를 무시하고 나가려는데 여인의 손길이 거친 그의 왼손을 붙들었다.

 

"그거 알아? 난 아직도 네가 증오스러워. 하지만 오늘은 손님으로 온 거니까."

 

 조슬랭이 뒤돌았을 때 그는 그 옛날의 모습이 조금이나마 느껴지는 여인이 눈에 들어왔다.

 

"그저 직업적인 이유일 뿐이야."

 

 엘로이즈는 까치발을 들며 조슬랭의 까슬까슬한 입에 그녀의 보드라운 입을 맞추었다. 조슬랭은 그녀의 입에 자신에게 닿는 순간 온몸이 마비되는 것만 같았다. 그는 옛날 근위병처럼 공주의 말과 행동 하나하나에 순응할 수밖에 없었다. 엘로이즈가 그를 침대로 끌어오자 조슬랭은 정신을 잃은 사람과도 같이 멍청하게 누워있을 뿐이었다.

 

=========

 

 보름이 지나도록 조슬랭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엘로이즈에게 매일 오는 화대는 끊이지 않아서 그녀는 굳이 일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녀는 단순하게 시간을 보내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는 조슬랭이 왜 보름이 지나도록 나타나지 않는지 궁금해 했다. 걱정하는 게 아니야,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왠지 모르게 자꾸 조슬랭의 얼굴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조슬랭이 나타나지 않은지 열엿새 되는 날이었다. 도시 야경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발코니에서 차를 마시던 그녀에게 파리드가 다가왔다. 파리드는 그녀에게 요깃거리를 가져다주며 말했다.

 

"그 양반이 찾아왔어."

"누구?"

"조 어쩌고 말이야. 전에 왔던."

"조슬랭?"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파리드는 벌떡 일어난 그녀를 보고 놀라 뒷걸음질 치고는 한숨을 한 번 쉬었다.

 

"놀랬네."

"그, 그래. 마침 잘 됐네. 들여보내."

 

 파리드는 고개를 한 번 까딱이더니 말했다.

 

"그 녀석 표정이 영 안 좋던데."

"응?"

"어딘가 불안해보이고 어두워보였어. 그냥 보내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아니야. 괜찮아. 그 녀석이 날 해할 리는 없어."

 

 엘로이즈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분명 괜찮을 거야……."

 

 파리드는 쯧, 혀를 한 번 차고는 말도 없이 뒤돌아 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조슬랭이 방문을 열고 나타났다. 그는 엘로이즈를 보고는 한 번 예를 갖춰 인사하더니 천천히 다가와 엘로이즈의 앞에 앉았다. 과연 파리드의 말대로 그의 표정은 굳어있었다. 그 표정은 슬프기 보다는 불안하다는 느낌의 어두움이었다. 그는 엘로이즈를 한 번 보더니 무어라 말하려 입을 잠깐 열었다 다시 닫았다. 그러고는 엘로이즈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것이었다. 엘로이즈는 그의 모습을 보고는 그녀 자신도 불안해졌다. 그가 무슨 말을 할지, 무슨 짓을 할지 아무도 모르니까.

 

"무슨 일이야? 왜 그런 표정을 하고 있어?"

 

 엘로이즈의 물음에 고개를 숙인 채 가만히 있던 조슬랭이 퍼뜩 정신을 차리며 고개를 들었다. 그는 손을 가만두지 못하며 말을 못하고 있었다.

 

"빨리 말해."

"……그래. 알았어."

 

 조슬랭은 결심한 듯 눈을 감은 채 한 번 크게 심호흡하고는 다시 눈을 떴다. 그는 엘로이즈를 똑바로 쳐다보며 얘기를 시작했다.

 

"왕이 죽었어."

"……베렝게르 왕이?"

 

 조슬랭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까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곧 찬탈자 베렝게르가 후사도 없이 죽었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지겠지. 그럼 그가 그랬듯이 많은 이들이 왕의 자리에 도전할 거야. 한참 전의 가계도를 뒤져가면서 왕이 될 이유를 댈 테고. 이 나라는 또다시 내전에 빠질 거야."

 

 엘로이즈는 아무런 말도 없이 그저 조슬랭을 놀란 얼굴로 바라 보고 있었다.

 

"널 찾은 건 그 때문이었어."

 

 조슬랭은 엘로이즈의 손을 잡았다. 그녀는 화들짝 놀라며 손을 빼려 했으나 조슬랭의 손은 너무나도 강했다. 그는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

 

"엘로이즈 드 테르누아. 6년 전 반란에서 죽은 클로드 왕의 마지막 딸. 너야말로 이 나라의 왕위에 앉을 자격이 있어. 네가 왕에 올라야 해."

"……뭐라고?"

 

 엘로이즈는 조슬랭의 손아귀에서 손을 강하게 뺐다. 그녀의 놀란 얼굴은 점점 분노로 붉어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조슬랭은 꿋꿋이 그녀에게 같은 말을 반복했다.

 

"이 나라는, 우리는, 나는……. 네가 필요해. 나와 함께 싸우자, 엘로이즈."

 

 그러면서 조슬랭은 허리에 찼던 칼을 칼집 채로 허리띠에서 풀고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 칼은 다름 아닌 엘로이즈의 아버지인 클로드의 것이었다.

 

"이 칼을 잡고서……."

"……헛소리 마."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녀는 금방이라도 칼을 뽑아 조슬랭의 목을 칠 것만 같은 분노의 표정으로 조슬랭을 보고 있었다.

 

"그때……. 넌 우리를, 나를 배신했어."

"그건……."

"그때 그렇게 우리 가족을 죽여놓고, 내 앞에서 그토록 잔인하게 내 언니오빠를 살해해놓고……. 이제 와서 뭐라고?"

 

 그녀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더니 조슬랭의 뺨을 후려쳤다.

 

"……내 말 좀 들어봐, 엘로이즈."

"네가 무슨 말을 하든 상관없어. 넌 나를 배신하고 그 반역자 놈에게 붙어서 우리 가족을 다 죽였어! 다른 사람도 아닌 바로 내 앞에서! 난 널 믿었는데! 너야말로 우리 가족을 지켜줄 거라고 그렇게 믿었었는데! 네 손에 묻은 그 피는 지금은 말랐겠지만 내 가슴속에 있는 그 핏자국은 아직도 흐르고 있다고!"

 

 엘로이즈는 불같이 말을 토해내고는 숨조차 쉬기 어려운지 거칠게 숨을 토해냈다. 어느새 그녀의 얼굴에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조슬랭은 고해성사하는 선 죄인처럼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네 손에 죽어간 불쌍한 사람들은 또 어떻고? 네 칼끝에 묻은 피에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들의 것도 있었어. 네가 지난 6년 동안 베렝게르 그 자식을 위해 수없이 짓밟은 사람들에 대해선 뭐라고 변명할 생각이야?"

 

 조슬랭은 얼굴을 문질렀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길게 숨을 토해내고는 그제야 그가 하고 싶었던 말을 내뱉었다.

 

"모든 건, 모든 건 널 위해서였어."

 

 조슬랭의 말에 엘로이즈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뭐?"

 

 조슬랭은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그의 눈가에도 눈물이 가득했다. 그는 울먹이며 말했다.

 

"널 위해서였다고."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조슬랭은 고개를 두어 번 가로저었다. 그는 눈물을 닦곤 자리에서 일어나 엘로이즈에게 다가갔다. 그가 다가올 때마다 엘로이즈가 조금씩 뒤로 물러섰고 그녀는 결국 뒤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조슬랭은 그녀 앞에 무릎 꿇고 앉아 그녀에게 말했다.

 

"그래……. 난 바보였어. 바보처럼 계속 네게 속았어. 네가 그런 비참한 얼굴로 국왕의 부름에 응하는 것을 보고도, 그건 그저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저 병간호일 뿐이라고, 그런 지나가는 3살 짜리 꼬마도 속지 않을 거짓말에 속아 아무것도 하지 못했어."

"……그 이야기는 하지 마."

 

 조슬랭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네 아비도 네 오라비들도 다 너를 고통스럽게 하고 괴롭혔는데도, 너를 딸이나 동생이 아니라 첩 따위로 여겼는데도, 나는 널 도와주기는커녕 네 거짓말에 속아 아무 일도 없었다고 생각했어. 애초에 내가 너의 말에 속지만 않았더라도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거야."

 

 그러면서 조슬랭은 어둠이 들어선 그녀의 얼굴에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녀는 이번에는 물러서지 않은 채 거칠고 상처투성이인 옛 근위병의 손길이 자기 얼굴을 어루만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어느새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조슬랭 역시 울먹이며,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낼 것만 같은 얼굴로, 슬픔 가득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속삭였다.

 

"그때 널 구했다면 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겠지. 미안해. 정말로……."

 

 엘로이즈는 눈물을 흘렸다. 그녀는 눈물을 토해내듯 오열했다. 조슬랭이 그녀의 눈가에 손을 갖다 대자 그녀는 거칠게 그 손을 뿌리치며 외쳤다.

 

"그 더러운 손 치워! 나를 위해서 그랬다는 건……. 좋은 변명이 아니야! 난……. 넌……. 왜, 왜……."

 

 그녀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감을 못 잡는 모양이었다. 조슬랭은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 역시 어떤 말을 해야 그녀를 안심시키고 눈물을 닦아낼 수 있는지를 몰랐다. 그녀는 바로 앞의 조슬랭을 주먹으로 마구 내리치며 말했다.

 

"왜, 왜 내 앞에 나타난 거야! 어째서! 나는 행복하게 잘 살고 있는데……. 이제야 그 악마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자유로워졌다고, 이제는 두려워 할 필요 없다고, 그렇게 믿었는데……. 왜 다시 나타나서 나를 괴롭히는 거야……. 제발……. 제발 꺼져……. 내 앞에서 당장 사라지라고……."

 

 그녀가 크게 소리치자 조슬랭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차마 표현하기도 어려운 슬픈 표정을 지으며 엉엉 우는 엘로이즈를 한 번 끌어안았다. 그의 옷이 엘로이즈의 눈물로 가득 젖어버린 후에야 그는 눈물을 멈출 기미가 없는 그녀를 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길게 한숨을 내뱉고는 탁자 위에 올려놓았던 칼을 들고 방 바깥으로 사라졌다.

 방 밖으로 나온 그의 뒤에, 안에서 여전히 엘로이즈의 울음이 들려왔다. 조슬랭은 그걸 무시하고 갈 용기가 없어서, 그저 문에 등을 기댄 채 바닥에 주저앉아, 억지로 소리를 막으며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

 

 내전의 참화가 도시를 덮쳤다. 조슬랭이 경고한 대로 많은 이들이 왕위를 노렸고 그 결과는 내전이었다. 이 나라의 사람들은 누군가를 선택해야 했고 이 도시는 시장의 잘못된 선택으로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홍등가의 여인들은 도시까지 쳐들어온 화를 피해 짐을 싸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언제나 괴악한 손님들로부터 그녀들을 지키던 깡패와 용병들도 강철과 화약과 명백한 살의 앞에서는 어린애처럼 무기력하게 벌벌 떨 수밖에 없었다.

 엘로이즈 역시 사창가를 떠나야 했다. 그녀는 조슬랭이 준 돈으로 배를 살 수 있었고 사람들과 함께 그쪽으로 떠날 준비를 했다.

 

"모두 준비됐어?"

 

 파리드가 건물 안으로 들어서며 외쳤다. 굳이 대답을 들을 필요는 없었다. 엘로이즈를 필두로 건물 안의 모든 사람들이 한데 모여 있었다. 그때였다. 포탄 하나가 건물을 뚫고 사람들이 있는 곳 위에 바로 떨어졌다. 그들은 혼비백산하여 질서를 잃고 밖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엘로이즈는 그들의 물결에 밀려 이리저리 휩쓸려갔다.

 

"파리드!"

"여기야! 엘로이즈!"

 

 그녀는 이방인의 손을 잡아 무질서의 파도에서 빠져나왔다. 그녀는 그녀와 친분이 있는 어린 창부의 손을 같이 맞잡고 파리드의 인도를 따라 부두로 향했다.

 그곳은 이미 도망치려는 사람들로 혼란 그 자체였다. 지옥의 모습을 그리라고 한다면 이곳을 배경으로 삼는 게 어울릴 정도였다. 엘로이즈는 급하게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돈을 내지 않았음에도 배에 뛰어오르려고 안간힘을 쓰는 사람들을 막는 선원들과 그 뒤에 돛을 내리고 출항 준비를 하는 배 한 척이 보였다. 엘로이즈의 배였다.

 

"저기야! 빨리!"

 

 셋은 사람들을 뚫고 배로 향하려고 했으나 사람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벽은 감히 뚫을 수가 없었다. 파리드는 안간힘을 쓰다가 결국 하는 수 없이 허리춤에 찬 총 한 자루를 뽑아 하늘에다 겨눴다. 그리고 방아쇠를 당겼다.

 폭음을 신호로 사람들이 썰물처럼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 틈을 타서 파리드가 재빨리 둘을 데리고 배로 향했다. 세 사람이 선원들을 뚫고 배 위에 올라타는 순간 뒤에서 함성과 함께 침략군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마구잡이로 사람들을 향해 칼을 휘두르고 총과 활을 쏘아댔다. 안 그래도 시끄럽고 혼란스럽던 부두는 지옥 그 자체로 변하고 말았다.

 세 사람은 끔찍한 참상을 그녀가 조슬랭의 손을 잡지 않은 결과를 눈앞에서 똑똑히 지켜보았다.

 

=========

 

 오랜 시간이 지났다. 이 사막 땅에 온지 거의 3년은 지났을 것이었다. 파리드는 고향을 찾아 다시 떠났으나 엘로이즈와 어린 소녀는 처음 도착한 해안 도시에 남았다. 처음엔 힘들었다. 그러나 그녀들은 그녀가 샀던 배를 시작으로 상단을 일으켰고 이윽고 성공해 부유해졌다. 그녀, 엘로이즈의 상단은 어느새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여전히 전란이 멈추지 않는 고향에서 세 사람이 그녀를 찾아왔다. 자리에 앉아 세 살이 된 그녀의 아들을 소녀와 함께 돌보던 그녀는 손님이 왔다고 말하는 하인의 말을 듣고 그들을 들여보냈다.

 남자 둘 여자 하나로 이루어진 셋. 그들은 하나같이 얼굴에 끔찍했던 그동안의 시간을 새긴 모양이었다. 그들은 어두운 얼굴을 한 채 밝은 얼굴의 엘로이즈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를 찾아오셨다고요?"

 

 셋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가장 왼쪽에 앉아 있던, 연장자로 보이는 남자가 말했다.

 

"조슬랭 경을 기억하십니까?"

"……조슬랭 드 샤티뵈?"

 

 셋은 또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한숨을 쉬더니 옆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아이와 노는 소녀를 돌아보았다.

 

"카트린. 잠깐 자리 좀 비켜줄래?"

"네, 엘로이즈."

 

 소녀는 아이를 안고 자리를 나섰다. 그러자 자리에 앉았던 남자 하나가 소녀를 따라 나섰다. 두 사람이 아이를 데리고 노는 동안 남은 둘은 엘로이즈와 얘기를 나누었다.

 

"저 아이……. 파란색 눈이군요. 당신의 눈은 갈색인데요."

"무슨 말을 하려는 거죠?"

 

 엘로이즈는 대답을 회피했다. 그러자 여자가 허리에 찼던 칼을 칼집째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 칼은 평범한 장검이었으나 그 칼집 끝에는 노란색 손수건 하나가 묶여 있었다.

 

"이건……."

"조슬랭 경의 검입니다."

 

 여자는 슬퍼하는 기색을 보이며 말을 이었다.

 

"반 년 전에……. 조슬랭 경께서 전사하셨습니다. 경께서 돌아가시기 직전에 당신을 찾아가라고 하시더군요."

"아……."

 

 엘로이즈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대답했으나 그녀의 놀란 얼굴을 숨길 수는 없었다. 그러자 이번엔 남자 쪽이 말했다.

