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백옥루의 마당에도 낙엽이 가득 쌓이고, 노랗게 변한 낙엽이 때때로 바람에 날리며 내는 울음과 같은 소리를 제외하면 그 어떤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망령 아가씨의 거처에 어울리는 지독하고 소름끼치는 정적이었다. 그 정적 속의 마루 위에는 벚꽃 같은 머리색의 사이교우지 유유코가 멍하게 앉아있었다. 그녀의 눈에 초점이라고는 없었고, 비어있는 것만 같았다.

 그 정적을 깨는 발소리, 손에 소반을 든 요우무가 뒤에서 나와 유유코의 옆에 내려놓았다. 조르륵 소리와 함께 차를 따르며, 요우무가 말을 걸었다.

 

"차 드세요, 유유코 님."

"……."

 

 멍하니 있던 유유코는 요우무의 말에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몸을 돌리고 찻잔을 받았다.

 

"고마워, 요우무. 오늘은 경단이네."

 

 유유코는 다시 떨어지는 낙엽을 보면서 찻잔을 기울였다. 그녀는 아무런 말도 없이 그저 이리저리 흩날리는 낙엽에만 시선을 고정했다. 그러기를 한참, 조용한 주인을 뚫어지도록 쳐다보던 어린 정원사는 얼음장 같은 정적을 참지 못하고 말을 꺼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계신가요?"

"아무것도."

"하지만 그렇게 슬픈 표정으로 낙엽을 보시면 제가 다 걱정돼요, 유유코 님."

 

 그 말에 찻잔을 기울이던 유유코의 손이 멈췄다. 그녀는 잔을 놓고는 경단을 하나 집었다. 그녀는 아가씨답게 조신하게 한 입 베어물고는 다시 내려놓았다.

 

"그래……. 사실은 낙엽을 볼 때마다 요우키가 생각난단다."

"제 할아버지요?"

 

 유유코는 고개를 끄덕였다.

 

"요우키가 떠난 지도 정말 오래구나."

 

 요우키라는 말에 요우무는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표정 역시 밝지만은 않았다. 유유코는 반이 잘린 경단을 다시 집어먹었다. 경단이 그녀의 목을 타고 넘어가자, 그녀는 다시 찻잔을 들었다. 그녀는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운 요우무를 한 번 힐끗 쳐다보았다.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니? 나도 요우무가 그렇게 슬픈 표정을 지으면 싫단다."

"할아버지께서 떠나시기 전에 제 부모님에 관해서 물어본 적이 있었어요."

 

 유유코는 순간적으로 손을 멈췄다. 손이 멈췄다기보다는 그대로 마비되었다는 것에 가까웠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찻잔을 엎지를 뻔했다

 

"평소 같으면 무섭게 화를 내셨을 텐데, 그때는 정말로 슬픈 표정을 지으셨어요. 그러더니 할아버지답지 않게 미소를 지으시면서, 언젠가는 알 거라고, 그 말만 하셨어요."

 

 요우무의 얼굴은 여전히 응달처럼 어두웠다. 항상 차갑고 무서운, 다가가기 어려웠던 그 사람이 억지로 웃으며 슬픔을 억누르는 모습을 회상하자니 더더욱 슬프고, 또 궁금했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유유코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제 부모님은 대체 어떤 분인가요?"

 

 유유코는 대답하지 않고, 그녀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알려주세요, 유유코 님!"

 

 절규에 가까운 요우무의 물음에도 유유코는 말없이 찻잔만 기울였다. 그리고 시선을 저멀리 허공에 둔 채,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미안해, 요우무. 요우키는 나한테 아무 말도 안 해줬단다. 그나마 알고 있던 부분은 다 잊어버렸고."

"하지만……."

 

 그때 정원에 누군가가 불쑥 튀어나왔다. 유유코가 시선을 옮기자 그곳엔 양산을 쓴 금발의 아름다운 요괴, 야쿠모 유카리가 마루를 향해 천천히 걸어오는 게 보였다. 요우무는 그녀를 보자 일단 일어나 인사했다.

 

"손님이 왔네. 미안하지만 술상을 준비해줄 수 있겠니?"

 

 요우무의 표정에는 당장 대답을 듣겠다는 의지가 보였으나, 점점 더 가까워지는 유카리를 보고는 풀 죽은 목소리로 알았다는 대답만 하며 부엌으로 물러났다. 유카리는 요우무가 앉았던 자리에 앉았다.

 

"안녕, 유카리. 이제 곧 자야할 때네. 인사하러 온 거야? 마침 잘 왔어. 단풍이 예쁘게 폈거든."

"흐응. 난관에서 구해준 건 언급하지 않는 거야? 실망인걸."

"아직 나한테 실망할 거리는 많아, 유카리."

 

 유유코는 나름의 유머를 발휘했으나, 씁쓸한 표정을 감출 수는 없었다. 유카리는 잠깐 뒤를 돌아보았다. 유유코는 어차피 요우무가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지 이야기를 꺼냈다.

 

"아직도 잊지 못해. 요우키의 그 모습을. 누가 잊을 수 있겠어."

 

 유카리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둘은 과거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정말 오래전의 이야기였다.

 백옥루의 정원사 콘파쿠 요우키가 방랑무사 짓을 끝내고 백옥루의 주인 사이교우지 유유코를 보필한지도 수없이 많은 시간이 지난 뒤였다. 수많은 시간이 지나는 동안 그는 성심성의껏 유유코를 보필했다. 언제나 조용하게, 있는 듯 없는 듯 하면서도 유유코를 지켰다. 뿐만 아니라 그의 검술 실력은 환상향 제일이라고 해도 무리가 아니었다. 최소한 유유코를 제외한 사람들에게, 그는 가지치기보다는 검술로서 더 알려진 사람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품에 갓난아기를 안은 채로 백옥루에 나타났다. 그는 무표정하면서도 무언가 단호히 결심한 모습으로 유유코에게 절을 올렸다. 유유코는 요우키의 기묘한 행색에 반은 놀람으로, 반은 신기함으로 그를 대했다.

 

"소인 콘파쿠 요우키, 아가씨께 청할 것이 있습니다."

 

 유유코는 대답 대신 미소로 요우키를 바라보았다. 긍정의 뜻으로 알아들은 요우키는 아이를 보며 말했다.

 

"그 아이는 제가 허락 없이 다른 아가씨와 통혼하여 낳은 아이입니다. 아가씨를 모시는 몸으로서 허락도 없이 통혼한 죄를 범하였습니다. 저는 죽어 마땅한 존재이나, 이 아이를 생각해서라도 부디 저를 용서해주십시오." 

 

 유유코는 새근새근 조용히 자는 아기를 보았다. 은은한 청색이 도는 하얀 머리는 물론, 아기의 주위에 손가락처럼 조그마한 반령이 유유히 떠다니는 것이 영락없는 요우키의 아이였다처음부터 내치려는 생각 따위는 없었던 그녀는 밝게 웃어보였다.

 

"이 백옥루에 사람이 한 명 더 생긴다면 그거야 말로 좋은 일이라고 생각해. 그보다도, 칼날 같던 요우키의 마음을 가져간 아가씨는 누굴까? 궁금해지는걸."

 

 요우키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이 이름은 지었고?"

"예전에 섬겼던 분의 이름을 따서, 요우모리(妖盛)로 할까 합니다."

"콘파쿠 요우모리(魂魄妖盛). 좋은 이름인걸."

 

 유유코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요우키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는 다시 한 번 절하며 아이를 데리고 나갔다. 대체 누구와의 사이에서 얻은 자식일까, 유유코로서는 알 수 없었다.

 

 그렇게 한참이 지난 뒤, . 언제나 변함없이 백옥루 마루에 앉아 차를 마시며 변화하는 계절을 보던 그녀에게 새로운 볼거리가 생겼다. 백옥루의 마당은 전과 같지 않게 시끌시끌했고, 그 소음의 진원지에는 은은한 청색이 감도는 하얀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두 칼잡이의 검무가 보였다. 둘은 기합을 내지르며 진짜 같은 대련을 펼쳤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서로 죽이려 드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대련은 거칠었다.

 요우키는 계속 옆으로 움직이며 아들의 허점을 살폈다. 거친 숨을 내쉬며 지친 모습을 보이는 요우모리는 움직임이 계속 느려졌고, 아버지의 빠른 몸놀림에 눈을 따라가는 것도 버거웠다. 하지만 그는 요우키의 공격을 요리조리 칼을 움직이며 막아내었다. 그런 요우모리의 모습을 날카로운 눈초리로 노리던 요우키는 단 한 번의 틈을 노리고, 크게 기합을 내지르며 칼을 뻗었다. 요우키의 일격에 요우모리는 칼을 잃고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많이 늘었네, 요우모리군."

 

 낯선 여인의 목소리에 둘은 살기를 잃고 목소리의 주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유카리였다. 요우키는 칼을 치우고 아들을 일으켜 세우며 유카리를 향해 인사했다.

 

"오랜만입니다, 유카리 님. 아가씨를 뵈러 오셨는지요?"

", 그렇다고나 할까."

 

 유카리는 부채로 입을 가린 채 살짝 웃었다.

 

"온지는 한참 됐는데, 둘이 너무 대단하게 대련하느라 넋 놓고 보고 있었지."

"과찬이십니다."

"아니야. 정말 대단했어."

 

 유카리는 호호 웃더니 요우모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고는 부채를 접으며 요우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사흘 뒤에 새로운 하쿠레이의 무녀가 처음으로 제를 올릴 거야."

"그 아이가 벌써 그렇게 자랐습니까?"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결계를 수호하는 인간이 제를 올리는 날이니 우리가 참석해야겠군요. 언제나 그랬듯이."

"."

 

 유유코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유카리를 부르는 듯했다. 유유코 쪽을 한 번 돌아본 유카리는 적당히 인사하며 자리를 떴고, 그녀가 유유코를 향해 걷자 요우키는 아들을 데리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요우모리는 곁눈질로 유카리를 힐끔힐끔 보았다.

 

"저 분은 누구……."

"야쿠모 유카리. 요괴 현자이자 아가씨의 오랜 친구이시다. 혹시나 음흉한 생각을 품고 있다면 그런 생각은 그만 두는 게 좋아."

"제가 언제 그런 생각을 했다고 그래요, 아버지?"

 

 그렇게 떠들던 둘은 방문 앞에 도착했다. 요우키가 장지문을 열자마자 보인 것은 빛바랜 초록색 오오요로이(綠大鎧)였다. 갑옷 뒤에는 소창(素槍)과 활이 한 자루씩 걸려있었다. 요우키는 이 모든 것들이 마치 보이지 않는 것인 양 안으로 들어가서는 자리에 앉았다.

 

"조금 전에 들었느냐? 새로운 하쿠레이의 무녀가 처음 제를 올리는 날이 사흘 앞이라고."

", , 아버지. 무녀는 환상향의 결계 유지에 꼭 필요한 존재라고 하던데."

"그래. 환상향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기에 우리가 가서 축하해줘야 하는 거지.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본 무녀만 몇이더라. 지난번 무녀는……."

 

 하지만 요우모리는 아버지가 얘기를 하든지 말든지 상관은 안 하고, 오로지 요우키의 왼편 벽에 걸린 초록색 갑옷만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무녀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 요우키는 요우모리의 무신경한 대답과 홀린 듯한 시선을 보았다.

 

"저 갑옷이 그렇게 궁금하느냐?"

 

 아버지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린 요우모리는 아버지에게로 돌렸다. 그는 기죽은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 갑옷에 홀린 것처럼 고개를 돌렸다.

 

"볼 때마다 궁금했던 겁니다만, 대체 저 갑옷은 어디서 구하신 건가요? 환상향 어디에서도 저런 갑옷은 못 봤어요."

 

 요우모리의 말에 요우키는 고개를 돌려 갑옷을 보았다. 찰은 낡아 빛을 잃었고 이를 연결하는 실은 때가 잔뜩 껴서 거무스름했다. 투구는 커다란 황금색 장식이 붙어있지만, 마찬가지로 황금으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색이 바랬다. 먼지가 하얗게 앉은 것은 물론이었다. 요우키는 일어나 갑옷에 가까이 갔다. , 한 번 입김을 불자 갑옷에 붙어있던 먼지가 날아갔다.

 시선을 조금 더 뒤로 옮기자 벽에 창과 활이 걸려있었다. 창날은 낡았고 이는 빠져있었으며, 창대는 금방 부러질 것 같았고, 활은 한 번 당기기라도 했다간 활 몸과 시위가 동시에 부러져버릴 게 분명했다. 요우키는 손으로 갑옷을 천천히 쓸며 입을 열었다.

 

"이건 내가 환상향에 오기 전에 썼던 것들이야. 뭐라고 해야하나, 정말 오래된 것들이지. 환상향에 오기 전, 결계가 생기기 전에 나는 이 나라 곳곳을 떠돌아다니며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찾았다. 이 갑옷을 입고, 저 뒤에 있는 창과 활을 들고, 보이는 것들은 모조리 죽였지. 사람, 요괴, 오니, 누구든 가리지 않았어."