 

"경께서 이런 말도 하셨습니다. 엘로이즈 양을 찾아뵈면 이렇게 말하라고 했죠. 다시 네 자리에 오르는 걸 원한다……. 라고요."

"엘로이즈 양. 아니, 엘로이즈 공주님."

 

 여자가 말했다.

 

"제발, 왕국은 무너지기 직전입니다."

"조슬랭 경께서 모시던 이들도, 그분과 적대하던 이들도, 이젠 다 죽었습니다. 하지만 내전은 끝이 나질 않습니다. 왕을 사칭하는 이들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엘로이즈 공주님. 다시 돌아와 왕위에 앉아주십시오."

 

 하지만 엘로이즈는 고개를 저었다.

 

"저는 공주가 아니랍니다. 공주가 몸을 얼마나 험하게 굴렸으면 아비도 모를 아이가 있겠어요? 게다가 저는 그 나라에 대한 좋은 기억이 없어요. 왕국이 무너지든 말든 상관하지 않아요. 난 돌아가지 않을 거예요."

"공주님……. 제발……."

 

 남자가 엘로이즈에게 매달리듯이 말함에도 그녀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그녀는 확고했다. 다만 그녀의 눈은 어디서 많이 본 노란색 손수건에만 머물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을 느낀 여자는 칼집 끝에 묶인 노란 손수건을 풀며 입을 열었다.

 

"전 조슬랭 경의 시녀였습니다. 그분께서 베렝게르 왕의 근위대장이자 대귀족으로서 작위를 받은 후로 쭉. 아, 그분께선 정말 제게 잘해주셨죠. 저를 비롯한 수많은 이들에게 조슬랭 경은 부하나 하인으로서 만날 수 있는 최고의 사람이었으니까요.
 조슬랭 경의 얼굴은 언제나 어두웠고 언제나 슬퍼하는 눈치였습니다. 베렝게르를 위해 하는 수많은 악행을 하면서 자신이 쌓은 죄악을 두려워하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3년 전부터, 베렝게르가 죽은 후로 내전이 났을 때……. 그분께선 이름도 모를 사람들을 위해 싸웠습니다. 왕궁은 어느새 가난하고 힘 없는 사람들을 위한 집으로 바뀌었죠. 속죄를 위해서, 조슬랭 경께선 싸우셨습니다. 저 같이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 힘도 없는 사람을 위해 싸우고 제게 대항하는 법을 가르쳐주셨습니다. 그것 때문에 돌아가셨지만…….
 저는 그런 그분을 사랑했습니다. 저는 이름 없는 지방 귀족의 딸이고 아무런 힘도 배경도 없는 사람이지만 감히 그분의 얼굴을 보며 사랑을 꿈꿨지요. 하지만 그분께선 항상 단 한 분만을 생각하고 계셨습니다. 그건 제가 아니었어요.
 그분은 언제나 그 노란 손수건을 소중히 여기셨습니다. 처음에 전 칼에 묻은 피를 닦아내려고 일부러 한 건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습니다. 언제 한 번은 제가 무례하게 그분께 물은 적이 있었죠. 대체 그 손수건이 뭔지. 그분께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자기가 속죄해야 하는, 사랑하는 사람이 남겨준 유일한 것이라고."

 

 어느새 여인은 노란 손수건을 풀어 좌우로 펼쳤다. 생각 외로 큰 손수건은 정말 오래된 물건이었는지 군데군데 헤지고 낡은 티가 났었다. 허나 하나 확실한 것은 그 노란 손수건은 엘로이즈에게 낯익은 물건이라는 것이었다.

 

"그분께선 외롭고 힘들 때마다, 슬플 때마다 그 손수건을 풀어서 거기 적힌 이름을 부르며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매일 같이 들을 수 있었던 이름이었죠. 엘로이즈……."

"……드 테르누아."

 

 엘로이즈는 여인의 말을 끊으며 대신 자신이 말을 이었다. 어색한 침묵이, 슬픈 침묵이 이어졌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여자가 다시 말을 꺼냈다.

 

"조슬랭 경께서 엘로이즈 공주님께 한 짓은, 살아오면서 쌓은 죄악은 오직 신만이 용서할 수 있는 악행임이 확실합니다. 조슬랭 경께서도 자신이 용서받을 수 없음을, 지옥에 떨어질 것임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속죄를 위한 노력마저 저버리는 건 잔인한 일이 아닌가요?"

 

 여인은 엘로이즈의 앞에 그 노란 손수건을 두었다. 엘로이즈는 떨리는 손으로 그 손수건을 쥐었다. 색깔. 촉감. 그리고 Eloise de Ternois라는 글씨. 모두가 그 옛날 그녀가 조슬랭에게 주었던 그것, 조슬랭이 잃어버렸다고 한 그것이었다. 엘로이즈의 눈에 어느새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폭포처럼 눈물을 흘리는 그녀를 보며 여자가 다시 말했다.


"공주님……. 저희가 공주님께 강요할 권리는 없습니다. 왕과 나라를, 백성을 위해 싸워야할 의무도 공주님께는 없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그런 고상한 것들 위해서가 아니라, 죽는 순간까지 공주님을 사랑했고 기억했고 속죄하려던 조슬랭 경의 순수했던 마음을 위해 싸워주셨으면, 그래서 이 칼을 잡고 그분의 속죄를 마무리 해주셨으면, 하고 바랄 뿐입니다."


 그렇게 남자도 여자도 입을 다물었다. 그 긴 침묵 동안 엘로이즈는 흐르는 눈물을 손으로 닦아냈다. 그녀는 루비처럼 붉어진 눈으로 그녀의 아들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과 함께 노는 아무것도 모르는 그녀의 아이. 그 너머로 석양이 지고 있었다. 그 석양 위에 옛 모습이 떠올랐다. 석양을 등지고 선 근위병 조슬랭을 바라보던 공주로서의 자신이. 언제나 자신을 위해 헌신 하겠다 맹세하던 그의 모습이. 

 엘로이즈는 다시 탁자 위에 놓인 그의 칼을 내려다보았다. 낡고 닳은 칼집과 손잡이가 지난 3년간을 말해주고 있었다. 칼을 바라보던 그녀는 눈을 감은 채 길게 심호흡했다.


 그녀는 칼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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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즈베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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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타벡의 남자

 

01.

 

 레흐가 눈을 떴을 때 그는 손이 등 뒤로 묶인 채 바닥에 누워있었다. 그가 입을 열려고 했으나 입에 물린 재갈 덕분에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하고 그저 웅얼거릴 뿐이었다. 그는 힘겹게 몸을 틀어 주변을 돌아보았다. 최소한 그러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입구에서 흘러 들어오는 희미한 빛을 제외하고는 사방이 어두웠고, 눈이 어둠에 익숙해질 때까지 레흐는 어떤 것도 명확하게 볼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나 눈이 밝아지고 나서야 주변의 모습이 들어왔다.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낡은 잡동사니들이었다. 오랫동안 사람의 손길이 없었다가 최근에야 옮겨진, 그런 물건들이었다. 그가 몸을 틀어 다른 곳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도 딱히 눈길을 줄만한 특별한 것들은 없었다. 잡동사니 뒤의 벽은 여기가 천막이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그는 유일하게 빛이 들어오는 입구를 향해 고개를 틀었다. 붉은 빛이 희미하게 들어오는 것을 보아 새벽 아니면 초저녁인 모양이었다. 바깥에서는 말발굽 소리나 걷는 소리, 그리고 함께 들려오는 재채기, 기침 같은 소리나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하는 잡담이 전부였다.

 갑자기 입구가 확 열리며 레흐의 눈을 향해 강한 빛이 들어왔다. 레흐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틀며 동시에 눈을 감았다. 눈보라는 어느새 그쳤는지 차가운 칼바람 대신 따듯한 햇살이 들어왔다. 레흐가 다시 눈을 떴을 때 그의 눈에는 붉은 햇빛을 등진 채 자신을 바라보는 누군가의 그림자가 들어왔다.

 

"뭐야, 깨어났나?"

 

 천막 입구를 젖힌 트라나는 레흐가 꼼지락거리는 것을 보며 말했다. 당연히 레흐는 트라나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트라나 남자는 천막 바깥으로 고개를 돌리며 무어라 소리쳤고 얼마 지나지 않아 트라나 남자 곁에 다른 트라나 남자가 다가왔다. 그가 다가오자 먼저 있었던 남자는 자세를 잡으며 인사하고 자리를 비켜주었다. 그러자 새로 나타난 트라나 남자가 안으로 들어섰다.

 천막 안으로 들어온 남자는 가면 같은 모습의 면갑을 위로 올렸는데 입과 눈가의 주름 때문에 인간으로 치면 30대 중반으로 보였다. 눈은 다른 트라나들이 그렇듯이 가로로 찢어져있었으나 그렇게 심한 편은 아니었다. 투구 끝 꼭지 부분에는 화려한 말총 장식이 달려있었는데 레흐 역시 기절하기 직전 왜소한 전사 옆에 바로 붙어있던 근위기병의 것임을 알아챘다. 남자는 사슬 갑옷 위에 철로 된 작은 찰들을 엮은 찰 갑옷을 겹쳐 입고, 그 위에는 외투를 걸친 모습이었다. 그는 레흐를 잠깐 내려다보더니 레흐에게 다가왔다. 그러더니 레흐를 붙들어 일으키고는 그를 끌고 밖으로 나왔다. 레흐는 속절없이 끌려나올 수밖에 없었다. 

 밖으로 나오자 저물어가는 붉은 해가 레흐의 얼굴에 닿았다. 레흐는 갑자기 밝아진 탓에 눈을 감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레흐를 붙든 근위기병은 레흐를 한 번 흔들어 보채고는 계속 레흐를 끌고 갔다. 레흐는 눈을 깜빡이며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한 번 훑어보았다. 죽은 동료의 시신을 옮기는 이들, 전리품을 실은 수레를 내리고 바닥에 내리는 이들, 전투의 열기가 남았는지 여전히 말을 타고 돌아다니며 환호하는 이들, 서로 이야기하는 이들. 기사단이나 라코비아 사람들과 딱히 다를 것이 없었다. 다만 이들이 뿔이 달린 채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것이 레흐에게 이상하고 불안하게 다가오는 것이었다. 물론 트라나들 역시 입에 재갈이 물리고 손이 뒤로 묶인 채 자신들의 근위대장에게 끌려오는 인간 기사를 보며 이상하게 여기는 것도 똑같았다.

 레흐가 끌려간 곳은 다른 유목민 천막과 비교해 훨씬 크고 화려하며 부족의 상징인 날개 달린 화살 깃발이 바람에 나부끼는 천막이었다. 둥그런 유르트는 노란색으로 밝게 물들어있었고 입구에는 화려한 장식이 된 융단이 문을 대신해 매달려있었다. 근위대장은 입구 앞에 선 근위병을 보았다. 그러자 근위병이 그를 보고 똑바로 자세를 잡으며 예를 표했다. 근위대장은 고개만 살짝 끄덕이고는 근위병과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레흐는 알 수 없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자신을 붙든 근위대장에게 밀쳐져 안으로 들어왔다.

 레흐가 안으로 들어왔을 때 안에는 한 사람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 사람 주변에는 수많은 시녀들이 들러붙어 그의 갑옷을 하나하나 벗겨내고 있었다. 그들은 레흐의 등장에도 이쪽으로 눈길도 하나 주지 않았다. 누구를, 무엇을, 어디를 봐야 할지 아무것도 모르던 레흐는 순간적으로 느껴지는 충격에 앞으로 무릎꿇었다. 바닥을 향해 고개를 숙이며 고통을 참던 레흐에게 이번엔 머리에 고통이 느껴졌다. 근위대장은 레흐의 머리채를 잡아 들어올리며 자기 눈과 레흐의 눈을 잠깐 마주치더니 이윽고 고개를 들어올려 앞에 있는 사람을 향해 말했다.

 

"이 남자가 전하를 시해하려 했던 바로 그 놈입니다."

"그래? 고마워, 아이데미르."

 

 생각했던 것보다 가녀린 목소리에 레흐는 약간의 당혹스러움과 호기심, 그리고 놀람으로 눈을 채워 앞에 앉은 사람을 바라보았다. 눈앞의 사람은 레흐 그 자신이 마지막에 목숨을 노렸던 그 왜소한 몸집의 전사였다. 그는 면갑을 올리고 있었으나 고개는 아래로 푹 숙인 채 전투의 후유증이 아직 남았는지 길게 심호흡하고 있었다. 때마침 그에게 달라붙어있던 시녀들이 뿔에 걸려 빠지지 않던 사슬을 빼내고 투구를 벗겼다. 그리고 그가 고개를 들어 레흐를 바라보았다. 레흐는 그의 얼굴을 보자 자기도 모르게 놀라 숨을 삼켰다. 자기가 죽이려 했던, 그리고 그 앞에 묶여있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자가 다름 아닌 여자라는 것에 말이다.

 작고 선이 고운 얼굴, 그 얼굴이라는 도화지 위에 그려진, 날카롭게 옆으로 찢어진 눈매, 그 안에는 헤이즐색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하늘을 뚫을 듯이 크고 오뚝한 코를 가진 인간이나 블렌다르와는 반대로 코는 작고 낮은 편이었으나 얼굴에 잘 어울리는 편이었고 입술은 작고 얇은 편이었다. 머리는 금발에 가까울 정도로 밝은 갈색이었는데 옆머리를 길게 땋아 늘어트렸다. 그 머리카락은 땀에 젖은 피부에 다닥다닥 달라붙어 묘한 분위기를 발산하고 있었다. 그 옆머리 뒤에는 마치 소나 코끼리의 그것을 연상케 하는 한 쌍의 상아색 뿔이 가로로, 앞을 향해서, 약한 곡선을 그리며 돋아나 있었다.

 그 왜소한 몸집의 전사, 아니, 높은 지위로 보이는 여인은 등을 의자에 기대며 레흐를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갑옷 입은 다리를 꼬며 오른손으로는 턱에 손을 받쳤다. 그러더니 레흐를 향해 왼손의 손가락으로 이쪽으로 오라는 듯이 까딱였다. 그러자 아이데미르는 레흐의 재갈을 벗긴 후 여인의 바로 앞까지 끌어왔고, 그 힘에 못 이긴 레흐는 여인의 발 바로 앞에 머리를 박으며 엎어졌다. 아이데미르는 레흐의 머리를 다시 붙잡아 일으켜 세우고는 두어 걸음 물러섰다. 

 레흐는 정신을 차릴 시간도 없이 고개를 숙인 채 머리를 흔들었다. 그가 고개를 들어 여인을 볼 기색이 없자 여인은 꼰 다리를 풀더니 오른쪽 발을 천천히 레흐의 목덜미에 가져갔다. 그러고는 발끝으로 레흐의 고개를 들어 올리는 것이었다. 레흐는 결국 강제로 여인의 얼굴을 바라보아야만 했다.

 

"그래, 이름이 뭐지?"

 

 여인은 싸늘하게 미소 지으며 레흐에게 말했으나 트라나 말을 단 한 마디도 모르는 레흐로서는 대답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레흐는 대답 대신 고개를 흔들어 여인의 발에서 턱을 떼고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여인은 짜증으로 표정을 구기며 레흐의 뺨을 발끝으로 살짝 찔렀다.

 

"가만히 있어."

 

 그녀는 잠깐 아무 말도 없이 레흐의 얼굴을 발로 꾹 누르며 재미있다는 듯이 옅게 웃어보였다. 레흐는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는 자신을 생각하니 참담한 심정이 들었다. 여인은 계속 레흐의 뺨을 꾹 찌르며 말을 이어갔다.

 

"이름이 무어냐고 묻지 않느냐."

 

 대답이 없자 뒤에 있던 아이데미르가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하지만 그를 여인이 제지했다. 레흐가 고개를 흔들어 여인의 발을 자기 뺨에서 떼어내고는 입을 열었기 때문이었다. 아이데미르가 다시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는 동안 레흐는 느릿하게나마, 얼굴을 분노로 구긴 채 그들이 알아듣기를 바라며 벨렌드니아의 언어로 낮게 말했다.

 

"나는……. 네놈들의 말을……. 모른다. 역겨운 트라나 악마야."