 

 낡은 갑옷은 그의 눈엔 인간, 동물, 요괴, 온갖 피를 뒤집어 쓴 자기 자신으로 보였다. 자기 의지라고는 없이 따르는 주인의 명령에 따라 손에 든 무기를, 주인이 가리키는 사람을 모조리 살해하는 그 모습. 그것은 무사라기보다는 하나의 괴물이었다. 요우키는 눈을 감고 그 끔찍한 과거를 생각했다.

 

"한때 나는 온 나라가 두 패로 갈려서 싸울 때 호랑나비 깃발을 든 전사들 사이에서 대나무 잎을 든 자들과 맞서 싸웠다. 결국 우리가 패해 흩어져버린 뒤로, 난 살아남기 위해 싸웠지……."

 

 요우키가 말꼬리를 흐리더니, 그대로 침묵했다. 그는 갑옷을 만지며 상념에 잠겼다. 창대를 쥔 채 자신에게 달려드는 졸병, 두려움에 질려 마구잡이로 칼을 휘두르는 무사, 무시무시한 소리를 내며 날아오는 화살, 상처투성이가 되어 피를 흘리면서 무릎 꿇은 자신…….

요우키의 무거운 침묵에 공기마저 무거워 숨쉬기조차 어려워졌으나, 요우모리는 과거 이야기를 하는 아버지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그냥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덕분에 나는 초록 오오요로이의 귀신이라는 새 이름을 가지고 온 나라를 떠돌았지. 증오를 증오로, 분노를 분노로 씻으며, 이 칼로 내 자신의 부끄러움을 덮으며 살았다그러던 중에 야쿠모 유카리를 만났지. 그리고 아가씨를 만났어. 그렇게 여기까지 왔고."

 

 요우키는 갑옷에서 손을 뗐다.

 

"여기에 정착하면서, 다시는 이걸 입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매일 이 갑옷을 보면서 과거의 내 자신을, 생각하기조차 싫은 그 괴물을 떠올리며 각오를 되새겼다. 때로는 보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워 이 갑옷을 버리려고 했지만, 그럴 때마다 나는 이를 수행이라고 생각하며 참았다."

 

 그는 몸을 돌려 아들을 바라보았다.

 

"아직도 이 갑옷이 멋있다고 느껴지느냐? 환상향은 갑옷이 필요 없는 곳이다. 그래야만 하는 곳이다. 너도 그 뜻을 이해하면 좋겠구나."

 

 요우모리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지만, 완전히 이해한 표정은 아닌 것 같았다. 요우키는 언젠가 아들이 이해해주리라고 믿으며 자리로 향했다. 그때 갑자기 장지문이 스르륵 하고 열렸다. 둘이 거의 동시에 열린 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유유코였다. 그녀는 두 사람에게 한 번 미소를 보여주고는 요우키를 돌아보았다.

 

"요우키. 유카리가 주문한 게 다 됐다고 해. 마침 잘 됐어. 찻잎이 다 떨어졌으니. 빨리 마을에 내려갔다 와."

 

 요우키는 대답하지 않고 일어나 유유코에게 묵례로 답했다. 그가 밖으로 나서려는데 유유코가 다시 말을 꺼냈다.

 

"요우모리도 같이 내려가렴. 요우키 혼자서 모두 들 수는 없잖니?"

", 아가씨."

 

 요우모리 역시 요우키와 똑같이 인사하며 일어섰다. 둘의 모습을 본 유유코는 웃으며 중얼거렸다.

 

"정말로 요우키의 아들이 맞구나."

"?"

"아무것도 아니야. , 빨리 가야지. 아버지가 기다리고 있잖니. 그리고 올 때 맛있는 거 사오고."

", ."

 

 두 사람이 갈 준비를 마치고 나가려는데, 유유코가 요우키를 불렀다.

 

, 아가씨.”

아까 말한 거 말이야.”

…….”

 

요우키는 유유코의 말에 당황했다.

 

들으셨습니까?”

처음부터 유카리한테서 들어서 별로 놀랍지는 않아. 그래도…….”

 

유유코는 걱정하는 눈빛이었다.

 

언제든지 힘들 때면……. 알았지? 종자를 챙기는 건 주인의 몫이니까.”

……황송함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아가씨.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콘파쿠 부자는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려는 때에 마을에 도착했다. 마을에는 점점 어둠이 드리워져갔지만, 등불 덕분에 오히려 낮보다 더 밝고 활기찼다. 이제 곧 열릴 새 무녀의 첫 제의에 마을 사람들도 같이 들뜬 것처럼 보였다. 둘이 안으로 들어가자 마을 사람들이 각자 요우키를 보고는 인사를 건넸다. 요우모리는 시선을 끄는 주변의 많은 것들을 보고 멈칫거렸으나 요우키는 모조리 무시하고 한 곳으로 향했다. 바로 대장간이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주인이 밝게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네요, 콘파쿠 공! 옆의 분은?"

"아들일세."

"아들? 아아! 콘파쿠 요우모리, 맞죠?"

 

 요우모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별안간 대장장이는 잠깐 기다리라며 공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뒤에서 한참을 덜그럭 소리를 내며 나오지 않자, 부자는 약속한 듯 동시에 서로 돌아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한참이 지난 뒤에야 대장장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들어가기 전엔 없었던 커다란 검을 손에 들고 나왔다. 대장장이가 손잡이 끝을 잡고 칼을 뽑자 칼날이 반짝였다.

 

"만들어달라고 했던 거, 이거 맞죠? 칼날이 한 세 척 정도 하는 노다치 말입니다."

", 그렇소."

 

 요우키가 대금을 치르자 대장장이는 칼날을 다시 집어넣고 요우키에게 주었다.

 

"정원사께서 갑자기 노다치는 왜? 전쟁이라도 하실 생각인가요?"

"전쟁은 무슨. 가지치기와의 전쟁이라면 전쟁이다만."

 

 요우키는 그렇게 말하며 힘을 주어 칼을 뽑았다. 농담을 하던 방금까지의 모습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위협적이었다. 이리저리 둘러보고, 한 번 돌려보며 무기를 확인한 요우키는 칼을 다시 칼집에 넣었다.

 

"정말로 고맙네. 나중에 또 내려오면 들리지. 가자."

 

 두 사람이 나가자 뒤에서 대장장이의 활기찬 인사가 들려왔다. 바깥에 나오자마자 요우키는 요우모리에게 노다치를 건네며 말했다.

 

"이건 널 위해 만든 거다."

"?"

 

 요우키가 준 노다치를 받아든 요우모리는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옻칠 된 칼집 안에서 잠든 무시무시한 전쟁용 검이 자신의 손에 들려 있었다. 그리고 이 괴수는 아버지의 한 마디에 바로 자신의 것이 되었다.

 

너는 나보다 키도 크고 힘도 강하니 노다치를 써도 좋을 듯해서 이걸로 만들었다. 물론, 내가 쓰는 타치도 언젠가 물려줄 터이니 수련을 게을리 하지 말거라.”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요우모리는 칼집을 살짝 밀어 약간 뽑아보았다.

 

"칼잡이들은 때때로 칼에 이름을 붙이기도 하지. 나는 이제 나이 먹고 칼에 이름 붙이는 건 남우세스러워 못 하겠다만……. 네가 직접 붙여 보거라."

 

 이름을 붙이라는 말에 요우모리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노다치를 내려다보았다. 한참을 내려다보던 그는 끄응 소리를 내며 머리를 최대한으로 굴렸다. 그러더니 아하, 칼집을 가볍게 두드리고는 다시 요우키를 바라보았다.

 

"저희는 백옥루를 지키는 사람들이니까, 다락 누()에 볼 관()을 써서 누관검이라고 하겠습니다."

"좋은 이름이구나."

 

 요우키는 미소 지으며 아들의 등에 노다치를 묶어주고는 어깨를 한 번 툭 건드렸다.

 

"어디보자, 이젠 떨어진 찻잎과 찬거리도 사고, 계속 두고 먹을 간식거리도 사야겠군. 그보다 쌀부터 사야할 텐데……."

 

 요우키가 중얼거리며 마을을 돌아다니는 동안, 요우모리는 등에 찬 노다치를 계속 만져댔다. 분명 손에 느껴지는 딱딱한 칼집의 감촉, 그러나 얼떨떨한 건 여전했다. 정말 갑작스럽게 생긴 자신만의 검, 그것도 다름 아닌 노다치. 말은 안 했지만, 이 칼을 줬다는 것은 분명 인정 받았다는 뜻이리라. 그렇게 생각하니 요우모리는 자신도 모르게 으헤헤 웃고 말았다. 소리를 들은 요우키가 뒤를 돌아보았다.

 

"뭐가 그리 좋으냐?"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버지."

그럼 으헤헤 같은 웃음소리는 내지 말거라. 이상하니까.”

 

 그렇게 걷는 사이, 옆에서 갑자기 요우키를 부르는 큰 소리가 들려왔다. 둘이 옆을 보니 까만 날개가 달린 카라스 텐구 둘이 손바닥만 한 술잔을 들고 대작 중이었다. 요우키와 눈이 마주친 그들은 이리 오라며 손짓했다. 요우키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는 아들을 돌아보았다.

 

혼자 가도 괜찮겠느냐?”

설마 텐구랑 술 대결을 하시려고요?”

 

요우키는 슬쩍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요우모리는 아버지가 내려놓은 짐을 들며 불평을 내뱉었지만, 요우키는 들은 척도 않았다.

 

아가씨를 위한 요깃거리는 내가 사 가지고 갈 테니 너는 그냥 가거라.”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내 걱정은 하지 마라, 요우모리.”

 

요우키는 끄덕이며 텐구들을 향해 걸어갔다. 마치 일기토를 준비하는 장수처럼, 그의 걸음은 위압적이었다. 고작 술 마시는 것에 불과한데. 그가 자리에 앉아 자신의 울퉁불퉁한 손바닥을 완전히 가리는 텐구 전용 술잔을 쥐고 그들의 시끄러운 연회에 녹아들어가자, 요우모리는 한숨을 한 번 길게 내쉬며 백옥루를 향해 걸어갔다.

무거운 짐을 가득 진 채 한참을 걷던 요우모리는, 마을 구석에 작은 불빛만 나는 건물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갑자기, 무언가가 요우모리의 옆구리를 들이받듯 부딪쳤다. 깜짝 놀란 요우모리가 짐을 놓치며 바닥에 넘어짐과 동시에, 옆에서 가냘픈 소녀의 비명과 흙바닥에 물건이 떨어지는 둔탁한 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요우모리가 정신을 차리고 옆을 보자, 갈색 머리의 소녀가 바닥에 널브러진 카메라 필름 사이에 쓰러져있었다. 요우모리는 당황하여 벌떡 일어나 소녀를 일으켰다.

 

죄송합니다! 괜찮으신가요?”

 

소녀는 여전히 정신이 없는지 헝겊인형마냥 그대로 요우모리에게 끌려 올라왔다. 그녀가 정신을 차리자, 다짜고짜 요우모리의 팔을 뿌리치고 카메라 필름을 정신없이 주웠다. 요우모리 역시 자기 짐은 내버려두고 그녀를 따라 필름을 주웠다. 소녀에게 필름을 건네주자 그녀는 한 아름 사진기용 필름을 안은 채 요우모리에게 인사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앞을 보고 걸었어야 했는데…….”

아닙니다. 제가 신경을 안 써서…….”

 

순간 침묵이 이어졌다. 길고 긴 정적이었다.

 

눈을 감은 채 찻잔을 기울이며 유유코의 말에 귀 기울이던 유카리는 친구의 이야기가 잠시 끊기자 옆을 돌아보았다, 유유코는 머리에 손가락을 짚으며 고민에 잠긴 모습이었다. 기억에 혼선이 온 듯했다.

 

뭐야,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 거 맞아, 유유코?”

요우키가 그렇게 말했던 것 같은데…….”

 

유유코는 고개를 잠깐 흔들더니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 뒤로 이틀간 요우모리는 매일같이 마을로 나갔지. 요우키는 아들이 뭘 하고 있는지 봐야겠다면서 그 아이를 몰래 쫓아다녔고, 돌아와서는 내게 요우모리가 뭘 하는지 말했어. 하라는 수련은 안 하고 여자 꽁무니나 쫓아다닌다면서 하소연을 했지만, 동시에 평범한 삶을 사는 것 같다고, 내심 좋아하던 게 기억나. 너도 기억할걸?”

아아, 기억난다. 나한테도 계속 그렇게 말하던데.”

 

유카리는 아들의 모습을 성토하는 요우키의 표정을 상상하자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유유코 역시 웃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래. 하지만 행복은 얼마 가지 않았어…….”

 

유유코의 말에 두 사람 모두 웃음기를 잃어버렸다.

 

 

-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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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즈베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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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쉬카르 연대기

황제의 탄생(Rise of the Emperor) 1부, 열쇠의 기사(Knight of the Key)

 

10.