 

 레흐가 마치 사냥꾼 앞의 늑대처럼 으르렁 거리듯 여인을 노려보았으나 그녀는 그저 싸늘한 웃음을 여전히 짓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에게 레흐의 반항은 손바닥만한 강아지가 으르렁 거리는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그녀는 턱을 괴고 잠깐 생각하더니 다시 레흐의 턱을 자기 발끝으로 들어올렸다. 그녀는 살짝 느리게, 그러나 정확한 벨렌드니아 말로 대답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약하고 상처 입은 사냥감 주제에 혓바닥은 멀쩡한 모양이구나. 좋아, 블렌다르들의 말로 하면 알아듣는 게로군."

 

 레흐는 대답 대신 여인을 향해 분노가 담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녀는 후후 웃으며 계속 말을 이어갔다.

 

"다시 한 번 묻지, 인간이여. 그대 이름이 무엇인가?"

"알아서 뭘 하려고?"

 

 여인의 얼굴은 싸늘한 미소에서 짜증으로 점점 변해갔다.

 

"나의 인내심을 시험하다니 그 배짱 하나만큼은 인정해줘야겠구나. 허나 그것도 여기까지다."

 

 여인의 발끝이 더더욱 위로 솟았고 레흐의 고개도 목이 아플 정도로 솟아올랐다. 여인의 얼굴에는 더 이상의 웃음기는 없었다.

 

"나를 농락함은 곧 길고 고통스러운 죽음으로 이어질 뿐이다. 고작 이름 하나로 그런 비참한 꼴을 당할 필요는 없지 않느냐."

"네게 말해줄 이름은 없다."

 

 그러자 여인의 얼굴이 짜증으로 팍 굳어지더니 그대로 레흐의 얼굴을 발로 차 쓰러트렸다. 그는 아무런 저항도 못하고 바닥에 쓰러졌고 여인은 아이데미르에게 손짓하며 나가라 지시했다. 아이데미르는 고개 숙여 인사하고는 바닥에 쓰러진 레흐를 끌고 천막 바깥으로 나섰다. 레흐는 아무런 저항도 못하고 그대로 질질 끌려 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는 동안 레흐의 손은 눈 바닥에 쓸려 나갔다. 그는 손에 느껴지는 눈의 차가운 촉감과 간간이 부딪히는 돌멩이 때문에 손이 부러질 것만 같았다.

 아이데미르에게 끌려 다니던 레흐는 여전히 손이 묶인 채 자기가 갇혀있던 천막 앞 흙바닥에 앉아 있었다. 아이데미르가 그를 다른 병사에게 내버려두고 잠깐 자리를 뜬 사이 이름 모를 트라나 시녀가 다가와 그에게 반강제적으로 물을 먹였다. 레흐는 기침하며 반쯤을 뱉어냈다. 그는 계속 기침하면서도 자신을 보는 트라나 시녀에게 벨렌드니아 말로 말을 걸었다.

 

"여긴 어디지?"

"……테르메리 부족."

 

 시녀는 어눌한 벨렌드니아 말로 대답했다. 레흐는 그녀가 대답하지 않을 줄 알고 그냥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어본 것이었으나 예상치 못한 대답에 당황스러우면서도 표정이 밝아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레흐는 헛기침 하며 한 번 더 물었다.

 

"다른 인간 포로들은?"

"몰라."

 

 다시 생각해보니 일개 시녀가 포로가 어디 있고 어떻게 처분되는지 알 턱이 없었다. 굳이 알아야 할 필요성도 없었고. 하지만 지금까지 끌려 다니던 레흐가 생각해보니 포로로 보이는 사람, 아니, 인간이라고는 오직 자신뿐이었다. 그만이 이 '테르메리 부족'이라는 곳에 갇혀있는 모양이었다.

 

"그, 그럼, 벨렌드니아 놈들은?"

"누구?"

"벨렌드니아. 블렌다르. 키 큰 놈들 있잖아."

 

 시녀는 겨우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대답했다.

 

"그런 거 알아서 뭐하려고?"

 

 레흐는 방금 자신이 그 높은 계급의 여인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되받았다. 레흐는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이 나왔다. 그 여인이 느꼈던 감정이 바로 이런 것이었을까. 그러자 레흐의 머릿속은 그 높은 여인에 대한 생각에 도달했다. 그는 물을 달라고 해서 잠깐 목을 축이고는 다시 시녀에게 물었다.

 

"저기 저 큰 천막에 있는 여자. 누구야?"

 

 레흐는 턱짓으로 자신이 아까 있었던 곳을 가리켰다. 여전히 커다란 깃발이 선선히 불어오는 바람에 약하게 펄럭이는 게 여기서도 보일 정도였다. 그러자 시녀는 옅게 웃으며 말했다.

 

"그분은 부족의, 음, 어, 그래. 족장이야. 지도자라고."

"지도자? 왕?"

 

 시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칸, 아니 여성이시니 카툰(Khatun)이 되겠네. 그리고 아타벡이시지."

 

 레흐는 잠깐 생각하다가 다시 시녀에게 물었다.

 

"칸은 뭐고 아타벡은 또 뭐지?"

"그런 걸 일일이 설명할 정도로 내가 시간이 넘쳐 보이나보네?"

 

 시녀는 흥 콧바람을 한 번 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옆에 있던 경비병과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경비병이 그의 목덜미를 쥐더니 질질 끌고 다시 레흐가 있던 천막 안으로 그를 집어넣었다. 레흐는 바닥에 강하게 내쳐져 악하고 소리를 내었다. 경비병은 레흐를 보고 혀를 차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그에게 다시 재갈을 물리고 천막 바깥으로 나갔다.

 레흐는 입으로 으으 소리를 내면서도 눈은 문을 향해 계속 돌아보았다. 누군가가 들어오지 않을까 걱정하던 레흐는 한참을 기다려도 아무도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는 재빨리 뒤에 묶인 손을 마구잡이로 흔들었다. 어느새 그의 손에는 날카로운 돌멩이가 들려있었다. 아이데미르에게 끌려올 때 손에 잡히는 날카로운 촉감의 돌을 운 좋게 잡을 수 있었고, 시녀에게 계속 말을 걸어 돌멩이를 소매에 숨길 수 있었던 그였으나 그게 정말로 밧줄을 자를 정도로 날카로운지는 직접 확인해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입구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뾰족한 돌로 밧줄을 문질렀다. 차가운 바닥에 쓸려 빨갛게 부어오른 손은 마찬가지로 차가우면서 뾰족한 돌멩이 때문에 어느새 피로 물들어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레흐는 억지로 손에 느껴지는 고통을 참아 넘기며 계속 뾰족한 돌멩이를 밧줄에 비볐다.

 효과가 있었다. 레흐의 손목을 묶고 있던 밧줄이 조금씩 끊어졌고 레흐의 양손은 조금씩 자유를 되찾고 있었다. 레흐는 자기도 모르게 입에서 끙 소리를 내며 힘을 주었다. 그때였다. 천막 바깥에서 누군가의 걷는 소리가 들려왔다. 레흐는 반사적으로 놀라 손에서 돌멩이를 떨어트렸다.

 레흐는 다급하게 돌멩이를 주우려고 안간힘을 썼다. 발소리의 주인공은 천막 바깥에 있는 경비병과 무어라 떠들고 있었다. 목소리를 들어보니 아까 그 시녀인 모양이었다. 레흐는 다급하게 손을 최대한 아래로 뻗으려 애썼으나 소용없었다. 바닥에 떨어진 돌멩이는 그의 손가락에 닿을 듯 말듯 하며 그를 조롱했다. 레흐가 온힘을 짜내며 돌멩이를 향해 손을 뻗는 순간 천막 입구를 가리던 천이 위로 올라가며 아까 그 시녀가 나타났다. 레흐는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양팔을 꽉 붙이고 시녀를 보았다.

 

"안 자고 있었네?"

 

 레흐는 시녀를 노려보았다. 그녀는 손에 그릇을 하나 들고 있었는데 잘 보니 모락모락 김이 나고 있었다. 시녀는 그 아타벡인지 뭔지 하는 여자가 그랬듯 서늘하게 미소 지으며 레흐에게 다가왔다. 레흐는 그녀가 다가올 때마다 불안이 가슴속에서 더더욱 커짐을 느꼈다. 시녀는 레흐 앞에 몸을 숙이더니 그를 유혹하듯 옷 사이로 비추는 가슴골을 들이밀었다. 레흐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뒤로 젖히며 시녀를 피했다. 그러자 여인은 후후 웃더니 레흐 앞에 그릇을 내려놓고는 재갈을 벗기며 말했다.

 

"생각보다 잘 생겼더라 너."

 

 트라나 말을 모르는 레흐로서는 눈앞에 있는 뿔 달린 여자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바닥에 놓인 그릇에 담긴 수프를 한 술 뜨더니 자기 입에 넣었다. 뭘 하는 걸까 레흐가 생각하던 순간 갑자기 그녀가 레흐의 입에 자기 입을 맞추었다. 레흐는 갑작스러운 시녀의 행동에 놀라 반사적으로 숨을 삼키려했으나 대신 들어온 것은 뜨거운 수프와 여인의 혓바닥이었다.

 레흐는 버둥거리며 몸을 이리저리 흔들었다. 하지만 시녀는 먹잇감을 감싸는 뱀처럼 레흐를 꽉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녀는 한참 레흐의 입안을 괴롭힌 끝에야 입을 뗐다.

 

"수프 맛은 어때?"

 

 레흐는 이름도 모르는 시녀를 어떻게든 떼어내려 안간힘을 쓰며 말했다.

 

"뭐하자는 짓이냐?"

"아이카 님 옆에 있다 보면 재미 보기가 너무 힘들다구……. 요즘 너무 심심했는데 잘 됐어. 너도 참기 힘들었지?"

"저리 꺼져!"

"소리 질러도 상관없어. 내가 무슨 일을 할지는 밖에 있는 사람들도 다 알 테니까. 후후후……."

 

 시녀의 미소는 어딘가 뒤틀려있었다. 레흐는 그 얼굴을 보면 볼수록 불안감과 두려움에 잠식되는 것을 느꼈다. 그는 어떻게든 몸을 뒤틀고 또 손을 이리저리 꼬며 벗어나려 애를 썼다. 시녀는 어느새 레흐의 옷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이대로라면 레흐는 그대로 이 시녀에게 겁탈당할 것이었다. 레흐는 온힘을 다해 저항했다.

 그때였다. 레흐의 양팔을 묶고 있던 밧줄이 어느 순간 뚝 하는 소리와 함께 끊어졌다. 조금 전까지 뾰족한 돌멩이로 계속 긁어놓은 탓에 밧줄이 해진 모양이었다. 순간적으로 레흐도 시녀도 놀라 멈췄다.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레흐였다. 레흐는 재빨리 양팔로 시녀의 얼굴을 후려친 후 주먹을 날려 시녀를 쓰러트렸다. 시녀는 바닥에 엎어지며 꺅 소리를 내었으나 바깥에서는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모르고 오해하는 경비병의 웃음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시녀가 소리치려고 한 순간 레흐가 재빨리 달려들었다. 그는 한손으로는 시녀의 목을 뒤로 꺾듯이 잡아당겼고 다른 한 손으로는 입을 틀어막았다. 그녀는 컥컥 소리를 내며 발버둥 쳤다. 흙바닥은 어느새 그녀의 손톱자국으로 잔뜩 긁혔고 그녀의 몸은 방금 레흐가 그랬듯이 마구잡이로 요동치고 있었다. 그러기를 잠깐, 시녀는 이내 힘을 잃고 축 늘어졌다. 레흐는 그러고도 한참을 더 목을 졸랐다. 그녀가 완전히 의식을 잃은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레흐는 거칠게 숨을 내뱉으며 물러섰다. 자신을 겁탈하려던 시녀는 이미 기절했고 바깥에선 아직 지금 어떤 상황인지 알지 못하고 있었다. 레흐는 땀에 젖은 머리를 쓸어 올리며 어떻게 할지 생각했다.

 레흐는 아직 자기 목에 걸려있는, 조금 전까지 그의 입을 틀어막는 재갈로 쓰인 천을 손으로 만져보았다. 그는 재빨리 목에 걸린 그 천을 풀고 펼쳐보았다. 레흐의 어깨 넓이에는 못 미치지만 충분히 긴 편이었다. 그때 바깥에서 경비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튈라이, 아직도 하고 있어?"

 

 레흐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잠깐 문을 바라보고는 당황한 표정으로 주변을 보다가 잡동사니 뒤에 재빨리 몸을 숨겼다. 안에서 아무런 대답이 없자 경비병은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채고 천막 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당연히 바닥에 쓰러져 미동도 없는 시녀였다. 그는 놀라 시녀의 이름을 부르며 다급하게 다가갔다. 레흐가 노린 것은 바로 이 순간이었다.

 레흐는 순식간에 달려들어 경비병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운 좋게도 경비병은 얼굴을 가리는 단단한 투구 대신 가죽 모자를 쓰고 있었고 덕분에 레흐는 자기 자신의 주먹을 박살내지는 않았다. 레흐는 쉬지 않고 바로 경비병의 목을 잡아 바닥으로 내쳤다. 그러고는 곧바로 손에 쥐고 있던 천으로 경비병의 목을 감아 잡아당기며 목을 졸랐다. 경비병 역시 시녀와 똑같이 발버둥 쳤으나 이번에는 저항이 훨씬 더 강했고 때문에 레흐는 땀을 질질 흘리며 온힘을 다해 경비병의 목을 졸랐다.

 시녀보다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경비병은 팔다리를 축 늘어트리며 힘을 잃었다. 경비병이 더 이상 저항할 수 없음을 깨닫자 레흐는 힘겹게 뒤로 물러섰다. 레흐는 여전히 손에 쥔 천을 잠깐 보고는 바닥에 버렸다. 레흐는 잠깐 비틀거리며 머리를 짚었다.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레흐는 경비병을, 정확히는 그의 갑옷을 내려다보았다. 그 다음에는 경비병의 몸을 살짝 훑어보았다. 경비병은 레흐의 체격과 비슷했다. 레흐는 머릿속에 좋은 생각이 떠올랐고 그대로 한쪽 무릎을 꿇고 경비병의 갑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보이는 것보다 경비병의 체격은 작은 편이었는지 그의 트라나식 사슬 갑옷은 레흐에게는 살짝 작게 느껴졌다. 하지만 충분히 버틸 수 있을 정도였다. 레흐는 몸을 이리저리 돌려본 다음 가죽 모자를 머리에 얹었다. 뿔이 있을 자리가 비니 그 부분이 휑했다. 하지만 그는 멀리서 걷고만 있으면 이 어둠속에서 쉽게 들키지 않을 것이라 믿었다. 레흐는 마지막으로 허리에 칼을 차고 밖으로 나섰다.

 레흐는 고개를 숙인 채 천막 바깥으로 나섰다. 실눈으로 주변을 주의 깊게 살펴보며, 그는 의심을 어떻게든 피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레흐는 어디로 가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계속 엉성하게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이곳저곳 쏘다니다가는 금방 들켜 화살 과녁이나 칼꽂이 신세로 전락할 게 분명했다. 그는 빛을 피해서 계속 움직였다. 하지만 모든 빛을 피할 수는 없었다.

 멀리서 등불을 든 트라나 순찰병 두 사람이 레흐가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그들은 서로 바라보며 신나게 떠드는 중이라 반대쪽에서 뿔 없는 트라나가 다가오는 것을 아직 발견 못한 모양이었다. 레흐는 고개를 푹 숙인 채 그들 옆을 지나갔다. 그의 심장은 언제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쿵쾅거렸다. 두 순찰병이 떠드는데 집중하지 않았다면 다섯 걸음 앞에서도 심장 뛰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을 것이었다. 레흐와 두 사람이 마주쳤다. 둘은 레흐에게 잠깐 시선을 주었다. 레흐는 재빨리 종종걸음으로 두 사람에게서 멀어졌다. 레흐의 얼굴은 어느새 땀으로 가득했다. 그들은 레흐가 빠르게 두 사람에게서 멀어지는 것을 그저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들은 레흐의 모습을 보고 서로 바라보았으나 이내 어깨를 한 번 으쓱이고는 다시 이야기에 집중했다. 레흐는 두 사람이 자신에게 관심을 잃고 사라지는 것을 보고 안심하며 재빠르게 뛰어갔다. 