 

 아침, 안지르 성채의 정문이 열리자 문 바깥에서 기다리던 대상들이 물밀듯 성채 안으로 들어왔다. 성채의 경비병들은 대상들과 그들이 끌고 오는 낙타와 말이 서로 얽히지 않게 그들을 통제하며 천천히 대상 숙소로 보냈다. 끝날 줄 모르는 난장판이 끝나고 성문이 조용해지자, 이번엔 유목민들이 나타났다. 안지르 성채 영주와의 계약으로 유목민들은 성채 주변을 돌아다니며 대상들을 지키거나, 도적 떼를 물리치기도 했다. 막 순찰을 끝낸 그들은 지금 성채 안으로 들어오려고 하고 있었다. 

 무장한 유목민들은 소매로 열심히 땀을 훔치며 성문 앞에 섰다. 그들은 하나같이 머리에 두꺼운 터번이나 케피예를 두르고 있었고, 모래바람에 맞서기 위해 눈만 내놓은 채 얼굴을 다 가렸다. 그런 유목민들을 보던 경비병의 눈에 이상한 모습이 보였다. 분명 터번을 쓴 유목민 중 하나인데, 눈이 인간처럼 파란 사람이 하나 있었다. 경비병이 그 사람을 빤히 쳐다보자 그가 얼굴을 드러냈다.  

 

"안녕하시오." 

 

 카를은 얼굴을 가리던 천을 목 아래로 끌어내렸다. 젊은 카쉬팀 유목민들처럼 짙게 기른 수염, 햇빛에 그은 얼굴, 모든 것이 옆에 있는 유목민과 다를 바 없었지만, 오직 하나, 사파이어 같은 새파란 눈이 그가 카쉬팀이 아님을 증명했다. 경비병이 신기한 듯 계속 그를 바라보자 카를이 먼저 말을 걸었다. 

 

"무슨 문제라도?" 

"아, 아닙니다." 

 

 경비병이 손짓하자 안에 있던 다른 병사들이 나와 그들을 유도하며 손짓했다. 그러자 유목민들은 천천히 말을 몰며 안으로 들어섰다. 그때 옆에 있던 유목민 청년 말릭이 카를에게 말했다. 

 

"저 녀석 최근에 배치된 녀석이야. 너에 대해선 들어본 적이 없나 봐." 

"이봐, 말릭. 너 내 입장 알잖아. 덜 알려지는 게 낫지." 

 

 카를의 말에 말릭은 웃으면서 손을 내저었고, 카를 역시 미소를 지었다. 웃다 뒤처지는 것을 발견한 둘은 고삐를 쥐고 재빨리 다른 사람들을 따라갔다. 유목민들은 들어오자마자 말에서 내리고 병영으로 향했다. 그들은 병기창에 창, 칼, 갑옷 등, 성채에서 지급 받은 무장을 내려놓았다. 무장을 내려놓자마자 유목민들은 웃으며 병영 바깥으로 나갔다. 카를 역시 말릭과 함께 대화를 나누며 무기를 내려놓고, 옷 위에 걸친 사슬 갑옷을 벗어 내려놓았다. 정리가 끝나자 말릭은 카를과 어깨동무를 하며 다가왔다. 

 

"할 거 없으면 우리 가족이랑 같이 아침 먹지 않을래?" 

"그럴까?" 

 

 그렇게 말하며 나오는 두 사람의 눈에 라일라가 보였다. 그녀를 보자 말릭은 웃으며 카를의 등을 두드렸다. 

 

"참 좋겠네, 넌."

"뭘 생각하는 건지 모르겠다만, 네가 생각하는 거와는 달라." 

"하하. 난 간다." 

 

 말릭은 웃으면서 성문 바깥으로 뛰어갔다. 그가 카를의 시야에서 멀어지자 이번엔 라일라가 그의 시선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카를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오늘은 어땠어?" 

"뭐. 평소대로였어. 밤이라 도적 떼는 안 보이고, 모래바람 때문에 눈은 따갑고." 

"많이 피곤하겠네. 집에 가자." 


 라 일라는 미소 지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동쪽 하늘에 막 뜬 태양은 하늘 높은 곳을 향해 가고 있었지만, 밤새 사막을 돌아다닌 카를에겐 잘 시간이었다. 그는 기지개를 켜며 마구간으로 향했다. 이렇게 말을 타고 이스카르로 돌아가, 자기 방 양탄자 위에 드러누워 바로 잠이 들 것이었다. 지금까지 그랬듯이. 그런 달콤한 아침잠을 생각하며 카를은 말고삐를 이끌고 라일라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성문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카를이 하품을 하며 그녀의 시선을 따라가자, 하얀 더블렛을 입고 모자를 쓴 인간 하나가 땀을 뻘뻘 흘리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를 무시하고 지나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당황한 얼굴이었다. 

 

"여행자인가 보네."

 

 카를은 무심하게 말했다.  

 

"안 도와줄 거야? 같은 인간이잖아."

"……." 

 

 라일라의 말에 카를은 고삐를 라일라에게 건네주곤 인간에게 다가갔다. 인기척에 상대가 놀라 카를쪽을 바라보았다. 그는 카를의 모습을 위아래로 번갈아 보며 살폈다. 얼굴만 드러낸 새까만 터번, 다른 카쉬팀 유목민과 다를 바 없는 양털 옷, 그리고 짙은 수염까지, 전형적인 카쉬팀과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남자의 눈은 그런 것에 멈추지 않고 한 곳에만 정지했다. 그는 놀란 얼굴로 카를의 눈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파란 눈……." 

 

 너무 오랜만에 듣는 언어라 카를은 그 말이 낯설게 느껴졌다. 하지만 상대가 내뱉은 말은 분명히 레벤발트어였다. 

 

"인간?" 

 

 남자가 또다시 레벤발트어로 물었고, 카를은 고향 말에 정신이 멍해졌다. 남자의 얼굴이 밝아질수록 카를의 얼굴은 당황한 기색이 짙어져 갔다. 남자는 다짜고짜 손을 잡았다. 

 

"여기서 같은 인간을 보게 될 줄이야! 이거 참 행운이군요!" 

"어……." 

 

 카를은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몇 년간 쓰지 않았던 말을 갑자기 하려니 수많은 말들이 떠올랐지만, 정작 기본적인 것들은 생각나지 않았고, 머리는 점점 복잡해져 갔다. 상대가 반가움에 카를의 손을 꽉 잡은 채 신나게 떠들고 있었음에도 카를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가 아무말도 못하고 있자 남자는 말을 멈추었다. 

 

"음, 저기……." 

 

 그가 말이 없자 남자는 자신이 귀찮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웃음을 거두고 카를의 손을 놓았다. 그가 입을 열어 말을 하려는데, 카를은 손가락을 세워 말을 막고는 잠깐 관자놀이에 손가락을 몇 번 두드리더니, 그제야 레벤발트어로 말을 꺼냈다.

 

"반, 반갑습니다." 

 

 카를이 말을 하기 시작하자 남자의 얼굴이 다시 밝아졌다.

 

"너무, 너무 오래 말을 안 쓰다 보니, 음, 그러니까, 음……." 

"까먹었다고요?" 

"네." 

 

 카를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이제는 다 기억이 돌아왔습니다. 저는 카를이라고 합니다." 

"저는 디트리히 부르가르트입니다. 오펜슈타인에서 왔죠." 

 

 오펜슈타인. 수년 만에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고향의 이름이 이방인의 입에서 튀어나오자 카를은 뒤통수를 망치로 크게 얻어맞은 듯했다. 수없이 많은 추억, 그리고 불타는 저택, 죽어가는 아버지, 떠나던 날의 오펜슈타인도 동시에 카를의 머리에 떠올랐다. 그것을 생각하니 카를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왈칵 쏟을 것 같았다. 

 

"저도, 저도 오펜슈타인에서 태어났습니다." 

 

 카를은 목이 메어 떨면서 말했다. 그 점을 알 리가 없는 디트리히는 웃으면서 반가운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이렇게 반가울 수가! 정말 기적이군요. 이런 오지에 같은 인간이, 그것도 고향까지 같은 사람이 있다니!"

 

 그렇게 디트리히가 카를의 손을 마구 잡고 흔들던 중 뒤에서 듣고 있던 라일라가 다가왔다. 말 고삐를 쥔 그녀는 작게 미소 지으며 카를에게 말했다. 

 

"나는 먼저 가볼 게. 괜히 방해하면 안 되니까."

"으, 응. 먼저 가." 

 

 그녀는 카를의 말 위에 자신이 올라탔다. 카를은 그녀에게 손을 흔들었고 라일라 역시 똑같이 손을 흔들어 답하고 성문으로 향했다. 멀어져가는 그녀를 보던 디트리히가 말했다. 

 

"아름다운 분이시네요. 혹시 아내분?" 

"그런 말 많이 듣긴 하는데, 그런 사이는 아닙니다. 뭐랄까. 누이에 가까우려나……." 

 

 카를은 말끝을 흐렸다. 디트리히는 고개가 돌아갈 정도로 멀어져가는 라일라를 바라보다가 다시 카를을 향했다. 

 

"그래, 그보다 오펜슈타인 사람이 이런 곳에서 왜 카쉬팀들처럼 차려입고 계시는지 물어봐도 괜찮겠습니까?" 

"글쎄……." 

 

 카를은 또다시 말을 흐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의 반응에 디트리히는 당황해서는 손을 흔들었다. 

 

"굳이 말씀해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렇습니까? 다행이군요. 제 얘기는 이런 데서 말하기엔 너무 길어서 지루하거든요. 그런데 디트리히 씨는 어쩌다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디트리히는 카를과는 달리 시원시원하게 대답했다. 

 

"저는 여행자입니다. 그 옛날 인간이 이곳에 거점을 세울 때 같이 세워진 성지를 찾아가는 중이었죠. 원래는 다른 여행자들이랑 같이 다녔는데 사막에서 낙오돼서, 그러니까, 그렇게 사막에서 죽는 줄 알았는데 대상들과 우연히 만나서 살아났어요. 어휴, 정말 그때는 죽는 줄 알았다니까요. 아, 그리고……" 

 

 그는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계속 말을 이었고, 카를이 물어보지도 않은 것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어느 정도 사는 상인 집안의 삼남이라는 자기 출신, 어렸을 때의 일들, 가업을 이을 정도로 수완 좋은 형들과는 다른 자신에 대한 한탄 등. 카를은 한참을 듣기만 하다가 디트리히의 수다가 잠잠해지자 헛기침을 했다. 디트리히는 카를의 반응에 멋쩍은 듯 머리를 긁었다. 

 

"여기는 처음일 테니 같이 돌아다니며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정말요?" 

"싫으시다면야……." 

"아니, 아니 그게 아닙니다. 그렇게 해주신다면야 정말 고맙죠!" 

 

 그의 말에 카를은 따라오라고 하며 뒤돌았다. 둘이 적당히 이야기를 나누며 걷다, 완전무장한 카쉬팀 하나와 마주쳤다. 경번갑과 사슬이 달린 치차크 투구를 쓴 그는 카를을 보고는 험악한 인상을 지었다. 한 걸음, 두 걸음, 그가 다가올 때마다 카를의 표정도 험악해지기는 마찬가지였다. 

 

"안녕. 반갑군, 이스마일." 

 

 카를은 마음에도 없는 말로 인사를 건넸다. 그를 볼 때마다 목덜미가 아파져 오는 것 같았다. 이스마일은 대답도 안 하고, 왼손을 허리에 찬 칼 손잡이 위에 얹은 채 손가락을 타닥 두드리며 카를과 디트리히를 돌아보았다. 험악한 분위기에 디트리히는 식은땀을 흘렸고, 이스마일의 반응에 지친 카를은 한숨을 쉬었다.

 

"빨리 지나가시지." 

 

 이스마일은 금방이라도 칼을 뽑아 두 사람을 베려고 할 것 같은 표정이었지만, 순순히 칼에서 손을 떼었다. 그리고는 두 사람을 동시에 손으로 밀치며 병영으로 향했다. 카를은 이스마일이 밀치고 지나간 어깨를 손으로 한 번 쓸어내렸다. 

 

"저 사람은 누구죠?" 

"라일라의 동생입니다." 

"그 아름다운 분의 동생이 저런 개차반이라니." 


 디트리히의 말에 카를은 피식 웃었다. 

 

"저놈은 신경 쓰지 말고 계속 가죠." 

 

 카를이 가장 먼저 데려간 곳은 대상들이 들어간 숙소였다. 냄새 나는 낙타들은 다소곳이 앉아있고, 상인들은 건물 안을 들락날락하거나, 낙타 옆에서 불을 피우거나 하며 시간을 보냈다. 둘은 숙소 안으로 들어가 한 바퀴 돌아보았다. 카를이 뒤도 안 돌아보고 숙소의 역사 따위를 얘기하는 동안, 디트리히는 남의 집에 놀러 온 소년처럼 주변을 계속 두리번거렸다. 건물도 낙타도 모두 신기하다. 디트리히는 그런 평을 내렸다.  

 그다음은 높은 내성 앞. 일단은 영주가 기거하는 거처지만, 사치스러운 영주는 아무것도 없어 공허한 안지르 성채에는 거의 오지 않는다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아무도 없는 내성의 문 앞에는 그러나 중무장한 경비병이 서 있어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대신 카를은 이 성채의 역사를 간략히 얘기해주었다.  

 

"천 년 전 하신들이 몰락할 때 인간이 이곳을 침공했다는 역사는 아시죠?"

"질리도록 들었던 얘긴걸요. 국교회 경전에도 쓰여 있고." 

"그 뒤에 '마흐디', 그러니까 구원자 자카리야가 나타나 키르타트를 수복하고 인간을 몰아냈다는 것도." 

 

 디트리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키르타트 수복 이후 서쪽으로 가다가 이곳을 발견하고 군영을 세웠죠. 몇몇 귀족들이 여기 남아 요새로 쓰기 시작한 게 지금의 여기고요."

"오. 그런 역사가 있었군요." 

 

 그는 고장 난 목각 인형처럼 고개를 계속 끄덕였다. 그 뒤로도 둘은 계속해서 성채를 돌아다녔다. 다른 도시에서는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보며 디트리히는 신기해하고, 좋아했다. 물론 이스마일처럼 둘을 좋아하지 않는 카쉬팀들도 종종 있었지만, 다들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돌아다니고 얘기를 하니, 벌써 해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둘은 병영 앞으로 다시 돌아왔다. 디트리히는 다시 카를과 악수했다. 

 

"오늘은 정말 신세 크게 졌습니다." 

"별거 아니죠. 저도 오랜만에 고향 사람을 만나서 기뻤습니다. 몇 년 만인지 원. 아아, 맞다. 잠깐 여기서 기다리세요." 

 

 카를은 병영 안으로 뛰어들어가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손에 새까만 유리병 하나를 들고 나타났다. 그는 허리에 찬 작은 칼을 꺼내 병의 뚜껑을 막고 있던 마개를 따고 냄새를 맡아보았다. 그리고 한 번 마셔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아직 괜찮네." 


 그가 디트리히에게 병을 건네자, 디트리히는 받아들고는 크게 들이켰다. 디트리히의 목젖은 멀리서 봐도 보일 정도로 크게 움직였다. 그는 소리를 내며 입에서 병을 뗐다. 

 

"아, 좋다. 이 포도주를 대체 어떻게 구했어요?" 

"몇 달 전에 도적을 잡았더니 한 병 가지고 있더군요. 그래서 몰래 하나 감춰놨죠." 

 

 둘은 적당히 자리에 앉아서는 한 번씩 병을 돌리며 마셨다. 

 

"이런 오지에서 고향 술까지 마시다니, 오늘은 창조주께서 축복을 내린 것 같네요." 

 

 디트리히는 술기운에 얼굴이 새빨개졌다. 카를이 술을 마시고 그에게 건네자, 그는 또다시 병을 크게 들이켠 뒤 그걸 건네주며 말했다. 

 

"아, 맞다. 술을 마시니 생각이 났는데. 몇 주 전에 트라니스 항구에 내려서 돌아다니다가 험상궂은 레벤발트 놈들에게 걸려서 곤욕을 치렀죠. 머리 빡빡 깎고 얼굴이 상처투성인 놈들이 허리에 칼까지 찬 채 저한테 다가오는 게 아니겠습니까? 스무 명 정도였죠. 그 중 한 놈이 딱딱한 레벤발트 어투로 말했죠. '당신 오펜슈타인에서 왔소?' 입에서 술 냄새가 확 나더라고요. 어우, 저 같은 약골이 뭐 어떡하겠습니까? 전 대답도 못 하고 그대로 얼어붙었죠." 

"완전무장한 레벤발트 사람들이라고요?" 

"네! 그렇다니까요! 있잖아요, 우리 오펜슈타인 사람들은 같은 말을 써도 좀 더, 뭐랄까, 부드럽고 상냥한 어투인데, 재미없는 레벤발트 놈들은 말투까지 딱딱하고. 근데 그놈들이 다짜고짜 제 멱살을 잡았죠. 허! 그때 전 죽는 줄 알았다니까요. 것도 모르는 이종족이 아니라 같은 인간한테."

 

 디트리히는 다시 카를에게서 술병을 받아서 들이켰다. 술은 거의 다 떨어졌는지 찰랑거리는 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았다. 그는 몇 모금 안 남은 병을 카를에게 돌려주며 말을 이었다. 

 

"근데 놈들은 제 얼굴을 보고는 그냥 가버렸죠. 완전 정신병자들이 따로 없었다니까요." 

 

 디트리히의 말을 듣던 카를은 어두운 표정으로 병에 남은 마지막 방울을 털어냈다. 카를은 병을 한 번 흔들고는 바닥에 그냥 던져버렸다. 그리고 얼굴을 손으로 쓸며 고개를 숙였다. 

 

"저기……. 무슨 일 있으십니까?" 

"……."

 

 카를은 대답도 없이 얼굴을 쓸다가 기어들어갈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디트리히는 카를의 대답이 거짓말이라는 것 정도는 충분히 알 수 있었지만, 더 이상 묻지 않기로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술기운에 디트리히는 살짝 비틀거렸다. 카를이 일어나며 괜찮냐고 물었고, 디트리히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오늘 정말 고마웠습니다. 게다가 몇 달 만에 술까지 마시다니. 이거 사례를 안 하면 제가 미안해서라도 여길 못 떠나겠습니다." 

"사례라니요. 동족끼리 무슨……." 

"아이고, 그런 소리 마세요." 

 

 그는 땅에 내려놓았던 자기 짐을 주섬주섬 풀더니, 입으로 무어라 중얼거리며 한참을 헤집었다. 그러다 아하, 소리를 내며 구석에서 새까만 모자를 하나 꺼냈다. 장식이라고는 거의 없는 샤프롱(Chaperon), 서부의 인간이라면 위아래를 가리지 않고 쓰는 모자였다. 디트리히는 모자를 두어 번 허공에 흔들어 먼지를 털어냈다.  

 

"선물이랍시고 주는 게 이런 식이긴 합니다만……." 

 

 디트리히는 모자를 카를에게 건넸다. 

 

"이건 왜……." 

 

 카를이 모자를 받아들고 살펴보자, 디트리히는 헛기침을 한 번 하고는 입을 열었다. 

 

"드릴만 한 게 그것밖에 없더라고요." 

 

 그는 머리를 긁었다.

 

"그리고 무슨 일 때문에 고향을 떠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절대 고향을 잊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우리 고향에서 흔히 보이는 물건을 드리는 게 낫다고,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

 

 고향을 잊지 않았으면. 그의 말은 카를의 가슴에 화살처럼 날아와 꽂혔다. 마치 얼어붙은 것처럼, 그는 아무 말도 못 하고 모자만 만지작거렸다.  

 

"세 번이나 말하지만, 오늘 정말 고마웠습니다."

 

 카를은 대답도 못 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디트리히가 대상 숙소로 떠난 뒤에도 카를은 계속 모자만 바라보았다. 해가 완전히 저물고 성채 곳곳에 설치된 횃불이 켜질 때에야 카를은 비틀거리며 성채 바깥으로 나갔다. 바깥으로 나가니 라일라가 있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살피던 그녀는 카를을 보자 미소 지으며 그에게 다가왔다. 

 

"혹시나 해서 왔어. 집에 가자." 

 

 그녀의 말에도 카를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손에 쥔 모자를 꽉 쥐기만 할 뿐이었다. 

 

"무슨 일 있어?" 

"아니……. 아무것도……." 

 

 카를은 복받치는 감정을 주체 못 하고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그의 눈물에 놀란 라일라는 왜 그러느냐고 물었지만, 카를은 소리 없이 눈물만 흘리며, 그대로 주저앉아버렸다. 뒤늦게 그의 손에 들린 모자를 본 라일라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다만 숨죽여 우는 카를을 다독이며 위로할 뿐이었다.  

 이후로 며칠 간, 카를은 소리 없이 눈물 흘리던 그 날이 마치 없던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행동했다. 그는 평소대로 웃었고, 평소대로 유목민들과 같이 순찰을 하였다. 하지만 그날 이전의 카를과 이후의 카를은 분명 달랐다. 때때로 북쪽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거나, 누가 말을 걸어도 생각에 잠겨 대답하지 않기를 일쑤였다. 라일라도, 아이샤와 아르와도, 말릭도, 심지어 이스마일조차 그의 변화를 느낄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카를이 라일라를 찾아왔다. 말없이 자리에 앉은 그의 표정은 어두웠고, 그의 눈은 라일라를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그의 이상한 모습을 라일라가 모를 리 없었지만, 그녀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평범하게 행동했다. 

 

"커피가 없네. 다른 거라도 가져와야겠다."
"……라일라." 

 

 한참을 말없이 앉아 있던 카를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응?" 

"나……." 

 

 힘겹게 말을 꺼낸 그는 그러나 다시 말문이 막힌 듯 조용해졌다. 라일라는 부엌으로 가는 대신 다시 카를 앞으로 왔다.  

 

"말하기가 어려우면 지금 당장 말하지 않아도 돼." 

 

 라일라는 카를을 위로하듯 그의 얼굴을 손으로 슥 어루만졌다. 카를의 어두운 표정이 더더욱 어둡게 변해갔다. 그녀가 자리에 일어서려고 하자, 카를이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녀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카를은 결심한 듯, 눈을 감으며 깊게 심호흡하고는 다시 눈을 떴다. 

 

"고향으로, 오펜슈타인으로 돌아갈 거야." 

 "……."

 

 라일라는 카를의 말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뭐라고 대답할 겨를도 없이, 카를의 말이 폭풍치듯 이어졌다.  

 

"같이 가 달라고는 하지 않을게. 여기도 좋은 곳이지만, 나는 가야 할 곳이 있어. 하지만 너는 여기가 바로 그곳이니까." 

 

 카를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갑작스럽게 말해서 미안해. 잘 자." 

 

 그가 나가려고 하자, 이번엔 라일라가 카를의 팔을 잡았다.  

 

"정말, 정말 너무하네, 카를. 자기 할 말만 하고 가는 거야?" 

 

 라일라는 카를을 자리에 앉혔다.  

 

"맞아. 여기는 내 고향이야. 내 집이고. 하지만 펠리페 님은 나한테 너를 부탁한다고 하셨어. 나는 약속을 저버리지 않아. 사랑하고 존경했던 사람과 한 약속은 더더욱."

 

 그녀는 카를의 손을 꽉 붙잡았다.  

 

"한 가지만 약속해줘, 카를. 혼자서 떠나지 않을 거라고." 

 

 하지만 카를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야. 더 이상 네게 의지할 수 없어. 이 싸움에서 이긴다고 네게 돌아가는 것도 없어. 그리고 실패한다면 우린 죽을 거야. 네가 죽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 내가 죽는 모습을 네게 보여주고 싶지도 않고. 너를 데려가는 건 생떼 부리는 어린애의 심정과 다를 바 없어." 

"그렇게 생각하지 마, 카를." 

  

 라일라는 카를의 얼굴을 자신의 손으로 감싸고, 고개도 못 드는 카를의 시선을 자신과 맞췄다. 카를은 어떻게든 시선을 피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하자 얼굴을 붉혔다. 라일라의 심연처럼 새까만 눈동자에 카를은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라일라는 카를을 타이르듯, 부드럽게 속삭였다. 

 

"강해진다는 게 꼭 혼자가 된다는 건 아니잖아."

 

 라일라는 작게 미소 지으며, 그의 뺨과 턱에 난 수염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곧 잔치가 있으니까. 그때까지는 기다리자." 

 

 카를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라일라는 카를의 이마에 살짝 입맞춤하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를은 말없이 이마에 느껴지는 그녀의 기운을 느꼈다. 

 이 튿날 카를이 바깥으로 나갔을 때, 웅성거리는 소리에 마을 입구 쪽을 돌아보니 마을 사람들 거의 전부가 그쪽에 몰려있었다. 그쪽으로 가보니 궁정에서 마을로 돌아온 아이유브가 보였다. 궁정에서의 자기 위치를 말해주듯 수수하고 장식이라고는 없는 노란색 카프탄 차림의 그는 그러나 마을 최고의 유명인사나 다름없었다. 늙은 카쉬팀들은 저마다 아이유브에게 한마디씩 했다. 하지만 아이유브는 그런 노인들의 말이 불편한 듯 당황스러운 얼굴을 하며 억지웃음을 짓고 있었다. 마침 카를이 나타나자 그는 부리나케 카를에게 말을 걸었다 

 

"카를! 오랜만이야. 잘 지냈나?" 

"네. 물론입니다." 