 레흐는 그러나 그런 천운을 겪고도 트라나 군영을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레흐는 한나절을 걸어야 이 군영을 횡단 가능한 게 아닐까 하는 끔찍한 절망에 사로잡혔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유르트, 끝이 없는 순찰병, 끝이 없는 불빛까지. 레흐는 주저앉고 싶었다. 그에게 또 다른 순찰병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을 때는 아예 자기 목을 칼로 그을까 하는 생각까지 할 정도였다.

 그때 바로 옆에 있는 천막 안에서 작은 불빛이 켜졌다. 그림자 하나가 천막의 벽에 드리워졌다. 길게 꼰 옆머리와 굴곡 있는 몸뚱어리는 그림자의 주인이 여인이라는 것을 증명했다. 레흐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불빛이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레흐는 칼을 뽑고는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천막 안으로 들어서니 머리를 정리하던 트라나 여인 하나가 있었다. 그녀는 아직 레흐를 발견하지 못한 듯 콧노래를 부르며 오른쪽 옆머리를 다시 꼬고 있었다. 레흐는 자세를 낮추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칼이 그녀의 목에 닿을 정도로 가까워질 때까지 여인은 여전히 레흐의 존재를 눈치 못 챘다. 

 레흐는 재빨리 여인의 입을 잡으며 동시에 칼로는 그녀의 목에 칼날을 대었다. 순간적으로 놀란 여인이 저항하려 했으나 가녀린 여인이 레흐의 힘을 이길 수는 없었다. 그러면서 그는 입으로 촛불을 껐다. 갑자기 뒤에서 덮쳐진 여인은 계속 발버둥 쳤지만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여인은 천막 바깥에서 순찰병이 든 불이 천막 근처를 지나가는 것을 보고 소리 지르려고 안간힘을 썼으나 레흐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했다. 순찰병이 멀리 사라지자 여인은 절망에 사로잡힌 듯 팔에 힘을 잃었다. 그녀가 잠잠해지자 레흐는 그녀의 귀에 대고 말했다.

 

"라코비아 말 할 줄 알아? 알면 고개를 끄덕여."

 

 여인은 대답 대신 발버둥 쳤다. 반데르바르트 말도 아닌 라코비아의 말을 일개 여인이 알 리가 없었다. 레흐는 잠깐 생각하더니 이번에는 벨렌드니아 말로 시도해보았다.

 

"벨렌드니아 말은? 할 줄 알면 고개를 끄덕여."

 

 여전히 여인은 울먹이기만 할 뿐이었다. 레흐는 한숨을 쉬더니 길게 생각한 끝에 다시 입을 열었다.

 

"바, 바, 반데르바르트, 말은, 할 줄, 아는가? 만일 네가 하, 할 수 있으면 고, 고개를 끄, 끄덕여라."

 

 레흐는 더듬거리며 어눌하게 반데르바르트 말을 꺼냈다. 그제야 여인은 울먹이며 격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소리를 지, 지른다면, 죽을 것이다."

 

 여인은 또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레흐는 그런 여인을 믿지 못해 여인의 목에 닿은 칼을 바싹 붙이며 천천히 왼손을 떼었다. 여인은 죽음의 공포에 감히 소리 지를 엄두를 내지 못하고 그저 울먹일 뿐이었다.

 

"네가 혀, 협, 협조만 잘 한다면 아, 아무, 음, 그러니까, 음, 아무 일도 없을 거야."

 

 레흐의 말에 여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레흐는 쉽사리 나오지 않는 반데르바르트 말을 생각하며 물어볼 것을 떠올렸다.

 

"그, 뭐지, 그, 그, 그러니까, 음, 잡혀온 사람? 뭐라고 하지?"

"포, 포로 말인가요?" 

"그래. 포로. 어디 있지?"

"저, 저는 그런 거 몰라……."

 

 레흐는 실망스러운 대답에 여인의 목에 날카로운 칼끝을 바싹 붙이는 것으로 답했다. 여인은 깜짝 놀라며 엉엉 울기 시작했고 레흐는 어쩔 수 없이 여인의 입을 틀어막았다.

 

"쉿."

 

 레흐의 속삭임에 여인의 울음이 점점 잦아들어갔다. 여인이 진정하자 레흐는 천천히 입에서 손을 떼고 다시 물었다.

 

"다음은 없어."

"저는 정말로 몰라요! 정말이에요! 믿어주세요! 제발……."

"모르는 게 죄로군, 그럼."

 

 레흐가 칼을 살짝 움직이자 여인은 발버둥 치며 말했다.

 

"하, 하, 하지만, 어디 있는지 느낌으로는 알 수도 있을 거 같아요! 그, 그, 그, 그러니까, 여, 여, 여기서 자, 잠깐만 왼쪽으로 더 가면 경비병이 셋인가 넷인가 있는 커다란 천막이 있을 거예요! 그쪽에는 일부 사람들만 갈 수 있고 경계가 삼엄해요! 안에서는 가끔씩 반데르바르트 말 같은 게 들리고요! 분명 거기가 포로가 있는 곳일 거예요!"

"……좋아. 하나 더, 더 묻지."

"어, 어떤 건가요?"

"음, 그, 벨렌드니아 군대. 그러니까, 음, 어디 있느냐고."

"제, 제가 알기로는 북서쪽에 멀리 떨어져있다는 것 밖에는 몰라요! 저는 다 말했어요! 더 이상상 아는 것도 없어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살려주세요……."

 

 여인은 다시 울먹이기 시작했다. 레흐는 울먹이는 여인을 잠깐 보더니 칼을 내려놓았다. 그러자 여인은 눈물 가득한 얼굴을 피며 중얼거렸다.

 

"정말 고맙습니……. 컥!"

 

 하지만 여인의 기대는 순식간에 배반당했다. 레흐는 여인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마구 발버둥 치다 이내 힘을 잃고 기절했다. 여인이 움직이지 않자 레흐는 그제야 여인을 놓고 그녀를 똑바로 눕혔다.

 레흐는 바깥으로 나왔다. 순찰 도는 병사들은 없었다. 그는 여인이 일러준 대로, 천막을 중심으로 왼쪽을 바라보았다. 잔잔하게 불길이 이는 난로 세 개, 그 주변에 털모자를 쓴 채 모여 있는 병사 네 명이 보였다.

 트라나 여인의 말은 정확했다. 레흐는 잔잔한 불빛으로도 그들이 중무장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양털로 된 겉옷 사이로 조금씩 보이는 사슬 갑옷, 그들이 몸을 흔들 때마다 불빛을 받아 반짝이는 도끼, 움직임을 따라 흔들리는 칼집, 그리고 팽팽하게 줄이 걸린 활과 전통까지 모두 레흐의 눈에 들어왔다.

 레흐는 숨을 한 번 삼키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당연히 아무도 없었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빠른 걸음으로 그쪽을 향했다. 레흐에게는 다행히도 멀리서 고개를 숙인 채 움직이는 뿔 없는 트라나의 그림자를 네 명의 병사는 발견하지 못했다. 레흐는 커다란 천막의 뒤로 돌아왔다. 레흐는 천막의 겉을 만져보았다. 도톰한 펠트로 된 표면 아래에 나무 골격이 느껴졌다. 나무를 자르고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어 보이지만 그래도 칼 하나가 들어갈 정도는 되어보였다.

 레흐는 주변을 경계하며 칼을 뽑고 천천히 칼을 천막에 찔러 넣었다. 예상보다 훨씬 더 칼이 안 들었다. 레흐는 단검으로 나무 탁자를 긁어내듯 칼끝으로 펠트 천을 문질렀다. 한참을 칼끝으로 찌른 끝에 갑자기 쑥 하고 칼날이 유르트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안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레흐는 뚫린 틈을 손으로 잡고 양쪽으로 벌려 틈을 넓혔다. 그리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안에는 다름 아닌 인간들이 있었다. 그리고 들려오는 예상치 못한 반가운 목소리도.

 

"누구요?"

"……이슈트반 경?"

"레흐?"

 

 레흐는 자기도 모르게 큰 소리로 외칠 뻔했다. 하지만 그는 반가움을 억누르고 시선으로 안쪽을 이리저리 살피며 물었다.

 

"다들 괜찮으십니까?"

"물론이지. 그보다 자네는 대체 어디 있었나?"

"저도 잡혀 있었습니다. 여기 족장으로 보이는 여자도 봤고요."

"족장으로 보이는 여자?"

 

 그때 반대쪽에서 경비병의 큰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기 안에! 조용히 하라고!"

 

 레흐는 순간적으로 자신이 들켰다고 생각했으나 그뿐이었다. 경비병의 커다란 목소리 외에는 아무런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안을 들여다보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레흐는 삼켰던 숨을 내뱉고는 다시 이슈트반과 대화했다.

 

"하여튼. 아직 저놈들이 우리를 못 본 것 같으니 다행입니다. 제가 꺼내드리겠습니다."

"어떻게? 너 혼자서 네 명을 잡을 수 있어? 그것도 안 들키고?"

 

 옆에 있던 기사의 말에 레흐는 얼어붙었다. 아무리 레흐가 뛰어난 검술 실력을 지녔다 한들 혼자서 넷을 상대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하지만 동료를 보았다는 기쁨과 구해야 한다는 사명감에 그 생각을 못한 것이었다. 그러자 이슈트반이 나섰다.

 

"그 칼을 나한테 주게. 우리가 뒤에서 공격해 제압하면 어떻게든 될 거야. 우린 보시다시피 열은 되고 저쪽은 넷 밖에 안 되니."

"알겠습니다."

 

 레흐는 틈새 사이로 거꾸로 든 칼을 집어넣었다. 누군가가 손잡이 쪽을 붙들자 무게가 느껴졌고 그 틈에 레흐는 손을 놓았다. 칼을 받은 이슈트반은 살짝 휜 트라나들의 칼을 이리저리 둘러보고는 동료 기사들을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슈트반과 기사들은 몸을 최대한 낮춘 채 천천히 유르트 입구에 쳐진 발을 들어올렸다. 포로들이 자신의 무기를 갖고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할 그들은 그저 추운 밤이 빨리 지나가길 바라며 난로 주변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그들을 본 이슈트반은 손가락 세 개를 들었다. 하나, 둘, 셋.

 이슈트반과 기사들이 네 명을 향해 달려들었다. 순식간에 난로가 바닥에 엎어지고 그 위에 트라나 경비병들이 엎어졌다. 이슈트반은 그들이 소리를 지르지 못하도록 순식간에 목을 찔렀고 그러는 동안 동료 기사들은 그들의 입을 틀어막고 목을 조르거나 단검을 빼앗아 목을 그었다. 순식간이었다. 그리고 아무도 소리를 지르지 못했다.

 이슈트반은 시체를 유르트 안으로 끌고 들어왔고 안에 있던 포로들은 무기를 주렁주렁 단 시체에서 무기와 갑옷을 빼앗았다. 그러는 동안 활을 챙긴 이슈트반은 뒤에서 멀뚱히 있던 레흐에게 다가가 피로 물든 칼을 건넸다.

 

"좋아. 이제 여기서 빠져나가세."

 

 레흐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북서쪽으로 멀리 떨어진 곳에 벨렌드니아 군영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쪽으로는 가면 안 될 것 같습니다."

"좋은 정보로군. 말이 있는 곳은 혹시 알고 있나? 걸어서 빠져나가려면 꽤나 고생할 것 같은데."

 

 레흐는 이번에는 고개를 저었다. 이슈트반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자네에게 너무 많은 걸 요구하는군, 내가. 일단은 다들 걸어서 빠져나가자고."

 

 이슈트반의 주도로 무장을 끝낸 기사들이 주변에 모여들었다. 이슈트반은 그들의 이름을 하나씩 부르며 수를 셌다. 잡혀온 이들 모두가 이슈트반에게 대답했다. 그는 앞서 걸으며 말했다.

 

"더 이상 꾸물거렸다간 들킬……."

 

 그때였다. 멀리서 나팔 소리가 울리더니 여기저기서 분주하게 뛰어다니는 소리가 들려왔다. 레흐가 사람들을 쓰러트리고 탈출했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여기저기서 고함이 들려왔다. 이슈트반은 욕을 한 번 하더니 빠른 걸음으로 움직였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다들 빨리 움직이게! 잡히면 안 돼!"

 

 모두가 이슈트반을 따라 빠르게 뛰어갔다. 그쪽이 서쪽인지도 동쪽인지도 모른 채. 서쪽이고 동쪽이고는 중요하지 않았다. 탈출하려는 기사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여기서 벗어나야 한다는 점이었다. 레흐는 계속 뒤돌며 누군가가 따라오지는 않는지 살폈다. 멀리서 말 탄 전사들의 그림자가 그들이 든 횃불과 함께 일렁였다. 레흐는 다급해졌다. 그는 속으로 그들이 자신의 목을 취하러 오지 않기를 창조신에게 기도하며 다시 앞을 보았다. 기사들 역시 계속 옆이나 뒤를 두려움 가득한 두 눈으로 살펴보며 계속 달려갔다.

 하지만 창조신은 레흐의 기도를 들어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뒤에서 트라나 기병 둘이 레흐 일행을 보자 나팔을 길게 불더니 도망치는 기사들에게 화살을 쏘며 달려들었다. 정신없이 달리던 기사들은 뒤에서 추격대가 화살을 쏘아대며 쫓아오자 혼비백산하여 얼굴이 눈밭처럼 하얗게 질렸다.

 

"정신 차려! 전부 대열 갖춰!"

 

 이슈트반의 일갈에 공포에 질려있던 기사들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기병에게 대항할 진형을 짜기 시작했다. 방패를 든 이가 앞서 나갔고 뒤에서는 활 든 이가 두 명의 기병을 향해 활을 겨누었다.

 

"신들의 아버지, 만물의 창조자이시자 군주인 창조신이시여!"

 

 이슈트반은 시위를 당기며 기도문을 읊었다. 그러자 마치 전염병이라도 옮은 듯 다른 기사들도 각자 기도를 읊기 시작했다. 레흐 역시 맨 앞에서 방패를 쳐든 채 적이 쏘는 화살을 막아내며 기도문을 중얼거렸다.

 

"우리를 갈기갈기 찢으려는 저 뿔 달린 악마들에게 당신의 천벌을 내리소서!"

 

 그 말과 함께 이슈트반은 시위를 놓았다. 화살이 칼바람을 가르며 기병을 향해 날아갔다. 하지만 트라나 기병은 가볍게 몸을 비틀어 피했다. 그리고는 오히려 그쪽에서 쏜 화살로 기사 하나를 맞추었다. 레흐의 바로 뒤에 있던 동료가 화살에 맞고 레흐를 덮치듯 앞으로 쓰러졌다. 순간적인 충격에 레흐는 방패를 들지 못하고 아래로 내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 틈 사이로 화살이 날아왔다. 충격이 느껴졌으나 천만다행으로 화살은 갑옷을 뚫지 못했다. 레흐는 화살을 부러트리며 다시 방패를 쳐들고 피를 토하며 쓰러진 동료를 가렸다.

 두 트라나 기병은 기사들을 농락하듯 그들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활을 쏘기 시작했다. 레흐와 방패를 든 다른 넷은 그들의 화살을 막으려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애를 썼다. 그러는 동안 이슈트반은 다른 셋과 함께 활로 그들을 맞히려고 애를 썼다. 다른 셋이 마구잡이로 활을 쏘는 동안 이슈트반은 시위를 길게 당긴 채 기병들의 움직임을 살펴보았다. 그의 동료 하나가 목에 화살을 맞고 바로 절명해도 그는 흔들리지 않았다. 이슈트반은 주변에 아무것도 없다는 듯이 기병들을 노렸다. 그리고 화살을 놓았다.

 화살이 빠르게 허공을 가르며 화살을 피했던 아까 그 기병에게 날아갔다. 그는 이번에는 화살을 피하지 못했다. 화살이 그의 가슴팍을 꿰뚫었고 화살촉은 그의 등에서 다시 튀어나왔다. 허공과 하얀 설원에 붉은 피를 흩뿌리며 그는 바닥에 쓰러졌다.

 다른 기병은 동료의 죽음에 오히려 분노했는지 이내 칼을 뽑아들었다. 적이 달려들자 이곳저곳 힘겹게 움직이던 방패 든 기사들이 다시 뭉쳤다. 레흐는 바로 앞에서 적이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뒤에서 활을 쏘았으나 기병은 방패를 들어 그걸 다 막아냈다. 레흐를 비롯한 다섯은 적이 다가오자 방패를 높이 들었다. 기병이 휘두른 칼은 그대로 방패에 막혔다. 그러자 이슈트반은 재빠르게 뒤돌아 멀어지는 기병의 등을 향해 활을 쏘았다. 그의 동료와 똑같이, 그러나 정반대 방향으로 화살이 그의 몸을 꿰뚫었고 그 역시 동료와 같은 신세가 되었다.

 두 명의 적이 죽었고 두 필의 말이 생겼다. 기사들이 죽은 동료와 부상자를 똑바로 눕히는 동안 이슈트반과 레흐는 말을 끌고 오며 말했다.

 

"두 명이 먼저 가서 지원군을 불러오게. 아군이 흩어진 병사들을 찾고 있을 걸세."

"이슈트반 경이 가십시오."

 

 레흐의 말에 부상자를 응급처치 하던 기사들도 동의했다.

 

"이슈트반 경이 우리 중에 가장 말을 잘 타시잖습니까."

"그럼 다른 한 사람은?"

 

 레흐는 시체 옆에 누워 죽어가는 부상자를 눈으로 가리켰다. 부상자를 돌보던 기사가 레흐를 보탰다.

 

"이 친구를 데리고 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지원군이 올 때까지 못 버팁니다."

"……알았네. 어떻게든……. 어떻게든 아군을 데려오겠네. 잘 버티고 있게."

 

 이슈트반은 다른 기사들의 도움을 받아 부상자를 안장 위에 앉혔다. 그리고 자신도 말 위에 올라타 부상자가 탄 말의 고삐를 오른손으로 쥐었다. 뒤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모두 뒤를 돌아보았고 예상한 대로 수많은 트라나 기병들이 그들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이슈트반은 뒤도 안 돌아보고 박차를 가해 저 멀리 지평선으로 달려갔고 기사들은 시체를 들쳐 업고 눈앞에 있는 숲을 향해 죽어라 뛰어갔다.

 빽빽한 숲속으로 들어온 기사들은 시체를 나무에 기대어놓고 잠깐 기도하고는 이곳저곳에 숨어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트라나 기병들이 숲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기사들은 서로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의 거리로 흩어져 적이 자신들을 못 찾고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트라나들은 말을 탄 채로 주변을 수색하듯 지나갔다.

 트라나들이 자신 가까이 왔을 때 기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갑자기 나무 뒤에서 나타나 트라나들을 낙마시키고 틈을 노려 찔러 살해했다. 레흐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기습에 우왕좌왕하는 트라나들의 갑옷 틈을 그들의 칼로 찌르고 말의 목을 내리쳐 쓰러트렸다. 

 하지만 트라나들은 금세 정신을 차리고 기사들을 오히려 몰아세웠다. 두 명의 기사가 악마 같은 적들이 휘두른 칼과 도끼에 쓰러졌다. 한 명은 전의를 잃고 도망치다 뒤에서 날아온 화살에 그대로 목이 꿰뚫렸다. 이제 레흐를 포함해서 다섯뿐이었다.

 

"후퇴!"

 

 기사 하나가 외쳤다. 그러자 레흐는 방패를 높이 들어 화살을 막으며 뒷걸음질 쳤다. 방패에 화살이 박히며 그 충격이 레흐의 팔까지 전해져 고통스러웠다. 다섯 명의 기사들은 더 깊은 숲 안쪽으로 도망쳤다. 트라나들이 화살을 쏘며 쫓아왔다. 레흐는 동료들을 돌아보았다. 이미 두 명은 팔다리에 화살을 맞아 사실상 불구나 다름없었다. 그나마 멀쩡한 셋도 피로와 고통으로 쓰러지기 일보직전이었다. 타틀어가던 희망은 꺼져가고 있었다.

 

"……그대와 싸워서 영광이었소, 레흐 경."

 

 끝을 직감한 동료가 레흐의 어깨를 잡으며 말했다. 레흐 역시 슬픈 표정으로, 억지로나마 웃으며 대답했다.

 

"저도 영광이었습니다, 라디슬라프 경."

 

 그때였다. 뒤에서 익숙한 나팔 소리가 들려왔다. 절망에 빠졌던 모두가 소리가 난 곳을 향해 돌아보았다. 저멀리 희미한 지평선 너머에서 라코비아의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이슈트반이 지원군을 데려온 것이었다.

 

"……원군이다."

"원군이다! 우린 살았어!"

 

 모두의 마음에서 사라졌던 희망이 다시 불붙었다. 바닥에 앉아 있던 부상자들은 동료의 도움으로 다시 일어났다. 그들은 힘겹게 그쪽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뒤에서 트라나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레흐는 방패를 들어 몸을 가리며 뒤돌았다. 화살이 날아왔고 레흐의 이미 화살이 잔뜩 박힌 방패에 다시 박혔다. 방패가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요란한 소리와 함께 쩍 갈라졌다. 레흐는 방패를 버리더니 트라나들을 향해 뛰어갔다.

 

"어딜 가는 거요!"

"먼저 가십시오! 제가 시간을 벌어보겠습니다!"

"잠깐, 레흐 경!"

 

 라디슬라프는 레흐를 잡으려 했으나 레흐는 이미 멀리 뛰어가고 있었다. 그는 이미 멀어져가는 레흐에게서 어쩔 수 없이 눈을 떼고는 다시 부상자를 데리고 힘겹게 움직였다. 저 멀리서 인간의 기병대가 그들을 향해 필사적으로 다가오는 기사들을 구하기 위해 다가왔다.

 트라나들은 기사단을 보자 도망치는 기사들에게는 흥미를 잃고 오히려 그들의 시선을 끌려고 애쓰는 레흐에게 관심을 돌렸다. 레흐는 숲속을 마구 달리며 이리저리 소리쳤다. 그러자 트라나들은 마치 귀신에게 홀린 듯 레흐를 쫓아다녔다. 레흐는 자기가 병사들을 끌어냈다고 믿었다. 하지만 반대였다. 오히려 트라나들이야말로 레흐를 여우 사냥하듯 교묘하게 몰아가고 있었다. 레흐가 그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레흐가 달려간 곳은 나무와 나무 사이에 자리 잡은 꽤나 넓은 공터, 그리고 그 자리에 서 있는 그 왜소한 몸집의 전사, 아니, 카툰인지 아타벡인지 하는 여족장이었다. 레흐는 그녀를 보자마자 멈춰섰다. 그리고 이내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여족장을 보아서가 아니었다. 마치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들처럼 빽빽하게 그녀의 뒤에 선 근위병들 때문이었다.

 레흐가 멈춰 서자 여족장은 재빠르게 활시위를 당기더니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레흐의 오른쪽 다리를 향해 활을 쏘았다. 레흐 그 자신이 미처 알아채기도 전에 화살은 이미 그의 오른쪽 종아리를 꿰뚫은 뒤였다.

 

"아악!"

 

 레흐는 소리를 지르며 비틀거렸으나 넘어질 수가 없었다. 그는 힘겹게 몸을 움직였다. 그는 칼을 꽉 쥐고 비틀거리며 여족장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레흐가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차며 고개를 두어 번 가로젓더니 다시 활을 쏘았다. 이번에는 레흐가 든 칼을 향해 화살이 날아갔다. 칼날에 화살이 부딪히며 손이 뒤로 꺾였고 레흐는 이번에도 소리를 지르며 팔목을 붙잡았다. 다행이라면 칼을 놓치지 않은 것일까.

 

"끄으윽……."

"정말 멈출 줄을 모르는군. 마치 야생마 같아."

 

 여족장은 이번에는 감탄하며 칼을 뽑아들었다. 그녀는 레흐를 향해 걸어가며 칼을 휘둘렀다. 레흐는 재빨리 칼을 들어 막았다. 여족장은 쉬지 않고 칼로 내려치고, 가로로 베고, 찌르고, 다시 내려치기를 반복했다. 레흐는 힘겹게 칼로 그걸 다 쳐냈으나 반격할 힘은 없었다. 레흐는 이미 지쳤고 그의 몸은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다. 결국 여족장은 레흐의 틈을 보고 칼을 사선으로 휘둘러 그의 얼굴을 그어버렸다. 레흐는 또다시 소리를 지르며 뒤로 엎어졌다.

 레흐가 팔을 뻗어 칼을 잡으려고 했으나 여족장은 레흐의 칼을 발로 차 그를 막았다. 그러고는 그의 손목을 발로 짓눌렀다. 레흐는 아무것도 못하고 온몸에 느껴지는 고통에 신음하며 정신을 잃어갔다.

 

"멍청이 같으니."

 

 여족장은 레흐를 발로 밀어 자신과 눈을 마주치게 했다. 레흐는 힘겹게 숨을 내뱉었다. 점점 그의 시야가 흐려지고 있었다. 그는 너무 지쳤고 눈을 뜨고 있는 것조차 고통이었다.

 

"이제는 쉴 때도 됐잖아. 너를 도와줄 사람은 다 떠났고 너는 홀로 이렇게 비참한 꼴로 누워있는데."

 

 여족장은 한쪽 무릎을 꿇고 레흐의 얼굴을 손으로 어루만지며 중얼거렸다.

 

"눈 감아."

 

 여족장의 말에 레흐는 마치 어머니의 말을 듣는 것처럼 순순히 눈을 감았다.

 

"잘 자."

 

 그녀의 말을 기점으로 레흐는 정신을 잃어버렸다.

 

 

 

 

 트라나 기병들은 저 멀리 떠나버렸다. 숲으로 들어온 라코비아 병사들은 트라나들을 발견하지 못했고 다만 잔인하게 살해된 기사들의 시신만 보았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 중에 레흐는 없었다. 미로스와프는 숲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사라진 아들의 이름을 목 놓아 불렀다.

 

"레흐! 아들아! 어디 있느냐! 대답해라! 레흐!"

 

 미로스와프는 숲 전체를 뒤져서라도 아들을 찾아내려 했지만 레흐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해가 다 떠올라 하늘 끝에 걸릴 때까지 숲을 샅샅이 뒤졌으나 레흐는 없었다. 미로스와프는 절망적인 표정이 되어 군영으로 돌아왔다. 볼레미르와 이슈트반이 그를 맞이했다. 천막으로 들어온 미로스와프는 의자에 주저앉더니 얼굴을 감쌌다.

 

"레흐가 없소. 시체조차 못 찾았다고."

"차라리 잘 된 겁니다. 백작. 레흐가 살아있을 수도 있잖습니까?"

"트라나들이 잡아갔으면 살아있을 리가……."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볼레미르를 이슈트반이 팔꿈치로 쳤다. 미로스와프는 그러나 이미 아들의 말을 들었고, 하늘이 무너질 것만 같은 얼굴이 되었다.

 

"레흐는 살아있을 겁니다. 그 강한 친구가 허무하게 죽을 거라고는 생각치 않습니다."

"……그러길 바라야지."

 

 미로스와프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중얼거렸다.

 

"나는……. 제대로 미안하다고 말을 못 했소. 자존심 때문에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면서도 미안하다고, 미안하다고 그 한 마디를 못했다오. 내가 그 아이의 길을 막지 않았다면, 최소한 미안하다고 한 마디만 했더라면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텐데."

 

 미로스와프는 붉어진 눈을 한 채 고개를 들었다.

 

"나가주시오, 이슈트반 경. 볼레미르 너도."

 

 두 사람은 서로 잠깐 바라보았다. 볼레미르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똑같이 슬픈 표정을 짓는 이슈트반과 아버지를 번갈아보다 바깥으로 나가버렸다. 그가 나가고 난 뒤 이슈트반 역시 미로스와프에게 인사하고 밖으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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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타벡의 남자 00.  (4) 2016.01.20
Posted by 즈베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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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타벡의 남자


00.

 

"하아."

 

 차가운 바람 앞에 따듯한 입김이 새어나왔다. 그 입김은 무자비한 울리엔의 겨울 앞에서 차갑게 사라져 갔다. 레흐는 추위에 입가를 손으로 가리며, 멜모데르 성벽 위에서 동료 기사들과 함께 먼 곳을 바라보았다. 멀리서 커다란 깃발이 펄럭이며 이쪽으로, 성채를 향해 다가오는 게 보였다. 기사들은 서로 귀를 대고 속닥이며 그들이 누구일지를 추리했다. 강 건너 서쪽에서 오기에 아군인 줄은 알았으나 정확히 어디 소속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는 사이 주변을 하얗게 물들이는 눈보라 사이로 하얀 깃발이 나타났다. 하얀 바탕에 왕관을 쓴 붉은색 독수리였다.

 

"라코비아군이다!"

 

 병사 하나가 소리쳤다. 레흐는 기사단 회의에서 라코비아에서 온 전령이 지원군을 보냈다고 말한 것을 떠올렸다. 거짓말이 아니었다는 생각에 레흐는 안도감이 들었다. 그러나 곧이어 눈에 들어오는, 지휘관과 그의 가문을 상징하는 문장이 그려진 깃발을 보자 표정이 천천히 굳어졌다. 그때 뒤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레흐가 고개를 돌리자 노년의 기사가 그의 뒤에 서 있었다.

 

"이슈트반 경."

 

 레흐는 오랫동안 기사단에 몸담은, 그리고 그의 스승이자 동료인 미탈리 이슈트반을 향해 인사했다. 그는 인사를 받아들이고는 바로 레흐의 옆에 섰다. 그러더니 성에 가까워지는 라코비아군을 바라보며 말을 꺼냈다.

 

"쿠를레프스키 가문의 문장이로군. 저 문장의 주인은 자네에겐 익숙한 사람이지 않은가?"

"……예. 제 옛 주군이었던 쿠를레프 백작 미로스와프 쿠를레프스키입니다."

"그리고 자네 아버지기도 하고."

 

 이슈트반은 여전히 레흐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빠르게 어두워지는 레흐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설령 보았다 한들 이슈트반은 레흐에게 괜찮은지 물어보지는 않을 것이었다. 그가 왜 그러는지는 이미 잘 알고 있었으니까. 이슈트반은 굳이 그 말을 상기시킬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곤 몸을 돌렸다.

 

"가세. 아군을 맞이해야 하지 않나. 전령의 말대로라면 보급품도 엄청나게 많이 가져왔을 거야. 잘하면 잔치를 벌일 수 있겠지. 그러고 보니 마침 승전절 아닌가?"

"예. 내일이 승전절입니다. 지금쯤 저 멀리 서쪽에선 밤새도록 벌어질 잔치를 준비하고 있겠죠."

"자네 아버지가 먹을거리를 많이 가져왔기를 바라야겠군."

 

 이슈트반은 먼저 성벽을 내려갔다. 다른 기사들도 얼굴에 기쁜 감정을 띄우며 성벽을 내려갔다. 오직 레흐만이 어두운 표정이었다. 그는 모두가 성벽을 내려가고 나서도 한참을 서성이다 돌계단을 천천히 내려갔다.

 계단 아래로 내려왔을 때는 마침 병사들이 성문을 열고 있었다. 레흐는 입술을 씹으며 얼굴을 돌렸다. 이걸 피하려고 늦게 내려온 건데. 레흐는 재빨리 기사들 사이로 숨어들어 갔다. 성문이 활짝 열리자마자 맨 앞에 선 화려한 옷차림의 라코비아인 귀족이 수많은 사람들을 이끌고 천천히 말을 몰며 안으로 들어왔다. 안에서는 멜모데르의 사령관이 그를 맞이했다. 중년의 귀족은 말에서 내리며 예를 갖춰 사령관에게 인사했다.