 

 아이유브는 카를의 어깨를 가볍게 한 번 손으로 치면서 그의 옆으로 붙어 사람의 벽에서 빠져나왔다. 둘이 마을 안으로 들어서자 입구를 막아선 마을 사람들은 각자 흩어졌다. 아이유브는 고개를 뒤로 돌려 사람들이 흩어지는 것을 보자 한숨을 내쉬었다.   

 

"난 그냥 하급 서기관 중 하나일 뿐인데 말이야. 누가 보면 내가 재상이라도 되는 줄 알겠어. 너무 부담스럽다고." 

"그만큼 형님께서 자랑스럽다는 게 아닐까요?" 

"하하. 생각보다 내가 대단하지 않다는 걸 알면 다들 실망하겠네. 그보다 이제 슬슬 잔칫날인데, 준비는 잘 돼가고?" 

"글쎄요……."  

 

 카를은 말을 끌었다.   

 

"요즘엔 이틀마다 순찰을 해서요. 잔치 준비가 어떤지는 모르겠어요."   

"너도 바쁘게 사네. 라일라는?"   

"집에 있죠."   

 

 그렇게 말을 나누다 보니 둘은 집에 도착했고, 아이유브는 집 안으로 들어갔다. 집 안에서 밝은 아이유브와 라일라, 그리고 부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를이 가족이 단란하게 나누는 얘기를 들을수록, 그의 가슴속은 먹먹해져 갔다.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 웃으며 다시 아버지와 얘기를 나눌 수 있다면. 소용없는 생각을 하던 그는 이내 뒤돌아 마구간으로 향했다.  

 카를이 성채에 도착하자 말릭을 비롯한 유목민 순찰자들이 각자 무장을 챙기고 있었다. 말릭은 카를을 보자마자 왜 이리 늦었냐며 핀잔을 주고는 짧은 창을 던졌다. 카를은 가볍게 잡아채고는 창대를 어깨에 얹었다. 그리고 바닥에 놓인 원형의 고리버들 방패를 팔에 끼웠다. 준비가 끝나자 유목민들은 각자 능숙하게 말 위에 올라탔다.  

 

"그러고 보니 이제 곧 이스카르에서 마을 잔치를 한다지 아마?"

 

 유목민 하나가 중얼거렸다.   

 

"그럼 빨리 순찰 끝내고 잔치나 즐기자고." 

 

 누군가 그렇게 말하자 말릭이 부정적으로 대답했다. 

 

"오늘은 멀리 나가야 해서 빨리 돌아갈 수는 없을걸." 

 

 그리고 말릭은 박차를 가하며 화살처럼 성문 바깥을 향해 튀어 나갔고, 다른 이들도 그를 따라 나섰다. 여덟 명은 흙먼지를 일으키며, 성채 주변을 빙글빙글 돌면서 그 범위를 넓혀갔다. 그렇게 쭉 성채 주변을 수색하며, 여덟은 여느 때처럼 행동했다.  

 날이 저물고 성채의 망루 위에 불이 피어오르자, 순찰대는 잠시 멈춰 섰다. 다들 말에서 내려 몸을 풀고 목을 축이는 동안, 말릭은 횃불을 들고 불을 붙였다. 다른 사람들도 횃불을 들고 말릭의 횃불에 붙은 불을 자신의 것으로 옮겼다. 주변이 밝아지자 그들은 다시 움직일 채비를 하고 말 위에 올라탔다. 

 그때였다. 멀리서 모래바람을 일으키며 다섯 남짓한 남자들이 다가왔다. 그들은 모두 서부 인간 용병들처럼 철편을 누비솜옷 안에 끼워 고정한 브리건딘이나 잭 오브 플레이트로 보이는 것들을 입었고, 허리에는 칼과 휠락 피스톨을 한 자루씩 차고 있었다. 그들을 보자 카를의 머릿속에 디트리히가 했던 말이 맴돌았다. 그는 긴장 끝에 오른손에 쥔 창이 부서지도록 꽉 쥐며 용병들을 노려보았다. 

 

"카를 폰 오펜슈타인이라는 사람을 찾고 있소. 우리와 같은 인간이지." 

 

 험악한 인상의 용병 하나가 나서서 말했다. 그의 얼굴은 상처투성이였고, 머리는 새하얀 두피가 보일 정도로 바짝 깎았다. 딱딱하고 공격적인 말투는 그가 레벤발트 출신이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그 말을 듣자 말릭과 유목민들은 서로 얘기하는 척하면서 카를을 가렸다. 아무도 대답을 안 하자 그는 눈을 찡그리며 여덟 명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모두 터번을 쓴 채 눈만 내놓은 유목민들은 전혀 구별되지 않았다. 

 

"그놈을 아는지 모르는지만 말해." 

 

 그의 말에 말릭이 콧방귀를 끼며 대답했다. 

 

"우리가 왜 인간 따위의 말을 들어줘야 하지? 다짜고짜 다가와서는 부탁해도 모자랄 판에 그런 식으로 나오면 도와줄 마음이 사라지지. 안 그래?" 

"……." 

 

 용병의 인상이 더더욱 험악해지기 시작했다. 그때, 다른 용병이 험악한 얼굴의 용병에게 다가와 무어라 귓속말을 중얼거렸다. 그러자 그 용병은 씩 웃었다. 

 

"어이, 거기 파란 눈. 얼굴을 보여라." 

 

 그 말에 카를은 움찔했다. 카를이 못 들은 척 반응하지 않자 용병들은 말을 하는 대신, 품에서 피스톨을 꺼내 들었다. 동시에 말릭이 반사적으로 외쳤다. 

 

"고개 숙여!" 

 

 말릭이 팔을 뻗어 카를의 몸을 뒤로 미는 순간, 다섯 명의 용병들이 동시에 카를을 향해 피스톨을 쏘았다. 순식간에 엄청난 포연과 폭음이 아무것도 없이 빈 사막을 가득 메웠다. 총알 하나가 말릭의 팔을 뚫고 지나갔고, 말릭이 비명을 지르며 팔을 부여잡았다. 나머지 유목민들은 각자 박차를 가하며 사막으로 흩어졌고, 카를은 말릭을 두고 일단 뒤로 도망쳤다. 용병들은 각자 칼을 뽑아들며 말릭은 무시하고 카를을 쫓아가기 시작했다. 

 

"저 파란 눈을 잡아!" 

 

 용병들 이 레벤발트 말로 외쳤다. 사방으로 흩어진 유목민들이 다시 돌아와 각자 활이나 투창을 들고 용병들의 주위를 돌며 마구 쏘아댔지만, 천 쪼가리나 겨우 입은 도적 떼와는 다르게 용병들의 몸에 화살이 박혀도 그들은 무심하게 그것을 부러트릴 뿐이었다. 그걸 보던 말릭이 소리쳤다.

 

"말을 쏴!" 

 

 외침을 들은 여섯 명은 활과 투창을 아래로 내려서 조준하기 시작했다. 크면서도 날랜 인간들의 군마는 그러나 용병들 덕분인지 화살과 투창을 요리조리 잘 피하며 카를을 계속 쫓아갔다. 카를은 빠르게 왼쪽으로 말머리를 돌려 방향을 바꿨다. 용병들이 잠시 주춤하는 사이 나머지 여섯이 빠르게 그들의 뒤로 돌아오며 투창을 던지고, 활을 쏘아댔다. 여섯의 사격 끝에 한 사람의 옆구리에 투창이 깊게 박혀 쓰러지고, 나머지는 그대로 낙마했다. 한 명이 쓰러진 자기 말에 깔려 정신을 잃고, 나머지 셋은 재빨리 일어나 권총을 꺼내 들고 장전했다. 여섯이 용병들의 주위를 원 그리듯 돌며 계속 괴롭혔지만, 투창은 빗나가고 화살은 갑옷에 박혀서 아무런 피해도 주지 못했다.  

 투창을 모조리 던진 두 순찰대원은 돌아오는 카를을 향해 다가왔다. 셋은 서로 한 번 보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각자 창과 칼을 쥐고 셋에게 달려들었다. 카를은 펠리페에게 배운 대로 창을 옆구리에 끼고 돌격했고, 나머지는 칼을 높게 쳐들었다. 셋이 용병들을 향해 내달리자, 이미 장전을 마친 험상궂은 용병이 카를을 향해 셋을 향해 총을 겨누었다. 그가 방아쇠를 당기자 바퀴가 돌아가며 불꽃을 뿜어내고, 화약에 불을 붙였다. 그와 동시에, 카를의 창끝이 용병에게 닿았다.  

 콰직 소리와 함께 창이 박살 나고, 총성이 하늘을 한 번 더 갈랐다. 상처투성이 용병은 가슴에 창끝이 박힌 채 나가떨어졌고, 나머지 둘 역시 비슷한 결말을 맞이했다. 카를은 말에서 내려 가슴에 창대가 박힌 용병에게 다가갔다. 그는 입에서 피를 토하면서 카를을 노려보았다.  

 

"실패……했군." 

 

 

 그는 피를 토하면서도 웃기 시작했다. 

 

"그래. 네놈은 실패했어. 그런데 왜 웃는 거냐?" 

 

 정신이 흐려지는 듯 용병의 눈이 감기기 시작했지만, 카를의 말을 들은 그는 계속 기침하고, 숨 넘어가는 소리를 내면서 카를을 비웃었다. 

 

"빨리 네 집으로……가보라고……." 

 

 그리고 그는 눈을 감았다. 무슨 소리냐고 카를이 멱살을 잡고 흔들었지만, 반응이라고는 없었다. 그때 누군가가 카를에게 소리쳤다. 

 

"저기를 봐! 마을이!" 

 

 카를이 고개를 들어 이스카르쪽을 향하자, 그는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새빨간 불꽃이 들불처럼 마구 타오르는 게 보였다. 카를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당황하기는 마찬가지라, 다들 멍하니 불타는 마을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자 말릭이 소리쳤다. 

 

"다들 뭐하는 거야! 빨리 마을로 가! 빨리!" 

"말릭 넌?" 

"내가 성채로 데려갈게. 나머지는 가봐." 

 

 유목민 하나가 말릭을 부축하고 말에 태우는 동안, 나머지는 마을을 향해 달렸다. 마을에 가까워질수록 열기도 더더욱 가까워졌다. 다섯이 마을 안으로 들어서자 바닥에 쓰러진 시체 몇 구가 눈에 들어왔고, 집도, 나무도, 울타리도 불타고 있었다. 이때 카를의 눈에 급하게 싸우고 있는 세 사람이 보였다. 라일라, 아이유브, 그리고 사이프였다. 열 명 가까이 되는 용병들이 셋을 둘러싼 채 무기를 겨누고 있었고, 라일라와 아이유브는 간간이 마법을 쓰며 그들이 접근하는 걸 막을 뿐이었다. 

 

"라일라!" 

 

 카를은 뒤도 안 돌아보고 그쪽을 향해 돌진했다. 셋을 마구 공격하던 용병들은 갑자기 등장한 유목민들을 보고 놀라 물러서려고 했지만, 그들과 가장 가까이 있던 사람들은 미처 피하지 못하고 말에 부딪혀 넘어지거나, 칼에 맞고 쓰러졌다. 다른 유목민들이 용병들을 마구 몰아내는 동안 카를은 말에서 뛰어내려 라일라의 어깨를 잡으며 살펴보았다. 

 

"라일라! 괜찮아? 다른 사람들은?" 

"괜찮아……. 난 괜찮아. 우리 빼고 다들 안지르 성채로 갔어." 

 

 라일라는 뺨이 조금 긁히고 옷이 찢겨나갔지만, 큰 부상은 없었다. 아이유브는 총에 맞았는지 팔을 붙잡고 있었고, 사이프는 크게 다치지는 않은 것 같았다.

 

"지금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어, 카를. 빨리 싸워야 해." 

 

 카를이 유목민 동료들을 보자, 한 사람이 낙마 당해 칼에 찔리는 게 보였다. 한가하게 얘기할 시간은 없었다. 그는 고리버들 방패를 손으로 꽉 잡고 자신의 칼을 쥐었다. 

 

"분명 성채에서 지원군이 올 거야. 그때까지만 버티면 돼." 

 

 아이유브의 말에 카를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성채로 피하세요. 여긴 제가 맡겠습니다." 

"아니야. 나도 싸울 수 있어. 사이프 아저씨, 오라버니를 부탁할게요." 

 

 사이프는 고개를 끄덕이고 아이유브를 일으켰다. 괜찮겠느냐는 아이유브의 말에, 라일라는 오빠의 뺨에 입을 맞추는 것으로 답했다. 둘이 용병들을 피해 성채로 향하자 둘은 힘겹게 싸우는 유목민들 사이로 뛰어들어갔다. 카를은 칼과 방패를 휘두르며 용병들을 물러서게 했고, 라일라는 불을 뿜어내었다.  