 

"쿠를레프 백작 미로스와프 쿠를레프스키, 국왕 전하의 명에 따라 기사단을 지원하러 왔소이다."

"정말로 반갑습니다, 백작."

 

 젊은 사령관은 면면에 기쁨을 감추지 않고 백작에게 인사했다. 멜모데르 성은 무너지지 않는 게 신기할 정도로 낡았고 기사단과 이종족 군대의 국경선에 있으면서도 주요 전선에서 벗어나 있다는 이유로 지금까지 제대로 된 지원을 받지 못했다. 이 지원군도 이종족 군세가 근처에 있다는 첩보 때문에, 본래 좀 더 북쪽으로 가야할 군대를 남쪽으로 돌린 것뿐이었다. 그렇기에 사령관은 미로스와프가 더더욱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정말로 창조주께서 우리를 보살피시는 게 분명합니다. 승전절을 하루 앞두고 이렇게 지원군과 보급품이 오다니. 우연도 이런 우연이 따로 없군요."

"늦지 않았다니 참으로 다행이오, 사령관. 하마터면 눈밭 위에서 승전절 전야를 보낼 뻔했소."

 

 두 지휘관은 그렇게 웃었고 그러는 사이 기사들은 밖에서 떠는 라코비아의 기사들을 맞이하며 안으로 들였다. 그들은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는 평민 병사들에게도 술과 먹을거리를 나누어주었고 레흐도 그에 동참했다. 아버지와 형제들을 보고 주변을 냉랭하게 하는 것보다야 이러는 것이 훨씬 나았다.

 밤이 되자 멜모데르 성 곳곳에 밝은 횃불이 켜졌다. 그리고 기사단 사람들과 라코비아에서 온 귀족들은 성내의 작은 예배당에 모여들었다. 그러지 못한 일반 병사들은 성벽이든 성내든 바깥이든, 자리를 가리지 않고 불을 피우고 주변에 모여들었다. 레흐도 기사였으므로 비록 말석이나마 예배당에 들어올 수 있었고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사람들이 자리에 앉자 사제가 성서를 펴고 미사를 진행했다. 신앙심 깊은 일부를 제외한 많은 이들은 애벌레가 기는 듯한 사제의 목소리에 꿈나라로 가버렸다. 레흐는 신앙심이 깊은 사람은 아니었으나 양손을 꽉 쥐고 기도문을 중얼거렸다. 그의 기도는 이미 죽은 사람을 위한 기도문이었다.

 미사는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끝났다. 코를 골며 자던 기사들은 분주해진 주변의 소음에 정신을 차리며 잠을 깼다. 레흐 역시 옆에 앉은 기사가 그만 가자며 그를 흔들고 나서야 기도를 끝냈다. 레흐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느새 그의 눈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듯 울먹이고 있었다. 아무도 그의 눈을 보지 않아 그는 재빨리 얼굴을 가려 귀찮은 일을 피할 수 있었다.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던 건 바로 지금이었다. 그들은 귀천을 막론하고 너나 할 것 없이 열두 대전사의 승리를 찬미하는 찬송을 부르며 잔치를 준비했다. 레흐는 진창 마실 것만 생각하는 기사들 틈을 몰래 빠져나왔다. 승전절이기에 아무도 그를 신경 쓰지 않았고 그래서 레흐는 오늘이 승전절임을 감사했다. 그는 홀로 빈 성내를 걸으며 상념에 잠겼다. 그가 눈 쌓인 길을 걸으며 묵상하는 동안 그를 방해하는 건 운 나쁘게 이날 경계를 서는 병사들뿐이었다. 그들은 레흐가 옆에 지나갈 때마다 그에게 인사했고 레흐는 적당히 그 인사를 받아주며 바로 시선을 돌렸다. 이슈트반이 그를 방해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잠들 때까지 묵상에만 전념했을 것이었다.

 

"레흐 경. 형제여. 여기 있었구먼."

 

 이슈트반의 목소리에 레흐는 묵상을 끝내고 뒤돌았다. 그는 목걸이를 만지고 있었다. 이슈트반 경은 그걸 잠깐 눈여겨보고는 레흐에게 말했다.

 

"아직도 그 여자를 생각하는가? 자네가 말했던 그 사람?"

"……예. 그렇습니다."

 

 레흐는 고개를 끄덕였다.

 

"항상 생각나기에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하던 중이었습니다."

 

 레흐는 다시 목걸이를 바라보았다. 마치 세이렌에 홀린 선원이 암초로 키를 돌리듯 그의 눈은 옛 연인의 추억이 담긴 십자가 목걸이를 향해 있었다. 그가 가혹하게 눈보라 치는 정원에 동료를 내버려두고 있음을 깨달았을 때는 한참이 지난 뒤였다. 레흐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이슈트반에게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뭘 이런 걸로 미안하다 하는가. 사람이 슬퍼할 일에 슬퍼하는 건 당연한 일이야."

 

 이슈트반이 손을 떼자 레흐는 한숨을 한 번 내쉬었다.

 

"그보다 무슨 일로……."

"자네를 잔치에 데려오려고 했지. 이 좋은 날에 포도주 한 잔조차 안 할 생각인가? 따라오게 형제여. 아직 밤은 깊고 마실 거리는 차고 넘친다네."

"……역시 입담이 좋으시군요."

"내가 기사가 안 됐으면 루아송을 쏘다니는 에르니도르들과 함께 노래나 부르고 있었을 걸세."

 

 이슈트반은 그러면서 레흐에게 손짓했다. 레흐는 하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이슈트반의 뒤를 따라 성채 내부로 걸어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서니 주변이 따듯하게 느껴졌고 레흐는 아무래도 자신이 칼바람에 너무 오래있었던 것 같다고 생각했다. 분주히 움직이던 시종이 두 사람을 보자 그들에게 인사하고 연회장으로 안내했다. 그러는 동안 이슈트반은 앞서 걸으며 레흐에게 말했다.

 

"그러고 보니, 지난번에 기병 지휘관이던 얀 형제가 전사하지 않았는가."

"예. 슬픈 일이었지요."

 

 이슈트반은 잠깐 기도하며 죽은 전우를 추모하더니 다시 말을 꺼냈다.

 

"그래서 말인데, 내 자네를 얀을 대신할 기병 지휘관으로 추천했네."

"예?"

 

 레흐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못 들은 건가 아니면 내 말을 이해 못 하는 건가?"

"아니, 그게, 그러니까, 그럼, 그 말씀은……."

"다시 한 번 말하지. 내가 자네를 새 지휘관으로 추천했다고."

 

 레흐는 뒤통수를 망치로 얻어맞은 듯한 얼얼함에 그대로 멈춰 섰다. 앞서 걷던 이슈트반 역시 레흐의 발걸음이 멈추자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레흐는 멍청한 표정을 지으며 이슈트반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럼 이슈트반 경은……."

"나? 아, 나는 이 자리에 만족하고 있네."

 

 이슈트반은 여전히 차가운 공기가 흐르는 복도에 멍청히 서 있는 레흐에게 손짓했다. 레흐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노년의 동료 곁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사실 자네를 여기에 데려오려 한 것도 그것 때문일세. 여기서 상급자들에게 잘 보여야 지휘관으로 선발될 가능성이 더 커지지 않겠는가?"

"하지만 전 그런 일에는 익숙하지 않습니다."

"누군들 익숙하겠나. 그리고 자네 예전에는 이런 곳에 잘만 돌아다녔다면서."

"그건……. 그저 옛날일 뿐입니다."

 

 레흐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한숨을 내뱉었다.

 

"이슈트반 경. 저는 아직 지휘관이 될 자격이 없습니다. 수십 년 동안 기사단에 헌신하고 싸워 오신 이슈트반 경께서도 아직 하급 지휘관에 머물러 계신데요."

 

 그렇게 얘기한 끝에 두 사람은 어느새 문 앞에 다다랐다. 안에서 왁자지껄한 소리와 밝은 빛이 새어 나왔다. 시종은 두 사람에게 인사한 다음 다른 곳으로 발걸음을 옮겨 사라졌다. 이슈트반은 연회장 안으로 들어서기 전에, 문에 한쪽 팔을 기대며 레흐를 돌아보았다.

 

"레흐 경. 아직 자네가 지휘관으로 선정됐다는 말은 안 했어. 그리고 말이야."

 

 이슈트반 경은 반대쪽 손가락을 펴 레흐의 가슴을 툭 치며 말했다.

 

"내키든 내키지 않던 간에, 기회가 왔을 때 잡지 않으면 안 되는 걸세. 지금 내키지 않는다고 거절했다가는 영원히 기회가 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거니까."

 

 그러면서 이슈트반은 문을 확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커다란 연회장 안에선 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모여 술을 마시거나 떠들고 있었다. 이슈트반은 앞서 들어가선 레흐에게 손을 뻗으며 들어오라 말했다. 레흐는 숨을 한 번 크게 들이마시고는 이슈트반을 따라 안으로 들어섰다.

 이슈트반은 순식간에 사람들 사이로 녹아들었다. 그는 여기저기 사람들과 말을 나누더니 레흐를 부르며 손짓했고, 레흐는 그를 따라 여기저기 불려 다니며 멜모데르 성의 고위 지휘관들과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어야만 했다. 한 명, 두 명, 세 명, 계속해서 입에서 역겨운 술 냄새를 풍기는 사람들과 코앞에서 술을 마시며 얘기를 하려니 레흐는 점점 머리가 아파졌다. 그렇게 얘기를 한참 나누던 중 익숙한 목소리가 레흐의 귀에 들어왔다.

 바로 옆에 미로스와프가 있었다.

 레흐와 얘기하던 기사단 장교는 그가 옆에 온 것을 보자 바로 그에게 웃으며 말을 건넸다. 레흐가 말을 막거나 자리에서 벗어나기도 전에 미로스와프와 그의 둘째 아들 볼레미르가 셋의 곁으로 걸어 들어왔다.

 

"아, 미로스와프 경!"

"아아. 미에스코 경. 오랜만이로군."

 

 미로스와프는 얼굴에 미소를 띠며 장교와 이야기하다 레흐와 눈이 마주쳤고, 그러자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갔다. 기사단 장교는 그것도 모른 채 술에 취해 벌게진 얼굴로 크게 떠들었다.

 

"자네에게 이 친구를 소개해야겠군. 기사단의 젊은 피인……."

"……레흐 쿠를레프스키 경."

 

 전혀 예상치 못했던 미로스와프의 대답에 장교는 엇 하고 소리 내더니 말했다.

 

"둘이 아는 사이였나? 잠깐만, 그러고 보니……. 쿠를레프스키?"

"미에스코 경. 미안하네만 잠시 비켜줄 수 있겠는가, 거기 뒤에……경께서도."

 

 그의 말에 미에스코와 이슈트반은 서로 한 번 마주보고는 자리에서 슬금슬금 물러섰다. 미에스코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들썩였고 이슈트반은 레흐를 보며 고개만 설레설레 저을 뿐이었다. 자신을 막아줄 방패막이마저 사라지자 레흐는 발가벗겨진 채 연극 무대 위에 선 기분이었다.

 미로스와프는 어색한 표정으로 레흐 앞에 섰다. 레흐 역시 아버지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이리저리 시선만 돌리며 손에 든 포도주 잔만 흔들었다. 볼레미르는 아버지의 뒤에서 레흐와 미로스와프의 뒤통수만 번갈아 보고 말을 못 꺼냈다.

 

"미로스와프 경."

"아들아."

 

 두 사람은 동시에 입을 열었고 목소리가 겹치자 두 사람은 또다시 입을 닫았다. 그렇게 침묵이 이어지자 볼레미르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이러지 말고 술이나 들죠, 우리. 승전절이잖아요?"

 

 레흐는 이복동생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레흐의 날카로운 시선에 그는 움찔했다. 레흐는 무언가 결심한 듯 술을 입에 털어 넣고는 말했다.

 

"반갑습니다 미로스와프 경. 허나 죄송합니다만……. 피곤해서 먼저 들어가 봐야겠습니다."

"잠깐만."

 

 미로스와프는 레흐를 불러 세웠고 레흐는 뒤돌려다 멈춰 섰다.

 

"아직도 화가 덜 풀린 것이냐? 그 여자에 대해서?"

 

 그 여자라는 말에 순간적으로 레흐의 이성이 끊어질 뻔했으나, 레흐는 애써 숨을 삼키며 이성을 붙들며 말했다.

 

"……베라는, 그녀는 그렇게 죽을 사람이 아니었으니까요."

 

 미로스와프는 레흐의 대답에 실망감을 느끼고 고개를 숙였다.

 

"몇 번이고 얘기했던 것 같지만, 널 위해서 그 아가씨를 내친 것이었다. 너는 내 아들이다. 너는 더 고귀하고 훌륭한 여인을 맞이할……."

"제 삶을 그렇게 옥죄고 이래라 저래라 하실 거였으면!"

 

 레흐의 이성이 끊어졌다. 순식간에 주변이 침묵하고 싸해졌다. 모두가 레흐와 미로스와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왜 나를 사생아로 낳은 겁니까? 스스로의 욕망을 못 이겨 이렇게, 이렇게 아무것도 아니며 앞으로의 삶조차 보장받을 수 없는 이런 사람으로 날 낳아놓고, 어째서? 어째서 제가 아무것도 못하게 막으려 하셔서 이런 결과로 이끄셨습니까?"

"……레흐."

 

 레흐의 폭우 같은 고성에 미로스와프는 아무 말도 못하고 그대로 입을 닫았다.

 

"당신이 아니었으면 그녀는 죽지 않았을 거고! 내 아이도 안 죽었을 거라고!"

 

 그러면서 레흐는 잔을 바닥에 내쳤다. 철로 된 술잔이 돌바닥에 닿으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그 소리를 기점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며 웅성거리던 기사들 역시 입을 다물었다. 레흐는 순간적으로 숨을 쉬기 어려운 듯 비틀거리며 얼굴을 오른손으로 감쌌다. 그의 손가락 사이로 눈물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연회장은 거칠게 숨을 쉬는 레흐의 목소리만이 차가운 공기를 흔들 뿐이었다.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레흐는 반대쪽 손으로 힘겹게 미로스와프를 손가락질 하며 중얼거렸다.

 

"당신……당신과는 할 말이 없어."

 

 그 말을 끝으로 레흐는 도망치듯이 비틀거리며 연회장 바깥으로 나섰다. 미로스와프는 그를 붙잡으려 했으나 볼레미르의 제지에 그 자리에 멈춰섰다. 여전히 눈보라치는 바깥으로 나온 레흐는 숨을 몰아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숨이 막혀왔다. 그의 얼굴에서 눈물이 멈출 줄을 모르고 바닥에 떨어졌다. 레흐는 무릎 꿇은 채 눈밭에 얼굴을 처박으며 울음을 참으려 애썼다. 뒤따라 나온 이슈트반은 그런 그를 보고는 놀라 달려왔다.

 

"레흐 경! 자네 괜찮나?"

 

 레흐는 한참을 말없이 있다가 일어섰다. 그의 얼굴은 눈물자국으로 엉망이었고 눈은 붉었으나 끓어오르던 마음이 이제야 진정된 듯 그는 길게 심호흡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는 걱정스레 바라보는 이슈트반을 향해 고개를 돌리더니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이슈트반 경. 제가 잔치를 망쳐버렸……."

"아니야. 괜찮네. 이런 일도 있는 법이잖나."

 

 이슈트반의 위로에도 레흐의 표정에는 안그래도 짙은 그림자가 더더욱 짙어지고 있었다. 이슈트반은 지금은 무슨 말로도 레흐를 위로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만 들어가서 쉬게. 오늘은……힘든 하루였으니."

 

 레흐는 이슈트반을 잠깐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이고는 비틀거리며 숙소로 향했다. 이슈트반은 레흐가 눈보라 속으로 사라지는 걸 보다가 고개를 저으며 다시 연회장으로 향했다.