 그때, 용병 하나가 카를을 향해 도끼를 강하게 휘둘렀다. 반사적으로 방패를 높게 들어 공격을 막은 카를이었지만, 고리버틀 방패는 찢겨나가듯 박살 났다. 방패를 한 방에 부순 용병도, 눈앞에서 방패가 박살 나는 것을 본 카를도 당황하여 아주 잠깐 동안 서로 바라보았다. 이윽고 용병이 다시 도끼를 휘두르자, 카를은 재빨리 칼을 들어 튕겨내고 상대의 무릎을 밟았다. 용병이 당황하는 사이 카를은 그의 다리를 강한 베기로 날려버리고 다시 목을 찔러 끝장냈다. 용병이 죽자 카를은 박살 나 덜렁거리는 방패의 조각을 팔에서 떼어내고, 칼을 양손으로 쥐었다. 

 그렇게 용병들 몇을 죽였지만, 여전히 그들은 많았다. 다섯 명의 유목민들은 거의 전멸하고, 카를과 라일라는 무기를 든 용병들에게 포위당했다. 그들은 각자 피스톨이나 칼, 도끼, 망치 따위를 든 채 카를과 라일라를 노려보았다. 둘은 거칠게 숨을 내쉬며 각자의 등을 붙였다.

"그동안 고마웠어, 라일라." 

"……나도." 

 

 평소였다면 절대 그런 말 하지 말라고 했을 라일라였지만, 그녀조차 반쯤 포기했는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용병들은 카를을 한 번 살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카를에게 총을 겨눈 용병 하나가 그에게 천천히 다가오며 외쳤다. 

 

"카를 바리엔토스 폰 오펜슈타인. 우리 고용주가 이렇게 전해달라고 하더군. '세상 끝으로 도망치면 살 수 있다고, 모두가 잊어주리라고 생각했나? 그러게 오펜슈타인에서 네 아비랑 같이 죽었으면 너나 나나 모두 편하고 좋았을 텐데.'라고 말이다."  

 

 카를은 칼끝을 그 용병에게 대어 위협했지만, 그는 콧방귀를 끼며 휠락 피스톨의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었다. 

 

"칼이 아무리 빨라 봐야 총알만은 못하지."

  

 권총을 든 용병은 웃으며 총구를 카를의 미간에 대고 조준했다.  

 

"개인적인 감정은 없어." 


 그때였다. 마을 바깥에서부터 무지막지한 진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카를도, 라일라도, 용병들도 모두 한곳을 바라보았다. 타오르는 불꽃 저 너머로 어른거리는 그림자가 가까워져 왔고, 당황한 용병들이 창끝과 총구를 그쪽으로 향했다. 그 순간, 불꽃 속에서 기수가 하나 튀어나왔다. 그가 탄 말은 불똥이 흐트러진 갈기를 휘날리며, 마치 사자가 포효하듯 울었다. 그 위에 탄 기수는 시위를 끝까지 당기며 라일라 바로 앞의 용병을 겨누었고, 말이 땅에 닿기도 전에 시위를 놓았다. 화살은 그대로 당황한 표정으로 기수를 노리는 용병의 목덜미를 향해 날아갔다. 총을 든 그 용병은 목에 화살을 맞고 뒤로 넘어가며 허공에 방아쇠를 당겼다. 갑작스러운 광경에 둘은 황망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고 주변만 두리번거렸다. 그때 기수가 외쳤다.

 

"누님! 엎드리세요!" 

 

 그 말에 라일라는 카를을 잡아 바닥에 엎드렸고, 동시에 이스마일의 뒤에서 카쉬팀 기병들이 파도처럼 밀려와 당황한 용병들을 쓸어갔다. 총성이 몇 발 울렸으나 아무도 그 총에 맞지 않았다. 순식간에 상황이 역전되고, 말의 울음, 카쉬팀의 외침, 용병의 비명이 마을을 가득 메웠다. 한참이 지나고 조용해졌을 때 라일라가 고개를 들자, 피를 뒤집어쓴 이스마일이 무릎을 꿇은 채 라일라를 보고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누님?" 

"이스마일……." 

 

 이스마일은 라일라를 일으켰다. 그는 무표정하게 여전히 엎드려있는 카를을 발로 툭 건드렸다. 그러자 카를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앞에 경번갑과 치차크 투구를 쓴 카쉬팀 병사들이 두 사람을 보고 있었다.  

 

"저희가 누님을 구하러 왔습니다." 

 

 맘루크, 카쉬팀의 자랑, 최고의 병사들. 카를은 엎드린 그 상태로 넋이 나가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맘루크들이 다가와 카를을 일으켜 세워주었다. 카를이 일어서자마자 다짜고짜 이스마일이 카를의 멱살을 잡았다.

 

"네놈! 너 때문에 우리 마을이 이렇게 됐어. 너 때문에!"

 

 카를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애초에 네놈이 여기로 오지 않았다면 우리 마을이 이렇게 되지도 않았을 거야! 네 고향에서 뒈지지 않고 여기까지 와서 애꿎은 우리 마을 사람들이 죽었다고!"

"그만해, 이스마일!"

"그만 감싸세요, 누님! 다 이 자식 탓입니다. 모두 다! 어떻게 누님은……." 

 

 이스마일은 라일라에게 소리치려고 하다가, 화를 누르며 입을 다물었다. 대신 그는 카를을 주먹으로 쳐서 쓰러트렸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카를은 그냥 맞기만 할 뿐이었다. 사실 당장에라도 이스마일이 칼을 빼들이 카를을 내려치지 않은 게 이상할 정도였다. 하지만 이스마일은 더 이상의 행동 없이 뒤돌아 마을 바깥으로 걸어 나갔다. 그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맘루크들은 둘을 데리고 안지르 성채로 향했다. 

 둘이 성채에 도달했을 때는 새벽녘이었다. 둘이 나타나자 라일라의 가족들이 그들을 맞이했다. 라일라는 어머니를 끌어안고, 카를은 고개를 숙인 채 한숨만 쉬었다. 팔을 붕대로 감싼 아이유브가 중얼거렸다. 


"이게 무슨 변고인지 원." 

"다, 다 제 탓입니다." 

 

 카를이 중얼거렸다. 

 

"놈들은 저를 쫓아왔어요. 제가 여기 있다는 게 들켰으니 앞으로도 위험할지 몰라요." 

"……그 얘기는 들었어. 이스마일이 길길이 날뛰며 널 죽여야 한다고, 그렇게 말하더라고." 

 

 아이유브는 한숨을 쉬었다.  

 

"당장 떠나겠습니다. 더 이상 여기 있을 수 없어요." 

"떠나겠다고?" 

 

 사이프가 다가왔다. 오른팔이 상처투성이가 되어 오른팔 소매가 피투성이가 되었음에도 별 느낌이 없는지 붕대조차 감지 않은 모습이었다.  

 

"하긴, 그렇겠군. 이런 재앙이 생겼으니 자네를 좋게 볼 사람도 없을 테고. 하지만 지금 당장 떠나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일세. 언제 출발할 셈인가?" 

"될 수 있으면 빨리……." 

"그럼 내일 가면 되겠군. 내가 다른 이들에게 말해놓겠네. 오늘은……. 일단 쉬게." 

 

 사 이프는 자기 오른팔을 한 번 보고는 왼손으로 감쌌다. 그제야 병사들이 다가와 그를 데리고 병영으로 데려갔다. 그리고 카를과 라일라는 대상 숙소로 데려갔다. 숙소는 마을 사람들로 미어터질 듯했고, 다들 갑자기 일어난 변고에 슬퍼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적당한 곳에 자리 잡았다.  

 카를은 구석에 주저앉았다. 때때로 머리를 쓸어올리거나 하는 걸 제외하면 전혀 움직임이 없었다. 라일라는 카를의 옆에 앉아 그에게 기대며 눈을 감았다. 한참을 말없이 있던 둘, 먼저 입을 연 건 카를이었다. 


"라일라." 

"……왜?" 

"오늘 일은……." 

 

 카를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한참을 괴로워하듯 머리를 잡았다.  

 

"……정말로 미안해." 

"슬픈 일이야.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라일라는 카를의 어깨에 기댄 채 슬픈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가 아는 사람들이 다치고, 몇 명은 죽어버렸어. 하지만 네 탓이라고 생각하지는 말아줘. 네가 자꾸 네 탓이라고 생각한다면, 나도 널 탓하게 될지도 몰라. 그러니까……." 

 

 카를은 팔을 라일라의 어깨에 둘렀다. 

 

"네 탓이 아니야. 그렇게 생각해." 

 

 카를은 말없이 라일라의 머리를 손으로 쓰다듬었다. 그렇게 밤이 흘렀다. 

 해가 미처 다 뜨기도 전에, 두 사람은 일어나 각자 말을 끌고 출발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일찍 일어난 사이프와 라일라의 가족만이 둘을 배웅하러 나왔고, 다른 사람이라고는 뒤늦게 팔에 부상을 입은 말릭이 나왔을 뿐이었다. 아이샤는 카를의 팔을 붙잡은 채 훌쩍였다. 

 

"왜, 왜 떠나는 거예요. 지금 떠나면, 다시는……못 볼 텐데……." 

"가지 마세요, 오빠! 놈들이 또 쳐들어오면, 다시 막으면 되잖아요!"
 

 카를은 몸을 숙인 채 둘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나도 내 고향이 있어. 그리고 고향으로 가야 해. 여기도 좋은 곳이지만, 그래도……." 

 

 아 이샤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카를의 품에 안겨 펑펑 울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이스마일은 라일라를 포옹한 채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아이유브가 남우세스럽다며 이스마일을 떼어내자 이스마일은 실망한 표정을 지으면서 라일라에게 묻기 시작했다. 

 

"정말 저놈을 따라실 생각인가요?" 

"아직 지키지 못한 약속이 있으니까." 

"저놈은 가는 길마다 재앙을 불러오는 놈입니다. 그래도 가시겠다니……. 몸조심하세요, 누님." 

"너도, 이스마일." 

 

 이스마일은 의례적으로 라일라와 뺨 키스를 하고, 축 늘어진 어깨를 하며 뒤돌았다. 아이유브는 멀쩡한 팔로 라일라를 감싸 안고 뺨에 입을 맞춰주며 행운을 빌어주었다. 그리고 카를에게 다가와서는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으며 말했다. 

 

"라일라를 잘 부탁해. 저 아이는 강인하고 굳세지만, 그래도 내 눈엔 아직 여리고 여린 동생이야."

"명심하겠습니다." 

"저 아이는 너를 굳게 믿고 있어. 그 믿음을 저버리지 말고. 나도 널 믿으니까 말이다."

  

 카를은 고개를 끄덕였고, 아이유브는 씩 웃으며 어깨를 툭툭 치고는 뒤돌았다. 말릭 역시 비슷하게 행운을 빌어주었고, 라일라의 어머니 역시 마찬가지였다. 모두의 인사가 끝나고 출발하려는 데, 사이프가 두 사람을 불렀다. 그는 무표정하게 두 사람을 한 번 보고는, 허리춤에 찬 작은 주머니를 던져주었다. 카를이 주머니를 받아 열자, 디나르화가 가득 담겨있었다. 

 

"이걸 어떻게……." 

"내가 보통 유명한 사람이어야지." 

 

 사이프는 농담하면서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자네가 떠날 때를 대비해서 미리 준비해놨네."

"감사합니다, 사파딘." 

"행운을 빌지." 

 

 떠나기 전 둘은 마지막으로 안지르 성채와 불타버린 이스카르를 돌아보았다.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어쩌면 이것이 마지막으로 보는 모습이 될지도 모른다. 아직도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마을을 멍하니 바라보는 라일라의 얼굴은 어딘지 슬퍼 보였다. 그녀는 눈을 감으며 길게 한숨을 쉬었다.

 

"가자, 카를."

"정말 괜찮겠어?"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표정은 슬퍼 보였으나 새까만 눈동자에는 굳은 결의가 느껴졌다. 둘은 서로 한 번 바라보며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말에 박차를 가하며 서쪽을 향해 달렸다.

 

Posted by 즈베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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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쉬카르 연대기

황제의 탄생(Rise of the Emperor) 1부, 열쇠의 기사(Knight of the Key)

 

09.

 

 라일라의 손에 이끌려 걷는 카를은 넋이 나간 듯 멍하니 허공만 응시하고 있었다. 앞에서 그를 이끄는 라일라는 때때로 고개를 돌려 카를을 보았다. 그의 모습에 라일라는 어떻게든 그를 위로하려고 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만 벙긋하기 일쑤였다. 한참을 걷던 라일라는 마을 안으로 들어서서 어느 집 앞에 멈췄다. 라일라는 뒤돌아 카를에게 말했다.

 

"먼저 집에 들어가 있을래? 아니면 여기서 기다려도 돼." 

 

 카를은 묵묵부답이었다. 라일라는 그의 대답을 원한다는 듯 그의 손을 잡았다. 

 

"카를?"

 

 여전히 대답이 없는 그는 라일라의 말이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그는 라일라를 보지도 않고 그저 땅바닥만 내려다 보고 있었다. 그의 모습에 라일라는 답답한 듯 그를 다그쳤다. 

 

"카를!"