 

 나흘이 지났다. 여전히 눈보라는 몰아쳤고 칼바람이 성 밖으로 나온 이들을 괴롭혔다. 병사들은 얼어 죽지 않으려고 서로의 몸에 자기 몸을 밀착시키며, 저 멀리 새하얀 눈보라 사이로 벨렌드니아의 지배자인 대공을 상징하는, 나무가 그려진 군기가 바람에 나부끼는 것을 보고 있었다.

 이틀 전부터 그들은 멜모데르 성 바깥에 나타나 진을 쳤다. 기사단은 그들이 온다는 정보를 알고는 있었으나 그들은 너무나도 빨랐다. 병사들이 혼비백산하여 수성전을 벌일 준비를 했으나 벨렌드니아군은 마치 장난이라도 치듯 서로를 잘 볼 수 있는, 그러나 서로 공격할 수도 공격 받을 수도 없는 그 위치에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게 이틀이 지났다. 기사단은 그들을 몰아내기로 결정하고 성 밖으로 군대를 끌고 나왔다.

 레흐는 군영 바깥으로 나왔다. 차갑게 부는 눈 섞인 바람에 그의 갑옷 위를 덮은 서코트와 망토가 휘날렸다. 그의 시선은 저 멀리 하얀 눈보라 사이로 드문드문 보이는, 키 큰 이종족들을 향해 있었다.

 그들, 드네페르 강 동쪽의 이종족들은 블렌다르라 불렸다. 레흐는 처음 그들과 격돌했을 때를 떠올렸다. 말로만 듣던 괴물 같은 거인족. 키가 7피트에 달한다는 소문은 사실이었고 그들이 상상을 초월하는 괴력과 민첩함의 소유자라는 소문 역시 사실이었다. 레흐의 코에 첫 전투에서 느꼈던 끔찍한 피비린내가 느껴졌다. 레흐는 눈을 감았다. 하지만 그때의 모습이 더더욱 명확하게 그의 눈에 떠올랐다.

 말을 타고 칼을 휘두르던 레흐의 팔을 아름다운, 그러나 피투성이가 된 블렌다르 여전사가 붙잡았을 때 레흐는 마치 팔에 쇠사슬이라도 찬 듯 움직일 수가 없었다. 여전사의 손아귀 힘은 레흐가 지금까지 느껴본 적 없었던 힘이었고 손목이 부러질 것만 같았다. 공포에 찬 레흐의 외침을 이슈트반이 듣지 못했다면, 그래서 그가 튀어나와 여전사의 팔을 칼로 내려쳐 잘라내고 얼굴에도 칼을 휘둘러 반으로 갈라버리지 않았다면 레흐는 그때 죽어버렸을 것이었다.

 레흐는 다시 눈을 떴다. 멀리서 그들의 기병대가 그들의 진영 주변을 돌아다녔다. 분주하지는 않았으나 위협적인 모습이었다. 레흐는 그들이 더는 여기 다가오지 않기를, 그래서 전투가 벌어지지 않기를 바라며 기도했다. 아니면 최소한 빨리, 고통스럽지 않게 죽던가.

 

"레흐 경."

 

 익숙한 목소리에 레흐는 기도를 끝내고 뒤돌았다. 역시나 이슈트반이었다. 이슈트반은 얼굴에 옅은 미소를 띠며 그에게 손짓했다.

 

"따라오게. 회의가 시작했어."

 

 그러더니 이슈트반은 뒤돌며 그가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레흐는 그의 뒤를 졸졸 따라가며 말했다.

 

"결국 여기서 전투를 벌이는 겁니까?"

"그렇게 됐네. 뭐, 아직 눈보라가 세차긴 하지만 곧 있으면 멎을 거라고 하니, 그때 저들을 공격할 예정인 것 같네. 자세한 건 지휘관에게 직접 들어야지."

 

 이슈트반은 레흐와 함께 회의가 한창인 천막 안으로 들어섰다. 따듯한 화로 앞에 모인 수많은 귀족들이 중앙에서 목에 핏대를 세우며 큰 목소리로 말하는 미에스코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커다란 지도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곳, 멜모데르 성 바로 앞에 이종족 놈들이 진군해왔소. 그들의 깃발과 정찰병의 보고를 토대로 그들이 다름 아닌 벨렌드니아의 대공, 바이스빌카스가 직접 이끄는 정예군임을 알았소."

 

 벨렌드니아의 최정예가 나타났다는 사실에 모두 긴장한 듯 말을 아꼈다. 간간히 들리는 웅성거림은 최소한 용기의 증거는 아니었다. 특히 벨렌드니아의 전사들과 수없이 많이 싸운 기사단의 늙은 기사들은 더더욱 말이 없었다. 미에스코는 그들을 한 번 훑어보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곧 있으면 정오가 될 거고 눈보라는 멈출 거요. 그때를 기점으로 우리가 공격할 것이오. 이틀 간의 정찰 결과 저들의 수가 그렇게 많지 않아 보이니 라코비아군과 우리 기사단이 함께 싸운다면 승리할 수 있을 것이오."

"하지만 그들은 최정예 병사들이자 벨렌드니아 대공국의 지배자가 직접 이끌고 온 군사요. 그들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저기서 진을 치고 있는 게 이상하오."

 

 천막 안의 웅성거림이 더욱 심해졌다. 누구하나 큰 소리로 말하진 않았으나 천막 안의 웅성거림이 최소한 미에스코보다는 다른 기사의 말을 더 긍정하는 것으로 보였다. 레흐는 침을 삼키며 이슈트반을 돌아보았다. 그는 아무런 말도 없이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미에스코는 그 기사의 의문을 일축했다.

 

"정찰병들을 여럿 보냈으나 그 누구도 다른 군세를 찾지 못했소. 이 근처는 빽빽한 숲이 있는 것도 아니니, 그 많은 병사들을 우리 정찰병들이 발견하지 못했다면 그건 정말로 정찰병들의 눈이 잘못 됐던지, 아니면 그들의 죽은 신들이 그들을 가호한다고 볼 수밖에."

"조금 떨어져있기는 하나 트라나들이 있잖소? 사실 따지고 보면 그렇게 멀리 있는 것도 아닌데."

 

 라코비아인 귀족의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서로 얘기를 나눴다. 트라나. 머리에 한 쌍의 뿔이 달린 유목민족. 레흐도 그들의 악명을 소문으로만 들었지 그들을 직접 맞상대한 적은 없었다.

 소문으로는 트라나들이 젊고 아름다운 사람들을 종족 불문하고 잡아가 노예로 부려먹거나 멀고 먼 동방으로 팔아버린다고 했다. 또 다른 소문으로는 그들이 남녀노소, 귀천을 불구하고 자비를 베풀지 않으며 전장에 남은 부상자들을 모조리 살해한다고 했다. 심지어는 그들이 포로들을 씨받이나 씨내리로 쓴다는 소문도 있었다. 레흐는 그 소문들이 모두 의미 없이 부풀려진 허풍과 거짓이라고 생각했으나 그 역시 아무런 근거 없는 자신의 기대인 것은 매한가지였다. 여하간 트라나라는 말에 천막 안의 웅성거림이 더더욱 커졌다. 미로스와프가 큰 소리로 조용히 하라고 외치지 않았다면 미에스코는 입도 뻥끗 못했을 것이었다. 주변이 조용해지자 미에스코의 눈은 지도의 하단, '트라나 부족들'이라 쓰인 땅에 어지러이 흩어진 점들을 향했다.

 각각의 점에는 이름이 딸려있었다. 세비트킨, 하바리, 모르미리, 코테니, 기르겐, 그리고 테르메리. 그 외의 점에도 물론 이름은 붙어있었다. 각각의 점은 하나의 부족이었고 그에 딸린 이름은 부족과 가문 명이었다. 모두 남쪽에서 트라나들과 싸우는 흐레덱 후작 커르페시 카로이가 준 정보 덕분에 붙을 수 있었다. 미에스코는 그 점들을 쳐다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 하지만 그들이 하루 안에 여기로 올라올 수 있을지는 모르겠구려. 게다가 반데르바르트의 카로이 후작이 그들을 붙잡고 힘겹게 싸우고 있으니 그들도 쉽게 병력을 빼지 못하겠지."

"허나 서쪽의 트라나들은 벨렌드니아의 오랜 동맹이오. 벨렌드니아의 대공이 직접 나타났다면 분명 믿는 구석이 있을 터. 저놈들 중 하나가 우리의 눈을 피해 돌아올 수도 있는 거 아니겠소? 아무리 천 개의 눈과 귀를 가졌다는 카로이라도 그들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바로 알 수 있지는 않을 거요."

 

 그때 이슈트반이 손을 들었다. 미에스코는 손을 든 이슈트반을 보며 그를 가리켰고 순식간에 모든 귀족들의 눈이 그와 레흐를 향했다. 레흐는 당황한 듯 이슈트반에게서 살짝 발을 떼어 거리를 두었다.

 

"기사들 일부를 예비대로 편성해 남겨두면 좋겠습니다. 만약 정말로 트라나들이 나타난다면 힘을 비축한 예비대가 중앙을 보조할 수 있을 테고, 그러면 우리가 기습적인 공격으로 궤멸 당하지는 않을 겁니다."

"좋은 생각이오만, 예비대를 얼마나 쓰겠소?"

 

 그러자 다른 기사가 끼어들었다.

 

"백 명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백 명은 너무 많소. 예순 명으로 하지."

 

 미에스코의 말에 이슈트반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살짝 소리를 냈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미에스코가 덧붙였다.

 

"그대들이 더 잘 알겠지만 이 앞은 얕은 구릉조차 없는 완벽한 평지일세. 기병이 많은 우리가 활약하기 아주 알맞은 곳이지. 트라나 놈들이 오기 전에 우리가 저들을 처부수면 그만이오. 우리 자신을, 창조주의 가호를 믿고 싸우세."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던 중 누군가가 소리쳤다.

 

"신의 뜻대로!"

 

 그러자 기사들이 하나둘씩 그를 따라 외쳤다. '신의 뜻대로!' 천막은 기사들의 외침으로 떠나갈 것만 같았다. 레흐는 그러나 그 외침의 대열에 동참하지 않았다. 그저 눈을 감은 채 기도만 할 뿐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눈발이 점점 잦아들어 맑아졌고 덕분에 저 멀리에 있던 이종족의 군세가 기사단 병사들의 눈에 들어왔다. 작은 움직임조차 없이 무기를 세워두고 기사단의 병사들을 바라보는 그 모습은 멀리서 보고만 있어도 흉흉하기 짝이 없었다. 정찰병의 말만 듣고 생각하던 병사들은 생각보다 많은 적들을 보자 긴장감에 침을 꿀꺽 삼키며 대열을 세웠다. 갑옷으로 중무장한 병사들이 맨 앞에 서서 칼이나 도끼, 철퇴 따위를 방패와 함께 들고 있었고, 그 뒤에는 각자 무기를 든 병사들이 섰다. 기병들은 양익에 서서 창을 들고 명령을 기다렸다. 좌익에는 미로스와프가, 중앙에는 멜모데르 성주가, 우익에는 미에스코가 지휘관이었다. 레흐는 이슈트반의 뒤에 서서 예비대로 대기했다. 전투가 벌어지기 직전까지 사제들은 찬송가를 부르며 병사들 하나하나에게 성수를 뿌려댔다.

 

"시작하는군."

 

 이슈트반의 말에 레흐는 병사들을 바라보았다. 그의 말대로 기사단과 라코비아의 군대가 여전히 서 있기만 하는 벨렌드니아군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예비대의 기사들도 전투가 어떻게 벌어질지 궁금해하면서, 자신들이 아주 유리한 상황에서 나가기를 기대하면서 전투가 벌어지는 것을 확인했다.

 벨렌드니아 군세의 뒤에서 불덩이가 날아왔다. 투석기였다. 불덩이는 병사들을 맞추지 못하고 대열의 앞이나 뒤로 떨어졌으나 병사들의 마음에는 불안감이 생겨났다. 조금 더 걸어가니 불화살이 날아들어 왔고 기사단 병사들이 하나둘 씩 쓰러져갔다. 그때 벨렌드니아의 경기병대가 나타났다. 가볍게 차려입었으나 기사단의 기사들보다 훨씬 더 큰 몸집이 어마어마한 위압감을 주었다. 그들은 넓게 뻗어나가더니 떨어진 기사단의 우익을 습격했다. 병사들은 갑자기 나타나 벼락같이 공격을 퍼붓는 기병을 보자 놀랐으나 당황하지 않고 대열을 유지하며 맞서 싸웠다. 벨렌드니아 기병대는 몇 번이고 미에스코의 우익을 몰아쳤으나 그들은 물러서지 않았고 벨렌드니아 기병대는 결국 저 멀리 도망치기 시작했다. 기사단 기병들이 그들을 추격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왔다.

 

"놈들이 물러섰다!"

"창조주께서 우리를 지켜주신다!"

 

 최초의 승리에 기사단 병사들은 전투를 이길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겨났다. 기병대는 멀리 물러서서 전열을 가다듬었고 그러는 동안에도 대공의 부대는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걸 바라보던 이슈트반은 무언가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손을 쥐락펴락하며 중얼거렸다.

 

"뭔가 이상한데."

"뭐가 말입니까?"

 

 레흐가 묻자 그는 여전히 미동도 없는 대공의 군대를 가리켰다.

 

"애초에 이런 구석진 곳에 대공이 나온 것도 수상하지만, 대공이라는 놈은 자기 기병대가 도망치는데도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어."

"손 쓸 수가 없는 상황이라 그런 게 아니겠습니까?"

"아니야. 아무리 패주한다지만 적 기병대가 아직 마흔 명은 남았잖아."

"대전사들의 언행록을 보면 만 명이 넘어가는 이종족 군대가 단 열 명에게 무너져 패주했다고 하잖습니까?"

 

 동료 기사 하나가 그리 말하자 이슈트반과 레흐는 모두 그 사람을 돌아보았다.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동시에 지으면서. 주변에 있던 기사들도 그건 다 과장이라며 그 기사를 타박했다. 이슈트반은 다시 전선을 바라보았다.

 기사단 보병대가 거인들의 코앞까지 도달했다. 그때 미에스코의 기사들이 끓어오르는 혈기를 주체 못하고 그대로 적들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누비솜옷과 사슬갑옷으로 완전무장한 기사들은 투석기에서 날아가는 돌처럼 거대한 성문조차 부술 기세로 돌격했다. 블렌다르들도 지지않고 방패와 창, 도끼를 높이 든 채 단단한 벽이 되어 맞섰다. 기사들의 돌격에 거인조차 창에 맞아 날아가고, 쓰러지고, 죽어갔다. 벨렌드니아 보병들은 그러나 무너지지 않고 대열을 유지하며, 다시 돌아가려는 기사들을 향해 무기를 휘둘렀다. 거인의 괴력에 불운한 기사들은 낙마하며 죽어갔다. 그 꼴을 보다 못한 미에스코가 외쳤다.

 

"돌격!"

 

 그러자 기사단 우익의 병사들이 파도처럼 적을 향해 뛰어갔다. 기사의 공격으로 정신이 없던 블렌다르들은 전열을 가다듬지 못한 채 적들을 맞이했고 결과는 대혼란이었다. 그렇게 우익을 시작으로 중앙, 좌익 역시 적과 부딪혔다. 양쪽 모두 서로에게 잔인하게 무기를 휘둘러댔다. 피가 허공에 흩뿌려졌고 생기 잃은 몸뚱이가 평원을 메우기 시작했다. 그렇게 전투가 한창 진행되는 동안 기사단 예비대도, 대공의 군대도 움직이지 않았다.

 

"왜 아직도 대공이 움직이지 않습니까?"

"글쎄. 뭔가 기다리고 있는 것 같은데."

 

 레흐와 이슈트반은 그렇게 대화를 나누며 계속 전투를 지켜보았다. 점점 벨렌드니아군 중앙이 뒤로 물러서는 모양새였다. 조금만 더 움직이면 대공의 병사들과 닿을 수준이었다. 다시 보니 애초에 벨렌드니아군 중앙이 양익에 비해 수가 적은 편이었다. 그들은 계속 뒤로 밀려갔고 이윽고 대공의 깃발과 중앙의 깃발이 바로 옆까지 맞닿았다. 그제야 대공의 깃발이 앞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벨렌드니아 대공이 움직인다."