"……왜?"

 

 라일라의 다그침에 카를은 놀란 듯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라일라는 카를의 얼굴을 안쓰러운 표정으로 보다가 말을 꺼냈다.

 

"내가 방금 뭐라고 했는지 기억해?"

"그래. 여기서 기다릴게."

 

 라일라는 여전히 안쓰러운 표정으로 카를을 보았다. 그녀는 무어라 말하려고 하다가 포기하고 뒤돌아 집의 대문 앞으로 걸어갔다. 그때 카를이 말했다.

 

"아까는 미안했어. 그러면 안 됐는데……."

 

 그러자 라일라는 고개를 뒤로 돌리며 싱긋 미소 지었다. 

 

"괜찮아. 신경 안 써." 

  

 그녀가 문을 두드리자 얼마 지나지 않아 집주인이 대문을 열고 나왔다. 그는 라일라와 뒤에 있는 카를을 한 번 훑어보았다. 그는 문을 열고 자기 모습을 드러냈다. 사이프였다. 그는 둘의 등장을 전혀 예상 못 했다는 듯, 조금 당황한 얼굴이었다. 

 

"안녕하세요? 사이프 아저씨."

"이 시간에 무슨 일이냐?"

 

 라일라는 대답 없이 미소만 지었다. 

 

"안으로 들어오너라."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안으로 들어서자, 사이프는 턱짓으로 카를을 가리켰다.

 

"저 녀석은?"

"저기 있을 거예요." 

 

 라일라가 안으로 들어가자 사이프는 카를을 한 번 흘겨보고는 문을 닫았다. 사이프는 빠른 걸음으로 먼저 안으로 들어가서는 라일라를 안내했다. 집 안에는 바닥에 깔린 양탄자와 불이 다 꺼져가는 램프, 그리고 벽 한쪽 구석에 세워진 사이프의 칼과 갑옷이 전부였다. 알 안겔루스 에미르의 친위대장이라는 과거가 무색할 수준이었다. 사이프는 먼지투성이 양탄자를 가리키며 앉으라 하고, 자신은 구석에서 잔을 가져왔다. 

 

"이럴 줄 알았으면 커피라도 좀 챙겨올 걸 그랬구나."

"괜찮아요, 아저씨." 

 

 라일라는 사이프가 건넨 잔을 받았다. 사이프는 그녀가 받아든 잔에 왼손으로 물을 따라주었다. 그의 손을 보던 라일라는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오른손이 불편하신 거죠?"

"역시 넌 눈썰미가 좋구나." 

 

 사이프는 오른손을 들어 올리고 왼손으로 소매를 걷었다. 새까만 팔꿈치 아래에 이어진 커다랗고 끔찍한 상처를 보자마자 라일라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막았다.  

 

"몇 달 전에 전장에서 당했다. 팔이 거의 잘려나갈 뻔 했지. 어떻게 붙어있기는 하지만 말이야."

 

 사이프의 오른팔은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이젠 손을 마음대로 쓸 수도 없구나." 

"그래서 돌아오신 건가요?"

 

 사이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에미르께서는 팔 하나 정도 못 써도 지휘는 할 수 있지 않으냐고 하셨지만, 그냥 돌아오기를 청했다. 거긴 암투가 활발한 곳이야. 나처럼 팔 못 쓰는 사람이 친위대장으로 남아있으면 에미르님에게도, 나에게도 위험하니까." 

 

 그는 씁쓸하게 웃으며 자기 몫의 잔에 물을 따랐다. 그는 담담하게 말하고 있었지만, 아쉬움을 숨기지는 못하고 있었다. 라일라는 잔에 담긴 물을 바라보며 물었다. 

 

"후회하시나요?" 

"아니다. 그보다 내 팔을 걱정하러 이 시간에 온 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카를 때문이냐?" 

 

 라일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사이프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라일라. 아그라다에서 널 봤을 때 너는 다른 카쉬팀들과 다르지 않았어. 카쉬팀을 공격하는 인간을 증오하고, 그들을 물리쳐서 동족을 구하겠다고, 너는 그렇게 맹세하지 않았더냐? 지금 너는 그때의 너와는 완전히 달라. 왜 그렇게 그놈에게 목을 매느냐?"

 

 사이프의 말에 라일라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놈과 같이 있을 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게냐?" 

"……카를 때문이 아니라 펠리페 님 때문이에요." 

 

 그녀가 울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펠리페 님께 노예로 팔려 있는 상태였어요. 하지만 펠리페 님께서 저를 데려오지 않으셨다면, 전 지금쯤 어느 쓰레기 같은 인간 놈들한테 모욕당하고 있었을 거예요. 그것만으로도 고마운 일이지만, 펠리페 님께서는 카쉬팀인 저를 배려해주셨고, 또 목숨을 걸어 저를 믿고, 구해주셨어요……." 

 

 라일라는 사이프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눈엔 진심 어린 간절함이 드러났다. 

 

"돌아가신 펠리페 님을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건 카를을 도와주는 것 뿐이에요. 그런데 전 그렇게 할 수가 없어요. 카를을 돕고 싶지만 전 그럴 능력이 없어요……."

 

 말을 끝내자마자 라일라는 작고 애처로운 목소리로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녀의 처량한 울음에 사이프는 말없이 그녀를 토닥이며 위로했지만, 그녀의 눈물은 멈출 줄을 몰랐다. 한참을 우는 라일라를 보며 생각에 잠긴 사이프는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예전에, 펠리페와 독대한 적이 있었지. 10년 전쯤이었을 거다. 그동안 여러 번 전투를 벌이면서도 상대의 얼굴을 확인하는 것은 처음이었지. 그는 화려한 갑옷을 입고 있었는데, 그다지 어울리지 않았어. 오랜 전쟁 때문에 얼굴엔 피곤함이 가득했지. 하지만 눈빛과 혈기만은 살아있었다. 그와 대화한 건 그때뿐이었지만,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사이프는 라일라의 어깨를 드렸다.

 

"그의 아들이라고 해서 너무 높은 기대를 했던 내가 잘못인 것 같구나. 라일라, 이제부터는 내가 그놈을 가르치겠다. 옛 적에 대한 예우로서 말이야. 이제 집에 가라. 가족들이 걱정할 거다."

"아저씨……. 정말로, 정말로 감사합니다……." 

 

 그때였다. 문 바깥에서 말싸움 소리와 함께 소란이 일었다. 사이프는 라일라에게 나오지 말라고 하고는 구석에 놓인 칼을 챙기며 바깥으로 나섰다.

 

--- 

 

 바깥에 있던 카를은 벽에 기대어 앉아 멍하니 하늘만 보았다. 수많은 별이 모여 은하수를 이룬 모습은 장관이었다. 하지만 그 모습을 보면서도 카를은 별생각이 없었다. 모든 게 그저 아득하게만 보일 뿐이었다. 그렇게 앉아있던 그의 앞에 누군가가 다가왔다. 카를이 고개를 숙여 앞을 보자 거기엔 친숙한 모습이, 이스마일이 보였다. 그는 팔짱을 낀 채 카를을 한심하다는 듯 내려다보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문밖으로 쫓겨난 개처럼 처량하게 앉아서 울던 쓰레기가 남의 집 문 앞에서 뭐하고 계시나? 구걸?"

 

 그는 시비를 걸며 카를에게 다가왔다. 카를은 대답 대신 고개를 숙였다. 이스마일은 허리춤에서 칼을 뽑더니, 카를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네가 네 고향에 있었을 때는 우리 누님을 노예로 마구 부려 먹었을 지는 몰라도, 여기서는 그렇게 하면 안 되지. 감히 누님께 소리를 지르고, 사이프 아저씨를 배반자로 몰아 누님을 화나게 하다니."

 

 이스마일의 목소리엔 점점 살기가 올랐다. 고개를 숙인 채 이스마일을 무시하던 카를도 칼을 들고 다가오는 이스마일의 말을 듣자 더 이상 무시하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는 어느새 바로 앞까지 다가와서 카를의 어깨에 칼을 들이밀고 있었다. 이스마일은 증오와 살기로 가득한 낯빛으로 카를을 내려다보았다. 

 

"네놈은 누님께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됐어."

 

 그는 칼을 높이 들었다. 자신을 내려치려는 이스마일의 모습이 아득했다. 카를은 그러나 트라니스에서 자신을 죽이려는 암살자와 마주쳤을 때처럼 떨지 않았다. 카를은 반사적으로 몸을 이스마일을 향해 날렸다. 이스마일은 카를을 내려치기 전에 카를의 일격에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카를은 이스마일의 얼굴을 마구 내려친 뒤, 재빠르게 그의 칼을 빼앗았다. 이스마일은 재빨리 발로 카를을 밀어내고는 단검을 뽑아 카를을 향해 마구 휘둘렀다. 카를은 떨리는 손으로 단검을 막았지만, 칼날이 부딪히는 순간 이스마일이 칼날을 잡고 당기자 무기력하게 칼을 빼앗겼다. 이스마일은 단검을 내던지고 자신의 검을 똑바로 쥐었다.  

 

"네가 찬 칼은 장난감이냐?"

 

 이스마일은 카를을 도발하며 공격을 계속했다. 카를은 칼날을 피하며 틈을 보았지만, 이스마일의 공격은 마구잡이로 보임에도 틈을 찾을 수가 없었다. 틈은 오히려 카를이 보였고, 이스마일은 카를의 목을 향해 재빨리 칼을 크게 휘둘렀다. 급하게 고개를 뒤로 뺀 카를은 그러나 칼날을 피하지 못하고 칼날 끝에 목을 베였다. 카를은 목을 부여잡고 뒤로 물러섰다. 카를의 손을 타고 흐르는 피를 보자 이스마일은 씩 미소를 지었다.

 

"네 인생도 여기서 끝이야." 

 

 이스마일은 칼을 높게 들었다. 그때 뒤에서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내려치는 이스마일의 칼날을 누군가가 재빨리 다른 칼로 받아냈다. 자신의 눈앞에서 벌어진 모습에 카를은 기겁하며 주저앉았다. 이스마일을 막은 사람은 사이프였다. 그는 칼이 부딪친 순간에서 멈추지 않고 재빨리 거리를 좁힌 뒤 이스마일에게 박치기했다. 이스마일이 얼굴을 잡으며 뒤로 물러섰으나 사이프는 멈추지 않고, 칼을 거꾸로 쥔 다음 손잡이 부분으로 이스마일의 머리를 내려쳤다. 이스마일은 그대로 바닥에 얼굴을 박은 채 쓰러졌다.  

 

"계속 할 셈이냐?"


 머리에서 피가 흐르는 이스마일은 이를 갈며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그러지 못하고 다시 쓰러졌다. 그때 아이유브와 여동생들이 나타났다. 아이유브는 피를 흘리는 이스마일과 카를을 보고는 놀라며 다가왔다.

 

"대체 무슨 일입니까, 사이프 아저씨!" 

"보면 알잖느냐. 이스마일을 집으로 데려가라. 저놈은 별로 안 다쳤어." 

 

 사이프는 뒤돌며 칼을 집어넣었다. 아이유브는 이스마일을 살펴보며 아이샤와 아르와에겐 카를을 살펴보라고 말했다. 이스마일은 얼굴을 찡그리며 아이유브의 부축을 받아 일어섰다. 아이유브는 무슨 일이 있었냐며 계속 물었으나 이스마일은 대답하지 못했다. 아이샤와 아르와는 목에서 피를 흘리는 카를에게 다가왔다. 아이샤는 머리 천을 풀고 카를의 목에 대었다. 아르와는 계속 괜찮냐고 물으며 카를이 정신을 잃지 않도록 말을 시켰다. 이때 라일라가 바깥으로 나왔다. 그녀는 목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카를을 보고 놀라 소리쳤다.

 

"카를!" 

 

 그녀는 카를에게 다가와 무릎을 꿇고 카를의 상처를 보았다. 그녀의 손이 얼굴에 닿자 카를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틀었다. 

 

"가만히 있어봐, 카를. 아이샤, 아르와. 집에 약초가 있을 테니까 그것 좀 가져와 줄래?"

 

 소녀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집으로 달려갔다. 카를은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자신을 보살피는 라일라의 손을 잡았다. 

 

"내가, 내가 소리를 지르지 말아야 했어. 네게 상처 입혀서 미안해."

"무슨 소리야? 카를.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니까?"

"아니야. 꼭 사과해야 해. 너한테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됐어. 나 따위가 너한테……."

"나 따위 같은 소리야말로 하면 안 되는 거야. 가만히 있으라니까? 피가 더 난다고."


 라일라가 계속 지혈하는 동안 사이프가 한쪽 무릎을 꿇어 몸을 숙이고 카를을 보았다.  

 

"개입하기 전에 잠깐 싸우는 걸 봤더니 전혀 칼을 뽑지 않더군." 

 

 카를은 대답 대신 사이프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는 사이프의 바로 개입하지 않았다는 말이 거슬리는지 얼굴을 찌푸렸다. 