 

 이슈트반의 말에 기사들이 모두 그쪽을 향해 시선을 집중했다. 그때 저 멀리서 도망쳤던 벨렌드니아 기병들이 새로 충원되어 다시 나타났다. 여든 명 정도의 숫자였다. 그러자 이슈트반이 급하게 소리쳤다.

 

"적 기병대다! 전군 전투 준비!"

 

 그러자 모두 옆구리에 끼거나 시종에게 들렸던 투구를 들어 뒤집어쓰고 손에 창과 방패를 들었다.

 

"적의 기병대를 몰아내고 측면을 쳐서 아군을 돕는다! 전진!"

 

 모두가 침을 한 번 꼴깍 삼키고는 말에 박차를 가해 평원을 달렸다. 이미 벨렌드니아의 경기병들은 어느새 뒤로 돌아와 기사단을 공격하고 있었고, 덕분에 미에스코의 우익은 엉망진창이 되었으며 중앙도 대공의 등장으로 전세가 기사단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벨렌드니아군은 우익을 돌파하고 기사단을 포위하려는 모양새였다. 이슈트반은 그 모습을 보고는 더더욱 박차를 가하며 빠르게 달렸다. 바로 코앞까지 투석기에서 날아온 불덩이가 떨어졌으나 기사들은 멈추지 않았다. 기사들은 어느새 창을 가로로 눕히며 바로 앞의 적들을 향해 돌격했다. 레흐 역시 가장 앞에서 아군을 공격하느라 정신없는 적 기병을 향해 창을 겨눴다.

 레흐의 창은 바로 앞에 있던 적 기병의 몸에 닿았다. 창은 산산조각 나 사방으로 흩어졌고 엄청난 반동이 레흐의 몸에 전해졌다. 창에 닿은 적은 그대로 날아가듯 낙마해 시체의 산 위에 자신의 몸을 더했다. 돌격을 끝낸 레흐와 동료들은 부러진 창대를 내던지고 고삐를 잡아 뒤로 물러섰다. 다른 기사들이 순차적으로 돌격을 끝내며 동료를 엄호하는 동안 레흐를 비롯한 기사들은 어느새 뒤로 돌아와 시종들이 준비한 창을 다시 집어 들었다. 그들은 쉬지 않고 곧바로 다시 적을 향해 내달렸다. 이번에는 전열을 가다듬은 적군 기병들이 창과 칼, 도끼를 빼들고 레흐 일행을 향해 똑같이 돌격을 가했다.

 양측이 서로 맞붙었다. 동료 기사들은 방패를 높이 들었음에도 충격에 넘어가거나 허리가 부러질 것 같은 고통을 느끼며 몸을 뒤로 젖혔고 상대 역시 뒤로 날아가고, 충격에 나무 방패가 산산조각 나며 그 파편이 튀어 몸과 얼굴에 박혔다. 이번엔 레흐는 칼을 뽑아들었다. 뒤돌았다가는 블렌다르의 무지막지한 괴력에 붙잡혀 바닥에 쓰러질 게 분명했다.

 

"물러서지 말고 싸워라!"

 

 이슈트반의 외침에 레흐는 그대로 따랐다. 레흐는 칼을 휘두르며 적을 위협했고 벨렌드니아 기병들 역시 말고삐를 잡아 끌며 도끼를 위아래로 휘둘렀다. 바로 옆에 있던 동료 기사의 머리에 날카로운 도끼가 그대로 찍혔다. 블렌다르가 도끼를 뽑자 그 사이로 피가 분수처럼 튀어나왔고 기사는 축 늘어지며 말에서 떨어졌다. 바로 옆에 있던 레흐는 순간적으로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하지만 레흐는 다시 정신 차리고 칼을 가로로 휘두르며 적의 말을 베어버렸다. 블렌다르 기수를 태우고 있던 말은 그대로 고통에 몸부림치다 주인을 바닥에 내치고는 계속 날뛰다 죽어버렸다. 레흐는 멈추지 않고 일어서려는 그 기수를 향해 칼을 휘둘렀다. 그는 악 소리를 한 번 내고는 바닥에 쓰러져 그대로 움직임을 멈췄다. 그렇게 여럿이 죽자 그들은 싸움을 멈추고 다시 도망쳐버렸다.

 

"적이 물러선다!"

 

 레흐는 피에 젖은 칼을 높이 들어 소리쳤다. 말을 탄 채로 난전을 벌이던 기사들은 다시 전열을 가다듬었다. 그때 기사들은 투구에 닿는 햇빛이 약해진 것을 느끼고 모두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 동쪽의 낮은 언덕 너머로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먹구름이라니, 불안하게……."

 

 기사 하나가 중얼거렸다. 멀리서 다가오는 검은 그림자는 기사들의 마음에도 검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러자 이슈트반이 기사들을 다그쳤다.

 

"여기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 다시 창을 쥐고 아군을 도와야 한다!"

 

 이슈트반의 다그침에 정신을 차린 레흐와 동료 기사들은 칼을 집어넣고 다시 뒤로 돌아와 창을 받았다. 기사들은 이번엔 넓게 우회하여 벨렌드니아군의 뒤를 치려 했다. 그들의 움직임에 벨렌드니아군도 이를 알아챘는지 뒤에 있던 병사들이 급하게 모여 이슈트반의 예비대를 맞이했다. 기사들은 창끝을 아래로 내리며 싸웠고 급하게 방패를 든 벨렌드니아 병사들은 방패를 뚫고 가해지는 충격에 쓰러졌으나 이내 다시 정신을 차리고 기사들과 싸웠다. 이슈트반은 뒤로 돌아가려 했다가는 그대로 붙들릴 것이라 생각하고는 칼을 뽑아들며 외쳤다.

 

"맞서 싸워라! 물러서지 마라! 신들의 아버지이신 창조주의 가호가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 이슈트반은 칼을 마구 휘둘렀다. 레흐는 아직 부러지지 않은 창을 보고는 그대로 크게 휘둘러 앞에 있는 보병의 턱을 날려버리고는 창을 버리고 칼을 뽑아들었다. 하지만 난전에 들어간 이상 기병들은 오히려 불리하기 짝이 없었다. 이미 몇몇 기사들은 허벅지나 옆구리에 창을 맞거나 팔을 붙들려 낙마했다. 이제 멀쩡히 싸우는 기사들은 레흐를 포함해서 스무 명 남짓에 불과했다. 그때 멀리서 기사단의 나팔소리가 들려왔다. 레흐가 재빨리 고개를 틀자, 중앙, 멜모데르의 성주가 이끄는 부대가 벨렌드니아군을 돌파한 것이 보였다. 그러면서 성주가 큰 소리로 외치는 것이었다.

 

"기사단이 적을 돌파했다! 성 아녜스께 영광을!"

 

 그러자 이슈트반 역시 칼을 높이 들며 외쳤다.

 

"성 아녜스께 영광을!"

 

 그의 말에 기사단 병사들이 모두 수호성인의 이름을 부르며 적을 더 매섭게 몰아붙였다. 레흐 역시 희망을 갖고 더더욱 적들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벨렌드니아의 중앙은 대공의 정예병들이 틀어막았으나 전황은 점점 기사단에 유리하게 흘러갔다.

 그때였다. 저 멀리 동쪽에서 낯선 나팔소리가 들려왔다. 기사단도, 라코비아군도, 벨렌드니아군도 모두 그 낯선 나팔소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얕은 구릉 위 지평선을 검은 그림자가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 그림자는 나팔소리에 맞춰, 뒤에선 거센 눈보라를 끌고 오며 천천히 구릉 아래로 내려오고 있었다. 어느새 레흐의 곁에 다가온 이슈트반은 그 검은 그림자를 돌아보더니 천천히 표정이 굳어가며 중얼거렸다.

 

"트라나……."

 

 트라나, 뿔 달린 기마병들은 점점 속도를 높이더니 이윽고 나팔을 더 크고 빠르게 부르며, 그 빨라진 속도에 맞춰 기사단을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기사단은 생전 본적 없는, 예상은 했으나 정말 나타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한 군대의 등장에 크게 동요했다. 그때 병사 하나가 외쳤다.

 

"트라나다! 트라나 군대다!"

 

 어느새 평원을 가득 메운 트라나 기병들은 박차를 가하며 기사단의 측면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러자 벨렌드니아군도 분발하며 기사단을 밀어붙였다. 트라나들은 각자 손에 쥔 창끝을 기사단 병사를 향해 겨누며 다가왔고 어느새 기사단 병사들은 앞에는 거인, 뒤에는 뿔 달린 기마병이라는 진퇴양난에 빠져 공포와 혼란의 제물이 되어버렸다. 기병들의 창은 그대로 기사단 병사들을 갈가리 찢어버렸다.

 트라나 기병들의 돌격에 어느새 미에스코의 우익은 붕괴하고 말았다. 그 혼란에 스스로의 몸을 던져서라도 병사들을 집결시키려는 미에스코의 노력은 헛되이 돌아갔다. 그는 누가 휘둘렀는지도 모를 도끼에 맞아 낙마했고 그대로 그 병사의 도끼날에 목이 잘려나가 절명했다. 기사단이 그 사실을 알게 된 건 피투성이가 된 미에스코의 군기에 그의 머리가 걸린 것을 보고 난 뒤였다.

 

"후퇴! 후퇴하라! 후퇴!"

"도망쳐! 도망치라고!"

 

 기사단 병사들은 전의를 잃고 성을 향해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트라나 기병들은 옳다구나 하며 병사들 사이를 이리저리 사냥하듯 흩고 몰아가며 칼과 활로 하나씩 죽여 댔다. 힘겹게 기병들과 칼싸움을 하던 레흐 역시 이슈트반의 외침을 들었다.

 

"도망치게 레흐 경! 우린 이미 패했어! 도망쳐서 뒤를 생각하자고!"

 

 레흐는 잠시 망설였으나 도망치는 동료 기사들의 하얀 서코트가 이미 피로 붉게 물든 것을, 그리고 바닥에 수없이 많은 시체가 섞여 있는 것을 보고는 역시 도망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는 칼을 휘둘러 트라나 기병 하나를 밀치고는 그대로 틈을 향해 달아났다.

 그렇게 한참을 달아나던 중이었다. 레흐는 어느새 그가 혼자 남았음을 깨달았다. 주변을 돌아보니 저 멀리 트라나 기병들이 병사들을 사냥하는 모습이 보였고, 그들 중 한 무리가 이쪽으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레흐는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급하게 주변을 돌아보며 도망칠 곳을 찾았다. 그때 주변에 기병용 창을 쥐고 죽은 시체 몇 구가 등에 화살이 박힌 채 바닥에 누워있는 게 보였다. 레흐는 그게 누구였는지 생각할 시간도 없이 재빨리 내려 그 창을 들고 다시 말 위에 올라탔다. 어느새 트라나 기병들이 나타났다. 레흐는 재빨리 창을 쥐고 흔들어 그들을 위협하며 다시 도망쳤다. 

 하지만 창조주는 그를 돕지 않으려 작정한 것인지, 눈보라 사이로 그의 눈에 보이는 군기는 기사단의 것도 벨렌드니아의 것도 아니었다. 날개 달린 화살이 그려진 그 그림은 명백히 트라나의 것이었다. 레흐는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트라나 기병들이 가까이 따라붙어 활을 쏘려고 하는 게 보였다. 레흐는 여기서 이렇게 죽느니 차라리 적군 아무나와 같이 죽겠다 마음먹고는 그 깃발을 향해 박차를 가했다. 

 그가 창을 겨누며 달려간 곳에는 말 위에 올라탄 왜소한 몸집의 전사 하나와 그 주변의 트라나 치고는 덩치 좋은 근위 기병들이 있었다. 그들은 눈보라를 뚫고 인간 기사가 튀어나올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는지 다들 당황한 눈치였다. 레흐는 짧은 시간 안에 누구를 향해 공격을 가할지 정해야 했다. 이대로라면 레흐의 창끝은 허공을 가를 것이고 그건 아무런 의미도 없는 행동이다. 레흐는 화려한 갑옷 차림의 근위병들이 가면 모양의 황금색 면갑을 쓴 왜소한 전사를 가리려고 움직이는 것을 알아챘다. 아무래도 그가 지휘관인 모양이었다. 레흐는 다시 박차를 가하며 창끝을 그 전사를 향해 겨눴다.

 근위병들은 눈보라 속에서 튀어나온 레흐를 보고는 재빨리 방패를 들며 지휘관을 가렸고 그러는 동안 지휘관은 활을 뽑아들고는 시위를 당겼다. 레흐의 창이 맨 앞에 있던 근위병의 방패를 꿰뚫었다. 창과 방패는 모두 산산조각 났고 파편은 꽃가루 날리듯 사방으로 날아갔다. 근위병 역시 충격에 뒤로 넘어가 낙마했다. 레흐는 부러진 창을 내던지고 칼을 뽑아들었다. 그와 동시에 레흐는 가슴팍에 커다란 충격을 느꼈다. 화살이 피투성이 서코트와 갑옷을 뚫고 누비솜옷에 박혔다. 하지만 치명상은 아니었다. 레흐는 방패를 휘둘러 자신을 후려치는 트라나 근위병의 칼날을 쳐내고는 적장을 향해 달려들었다. 적장은 재빨리 뒤로 달아나더니 허리를 뒤로 틀며 활을 레흐에게로 겨눴다. 다시 화살 한 발이 레흐를 향해 날아왔다. 화살은 레흐의 오른쪽 위팔을 맞췄다. 다시 화살이 레흐에게 충격을 주며 갑옷을 뚫었고 이번에는 차가운 화살촉이 살갗에 닿아 찢어버린 것을 느꼈다. 레흐는 순간적으로 칼을 떨어트릴 뻔했다. 하지만 레흐는 고통을 참으며 끝까지 적장을 쫓아갔다. 뒤에서는 근위병이 그를 쫓아오고 있었다.

 왜소한 몸집의 전사는 몸에 화살을 두 개나 꽂고도 멀쩡히 달려오는 레흐를 보고는 어찌해야 할지 생각하며 다시 화살을 시위에 물렸다. 그가 허리를 틀고 뒤를 돌아보자 이미 레흐는 칼을 뻗으면 닿을 것만 같이 가까워져 있었다. 몸을 쏜다 해도 인간 기사들의 갑옷은 단단하기 짝이 없었기에 별 소용없었다. 그는 반사적으로 말을 바라보았다. 말 역시 두툼한 솜으로 된 마갑이 치렁치렁 달려있었다. 말을 쏘기에도 애매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는 말을 향해 활을 돌렸다. 그는 눈을 반짝이며, 새까만 말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그러는 동안 레흐는 칼을 높이 들어 금방이라도 휘두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레흐가 칼을 휘두르려는 순간 전사는 시위를 놓았다. 둔탁한 소리를 내며 시위를 떠난 화살은 빠른 속도로 눈보라를 가르며 말을 향해 날아갔다. 레흐는 순간적으로 자신의 시야가 전사에서 눈밭으로 변한 것을 느꼈다. 이유를 알기도 전에 그의 온몸에 끔찍한 충격이 전해졌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깨달은 것은 그가 바닥을 두어 번 뒹굴며 고통을 겪고 난 뒤였다. 화살은 그대로 말의 눈에 박혔고 레흐의 말은 고통을 참지 못하고 포효하듯 울며 바닥을 뒹굴었다.

 레흐는 힘겹게 몸을 일으키려고 했으나 온몸의 충격 때문에 고작 무릎을 꿇는 게 전부였다. 어느새 근위병들은 그의 곁에 다가왔고 재빨리 바닥에 뒹구는 그의 칼을 치우며 그를 다시 바닥에 처박았다. 근위병들은 그의 투구를 벗겨내고는 그를 발로 마구 밟으며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레흐가 흐려지는 눈으로 본 마지막 모습은 가면 달린 투구를 쓴 뿔 달린 트라나 기병들이 자기를 내려다보는 장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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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즈베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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