 

"자네, 나랑 싸울 때는 칼을 뽑았잖나. 하지만 정작 목숨이 위험할 때는 칼을 뽑을 생각도 못 하다니. 그 좋은 칼을 가지고 말이야."  

 

 사이프의 물음에도 카를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때 뒤늦게 아이샤와 아르와 자매가 각자 약초가 가득 든 바구니를 들고 부리나케 달려왔다. 라일라는 약초를 입에 넣고 씹으며 목에 묶은 아이샤의 머리 천을 풀었다. 피는 멎었으나 여전히 상처가 벌어져 있었다. 그녀는 입에 넣은 약초를 손으로 조금씩 떼서 카를의 상처에 정성껏 발랐다. 카를은 라일라의 손이 상처에 닿을 때마다 고통스러운 듯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소리를 내었다. 약초를 다 바르자 라일라는 다시 머리천으로 카를의 목을 살짝 묶었다. 그러자 아이샤가 카를의 팔을 붙잡고 울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빠 괜찮아?" 

 

 카를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여기서 죽으면 안 돼, 카를 오빠!" 

 

 아르와의 말에 카를은 슬쩍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여기 있지 말고 안으로 들어가자. 다들 도와줘."

 

 라일라와 사이프는 카를의 어깨를, 두 자매는 카를의 다리를 하나씩 잡고 조심스럽게 움직이며 사이프의 집 안으로 들어갔다. 넷은 카를을 바닥에 눕히자 그제야 손을 뗐다.  

 

"너희 둘은 이제 돌아가렴. 어머니께서 걱정하실 거야." 

"하지만 카를 오빠가……." 

"여긴 나랑 사이프 아저씨한테 맡겨." 

 

 아이샤는 반신반의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둘이 바깥으로 나가자 사이프가 물었다.

 

"여기 있을 생각이냐?"

"네."

"알았다.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부르거라." 

 

 사이프는 허리에 찼던 칼을 빼서 다시 구석에 놓았다. 그가 구석에 누워 잠을 청하는 것을 본 라일라는 고개를 눈을 감은 채 신음을 흘리는 카를에게로 돌렸다. 카를은 허공을 손으로 휘젓더니 가슴 위로 손을 올렸다. 그의 손에 오펜슈타인의 열쇠가 닿자 그는 부수려는 것처럼 꽉 쥐었다. 카를을 보던 라일라는 그의 이마에 손을 대었다. 그러자 카를의 고통스러운 신음이 차츰 잦아들었다. 열쇠를 쥐던 손 역시 스르륵 힘을 풀었다. 그가 잠잠해지자 라일라도 잘 준비를 하고 그의 옆에 누웠다. 그녀는 순식간에 잠들었다. 

 쥐구멍만 한 작은 창문에서 나오는 빛에 카를은 왼팔로 얼굴을 가리며 잠에서 깼다. 잠시 그 상태 그대로 누워있던 그는 문 바깥에서 들리는 소리에 팔을 떼고 시선을 문 쪽으로 향했다. 활짝 열린 문 바깥에서 라일라와 사이프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 순간 라일라가 카를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치자 라일라가 눈웃음을 지었다. 

 

"일어났어? 목은 어때?" 

 

 카를은 대답 대신 목에 손을 가져갔다. 목은 여전히 상처로 따끔거렸다. 라일라가 다시 집 안으로 들어와 그의 앞에 앉았다.

 

"오늘은 금요일이야. 모스크에 가는 날인데, 너도 같이 갈래?"

 

 카를이 대답하지 못하고 뜸들이자 라일라는 미소를 지었다. 

 

"이스마일이라면 걱정 안 해도 돼. 걔는 아침 일찍 안지르 성채로 갔어."

"그래도 난 인간인 데다가 국교회 신자인데……." 

"괜찮아. 아무도 신경 안 쓸 거야. 내가 옆에 있으면 누구도 뭐라고 못 해." 

  

 그녀의 말에 카를은 못 이기는 척 그녀의 손을 잡았다. 바깥으로 나온 카를은 사이프에게 적당히 인사했다. 무표정한 사이프는 답도 안 하고 그냥 뒤돌아 먼저 모스크로 향했다. 사이프의 반응에 카를은 멋쩍게 머리를 긁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라일라는 카를을 재촉하며 모스크를 향해 빠르게 걸었다. 마을 중앙으로 나서나 이미 많은 마을 사람들이 모여 있었고, 그 중엔 라일라의 가족도 있었다. 먼저 와 있던 아이유브가 카를을 발견하자 그에게 다가왔다.

 

"목은 괜찮나?" 

"아, 예. 괜찮은 것 같습니다."

 

 여전히 목이 따끔거렸지만, 카를은 적당히 대답했다. 

 

"어제 일은 대신 사과하겠네. 정말 미안해. 나도 이스마일이 그렇게까지 나올 줄은 몰랐어. 아무리 내 동생이라지만……."

"아, 아닙니다. 어쨌든 살았으니 됐죠. 하하……."

 

 아이유브는 계속 고개를 숙이며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카를은 그러나 그의 사과가 부담스럽기만 했다. 게다가 정작 사과를 해야 할 사람은 이미 떠나버린 지 오래였기에 그의 사과에 별 의미를 못 느끼지도 못했다. 카를의 속내를 알아챈 라일라는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어서 화제를 돌렸다. 

 그렇게 대화하다 보니 어느새 모스크에 도착해 있었다. 작은 마을에 알맞은 조그만 모스크는 트라니스에 있던 거대한 모스크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초라해 보였다. 트라니스의 모스크는 지붕이 황금으로 덮여있었으며 첨탑도 여러 개 세워져 있었고, 대문에는 수려한 문양이 양각으로 새겨져 있었다. 하지만 이곳은 지붕도 흙색이고, 첨탑은 당연히 없고, 나무로 된 문짝은 썩어서 조금만 힘을 주면 부서질 것 같았다.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모스크 안으로 들어섰다. 모두 안으로 들어서고 나서도 카를은 홀로 바깥에서 서성였다. 그의 부재에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라일라가 바깥에 나가 그를 불렀다. 

 

"안 들어오고 뭐 해?"

"……."

 

 카를은 대답도 안 하고 라일라의 얼굴만 슬쩍 보고는 등을 돌렸다. 라일라는 그에게 다가갔다.  

 

"들어와도 괜찮다니까."

"아니야. 그냥……. 그냥 여기서 기다릴게. 너도 오펜슈타인에선 예배당에 들어가지 못했잖아."

"여긴 오펜슈타인이 아니야." 

 

 라일라는 카를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손이 닿자 카를은 깜짝 놀라 라일라를 돌아보았다. 어두운 카를의 표정과는 정반대로,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싱긋 웃어 보이는 라일라를 보자 카를은 얼굴을 붉혔다. 카를이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트라니스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의 손을 끌어 모스크 안으로 들어갔다. 

 둘이 안에 들어가자, 융단이 깔린 바닥에는 새하얀 옷을 입은 카쉬팀들로 북적였다. 마을 사람들 중엔 대체로 하얀 피부의 사람들이 많았지만, 우르나스도 여럿 있었다. 주름투성이의 늙은이부터 새파란 어린애까지 나이도 다양했다. 그들은 거의 동시에 뒤늦게 도착한 두 사람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부담스러운 그들의 시선에 카를은 당장에라도 도망치고 싶었지만, 자신을 꽉 붙잡은 라일라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했다. 둘이 가족의 옆에 가서 자리에 앉자 사람들은 두 사람에 대한 관심을 잃고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예배를 알리는 말과 함께, 맨 앞에 앉은 이맘이 경전 구절을 읊으며 미흐라브─'마흐디' 자카리야가 인간들로부터 탈환했다는, 칼리프가 사는 키르타트를 향해 낸 벽에 대고 절하자 모두 그를 따라 했다. 이방인인 카를에게 그 모습은 너무나도 낯설었다. 눈앞에서 보고 있음에도 먼 나라 이야기를 듣는 기분이었다. 신에게 기도를 드린다는 점에선 고향과 다를 바 없었지만. 

 그렇게 한참을 보고 있자니 카를은 다리가 저렸다. 그가 저림을 못 이기고 일어서려는 순간 예배가 끝났다. 그러자 사람들은 자리에 앉은 채로 각자 이야기를 나누었고, 아이들은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 바깥으로 뛰어 나갔다. 카를이 일어서자 사이프가 마찬가지로 일어서서 그에게 말했다. 

 

"따라와라."

 

 사이프는 먼저 바깥으로 나갔다. 카를이 라일라를 보자 라일라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이프가 도와줄 것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카를이 바깥으로 나오자 그를 기다리던 사이프는 그에게 손짓하며 자신의 집으로 갔다. 집에 도착하자 그는 카를에게 그의 검을 꺼내오라고 시켰다. 카를이 칼을 허리에 차며 바깥으로 나오자 사이프는 다시 말없이 걷기 시작했다.

 사이프는 마을 바깥을 향해 계속 걸었다. 구불구불한 절벽 길을 지나고, 완만히 경사진 입구도 지났다. 그때 사이프가 멈췄다. 카를이 옆에 서서 그의 시선을 따라가자 커다란 모래폭풍을 일으키고 있는 여러 기수들이 보였다. 빙글빙글 돌던 그들은 전속력으로 달리는 것을 멈추고 사이프에게 다가왔다.


"아, 사이프 아저씨.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기수 하나가 얼굴을 가리는 케피예를 손으로 내리며 사이프에게 인사했다. 그는 카를을 슬쩍 돌아보고는 다시 물었다.


"이 인간이 그 사람입니까? 카, 카, 어쩌고 하는."

"카를."

"아, 그렇죠. 카를."


 카를은 이들이 대체 누구냐고 물으며 사이프를 돌아보았다.


"라일라가 태어나기도 전에, 그 아비인 파키르와 난 이 사람들, 유목민들과 함께 훈련했었지. 그것도 벌써 언제인지, 까마득해서 기억도 가물가물하다. 내가 라일라가 태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것만은 기억하니, 적어도 260년은 넘었겠지. 이들과 같이 말을 타고, 활을 쏘고, 칼과 창을 휘두르고……. 팔을 못 쓰는 이젠 아무것도 못 하지만."


 눈을 감은 채 회상에 잠겼던 사이프는 다시 눈을 뜨고 카를을 돌아보았다.


"하나만 묻겠네. 자네가 하고 싶은 것은 뭔가?"

"갑자기 무슨 소리죠?"

"대답하게. 원하는 것이 없다면 여기까지 살아서 오지도 않았을 걸세. 뭐, 최소한 난 그랬겠지. 여기까지 살아서 온 이유는 무엇이지?"

"그건……."


 그 말을 듣자 카를은 잠깐 고개를 살짝 숙이고 생각했다. 무엇 때문에 자신이 라일라의 말에 따라서 여기까지 왔는지에 대한 생각, 그는 지금까지 잊고 있었다. 긴 사막을 지나는 동안, 라일라의 가족에게 죽을 뻔 하는 동안, 잠깐 잊고 있었던 그 생각, 그 이유, 그 목적. 그것이 카를의 머릿속에 다시 떠오르자 그는 주먹을 꽉 쥐었다. 얼마나 강하게 쥐는지 온몸이 파르르 떨리는 게 눈으로 보일 정도였다. 고개 숙인 그의 표정은 분노로 점점 일그러져갔다.


"……복수."


 카를은 마음을 추스르며 다시 고개를 들었다.


"복수를 원합니다. 제 아버지를 죽인 놈들을 찾아서 모조리 죽여버리고 싶습니다."


 그의 말에 사이프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좋은 이유로군."


 그는 카를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나와 이 사람들은 원수에게 복수할 수 있도록 네게 칼을 쥐여주겠지만, 그 칼을 휘두르는 것은 네게 달려있어."


 그리고 다시 팔을 내려놓았다.


"네 피난처는 여기가 마지막이다. 카를 폰 오펜슈타인. 너는 더 이상 도망칠 수 없다. 너는 더 이상 두려워할 수 없다. 무슨 말인지 이해했나?"


 카를은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사이프도 고개를 끄덕이고 유목민들을 향해 턱짓했다. 그러자 기수 하나가 주인 없는 말을 하나 끌고 카를에게 다가왔다. 카를은 말 위에 올라타고는 사이프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건넸다. 사이프는 답하지 않고 마을로 돌아갔다. 그러자 옆에서 사이프와 대화했던 기수가 그를 툭툭 치며 말을 걸었다.


"쉽지 않을걸. 너 같이 말라빠진 인간이 우리를 따라잡을 수 있으려나."


 기수들은 카를을 비웃으며 먼저 말을 몰아 사막을 향해 내달렸다. 카를 역시 지지 않겠다는 듯 악을 쓰며 말을 몰아 그들을 따라갔다. 그들은 아직도 해가 떠오르는 동쪽을 향해 계속, 끝을 모를 정도로 멀리 내달렸다.

 그렇게 많은 시간이 지났다. 그리고 카를은 어른이 되었다.



Posted by 즈베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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